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들의 살결을 어루만진다 시체의 향기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니 죽은 나무의 시체들, 오래될수록 혈색이 살아나는 목재를 쓰다듬으며 나는 환생을 꿈꾸지 않는다 이 나무들이 썩지 않는 것은, 아니 더욱 생생하게 연륜을 드러내는 것은 마음을 비웠기 때문이다 가을날 바람에 흩어지는 나뭇잎을 보아라 나무들은 이미 헛된 것들을 전부 허공에 풀어주었다 살갗을 깊이 파고들었던 상처도 첫사랑의 기억도 거칠었던 수피는 이미 다 깎여나갔다 남은 것이라곤 하얀 뼈 이 뼈는 내 것이 아닌 너를 위한 선물 서랍이 되어 네 추억을 간직하거나 소박한 장이 되어 네 생애를 전시해줄 것이다 그의 공방에서 나는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서랍과 장은 언젠가 버려지고 썩어 없어질 것이지만 나의 기억 속에서 이 향기는 불멸이다 환생의 꿈마저 놓아버린 나무의, 흰 뼈의, 향기가 진동한다
<시작노트>
비울수록 고귀해진다 비울수록 아름다워진다 비울수록 충만해진다 영원을 버려야 영원을 얻는다
김옥성
1973년 전남 순천에서 나고 자랐다. 오랜 시간 종교적 상상과 생태학적 사유를 천착해온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다. 현재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현대시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와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졸업하였다. 1996년 대학문학상 시 부문, 1997년 대학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하였으며, 2013년 김준오 시학상을 받았다. 2003년 『진주신문』 가을문예와 『문학과경계』에 소설로, 2007년 『시사사』에 시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도살된 황소를 위한 기도』가 있다. 주요 학술서로 『한국 현대시와 불교 생태학』, 『한국 현대시와 종교 생태학』, 『현대시의 신비주의와 종교적 미학』, 『한국 현대시의 전통과 불교적 시학』 외 다수가 있다. 문화광관부 우수학술도서,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등에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