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장 비밀통로
조중화는 무슨 글씨를 쓰고 있다가 음적양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얼
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총호법, 지긍 떠나실 겁니까?"
"그렇소. 어서 안내하시오."
조중화는 그들 남녀를 데리고 본채의 뒤결에 있는 어느 허름한 창고
로 들어갔다.
창고의 문을 열자 매캐한 냄새와 함께 썰렁한 공기가 밀어닥쳤다.
창고는 그리 크지 않았는데 예전에는 쌀창고로 쓰였던 듯 여기저기에
낡은 쌀가마니들이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었다.
조중화는 그 중 한쪽 구석으로 가서 그곳에 놓여져 있는 쌀가마니를
뒤집었다.
쌀가마니 아래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조중화가 가운뎃손가
락을 구멍 안에 집어넣고 돌리자 나직한 음향과 함께 바닥에 입구가
나타났다.
크릉!
입구 아래에는 십여 개의 계단이 나 있었다.
조중화는 서슴없이 계단을 내려가 통로로 향했다. 통로에는 여러 개
의 기관장치가 있는 듯 그들은 다시 세 개의 비밀문을 통과하고서야
비로소 비밀통로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곳은 조가장의 후원에서 지하로 어림잡아 약 오 장 정도 내려간 부
근이었다.
거기서부터는 지형이 점차 낮아졌고 희미한 등불이 비치는 곳에 돌
로 만든 넓은 장진고가 나타났다. 장진고 안에는 많은 금은
보주들이 진열되어 있어 매우 휘황찬란했다.
조중화는 양손으로 신력을 일으켜 네모진 철가를 밀어젖
힌 다음 석벽에 박힌 등근 철환을 힘껏 비틀었다.
끄르르릉!
굉음과 함께 석벽이 이동하며 두 자 둘레의 출입문이 나타났다.
조중화는 조금 전에 글을 썼던 종이 쪽지를 음적양에게 건네 주면서
말했다.
"여기서 교외까지의 거리는 약 칠 리쯤 되는데 도중에 세 군
데의 금제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부총호법께서는 비밀통로를 쭉 따라
나가시다 금제를 만나게 되면 여기에 기재된 대로 움직여 주십시오.
그럼 무사히 통과하실 수 있을 겁니다."
조중화는 말을 마친 다음 작별을 고하고 총총히 되돌아갔다.
음적양은 화섭자에 불을 붙여 들고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손지유는 약간 긴장하는 기색을 보이며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
가 음적양이 뒤따라오기를 재촉하자 조심스럽게 발을 옳겨 안으로 들
어갔다.
그로부터 얼마 후.
드디어 세 군데의 금제를 완전히 통과하자 앞으로 나갈수록 지형이
높아졌다.
음적양은 갑자기 명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우린 빨리 밖으로 나갑시다."
손지유가 멈칫했다.
"잠깐! 만일 적들이 이곳에 비밀통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출구
에 잠복을 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게 아니에요?"
"놈들이 알 리가 없소."
손지유는 곱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부총호법께서는 상대를 너무 무시하시는군요. 전 안 가겠어요. 잘못
하다간 개죽음을 면치 못할 것 같아요."
음적 양은 호방한 웃음을 터뜨렸다.
"낭자는 매우 조심성이 있는 여자요. 하지만 나도 신중을 기할 만큼
은 기하고 있으니 너무 우려하지 말고 뒤따르시오."
손지유는 할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라 통로를 걸어갔다.
다시 일 각쯤 지나자 그를은 비밀통로를 벗어나 밖으로 나올 수 있었
다.
출구는 한 그루 아름드리 고목이었는데 썩어 버린 고목 안에는 겹칠
수 있는 사닥다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음적양은 밖으로 나온 후 고목을 다시 한 번 눈여겨보며 중얼거렸다.
"과연 신통하고 은밀스런 장치로군. 어느 누가 이 고목 속에 사다리
가 숨겨져 있는 줄 알겠는가?"
손지유가 야무지게 한마디 던졌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나무를 베어 버리면 모든 것이 드러날 게 아니
에요?"
음적양은 의미 깊은 운음을 지었다.
"이처럼 다 썩은 고목을 무엇에 쓰려고 베어 버리겠소? 땔감으로도
마땅치 알은 나무인데……"
돌연 멀리 떨어진 나무 위에서 비조 한 마리가 무엇에 놀란듯
끼악, 소리를 지르며 푸드득 날아갔다.
손지유의 안색이 일순간에 싹 달라졌다.
"제가 이 나무 위에 올라가 주위의 동정을 살펴보겠어요."
음적양은 급히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낭자, 나의 신변에 대해 이처럼 염려해 주니 매우 감사하오.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몸을 숨기고 살펴보시오."
손지유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나루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척하면서 한 쪽 소매
속에서 용당운이 건네 준 조그만 새 한 마리를 공중으로 날려보내고
밑으로 내려왔다.
"부총호법, 아무런 이상도 없는 것 같아요."
그녀의 미색에 반쯤 얼이 빠져 있는 음적양은 추호도 의심을 품지 않
았다.
따라서 손지유는 용당운의 첫 단계 지시를 무난히 이행하게 된 것이
다.
두 사람은 나무 뒤에서 나와 수림 속을 걷기 시작했다.
음적양은 얼마쯤 걷다가 나직이 물었다.
"손 낭자, 여긴 어디쯤 되오?"
"자세히는 모르지만 수목이 울창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어느 산속인
가 봐요."
"음…… 혹시 적들이 나타나지 않을지 모르겠소."
