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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가지고 일곱 금촛대 가운데서 거니시는 분께서 이 일들을 말씀하시느니라(계 2:1).
여기서 천사론에 대해 깊이 다룰 것은 아니지만 거듭 천사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계시록의 이런 부분들에서 반복하여 의문을 갖기 때문이다. 천사는 곧 현현, 나타남이다, 그렇게 이해를 했다면 본문을 읽으면서 큰 의문점은 없겠지만 그래도 다 해소되지는 않을 터이다.
피터 럭크만 박사는 천사는 현현이다, 정의를 내렸고 본문에 그것을 문자적 적용해 볼때 에베소 교회의 천사란 곧 그 교회의 현현이다. 요한은 에베소 교회의 현현에게 편지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렇게 결론이 난다. 적어도 영적 몸을 가진 실제 천사를 말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렇게 보인다.
왜 그런가 하면, 성경의 모든 말씀들은 인간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성경의 어느 구절도 인간을 벗어난 다른 피조물에게 직접적으로 교훈과 교리가 되게끔 주어지지 않았다. 인간 이외의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말씀들에 의해 관장될 지언정 이 말씀을 깨닫고 공부하는 존재들이 아니다.
그들이 행한 사역들은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임이 그들에게 계시되었고 이것이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으로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이제 전해졌으며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들이니라(벧전 1:12).
구약 시대 선지자들의 예언은 천사들이 볼때 경이로운 것들이었고 천사들도 간절히 살펴보기를 원했다. 그러나 간절히 바란다고 했지 실제 그 천사들이 성경을 공부해서 깨닫는다고 기록되지는 않았다. 천사들은 말씀을 누구에게 전하는 배달 서비스 정도는 할 수 있지만 말씀을 직접 받아서 깨닫고 공부하는 존재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베소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라"는 말을 문자적 하늘의 그 천사들에 적용한다면 그것은 바른 해석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개신교 해석가들이 주장하듯이 이 천사들은 에베소 교회 목사를 말하는 것이겠는가? 그것도 결코 아니니, 그 해석은 문자적 천사로 해석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오류를 자아낸다. 우선 목사가 곧 천사가 될 수 있다는 교리는 성경 어디에도 없다. 더 교묘한 개신교 신학자들은 본문의 헬라어, 앙겔로스를 천사가 아닌 "사자"(메신저)인 것처럼 포장해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사자는 곧 목사이니 여기서의 천사는 목사다, 그렇게 야바위 같은 해석을 해 버린다.
그런 머저리 같은 해석이 가능하게 하려면 1장에서 예수님께서 "일곱 별"에 대해 주신 해석을 엎어 버려야 한다. 주님은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라고 하셨고 그 별들은 주님의 오른 손 위에 놓여져 있다고도 하셨다.
여기서 개신교 머저리 주석가들은 이중고에 부딛치게 되는데 성경에 없는 교리 두 가지를 그들은 가르쳐야 한다. 첫째, 성경 어디에도 앙겔로스, 곧 천사가 목사라는 교리는 없다. 둘째, 성경 어디에도 목사를 별이라고 지칭한 데는 없다. 성도를 별들로 비유한 부분은 있지만 그것은 일반 모든 성도까지도 부르는 것이지 특히 목사를 일컬어 별이라고 하지 않았다.
현명한 자들은 창공의 광명처럼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의로 돌이키는 자들은 별들처럼 영원무궁토록 빛나리라(단 12:3).
그 자들이 계시록의 일곱 교회 천사들, 또는 그 별들을 교회 목사라고 해석한다 치면 그들은 단 12:3을 개정해야 할 것이다. 위 구절의 단어들에서 현명한 목사들, 의로 돌이키는 목사들, 그렇게 바꿔야 말이 된다는 말이다.
당연히 얼토당토 않은 해석이기 때문에 언급의 가치도 없는 망발이다. 일곱 교회의 천사들은 절대 그 교회의 목사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들이 놓친 중대한 과실 한 가지를 내가 더 말하겠는데 이건 내가 생각하건데 어떤 성경대로 믿는 주석가들 중에서도 미처 놓치고 지적을 안 한 것 같다. 이건 내가 발견한 그 개신교 주석가들의 허실이다.
