2024년 7월 3일 수요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24-29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까만색 머리칼의 예수님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은 확실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은 3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삼차원으로 이해하고 생각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내가 본 것도 믿지 못하고, 내가 가진 것도 확실하게 믿을 수 없을 때가 참 많습니다. 내가 가진 몸도 만져보고, 느낄 수 있음에도 내 안에 암 덩어리가 크고 있는지, 뇌세포가 죽고 있는지, 살고 있는지, 내 안에 혈관이 굳었는지, 심장에 경련이 생기는지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나도 암 덩어리가 5년이나 크고 있었는데 병원에서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의사도 사진을 찍어보고, 여러 가지 증세를 종합해서 무슨 병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믿고 믿지 않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였나 봅니다.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이 “누가 예수님을 흠처 갔다.”는 말을 듣자 토마스는 예수님의 시신을 흠처 갈만한 사람들을 찾아서 되찾아 오려고 몇 날 며칠을 돌아다녔지만 찾지 못하자 그만 짜증도 나고, 속도 상해서 골방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을 때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았다는 말을 듣고 성질이 잔뜩 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손가락을 상처에 넣어보고 만져보아야 믿겠다고 큰소리로 야단을 쳤을 것입니다. 이것은 나도 영화를 보고 그렇게 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영화제작자들이나 시나리오 작가들이 너무나도 그 당시를 사실처럼 묘사해서 그렇게 착각을 일으켰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 자신도 토마스처럼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라고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토마스뿐만 아니라, 뒤에서 의심하는 제자들도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유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의심을 버리라는 오늘 말씀은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의심하고 있나요? 의심하지 않고 있나요? 예전에 천주교 신자들에게 부활에 대하여 얼마나 믿고 있는지 설문조사를 하고 질문하였더니 상상 밖으로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질 수 없습니다. 특히 구약에서는 하느님을 보는 사람은 모두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장 최근에 하느님을 직접 보고, 만진 것은 2000여 년 전에 예수님을 뵙고 만지고, 느낀 것이 가장 최근의 사건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것을 강조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어느 유치원에서 예수님 그리기 대회가 있었습니다. 모두 파란 눈에 금발의 예수님을 그리고 있었는데 어느 아이는 까만 눈에 까만 머리로 예수님을 그리고, 어느 아이는 하늘나라에 갈 때 면도기를 가지고 가서 면도해드려야 한다고 말끔한 예수님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 나셨으니 분명 아시아 사람입니다. 까만 머리와 까만 수염, 까만 눈동자나 갈색 눈동자를 가지고 계시고, 우리와 피부 색깔도 아주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서양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꾸만 그렇게 그려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예수님은 바로 나와 똑 닮은 분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으십니까? 훨씬 상상만으로도 예수님이 친근하게 느껴지시지 않으십니까?
신앙생활에서도 의심스러운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면 멀쩡한 예수님도 괴이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의심생암귀'(疑心生暗鬼)라는 말이 그 말입니다. 의심하는 마음이 있으면 있지도 않은 귀신이 나오듯이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곧 마음속에 의심이 생기면 갖가지 무서운 망상이 잇따라 일어나 사람은 불안해집니다. 그리고 선입관은 판단을 빗나가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편견과 선입관으로 판단의 정확성을 잃는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도, 예수님의 기적도, 그리고 성체성사의 신비도 의심쩍게 생각하고 바라볼 수 있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는데 무엇이 행복한 것인가요? 그 분이 우리와 같이 계시다는 사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눈으로 보이는 것은 항상 변하고, 썩고, 없어지고, 닳고, 많이 보면 질리고, 미워지고, 변덕이 죽 끓듯 끓어서 날로 변하는 데 그럴 염려 없는 주님을 이성으로 만나고, 가슴으로 느끼고 언제나 촉촉한 입술이나 맑은 눈동자로 주님을 느끼며 함께 계시는 주님을 믿는데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2,19-22
형제 여러분,
19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축일7월 3일 성 토마스 (Thomas)
신분 : 사도, 순교자
활동 연도 : +72년경
같은 이름 : 도마, 토머스
사도 성 토마스는 아마도 갈릴래아 출신인 듯하며 ‘쌍둥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토마스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쌍둥이’라는 뜻을 가진 ‘토암’이나 ‘타우마’의 변형으로, 그리스어로는 같은 뜻을 가진 ‘디디무스’(Didymus)라고 부른다. 그래서 그리스어 문화권에서는 성 토마스를 디디무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일부 위경 문헌에서 그의 실제 쌍둥이 형제에 대해 언급하기도 하지만, 단지 ‘쌍둥이’란 뜻을 지닌 ‘토마스’란 이름의 사도라고 볼 수 있다. 성 토마스는 열두 사도 중의 한 명이지만 언제 그리고 어디서 사도로 뽑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공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열두 사도의 명단을 언급할 때 등장하고 있다(마태 10,3; 마르 3,18; 루카 6,15; 사도 1,13).
