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정
투어일자: 2017.4. 후반
참석자: 통통한토끼
투어목적지(경로): 대전> 청주> 진천> 이천> 여주> 양평> 남종> 팔당> 다산생태공원> 양수리 두물머리>
양평만남의 광장> 유명산> 86번 도로> 팔봉산> 김유정역> 건봉령 승호대> 느랏재> 가락재>
인제 남면> 양구 두타연> 446지방도> 용소폭포> 31번 국도> 방동계곡> 꿩밭길> 필례약수>
한계령> 미천골 휴양림> 구룡령> 살둔계곡> 424지방도> 31번 국도> 평창> 31번 국도>
원동재> 38번 국도> 82번 국도> 금성면> 삼탄역> 신척면> 충주> 음성> 증평> 청주>
세종> 대전
2. 감상 및 투어포인트: 이번 강원도 투어는 워크숍 장소와 일정이 양평과 춘천으로 잡혀서 그 일정에 끼워 맞추는
형식으로 진행되어서 매끄러운 동선이 아니지만 그간 못가보거나 다시 가보고픈 코스를 끼워
넣어 둘러보는 투어가 됐다.
허나 잔인하리만치 좋은 날씨와 산이며 들이며 천이며 은은한 파스텔톤풍의 신록과 눈부신
봄 햇살에 거의 죽기직전의 황홀경을 경험하는 투어가 아니었나 싶다. 좌우지간 이 절묘한 사월
마지막주를 너무 행복한 풍광에 노출되었고 투어중 뒷타이어에 지렁이를 12마리나 꼽으면서
빵꾸를 4번이나 때우면서 다니는 아주 특이한 경험을 하는 기억에 남고 손에 꼽을 정도의 투어가
아니었나 싶다. 지렁이를 꼽아서 타다가 300km정도 주행하면 바람이 빠져서 다시 꼽고, 또 달리다가
꼽았떤 지렁이가 마모한계선까지 닳은 얇은 타이어가 견디질 못하고 뽑혀나가는 불상사가 계속
이어졌지만 항상 가지고 다니던 지렁이와 전동에어펌프덕에 이번투어에 투자비를 1000%이상
뽑은듯 하다.
이번투어는 아주 좋은시기와 날짜에 다녀왔다는 점 그리고 펑크가 그리 많았지만 안전하게
투어를 종료했다는 점에서 정말 기억에 남는다.
거두절미하고 양구의 두타연, 상남면의 용소폭포, 내면 살둔마을과 계곡, 진동계곡에서 필례약수로
넘어가는 꿩밭길은 꼭 추천해주고 싶다. 이곳은 모두 목적지로 정하지 않는다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이니 휘리릭 지나가기 쉬우니 반드시 목적지로 정해서 가보길 추천한다. 4월에 어딜 가도 좋겠지만
이번투어에 들렀던 곳들은 호젓이 혼자 커피 한 잔, 비스켙 하나 들고 계곡물소리 듣고, 나무그늘
아래서 여유롭게 쉴만한 곳들이니 한번들 가보시길 추천한다.~~~
3. 사진 기타 기록:
< 첫날 워크숍 장소에서 저녁 먹기 전 연산홍과 저녁 햇살>
<양수리의 아침 풍경>
<워크숍에서 재워주는 숙소.....저녁식사전에 산책을 해봅니다.>
<고기와 술이 무제한인데.....토끼 입이 너무 짧아요~~~ >
<속소에서 바라보는 비주얼, 아직 양수리가 아니니 정확히 말하자먼 남한강변이네요>
<지글지글.....이제는 먹는것에 연연하는 시대는 지나고 무엇에 만족하냐의 문제에 부딪치는거 같습니다.>
< 해가 서산에 걸렸습니다. 이시간이 되면 경건해지는데, 아마도 생명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시기인듯하기에 그런 맘이 드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병맥주 하나에 육즙 올라오는 고기~~~ 간만에 포식합니다.>
<산반나드리의 풍경, 물에 비친 반영이 잔단하게 다가오는거 같습니다.>
<어느 지역이든 그 지역에 얽힌 야사와 전설은 항상 재미있습니다.>
<할미꽃인데 너무 소녀같이 수줍어 합니다.>
[할미꽃 전설]
먼 옛날 어느 깊고 외진 산골에 할머니가 세 명의 손녀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 가난했던 할머니는 남의 집 일을 도와가면서
부지런히 일을 했다. 힘들었지만 손녀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기운을 차리고 부지런히 일을 하였다. 할머니는 어린 손녀들을
정성껏 키웠다.
할머니는 세월이 흘러갈수록 허리가 굽고 주름살이 늘어만 갔다. 더욱 늙고 초라해지는 할머니에 비해 손녀들은 날이 갈수록
예쁘게 자랐다. 손녀들이 예쁘다는 소문은 이웃 동네까지도 널리 퍼질 정도였다.
