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경기전에 있는 예종대왕 태실,
전주 경기전에는 완주군 구이에서 옮겨온 예종대왕 태실이 있다. 세조의 아들인 그의 태실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가 죽고 그의 뒤를 이어 임금에 오른 사람이 성종이고, 성종의 아들이 연산군인데, 그의 짧은 재위 기간을 들여다보자.
서오릉 북동쪽에 자리한 창릉昌陵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무덤이다. 예종(1450~1469, 재위 1468∼1469)은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이다. 해양대군에 봉해졌다가 의경세자가 병으로 요절하자 1457년(세조 3) 12월 15일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 뒤 1468년 9월 7일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예종의 비妃 안순왕후安順王后(미상~1498)는 우의정 한백륜韓伯倫의 딸로 당시 세자였던 예종과 가례를 올렸다가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한편 그의 소생은 제안대군과 현숙공주가 있으며, 제안대군은 효성이 지극했다고 알려져 있다.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는 1461년 세자빈의 신분으로 사망했다.
예종이 임금에 오른 1468년에 남이와 강순 등 이 역모죄로 처형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남이南怡는 조선 개국공신 남재南在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남빈南份, 어머니는 남양 홍씨로 태종의 외손자이자 세조에게는 고종사촌의 아들이었다. 남이는 13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계유정난으로 왕위에 오른 세조에게 총애를 받은 남이는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선봉장으로 활약하여 북청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그 뒤 여러 차례 공을 세워 27세의 나이로 공조판서가 되면서 승승장구했다.
1468년(예종 원년) 남이가 숙직을 하던 중에 혜성이 나타났다. 그때 남이가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몰아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징조다”라고 말한 것을 병조참지 유자광이 엿들었다. 그는 남이의 말이 역모를 꾀하는 말이라고 예종에게 고변했다. 남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예종은 그에게 역모죄를 물어 그해 10월 27일에 강순, 변영수, 변자의, 문효량 등과 함께 저자에서 거열형으로 처형되었다. 그의 어머니 역시 다음날 거열형으로 처형되었으며, 딸은 한명회의 노비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 외조부인 권람의 공이 참작되어 사면되었고, 이 사건을 ‘남이의 옥獄’이라고 한다. 남이가 남긴 <북정가北征歌> 한 수가 가슴을 울린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닳아지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마르리라
남아 스물에 북北을 평정하지 못하면
뒷날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이긍익, 《연려실기술》 권6, <예종조 고사본말>)
훗날 이수광李睟光은 이 시를 두고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그 말뜻이 발호하여 평온한 기상이 없으니 화를 면하기가 어려웠다”라고 평했다.
예종은 왕위에 있던 약 14개월간 직전수조법을 제정하여 둔전의 민경을 하락했고, 《경국대전》의 마무리를 서둘렀지만 반포는 보지 못했다. 예종은 1469년 11월 28일에 경복궁 사정전에서 스무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임금으로 재직한 지 1년 2개월이었다. 아버지 세조가 저지른 단종과 사육신에 대한 죄가를 네 명의 아들들이 받아서 그런지 모두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것이다. 서오릉에 가장 먼저 들어선 것은 덕종의 경릉이지만 서오릉에 조성된 최초의 왕릉은 창릉이다. 신정일의 <왕릉 가는 길>에서
도처에 역사가 있고, 우리도 어느 날 역사가 된다.
잠시 살다가 간다, 슬프지 않은가?
2022년 10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