"글쎄요. 만일 이런 곳에 적들이 대거 잠복해 있다면 우리는 완전히
궁지에 몰리고 말 거예요."
음적양은 빛나는 눈초리로 사방을 훑어보았다.
"한번 뱀에게 놀라게 되면 두레박줄을 보고도 놀란다더니 낭자처럼
의심이 많다가는 단 한 발짝도 전진하기 힘들겠구려."
바로 그때였다.
"휘이이이익!"
귀를 찌르는 듯이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려 왔다.
손지유가 움찔하며 고개를 돌리더니 만면에 두려운 빛을 띠었다.
"부총호법, 안 되겠어요. 우리 그냥 되돌아가도록 해요."
그녀가 빌길을 돌리자 음적양은 급히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낭자, 이젠 이미 기호지세가 되어 총단으로 향하는 수밖
에 없소. 조가장은 앞으로 몰살당하고 말 것이오."
"어쨌든 저는 이대로 돌아가겠으니 부총호법은 총단으로 가세요."
그때였다.
휘익!
밀림 속에서 일진의 바람이 불어오며 유령 같은 인영들이 속속들이
뛰쳐 나왔다.
"앗!"
두사람이 움찔 놀라는 순간 상대편 다섯 사람이 쾌속한 속도로 쇄도
해 왔다.
그 중 한사람은 냉막한 얼굴에 청의를 걸친 중년인이었으며, 나머지
네 사람은 맨발에 마삼을 걸친, 모습이 악귀처럼 흉악스
럽게 생긴 괴인들이었다. 그들은 성심장의 고수들인 염라사귀
였다.
음적양은 자신의 행적이 발각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일신의 무공
을 믿는 그는 손지유로 하여금 자신의 보호를 받도록 뒤로 물러서라
는 눈짓을 한 다음 다섯 사람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염라사귀 중 한 사람이 청의중년인을 향해 음홍스럽게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과연 귀하의 추측대로군요. 우리는 절대로 약속을 저버리는 사람이
아니니 귀하는 서슴지 말고 요구 조건을 제시하시오."
청의중년인은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들은 너무 날뛰지 마시오. 회서방 부총호법은 무공이 뛰어나 당
신들이 저자를 사로잡는다는 것은 무리요."
"……"
"나는 달리 요구할 것도 없고…… 다만 한평생 여색을 즐기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는 만큼 저 낭자만 손에 넣으면 그걸로 만족하겠
소."
염라사귀는 히죽 의미있는 웃음을 지었다.
"이 숲속에 회서방이나 조가장의 문하들이 잠복해 있다 해도 우리 성
심장 고수들이 있는 이상 별수없을 거요."
이어 손지유를 힐끔 쳐다본 뒤 다시 말을 계속했다.
"과연 저 계집의 얼굴은 반반하오. 귀하의 뜻이 그렇다면 우린 그 문
제에 대해 일체 신경을쓰지 않겠으니 알아서 하시오."
이 말을 들은 음적양은 두눈에 노기를 띄우며 음양수의 공력을 끌어
올렸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자는 나서라. 가차없이 죽여 주겠다!"
말하는 동시에 몸을 빙글 돌리면서 쌍장을 휘둘러 염라사귀에게 덮쳐
갔다.
손지유가 내심 놀라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고 청의중년인도 한쪽으로
비켜서서 관전할 자세를 취했다.
꽈앙!
염라사귀는 음적양의 손이 채 이르기도 전에 뜨겁고 차가운 두 가닥
기운이 쇄도해 옴을 느끼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
다.
하나,
쾅!
"크악!"
"으으악!"
그들 중 두 사람은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놀랍게도 그들이 막 피하려는 찰나 등줄기에서 무형의 암경이
노도처 럼 밀어닥쳤던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음양수 중 회선어공 수법으로, 보이지 않는
경력이 이미 상대방의 뒤편에 이르렀다가상대가 물러나는 순간을 이
용하여 격살시키는 가공할 무공인 것이다. 이 수법은 매우 기괴하여
웬만한 고수들은 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다.
음적양은 단 일 수에 염라사귀 중 두 명이 시체가 되어 쓰러진 것을
보고 득의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겨우 그 정도 실력으로 감히 본 공자에게 덤벼들었단
말이냐?"
그는 번개처럼 달려들며 다시 쌍장을 휘둘렀다.
쾅! 쾅!
북 치는 듯한 음향이 터지며 다른 두 명의 염라귀들도 미처 피하지
못하고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끄아아아……!"
그들의 비명이 긴 꼬리를 물며 울려 퍼질 때,
쐐액!
한 줄기 인영이 섬전처럼 날아오며 양손을 내밀어 음적양의 미간을
노려 왔다.
"멈춰라! 어린 놈이 솜씨가 너무 악랄하구나!"
날아든 인영은 키가 훤칠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간일발의 차이로 염라사귀가 이미 몰살당한 것을 알아차리자
고함을 치며 양손을 계속 휘둘러 강맹한 역도를 발출했다.
콰콰쾅!
음적양은 노인의 두 주먹이 휘둘러지며 엄청난 권세가 밀어닥치자 흠
칫 놀라 좌측으로 피했다.
쾅!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폭음이 터지며 방금까지만 해도 음적양이
서 있던 자리에 반경 이 장이 넘는 거대한 웅덩이가 패었다.
음적양은 이 쾅경을 보고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는 아직까지 이토록 패도무쌍한 권법이 있다는 말
을 들어 보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는 안색이 일변해 경악성을
터뜨렸다.
"혹시…… 당신은 패권 혁련후?"
노인은 음적양이 자신의 이름을 단번에 알아맞히자 껄껄 대소를 터뜨
렸다.