그러나 큰 손녀는 얼굴은 가장 예뻤지만 마음씨는 세 명의 손녀 중에서 가장 고약하였다. 둘째 손녀는 큰 손녀보다는
덜 예뻤지만 역시 마음씨가 고약했다. 그러나 셋째 손녀는 별로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손녀들 중에서 가장 마음씨가
착했다.
“언니들, 할머니께서 힘들어하시니 저녁밥은 우리들이 지어요.”
“할머니가 계시는데 왜 네가 나서니? 괜히 너 혼자 착한 척 하지마!”
할머니는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첫째 손녀와 둘째 손녀가 걱정이 되었다.
“아이고 저렇게 속이 좁은 것들이 어떻게 시집을 가려는지. 쯧쯧쯧.”
어느 덧 큰 손녀와 둘째 손녀는 나이가 차서 시집갈 때가 되었다. 할머니는 손녀들을 불러놓고 말씀하셨다.
“얘들아, 이제 너희도 나이가 찼으니 좋은 데가 있으면 얼른 시집을 보내 줄 테니 말해보거라.”
큰 손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네, 할머니!’하고 대답했다. 둘째 손녀도 큰 손녀의 대답에 지지 않고 반가운 듯이 대답을 했다.
그러나 셋째 손녀의 대답은 달랐다.
“아니에요. 할머니 전 시집가지 않고 할머니를 모시고 살꺼예요. 나이도 많으신데 우리들이 떠나면 혼자 어떻게 사시겠어요.”
할머니는 셋째 손녀의 말을 듣고는 가슴이 찡해졌다.
“얘야, 네 말은 고맙지만 나이가 차면 시집을 가야 한단다. 내 걱정은 말거라.”
그러던 어느 날 이웃 동네의 부잣집에서 중매쟁이가 할머니를 찾아왔다.
“누추한 집에 무슨 일로 오셨소?”
“저 이웃마을의 김부자 댁에서 이 집에 예쁜 처녀가 있다기에 선을 보러 왔지요.”
이 소리를 듣고 있던 큰손녀와 둘째 손녀가 쪼르르 뛰어나왔다. 할머니는 중매쟁이에게 큰손녀를 소개했다.
“이 애가 제 큰손녀입니다.”
중매쟁이는 큰손녀의 미모에 홀딱 반해버렸다. 큰손녀는 김부자 댁에 시집을 갔다. 둘째 손녀도 재물이 많은 집에 시집을 갔다.
그러나 작은 손녀는 넉넉한 집이 아니라 먼데 사는 성실한 산지기에게 시집을 갔다.
셋째 손녀는 시집가던 날 몇 번이고 할머니를 돌아다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할머니, 몸 건강히 계세요. 일이 생기면 꼭 연락하세요.”
세월이 흘러 손녀들을 시집보낸 지도 몇 년쯤 되었을 때 할머니는 홀로 쓸쓸한 마음을 달래면서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할머니는 이제 너무 늙고 병까지 들어 도저히 혼자 살 수가 없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찾아가 이 늙은 할미를 보살펴 달라고 해 봐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할머니는 아픈 몸을 이끌고 이웃 동네의 큰손녀를 찾아갔다.
“여보세요. 여기가 이웃마을에서 얼굴이 예쁜 색시를 며느리로 맞아 온 부잣집이지요? 저는 그 아이의 할머니 되는 사람입니다.”
조금 있으니까 화려한 비단옷에 금목걸이를 하고 금팔찌를 찬 손녀가 나왔다. 큰손녀는 할머니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자 할머니가 자기에게 얹혀살러 온 것을 알고 푸대접을 하기 시작했다.
큰손녀는 할머니만 보면 짜증을 내곤 했다. 할머니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할머니는 큰손녀 몰래 집을 빠져 나왔다. 둘째 손녀의 집에도 찾아갔지만 큰 손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할머니에게 일을 시키면서 더 고생을 시켰다. 할머니는 집을 나왔으나 갈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에는
할머니를 모시고 살겠다고 하던 셋째손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할머니에게 같이 살고 싶다고 말하던 셋째 손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갑자기 셋째 손녀가 너무나 보고 싶어졌다.
셋째 손녀의 집은 높은 산꼭대기에 있었다. 추운 겨울밤 눈이 내리는 산길을 나이가 많은 할머니 혼자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할머니는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 겨울에 겨우 고개를 올라가고 있는데 할머니를 향해 찬바람이
쌩쌩 불어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쓰러질 듯 겨우 발걸음을 옮겼다. 결국 춥고 숨이 차서 할머니는 더 이상 한 발짝도
더 걸을 수가 없게 되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하며 할머니는 안타까워했다. 할머니는 그만 고갯마루에서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셋째손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할머니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셋째 손녀는 할머니 생각이 날 때면 언덕 쪽으로 내려오곤 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할머니가 계시는 곳이 보였기 때문이다.
