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산행
아름다운 산행이라니 무슨 산행인가 ?
209년 12월 11일 .. 날씨는 간밤에 비가 내려서인지 아침부터 잔뜩 흐린게 하늘이 심상치 않다.
광교산을 가야 하는데 암만해도 비가 올것만 같다.
국번없이 전화기에 131번을 눌러 기상예보를 들으니 오전에 강수확률 20~30% 란다.
그럼 된거다 , 그런정도면 산행은 충분하고 오히려 햇볕 밝은날만 못지않다.
어찌 산을 좋아 하는이가 마른날만을 기대하랴 !
난 산을 빠르게 다니지 못하는 습성이 있다, 힘도 들거니와 도저히 남들을 따라잡지 못하는 속도로 ㅎㅎ 인하여 미움도 ?
받고 눈총도 받을것 같아 아예 혼자 사진기들고 다니기를 좋아한다. 그게 무지 편해서 좋다.
수원에서 광교산을 오르는 코스는 실로 다양하다.
오늘은 문암골 - 백년수 - 형제봉 - 김준용장군 전승비 - 종루봉 - 토끼재 - 사방땜으로 내려올 계획으로 배낭을 짊어지고 걸
었다.
문암골 그 외따르고 쓸쓸한 깊은 산중의 외딴집 마을 길은 마치 새봄처럼 질퍽대고 발이 젖었다.
등산로로 접어드니 더욱 운무(雲霧)가 심해 나뭇가지마다 영롱한 물방울이 달려 있는게 무척 보기 좋았다.
형제봉에 오른다 ... 형제봉의 모습은 보는 방향에 따라 다양하며 그 맛이 다르다.
단적으로 말해 형제봉의 가장 아룸답고 빼어난 모습을 볼려거든 수지쪽 신봉동 초입에서 바라 보아야 한다.
양재 - 동탄간 고속도로를 오가며 상행으로는 좌편, 하행으로는 우측으로 전개되는 형제봉의 모습은 마치 기상이 씩씩한
두 형제가 힘을 겨루고 서있는 모양처럼 젊고 패기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광교산쪽이나 종루봉쪽에서 바라보는 형제봉은 그저 평범한 산봉우리에 다름없이 보일뿐이라는것이다.
비가 오지도 않았는데 이렇듯 물방울이 맺혀 있다.
이런 날이면 마치 새봄의 날씨가 풀리는 계절을 연상하는 대목이 아닐수 없다.
아름답고 어여쁜 산새들이 지저귀며 야트막히 날며 나뭇가지 사이를 오간다.
일찌기 시인 김소월은 산유화(山有花)를 지어 산을 노래했는데 그 시어가 간단명료 하면서도 감칠맛 나는것이 과연
누대를 흘러가도 우리민족에게 아름답게 각인될 품격있는 시라 생각되어 흥얼거려 본다.
산에는 꽃피네
꽃이피네
갈 봄 여름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없이
꽃이 지네
그래 ... 온산이 이제 모두 낙엽만 가득하고 산새들도 쓸쓸한 겨울은 온거야 ~
한줄기 바람이 더욱 짙은 구름 뭉탱이를 산기슭으로 몰아붙이는 모양인지 사방이 더욱 괴괴하고 어둠컴컴했다.
가시거리가 짧아 저 밖으로 보이던 수지와 수원의 시가지 모습은 전혀 알수없는 세상인듯 감감하다.
형제봉에서 가뿐숨을 잠시 다스리고 나니 오히여 몸이 식어 추위를 느낄즈음 다시 그 멋진 산길을 걷는다.
산의 왼쪽은 수원의 하광교요 오른쪽은 용인땅 수지의 신봉동 서봉에 속하니 바로 저편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그 유명한 절터
서봉사지(瑞峰寺址)가 있고 또 현오국사탑비(玄悟國師塔碑)가있다. 어언 그곳에 다녀온지도 십수년이 되었구나.
그래, 이땅의 어느곳인들 역사와 전설이 깃들지 않은곳 있으랴 ! 그냥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 갈 뿐이지 ....
형제봉에서 양지재를 지나 종루봉으로 오르다 보니 저 유명한 김준용장군 전승비가 거기에 있었다.
아 ! 가슴이 뛴다.
이곳이 바로 이곳이 2백여년전 화성을 축성하던 번암 채재공 선생에 의해 바위 암벽에 김준용 장군의 전승을 기리는
문구를 암깍 시켰으니 내용인즉 이러하다.
丙子淸亂公提湖南兵(병자청란공제호남병) - 우측종서
忠襄公金俊龍戰勝地(충양공김준용전승지) - 중앙종서
勤王至此殺淸三大將(근왕지차살청삼대장) - 좌측종서
충양공 김준용 장군은 병자호란 당시 전라도병마절도사 로서 근왕병을 이끌고 서울로 향하던중 적세가 강성함을 알고 이곳
광교산 일대에 진을 첬다.
