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 |
ⓒ 정은임추모사업회, http://www.worldost.com |
대한민국이란 사회, 그 암울했던 회색빛 하늘의 마지막 끝에 정은임이 걸쳐 있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그나마 신뢰를 보내는 얼마 되지 않는 영화평론가 정성일과 나누던 영화 이야기가 세상에 지친 애청자들에게 한순간의 휴식과 새로운 눈을 뜨게 해줬다고 하는군요.
아주 먼 훗날, 전 '정은임추모사업회(http://www.worldost.com)'에서 그 방송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정은임은 리버 피닉스를 특히나 좋아했다죠? 리버 피닉스를 통해 정은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은임을 통해 리버 피닉스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가 죽은지만 3년이 지난 후에야 듣게 된 '리버 피닉스 특집', 왜 그런 걸까요? 그 멘트는 분명, 리버 피닉스를 이야기한 것일 테지만, 왜 정은임이 떠오르는 것일까요?
정은임의 이야기대로, '더이상 실수나 과오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고, '배신과 변절'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은임의 이야기대로, '너무 변하는 이 세상에서 결코 변하지 않을 사람이기에 그리워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훗날 '이야기'로 느낀 정은임은 살아 숨 쉬는 그 순간에도 '변하지 않았고', '배신과 변절'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생각해봅니다. 정은임은 '어느 별'에서 와서 애청자들에게 아련한 추억과 아픔만 남기고 갔던 것일까? 그리고 그게 왜 아픔일까?
앞서 이야기한 대로, 정은임은 살아 숨 쉬던 그때에도 변하지 않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변하지 않았기에, 용기를 잃지 않고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군사독재정권 치하에서 울려 퍼진 '인터내셔널'
'인터내셔널'? 시쳇말로 그건 '빨갱이 노래'입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빨갱이 노래'가 아닙니다. 1980년대의 열정이 스멀스멀 기어들어가던 1990년대 초, 그 시절에 울려 퍼졌던 '인터내셔널'은 도대체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대한민국 역사에 '사상 최고의 시민혁명'으로 남을 수 있었던 1987년이 좌절된 상실감이 여전했던 그 시절에 들었을 '인터내셔널'은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그 느낌은 정은임이 전해줬다고 합니다. '영화음악'이라는 이름으로 들려줬다는 그 인터내셔널, 지금의 20대야 잘 모르겠죠. 고백하자면 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어렴풋이 느껴집니다. 상실했다고 여겨졌던 소중한 가치가, 칠흑 같은 새벽녘에 조용히 울러 퍼졌을 때 느껴지는 그 벅차오르는 감동.
소리 나지 않았을 그 감동은 알게 모르게 전국으로 퍼졌을 겁니다. 뜨거웠던 열정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을 이도 있었을 겁니다.
그 누군가들이 진짜 '임'을 생각하며, 정은임과 함께 조용히 마음속으로 되뇌었을 '임을 위한 행진곡', 그 모든 금지된 것들이 고운 목소리에 야무진 의지를 동시에 갖췄던 당찬 정은임과 함께 살아났던 것입니다.
먼 훗날, 2003년 10월 26일에 정은임은 말했습니다.
<2003년 10월 22일 FM영화음악 고 정은임 아나운서 멘트 중>
"새벽 세 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00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봅니다. 올가을에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정은임을 추억하는 이들이 가장 아끼던 것은 아마도 그런 정은임의 고운 마음씨였을 겁니다. 각박한 세상, 서로 먹고 살기 힘든 세상.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아픔과 외로움을 함께 나누려는 사람이 줄어가는 세상.
그런 세상 속에서 정은임은 변하지 않고 그 고운 마음씨를 전해왔습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는다"는 고요히 울려 퍼지는 그 당찬 신념과 함께 말이죠. 우리네 정서는 그래요. 그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우리의 정서란 거죠.
우리 시대의 '마지막 아나운서' 정은임
그동안 쓴 글에 '마지막'이란 말 많이 쓴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여운이 많이 느껴진 적이 없네요. 한 번도 지켜보지 못했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먼 훗날, '기억'으로만 전해들었던 사람일 뿐인데 말이죠.
감히 말합니다. 정은임은 우리 시대의 마지막 아나운서였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미니홈피에 남긴 '당찬 의지'들이 그것을 증명해줍니다. 누가 정은임을 따를 수 있을까요?