간밤에도 할머니 걱정을 했던 셋째 손녀는 할머니 생각에 언덕으로 향했다. 슬슬 집을 나섰던 셋째 손녀는 거기서 할머니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어머나! 할머니 아니세요!”
셋째 손녀는 할머니의 시체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할머니의 시체를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다음해 봄. 그 무덤에는
‘할미꽃’ 한 송이가 마치 사랑하는 손녀들을 보내고 나서 늙고 병들이 힘없이 살던 할머니의 모습처럼 피어났다.
[네이버 지식백과] 할미꽃전설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국적 감성에 기반한 이야기), 2006., 한국콘텐츠진흥원)
<숙소의 주변에 있는 매발톱 꽃....>
<라일락 향기가 확 퍼지는 느낌~~~>
<다음날 아침 일찍 다산생태공원에 가봅니다.>
<거중기 앞에서 애마를 세워 놓고>
거중기는 정약용이 만든,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 작은 힘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기계예요. 1792년 수원 화성을 쌓는데
이용되었지요. 정조가 수원에 성곽 건축을 명령하자 정약용은 무거운 돌을 들 수 있는 거중기를 발명했어요. 이로써 수원성을
완성하는 날짜를 크게 앞당길 수 있었지요. 거중기는 중국에서 들여온 <기기도설>이란 책을 참고해 만들어졌다고 해요.
<화성성역의궤>에는 완전히 조립된 거중기의 전체 그림과 각 부분을 분해한 그림이 담겨 있어요. 수원 화성 공사를 위해 제작한
기구의 종류와 수도 나와 있는데, 거중기는 한 대가 사용되었고 왕실에서 직접 제작해 공사 현장으로 보냈다고 쓰여 있어요.
[네이버 지식백과]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거중기 (EBS 어린이 지식e, 지식채널(시공사))
<사진 정중앙 윗편에 정약용 선생님의 묘가 있는데 나무에 가렸습니다.>
< 조안에서 만난 할리 라이더분.....평일 이른아침에도 나 같이 바이크 타시는 분이.....같이 휴게소에서
커피 한 잔 하면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집니다.>
1903년 미국의 모터사이클 제작자인 윌리엄 할리(William Harley)와 아서 데이비슨(Arthur Davidson)이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처음으로 제작하였다. 1907년 두 사람은 이 모터사이클 이름을 회사명으로 내걸고 법인으로 전환한 이래, 전 세계의 대형 고급
모터사이클의 대명사이자 미국의 강력한 파워를 상징하는 상표로 자리잡았다.
배기량 883㏄에서 1,450㏄에 이르는 대형 모터사이클로, 400~800㏄인 일반 레저용 모터사이클보다 배기량이 훨씬 높고, 엔진
소리도 우렁차서 일반적으로 '모터사이클의 황제'로 일컬어진다. 미국 영화에서 흔히 히피 차림의 젊은이들이 떼를 지어
몰고다니며 거리를 질주하는 모터사이클이 바로 이 할리데이비슨인데, 1980년대 초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파산 위기에까지
몰리기도 했으나, 다시 중대형 모터사이클 시장에 주력하면서 빠른 속도로 전 세계 마니아층을 끌어모았다.
1985년 이후 15년간 연평균 17%의 순익증가율을 보여 2000년에는 세계 모터사이클 시장의 1·2위를 점하고 있는 일본의 혼다와
야마하를 젖히고 1위에 올랐고, 수요 증가 역시 계속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추세는 특히 할리데이비슨사의 대 고객 전략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회사는 할리데이비슨을 타는 사람들의 모임인 '호그(HOG:Harley Owners Group)'를 조직해 고객들의 결속을
강화하고, 다양한 행사를 통해 고객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왔다.
2001년 현재 호그 회원은 세계 50개국 55만 명 정도로 추정되며, 한국에만도 400여 명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1998년 미국
위스콘신주(州) 밀워키에서 열린 할리데이비슨 95주년 기념 랠리에 5만여 명이 참가하였고, 한국에서도 1999년부터 매년 경기를
개최하고 있는데, 2001년의 경우 400여 대가 참가하였다. 이들 회원들은 경주 외에 환경보호 및 안전운행 캠페인도 펼치고 있다.
대형 모터사이클이라 값이 매우 비싼데, 최저가 모델인 '스포스터 883'이 한화로 1,000만 원을 웃돌고, 1,450㏄의 경우
3,000만~3,100만 원에 달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할리데이비슨 [Harley-Davidson] (두산백과)
할리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다른분에게 패스~~~
<두물머리......>
남한강과 북한강의 두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이라 해서 두물머리라 불리며 ‘양수리’라는 지명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TV드라마나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두물머리는 400년 수령을 자랑하는 느티나무와 황포 돛배로 그 경치가 더욱 아름다우며, 특히 일교차가
심한 봄, 가을 새벽 물안개가 피어오를 때는 운치가 더한다.