성경에서 어디 어디 지명이 나오고 교회라고 할때, 이를테면 '에베소 교회'라고 할때 그 뜻은 에베소에 교회는 하나 밖에 없으니 그 단수 교회라는 뜻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에베소는 인구가 많은 큰 성읍이었고 당시 거기에 교회가 열 개 있었는지 스무 개 있었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어쨌건 그 큰 성읍에 지역 교회가 하나만 있었을리는 만무하고 그래서 '에베소 교회'라고 할때는 에베소에 있는 많은 지역 교회들을 총칭해서 하는 말이다.
워치만 니, 위트니스 리의 '지방 교회'라는 중국발 이단 종파는 성경의 지역 교회 개념을 오인해서 어떤 도시에는 교회가 하나밖에 없다는 망상을 교리로 삼았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마다 교회 이름을 달리 쓸 수 없어서 서울에 있는 1번 집회소, 2번 집회소, 이런 용어를 쓴다.
내가 왜 이야기를 했겠는가 독자들이여 생각해 보라. 위 구절에서 '에베소 교회의 "천사들"'이라고 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수 천사라고 했는가? 단수 천사가 아닌가? 저 개신교 목사들이 주장하는 대로 에베소 지역 교회 목사들에게 이 계시록이 가야 되는 것이었다면 대상을 복수로 적용해야지 왜 단수냐 말이다. 당시 에베소라는 데서 사역하던 목사가 딱 하나가 아니었다니까, 내가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여기서 벌써 삐그덕거리고 있는데 그래도 에베소 교회의 천사, 이게 목사냐는 얘기다. 그런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에베소 교회의 천사는 에베소 교회가 천상에 현현한 그 모습, 이미지 같은 것이다. 그렇게 일단 정리하면서 구체적으로 이게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차후에 기회되는 대로 더 설명해 나가겠다.
내가 너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며, 또 네가 어떻게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지만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찾아낸 것과(계 2:2).
어떤 사역의 기틀을 놓기 위해서는 피와 땀과 눈물이라는 선진들의 헌신이 있어야 된다. 현대 교회들은 피의 대가를 치르고 세워진 적이 대부분 없고 돈의 힘으로 세워진 교회들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의 수고를 알아주실 것 같지 않은데 초대 교회는 건물은 미약하거나 없었지만 그 성도들은 그들의 헌신적 복음 전파와 구령으로 인해서 주님께 유명해져 있었다.
오직 은혜와,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벧후 3:18).
그리스도께 바쳐지는 성도의 헌신, 행위와 수고들은 우리를 소진시키는 게 아니라 영적으로 세워주고 더 풍족하게 만드는 기폭제인데 무지한 자연인들의 종교 행위는 그들을 점점 영적으로 닫히게 하고 둔감하게 만드는데 반해 성도들의 헌신은 그들의 영적 감각을 예민하게 해서 선과 악을 분별하여 마귀를 대적하게 만든다. 거리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성도의 헌신 가운데서 가장 첨예하게 마귀를 대적하는 대단한 헌신이다. 그런 사람들은 영적인 일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마귀의 사람과 하나님의 사람을 구별할 줄도 안다.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는 것은 그 자들과 철천지 원수처럼 담을 쌓고 상대하지 말라는 그런 뜻이 아니다.
이는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욕하는 자들이나 약탈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전혀 함께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니 그렇게 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니라(고전 5:10).
실제로 우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필요는 있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환란전 휴거로 오셔서 우리를 "이리 올라오라"고 부르실 때 그런 것이고 현 세상을 살아나가는 과정에서는 불가불 우리는 세상과 소통하고 교류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 위치적으로는 그런 사람들과 한 사회, 지역 안에서 살고 있다 할지라도 그들을 한 교제권 안에서 만나서는 안 된다. "함께하는 것"은 그들을 마켓에서 만날 수 있고 직장에서 마주치기도 하며 길을 걷다가 보기도 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복음을 전하고 전도지를 전할 때도 우리는 많은 부류의 사람들을 접촉한다.