적장 청태종의 사위 앙고리 등 3명의 장수를 비롯하여 수많은 청나라 대군을 이곳에서 처죽이고 대승을 거둔곳 이라는 내용이
다
채재공 선생이 수원화성을 쌓을때 인근의 지리를 잘 아는이가 광교산 중턱 바로 이곳이 그 옛날 김준용장군이 청나라 대군과
크게 싸워 이긴곳이라는 말을 듣고 현장을 둘러보고 역사적 고증을 거쳐 바위에 새긴것이다.
어찌 공의 깊은 배려에 감읍하지 않으랴 !
이렇듯 첩첩산중에 아무런 군사적 이점도 없는 험준한 이곳이 어찌 격전장이 되었을까 ?
난 이렇게 나름대로 생각을 해 보았다.
10만이 넘는 청병은 남한산성을 에워싸고 있었고 송파,광주는 물론 판교,수지 일대가 모두 적의 판세에 들어 김준용 장군의
근왕병이 일시에 쳐 들어가기에는 무리였을것이고 수원 북방 경기대일대에 진을 치고 적세를 살폈을것이다.
이때 청군(淸軍) 역시 조선군이 광교산 기슭에 진을 쳤다는 급보를 받고 조선군의 후미를 돌아 급습을 하려 했던것이다.
적군이 군사를 수원남쪽 어디쯤으로 해서 기습해 온다면 개활지라 금방 포착될건 불문가지 ...
해서 청병은 풍덕천을 거처 산골로 접어들어 신봉동 서봉부락에서 광교로 넘는 산고개를 택했을것이다.
실로 교묘한 전법이다, 수지쪽에서 아무도 모르게 산을 넘는방법은 이것이 가장 최단거리요 비밀한 방법이다.
아마도 조선군은 형제봉 꼭대기에 척후병을 두었을것이고 청병의 움직임을 간파한 조선군이 바로 이곳에 매복을 했다가
쥐새끼 처럼 기어드는 청병을 몰살한 것이 틀림없다.
옛날의 전투는 대부분 이러한 점이 왕왕 있었고 또 그 방법이 유일하기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야 제몸 하나 움직이기 힘들고 어려운 험준한 산곡에서 어찌 양편의 대군이 몰려들어 사생결판을 냈을것인가?
저 진(秦)나라 백을병(白乙丙)과 서걸술(西乞述)이 진(晉)나라에 침공했을때 그 유명한 타마애, 낙혼간 등 험준하기 이를데
없는 산중에서 엄청난 매복에 걸려 수만대군을 모조리 죽인 사건이 있었다. 모두 매복작전이었다.
종루봉에서 계속 북진하면 광교산 정상이 나온다 ~ 바로 엊그제 올랐던터라 오늘은 이쯤에서 좌로 틀어 내려가리라.
오늘은 또 가보지 않았던 길을 따라 걸어 가리라 !
이정표를 보니 하광교 소류지 방면표시가 있어 그 길을 택했다.
어쩌면 산 꼭대기 그 높은 숲속에 이처럼 아름다운 운무가 드리울수 있을까
청산에 살리라
나는 수풀 우거진 청산에 살으리라
나의 마음 푸르러 청산에 살으리라
이봄도 산 허리엔 초록 빛 물들었네
세상 번뇌 시름 잊고 청산에 살으리라
길고 긴 세월동안 온갖 세상 변하였어도
청산은 의구하니 청산에 살으리라
김연준 선생의 이 시는 가곡으로 많이 불리워지고 있다.
비록 지금 이 계절이 노랫말 처럼 꽃피는 봄은 아니지만 산이란 이처럼 포근하고 아늑하니 어찌 산이 좋지 않단 말인가
하긴 산과 물을 읊은 시가 어디 한두수이던가 ~ 잊어버린듯 하던 옛시를 한번 읊조리며 산을 내려온다.
水澤魚龍國 (수택어룡국) 물은 고기와 용의 나라요
山林鳥獸家 (산림조수가) 숲은 새와 짐승의 집이러라
孤舟明月在 (고주명월재) 외로운 배와 밝은 달
何處是生涯 (하처시생애) 어느것이 나의 생애이던가
산이란 이렇게도 살갑게 닥아오고 사람으로 하여금 여유롭게 하는데 사람은 산에게 무얼 해 주었던가 ?
그저 나같은 인생이 있어 작은 한봉지의 흙이라도 메어다 어정진곳에 뿌려라도 보았던가 ?
아니었네 ... 한낱 바쁘게 돌아가는 세월 속으로만 달음질 쳐 달아나듯 올랐고 내렸을뿐 무엇하나 준것이 없었슴에
이제사 필부의 옹색한 마음을 고쳐 산을 사랑 할 마음이라네.
< 江村의 光敎山行記 >
첫댓글 삶이 묻어나는 시 를 보니 맘이 흐뭇허이~
허허 다녀 갔구먼 ^^
그대의 넉넉함이 묻어나는 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