드라마나 CF의 한 장면을 떠올리고 이곳을 찾는 이들이라면 평범한 강가 풍경에 실망할 수도 있지만, 느티나무 주변에 놓인
벤치에 앉아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일상을 떠난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이른 아침 시간을 놓쳤다면
해질녘 땅거미 내리는 두물머리의 풍경도 마음에 담을 만하며 눈 내린 겨울에는 또 다른 모습의 느티나무를 만날 수 있다. 물가를
따라 늘어선 수양버들과 신양수대교의 모습도 카메라에 담을 만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두물머리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2010. 1. 15., 마로니에북스)
<양평에서 일정을 마무리 하고 춘천으로 이동하는 중에 드른 김유정역>
<양평에서 춘천 김유정역까지 오기까지 유명산을 들러 오는데 코너에 방지턱이 여러게 설치되어 있다. 코너를 즐기며
타는건 아니지만 공도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는 코스연습은 정말 트렉에서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좌우지간 유명산
코너를 분석해보자면 차라리 느랏재와 가락재가 훨씬 훌륭한것 같고 꾸준하 업힐을 연습한다면 구룡령구간이 정말
좋은 곳이 아닐까 싶다. 천왕재, 입암재, 피반령, 엽돈재, 유명산보다 더 좋고 많은 트렉이 생겨났음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김유정]
경춘선을 타고 가는 길은 정말 아름다워요. 흔들리는 기차에서 본 창밖 풍경은 한 폭의 그림 같아요. 푸른 산과 푸른 물, 푸른 하늘,
푸른 들판이 보이는 경춘 가도는 어느 계절이건 마음을 상쾌하게 해 주지요. 경춘선1)을 타고 가다 보면 김유정역2)이 있어요. 그
역에서 내려 조금만 걸어가면 김유정의 문학촌이 나온답니다. 문학촌에는 외양간과 디딜방아, 연못과 정자 그리고 김유정의
생가가 고스란히 복원되어 있어요.
김유정은 1930년대에 활동했던 소설가로 흙냄새와 인간미가 넘치는 정감 있는 글을 썼어요. 1908년에 태어난 김유정은 춘천에서
한 이십여 리가량을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가면 나타나는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커다란 산에 둘러싸인 아늑한
마을이었지요. 산에 묻힌 마을의 모양이 마치 움푹한 떡시루 같다고 하여 실레마을이라 불렀지요.
김유정의 부모님은 대단한 부자로 춘천과 서울에 아주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어요. 김유정은 팔 남매 중에서 일곱째로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랐지만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게 되었어요. 어린 시절 김유정은 말을 심하게 더듬어 언제나 과묵하게
지냈고, 몸이 허약해서 잦은 병치레를 해야 했어요. 말이 없고 몸이 약했던 김유정을 돌본 사람은 형과 누나들이었어요. 특히
누나들이 김유정을 자식처럼 귀여워했지요.
김유정은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연희전문대학에 입학했지만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고향에 내려갔어요. 그때부터 김유정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 마을에 깊은 애착을 갖게 되었어요. 그는 고향에서 야학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청년들과
어울려 지내며 부지런히 글을 썼어요.
김유정은 《소낙비》로 1935년 조선 일보 신춘 문예에 당선했어요. 이에 힘입은 김유정은 쉼 없이 작품을 발표하지요. 김유정이
쓴 〈만무방〉, 〈산골 나그네〉, 〈동백꽃〉, 〈봄봄〉 등의 작품들은 한국 문학계에 큰 놀라움과 감탄을 불러일으켰어요.
김유정은 살아 숨 쉬는 생동감 있는 언어로 고향 마을의 풍경과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순박하고 진솔한 삶을 표현했어요. 당시
농촌 사람들은 가난에 이골이 날 정도로 힘들게 살고 있었지만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았어요. 김유정은 순박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진실성과 해학을 서정적이고 생생하게 그려 냈지요.
김유정은 한국 문단에 혜성처럼 나타난 소설가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어요. 그러나 김유정은 폐결핵, 불면증,
심한 치질 등의 병을 앓으며 이 집 저 집 전전하는 가난한 생활을 하다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에 눈을 감고 말았어요
[네이버 지식백과] 김유정 [金裕貞] (지도로 배우는 우리나라 우리고장 - 강원 · 경상, 2009.08.10, 주니어랜덤)
<기차라는 교통수단은 이제 KTX로 대표 되지만 그 옛날 통근열차, 비둘기호, 통일호.... 이런
기차가 정겹고 재미가 있었던거 같습니다. 무조건 빠른게 능사는 아닌듯 합니다.>
<김유정의 소설을 읽다보면 암울한 시설에도 웃음이 자아나게끔 하는 그런 맛이 있었다. 허나 그의 삶은
그렇케 유쾌하지 못한 결말이다.>
<그 옛날 수학여행이나 기차여행은 설레임 그 자체였는데......삶은 달걀에 병사이다를 얘기한다면
아재 인증밖에 안될듯 해서 그냥 넘어 간다.>
< 산막골에서 바라보는 가장 아름다운 소양호, 춘천 오지마을 부귀리, 건봉령에서 바라본 소양호>
대한민국 구석구석 여행이야기를 읽어보면 가보 싶어질 것이다.