에베소 교회는 가장 세상과 첨예하게 맞서면서 세상 속에 뛰어들어 거리 설교와 거리 구령을 통해 복음을 활발하게 전파하는 성도들의 모임이었고 그들은 현대 교회처럼 소위 성직자와 평신도의 차별도 없었다. 그들은 단지 성경적 목적, 곧 진리 전파와 복음 확산에 저해가 되는 악인들만을 모임에서 구별해 추방했다. 이것이 성경대로 믿는 모임 안에서 종종 발생하는 성별이라는 사건이다. 집단적으로 일어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발생하기도 하는데 이런 계기는 하나님께서 양들의 믿음을 더욱 돈독히 세워주기 위해, 또 영적 경각심을 깨워주기 위해 일으키시는 사건들이다. 어떤 교회가 수십 년 넘게, 또는 심지어 세기를 넘기도록 아무 파란도 풍파도 없이 잠자듯이 흘러간다면 그것은 박물관이나 폐가처럼 된 영적 무덤인 것이지 산 교회가 아니다. 살아있는 교회라서 이단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성별도 일어난다.
"자칭 사도"가 누구인지에 대해 우리는 비단 1세기의 상황만 고려할 게 아니라 현대의 거짓 사도들도 찾아내야 한다.
그러한 자들은 거짓 사도들이요, 기만하는 일꾼들이요,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사도들로 가장하는 자들이라(고후 11:13).
그가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 4:11).
어떤 그리스도인이 하나의 사역에만 부르심받는 경우보다는 여러 가지에 복합적으로 부름받는 경우가 더 많다. 특히 목사는 양들을 치리할 뿐 아니라 잘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교사의 자질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바울은 목사가 잘 가르치는 것은 기본이라 이야기했다.
그런데 오늘날의 '자칭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허락하신 다른 은사들과 사명들도 많이 있건만 무슨 턱없는 욕심을 내서인지 초대 교회의 그 사도들의 권한을 차지하겠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으니 그 자들이야말로 기독교계를 부패 소굴로 몰고 가는 진정한 폐단이라 하겠다. 비단 신사도라 불리는 노골적인 이단 무리들만 그런 것은 아니고 은사주의, 순복음 운동 안에서는 암암리에 자신을 사도격으로 내세우는 자들이 적지 않았었다. 물론 몰몬교 같은 집단에서도 사도권 계승은 항상 주장해 왔다. 가장 대표적인 사도 사칭자는 역대 교황들인데 그들은 사도 중에서도 자기들이 가장 신임하는 수제자 격인 베드로에게 사도권 계승을 의탁한다. 정작 베드로 자신은 로마 카톨릭을 알지도 못했고 로마에 가 본 적도 없으며 자기 사도권을 교황 아무개에게 계승한 적도 없건만 미신적인 카톨릭 교도들은 자기들의 종단이 베드로 직계승 종파인 줄로 아전인수에 빠져 착각하고 있다.
사도란 하나님께서 그 숫자를 정해 놓으셨고 특별히 지정해서 특정 임무를 부여하신 특수 사역자들이다. 그들은 초대 교회 때 그 시대적 부르심에 따라 사역했고 지금의 교회 시대를 위해 활약하는 일반 목회자들과는 다른 차별화된 사람들이었다.
다 사도들이겠느냐? 다 선지자들이겠느냐? 다 교사들이겠느냐? 다 기적들을 행하는 자들이겠느냐?(고전 12:29).
물론 사도들만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구약 선지자들도 사도들과 유사하게 많은 기적들을 행했었고 사도들의 이적은 구약 선지자들의 연장된 형태라고 볼 수 있는 요소도 있다. 어쨌건 구약 선지자들은 기적을 행했고 사도들도 행했으며 초대 교회 때에는 많은 기적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도처에서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고 현대 교회의 은사주의자들이 아무리 무엇이 되는 것처럼 허세를 떨어도 그들은 사도들처럼 엄청난 기적을 행할 수 없다.
에베소 교회는 자칭 사도와 거짓 사도를 분간할 수 있었는데 이는 진짜와 가짜를 판별하는 쉬운 잣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진짜 사도는 신학교 학위가 있고 가짜 사도는 가짜 학위이거나 허름한 신학교 나와서 드러났다는 게 아니다. 그들을 판별하는 주요 징표는 진짜 기적을 행할 수 있느냐 못하느냐였다.