"크하하…… 노부가 누구인지 안다면 노부의 손에 걸린 자는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도 알겠지?"
패권 혁련후는 백년래 무림에서 권법으로는 가장 강한 고수였
다.
그의 패권은 이름 그대로 무지막지한 위력이 있어 피와 살로 이루어
진 인간이라면 견뎌 내기가 힘들었다. 패권 혁련후는 성심오로 중의
한 명이었다.
음적양은 내심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으나 이내 입술을 질끈 깨물었
다.
'좋다. 이렇게 된 바에는……'
그는 이판사판이라 생각하고 아무 소리도 없이 혁련후를 향해 날아가
며 음양수를 휘둘렀다.
쿠쿠쿠앙!
뜨겁고 찬 두 가닥 기류가 섬전처럼 혁련후를 향해 휘몰아쳐 갔다.
혁련후는 설마 상대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기습을 가할 줄은
몰랐는지라 미처 진력을 제대로 끌어올리지 못하고 엉겁결에 일권
을 마주쳐 갔다.
쾅!
음양수의 위력은 가히 놀라워 혁련후는 미처 그 여세를 완전히 감당
치 못하고 어깨 부근의 옷자락이 길게 찢어진 채 뒤로 한걸음 물러섰
다.
혁련후의 안색이 시뻘겋게 변했다.
비록 그가 다급한 중에 공력을 채 칠 성밖에 끌어올리지 못
했다고 하나, 설마 아직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에게 격퇴당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만약 음적양의 내공이 그와 엇비슷했다
면 혁련후는 음양수에 의해 한줌 퍼모래로 변해 버렸을 것이다.
"이런 고얀……!"
분노가 머리 끝까지 충천해 오른 혁련후는 얼굴이 험상궂게 변하면서
우권을 빠르게 움직여 연거푸 일곱 번을 찔러 갔다.
콰아아아아아!
칠성조현의 권세가 바다를 뒤엎어 놓을 듯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휘몰아쳤다.
'놀랍다! 정말 주먹 하나는 끝내 주는 늙은이구나. 시간을 오래 끌다
가 는 내 쪽이 불리하겠다.'
음적양은 바짝 긴장되어 단전에 진기를모으며 음양수를 맹렬히 휘둘
렀다.
한동안 두 사람은 치열한 격전을 전개했다.
내공이나 초식의 능숙도 면에서는 혁련후가 압도적으로 우세했으나음
적양의 음양수가워낙 절묘하여 일시지간 결정적인 우세를 점하지 못
했다.
그때였다.
삼장 밖에 서 있는 손지유의 앞으로 청의중년인이 접근해 오면서 음
침한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낭자, 낭자는 이 같은 싸움에 끼여들 필요가 없으니 나를 따라오시
오."
손지유는 움찔하여 급히 피하려 했다.
하나 청의중년인의 몸놀림은 귀신과도 같아 꼼짝없이 혈도를 제압당
해 버렸다.
"흐흐흐……"
청의중년인은 음흥한 귀소를 터뜨리며 손지유를 옆구리에 끼고 접전
장을 벗어나 숲속으로 달려갔다.
음적양은 손지유가 청의중년인에게 사로잡혀 가는 것을 알면서도 혁
련후의 권세가 너무 패도적인지라 몸을 뺄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
었다.
손지유는 수치심과 노여움이 한꺼번에 치솟아올라 당장 혀를 깨물어
죽고 싶었다. 음적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깨끗이 죽는 것
이 낫다고 생각한 그녀는 악에 받쳐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청의중년인은 연방 징그러운 웃음을 입가에 흘려 내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으히히…… 앙탈 부리지 마라. 잠시 후면 내가 너를 즐겁게 해줄 것
이니……"
바로 그때 낭랑한 음성이 귀청을 울리면서 들려 왔다.
"멈추시오!"
동시에 커다란 나무 뒤에서 금검공자 도옥린이 불쑥 나타나더니 경멸
이 가득한 시선을 던졌다.
청의중년인은 두 눈을 무섭게 부릅뜨며 호통쳤다.
"나는 성심장 고수들의 승낙을 받고 이 낭자를 데려가는 것인데 그대
가 어찌 나서는 거요?"
도옥린은 냉랭한 코웃음을 쳤다.
"이유가 어찌 됐든 음행은 만악의 근본인 만큼, 귀하의
추잡한 몰골을 대하니 분노에 앞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구려."
"그대는 지금 회서방의 부총호법을 만나러 왔소, 아니면 나와……"
도옥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귀하가 그 낭자를 데리고 무사히 목적지까지 가길 바랄 뿐이
오."
청의중년인은 냉소를 날렸다.
"그 점에 대해선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되오. 만일 그대가 이 낭자에
게 손을 댄다면 그 결과는 반드시 좋게 끝나지 않을 것이오."
바로 그때였다.
쐐액!
한줄기 냉풍이 청의중년인의 등뒤로 쏜살같이 엄습해 오면서 성심장
고수 한 명이 나타나 날카로운 음성으로 소리쳤다.
"보자보자 하니까 이공자님께 너무 무례하게 구는군."
"흥!"
청의중년인은 냉소를 치면서 재빨리 석 자 옆으로 비켜섰다.
동시에 몸을 돌of키며 왼발을 쳐들어 그자의 오른편 무릎을 힘껏 걷
어찼다.
그 각법과 겨냥은 너무나도 신속하여 절세고수라도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딱!
"크윽!"
무거운 신음 소리와 함께 공격했던 인물은 무릎뼈가 박살난 채 뒤로
벌렁 나자라져 버렸다.
