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21 금요성령집회 / 조영창 목사
말씀 : 요한복음 4:46-54
제목 : 말씀을 믿고 가더니
(53절)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신 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54절 말씀에 보면, '두 번째 표적'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두 번째 표적 이것은, 예수님께서 유대 갈릴리 가나로 오신 후에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신 그 일이 두 번째 표적에 해당된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표적이라는 말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그런 특별한 말입니다.
이 표적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일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표적이라는 말은 좀 특별한 의미와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표적을 본 사람이 그 표적을 보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 영생을 누리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또 구원을 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얻게 하시려고 표적을 행하셨다 그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두 번째 표적이 나옵니다.
그럼 첫 번째 표적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오늘 본문 말씀 46절에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아멘!
이 말씀에서 보듯이, 첫 번째 표적은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했던 그 사건이 바로 첫 번째 표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 소문을 듣고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만나러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 왕의 신하의 집은 가버나움에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그 거리가
직선거리로 26km~32km 정도까지 된다고 이야기하는 분도 있고, 또 34km 정도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 거리가 걸어서 도보로 8시간에서 9시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또, 말을 타고 가면 한 3시간 정도 걸리는 그런 거리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가버나움의 해발 고도는 갈릴리 호수 옆에 있어서 마이너스 200m 정도가 되고,
또 가나는 산지에 있었기 때문에 해발 고도가 300m 정도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갈릴리 가나와 가버나움 사이에는 고도 차이가 500m 정도가 되었고,
거리는 대략 한 30km 정도 되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만나러 그 먼 거리를 그렇게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지형은, 대략적으로 구릉이 많고 또 언덕이 많은 지형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버나움에서 갈릴리 가나까지 오려면 힘든 길을 걸어왔다, 또 아니면 말을 타고 왔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이 왕의 신하가 이렇게 어렵게 힘들게 갈릴리 가나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러 온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 왕의 신하는 그 당시에 갈릴리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의 고위 관리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세상적으로 보면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사람이고, 또 경제적으로 보더라도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런 왕의 신하가 목수였던 예수님께 찾아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속된 말로 놀던 물이 달랐는데, 이 놀던 물이 달랐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입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인데, 그 특별한 이유는 46절과 47절 말씀에 보니까
이 왕의 신하의 아들이 오랫동안 시름시름 앓다가 이제 거의 죽게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자기 아들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기 때문에,
너무나 급했기 때문에 그 먼 길을 걸어서 아니면 말을 타고 그렇게 오게 된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걸어서 온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분도 있고,
왕의 신하의 지위를 생각해보면 아마도 말을 타고 왔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거리가 결코 짧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들을 살리고 싶다는 마음에서 너무나 그 마음이 강했기 때문에
그 생각만 가지고 가버나움에서 갈릴리 가나까지 단숨에 달려온 것입니다.
코로나 기간에 제가 겪었던 일이 있습니다.
저희 집의 둘째 아이가 3살이 되었는데 이 아이가 아파트 문 현관 앞에서 넘어졌습니다.
대부분 옛날 아파트에는 우유 투입구가 있는데, 대부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깊은 긴 핀으로 철사핀으로 고정해 놓은 집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희 집도 그렇게 되어 있었는데, 아이가 안쪽에서 넘어졌기 때문에 정확하게 아이의 인중으로 철사 핀을 박은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지혈을 했는데 피가 멎질 않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피가 흘러서 도저히 안돼서 근처에 있는 큰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습니다.(사실은 차를 타고 간 것이지요)
그런데 그 당시에 그 병원은 코로나19 중증응급진료센터로 지정돼 있어서 이 아이를 치료해 줄 의사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아이의 얼굴에 흉터가 남지 않으려면 성형외과 의사가 꿰매줘야 된다고 병원에서 이야기하면서도,
성형외과 의사가 없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병원을 한 군데 소개해 주는데 부천에 있는 큰 병원을 가면 그곳에 의사가 있을 수도 있다
(있다도 아니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보호자가 직접 전화를 해서 그 병원에 의사가 있는지 물어보고,
그리고 나서 그 병원으로 옮길 수 있으면 옮기면 좋겠다 이렇게 소개 아닌 소개를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해서 물어보니까 또 그 병원에서도 확답을 하지 않습니다.
