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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한째 이야기, 아빠하고 나하고(3)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171)
[삽화-백소(白笑)]
어르신의 보호자인 따님, 강신희 간호조무사와 신돌석씨가 함께 만난 것은 일주일이 지난 저녁 시간이었다. 신돌석씨는 점심식사를 함께 할 생각을 했었다. 저녁 시간을 따로 내기도 그렇고, 간단히 점심밥만 함께 먹으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어르신의 딸이 굳이 저녁식사를 하자고 했다. 그 사람이 점심보다는 저녁을 함께하자는 명분은 강신희씨가 점심때 먹으면 시간이 별로 없어서 급하게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보다는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듯하였다.
먹자촌이 있는 동네에서 조금 외진 곳에 한정식집이 있었다. 그리로 오라고 하였다. 신돌석씨는 거기는 비싸고 가성비가 떨어지니 다른 데로 하자고 하였다. 그래서 만나기로 한 곳이 그 부근에 있는 옛날된장찌개집이었다. 신돌석씨도 가본 적이 있는데 맛이 괜찮았다. 전철역에서 10여 분 걸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주변에 음식점이 많았다. 신돌석씨는 이런 곳에 올 때마다 이 많은 집들이 어떻게 먹고 사나 하는 괜한 걱정을 하곤 하였다. 하지만 가보면 손님이 항상 있었다. 이제는 구석진 곳에도 사람들이 맛있는 곳은 찾아오는 모양이었다.
대한민국 어디를 가봐도 식당들이 줄지어 있는 곳을 쉽게 볼 수 있다. 신돌석씨가 어린 시절에 먹는 장사는 망하지 않는다는 어른들 말씀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던 것 같다. 먹는 장사는 시작하기가 어려울 뿐 그런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같으면 정 안 되면 자기네 음식 먹고 살아도 된다는 식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먹는 장사는 쉽게 망한다. 음식이 팔리지 않아도 문제이지만 그것보다 임대료를 견디지 못한다. 대한민국 자영업 중 특히 음식점의 상당수가 최저임금 이하의 수입을 번다고 한다.
사실 자영업자는 경제학적으로는 소생산자인지 몰라도 우리 현실에서는 노동자계급의 일원이다. 노동자가 퇴직하면 자영업을 하고, 자영업 하다 망하면 노동자가 된다. 자영업자에 대한 노동자들의 정책이 필요하다. 최저임금 문제로 노동자와 자영업자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자본가들의 전형적인 갈라치기 정책이다. 여기에 넘어가면 안 되는데 많은 자영업자들이 이에 속아서 그들의 의도에 따라 휘둘리고 있다. 그것을 극복할 대안은 노동자에게서 나올 텐데 아직도 노동자조직은 그럴 만한 역량이 안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신돌석씨는 평소에 했다.
신돌석씨가 그 식당에 도착하자 어르신 따님이 먼저 와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먼저 나누었다. 따님은 강신희씨 칭찬을 했다. 사실은 어르신이 여기 요양원이 처음이 아니라고 한다. 세 번째인데 앞에 두 군데서는 다 쫓겨났다고 한다. 운영자이든 요양보호사든 간호조무사든 어르신 같은 사람은 싫어하고 윽박지르기만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강신희씨를 만나서 어르신을 이해해 주고, 함께 있어 주려 하는 걸 보고 정말 감명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자기 가족처럼 생각하는 요양원 직원을 처음 봤다고 하였다.
역시 그렇게 진심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인정을 받는구나 하고 신돌석씨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어르신 따님이 신돌석씨도 칭찬을 했다. 기사님도 정말 좋은 성품을 지니셨다고 하였다. 대체로 서울까지 가서 진료해야 한다고 하면 기사들은 짜증부터 낸다고 하였다. 그런데 전혀 그런 기색 없이 어머니를 부축해 주고, 휠체어를 밀어 주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눈물이 날 지경이라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사실 아르바이트식으로 일하는 것인데 그런 칭찬을 듣자 괜히 머쓱해졌다.