청의중년인은 그를 힐끔 바라본 뒤 다시 손지유를 옆구리에 낀 채 바
람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도옥린은 그를 가로막으려다 몸을 멈춘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음적양과 혁련후가 싸우고 있는 격전장
쪽으로 날아갔다.
청의중년인은 그녀를 안은 채 말없이 질풍처럼 달려갔다.
칠팔 리쫌 내달렸을 때 전면에 죽림 하나가 나타났다.
그 죽림은 범위가 사오 리쯤 되었고, 죽림 안에는 두 칸의 죽옥
이 있었다.
청의중년인은 죽옥 안으로 들어가 손지유를 내려놓았다.
'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이제 저놈에게 '나의 순결을……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자결하고 말겠다!'
그녀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원망과 저주의 빛이 스친 눈으로 청의중
년인을 응시했다. 청의중년인은 한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돌연 담담하
게 말을 꺼냈다.
"여기는 아무도 찾아을 사람이 없을 것이니 마음 푹 놓으시오."
손지유는 이 말을 듣고 만면에 놀랍고 기쁜 빛을 띠었다.
음성이 몹시 귀에 익었던 것이다.
"아니, 용 은공이 아니세요?"
청의중년인, 그는 바로 용당운이었다.
용당운은 싱긋 웃으며 그녀의 혈도를 풀어 주고 나서 말했다.
"그렇소, 내가 바로 용당운이오."
손지유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원망스런 음성으
로 말했다.
"은공께선 어찌 지금까지 절 속여 오셨어요? 야속하군요."
"만일 노부가 미리 기밀을 누설시키면 음적양과 도옥린을 떼어 버리
지 못하게 될까 염려하여 그런 것이니 이해하시오."
손지유는 절망에서 벗어나 기운을 차리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단정
히 한 다음 바깥을 내다보았다.
"이곳은 정말 안전한가요?"
용당운은 엷은 웃음을 지었다.
"대나무들이 몇 겹으로 둘러서 있고, 또 집 주위에 기문둔갑진이 배
치 되어 있으므로 하나의 미궁이라 할 수도 있는 곳이오."
손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저는 음적양의 가죽을 벗기고 살을 씹지 못하는 것이 한이에요.
은공은 무림의 기인이시나 저로 하여금 그놈을 직접 죽여 한을 풀게
해주세요. 그러면 저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불전에 장명등
을 켜놓고 은공의 복을 빌겠어요."
용당운은 길게 한숨을 지으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노부가 어찌 낭자의 심정을 모르겠소? 그러나 음적양을 죽일 수는
없소."
손지유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그놈은 단신이므로 제아무리 고강한 무공을 지녔다 해도 성심장 고
수들의 합공을 막아 내진 못할 텐데요?"
"그게 아니오. 지금 성심장에서도 회서방의 총단이 어느 곳인지를 모
르기 때문에 그에게 중상을 입혀 총단으로 도망치게 한 다음 총단의
소재를 알아 내려는 것이오."
그때 돌연 밖에서 은방을 구르는 듯한 음성이 들렸다.
"호호호…… 속 모르는 사람들은 당신을 음적으로 간주하겠어
요?"
동시에 두 줄기의 날렵한 인영이 놀란 기러기 같은 신법으로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들은 아리따운 미모의 소녀들이었다.
바로 운봉랑과 곽희연이었다.
손지유는 애정이 담뿍 서린 눈빛으로 용당운을 응시하는 두 소녀를
바라보며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용 은공은 이미 나이가 사십이 넘었는데도 저렇듯 미색이 뛰어난 젊
은 소녀들과 깊이 사귀고 있구나.'
이때 용당운은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일이 생각 외로 복잡하게 발전되어 두 분 낭자로 하여금 많은 수고
를 겪게 해서 미안하오."
곽희연은 횐 이를 드러내며 곱게 웃었다
"마음에 없는 말은 아예 하지 않는 게 좋아요."
그러자 운봉랑이 요염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성심장에서는 이번에 성심오로 중의 두 사람과 팔대빈객 중 세 사람
이 나왔어요. 그리고 금검공자 도옥린과 이총관인 반미륵 고
우성도 왔는데, 오늘 일의 주재자는 반미륵 고우성이에요. 그런데 무
슨 일로 저희들을 부르셨나요?"
"우리는 당분간 행동을 중지하고 여러 흉사들의 행동을 주시해
야 되겠소. 나는 잠시 다녀오겠으니 두 분 낭자는 손지유 낭자를 잘
모시고 있으시오."
용당운은 말을 마친 뒤 밖으로 나와 황삼을 걸치고 흉악스럽게 생긴
면구를 얼굴에 썼다.
그런 다음 천룡보도를 등에 매고 죽림 밖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금제 밖에 이르렀을 때,
휘익!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몇 줄기의 인영들이 번개같이 날아왔다.
용당운은 태연히 몇 걸음 걸어나갔다.
그때 한 사람이 크게 고함을 질렀다.
"멈추시오!"
말소리와 함께 다섯 사람이 나타나 번개같이 그를 포위했다.
그들은 바로 권운도 학귀와 네 명의 성심장 고수들이었다.
용당운은 냉랭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노부는 다섯 분과 전혀 알지 못하는 처지인 듯한데 어찌하여 앞길을
가로막으시오?"
학귀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가볍게 예를 취한 다음 말했다.
"귀하는 이곳 죽림 안에 거주하고 계시오?"
용당운은 거만스럽게 쏘아붙였다.
"이런 죽림 안에 무슨 집이 있겠으며, 노부의 처소가 다섯 분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이오?"
