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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현 유적지 답심자료 스크랩 안동 이육사 문학관과 목재고택(穆齋古宅)
이장희 추천 0 조회 243 14.08.05 16: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퇴계 선생의 흔적을 따라 하계마을에서 차를 달려

 한참을 갔더니 이육사 생가터와  문학관이 나온다.

 

 

이육사 문학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불미골)

 

 

이육사 문학관은 안동시가 2000년 2월 이육사기념사업회를 결성한 뒤 이듬해 1월

 기념관 추진위원회를 만들고, 2002년 10월 착공하여 2004년 7월 31일 개관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17번이나 옥살이를 하며 민족의 슬픔과 조국 광복의 염원을 노래한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 선생과 관련해 흩어져 있던 자료와 기록을 한곳에 모아

독립정신과 업적을 학문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지상 2층 규모로 설립됐다.



 

이육사 묘소 가는 길

 

주요시설은 문학관 2층, 생가모형, 3개 마당, 육사 동상, 시비,

잔디광장, 오솔길, 청포도밭, 청포도 샘터 등이다.

문학관 1층에는 선생의 흉상과 육필원고, 독립운동 자료, 시집, 안경,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고, 조선혁명군사학교 훈련과 베이징 감옥생활 모습등을 재현해 놓았다.

시 체험 시설도 갖춰 놓았는데, 헤드폰을 쓰고 버튼을 누르면 시를 눈과 귀로 동시에 접할 수 있다.

이밖에 2층은 기획전시실, 영상실과 세미나실, 탁본 체험 코너, 시상(時想) 전망대 등이 갖춰져 있다.

개관시간은 3월에서 10월까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11월에서 2월까지는

한 시간 일찍 문을 닫는다. 매주 월요일, 설날, 추석은 휴관한다.

 

 

원촌마을 안내판

 

 

이육사 시비(국가 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이곳은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의 대표적인 저항시인인 육사 이원록(陸史 李源祿, 1904~1944)의

생가가 있었던 곳으로, 생가는 1970년대 안동댐 건설로 인해 만수선에 걸리면서 안동시 태화동

 포도골로 이전되었으며, 이후 1993년에 이 곳에 흙을 돋우고 시비를 세워 생가터를 기념하고 있다.

비는 포도 모양을 나타낸 일곱개의 화강암 위에 동판으로 만든 육사의 모습과 함께

 대표작 '청포도(靑葡萄)'를 새긴 비를 얹은 형태이다.

 

 

육우당 유허지비(六友堂遺墟址碑)

 

 

 

靑葡萄

           

                  - 李陸史 -

 

내고장 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靑葡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민족시인 이육사 유허비 옆에 조선후기의 문신인

목재고택이 있어 그곳으로 가보기로 하였다.

 

 

마당 입구에 있는 나무가 웬지 외로워 보인다.

 

 

목재고택(穆齋古宅)

이 고택은 조선 후기의 문신인 목재 이만유(李晩由, 1822-1904)가 살던 집이다.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형조참판(刑曹參判) 사은(仕隱) 이구운(李龜雲, 1681-1761)의 증손자인

 이만유는 철종(哲宗) 9년 식년시(式年試) 문과로 벼슬을 시작하여 승지(承旨)

 대사간(大司揀) 등을 역임하여 종이품(從二品) 가선(嘉善)에 이르렀다.

외직으로 영해도호부사시 선정을 택호를 영해댁(寧海宅) 또는 염감댁(令監宅)이라 했다. 

 

 

사랑채의 계자난간을 두른 쪽마루에

해서체로 '이헌(怡軒) 기쁘게 맞이한다' 는 편액이 붙어있다.

 

 

목재고택은 정면 5칸, 측면 6.5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ㄱ'자형의 안채와

 'ㄴ'자형의 사랑채가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ㅁ'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전면에 중문을 내지 않고 사랑채와 안채가 만나는 좌우 측면에 문칸을 설치하였는데

우측문이 주된 문이다. 사랑채 마당과 안마당이 독립적이고 효과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슬대문을 겸한 행랑채가 있었으나 수몰로 인해 유실되었다.

 

 

목재 이만유는 퇴계 선생의 11세 손으로 그의 딸은 독립운동을 위해

서간도로 떠난 임청각의 주인 석주 이상룡의 며느리이다.