연예인으로 변신하는 아나운서는 많습니다. 하지만 정은임처럼 힘에 굴복하지 않고, 압력에 굴하지 않았던, 우리가 진정 그리워하는 가치를 전할 수 있는 이, 과연 누구일까요?
결국 정은임은 우리가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는 가치의 마지막 화신이었던 겁니다. 방송이라는 민감한 영역에서 용기를 실천할 수 있었던 마지막 꿈이었습니다. 실천이 아쉬운 시대입니다. 그리고 그 아쉬움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진해질겁니다.
앞으로도 정은임은 신화이자 추억으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정은임이 좋아했던 노래, '레니 크라비츠(Lenny Kravitz)'의 < It Aint Over Till Its Over >의 가사 일부분이었다죠. 정은임은 하늘에 있지만, 사람들의 가슴 속에 그 가치가 남아있는 한, 정은임은 사라지지 않을 듯합니다.
-추신-
하늘에서도 외로운 이들에게 그 고운 목소리, 그 당찬 의지를 전해주고 계신가요?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늘 잊지 않고 가슴에 담아두면서 살아갈 생각입니다. 감사드립니다.
- 3년 후, 뒤늦게 당신의 존재를 알고 아쉬워했던 어느 20대 영화키드가 -
2010. 01. 07. 금요일
데니크레인
<2003년 10월 22일 FM영화음악 고 정은임 아나운서 멘트 중>
새벽 세 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백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올가을에는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 겠다구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 FM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대기업 노조가 나라를 망친다했습니까? 21년차 노동자 기본급 105만원, 손에 쥐는 건 80만원, 그마저도 가압류로 12만원, 129일을 크레인에 매달려 절규를 해도 청와대, 노동부, 국회의원 누구하나 코빼기도 내미는 놈이 없었습니다.
노동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도, 내일에 대한 희망도, 새끼들에 대한 미래 따위 같은 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며, 조선소 짬밥 20년에 100만원을 받아도, '회장님,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렇게 감지덕지 살걸 그랬습니다. 자본이 주인인 나라에서, 자본의 천국인 나라에서, 어쩌자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꿈을 감히 품었단 말입니까?
애비 잘 만난 조양호, 조남호, 조수호는 태어날 때부터 회장님, 부회장님으로 세자책봉 받는 나라. 이병철 회장님의 아들이 이건희 회장님으로 부자 1위가 되고, 또 그 아들 이재용 상무님이 부자 2위가 되는 나라. 정주영 회장님의 아들이 정몽구 회장님이 되고 또 그 아들 정의선 부회장님이 재계순위 4위가 되는 나라.
태어날 때부터 그 순서는 이미 다 점지되고, 골프나 치고 해외로 수백억씩 빼돌리고, 사교육비로 한 달 수천만원을 써도 재산은 오히려 늘어나는 그들이 보기에는 한 달 100만원을 벌겠다고 숨도 쉴 수 없고 언제 폭발할지도 모르는 탱크 안에서 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우리가 얼마나 우스웠겠습니까?[고공 크레인 위에서 자살한 고,김주익 열사 추모사 中]
아이들에게 휠리스 인지 뭔지를 집에 가면 사주겠다고 크레인에 올라온 지 며칠 안 되어서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조차도 지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준엽야, 혜민아, 준하야."
아빠가 마지막으로 불러보고 적어보는 이름이구나. 부디 건강하게 잘 자라주기 바란다. 그리고 여보, 결혼한 지 십 년이 넘어서야 불러보는 처음이자 마지막 호칭이 되었네.
그 동안 시킨 고생이 모자라서 더 큰 고생을 남기고 가게 되어서 미안해.
하지만 당신은 강한 데가 있는 사람이라서 잘해주리라 믿어. 그래서 조금은 편안히 갈 수 있을 것 같애. 이제 저 높은 곳에 올라가면 먼저 가신 부모님과 막내누나를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럼 모두 안녕.
2003년 9월 9일 김주익
고 김주익씨의 유서中
[2003년 11월 18일 방송분]
굉장히 비난 많이 받았어요. 나더러 노동자에 대해 뭘 아느냐. 육체노동자로서의 노동자계급에 대해 뭘 아느냐고 이야기하더군요. 거기에 방송이나 언론의 허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이 세상은 마이크나 펜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계급적 기반에 따라 모든 것이 이뤄질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거야말로 정말 무시무시한 SF 영화 같은 세상 아닌가요.