그러자 학귀의 뒤에 있던 네 명의 사나이가 앞으로 나섰다.
"이 죽림 밖에는 우리 성심장의 고수들이 확 깔려 있기 때문에 당신
이 우리의 비위에 거슬리면 한 발짝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될
것이오. 지금 수상쩍은 청의인 한 명이 죽림 안으로 들어가 여태껏
나오지 않았는데, 보아하니 당신은 그의 일당인 것 같소."
"흥!"
"순순히 대답하시오. 쇈히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 곤욕을 자초하지 말
고……"
용당운은 연신 코웃음을 치면서 학귀를 주시했다.
"어찌하여 사람을 이토록 업신여기는가 했더니 역시 성심장의 수하들
이었군, 노부는 평소 남을 침범하지도 않을 뿐더러 남이 침범하는 것
도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성미인데, 이번 기회에 노부는 성심장의 절
학을 한번 구경해 봐야겠소."
말을 마치고는 그 경장사나이를 향해 우장을 서서히 밀어 냈다.
경장사나이는 그가 손을 쓰기 무섭개 슬쩍 옆으로 비켜서며 오른손으
로 철각동삭을 들어 비스듬히 내리침과 동시에 왼손을 가
볍게 떨쳐 냈다.
쌕!쌕!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아홉 개의 연미추혼침이 발사되어
용당운의 전신 급소를 한꺼번에 엄습해 왔다.
다음 순간,
쨍쨍쨍!
경쾌한 음향이 잇달아 울려 퍼지며 예리하게 파고 들어가던 연미추혼
침은 무형의 경력에 의해 모조리 땅으로 추락하였다. 경장사나이는
이 광경을 보고 내심 놀라면서 다시 철각동삭에 전력을 가하여 벼락
같은 기세로 내리쳤다.
용당운은 냉랭하게 웃으며 등뒤에 매고 있던 보도를 뽑아 들었다.
"과연 한 수가 있군. 어디 내 칼 맛도 좀 보시지!"
팟! 팟!
그는 가볍게 휘두르는 것 같았는데 도에서 무시무시한 도세가 일어나
며 경장사나이의 철각동삭과 상반신을 통째로 뒤덮어 갔다.
철각동삭을 휘두르던 경장사나이는 이 놀라운 광경에 얼굴이 새파랗
게 질렸다.
까깡!
철각동삭이 서너 토막으로 잘려지며 처절한 비명이 피분수를 동반하
고 장내에 울려 퍼졌다.
"크아악!"
경장사나이는 가슴이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이 놀라운 광경에 학귀를 비롯한 세 명의 사나이들은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단 일 도에 성심장에서도 일류인 무림고수가 도룩나고 만 것
이다.
학귀가 경악 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을 때 용당운은 보도를 다시 집
어넣으며 그를 힐끔 바라보더니 이내 몸을 날려 사라져 갔다.
그의 신법은 눈부시도록 빨라서 숨을 몇 번 내쉬기도 전에 아득히 멀
리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학귀는 그제서야 흠칫 몸을 떨었다.
세 명의 사나이들 중 하나가 분노에 찬 음성을 토해 냈다.
"아니, 왜 저놈을 그냥 가도록 내버려두는 겁니까!"
학귀는 얼굴을 실룩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자의 도법을 보니 우리가 전력을 다한다 해도 상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네. 물론 평상시라면 사생결단을 내겠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않은가? 음적양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거기에 정
체 모를 고수까지 상대하게 된다면 자칫 일을 그르칠지도 모르네."
"하지만……"
"자네들의 심정은 알고도 남네. 오늘의 복수는 언제고 반드시 하고야
말겠네. 하지만 일에는 선후가 있는 법. 더 늦기 전에 음적양이 있는
곳으로 가세."
세 사나이들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으나 학귀의 말대로 그의 뒤를 따
라 몸을 움직였다.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은 엄청난 폭음 소리를 듣게 되었다.
쾅! 와르릉!
움찔 놀란 그들은 황급히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은 하나의 폐허와도 같았다.
반경 이십여 장 이내가 형체를 잃어버렸고, 부서진 바위와 돌 조각,
뿌리째 뽐혀진 나무들이 사방으로 널려 있어 그야말로 흉험하기 이를
데 없어 보였다.
그 폐허의 한가운데에는 좀처럼 보기 드문 대격돌이 벌어지고 있었
다.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는 두 사람은 위맹한 인상의 노인과 회의청
년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얕은 언덕 위에 서너 명의 인물이 몸
을 숨긴 채 격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학귀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이총관과 이공자가 이곳에 계셨구려."
격전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성심장의 이총관인 반미륵
고우성과 금검공자 도옥린이었다.
고우성은 학귀를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오시오."
학귀는 장내의 격전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혁련 노사의 무공으로도 아직까지 음적양을 쓰러뜨리지 못하다니,
과연 그놈의 실력은 보통이 아니로군요."
장내에서 싸우고 있는 인물들은 다름 아닌 패권 혁련후와 음양공자
음적양이었다.
고우성의 안색은 의외로 심각했다.
"쓰러뜨리지 못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자칫하면 혁련 노사가 낭패를
당할지토 모르겠소."
학귀는 몸을 움찔거렸다.
"그 정도입니까?"
"음적양의 내공은 비록 그리 정순하지 못하지만 음양수의 위력
이 너무 막강해서 혁련 노사의 패권으로도 결정적인 우세를 잡지 못
하고 있소. 그들의 싸움이 벌써 이백여 초에 이르렀는데 혁련 노사는
나이가 많아 이대로 가다가는 진력이 점차로 떨어져 의외의 일
이 벌어질지도 모르오."
