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꿈 슈꾸리아 6-귀향, 그리고 새로운 히말라야를 꿈꾸며
※ 한 달 뒤 우리가 여행하고 돌아온 파키스탄 카시미르 지역에 강진이 발생, 많은 사상자가 났다고 한다.
지진과 폭우에 전혀 무방비 상태로 돌과 흙으로 얼기설기 지어진 그들의 주거지가 눈에 선하다.
그 중에서도 만세라 지역의 피해가 가장 심하다고 한다. 이슬라마바드에서 스카르두까지 운전한
파르자만은 만세라 출신이었다. 카라코람 하이웨이에서 잠깐 쉬었다 간 곳에서 짜이를 대접 받았는데
값을 치르려고 하니 이곳은 자신의 패밀리라 공짜라고 했다. 그 마을들이 이번 지진에 무너진 것이다.
이번 카시미르 지진으로 후세지방에 사는 이 어린 영혼들도 희생되지 않았기를 하나님께 기도 한다.
다음날 새벽
이틀 거리이다. 왕복하려면 약 3일 거리. 고도는 고로 캠프와 비슷한 4,300m.
다시 돌아와야 하므로 마셔브럼 BC까지 가지 못하더라도
나와 사다 둘이서 출발했다. 그런데 축지법을 쓰는 우리 사다를 열심히 쫓아가다 보니 12시쯤 도착했다!
그리고 4시간 만에 달리듯 내려왔다!
스틱을 얼마나 쾅쾅 찍으며 내려왔는지 스틱이 고착되어 줄여지지 않았다.
스틱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으니 우리의 포터가 다가와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애쓰다 포기하고,
마을에서 가장 악력이 센 사람을 수소문 해 데려 왔다. 그는 역시 간단하게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나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할 정도로 퍼져 버렸다.
부족한 내공으로 무리하게 축지법을 따라 하다가 무협지에서처럼 내공이 진탕 되어 이 때부터 이까지 아프기 시작했다.
마셔브럼 빙하는 곳곳에 비경이 숨어 있었다. 발토로 빙하만큼 황량하지도 않았다.
몇시간 거리에 마을이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져간 망원경으로 아무리 보아도 마셔브럼(7821m)을 오를만한 루트가 이어지질 않았다.
이런 때문일까. 가끔 트레커만 찾을 뿐 수년 내에 원정대가 들어온 적이 없고 아직 미등봉이라고 했다.
다음날
그리고 거기에서 사태지역을 걸어서 넘은 뒤 다른 지프로 갈아타고 추수가 한창인 여러 마을들을 지나고,
시가르강을 따라 몇 시간 달리다가 12시쯤 스카르두 마셔브럼 호텔로 돌아왔다.
여기서 고로2에서 헤어진 창길 미연이와 근 1주만에 합류하고, 고용인과 포터들에게 임금과 팁을 지급하고,
불확실한 비행기를 탈 것인가 고생스런 버스를 탈 것인가 고민 고민하다가 모두가 싫어하는 버스여행을 결정하고,
역시나 랜트한 버스를 타고 고생 고생하며 이슬라마바드 크라운 호텔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한번 협상가 나지르와 지리한 협상에 들어갔다. 발단은 창길과 미연의 하행 카라반 비용.
가이드 꿀람은 계획에 없던 일이므로 내려갈 때 데려간 포터들에 대해 추가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했고,
창길이도 이를 인정하고 이미 지급을 했지만, 나는 하행이나 상행이나 이미 계획한 일정 내에서 일어난 것이고,
그 포터들은 이미 대행계약 내에서 비용을 치렀고, 일부 대원이 사정이 생겨 코스를 달리했다고
추가 비용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니 돌려달라고 주장했다.
몇 시간 논란 끝에 나지르는 가까스로 이를 인정했고(
가이드 꿀람은 협상하는 동안 내가 보기에도 애처롭게 목소리가 변하고 손까지 벌벌 떨었다.
이유는 이의가 있으면 스카르두에서 얘기할 일이지 이미 끝난 일을 자신의 고용인 앞에 제기해
뒤통수를 때리느냐는 것이었다. 사실 이미 스카르두에서 창길이에게 이는 이중 지급에 해당하니 돌려 받으라고 했지만
유난히 정에 약한 창길이가 다른 한가지는 얘기하고 이 결정적인 한가지는 말을 하지 못하고 미적거리다
여기까지 온 것이니 모양새로 보면 뒤통수를 친 셈이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선배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준 경비를 그런 식으로 의미없게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가이드 스스로 자초한 것이고 사이드 머니를 바라던 그도 좋다 말았다.