<부귀마을로 가는 길에 있는 부귀천의 봄 풍경>
<가만보니 사이드백, 탑박스, 탱크백이 있는데 또 거기에 조그만한 더플백까지.......뭘그리 많이 가지고
댕기는지 모르겠다. 암튼 공간은 남고 봐야지.... ^^: >
<우리 아들보다 나랑 더 많이, 더 좋은 경치를 보는 나의 애마 FJR1300.....>
<이곳은 양구 두타연 가는길에, 멀쩡한 바이크는 두고 저전거를 타고 4km 달려야 한다. 참고로 계곡을 거슬러
가는 구간이기에 두타연갈때는 오르막, 보고 나올땐 내리막이다. 참고하시랏~~>
<버스도 가고 승용차도 가고, 트럭도 가고 자전거도 가는데~~ 왜 바이크만 못 갈까???!!!! 양구군청에 민원전화 넣고
정식민원 제기위해서 자료 수집중이다. 바이크 라이더만 먼지 먹고 자전거 패달을 밟아야할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다.>
<저 푸른 두타연의 소를 보고 있자니 삼척-울진에 걸쳐 있는 덕풍계곡의 용소가 생각난다. 아마도 그 옛날에는
정말 이무기가 많았을거 같다....>
<멀리 흘러 내리는 북쪽의 계곡과 신록>
<마음 같아선 이 계곡을 거슬러 올라 금강산 구경한번 해보고 싶다.>
<인제 방동약수근처 방동계곡의 아침>
<아침뜨락 찜질방의 아침풍경>
<꿩밭길에서 보는 낙석과 방지망>
<설악산과 점봉산의 산군들>
<필례약수에서>
<약수물은 반드시 끓여 먹으란다. 이제 세균수가 많아서 탈이 날수 있다고 하니 이제 약수라 하기 무색해진다.>
[필례약수]
인제읍에서 한계령 방면으로 약 11㎞ 떨어져 작은 개울가 성황당 옆의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있다. 1930년경 발견되었지만
인근의 오색약수, 방동약수의 명성에 가려져 있다가 주변 도로가 다듬어지면서부터 알려지게 되었다. 약한 탄산수로 철분을
함유하고 있어 조금 비릿한 맛이 난다. 피부병과 위장병, 숙취해소에 특효가 있다고 하여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주변에 장수대, 오색온천, 오색약수, 설악산, 대승폭포, 수렴동계곡 등 관광지가 많이 있다. 찾아가려면 인제읍소재지에서
쌍다리행 시내버스가 운행되며, 승용차로 가려면 인제읍에서 합강교를 지나 홍천 방면 31번 국도로 내린천계곡 하답에서
좌회전하여 쌍다리를 지나면 동북쪽으로 군량동을 지나 4㎞ 지점 개울가 성황당 옆에 약수터가 나온다.
필예라는 이름은 주변 지형이 베짜는 여자인 필녀(匹女)의 형국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또한 대동여지도에는 이 부근
필예계곡의 고갯길을 ‘필노령’ 즉 노력을 아끼는 지름길이라 했는데, 한계령이 생기기 전 영서와 영동을 잇는 지름길이었다.
인제군지에 따르면 필예약수가 있는 개울가에 서낭당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아름드리 당목이 빈 터를 지키고 있다. 가까운 곳에
암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폭포가 있고 주변에는 가리봉(1,519m)이 있어 관광코스로 이용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필예약수 [必曳藥水] (두산백과)
< 한계령으로 가는 길에 바라본 망대암산의 바위들....병풍같이 쳐져 있다.>
<소설에 나오는 곳 은비령이 아마도 이곳이 아닐까 싶다....44번 국도를 빼고 한계령으로 가는 곳은 이곳 뿐이니..>
[은비령]
나는 오후에 있었던 그녀와의 약속을 뒤로한 채, 갑작스럽게 눈을 보러 은비령으로 떠났다. 은비령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한계령쯤에 존재하는 곳이다.
그녀와는 이미 지난주에도 한번 만났었다. 나는 술을 마시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어떤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곳이란 내겐 죽은 친구이고, 그녀에겐 죽은 남편인 한 사내의 영혼에 대해 더 이상 소금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날 이후로 오늘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런데 막상 아침이 되니, 문득 말할 수 없이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까지
그녀를 생각할 때 한번도 떠오르지 않던 친구의 얼굴이 크나큰 무게로 나에게 다가온 것이다.