그의 말대로 처음에는 혁련후가 노련한 무공과 현란한 초식, 웅후한
내공으로 일방적인 우세를 잡고 있었으나 격전이 계속될수록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음적양보다 세 배나 나이가 많아 일단
피로를 느끼게 되자 쉽사리 떨어진 체력이 회복되지 않았다.
힘들기는 음적양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음양수 특유의 음양이기가 뿜어 내는 위력으로 근근
이 버티느라 여러 차례 위기를 넘겨 전신에 유혈이 낭자했다.
두사람의 싸움이 삼백 초에 이르자 그들의 의복은 갈가리 찢겨졌고,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하나 그들 중 누구도 뒤로 물러나려는 사람이 없었다.
고우성과 도옥린 등은 혁련후를 도와 주고 싶었으나 섣불리 나서다가
혁련후의 자존심을 건드리게 될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
다.
게다가 그들의 목적은 음적양을 제거하기보다는 그를 추궁해 회서방
의 총단을 알아 내는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합공할 수도 없었다.
그때 잠자기 장내의 격전이 일변했다.
음적양이 체내에 남아 있던 진원진력까지 끌어올려 음양수
의 절초들을 거푸 전개해 혁련후를 세차게 공격했던 것이다.
꾸르릉!
뇌성이 울리는 듯한 음향과 함께 붉고 횐 두 가닥의 장영이 폭풍 노
도와 같은 기세로 혁련후를 향해 몰아쳐 갔다. 혁련후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정면으로 음양수의 장공에 맞서 갔다.
쾅!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주위 사방이 온통 휘날리는 먼지
와 돌 조각으로 자욱했다.
"욱!"
"크윽!"
음적양과 혁련후는 각기 커다란 충격을 받고 휘청거리며 뒤로 세 걸
음 물러났다.
하나 혁련후의 신형이 채 안정되기도 전에, 음적양이 휘청거리던 몸
을 곧추세우며 무섭게 달려들었다.
그의 쌍수는 붉고 희게 물든 채 가공할 경기를 담고 있었다.
혁련후는 조금 전의 격돌로 심각한 내상을 입은 데다 설마 음적양이
부상을 무릅쓰고 이토록 저돌적인 공격을 해을 줄은 몰랐는지라 크게
당황하여 두 주먹을 급히 앞으로 내뻗었다.
쾌액!
두 가닥 뇌전 같은 권풍이 음적양을 향해 뻗어 왔다.
하나그 권풍이 채 반도 뻗기 전에 음적양의 음양수는 혁련후의 가슴
팍을 정통으로 가격하고 말았다.
쾅!
"크악!"
음양수에 가슴을 강타당한 혁련후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오 장여
밖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혁련 노사!"
지켜보고 있던 성심장의 인물들이 깜짝 놀라 혁련후에게 다가왔을 때
혁련후는 이미 오공으로 검붉은 피를 흘리며 즉사한 후였다.
음적양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간신히 혁련후를 격살하기는 했으
나 목구멍에서 핏물이 넘어오고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기조차 힘이
들었다.
하나 그는 여기서 머뭇거렸다가는 꼼짝없이 성심장의 인물들에게 사
로잡히고 만다는 것을 깨닫고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혁련후가 쓰러진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하나 그의 몸이 채 일 장도 움직이기 전,
"목은 두고 가라!"
싸늘한 호통과 함께 그의 코앞으로 눈부신 금검이 섬광처럼 폭사해
왔다.
"도옥린! 네놈이구나……!"
음적양은 대경하여. 급히 음양수의 절초인 획분음양을 구
사해 냈다.
콰쾅!
홍백의 기류가 두 가닥으로 매섭게 뻗쳐 나가며 긍광을 가로막
았다.
창!
콰쾅!
금속성이 일어나고 불꽃이 튀기는사이 두사람은 각기 일곱 보씩 뒤로
물러났다.
상대방은 바로 긍검공자 도옥린이었다. 그는 금빛 찬란한 금의가 십
여 군데나 찢겨지고 기혈이 역류하여 입가에 가는 선혈이 내비치고
있었다.
음적양 또한 금광검이 왼쪽 어깨에 스쳐 선혈이 배어나왔으며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하나 그때 그는 문득 도옥린의 몸이 이상하게 경직되어 있는 것을 깨
달았다.
한 가지 생각이 퍼득 머리에 떠오른 그는 이를 악물며 왼손을 번개처
럼 놀려 도옥린의 완맥을 움켜쥐었다.
휙!
어찌 된 일인지 도옥린은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맥없이 음적양의
수중에 제압당하고 말았다.
음적양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급히 그의 혈도를 찍었다.
순간,
"휘익!"
사방에서 맑은 휘파람 소리가 들리며 고우성과 학귀를 비롯한 성심장
의 정예고수들이 나타났다.
음적양은 그들이 본격적으로 공세를 취하려는 것을 보고 눈썹을 꿈틀
거리며 사납게 소리쳤다.
"누구든지 먼저 손을 쓴다면 이자의 숨통을 끊어 놓고 말겠소!"
고우성은 도옥린이 음적양의 수중에 제압당해 있는 것을 보고 안색이
변해 급히 손을 흔들었다.
막 음적양을 향해 덮치려던 성심장의 고수들은 급히 몸을 멈추었다.
음적양은 거듭된 격전으로 온몸이 찢어지는 듯 아파 왔으나 이를 악
물고 참으며 태연한 표정으로 냉소를 쳤다.