그리고 서간도에서 맞이한 석주의 손주며느리가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의 저자 허은이다.

허은은 허형의 손녀로 허형은 독립의병을 일으켜 을지로까지 진군하다

 실패한 후 만주로 망명한 왕산 허위의 사촌형이다.

그 범산 허형이 바로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의 외할아버지이시다.

지금 목재고택은 이육사의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 여사가 지키고 계신다.

 

 

목재고택 옆에는 봉경 이원영 목사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봉경(鳳卿) 이원영(李源永) 목사 생가(안동시 문화유산 제49호:사은구장(仕隱舊庄))

이 집은 퇴계 이황의 14대 손인 이원영 목사(1886~1958)가  태어나 성장한 곳이다.

아버지 이관호와 어머니 김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혁신유림으로

5세부터 한문을 사숙하였고 봉성측량강습소(1909), 보문의숙(1912)을 졸업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예안면 3.1운동을 주도하여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복역 중 이상동 장로의 전도로 기독교 신앙에 입신하였다.

출옥 후 안동 인노절 성경학교(1925)와 평양 장로회신학교(1930) 제25회를

 졸업한 후 영주, 이산, 안기, 신세, 안동서부교회 등 안동지역 교회를 담임하였다.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에 대해 이원영은 1938년부터 해방이 되기까지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4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루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출옥 한 그는 1946년 "경안고등성경학교

(현 경안신학대학교 대학원)"를 설립하여 교역자 양성에 힘을 쏟았다.

또한 경안노회 노회장에 다섯 차례 피선되었고, 경안고등학교, 계명대학교 설립 법인이사를 역임하였다.

1954년에는 제 39회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으로 추대되어 신사참배 취소성명을 발표하였으며,

1957년 경안노회 공로목사 및 1958년 안동서부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정부에서는 예안면 3.1운동의 공로로 1980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으며, 1999년 11월 2일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 2묘역에 이장되었다.

 

 

넓게 펄쳐진 원촌마을의 들녘에는 수박을 많이 심었다.

 

 

우리는 마을 끝까지 한번 가보기로 하였다.

 

 

낙도강변을 따라 가는 길에는 담배을 많이 심었다.

 

 

가는 내내 낙동강변을 바라보며 그 절경에 탄성을 지르게 만든다.

 

 

왕모산 등산 안내도

위치: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1361년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으로 왔을 때

왕의 어머니가 이곳에 피난하였다고 하여 왕모산(王母山)이라 한다.

전설에 의하면 홍건적이 이곳까지 진격하여 공민왕이 위태롭게 되자

백마를 탄 노장수가 왕을 구하고 지렁이로 변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왕모산은 갈선대라는 바위가 유명하며 12개의 산봉을 거쳐야만

정상에 오를 수 있으며 정상에서 낙동강의 자연경관은 볼만하다.

특히 왕모산에는 공민왕이 피난하였을시 주민들이 쌓았다는 왕모산성이 있는데

 전체길이는 360m가 넘는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50m정도가 남아 있다.

성의 안에는 왕모당이라는 성황당이 있으며 당내에는 남신상(男神像)과

여신상(女神像)각1구가 있어 동민들이 매년 정월보름 동신제(洞神祭)를 지내고 있다.

 

 

왕모산으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사고예방을 위한 10분 스트레칭이 적혀 있다.

 

 

그리고  왕모정이 있어 산행을 마치고  쉬어가면 좋을 것 같았다.

 

 

계속해서 가다 보니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단천리에 도착하였다.

 

 

단천리 간이상수도 취수원 옆에 돌로 비석을 세워

이 물을 드시면 만수무강 소원성취 한다는 글이 적혀 있다.

 

 

 

 

길을 따라 가다보면 안동 영화예술학교가 나온다.

 

 

 

 

 

 

 

 

병풍같은 바위와 그 밑을 감돌아 흐르는 물이 마치 한폭의 동양화와 같다.

 

 

내살미는 원천에서 가장 큰 마을로 낙동강이 휘돌아 흐르고 있다.

이 마을 모래사장도 예안 14곳 가운데 8곡으로 아름다운 천사미(川沙美)라 불린다.

이 길을 따라 달리다 보면 낙동강과 주변절경을 마음껏 만끽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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