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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모세의 빛나는 얼굴을 보고 그들은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탈출기의 말씀 34,29-35>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내려왔다.
산에서 내려올 때 모세의 손에는 증언판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모세는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어 자기 얼굴의 살갗이 빛나게 되었으나,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30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를 보니, 그 얼굴의 살갗이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31 모세가 그들을 불렀다.
아론과 공동체의 모든 수장들이 그에게 나아오자, 모세가 그들에게 이야기하였다.
32 그런 다음에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그에게 가까이 왔다.
모세는 주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였다.
33 모세는 그들과 이야기를 다 하고 자기 얼굴을 너울로 가렸다.
34 모세는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러 그분 앞으로 들어갈 때는 너울을 벗고, 나올 때까지 쓰지 않았다.
나와서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였다.
35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얼굴의 살갗이 빛나는 것을 보게 되므로, 모세는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러 들어갈 때까지는, 자기 얼굴을 다시 너울로 가리곤 하였다.
✠ 복음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3,44-46>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4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45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46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밭에 묻혀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요?
절대 최고의 가치를 지닌, 내 목숨을 내어주고서라도 얻고 싶은 것, 그것은 무엇일까요?
참된 행복, 참된 기쁨, 참된 보물, 그것은 무엇이며, 대체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우선 그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밭에 묻혀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44)
이는 그 ‘보물’이 멀리 하늘 위에 높이 매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땅에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나의 일터인 내 직장, 내 가정, 내 공동체가 바로 보물이 묻혀있는 “밭”이라는 말씀입니다.
“보물”은 내가 있는 이곳에 ‘이미 묻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루카 17,21)
그렇지만 그 보물은 누구나 발견하는 것은 아닙니다.
밭을 충실히 일구고 가꾸는 자만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습니다.”(마태 13,45).
우리의 머릿속, 관념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진주를 찾아다니는” 행동 안에 깃들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길을 찾는 발길 그 안에, 진리를 더듬는 손길 그 안에, 사랑을 찾아나서는 우리의 행위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하느님을 찾아나서는 신앙의 여정, 신앙의 행위 그 안에 깃들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그 진주는 누구나 발견하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찾아다니는 자만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는 이 “하늘나라”를 어떻게 얻을 수가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샀다.” (마태 13,44.46)
이는 “하늘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곧 우리가 비록 보물을 발견하고 찾았다 해도 그것이 곧바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진정 그 보물을 차지하려면 “먼저” “가진 것을 다 파는 일”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목숨까지 내놓으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비우지 않고는 채워지지 않는 법인가 봅니다.
그러나 비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는” 일입니다.
사는 일이 본질이지 비우는 일이 본질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그 보물이 더 값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그것을 “사는” 일입니다.
비록 보물을 발견했다 해도, 또 가진 것을 다 팔았다 해도, 그 보물을 실제로 사들이기 전에는 아직 그 보물은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살 때라야 그것은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됩니다.
하지만 보물이 없다면 결코 그것을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분명한 것은 그 보물이 “먼저”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먼저 있는 그 보물이 우리를 먼저 이끈 것입니다.
이미 우리 가운데 있으면서(루카 17,21)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보물을 차지하는 자가 참으로 복된 자입니다.
그 보물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 그리스도요, 그분의 나라입니다.
-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마태 13,44)
주님!
밭을 일구는 제 손길이 당신의 나라를 찾아 발견하게 하소서.
발견하고서 가진 것을 다 팔아 사게 하소서.
그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더 값진, 모든 것을 합해도 그것 보다 낳을 수 없는, 도저히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최상의 것, 그것을 가지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기에 목숨을 내어주고서라도 얻게 하소서.
아멘.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물을 어디에 부어야 할지 모를 때 깨진 독이라도 찾게 된다>
오늘 복음도 역시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습니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삽니다.
이는 하늘 나라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모든 에너지를 그것을 얻는 데 쓸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의 비유도 말씀하십니다.
값진 진주를 발견하자 그도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삽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오늘도 팔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간도 있고, 건강한 몸도 있고, 각자의 재능이나 능력이 있으며, 물론 재산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어디에 사용하나요?
어차피 인생은 내가 지닌 에너지를 무언가 얻기 위해 소진하다 가는 삶입니다.