"당신들이 강호의 규칙을 무시하고 차륜전을 펼쳤지만 가만
히 서서 죽음을 기다릴 내가 아니오. 나는 도옥린을 이용해 포위망을
벗어난 다음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곱게 돌려보내겠으니 당신들도
더 이상 날뛰지 말고 기다리시오."
고우성은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음적양의 손에 제압당해 있는 도옥
린을 응시했다.
원래 도옥린은 성심장주의 세 제자 중 하나로 장래가 유망한 기재
였다.
그래서 두 명의 장주는 매월 한차례씩 은밀한 곳으로 불러다가 자신
들의 절기를 전수해 주었기 때문에 그 신임이 여간 두텁지가 않았다.
고우성은 음적양을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우리는 그대가 실언하지 않기를 바라겠네."
음적양은 엷은 웃음을 지었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남에게 실언을 해본 적이 없으니 그 점에
대해선 염려치 말고 내가 무사히 이곳을 빠져 나가게 해주시초. 안경
성을 벗어나는 즉시 이자를 풀어 주겠소."
그는 도옥린을 옆구리에 끼고 천천히 걸어갔다.
고우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뒤로 물러났다.
"저자를 막지 마라."
주위에 매복해 있던 성심장의 고수들은 떠나가는 음적양의 앞을 가로
막지 않고 비켜 주었다.
음적양은 포위망을 벗어나자 고우성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섣불리 내 뒤를 쫓거나 미행할 생각은 하지 할기 바라오. 그렇지 않
으면 불행한 일이 벌어질 거요."
그는 말을 마치고는 재빨리 몸을 날려 사라져 갔다.
고우성 등은 멍하니 그가 사라지는 광경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학귀가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몸을 날리려 했다.
"이총관, 어서 쫓아갑시다."
고우성은 고개를 저었다.
"안 되네. 그랬다가 음적양이 도 공자를 상하게라도 하는 날에는 장
주님의 진노를 어찌 감당하려고 그러는가?"
학귀는 움쪘하여 몸을 멈추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저놈이 떠나가는 걸 멍하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고우성은 나직이 탄식을 토했다.
"원래의 계획은 저자에게 중상을 입힌 후 슬쩍 놓아 주려는 것이었는
데 뜻밖에도 도 공자가 저자에게 사로잡히는 바람에 계획이 어긋나게
되었네. 나는 어째서 도 공자가 그렇게 맥없이 제압당했는지를 모르
겠네!"
학귀도 의혹에 찬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옥린의 무공은 음적양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아 이미 기력이 탈진한
음적양에게 절대로 제압당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서로 마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우선 안경성 밖에 수하들을 풀어 음적양의 행적을 뒤쫓고, 그가 도
공자를 풀어 주는 기미가 있으면 다시 추적하는 수밖에 없겠네."
고우성의 말에 학귀는 수긍하는 빛을 띠었다.
그들은 수하들에게 몇 마디의 지시를 한 후 음적양이 사라진 방향으
로 몸을 날렸다.
그들이 모두 떠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 근처의 커다란 나무 위에서 하
나의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바로 용당운이었다.
도옥린이 음적양의 손에 제압당한 것도 알고 보면 모두 그의 솜씨였
다.
그는 조금 전 도옥린과 음적양이 서로 격돌할 때 몰래 격공지
를 날려 도옥린의 심맥을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도
옥린은 미처 정신을 가다듬지 못하고 멍한 상태에서 어이없이 음적양
에게 제압당하고 만 것이다.
하나 도옥린 자신도 그것이 음양수에 의한 충격인 것으로만 알 뿐 설
마 자신이 용당운의 암습을 받은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
다.
용당운은 잠시 무언가 생각에 잠겼다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자신도 몸
을 날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 * *
해가 지고 대지에 어둠의 그림자가 깔려 올 무렵.
안경성에서 멀지 않은 산촌 근처에 하나의 회의인영이 나타났
다.
회의인영은 바로 음적양이었다.
음적양은 여전히 도옥린을 옆구리에 낀 채 산마루에서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저녁 연기를 바라보았다.
"벌써 날이 저물어 가는군,"
그는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머금으며 산촌을 향해 나는 듯이 달려갔
다.
음적양의 옆구리에 끼인 도옥린은 비록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으나
정신만은 말짱했다.
그는 개처럼 질질 끌려가는 자신의 신세에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
었다. 그러나 이미 혈도를 제압당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몸
인지라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음적양은 산촌을 지나 제법 후미진 산언덕을 향했다.
음적양이 점점 으슥한 산중으로 들어가자 도옥린은 불현 듯 불
안감이 엄습해 왔다.
'혹시 이 녀석이……?'
아니나다를까!
주위에 수풀이 을창한 어느 산곡에 당도하자 음적양은 괴소를
흘리며 도옥린을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쿵!
'으음……!'
도옥린은 땅바닥에 세차게 나가떨어지는 바람에 눈앞에 별이 보일 정
도로 충격이 컸으나 그보다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음적양은 입가에 스산한 웃음을 띤 채 도옥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흐흐…… 이제 안경성을 벗어났으니 약속을 지켜야겠지?"
그는 느릿느릿 우수를 쳐들었다.
도옥린은 음적양의 눈에서 살광이 뿜어지고 쳐들린 손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고는 사색이 되어 몸에 경련을 일으켰다. 하나 아혈
마저 제압당해 있는지라 고함을 지를 수조차 없었다.
음적양은 도옥린의 두눈에 경악과 분노, 절망이 어려 있는 것을 보고
득의한 웃음을 날렸다.