나는 대행사 사장에게 그는 우리에게 최선을 다했고, 커뮤니케이션 미스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말하며
화해의 악수를 나누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뒤통수를 많이 맞았다. 나지르와 처음 협상에서 이메일로 나눈 대행가격과 현지가격이
달라 한방 맞았다고 느꼈고(실제로 맞았는지는 모르겠다), 가이드 꿀람에게는 잔 펀치를 무수히 맞았다.
가령 그가 우리에게 현지 언어라고 하면서 가르쳐 준 것이 “가셔봉오, 인주? 멘주?” 였다. ‘가셔’는
가셔브럼의 ‘가셔’로써 아름답다는 뜻이다. ‘봉오’는 아가씨이고. ‘인주’는 긍정, ‘멘주’는 부정의 뜻이다.
그는 이 말을 우리 아가씨 대원들에게 가르쳐 주고 나서, 수십 아니 수백 번 써먹었을 것이다.
그가 심심하면 어느 아가씨를 지목하고 “가셔봉오, 인주? 멘주?” 하고 물으면, 그 아가씨는 기를 쓰고 “인주”라 하고,
꿀람은 “멘주”라고 하면서, 계속 ‘인주’ ‘멘주’ 하고 다투는 식이었다.
나는 아저씨이므로 내게 묻지는 않았지만 가만히 들어보니 다 큰 사람들이 “예쁜 아가씨! 맞아요? 안 맞아요?”하면,
서로 예쁘니, 예쁘지 않니 하며 다투는 꼴이 유치해 보였고, 우리는 엄연히 그의 소중한 고객인데도
우리 대원들에게 마치 '아가야, 까꿍~' 하며 우롱하는 것처럼 들렸다(한두 번 써먹었으면 말도 안 한다.).
그래서 콩고르디아 쯤에서 대원들에게 다 큰 성인들이 그런 놀이(?)를 즐기느냐고 말하니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하면서, 꿀람의 “가셔봉오, 인주? 멘주?”에 더 이상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
반응이 없자 꿀람도 신이 나지 않은지 더 이상 이런 놀이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중간에 고소증으로 내려간 미연이는 이런 사정을 모르고 있었다.
이슬라마바드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무료한 꿀람이 다시 “가셔봉오, 인주? 멘주?” 하자
미연이는 즉각 반응을 보이며 “인주”라 했고,
그는 오랜만에 보인 반응에 반색하며 “멘주” 라고 하면서 계속 서로 ‘인주’ ‘멘주’를 주고 받는 것이었다.
우리는 기가 막혀 둘이서 하는 꼴을 몇 시간이고 구경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고객을 가지고 노는 것이니 따지고 보면 뒤통수 때리기가 아니고 뭔가?
6년 만에 다시 찾은 파키스탄은 더 개방되고 합리적으로 변한 것 같았다.
국적 비행기(PIA)에서 그걸 실감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담요를 달라고 하면 통로를 꽉 채우도록 엉덩이가 큰 스튜디어스 아줌마가 휙~ 던져 주었다.
이번에 만난 승무원들은 친절하고 매너 있는 미녀 미남들이었다.
이슬라마바드에서 인천공항으로 돌아오는 길에 방콕에서 대한항공으로 갈아타야 했다.
인도를 지나 베트남 상공까지 잘 오던 PIA가 홍콩으로 기수를 돌렸다.
예정에 없던 일이라 여승무원에게 왜 홍콩으로 가느냐, 우리는 방콕에서 트랜짓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 비행기는 원래 홍콩을 경유해 방콕으로 내려 간다고 했다.
그녀는 우리의 항공권을 보고 시간을 계산하더니 시간이 빠듯할 것 같다고 하면서 기장과 상의해 보겠다고 말했다.
기장과 상의한 후 그녀가 내 놓은 해결책은, 1. 홍콩 엘리자베스 공항에 머무는 시간을 30분 줄이겠다,
2. 방콕 갈 때 비행기 속력을 20%정도 더 내겠다, 3. 대한항공 기장에게 연락해서 당신네 승객 6명이 여기에 있으니
좀 늦더라도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완벽한 해결책에 감동했다. PIA는 평속 800~1000킬로 정도의 비행속도를 1200킬로까지 올리며
방콕으로 날아갔다. 방콕에 도착하니 대한항공 현지 직원이 우리 이름을 쓴 피켓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방콕공항에서 어찌하다 미아가 될 뻔한 막내인 유리를 구원(?)하고, 쇼핑까지 하면서 넉넉하게
인천행 비행기로 갈아 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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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실내암장에 등록했다. 한 달만 등록하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아서 3개월 치를 등록했다.