일단 와 보시라고 이야기하고, 그런데 혹시 의사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 일단 와 보시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한 35분에서 40분 되는 거리를 운전하면서 갔는데, 그 병원에서 다행히 의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의사를 만나기까지 또 1시간 이상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의사를 만나고 나서 이야기를 듣고 또 꿰매는 봉합 수술하게 됐는데,
그 수술을 할 때까지 또 보호자 한 명만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저는 주차장에서 아이의 봉합 수술이 끝날 때까지 1시간 넘게 밖에서 기다렸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흉터가 남아 있었는데, 흉터가 남은 그 모습을 보면서 참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더 많이 기억나는 순간은 언제였던가 하면 아이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일도 아닌데,
그냥 아파서 우는 아이를 차에 태우고 병원을 찾아다니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의사가 없으면 어떻게 할까, 치료해 줄 의사를 만나야 하는데
내가 다른 큰 병원으로 가야 하는데 너무 내가 편하자고 가까운 데로 온 것 아닌가,
또 조심성이 없었던 아이를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또 내가 좀 더 잘 지켜봤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이런 마음도 들고 자책도 하게 되었습니다.
또 차 안에서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병원을 이곳저곳 옮겨 다녔습니다.
아이의 인중을 지금도 가끔 쳐다봅니다. 오늘 설교 준비하면서도 일부러 한번 쳐다보고 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때 일들이 너무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제 경험은 사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이 아버지와 비교할 게 못 됩니다.
왜냐하면, 제가 경험했던 것은 그냥 꿰매는 수술 정도지만,
이 본문 말씀에 나온 아버지가 갖고 있는 아들을 향한 마음은
곧 죽을 수밖에 없는 그 간절한 마음, 안타까운 마음, 급하고 다급한 마음으로,
절망적인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기 때문에
가버나움에서 갈릴리 가나까지 한걸음에 달려오게 된 것입니다.
47절에서 예수님께 이렇게 간청을 합니다.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왕의 신하는 오늘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을 모시고 갈릴리 가나에서 가버나움의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래야 아이가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발 가버나움으로 내려오셔서 아들의 병을 고쳐주십시오." 그렇게 간청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한 번 간청한 것 같은데, 오늘 이 본문 말씀에 한 번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끈질기게 예수님한테 간청하고 사정하고 졸라댔다"
그렇게 원래 헬라어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의술이나 다른 어떤 방법으로 살릴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아들을 살릴 방법이 예수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 아버지가 체면이나 자존심 다 내려놓고 예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이 아버지의 간청을 들은 예수님이 48절에서 그를 책망하시면서 이렇게 꾸짖습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하는 아버지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시고
'어떻게 이렇게 꾸짖고 책망 하실까'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 왕의 신하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지만
사실은 그 주변에 모여 있던 유대인들에게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너희"는, 그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 또 왕의 신하를 포함해서 주위에 있는 많은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에게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너희는 도무지 믿지 아니할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합니다.
표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큰 능력을 이야기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기사는 어떤 것인가? '경이로운 일', '불가사의한 사건'을 기사라고 얘기합니다.
표적과 기사는 짝을 이루어서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한마디로 기적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예수님은
[지금 왕의 신하와 유대인들이 갖고 있었던 믿음이 무엇인가? - 기적을 추구하는 믿음이다.]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이렇게 꾸짖고 책망하는 말을 들었는데 왕의 신하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49절 말씀입니다.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왕의 신하는 다시 한번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아이가 죽으면 가버나움으로 예수님이 오셔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아이가 살아있을 때 예수님을 모시고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살려 달라고, "내려오셔서 아이를 살려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비록 자신을 꾸짖고 책망하셨지만, 예수님을 아들이 있는 곳으로 모셔가는 걸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간청을 듣고 예수님이 왕의 신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너의 아들이 살아 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 말씀을 들은 왕의 신하는, 그 말씀을 믿고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왕의 신하는 지금 예수님을 모시고 가려고 가버나움에서 갈릴리 가나에 왔는데,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가라"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예수님 곁을 떠나갑니다.
예수님이 아들을 위해 하신 말씀, "너의 아들이 살아 있다." 이 말씀만 가지고 가버나움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라 너의 아들이 살아있다." 이 말씀을 하신 시간이 52절에 나오는데 일곱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의 시간 계산법에 따르면 일곱 시는 오후 1시를 가리킵니다.
왕의 신하가 가버나움으로 가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을 만나러 온 종들을 도중에 만나게 됩니다.
그들로부터 "당신 아들이 살아 있습니다"라는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그런데 왕의 신하는 종들에게 "언제 아들이 살아났느냐?" 묻습니다.