"흐흐…… 네놈을 당장 죽이지는 않겠다. 다만 내 삼양신지가 네놈의
기해혈을 파괴한다면 내공이 없어지고 칠 일 동안 뼈가 녹는
듯한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조용히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애초에
비정한 무림의 세계에서 순진하게도 약속을 지킬 것을 믿었던
너희들이 어리석은 것이니 나를 탓하지는 마라……"
그는 혈수로 변한 오른손으로 사정없이 도옥린의 단전을
후려쳐 갔다.
절체절명의 순간,
"멈춰라!"
어디선가 낭랑한 호통 소리가 들려 오며 한줄기 경풍이 음적양의 뒤
통수를 향해 날아들었다.
쐐액!
음적양은 질겁을 하고 놀라 급히 몸을 돌리면서 도옥린을 내리치려던
우수를 휘둘러 갔다.
광!
삼양신지와 경력이 격돌하며 폭음이 터져 나왔다.
"큭!"
그 순간 음적양은 손가락이 부러지는 듯한 통증에 짤막한 신음을 토
해냈다.
어느새 장내에는 청의를 입은 수려한 용모의 소년이 우뚝 서 있었다.
청의소년은 별빛처럼 찬란히 반짝이는 눈으로 음적양을 무섭게 노려
보고 있었다.
"감히 암수를 써서 반항할 힘도 없는 사람을 해치려 하다니…
… 너 같은 악적은 엄히 다스려 국법의 무서움을 뼈저리
게 느끼도록 해야겠다!"
음적양은 청의소년의 전신에서 뿜어 나오는 무형의 기도에 압도당해
뒤로 주춤 물러났다.
"너…… 너는 누구냐?"
청의소년은 냉 랭한 코웃음을 쳤다.
"흥! 그건 알 것 없다!"
청의소년은 돌연 번개같이 우수를 휘두르며 음적양에게 덮쳐 들었다.
쓰아악!
청의소년은 별로 몸을 움직인 것 같지도 않았는데 기이하게도 음적양
의 전신이 그의 공세 속에 놓이게 되었다.
음적양은 깝짝 놀라 상대가 자신의 하수가 아님을 알고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는 황급히 음양수를 일으켜 한 대 갈기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날려 도망쳐 갔다.
꽝!
청의소년이 급히 몸을 움직려 음양수의 장공을 피하는 동안 음적양의
몸은 벌써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청의소년은 음적양의 약삭빠른 도주에 어이가 없는 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도옥린에게 다
가왔다.
이어 도옥린의 혈도를 풀어 주자 도옥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감
격에 찬 음성으로 외쳤다.
"제 형! 정말 고맙소."
청의소년은 그가 연자기에서 우연히 만났던 대내의 시위영반 제백석
이었던 것이다.
제백석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불편한 곳은 없소?"
도옥린은 고개를 저으며 정중하게 포권했다.
"다행히 기혈이 약간 들떴을 뿐 부상은 입지 않았소. 한데 제 형께서
어찌 알고 때맞춰 나타나셨소?"
"나는 일전에 조가장에서 도 형을 뵌 다음부터 조가장을 은밀히 주목
하고 있었소. 한데 오늘 우연히 조가장에서 조금 떨어진 야산
에서 무림인들이 격전을 벌이고 있다는 순무부 무사의 소식을 듣고
혹시나 도형이 오지 않았나 하고 달려와 봤던 거요."
제백석은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때 조금 전의 회의소적이 암수를 써 도 형을 제압하는
것을 보았소. 하지만 나는 대내의 인물인지라 가급적이면 무림인들
간의 싸움에 끼여들고 싶지 않아 그가 안전한 곳으로 가서 약속대로
도 형을 풀어 주면 나타나지 않으려 했소. 한데 그가 약속을 헌신짝
처럼 저버리고 도 형을 해치려 하기에 부득이 손을 쓰게 된 거였소."
도옥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랬구려, 이거 번번이 제 형에게 폐를 끼치게 되어 면목이 없소."
제백석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도 형과 나는 의기가 통하는 점이 있으니 너무 괘념치 마시
오. 그보다 그 소악적이 누구이기에 그토록 악독한 심보를 가지고 있
는 거요?"
도옥린은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그놈은 음양공자 음적양이라는 놈으로서 무림의 흥악한 문파 회서방
에서 부총호법의 직위를 맣고 있소."
"일방의 부총호법이란 자가 자기 입으로 내뱉은 말을 스스로 짓밟아
버리다니…… 내 회서방이란 문파가 요즘 들어 악행을 일삼는
다는 소문을 듣고 반신반의했더니 이것만 보아도 그들의 악행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알겠구려."
"회서방에는 온갖 흉악무도한 무리들이 모여 있어 그대로 두면 무림
뿐만 아니라 대내에도 크나큰 화근이 될 것이오."
제백석은 도옥린이 그런 말을 하는 의도를 짐작하고 내심 웃으면서
담담히 물었다.
"그런데 일전에 찾고 있다던 사매는 찾으셨소?"
도옥린의 표정이 돌연 무거워졌다.
"아직 찾지 못했소. 나는 내 사매가 음적양에게 사로잡힌 줄 알았는
데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는 않소."
"그렇다면 아마 어딘가에 잘 있을 거요."
말을 하면서 그들은 산을 내려왔다.
그때 멀지 않은 관제묘에 등불이 반짝이는 것을 발견한 제백
석이 도옥린을 바라보았다.
"배도 출출한데 저곳에서 잠시 쉬어 가지 않겠소?"
도옥린은 서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등불이 반짝이는 관제묘로 달려갔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
즐감
감사 즐감 합니다
잘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입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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