조금 지난 뒤 강신희씨가 와서 음식을 주문했다. 어르신 따님이 여기를 와본 적이 있는지 옛날된장제육볶음이 맛있다고 하였다. 그것 3인분 시키자고 하였다. 그러니까 써빙하는 사람이 제육을 시키면 된장찌개와 청국장 중에서 하나를 주는데 무엇을 하겠냐고 하였다. 셋 다 거의 동시에 청국장을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셋 다 함께 웃었다. 셋의 의견이 일치한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였다. 어르신 따님이 술은 어떻게 하겠냐고 했다. 강신희씨는 자기는 술을 못한다고 하였고, 신돌석씨는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들과 술을 마셔도 되나 하는 생각에 머뭇거렸다.
어르신 따님이 이렇게 만났으니 막걸리라도 한 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어야 좋지 않겠냐고 하더니 더 이상 의견도 묻지 않고 막걸리를 주문했다. 그래서 막걸리를 마시기로 했다. 신돌석씨 일행보다 먼저 세 팀 정도가 들어와서 주문한 음식이 늦게 나오고 먼저 막걸리와 밑반찬이 나왔다. 밑반찬과 함께 제육을 싸먹을 쌈도 나왔다. 써빙하는 사람이 아마 사장인 모양이었다. 옛날된장으로 양념을 해서 제육볶음을 만든다고 설명하면서 좀 늦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는 벽면에 붙어 있는 방문객의 서명을 소개했다. 내로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다녀간 듯하였다.
[삽화-백소(白笑)]
저는 어렸을 때 일본 사람이 나쁘다는 건 들었지만 왜 그런 건지도 잘 몰랐어요. 사실 어른들은 심심치 않게 일본 사람 칭찬을 했거든요. 예의 바르다, 장인정신이 있다, 무슨 일을 하든 책임감이 있다 등이요. 그런데도 일본과 축구하면 일본은 이겨야 한다고 하고요, 가끔 어떤 어른들이 일제말기에 공출당한 이야기를 하고, 동네에서 똑똑한 사람치고 끌려가서 얻어 맞지 않은 사람 없다고 하더라구요. 차라리 인민군 치하가 나았다고 하면, 옆에서 어허 이 사람 큰일날 소리 하네 하고는 이야기가 중단되고는 했어요.
술을 못 마신다고 하던 강신희가 막걸리 반 잔쯤을 마시고는 말을 꺼냈다. 그런데 그렇게 친일파가 많은지 몰랐고, 그들이 해방 이후에 그런 악독한 일을 한지도 몰랐다고 한다. 어르신을 알게 되면서 많은 공부를 하게 됐다고 한다. 자기는 중학교밖에 못나왔는데 방송통신고등학교, 방송통신대학을 나와서 대학 졸업장이 있다고 하였다. 어려서부터 시를 좋아해서 방송통신대학 국문과를 갔다고 한다. 직장 다닐 땐데 참으로 어렵게 해서 7년 만에 졸업장을 땄다고 하면서 그것 하나는 자랑하고 싶다고 했다.
신돌석씨는 강신희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듯하였다. 중학교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공장에 들어갔다가 다니던 교회에서 하는 야학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검정고시를 공부해서 대학에 가게 하는 곳이었는데, 거기서 배우면서 방신통신고등학교를 가게 되었다고 한다. 야학에서 어느 대학생 선생님이 백석의 시를 가르쳤는데, 너무 좋더란다. 그래서 나도 국문학을 공부하고 시인이 돼보자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백석이 북한에 있어서 금지된 시인이었다는 말을 듣고 대단히 충격적이었다고 한다. 그때 생각 때문에 어르신 아빠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 엄마 이야기 들으면 할아버지가 젊어서 일본 건너가서 고학으로 학교를 다녔다고 해요. 그래서 돌아와서 고향에서 야학을 하다가 독립운동을 비밀리에 했대요. 할아버지는 엄마한테 일본 사람 미워하지 말라고 하셨대요. 일본에서 우리 독립운동을 도와주는 일본인들이 많다고요. 일본 사람을 미워할 게 아니라 일본군국주의를 미워해야 한다고 그랬대요. 일본 사람보다 진짜 나쁜 놈들이 친일파라고 하셨대요. 엄마와 할아버지가 잡혀들어갔을 때도 고문하는 놈들이 조선 사람이라는 거예요. 기가 막힌 일이지요.