예쁜 여자를 얻기 위해 소진할 수도 있고, 명예를 얻기 위해, 혹은 부자가 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쓸 수도 있습니다.
사실 모든 에너지를 무언가 얻기 위해 쓴다면 그것을 얻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러나 우리 옆에 ‘깨진 독’도 많습니다.
그래서 버는 것보다 쓰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연예계를 보면 돈 잘 버는 자녀들을 이용해 부모가 그 모든 것을 챙기다 결국엔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가 끊어지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배우 김혜수 씨의 예도 있었습니다.
김혜수 씨가 2012년까지 벌어들인 돈의 액수는 약 170억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2012년 당시 김혜수 씨는 월세에 살아야 했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어머니가 여기저기 투자하다 진 빚을 갚아주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결국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어머니와 관계를 끊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어머니는 딸의 이름을 대며 많은 빚을 졌고 이것이 언론에 나오자 김혜수 씨는 자신은 어머니와 8년간 만난 적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 어머니와 관계를 끊기 그나마 잘했던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연예인들에 장윤정 씨나 박수홍 씨도 있을 것입니다.
부모와의 인연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부모가 가진 재산을 무엇을 위해 써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것으로부터 부모를 의심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물론 부모도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렇게 하겠지만, 부모가 이미 성장하여 어른이 된 자녀의 것까지 빼앗을 권리는 없습니다.
부모의 가장 큰 역할은 자녀를 독립시키는 것이지 자기에게 종속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가 독립적인 성인이 되었을 때 가진 재산과 에너지를 어떻게 쓰고 살아야 하는지 먼저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와 자녀들을 위해 밭에 묻힌 보물이 무엇인지, 엄청난 가치의 진주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재물과 에너지를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지 알고 자녀가 어른이 되었을 때 쓸데없이 깨진 항아리에 물을 붓게 만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밭에 묻힌 보물은 ‘하늘 나라의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느끼게 해 주는 ‘성령님’입니다.
이를 위해 가진 것의 100%를 사용할 줄 알게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땅을 사기 전까지는 그 보물이 나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을 받기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할 용기가 있는 사람의 것이 되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삼구를 이기고 기도할 때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그러니 돈이나 시간을 어디에 사용해야겠습니까?
일단 ‘세속’에서 멀어지기 위해 가난한 사람을 돕고, ‘육욕’에서 멀어지기 위해 운동하며,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 겸손을 위해 에너지를 소진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위한 시간, 곧 미사나 피정 같은 것을 가고 아침기도나 저녁기도 시간을 벌기 위해 돈을 써야 합니다.
그 시간까지 바쳐가며 돈을 벌겠다고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물을 어디에 부어야 하는지 몰라 어쩔 수 없이 가까이 있는 깨진 독에라도 붓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목마르면 먼저 내가 마시고 다른 사람이 마시게 하고 또 그 물을 더 얻기 위해 투자해야 하는 것을 안다면, 굳이 옆에 있는 깨진 독에 물을 붓는 어리석은 삶은 살지 않을 것입니다.
오랜 무명 생활로 간신히 월세살이하며 군고구마라도 팔아야 했던 ‘임영웅’ 씨.
그가 ‘미스터 트롯’을 통해 받은 상금 1억 원은 어머니에게도 드리고 그동안 여기저기 갚아야 할 곳에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동차 첫 단독 광고를 찍고는 그 모든 수익을 전액 기부하였습니다.
자신도 월세를 살면서 첫 광고 수익 전액을 기부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에너지를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아동복지 재단에 1억 원이라는 거액을 통 크게 기부하고, 코로나 여파로 행사가 많이 줄었음에도 알게 모르게 기부의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그의 선행은 사실 유명해지기 전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예를 들면 2017년 아침마당에서 5연승을 하며 받은 상금 100만 원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전액 기부하였습니다.
그 당시 임영웅 씨는 군고구마를 팔며 월세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수입이 없던 시기에도 연탄 나누기 봉사활동을 다니며 묵묵하게 봉사활동을 해왔습니다.