그러자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을 받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돈을 주며 말하기를 “나에게도 이 능력을 주어 누구에게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하소서.” 하니(행 8:18-19).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은 자신도 안수를 통해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는 능력을 받고자 사도들을 돈으로 매수하려 했다. 그는 사도라는 직이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일종의 성직 매매를 통해서 취득할 수 있는 자격증인 양 오인했던 것이다. 시몬이 그런 더러운 의도를 품었던 것을 베드로가 강하게 질책했고 우리가 그 사실은 본문에서 배우고 넘어가는 것이지만 한 가지 더 놓쳐서는 안 되는 게 있다. 그렇다면 역으로 시몬이 순수하고 깨끗한 의도를 갖고, "아, 나도 당신들 같은 사도가 되고 싶군요. 베드로 사도여, 내게도 안수하여 예수님의 사도로 임명해 주시면 아니 되겠소?" 그렇게 요청했다면 받아들여졌겠느냐 하는 말이다. 그랬다 할지라도 시몬은 사도가 될 수가 없는데 우선 사도라는 조건은 그냥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사도 되고자 하는 욕구를 갖는다고 될 수 있는 게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신 모든 기간 동안 즉 요한의 침례로부터 시작하여 우리를 떠나 들려 올라가신 날까지 줄곧 우리와 더불어 지냈던 이 사람들 중에서 한 명을 뽑아 우리와 함께 주의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해야 하리라.”고 하더라(행 1:21-22).
사도의 기본 조건은 예수님과 교제하며 그 분에게서 배웠던 소위 친견했던 경험이 있는 제자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주의 제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선별해 부르신 자들이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된 것이다. 그래서 원래 사도 바울은 사도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이는 그가 예수님 공사역 당시 주님을 친견한 적도 없고 오히려 주의 제자들을 쫓아다니며 박해까지 했기 때문에 어느 면모에서 보더라도 사도의 자격이 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즉 이방인의 사도로 삼고자 해서 부르신 특별 케이스 사도인 것이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자요, 사도라 불리기도 적합지 못한 자니 이는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이라(고전 15:9).
이제 무슨 말인지 대충 아실 것이다. 카톨릭 역대 교황들은 사도라 일컬어질 수 없는 완전한 짝퉁들이다. 그들은 사도들의 계승자도 될 수가 없는데 신약 성경 어디에도 바울이나 베드로가 후임 사도를 안수하여 임명했다는 기록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에서는 디모데 같은 사람을 '속사도'라 부르고 사도 시대 이후의 이어진 교회사를 속사도 시대라 하는데, 이는 약칭 그렇게 일컫는 것이지 디모데가 진짜 바울의 후임 사도였다는 뜻은 아니다.
사도는 무조건 기적을 행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기적은 예수님이 행하신 초자연적인 이적들을 포함해서 병치유와 마귀를 쫓아내는 기적들을 말한다. 성도가 기도하여, 또는 중보 기도의 도움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은 오늘날도 행해지지만 그건 사도 시대에 했던 것처럼 단회적인 사건으로서 되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꾸준한 기도를 통해서 서서히 되어진다. 그저 말만 척 하면 마귀가 알아서 깨갱 하면서 나가는 시츄에이션은 은사주의자들이 도저히 따라할 수가 없는 사도적 영역이다. 그래서 그 짝퉁 사도들, 조용기와 베니 힌, 캐서린 쿨만 무리들은 사람들을 현혹시키기 위해서 군중 집회에서 신디사이저와 열광된 분위기에 묻어가며 조작된 연극을 벌일 수 밖에 없다. 보다 노골적인 가짜 사도들은 전기 충격기로 희생자들을 감전시켜서 바닥에 나뒹굴게 만드는 쇼도 한다. 좀더 "리얼하게" 마귀를 쫓아내려면 거품을 물고 뒹굴게 해야 하니까 간질병자들을 수고비 주고 단역 배우로 쓰는 치졸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은사주의자들은 모두가 성경적 잣대로 볼때 거짓으로 똘똘 뭉친 거짓말쟁이들이요 그들의 집회와 그들의 교회는 거짓을 확산시키는 전염병 소굴과 같다. 그들이 사람들을 현혹할 때 쓰는 "은혜"라는 말조차 성경에서 가장 오용되고 더럽혀진 은사주의의 전매 특허 용어로 전락시켜 놓았다. 하나님의 "은혜"는 성령으로 위장한 더러운 영을 지닌 은사주의자들이 입에 함부로 올리듯이 "은혜 받으러 가자"고 하는 짝퉁 사도 쇼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들에게 구원을 주는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피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짜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성경을 더 알기를 원하고 성경대로 믿으려고 하지 성경에도 없는 사도적 권능을 찾아서 산 기도원 같은 은사주의 소굴을 헤집고 다니지 않는다.