돈이 아까워서라도 계속 다니게 말이다.
지난 번 연-팔 합동등반 때 이 필요성을 느꼈다. 미륵장군봉 체게바라길을 오르는데 좀 까다로운 곳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한쪽 발이 덜덜 떨렸다. 두려움이 이런 육체적 반응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 동안 몸을 단련시키는 데 게을렀던 것이 이런 두려움을 끌어들이는데 한 몫 했을 것이고 …
나는 그 때 왜 히말라야에 갔는가? 히말라야에 가서도 왜 여기 왔는가 라고 계속 자문해 보았지만
시원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대답할 자신이 없다.
이런 내게 누군가 산에 미쳐서 그런 것 아니냐고 말했다. 하지만 미쳤다고 하는 것만큼 손 쉬운 답이 없고,
또 이만큼 부조리한 답도 없다. 사람의 마음이란 끊임없는 의심과 번뇌로 흔들리기 마련이므로
미치는 것 말고 다른 출구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살인을 해도 미쳤다고 하면 관용되는 세상 아닌가.
답을 찾을 수 없으면 까짓 거 그냥 ‘그래! 나는 미쳤다’고 자위하면 편하다.
그리고 진짜 미치면 행복할 것 같기도 하다. 더 이상 번뇌가 없는 상태임으로.
이것은 ‘그래 나 꼴통이다. 어쩔래’ 하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어느 순간 나는 히말라야에 가기로 결정했고, 그 결정을 이행했을 뿐이다.
가기 전에는 몹시 가고 싶었는데 막상 가서 얼마쯤 지내다 보니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어졌다.
가족들이 보고 싶었고 그 동안 와이프에게 사랑한다는 감정을 표현하는데 너무 인색했음을 반성하게 됐다.
우리나라 산이 히말라야보다 백배 천배 좋다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울에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히말라야에 가고 싶어졌다.
스카르두에서 내가 집에 돌아갈 생각에만 빠져 있을 때,
창길이는 2년 뒤쯤 발토로 빙하 중간에 있는 트랑고를 등반하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다.
나는 만약 다시 간다면 아스꼴레에서 가까운 비아포 빙하의 라톡 BC, 쉽튼스파이어 BC,
K2 뒤쪽에 있는 사보아 빙하, 우리가 그냥 지나치기만 했던 사이초에서 야영하고 싶고,
그 위쪽 계곡을 따라 헤르만 불이 사라졌던 초골리사 BC에도 가보고 싶다.
곤도고로를 한 밤중에 캄캄하게 넘었지만 환한 대낮에 그 풍광을 구경하며 넘고 싶고,
가셔브럼 산군이 있는 아부르찌 빙하를 따라 중국
이런 희망을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그 곳을 가보게 될 것이고,
이러한 희망들이 적어도 내 인생을 지루하게 만들지는 않을 거라고 믿는다.
PS : 지금까지 히말라야를 여행하며 별 생각 없이 했던 말들, 웃어 보려고 가볍게 쓴 글들에
혹시 마음의 상처를 받은 대원이 있다면 너그럽게 용서해 주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히말라야의 바람에 씻기고 햇볕에 바랜 과거가 되었다.
정 잊지 못하겠으면 지금쯤 눈에 덮여 인적이 끊긴 거대한 발토로 빙하를 그려보면서
나쁜 기억들이랑 사납게 흐르던 크레바스 속에 던져 버리자.
그리고 새로운 여행을 꿈꾸며 살자. (끝)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잘 읽고 잘보았습니다^^..그림엽서내요!~~
고맙습니다. 얼굴들이 까맣지요. 모자를 쓰고 썬크림을 발랐지만 워낙 햇볕과 바람이 심해서요.
잘 보았습니다..대단합니다..부럽고요
하하 저는 내려올땐 콩코르디아에서 헬기타고 이슬라마바드로 직행!했었습니다...^^ 감사합니다...너무 재미있게 봤습니다...
마음속이 꽉 찬 느낌으로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