나의 친구와 함께 있던 그녀를 처음 본건, 4년전 운전면허시험장에서였다. 그날 나는 다섯 번째 코스시험을 보러 갔다가,
주행시험을 치르고 나오던 친구와 만났던 것이다. 거의 8∼9년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군에서 제대한 다음 한두 달 집에서 머무르다
나는 곧바로 책보따리를 싸 들고 강릉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은비령으로 들어갔었다. 내가 그곳에서 생활한 것은 1년 동안이었고,
그와 함께 생활한 건 9개월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은비령을 나온 다음 서로 소식도 모르고 지내다가 9년 가까운
시일이 흘러 서울의 한 운전면허시험장에서 만난 것이다. 그는 사시 공부를 하다가 행시로 곧 방향을 바꾸었으며, 시험에 합격한
건 5년전의 일이라고 했다. 나는 체력의 한계에 부딪혀 공부를 3년 만에 포기했고, 그 이후 창작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3년전에
결혼했고, 두돌 된 아이가 있다고 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그녀가 왔다. 그는 집사람이라며 그녀를 나에게 소개시켜
줬다. 그녀가 반갑다고 인사를 하는데, 여자의 모습이 매우 낯익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한참을 떠올려 보니, 그녀는 내가 군대에
있을 때 바람꽃을 닮았다고 느꼈던 나의 후임병의 애인이었던 여자였다. 그 이후로 친구와 나는 두어 번쯤 전화로만 연락했고,
다시 그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오늘 처음에는 그의 혼이 떠돌고 있을 것 같은 격포를 찾아
떠날 생각이었다. 격포는 그 친구가 사고를 당한 곳이다. 그곳에 가서 그 친구에게 인사를 하고 나면 왠지 마음의 짐이 절반은
줄어들 것 같았다. 여자를 만나러 가는 일조차 그가 가로막고 있는 기분이었다. 집을 나설 때 나는 별거중인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격포 근처의 채석강으로 떠난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아내는 상관할 바 아니라며 매몰차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아내는
고시공부를 포기해 버린 나에 대해 미련을 갖고 있었고, 글쓰는 나의 직업은 탐탁지 않게 여겼었다. 그것이 그녀와 나 사이의
가장 큰 문제였을 것이다.
일단 자동차를 타고 격포쪽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대관령 쪽에 눈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행선지를 은비령쪽으로 바꿨다.
친구와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그곳에 가서도 나름대로 마음의 짐은 어느 정도 털어 버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자가 약속 장소에서 무작정 기다릴 것을 염려하여, 지금 은비령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는 메시지를 나의 자동응답기에
남겼다.
운전면허시험장에서 만났던 여자를 다시 본 건 제작년 여름이었다. 그때 이미 나는 아내와 별거 중이었고, 어떤 친구의 부탁으로
사회보장보험연합회의 체험수기 심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심사료를 받으러 연합회 사무실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일하는 그녀를
보았고, 그때 친구가 죽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접했던 것이다. 친구는 회사의 단체 관광 모임에 갔다가 격포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여자의 얼굴엔 아픔이 가득해 보였다. 나는 그날 받은 심사료를 그녀에게 주고 돌아왔다. 그러다 지난해 여름에
같은 일로 다시 연합회 사무실을 들렀다가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녀와의 만남이 몇번으로 이어지면서, 어느샌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은비령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열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눈길에 체인을 걸고 오지 않은 탓에 차가 이미 많이 손상된 상태였다.
나는 예전에 친구와 공부했던 집을 찾아갔다. 주인 노부부는 나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나는 노부부에게
눈 구경을 왔다고 말씀 드린 후, 밤늦게 내가 예전에 묵었던 방으로 건너왔다. 아침에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눈은 무릎 반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눈도 많이 오고, 차의 상태도 그다지 좋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상황이었다. 그 때 별을 보러 옆집에
내려와 있다는 한 남자가 다가와 자동차 정비소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오늘 서울로 올라갈 것이 아니면 밤에 자신이
별 관측하는 곳으로 놀러 오라고 했다.
자동차를 정비하러 양양으로 가는 길에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내가 은비령으로 내려올 때 남긴 메시지를 듣고 무작정 이곳으로
떠나왔다는 것이다. 그녀와 함께 자동차 정비소에 들러 차를 맡긴 후, 우리는 바다를 보러 갔다.