이렇게 어디에 에너지를 써야 하는지 명확히 안다는 것은 부모로부터 올바른 교육을 받았음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부모는 재산을 쓸 때, 하느님 나라 곧 마음의 떳떳함, 그리고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목적으로 쓰도록 교육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감정을 모르는 사람, 그래서 그 감정을 위해 에너지를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것들을 깨진 독에라도 붓게 되고 결국 인생을 헛살았다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어떤 부자는 자녀에게 어렸을 때부터 용돈을 주며 10%는 십일조를 내고, 10%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쓰며, 30%는 저축을 하고 나서 나머지를 원하는 대로 사용하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 돈을 사용할 때 얻게 되는 마음의 떳떳함과 기쁨과 평화를 알게 먼저 알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교육을 통해 아이는 자신의 에너지를 잘 사용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깨진 독에 물을 부으며 느끼는 감정이 싫어서 에너지를 잘못 사용하며 사는 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녀들을 교육할 때, 어떻게 벌어야 하는지가 아니라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지 명확히 먼저 깨닫게 해야 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외딴 바닷가 언덕 위에 위치한 저희 집의 경비견이자 귀염둥이 친구들이 둘 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언제나 시선과 귀가 아래로 향해 있습니다.
낯선 사람이라도 포착되면 얼마나 맹렬히 짖어대는지 놀랄 정도입니다.
나름 최선을 다해서 근무를 서는 것 같습니다.
가끔 비상 상황에서 체구가 작은 친구가 짖는 데 소홀했다 하면 큰 녀석이 절대로 가만있지 않습니다.
‘너 지금 근무 소홀히 하는 거야?’하며 왕왕 짖으면 할 수 없이 작은 친구가 따라서 왈왈 짖는 모습이 정말 웃깁니다.
녀석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면 정말이지 재미있습니다.
아무래도 가장 좋아하는 것은 먹는 것입니다.
매일 두 번 먹는 사료 말고, 햄이나 고기 조각 같은 특식 앞에서는 정신을 못 차립니다.
특식을 들고 가면 꼬리뿐만 아니라 온몸을 흔들며 기쁨을 표현합니다.
특식에 못지않게 녀석들이 좋아하는 것은 산책입니다.
평소에는 인사도 잘 하지 않는 녀석들이 ‘산책 가자’하면 즉시 달려 나와 기쁨을 표현합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고 싶어 안달입니다.
여기저기 코를 들이대며 냄새를 맡고, 나름 자기 영역을 표시하며 산책의 기쁨을 만끽합니다.
그러나 그 외 다른 것들은 강아지들에게 별 의미나 가치가 없습니다.
녀석들 눈앞에 5만원 짜리 한 장을 펼쳐서 흔들어 봐도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돈의 가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 돈이면 자기들이 먹을 최고급 사료 한 달 치 살 수 있는 대단한 가치라는 것을 모릅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 인생에 있어 정말 중요한 과정이 하나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 진정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것입니다.
복음 말씀이며, 예수님의 가르침이며, 하늘나라며, 정말 대단하고 값지고 중요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거들떠보지도 않고 잡동사니 취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당부가 오늘따라 더욱 절박하게 느껴집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여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마태오 복음 13장 44절)
이런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며, 동시에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입니다.
잠시 쥐고 있었지만 즉시 날아가 버릴 재산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 마음 안에 간직할 수 있는 불멸의 보물,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더 이상 고통이 다가와도 울부짖지 않습니다.
더 이상 아쉬움도 안타까움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다시 획득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회개의 곡괭이로 자신의 그릇된 과거를 갈아엎는 사람, 믿음의 쟁기로 자신의 부끄러운 하루를 뒤집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와의 참 만남이라는 큰 선물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
아무리 값진 보물이라고 해도 어떤 사람의 눈에는 보이고 어떤 이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값진 진주를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찾아 다녀야 얻을 수 있습니다.
애쓰지 않는 사람이 보물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주어진 보물이고 따라서 보물을 얻기 위한 희생과 헌신이 요구됩니다(마태13,46).
그리고 값진 보물을 발견했으면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하여 그보다 못한 것들을 처분하게 됩니다.
새 옷을 장만하면 전에 입던 옷을 정리하게 됩니다.
더 좋은 것을 얻으면 하나는 자연스럽게 정리됩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면 다른 모든 것은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말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필리 3,7-9)
마태복음 19장 이하의 부자청년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온 젊은이에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하셨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는 주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기의 재산을 포기하지 못하였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양다리 걸치기나 어중간은 없는 법입니다.