종들이 얘기합니다. "어제 일곱 시에 아들에게서 열병이 떠나갔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종들이 주인인 왕의 신하를 만난 시간이 오후 7시에서 10시 사이일 것이다 이렇게 추측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만약 이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걸어서 가버나움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면,
대략 이때 쯤 종들을 만났을 것이다 이렇게 추측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왕의 신하가 신분도 있고 여러 가지 상황을 봤을 때,
말을 타고 갔다면 그 시간이 더 짧았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의 시작을 언제부터 보느냐, 일몰 시작한 후부터 그 다음날 일몰 시작 전까지를 하루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로 치면, 오늘 오후 1시에 예수님한테 아들이 나았다는 말씀을 듣고
오늘 저녁 7시에서 10시 사이에 아들이 살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 유대의 시간 계산법에 따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시간에 고침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종의 말을 듣자마자 아버지가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너의 아들이 살아 있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시각에, 그 시간에 죽어가던 아들이 낫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왕의 신하 뿐만 아니라 그의 종들도 주인의 아들이 낫게 된 모든 과정을 다 알게 된 것입니다.
가버나움의 집에 함께 살던 신하의 가족들도 이 과정을 다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왕의 신하와 그의 온 집안 그의 모든 종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것이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믿는다"라는 말이 3번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믿는다는 말을 통해서 우리에게 믿음의 3가지 단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믿는다는 말은 48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 속에 믿는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말은 표적과 기사를 추구하는 믿음, 기적을 추구하는 믿음입니다.
인생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 우리는 예수님께 나옵니다. 예수님께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는 기적을 추구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절박하고 긴급하고 다급한 순간에 우리는 예수님을 찾습니다. 우리에게 표적과 기사를 구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왕의 신하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체면이나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아들을 살리는 것이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버나움에서 갈릴리 가나까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자, "예수님, 가버나움에 내려오셔서 제발 제 아들을 살려주십시오."
그렇게 끊임없이 끈질기게 간청하고 사정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책망을 듣습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결코 믿지 아니할 것이다" 이런 말씀을 들어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왕의 신하와 유대인들을 책망하신 꾸짖으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왕의 신하가 더 깊은 믿음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깊은 믿음이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이 신하에게 요구하신 더 깊은 믿음은 우리가 50절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50절 말씀에는 두 번째로, "믿는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5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아멘!
아들을 살리려고 예수님께 왔던 아버지가 예수님을 떠나갈 때 그가 보여준 믿음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너의 아들이 살아 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실 헬라어 원문에는 이 말씀이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너의 아들이 살아 있다." 말 그대로 "너의 아들이 지금 살아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많은 성경에서 어떻게 번역을 하고 있냐면,
"너의 아들이 살아날 것이다." 미래형으로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지금 왕의 신하는 아들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죽어가고 있는 아들을 보고서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때는 휴대폰도 없고 전화도 없는 시대입니다.
자기가 아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들을 가버나움에 있는 집에서 만날 때 뿐입니다.
"너의 아들이 살아 있다." 이 말씀은 아버지에게는 장차 장래에 일어날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왕의 신하가 걸어서 가버나움으로 돌아갔다고 가정하면
최소 6시간이 흐른 후에야 아들의 병이 낫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종들에게 들어서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왕의 신하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은 앞으로 이루어질 약속의 말씀,
다르게 표현하면 또한 예언의 말씀이다 그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왕의 신하의 믿음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기적을 추구하는 믿음에서 이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믿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를 추구하는 믿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직접 모시고 가버나움에 가야만 아들이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왔습니다.
그는 예수님도 의사처럼 직접 사람을 만나서 그 병을 진단하고 고쳐주셔야만 되는 그런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만 하셨습니다. "가라, 너의 아들이 살아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믿음, 그 말씀의 능력을 믿고 순종하는 믿음,
예수님이 직접 오시지 않아도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믿음,
이제 그 믿음을 왕의 신하(죽어가는 아들의 아버지)는 갖게 된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만 가지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요한복음에서는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이다" 그렇게 말씀해 줍니다.
요한복음 20장 29절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의심하는 도마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아멘!
예수님의 말씀에 능력을 믿는 사람은,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은, 기적이 지금 당장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믿는 믿음입니다.
아버지는 아직 아들의 병이 나았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채로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그는 단지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믿었고, 그 말씀에 순종했고, 예수님을 떠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믿음은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이요,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더 깊은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잘 보여주는 찬양이 있습니다.
새찬송가 545장, ♬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1절 가사는 이렇게 됩니다.
♬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나가세 나가세 의심 버리고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눈과 귀에 아무 증거 없어도~♬ 아멘!
예수님은 우리를 더 깊은 믿음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의 능력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믿음,
그것이 바로 더 깊은 믿음이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에게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장면이 바로 이 장면입니다.