바다를 보고 저녁때 노부부의 집으로 돌아와, 그들에게 그녀를 나의 아내라고 소개했다. 달리 설명하기가 막막한 부분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조금 앉아 있다가, 나는 그녀를 데리고 별을 관측하는 남자가 있는 곳으로 나갔다. 별자리를 가르쳐 주던 남자는
대부분의 행성이 공전주기를 가지고 있듯이 사람도 2천 5백만년이 될 때마다 윤회의 윤회를 거듭한다고 했다. 물론 그는
농담 섞인 어조로 한 말이었으나 우리는 그 말이 진실인 것처럼 느껴졌다. 별을 보고 돌아와 그녀와 나는 잠자리에 누웠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2천 5백만년 뒤에도 다시 만나서 이런 모습으로 있을지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그 생애에도 바람꽃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 어쩜 내일 아침 나를 보지 않고 떠날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날 밤, 은비령엔 아직 녹다 남은 눈이 날리고 나는 2천 5백만년 전의 생애에도 그랬을 것이고, 이 생애에도 다시 한번 나를 비껴
지나가는 별을 내 가슴에 묻었다. 서로의 가슴에 별이 되어 묻고 묻히는 동안 은비령의 칼바람처럼 거친 숨결 속에서도 우리는
이 생애가 길지 않듯 이제 우리가 앞으로 기다려야 할 다음 생애까지의 시간도 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은비령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이른 아침 신선한 공기를 맞으며 산속 숲길을 혼자 달리는 맛을 아는 사람들은 안다~~~>
[한계령]
강원도 인제군의 북면 한계리 자양밭 동쪽에서 양양군 서면 오색리로 가는 길에 위치한 고개이다. 인제군과 양양군의
경계를 이룬다. 신라김씨대종원(新羅金氏大宗院)의 기록을 보면 마의태자 일행이 서울을 떠난 것은 935년이고 지금의
한계리에 도착한 때는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와 눈보라가 심한 한겨울이었다. 따라서 한계령은 이들 마의태자 일행이
몹시 추웠던 것을 되새겨 이름을 붙였을 가능성이 높다. 한계령은 영동과 영서의 분수령으로 내륙과 동해안을 잇는
침략상 교통의 요로(要路)로 알려져 왔으며, 옛날에는 소동라령(所冬羅嶺)이라고도 불렀다. 『세종실록지리지』
양양도호부에 "요해(要害)는 본부(府) 서쪽으로부터 인제 경계 바드라재(所等羅嶺)로 가는 데 36리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양도호부에는 "소동라령(所冬羅嶺) 부 서쪽 60리에 있으며 겹쳐지고 포개진 산맥에
지세가 험하고 궁벽지다. 예전에는 서울로 통하는 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지도서』
등의 지리지에도 유사한 기록이 나타난다. 『해동지도』 등에는 소동라령에 대한 기록은 없고 오색령만 표현되어 있다.
한편,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인제군에 한계산(寒溪山)과 그 석성에 대한 기록이 있다. 특히
인제군에는 신라 마의태자와 관련된 전설이 많은데 한계리에 도착한 일행이 심한 추위로 인하여 한계라는 지명이
유래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한계령(寒溪岺)이 오색리에 위치한 영치현명으로 수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 지리서와 고지도 등에서 유추해보면 소동라령과 오색령이 따로 존재하고 있었지만 소동라령이 없어지고
오색령이 주 교통로가 된 듯하다. 따라서 오색령이 한계산의 이름을 따서 한계령이 되지 않았나 싶다. 1971년에
양양과 인제를 연결하는 포장도로가 뚫려 인제 원통에서 양양으로 가면서 하늘벽 · 옥녀탕 · 장수대 · 오색 온천 등이
자리 잡고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계령 [寒溪嶺, Hangyeryeong]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2008. 12., 국토지리정보원)
<한계령과 44번 국도의 풍광>
<미천골에서 잠시 휴식>
<이제 복귀코스로 접어들어 구룡령을 넘기 직전 북녁하늘과 설악산군을 바라본다.>
<홍천군 내면에 있는 살둔계곡>
4월은 잔인한 달~~
제가 혼자 생각으로는 너무나 좋은 시절이지만 우리네 인생이 잔인하리 만치 먹고 살기바빠서 꽃이 피고 신록이
우거지는 상황에서 농사를 준비하고 한해를 준비하고 또 학생들은 중간고사를 준비하는 시기이기에 잔인한
4월이라 해석했는데, 어떤이는 우리 민족과 역사가 4월에 격변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그 잔인한 4월의
연유를 찾아보니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영국국적을 택한 시인 엘리어트의 장편시에서 그 연원을 찿고 있습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황무지>에서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겨울은 따뜻했었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가냘픈 목숨을 마른 구근으로 먹여 살려 주었다. ~~
(중략)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fromThe Waste Land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Winter kept us warm, covering
Earth in forgetful snow, feeding
A little life with dried tubers.
(중략)
<살둔마을, 살둔계곡도 조용히 놀러와서 조용히 쉬다 가면 너무 좋을듯하다.>
[살둔마을]
내린천에 기대어 자리잡은 마을
‘사람이 기대어 살만한 둔덕’이라는 뜻의 살둔마을. 정감록에 3둔4가리라 하여 환란을 피할 수 있는 일곱 곳을 꼽았는데
3둔은 ‘월둔, 귀둔, 살둔’이고, 4가리는 ‘아침가리, 적가리, 명지가리, 연가리’다. 그중에서 마을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 살둔이다. 이제는 오지라는 설명이 무색할 정도로 많이 알려지고 펜션들이 들어서면서 개발이 되고 있으나 우리나라의
하천 중 깨끗하기로 유명한 내린천 상류지역에 있어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기운이 서려 있는 마을이다.