모든 것이 나의 물적 좌표에 따라 바둑판처럼 이미 짜여진 세상. 너는 중산층이고, 한 달에 얼마 버니까 얼마 버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하라는 거죠. 그들을 동정하거나, 연민하는 게 아니라 주위에 손배·가압류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 보면 괴롭고, 고민되고 그런 걸 이야기하고 다른 세상을 꿈 꿀 수 있는 거잖아요. 난 비록 잘 먹고 잘 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한번 생각해 보자고 이야기할 수 없나요?
왜 '8학군 기자들' 이야기가 나오겠어요. 방송국에도 정말 8학군 출신 기자들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점점 뉴스에서도 시선이 한쪽으로만 흐르게 돼요. 노동자, 농민 이야기는 그들의 생리나 환경과 맞지 않아서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거기에 눈도 돌리지 않고. 말은 심각하지만, 그게 일상으로 돌아가면 전혀 심각한 게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 우리 옆에서 투명인간화되어 버리는 청소하시는 아줌마. 아저씨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뿐인데."
[정은임의 인터뷰 中]
아침부터 주책맞게 자꾸 눈에서 땀이 난다. 니미럴. 김광석 노래나 하나 틀려다가 김진숙씨의 '골리앗 크레인 점거농성 기사'를 보았다.
아~김진숙. 그 이름을 잊고 살았다. 아니, 잊은채 기억 한구퉁이에 잠궈놓고 살았다. 꺼내보면 가슴 한구석이 여전히 아린 그 이름, 당신은 김진숙을 아는가?
몰랐다면 이제부터라도 좀 알아두시라.
김광석의 노래가사처럼 그녀를 첨 만난 것은(집회에서 말고 가까이에서 말이다)십여년 전 어느해 초여름 어느날. 경기도 광주에서였다. 조그마타 못해 왜소하기까지한 체구의 그녀. 허나 피곤함을 단숨에 가시게 아니, 번쩍 들게 만드는 그녀의 육성.
김진숙의 강연이나 집회에서 그녀의 목소릴 단 한번이라도 들은 적이 있는 사람은 알끼다. 그녀가 얼마나 뇌성같은 사자후를 토하는지. 나는 아직도 그녀처럼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책상물림 꼰대 교수나부랭이들 백명을 갖다 붙여도 째부시가 안될 그녀의 살아 꿈틀거리는 생생하고 절절한 경험들과 그속에서 뿜어져나오는 그 묵직한 외침들. 아직도 귓가에 선하다.
그 가녀린 몸으로 십대 때부터 거친 조선소 쇠덩이 배안에서 목숨 걸고(조선소 배 만드는 게 무쟈게 위험함)작업하던 야그부터 노동운동에 눈뜨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투쟁하고 체포 투옥되고 고난 받던 그녀의 청춘시절부터 이제는 경기도지사가 된 김문수와의 인연. 당시 어린 김진숙을 지도하던 김문수가 늘상 하던 말이
"공부해라 공부해야 오래간다."
...였다니. 풋.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그쟈.
김주익열사가 돌아가셨을 때 그 당시 추도사를 보며 얼마나 울었던지. ㅜㅜ
일상에 치어 살아간단 핑계(?)로 당시 꽃 한송이 바치지 못했던 게 무척이나 죄스러웠다.
그리고 간혹 들리는 김진숙 지도위원의 기사들. 그렇게 기사로만 여전한 그녀의 이십년이 넘는 해고투쟁을 지켜보며 비겁한 나 자신을 책망하던 나날들. 작년 24일 넘은 단식투쟁 사진을 보며(땡삼옹이 팔팔할때 왕년 기록이 23일이다)예전보다 더욱 말라 이러다 얼굴이 반으로 줄어든 정도로 말라버린 그녀의 얼굴을 보며 다시 고개만을 숙여야했던 나.
그리고 오늘 기사에서 본 골리앗 크레인 위로 오른 그녀의 모습. 젥일. 나 같은 비겁자가 무슨 정치가 어쩌고 세상이 어쩌고 하다닛. 입은 있으되 쉬 나오질 않는다.