또 네가 참고 인내하며 내 이름을 위하여 수고하고, 지치지 않은 것을 아노라(계 2:3).
성경적 기독교의 핵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수고하고 참고 인내하며 싸우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 창시자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 어떤 종교와도 다르게 이 이름 하나만으로 교리가 정립될 수 있다.
주,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것은 그 자체가 그 사람이 구원받았음을 증명하는 확실한 고백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예수는 저주받았다고 말하지 아니하며 또 성령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누구라도 예수를 주라고 말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세상 어느 종교도 마호메트를 '주'로 시인한다거나 크리슈나, 공자나 부처를 '주'로 시인한다고 해서 구원이 되지 않는다. 우선 그 자들은 그런 신앙의 대상이 될 자격도 갖추지 못했고 고백한다고 해서 들어줄 수도 없는 일찌감치 뒈져 버린 벌레 먹은 시체들이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의 대상으로 시인하는 그 분, 우리의 고백을 들으시는 그 분이 영원히 살아계신 알파와 오메가,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것은 기독교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을 전파하고 말씀을 먹고 말씀을 깨닫는 것은 모두 '주의 이름을 위하여' 하는 일이지 예수님 따로, 성경 따로 구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것, 지치지 않고 신앙의 페이스를 줄곧 유지하면서 피니시 라인까지 도달하는 것, 신앙이라는 장거리 경주를 완주하는 것을 믿음의 궁극적 승리라 부를 수 있겠다. 완주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 대부분은 달리는 시늉을 하다가 '그리스도 안의 갓난아기'라는 편한 길을 택하여 적당히 적당히 믿음 생활을 하면서 적당히 남들에게 묻어서 가려고 한다.
그래서 원래 '적당히'를 추구하는 기독교인들은 배교할 일도 없는 것이 믿음을 금강석 같이 확실하게 품었던 사람이 변절해야 그게 배교지 원래 타협적이던 사람이라면 배교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이르지 않고, 또 그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지 않고서는 그 날이 오지 아니함이라(살후 2:3).
마지막 날들에 '배교'가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매우 신실한 성도가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고 마귀와 세상에게 타협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런 신실한 사람은 보통 이야기하는 보수주의, 근본주의 반열의 지도자급 목사 정도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미 내면적으로 어느정도 세상과 타협하고 있다. 한국 교계의 지도자급 목사들 중에 대쪽을 고수하는 사람은 이미 멸종되고 없으며 극소수의 성경대로 믿는 교회만 지조나 신조를 말할 자격이라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배교'라는 부분에 대해서 흔히들 말하는 "WCC에 참여하는 교단들"이라는 명제와 관련시키지 않는다. 설령 장로교 교단들이 WCC에 참여 안했다손 치더라도 그 자들이 이미 성경대로 하고 있지도 않은 칼빈주의, 거짓 구원론을 가르쳐 왔던 것이다. 그런 형편없는 교단들이 새삼 WCC에 들어가는 것이 과연 배교이겠느냐 하는 것이다.
마귀는 교회의 근본을 허물기 위해서 성경에 대한 치열한 공격을 2천 년 동안 전개해 왔다. 물론 구약까지 포함한다면 더 늘어나겠지만 완성된 66권 하나님의 말씀, 그 권위에 대한 공격을 자행해 왔고 그 정점을 찍은 것이 20세기 이후 범람하고 있는 각종 변개된 현대 역본들의 홍수인 것이다. 그 공격은 지금도 모든 교회들에 가해지고 있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두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섬기려는 자세를 갖고 있다. 그들은 이미 배교를 마음 속에 품고 양다리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는 거짓 사도들을 판별해 추방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되이 다루는 성경 변개자들도 용납하지 않았는데 바울이 성경 변개를 경고했던 당시 마귀의 사람들은 이미 교회들 안에서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었고 거짓 사도들의 뒷배경에 숨어서 성경 변개, 조작을 일삼고 있었다.
오히려 감추어진 수치스러운 일들을 버리고 교활함 가운데서 행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되이 다루지 아니하며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우리 스스로를 각 사람의 양심에 추천하노라(고후 4:2).