요한 복음은 성 토마스가 중요한 역할을 한 네 번의 사건을 기록하여 비교적 그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11,1-16; 14,1-6; 20,24-29; 21,1-14). 이 중 세 군데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라고 그를 지칭하고 있다. 첫 번째로 그는 베타니아에 사는 성녀 마르타(Martha)와 마리아(Maria)의 오빠인 성 라자루스(Lazarus, 7월 29일)가 죽음에서 부활할 때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그리고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하고 말하였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가는 길에 대해 말씀하실 때,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여쭈어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는 말씀을 들었다.
세 번째는 가장 잘 알려진 사건으로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다고 했을 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 성 토마스가 제자들과 함께 모여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나타나시어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는 말씀을 들었다. 그러자 성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며 장엄하게 신앙을 고백했고,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셨다. 성 토마스의 신앙 고백은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명백하게 고백하는 유일한 예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을 때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도 시몬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제자와 함께 그 현장에 있었다.
이후 성 토마스의 행적은 성경에는 나오지 않고 전승을 통해서만 전해지고 있다. 교회사가 에우세비우스(Eusebius)와 다른 이들에 의해 전해진 초기 전승에 따르면, 성 토마스는 나중에 파르티아(Parthia, 고대 이란의 왕국)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또 다른 옛 전승에 따르면, 그는 인도로 가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순교했다고 한다. 이 전승은 성 토마스가 예루살렘 사도 회의의 결정으로 인도로 갔고, 그곳에서 목수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는 인도-파르티안 왕국을 세운 곤도파레스 1세(Gondophares I) 왕이 준 왕궁 건축 기금을 모두 불쌍한 이들에게 나눠준 뒤 하늘나라에 왕궁이 세워져 있다고 선포하여 감옥에 갇혔다. 기적적으로 풀려난 그는 인도 남서 해안지역인 말라바르(Malabar)로 가서 7개의 교회를 세우고 선교 활동을 본격화해 많은 인도인에게 세례를 주고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그러다가 72년경 마드라스(Madras) 교외 밀라포르(Mylapore) 근처에서 힌두교 사제들에 의해 창에 찔려 순교했다고 한다.
첸나이(Chennai, 옛 마드라스)에는 그가 순교하고 묻힌 무덤 위에 있었던 성당 위에 19세기 말 포르투갈 교회가 재건한 성 토마스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성당은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Basilica of St. Peter)과 에스파냐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주교좌성당(Santiago de Compostela Cathedral)과 함께 사도들의 무덤 위에 건립된 세 개의 성당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오늘날 케랄라(Kerala)주에서 말라바르 전례를 사용하는 시리아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성 토마스 사도에게 복음을 전해 받았다며 스스로 ‘토마스 사도의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고 있다. 성 토마스 사도의 유해는 394년에 에데사(Edessa, 오늘날 터키의 우르파 Urfa)로 옮겨졌다가 이탈리아 중부 아브루치(Abruzzi)에 있는 오르토나(Ortona)에 안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 토마스 사도의 순교일은 12월 21일로 알려졌으나, 그의 유해가 옮겨진 후 6세기부터 현재까지 가톨릭교회와 시리아 교회에서는 7월 3일을 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그리스 정교회는 10월 6일에 축일을 지낸다. 1972년에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는 성 토마스 사도의 순교 1900주년을 맞아 그를 ‘인도 교회의 사도이자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상처를 만지는 모습으로, 그리고 건축가와 목수의 수호성인으로서 목수들이 사용하는 직각자를 들고 있거나, 순교할 때 사용된 긴 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오늘 축일을 맞은 토마스 (Thomas)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