인터넷에서 흔히 20대가 존경할만한 정치인이 없지않냐, 진보는 인물이 없다 어쩌구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다른 그 어떤 이름보다 김진숙의 이름을 들려주고 싶었다.
김진숙을 모르는 게 잘못은 아니지만 당신의 그 무지가 빛나는 자랑은 되지 않는단 걸. 그리고 진보네 개혁이네 친노네 반노네 어쩌구 하기 전에 김진숙의 책(소금꽃 나무)을 읽고 김진숙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리고 지금도 투쟁하는 이들 곁에서 여전히 투쟁의 깃발을 내려놓치 않은 김진숙의 눈을 마주보고 그런 소릴 한다믄 내 기꺼이 다 받아주겠다.
진보 정치인은 하늘에서 뚝~떨어지는게 아니다. 또한 진보적 인간은 무슨 마징가 제트도 아니다. 무쇠가 아닌 살과 피가 흐는 인간이다. 김진숙처럼 살지는 못할지라도 그녀의 삶을 어줍잖은 몇마디 말로 재지말라 이거다.
그녀가 왜 이십년 넘게 싸워왔는지 그리고 여전히 강철같은 철의 여인으로 살아야만 하는지. 그녀 가슴에 묻은 열사들과 그녀 가슴에 박힌 상처를 들여다보지 않고 진보정치니 머니, 진보는 이게 문제야 어쩌구 말하지 말라. 좆도 모르믄 말이다. 가만 있는게 국이나 가는 기다.
이 엄동설한. 그 어느 해보다 추운 날씨 혹한에, 골리앗 크레인 위로 올랐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며 무슨 절박함에 올랐는지 반에 반에 반에 반만이라도 헤아려보고. 그 담에 비정규직이 어쩌구 저쩌구 진보정치가 어쩌구 저쩌구 진보를 욕을 하던 물 끓여서 쪄 먹든 꼴린대로 해라.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고도 '그래도 비정규직 어쩔 수 없는 거 아냐, 정리해고는 피할수가 없잖아, 세상이 다 그래' 라고 말할 수 있담 내가 그 종자 앞에서 절이라도 해주마. 왜냐 그 종자가 있담 갸는 인간이 아니거덩. 인간이하지. 암.
제발. 모르는 건 괘안한데 '진보가 한게 머있어?' 같은. 이런 소린 좀 하지말자. 니가 모르믄 다 안한거고 남들은 다 논걸로 보이나. 니네가 지금 발 딛는 아스팔트 한걸음 한걸음마다 그리고 니네가 말할 자유를 누리는 이 표현의 자유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피 흘렸는지.
좀 알아보기도 하고 그러고 말하자. 좋은 세상이잖냐. 손꾸락만 놀림 되는 것두 안함서 말하니 기가 차는 기다. 꼴랑 몇만원 정당에 기부하고 투표 때 꼬박꼬박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에 표 찍어주는 거, 그래 것두 주요허지 암.
허나 그게 자신이 이 사회를 위해 먼가 엄청난 헌신을 다 한양 착각하지는 말라 이거다. 지금 이순간에도 김주익이 그랬듯 김진숙처럼 골리앗위로 오르며 살이 찢는 추위에 맞서며 싸우며 쟁취하며 자신의 청춘과 열정을 바친이들이 철의 노동자에서 이젠 비정규직이란 이름으로, 그리고 다시 골리앗에 서야만 하는 이 비참한 현실 앞에, 지금 이 순간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부족하고 한심한지.
하루, 오늘 하루라도 생각해 볼 줄 아는 인간이 되자. 그게 사람의 도리고. 정치를 말하는 자의 기본 아니것냐. 나같이 변절(?)에 가까운 전향을 한 소시민도 이정도의 부끄러움을 느끼는 데 그래 다른 이들은 어떠신가?
강철 김진숙
골리앗 위 지금도. 얼마나 추울까. 제일 가슴이 먹먹하다. 내 가슴에도 찬 바람이 분다 시바... ....
첫댓글 정은임 아나운서 방송 넘 좋았는데.. 좋은 분이 가셔서 넘 맘 아팠어요
정은임 아나운서 영화프로 라디오 할때부터 열혈팬이었어요...안타까워요
의식도 있고 매력적인 분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