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유는 오군(吳郡) 사람이다. 처음에는 도생(道生)의 제자가 되어 스승을 따라 여산(廬山)으로 갔다. 스승이 죽은 후에는 임천(臨川)의 군산(郡山)에 은거하였다. 이어 새로 번역한 『승만경』을 보자, 책을 펼쳐 탄식하였다.
“돌아가신 스승께서 내신 옛날의 이해는 어둡기가 옛날 번역한 경과 똑같았다. 다만 세월이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 경이 새로운 이해를 거친 뒤에야 새로 결집하여 번역하였으니, 자못 슬픈 일이다.”
이로 인하여 『승만경』에 주석을 달아 스승이 남긴 유훈을 거듭 베풀었다. 이 주석서는 모두 다섯 권이 있었다. 그러나 글은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전송(前宋)의 문제(文帝)가 혜관(慧觀)에게 물었다.
“돈오(頓悟)의 내용을 다시 누가 익혔는가?”
혜관이 대답하였다.
“도생의 제자인 도유입니다.”
이에 곧 임천군에 조칙을 내려, 도유가 서울로 나왔다. 서울에 이르자 곧 맞아들여 궁중에 들게 하였다. 교리 이해를 공부하는 승려들을 크게 모아놓고, 도유에게 돈오에 관해서 진술하여 펼치게 하였다.
당시 말재주를 다투는 무리들로부터, 돈오에 관련된 질문이 바꾸어가며 일어났다. 도유는 이미 생각을 쌓아 현오한 경지에 들어가 있었다. 또한 가르침의 근원에 바탕을 두었다. 그러므로 기회를 타서 날카로움을 꺾고, 답변하면 반드시 상대방의 칼날을 꺾었다. 이에 황제는 책상을 어루만지며 통쾌하다고 칭찬하였다.
효무제(孝武帝)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더욱 찬탄하고 존중하였다. 곧 칙명으로 신안사(新安寺)로 가서, 절의 법도를 다스리는 불법의 주인[鎭寺法主]이 되었다.
황제는 늘 찬탄하였다.
도생은 홀로 우뚝 솟아 빼어나게 비추었다면
도유는 곧바로 말고삐를 잡아 홀로 올라탔다.
훌륭하게 스승을 밝혔다고 일컬을 만하니
그 어떤 아름다운 소리도 덧붙일 것이 없구나.
전송의 원휘(元徽) 연간(473~477)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1세이다.
∙도자(道慈)
그 후 예주(豫州)에 도자가 있었다. 『유마경』과 『법화경』에 빼어나 도유의 논리를 이어갔다. 도유가 지은 『승만경』의 주석본을 간추려 정리하여 두 권으로 만들었다. 지금 세상에 행한다.
∙혜정(慧整)ㆍ각세(覺世)
이 무렵 다보사(多寶寺)의 혜정과 장락사(長樂寺)의 각세도 모두 명성과 덕을 나란히 하였다. 혜정은 특히 3론(論)에 정밀하게 뛰어나 학자들의 종사가 되었다. 각세는 『대품경』과 『열반경』에 빼어나 불공가명(不空假名)에 대한 논리를 세웠다.
32) 석혜통(釋慧通)
혜통의 성은 유(劉)씨며 패국(沛國)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마음이 시원하게 트이고, 우뚝한 기개가 텅 비고 그윽하였다. 치성사(治城寺)에 머물렀을 때 매양 털이개를 한 번 흔들면, 그때마다 높은 이들이 탄 가마가 거리를 메웠다.
동해의 서담지(徐湛之)와 진군(陳郡)의 원찬(袁粲)은 스승과 벗의 예로써 공경하였다. 효무황제는 총애와 봉록(俸祿)을 도탑게 더하였다. 칙명으로 회릉(悔陵)과 소건평(小建平) 두 왕의 벗으로 삼았다.
원찬(袁粲)이 『거안론(蘧顔論)』이란 책을 지어 혜통에게 보여주었다. 혜통은 어려운 질문을 주고받았다. 그 글이 세상에 알려졌다.
또한 그는 『대품경』ㆍ『승만경』ㆍ『잡심론』ㆍ『아비담』 등의 의소(義疏)를 지었다. 아울러 『박이하론(駮夷夏論)』ㆍ『현증론(顯證論)』ㆍ『법성론(法性論)』ㆍ『효상기(爻象記)』 등을 지었다. 모두 세상에 전한다.
전송의 승명(昇明) 연간(477~479)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63세이다.
주석
1 지둔이 말년에는 산음(山陰)으로 나와서 『유마경』을 강의하였다. 지둔이 법사가 되고 허순이 도강(都講)이 되었다. 지둔이 한 논리를 화통하면, 대중들은 허순이 문제점을 제기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허순이 한 질문을 마련하면, 대중들은 또한 지둔이 회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강론이 끝날 때까지 두 사람의 논리는 다하지 않았다.
『고승전』 7권(ABC, K1074 v32, p.827a01-p.839b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