젊은이는 결국 주님을 차지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참으로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식별할 수 있는 지혜가 요구됩니다.
하느님을 잃어버리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무엇으로도 마음을 흐트러 뜨리지 말며 무엇 때문에도 놀라지 말라!
모든 것은 지나가나 하느님은 변하지 않는다.
하느님을 차지한 자에게는 부족할 것이 없으니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
결국 하느님을 얻으면 모두를 얻은 것이요, 모든 것을 얻어도 하느님을 차지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나라를 성인들이나 가는 곳으로 어렵게만 생각한다면 아무 발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마태 6,33)을 구하고 그리하여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러 오지 않으시고 오히려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실망과 좌절보다는 하느님의 자비를 갈망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내놓았던 성녀 엘리사벳 씨튼은 고백합니다.
“하느님만이 나에게 남은 피난처이십니다.
저는 다른 모든 피난처들을 잃어버리고 주님에게만 의존하게 되는 데서 오히려 영적인 기쁨을 느낍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재산은 무엇인가를 살펴야겠습니다.
보물은 사람의 마음이 머무는 곳에 있고 세상의 어떤 것도 다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지 말고’(루가 9,62) 내 삶의 자리에서 참 보물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 정녕 당신은 저의 등불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저의 어둠을 밝혀 주십니다.”
(2사무 22,29).
이제 당신이 밝혀 주시는 보물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나라의 소유자는 이기주의자일까?>
오늘 주님의 비유를 읽으면서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드신 비유는 너무 이기주의적인 비유가 아닌가?'
‘하늘나라의 사람이라면 보물을 발견하고 자기만 가지려고 욕심내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도 그 밭을 알려주고 같이 사자고 해야 되는 것 아닐까?’
그렇습니다.
오늘 비유에서는 주님께서 이 부분을 빠트렸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의 소유자는 마치 다른 사람이 그 밭을 사기 전에 얼른 자기 재산을 팔아 자기만 그 밭을 차지하는 이기주의자 같습니다.
제가 자주 하는 얘기지만 수도자란 하늘나라의 선취자요 증거자입니다.
선취자(先取者)란 다른 사람보다 먼저 하늘나라를 취한 사람이라는 뜻이고, 그래야 자기가 소유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증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소유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는 없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수도자건 아니건 보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사기 위해 모든 것을 파는 사람은 이기주의자가 아니라 선취자인데, 하늘나라라는 보물을 발견하는 것도 어렵고, 발견하였다고 해도 자기가 가진 것을 다 팔기도 어렵기에, 주님께서는 보물의 발견과 가진 것의 포기에 대해서만 강조하신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밭에 묻힌 보물은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묻힌 보물처럼 숨겨져 있기에 찾지 않는 사람과 눈이 없는 사람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지 않는 사람도 그것을 살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아까워 기꺼이 팔 수 없는 사람은 보물인 하늘나라를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늘나라 보물이 밭에 묻혀있고 숨겨져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늘나라야말로 진짜 보물인데, 이 세상 좋은 것들에, 그러니까 하늘나라의 최고선이 이 세상의 차선이나 차차선들에 묻혀있고 숨겨져 있고 가려져 있다는 뜻이겠습니다.
지혜서 13장은 이렇게 얘기하지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간혹 인간은 그것들 때문에 하느님을 잃는다고.
"그 아름다움을 보는 기쁨에서 그것들을 신으로 생각하였다면 그 주님께서는 얼마나 훌륭하신지 그들은 알아야 한다.
아름다움을 만드신 분께서 그것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크게 탓할 수는 없다.
그들은 하느님을 찾고 또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러는 가운데 빗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분의 업적을 줄곧 주의 깊게 탐구하다가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하도 아름다워 그 겉모양에 정신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간혹 예쁜 여자 때문에 수도원을 나가는 사람이 이와 같은 것일 겁니다.
하느님께서 여자를 너무 예쁘게 만드셨기 때문에 그 예쁜 여자가 눈을 멀게 해 최고선이신 하느님을 보는 것을 못보게 하잖습니까?
그러나 지혜서는 이어서 이렇게 또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들이라고 용서받을 수는 없다.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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