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의 추석 / 천상병 (1930~1993)
침묵은 번갯불 같다며,
아는 사람은 떠들지 않고
떠드는 자는 무식이라고
노자께서 말했다.
그런 말씀의 뜻도 모르고
나는 너무 덤볐고
시끄러웠다.
혼자의 추석이
오늘만이 아니건마는,
더 쓸쓸한 사유는
고칠 수 없는 병 때문이다.
막걸리 한 잔,
빈촌 막바지 대폿집
찌그러진 상 위에 놓고,
어버이의 제사를 지낸다.
다 지내고
음복을 하고
나이 사십에,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찾아간다.
불혹의 추석 / 천상병 (1930~1993)
침묵은 번갯불 같다며,
아는 사람은 떠들지 않고
떠드는 자는 무식이라고
노자께서 말했다.
그런 말씀의 뜻도 모르고
나는 너무 덤볐고
시끄러웠다.
혼자의 추석이
오늘만이 아니건마는,
더 쓸쓸한 사유는
고칠 수 없는 병 때문이다.
막걸리 한 잔,
빈촌 막바지 대폿집
찌그러진 상 위에 놓고,
어버이의 제사를 지낸다.
다 지내고
음복을 하고
나이 사십에,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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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을 대로 해라 / 김규동 (1925~2011)
천상병이 좋아한 것은 막걸리
공초 오상순은 그저 담배
문익환이 사랑한 것은 반독재집회
김정환은 철학과 맥주
에즈라 파운드가 좋아했던 것은 시경
말로가 흠모한 것은 영웅이다
정지용이 사랑한 것은 말을 만드는 일과 염소수염
이상이 그리워한 것은 인간의 사랑이다
이병기가 사랑한 것은 난초
김기림은 지성을
권정생이 사랑한 것은 길가의 민들레꽃
김남천이 사랑한 것은 노동자 농민이고
임화가 사랑한 것은
맨발로 뛰어다니는 한국의 아이들이다
여운형이 가장 좋아한 것은 대중을 만나는 일
손기정이 좋아하는 것은 끊임없이 달리는 것
김구가 사랑한 것은 나라의 독립이다
애들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집에서 학교에서 시달리는 아이들아
너무 괴로워하지는 마라
네 좋아하는 것을 하면 된다
그것만이 너 자신을 살리는 길이니라
천재는 거기 있다
좋을 대로 해라 좋을 대로 해라
거지시인 온다 / 김규동 (1925~2011)
철없는 모더니스트 시절
명동에서
내 친구들이
새카만 얼굴의
천상병이 나타나면
야, 저기 거지시인 하나 온다라고
우스갯소리 했지요
상대 나왔다는 친구가
뭐 저러냐
너 또 200원 줘라
그렇잖아도 널 알아보고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빈정댔지요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때 천상병이를 거지시인이라 놀려주던
친구들은 다 시인이 못 되고
천상병이는 시인으로 남게 되었군요
영원히.
참 알 수 없다 / 임보
친구들에게 구걸하여 막걸리나 마시며
폐인처럼 굴러다니다 떠난 천상병 시인은
몇 편의 작품을 안 남겼는데도
세상 사람들이 좋아한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딴
공원도 생기고
문학상도 제정 되고
기념사업회도 만들어지고…
그런데 그와 함께 살았던 당대의 시인들
문단에서 떵떵거리며 문명을 날렸던
소위 잘 나갔던 사람들은
누구 하나 챙겨주는 이 없이
세상의 기억에서 점점 사라져 간다
억지로 이름을 좇는 일이
무상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글을 열심히 써야 할 것인지
술을 열심히 마셔야 할 것인지
무엇이 길인지
도통 헷갈리는 봄이다
당나귀 / 류시화
- 천상병 시인, 당신은 어디에 있으며 거기서도 시를 쓰고 있는가
1.
당나귀는 가난하다
아무리 잘생긴 당나귀라도 가난하다
색실로 끈을 엮어
목에 종을 매달고도 당나귀는 대책없이 남루하다
해발 5천 미터
레에서 카루등라 고개를 넘어 누브라 밸리까지
몇 날 며칠을 당나귀를 타고 간 적 있다
세상의 탈것들은 다 타 보았지만
내가 나를 타고 가는 것 같은
내가 나를 지고 가는 것 같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당나귀 등에 한 생애를 얹고 흔들리며 벼랑길 오르는 동안
청춘을 소진하며
어찔한 화엄의 경계 지나오는 동안
한 소식 한 당나귀에게서 배웠다
희망에 전부를 걸지도 않고
절망에 전부를 내주지도 않는 법을
그저 위태위태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당나귀여, 너는 고난이 멈추기를 갈망하지도 않는다
나도 너처럼 몇 생을 후미진 길로 걸어 다녔다
그러나 그곳이 폐허는 아니었다
자학이 아니라 자족이었다
바람이 불었으나 너무 오래 걸어 무릎에서
새어 나오는 바람이었다
나의 화엄은 당나귀와 함께 벼랑이었다
2.
인사동 귀천에서 만난 한 시인은
시를 끌고 가는 힘이 부족하다고 고백했다
절망의 힘으로도 끌고 가기 힘들다고
밖으로 나오니
새 한 마리
가볍게 생을 끌고 피안으로 날아간다
일생의 힘으로 시를 끌고 간
천상병 시인이 눈 내리는 귀천을 끌고 턱없이 웃으며
하늘 모퉁이로 가고 있다
시보다도
한 생을 끌고 가는 힘이 턱없이 부족했다
인사동 벗어나기 전 뒤돌아 보니
눈보라 속 당나귀들이
저마다 자신을 지고 서역의고개를 넘고 있었다.
정찰일지 5 / 한상철
2014년 1월 1일 정찰비행 중 우주본부로부터 수신된 공문 내용
<자전하는 모든 행성은 즉시 자전을 멈추고 정지할 것
특히 거기서 노래 부르거나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생명체는
모두 중범죄자로 우주 밖으로 추방할 예정임>
이에 태양계 주민은 자전하는 지구를 천왕성 뒤 어두운 곳으로
숨기려 했으나 이를 알고 화가 난 우주본부는 아예 태양계 전체를
없애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음 그러나 박용래 김관식 김종삼 천상병 등
지구로 파견됐거나 소풍갔다 돌아온 시인 몇 명이 본부 정문 앞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항의하고 일부는 크게 우는 등 소동이 일어
우주본부는 현재 이 계획을 보류 중임
추신: 이 보고서는 극비사항이므로 지구인들에게는 철저히
보안을 유지할 것
- 한상철 시집 <가난한 습성>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