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한 삶3-3. 성격이 아니라 인격이다
인간의 여섯 번째 성격
다들 성격이 문제라고들 한다. 행복했던 연인이 헤어질 때도, 잘 지내던 친구들과 틀어질 때도, 갈등의 원인 1위는 언제나 ‘성격 차이’다. 인간관계의 대부분의 문제가 사람으로 인해서 벌어지고, 그 사람을 규정짓는 것이 성격이기 때문이다. 성격이 너무 달라도 문제지만 같다고 해서 늘 좋은 건 아니다. 그리고 성격은 절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성격이란 개인을 특정 짓는 지속적이고 일관된 행동 양식을 말한다. 꾸준하게 그 사람다운 행동을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된다. 성격을 알면 그 사람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할 수 있다. 심리학자들은 아이큐와 성격은 ‘기질’이라고 말한다. 윗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며 인생 안에서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격도 과학적으로 측정이 가능하다. 성격을 이루는 여러 요인들을 계량하여 분석하면 어느 정도 그 사람의 성격을 측정할 수 있다. 성격 심리학자들은 성격을 분석하는 요인으로 크게 다섯 가지를 꼽았다. 이는 Big5라고 하여 심리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익숙하게 들어봤을 것이다.
개방성 – 상상력, 호기심, 예술적 감각 등으로 보수주의에 반대하는 성향
성실성 –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성향
외향성 – 타인과의 사교를 좋아하고 자극과 활력을 추구하는 성향
우호성 – 타인과 공동체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성향
신경성 – 걱정, 두려움, 우울 등 부정적인 정서를 쉽게 느끼는 성향
개방성, 성실성, 외향성, 우호성, 신경성, 이것이 성격을 결정하는 다섯 가지 주요한 요인이다. 얼마나 외향적이거나 내향적인가, 개방적이거나 보수적인가, 친근한가 그렇지 않은가, 힘든 것을 참아 내는 성실도의 크기가 어떠한가, 정서적으로 얼마나 안정되어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물론 이 다섯 가지는 타고난 기질이며 저마다 다른 사람의 차이를 구분하게 해 준다. 그런데 최근 심리학에서는 이 다섯 가지로만 정의 내릴 수 없는 성격의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고 한다. 성격 모델을 더욱 완전하게 만들어 주는 여섯 번째 요소는 바로 ‘정직-겸손성’이다.
《H 팩터 심리학》의 저자인 이기범 교수는 인간의 여섯 번째 성격인 ‘정직-겸손성’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 왔다. 그가 발표한 재미있는 데이터 중 하나가 다른 다섯 가지 성격 요인들이 선천적인 데 비해 ‘정직-겸손성’은 후천적인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성격이란 정의 자체가 타고 나는 것을 말한다. 많은 연구들이 성격은 태아 시절 호르몬의 영향을 받아 결정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섯 번째 성격은 다르다. 배우고 익히고 생각하며 적당히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인격이라고 칭하고 싶다. 다섯 가지 성격 요인에 정직 겸손성이 합해졌을 때 성격을 넘어선 인격, 혹은 성품이 형성된다고 보는 것이다.
정직과 겸손
정직과 겸손은 비슷하게 좋은 말 같지만 사실은 다르다. 엄격하게 말해 두 개념은 상충된다. 정직이란 무엇일까? 있는 그대로 솔직히 말하는 것이다. 살면서 늘 정직하다고 자부하는 철수 씨가 있다. 그는 오늘도 부인에게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한다.
“자기 헤어스타일 바꿨어? 아주 엉망진창이네.”
100% 정직한 사람은 타인에게 종종 상처를 입힌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도 너무 정직한 사람들은 때론 주책맞아 보인다.
겸손은 어떤가? 상대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사회적 기술이다. 어려서부터 겸손이 몸에 익은 영희는 기말고사에서 전 과목 100점을 맞아도 고개를 숙인다. 공부 비법을 알려 달라는 친구에게 겸손하게 대답한다.
“아유, 어쩌다 얻어 걸린 거지 뭐.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야.”
지나친 겸손은 오히려 재수 없지 않은가. 어린아이가 너무 겸손하면 징그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 그런데 주변에 참 괜찮은 어른들을 보면 겸손과 정직의 중간 지점을 잘 아시는 것 같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부딪히는 수천수만 개의 상황들 속에서 겸손과 정직의 적정한 지점을 미세조정 하듯 맞춰왔기 때문이 아닐까.
이 시대의 꽤 재밌는 어머니들을 보자. 산전수전 다 겪은 그분들의 입담엔 인생의 정곡이 담겨 있다. 그분들과 조금만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웃음 속에 분명한 통찰이 담겨 있다는 걸 느낀다. 정직하지만 조금도 주책맞지 않다.
남자로서 내가 아는 한 주철환 선배가 이 반열에 올라간 분이다. 그는 교수로서 2020년 정년퇴임을 했다. 65세가 되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정년을 맞은 해에도 학부생들은 야구 잠바나 후드 티를 입고 모자를 쓴 형이나 오빠 같은 그의 사진을 담아 연하장을 만들어 보낸다.
어느 20학번 학생이 보냈다는 연하장. 그런데 전혀 주책맞지 않고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스무 살 먹은 대학 1학년 학생이 보기에도 그리고 이제 갓 50을 넘긴 내가 보기에도 말이다. 이런 사람이 솔직함에 자신만의 색깔까지 입힌 사람이다.