하여간 에베소 교회는 건전한 믿음의 표상인 교회인데 라오디케아 시대인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타입의 지역 교회이고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 그 진정한 계보를 계승했다고 보는 것인데 이 시대의 거듭난 크리스찬들이 다 휴거된다면 그 후에 남겨질 기독교계의 모습은 어떠할까? 일단은 처절한 자성과 회개가 뒤따를 수 있겠는데 이는 현 시대에 거듭나지 못해서 휴거를 놓친 그 교인들이 너무나 다급한 마음에 뒤늦게라도 구원 열차에 탑승하여 시작된 대환란을 모면하려는 생각이 강해지겠기 때문이다. 그런 대환란 시작 이후의 교인들에게 파멸을 가져올 단초는 변개된 성경에 기초한 세계 단일 교회의 미혹이 되지 않을까, 그것을 '배교'로 일컫는 게 아닐까 나는 생각해 본 것이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다소 있나니, 이는 네가 너의 첫사랑을 저버린 것 때문이라(계 2:4).
인생들이 말하는 '첫사랑'은 주로 쌍방향의 사랑보다는 사랑의 개념이 잘 잡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어설프게 시도하다 놓쳐 버리는 아지랭이 같은 미숙한 사랑을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단 한 번 언급된 바 이 '첫사랑'이라는 단어는 일회 언급되었다는 그 의미심장함, 그것도 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다는 그 중요성을 우리가 인식하고 잘 해석해야 할 말씀이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 첫사랑을 품는 순간은 그 분을 구주로 믿는 때부터인 것이 사실이다. 부처를 따르는 사람들이 부처에게 첫사랑을 바쳤다던지 빠져서 헤어나지 못한다느니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다른 종교 창시자들의 사정도 다 동일한데 그 종교인들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 대해 전혀 무지한 메마른 사람들이다.
많은 물들로도 사랑은 끌 수 없으며 큰 물들로도 잠기게 할 수 없나니, 사람이 그의 집의 모든 재산을 주어 사랑과 바꾸려 한다면 그 일은 완전히 멸시를 받으리라(솔 8:7).
성경에서 말씀하는 첫사랑은 하나님께서 지옥에 가야 하는 타락한 죄인들을 먼저 사랑하신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여기에 사랑이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의 아들을 우리 죄들을 위하여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이라(요일 4:10).
그 사랑은 끌 수 없는 사랑이며 홍수로 침몰시키지도 못하는 사랑, 마천루처럼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게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특히 재산으로 바꿀 수 없다고 했으니 이것은 돈 주고 면죄부나 교회 직분을 산다고 해서 하나님의 호의를 살 수 없다는 뜻이다. 에베소 교회는 그 첫사랑을 버렸고 자기들이 사역하는 이유를 습관과 종교 관행에서 찾기 시작했다. 일요일, 즉 주의 첫날에 모여서 주를 경배하고 찬양하는 그 일도 '관행'이 되기 시작했다. 그것이 성경적인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종교 관행이 되는 순간부터 그 기독교는 활력을 잃어버리고 절기와 종교 축일을 지키는 카톨릭화 되기 시작한다.
흔히들 첫사랑은 이루어지는 경우가 드물고 또 이루어지지 않고 원래 추억으로 간직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첫사랑은 반드시 인간들이 답을 해야 하고 주님의 사랑의 초청에 대해 예라고 말하던지 아니오라고 말하던지 그 선택은 영원한 멸망과 영원한 구원의 갈림길이 되는 것이다.
왕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불러오라고 자기 종들을 보냈으나 그 사람들은 오려고 하지 아니하였느니라(마 22:3).
하나님의 나라라는 세계, 즉 성령의 나라,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셔서 관장하시는 그 영적 나라는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 격조 높은 기쁨 그 자체이다. 그것은 24시간 잔치가 열리는 끝나지 않는 잔치의 장인 것인데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는 그것을 고된 노동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마르다가 열심히 주를 섬기면서도 섬김의 의미를 모르고 습관처럼 그렇게 했듯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의 의미를 모르고 하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는 완벽한 간증, 완벽한 성별, 냉철한 이단 판별의 능력, 성경적 믿음의 실행에 주저 않는 용기있는 교회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그들 안에 하나님의 첫사랑, 성도로서 가장 간직해야 하고 세상에 전파하는 기본 메시지인 그 사랑이 메말라 감으로써 그들은 이후 제도 교회라는 형태, 즉 사도신경이 나타내 주는 그런 형식화된 교회의 모양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하고 회개하며, 너는 처음 일들을 행하라. 만일 그렇지 않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속히 너에게 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4절에서는 "다소" 책망할 것이 있다고 했는데 5절의 분위기는 급전환되면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는 살벌한 경고의 말씀이 나온다. 이는 어찌된 분위기 반전인가, 독자가 이것을 비교해 읽으면서 이게 왜 이렇지? 라는 부분에 대해 생각을 해 보라는 성령의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4절에서는 "에베소 교회는 다 잘 하고 있는데 딱 하나 요거 좀 모자라구나, 이것만 고쳐라"였는데 5절에서는 "에베소 교회여, 그런 식으로 계속 할 것 같으면 이제 사표 써야 된다. 해고 당할 수 있어."라는 엄중 경고의 메시지로 전환되었다.