한국의 아름다운 집 100선에 소개되기도 한 전통 귀틀집 모양으로 지어진 살둔산장은 내린천의 맑은 물줄기가 내려다 보이는
위치에 있어 살둔마을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2층으로 지어진 산장의 마루에 앉으면 울창한 노송 숲이 실어다 주는 생명의
기운과 내린천의 물소리가 빚어내는 하모니를 들을 수 있다. 여름철 호젓한 피서지로도 좋고 겨울날 하얗게 눈 덮인 산골마을의
풍취를 느끼는 여행지로도 제격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살둔마을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2010. 1. 15., 마로니에북스)
<닳은 타이어에 지렁이 꼽는 팁하나는 지렁이 꼽은 다음 꽁다리를 자르지 말고 그냥 두고 타야한다는 점이다.
바이크타이어는 두께가 얇고 지렁이를 잡아주는 힘이 약해 바람이 새거나 지렁이가 빠지기 쉽기에 그냥 두고
타는게 더 낫다.>
<사실 이번투어에서 뒷타이어때문에 말썽이 많았지만 안전하게 무복한게 다행이라 생각한다. 일전 제주투어때
박아둔 지렁이에서 바람이 새서 조금씩 타이어 바람이 새고, 급기야 지렁이가 뽑혀나가는 일이 있었는데 그렇게
임시로 지렁이를 다시 박아서 달린 투어거리가 1,200km, 사용한 지렁이는 총 12마리, 때우고 달린건 총 4번......
이젠 지렁이 도사가 됐다.>
좌우지간 어찌됐던간에 자기 명의로 된 바이크가 있고 손에 당장 키가 있다면 달리고 볼일이다.4계절 있는 대한민국에서
춥다고 안타고 덥다고 안타고 비와서 못타, 눈와서 못타, 타이어 닳아서 못타, 정비해야해서 못타......또 시간이 안나서
못타......그럼 언제 탈 일인지 한번 따져볼 일이다.
몇천만원짜리 취미치고는 기회비용이 너무나 큰 취미가 아닐수 없기에 일단 날이 좋다면 달리고 볼일이다.
그렇다고 마냥 주구장장 달릴 일만도 아닌것이 가다서다를 반복하면서 보고 듣고 먹고 마실것들이 또 얼마나
많은 나라인지..... 이번투어는 못가본곳을 가보고 기억이 흐릿 한곳을 다시 가보는 웨이포인트 순회투어인 까닭에
참 많이도 달리고 멈추기도 많이 했다.
가다서다를 반복해서 피곤하기도 하고 그런 수고에 비해서 사진도 많이 찍지는 않았지만 2017년에 잊지 못할 투어의
추억을 하나 만들었다는 생각에 가슴 뿌듯하다. 빵구를 4번씩 떼워가며 달린 일과, 446지방도로에서 연속으로 계속
만난 노루들, 그리고 한밤에 홀로 용소폭을 찾으러 핸드펀 불빛하나 들고 용소폭포 밑에서 물소리를 녹음한것은
잊을수 없는 신선한 경험인듯하다.
이제 계절의 여왕 5월이 냉큼 왔다. 이제 더 더워지고 벌레도 많아지는 시기이니 당장 달리고 볼 일이다.~!!!!
첫댓글 바이크 라이더 풍경 너무멋지십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토끼야 부연동이 빠졌잔애ㅋ우와 정성이 가득한 후기네ㅎ나중에 백담 계곡 놀이터에서 목욕도 하구가ㅎ아참 원통에 있는 송희식당에서 황태해장국 꼭 먹고~^^*짝짝짝
부연동..좋죠...ㅋㅋ 한번에 다 오픈하면 밑천이..ㅋㅋ 금방이라....ㅋ
워크솝에 와서도 견문록을 쓰다니. . .
멀리서 왔는데 서.경 사람들에겐 매주 매달 몇번씩 지나가는길이라 주측컨데 가까워서 더 안가본사람들이 많을거라 생각됩니다
물론 이글을 끝까지 읽는사람은 더 적을거라 보여지구요
사람들이 함께 공감을하던 못하던 제겐 역시 최고의 후기꾼? 입니다
저녁노을 사진에 달린글이 극히 공감이 가네요
항시 안라 즐라하세요
그렇게 공감하신다면..이제 꺽였단 말씀이신데...ㅋㅋ
@통통한 토끼 진즉에요
멋지시네요
감사합니다
화장실 막혔어요 ㅠ..ㅠ
너무 오래 앉자있었나 봅니다 ㅎㅎ
멋진후기 ~ 멋진사진 ~ 잘 봤습니다
ㅋ..감사합니다
투어 한번에 바이크 트러블이 이렇게 많았다니 고생 하셨습니다^^
위험했지만 많이 배운 그런 투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