[가라, 너의 아들이 살아 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말씀하셨는데,
이 말을 듣고 아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 집으로 돌아가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들의 열병이 떠나갔다는 말을 듣기까지 최소 6시간이 걸렸을 것이라고 가정하면
이 아버지는 그 6시간 동안 어떤 마음으로 집으로 내려가고 있었을까?
예수님을 가버나움까지 모시고 가서 아들을 살리려고 여기에 왔는데,
예수님은 같이 가주시지 않고 "가라, 너의 아들이 살아있다" 이 말씀만 해 주시고 가라 하셔서
이 말씀만 가지고 돌아가고 있는 아버지의 그 마음이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계속해서 제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지 않았다면, 그 말씀대로 될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다면,
그의 발걸음은 예수님을 만나러 올 때보다 더 절망적이고 더 비참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아버지는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었고, 가버나움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아직 아들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알지 못했지만, 그래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였지만, 그래서 복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왕의 신하에게 믿음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나아와 바라고 원했던 간절한 소원과 바람은 이루어졌습니다.
죽어가는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 앞에 온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러 온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표적과 기적을 구하는 믿음으로 아들을 살린 것이 아닙니다. 출발점은 표적과 기사를 구하는 믿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을 살린 것은,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의 능력을 믿고 순종하는 믿음으로 아들을 살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에서 너희 아들이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30km 이상이 떨어진 가버나움에서 그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죽어가던 아들의 열병이 떠나갔습니다.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거리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만 하면, 거리에 상관없이 그곳이 어디든 간에
그 말씀은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세 번째로, 믿는다는 말은 53절에 나옵니다.
이 믿음은 온 가족과 종들이 영생을 얻도록 예수님을 증거하는 믿음입니다.
(53절)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아멘!
예수님이 말씀하시므로 아들의 병이 낫게 하셨다 그 소식이 온 집안에 전해졌다는 것은
우리가 그냥 말씀을 읽어도 바로 알게 됩니다.
갈릴리에서 가버나움으로 오는 길에 왕의 신하와 종들이 만났고, 그 과정을 다 이야기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데 아이의 병이 나았다." 그것을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왕의 신하는 그의 온 가족과 다른 모든 종에게도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을 확신에 차서 열정적으로 기쁨으로 전했을 것입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몸소 여기까지 오실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말했을 것입니다.
자기도 미처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 약속의 말씀을 듣고,
내가 그 말씀에 순종해서 돌아오는 길에 아들이 살아났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예수님은 말씀만으로도 아들을 살려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을 내가 알게 되었다고 가족들과 종들에게 그렇게 전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자기와 그의 온 집안이 다 예수님을 믿었다] 그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 믿음은 결국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믿음으로 변하게 됩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더 깊은 믿음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표적과 기사를 추구하는 믿음이 우리가 보통 믿음의 출발점이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매일매일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믿음이 온 가족을 구원하는 믿음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표적과 기사를 일으켰다는 것을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왕의 신하의 믿음을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변화시키셔서 아들을 살려주신 이유와 목적이 분명히 있습니다.
왕의 신하가 간절히 원했던 바람과 소원을 하나님이 들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왕의 신하의 믿음을 바꾸셨어요. 변화시키셨어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표적과 기사를 기적을 베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직접 우리 집에 모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그것을 느끼고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 함께 가시면 하나님이 같이 가시는 것이요 하나님의 능력이 같이 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는 길이고
결국에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같이 갈 때에, 그 약속의 말씀이 내 삶을 다스리고
내 삶을 이끌어갈 때 그 약속의 말씀은 능력이 됩니다. 기적을 일으킵니다. 표적을 보여 주십니다.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만듭니다.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구원자이심을 알게 합니다.
표적은 이단 사상에 빠트리지 않습니다.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이 더 깊은 믿음이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를 추구하는 믿음에서 출발하셔도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시길 원합니다.
그 말씀이 여러분의 삶 속에, 여러분의 문제와 아픔과 눈물을 치료하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 일을 여러분들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다 함께 "나 약해 있을 때에도" 찬양하시면서 우리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겠습니다.
♬ 찬양
나 약해 있을 때에도 주님은 함께 계시고
나 소망 잃을 때에도 주님은 내게 오시네~
나 시험 당할 때에도 주님이 지켜 주시고
나 실망 당할 때에도 주님이 위로 하시네~
주님만이~ 내 힘이시며~ 오 주님만이 날 도우시네
오 나의 주님 내 아버지여~ 오 나의 주님 내 사랑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