그런가 하면 나의 선배이신 최재천 교수님은 겸손의 대가다. 그분이 지인들과 만났을 때 즐겨 이야기하는 소재 중 하나가 학자로서의 실패담이다. 오랫동안 공을 들였던 연구나 일이 완전히 망해 버린 이야기를 그렇게 솔직하고 재밌게 말씀하신다. 세계적인 석학의 ‘말아먹은’ 이야기를 웃으며 듣고 있노라면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저 분이야말로 진짜 학자시구나라는 감탄, 그리고 저 겸손의 지점이 얼마나 적정한가 하는 감탄이다.
한편, 높은 정직과 높은 겸손을 동시에 만나는 건 참 쉽지 않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면서도 상대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배려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런데 얼마 전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그 예시를 발견하고 무릎을 탁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일하는 아주대학교에 내분비내과 교수로 재직하시는 김대중 교수님이 그 주인공이다. 내분비내과다 보니 당뇨병, 비만, 대사증후군 등 대부분 호르몬과 관련된 질병을 다루게 마련이다. 찾아오는 환자들의 질병은 대다수 유전인 경우가 많다.
“이 병의 원인은 유전입니다.”
대부분의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말하는 방식이다. 있는 그대로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의사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슴 아픈 것은 환자의 몫이다. 고통을 물려준 부모를 원망하는 것도, 자신의 처지를 가엾게 여기는 것도 그들이 겪어야 할 통증의 일부다. 그런데 김대중 교수님은 같은 말도 다른 화법으로 이야기한다.
“이 병 때문에 환자분 부모님도 똑같은 고생을 하셨네요.”
아, 나는 이 한마디만 듣고도 나는 그가 얼마나 진실하고 겸손한 분인지 느낄 수 있었다. 똑같은 사실을 말했지만 상대가 느낄 정서적 반응은 확연히 다를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부모님을 원망할 사람이 있겠는가. 우리 부모님이 한평생 힘들었구나. 그러나 지금까지 버티셨구나. 부모의 삶을 이해하며 새 희망을 찾게 마련이다. 이런 한마디야말로 한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매일 매일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아닐까. 고군분투하며 찾아낸 ‘정직-겸손’의 이상적인 지점은 오롯이 그 사람의 색깔이 된다. 인생 선배들이 이룩한 사람의 색깔을 만날 때마다 나는 심리학자로서 깊은 감동을 받는다.
사람은 변한다
이분들은 어떻게 이상적인 인격을 갖게 되었을까. 상대와 공동체를 감동시키는 깊은 생각과 마음, 그리고 적절한 표현력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안심할 수 있는 건 일단 그분들이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다. 적어도 60이 넘어서야 가능한 성품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 이틀 고민해서 나오는 깊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찾은 정직 겸손의 이상적인 지점은 내일이 되면 달라진다. 지금 가장 적절한 포인트를 발견했다 하더라도 5년 후, 10년 후엔 상황도 이상도 바뀐다. 지점 찾기는 그래서 어렵다. 사는 동안 끊임없이 찾고 또 찾아야 한다.
앞서 말했지만 인간의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성격의 다섯 가지 요인은 나이가 든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정직-겸손성’은 예외다. 이기범 교수를 포함한 거의 모든 연구에서 이 성격은 나이 먹으면서 점차 높아지는 것을 증명했다.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경험을 통해 교양과 배려 경청의 옷을 입으셨다. 몇 년 후의 내가 지금보다 더 깊어지고 넓어질 수 있다니, 기쁜 소식 아니겠는가. (물론 그렇지 않은 분들도 간혹 존재한다. 자칫 진정성은 올라가고 정직 겸손성은 떨어지는 트럼프와 같은 어른으로 발전할 수도 있으니 주의하자.)
‘정직-겸손성’의 인정은 낙관적이고 긍정적으로 인간을 보는 대표적인 이론이다. 이는 성선설과는 다르다. 성선설이나 성악설은 인간이 착하거나 나쁘게 결정되어 태어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이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바뀌어 나간다는 가능성이니 말이다.
당신이 부모라면, 작든 크든 한 조직의 리더라면, 인간관계의 골치 아픈 순간마다 ‘정직-겸손성’을 떠올리면 좋겠다. 가장 연장자가 더 진실되고 겸손한 인격을 보여 줘야 한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험하고 어려운 시대라면 더더욱 필요하다.
*위 글은 고려대학교 심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교에 심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인지심리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아트 마크먼 교수의 지도하에 인간의 판단, 의사결정, 문제해결 그리고 창의성에 관해 연구하였고, 현재는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면서 아주대학교 창의력연구센터장을 지냈고 게임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으면서 대학교 각종 교육기관, 기업에서 왕성하게 강연하고 있고, ‘어쩌다 어른’, ‘세바시’, ‘책 읽어 드립니다’, ‘나의 첫 사회생활’ 등 다수의 프로그램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게 있는 “김경일”교수의 저서 ‘적정한 삶’ 제3장 ‘팬데믹 이후의 공동체’ 중 일부를 옮겨본 것입니다. 그 외 저자의 저서로는 “지혜의 심리학”, “이끌지 말고 따르게 하라”, “어쩌면 우리가 거꾸로 해왔던 것들”, “십 대를 위한 공부사전” 등이 있고, 역서로는 “혁신의 도구”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