우선 에베소 교회의 개개인들이 이 말씀을 받을 때 그들이 '촛대가 옮겨지는 것'을 신자 개인의 구원 상실이라는 위협으로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다. 여기서 계속해서 '너'라고 단수로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에베소 교회의 목사에게 경고하는 말이 아니다. 에베소 교회 천사가 목사가 아니라고 내가 거듭 강조했지만 다시 강조한다. 에베소 교회의 목사가 사랑이 식었다, 잘못 하고 있다라고 지금 예수님이 에베소 교회의 목사에게 엄중 경고하고 계신 게 아니다. 여기서 '너'라는 대상은 대표 단수로 쓰인 것으로서 에베소 교회의 목사 아래 교인 일동 전부를 말하는 것이다. 시대적으로는 A.D. 1세기의 지역교회들 전체에 대한 포괄적 지칭이고 영적으로는 2천 년 교회사 기간 중 어떤 그리스도인들한테도 교훈이 되며 예언적으로는 앞으로 대환란 때 형성될 에베소라는 환란 교회 모임에게 주어진 경고장이다.
촛대는 권위, 사역의 위탁이라는 상징으로 쓰이고 있다. 여러분이 서양 장기를 둘 때 적의 퀸을 잡는다, 할때의 그 상대편을 잡는 것이 옮기는 것과 같은 의미일 수 있다. 동양 장기도 그렇지만 상대편 왕을 잡아 버리면 게임은 거기서 종료되어 버린다. 여왕이 잡히게 생긴 외통수 상황을 체스 용어로 "체크 메이트"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네 촛대를 거기서 옮길 거야'라는 것은 너 게임 접어야 될 거야. 휘슬 불거야. 너한테 더 이상 하나님 일을 안 시킬거야라는 두려운 경고의 말씀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의 촛대를 옮기셨을까 안 옮기셨을까?
이 부분에 대해 솔직 담백하게 해석하는 주석가들은 내가 볼때 없다. 에베소 교회, 역사적으로 A.D.1세기의 요한 당시 그 교회들은 결국 종교화 형식화의 전철을 밟아갔고 교부 시대 초반에 접어들면서 완전히 형식화의 길로 가버렸다. 주님은 옮긴다고 경고하신 그 촛대를 결국 옮기셨고 에베소 시대는 종막을 고한 것이다.
라오디케아 시대는 어떠한가, 20세기부터 지금에 이르는 이 시대는 에베소와도 다르게 소수의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 세포들이 죽은 교회들 가운데서 간간히 숨쉬고 있는 열악한 형편이다. 이제 주께서는 촛대를 더 이상 옮길 필요도 없이 교회 시대를 접어 버리실 것이다. 교회 시대가 끝나면 대환란이 오는데 그러므로 라오디케아에 대해서는 촛대 옮긴다는 경고가 빠져 있다. 왜냐하면 어차피 21세기의 교회가 역사적인 교회시대로서는 끝인 것이고 그 뒤에는 다른 시대가 더 없고 대환란만 남기 때문이다.
나의 계시록 해석이 초신자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무척 어렵게 여겨질 수도 있겠다 생각하는데 그래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애쓰고 있고 또 어려운 것을 더 어렵게 설명 안하려고 의식하면서 전개하고 있으니 독자들은 양해하고 양지해 주셨으면 한다. 다음 시간에 에베소 교회의 나머지 부분 본문과 이후 스머나 교회부터 설명을 이어나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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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계2: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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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너=2:1의 천사 (한킹)을 말하는 것
그럼 천사가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어이 없는 주장이 등장하게된다
천사가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근거는 전무
고로 억지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