할아버지는 미국에 대해서도 반대했대요. 친일파를 다시 살아나게 한다는 거지요. 하지만 미국 사람은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했대요. 엄마 말로는 외삼촌, 우리 친아빠가 그랬는데 국회프락치 사건 등도 평생을 바쳐서 연구하고 조사해서 우리에게 알려준 사람이 미국인이래요. 그레고리 뭐라고 하던데 잊었어요. 일본인이냐 미국인이냐 조선 사람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제국주의, 군국주의, 친일파 이런 것들이 나쁘다는 이야기지요. 나는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엄마가 골백번도 더 말씀하셔서 아주 머리에 박혀 있어요.
어르신 따님이 이야기를 하고는 호호 웃음을 웃었다. 이야기가 조금 나아가는 것 같자 강신희는 입을 다물었다. 사람이 신실한 만큼 자기가 확신이 들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듯하였다. 간호법 거부권 행사에 대해서 아무 말하지 않는 것도 그에 대해 다른 생각이 있다는 것보다 확신이 들지 않아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그런 자세를 보이니 더 신뢰가 갔다. 자기가 소화하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떠벌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자기가 이해하고 확신하는 만큼 이야기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자세인가?
우리 엄마는 정말 불쌍하게 사신 분이에요. 열 살 조금 넘어서 경찰서, 그것도 그 지독한 일본제국주의 경찰 고등계에 끌려가서 말못할 고문을 당하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이를 못 낳아요. 결혼을 한 번 했는데 소박을 맞았어요. 보다 못한 우리 친아빠가 아들 둘, 딸 셋이었는데 가운데 딸인 저를 엄마한테 보내서 함께 살게 한 거예요. 이런 엄마의 억울한 삶이 훈장은 못 받아도 사람들한테 이해는 받아야 되는 것 아니에요. 그런데 오히려 귀찮은 대상이 된다면 정말 이런 세상을 제대로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나요?
어르신 딸의 말에 신돌석씨는 문득 궁금해졌다. 어르신은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일까? 그래서 물어 보니 할아버지는 월북 혐의가 있어서 못 받았고, 어머니는 증거가 없다고 하면서 인정해주지 않더란다. 신돌석씨가 보기에 어르신의 아버지는 아마도 우파민족주의 내지는 중도좌파 정도의 이념을 갖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북으로 갔다는 이유만으로 이전의 독립운동 경력마저 다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것이 자의로 간 것인지 끌려간 것인지도 불분명한데도 말이다. 아니 자의로 갔어도 이전의 독립운동을 한 사실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삽화-백소(白笑)]
우리 엄마가 나라에서 보상을 못 받으니 나라도 정성을 다해서 돌봐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까지 엄마가 나를 키워주었는데도 사실 제대로 효도를 못했어요. 치매가 심해지시고 내가 직장에 나가야 하니 집에 혼자 계시게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요양원에 들어가시게 했는데 가는 곳마다 퇴짜를 맞으니 얼마나 속상했겠어요. 그래도 간호사님과 기사님 같은 분을 만나서 지금은 마음이 아주 편해요. 엄마도 두 분한테 많이 의지하시는 것 같고요. 그래서 오늘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해 드리겠다고 한 것이에요.
이 말을 듣자 신돌석씨는 당황스러웠다. 사실 자기야 강신희와 함께 둘이라고 말을 들을 것은 전혀 아니었다. 강신희야말로 지난 3년 동안 노력을 해서 어르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고, 자기야 알바로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일 뿐이지 않겠는가? 그것도 몇 번 되지도 않았다. 아마도 강신희한테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곁다리로 같이 하는 것이라고 신돌석씨는 스스로 판단을 했다. 어쨌든 강신희가 고마운 사람인 것은 틀림없는 일이고, 고마운 것을 고맙다고 생각하고 표현할 줄 아는 어르신 딸도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그랬어요. 할아버지가 반민특위 특경대를 할 때는 너무 바빠서 제대로 이야기도 못 나누었는데 습격당해서 와해되기 직전에 하루 일찍 들어온 날이 있었대요. 할아버지의 엄마에 대한 사랑은 지극했나 봐요. 진짜 꽃밭을 같이 가꾸고 그랬다지요. 당신께서는 아무것도 안 한 거나 다름없다고 하시면서, 만주 벌판에서 동상 걸린 손가락 발가락 잘라가며 싸우다가 돌아가신 분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냐고 했대요. 그런 분들을 생각해서라도 친일파를 마지막 한 놈까지 색출해서 처벌하는 것이 아빠 임무이니 그렇게 이해하라고 하셨나 봐요.
그런데 뜻을 못 이루고 오히려 친일파들한테 잡혀들어가는 상황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어르신은 젊었을 때 그 이야기를 따님에게 하면서 내가 지금이라도 친일파 잡는 일에 나서야 하는데 배우지 못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줄 모르니 안타깝기만 하다고 했단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신돌석씨는 이 말을 들으면서 언젠가 조철구가 한 말이 생각났다. 우리가 친일파를 미워하는 힘은 종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다 바쳐 싸운 선열들이 이룬 성과라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친일파, 일본제국주의를 논리가 아니라 감성으로 알고 미워하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요즘은 토요일이면 광장에 나가요. 거기서 친일파 때려잡자는 노래를 부르고, 연설을 들으면 힘이 나요. 정권 바뀌고 친일파가 숨어 있다가 나타난 것 같으니 얼마나 열불이 나던지요. 엄마가 이 상황을 아시면 정말 못 견디실 텐데 하는 마음에 나라도 뭔가 해보자고 나가요. 친일인명사전 만들 때는 엄마가 이름을 안 밝히고 꽤 많은 돈을 내셨어요. 나도 엄마가 하는 것 보고 그런 일이 중요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요. 어쨌든 나도 이제 나이가 적잖게 들었지만 젊은 신독립군이 있으니 마음이 든든해요. 신독립군가를 부를 때는 정말 힘이 솟아요.
생각지도 못했던 따님의 이야기에 신돌석씨는 한편 고무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 우려스럽기도 했다. 강신희의 눈치를 살폈다. 강신희는 별다른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진짜 술을 못 마시는지 반 잔 마신 뒤에는 입에 댔다 말았다만 반복하는 듯했다. 얼굴은 금세 붉어졌다. 그에 비해 어르신 따님은 몇 잔을 거푸 마셨다. 신돌석씨는 여전히 막걸리 두 통쯤은 앉은 자리에서 마셨다. 어르신 따님은 신돌석씨에게 술 잘 하신다 하면서 잔이 비워질 때마다 따라주었다. 어쩌다 만났는지 아무튼 매우 기분이 좋은 자리였다.
할아버지가 두 번째 들어가셨을 때 엄마가 경찰서 보호실에 면회를 갔던 모양이에요. 할아버지가 경찰들한테 많이 맞았던 것 같았대요. 그때 할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평생 잊히지 않는다고 했어요. 할아버지는 우리가 잊지 않고 대를 이어서라도 진리를 전해주고, 많은 사람들이 알게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고 하셨대요. 이어지는 것, 널리 알게 하는 것, 그게 정말 중요하지요. 엄마는 젊은 사람들이 민주화를 이야기할 때 친일파 청산을 함께 주장하는 것을 보고 할아버지 말씀이 옳았고, 결국 그렇게 될 거라고 믿게 되었대요. 엄마가 조금이라도 더 사셨으면 좋겠어요.
말을 마친 따님의 눈가가 붉어졌다. 신돌석씨는 따님의 말에 숙연해졌다. 식사를 마치고 술도 거나해진 뒤에 헤어지면서 신돌석씨는 정말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지 널리 알리고, 이어가기만 하면 우리는 이길 것이다. 그것은 친일파는 역사의 악이고, 친일 청산은 역사의 순리이며 정의이기 때문이다. 신돌석씨는 두 손을 불끈 쥐면서 허공을 향해 휘둘렀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에 자유 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신독립군가가 저절로 입에서 흥얼거려졌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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