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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평
1913년 4월 여수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17년 3월 졸업했다. 1917년 4월 경성부로 이주한 뒤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불과 4개월 만에 자퇴했다. 일본 교토 제3고등학교(1922년 4월 ~ 1925년 3월)와 교토 제국대학 법학부(1925년 4월 ~ 1928년 3월)를 졸업했고 1927년 12월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1928년 4월 14일 조선총독부 사법관 시보와 경성지방법원 및 검사국 사무수습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4월 24일 경성지방법원 검사대리로 임명되었다. 1928년 11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 대례 기념장을 받았으며 전주지방법원(1929년 12월 28일 임명)과 대구복심법원(1931년 10월 14일 임명), 경성복심법원 판사(1935년 7월 22일 임명)를 역임했다. 조선총독부 판사와 부장판사 재직 시절 독립 운동가 국진순에게 징역형을 선고하는 한편 통의부(統義府, 만주에서 활동하던 항일 무장 독립 운동 단체)가 일제 기관 폭파 및 군자금 모금을 목적으로 파견했던 조인현, 김종철, 오석완 등에게 징역형을 선고하는 등 항일 독립 운동 관련 재판 10건에 참여하였다.
1941년 3월 29일 평양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3월 31일 고등관 3등에 서위되었다. 1941년 5월 9일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받았으며 1943년 3월 11일 평양지방법원 부장판사를 끝으로 퇴직했다.
1943년 4월 5일 일본 정부로부터 정5위에 서위되었고 같은 해 4월 8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변호사로 등록했다. 1944년 12월 6일 경성변호사연맹 주최로 열린 전의앙양대강연(戰意昻揚大講演)에서 동대문 용두실업취체소 연사로 참여했다.
광복 이후에는 한때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기도 했지만, 한국 전쟁 중인 1950년 8월 6일 납북되었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조선총독부 판사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사법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원종억
원종억(元鍾億, 일본식 이름: 元原鍾億, 1902년 ~ ?)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법조인이다.
충청남도 천안군 출신이다. 1920년에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고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 서기과에서 통역생 겸 서기로 일했으며,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하면서 법조인이 되었다.
1925년 조선총독부 판사로 임용되어 공주지방법원 강경지청에 발령받았고, 이후 경성지방법원 인천지청, 해주지방법원, 평양복심법원 판사를 차례로 지냈다. 평양복심법원 판사로 근무하던 1935년에 이 법원의 판검사를 통틀어 유일한 조선인이었다.[1]
충청남도와 경기도, 황해도, 평안남도 지역에서 총독부 판사로 근무한 기간은 약 19년이다. 평양복심법원 판사이던 1939년을 기준으로 정6위에 서위되어 있었다.
퇴관한 뒤에는 마지막 임지였던 평양에서 변호사를 개업하였고, 평양과 서울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1967년까지도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 중이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중 판사 부문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사법 부문에 모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이충영
이충영(李忠榮, 1908년 ~ ?)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법조인이다.
경상북도 칠곡 출생이다.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하였고, 일본제5고등학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법학과를 1932년 졸업했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대구부, 함흥부, 광주부, 평양부의 복심법원에서 판사로 근무하다가, 1940년대 초반 변호사로 전직했다. 평양복심법원을 끝으로 판사직에서 사임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 가족들은 이충영이 창씨개명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변호사 개업 허가도 받지 못했다고 밝혔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광복 후 서울에서 변호사로 근무하던 중 한국 전쟁이 발발했고, 서울이 조선인민군 점령 하에 있던 1950년 8월 인민군에게 연행되어 납북되었다.
이충영의 맏아들이 서울대학교 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정치인 이수성, 둘째 아들이 정치학자 출신으로 역시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을 지낸 이수인이다. 이수성이 199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을 때, 상대 후보였던 이회창 측은 이충영이 좌익 인사였으며, 자진 월북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공격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반공 검사로 유명했던 선우종원이 사실무근이라 증언한 바 있다.[1]
큰 아들은 국무총리를 지낸 이수성이고, 둘째아들 이수인은 영남대 교수와 민주당 의원을 지냈으며, 셋째 이수윤은 한국교원대 교수이고, 넷째 이수억은 아서 앤더슨 대표를 지냈다
백선엽
백선엽(白善燁, 1920년 11월 23일 ~ )은 일제강점기 만주국의 간도특설대 군인 장교이자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외교관, 기업인, 교육인이며 사회운동가이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9기로 졸업하여 만주국의 장교로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하였으며 만주군 중위로 있을 때 1945년 광복을 맞았고, 해방 직후에는 고당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하였다. 이내 소련군이 이북 지역에 진주하게 되자, 1945년 12월에 월남하게 된다. 1946년 군정기 남조선국방경비대에서 활동하였고, 1949년 제5사단장이 되었으며 1950년 한국 전쟁에 대한민국 국군 장군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
1950년 제1사단장으로 승진한 뒤, 줄곧 전쟁에 참전하다가 1952년의 휴전 회담 때 한국측 대표단의 한사람으로 휴전문서에 조인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예편 후에는 중화민국·프랑스·캐나다 대사 등의 외교관을 지냈다.
호는 우촌(愚村), 운산(雲山), 본관은 수원(水源),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
백선엽은 1920년 11월 23일 일제 강점기 한국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백윤상(白潤相)과 어머니 방효열(方孝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주변에 의지할 친척이 없어, 홀어머니 아래에서 동생들과 함께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백선엽이 일곱살 때 생활고로 온가족과 함께 대동강에 뛰어 자살하려고 했으나, 그의 누이의 설득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후 그의 어머니는 길쌈과 밭일, 누이들은 공장의 여직공으로 입사하여 가정의 생계를 꾸려갔다.
유년시절의 그는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었으나 생각이 깊고 신중하였다. 그는 평양부립도서관에 자주 다니며 책을 읽고 신문사설을 읽는 것을 즐겼다.
그는 군인이 되기를 희망하였으나 변변치 않은 가정 환경으로 인하여 평안남도 강서 약송소학교를 중퇴한 이후 평안남도 평양사범학교로 진학한다. 1939년 3월 평양사범학교를 졸업 후, 교직에 종사했다. 그러나 군인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만주국 봉천군관학교에 진학하였다.
1941년 12월 30일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제9기로 졸업하고 견습군관을 거쳐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자무쓰 부대에 배속되었다가, 1943년 2월 간도특설대로 전근, 3년 동안 근무하였다. 1943년 12월 러허성에(열하성)서 간도특설대 기박련[1] 소속으로 팔로군 공격작전에 참가했다. 간도특설대는 1938년 12월 1일 기존에 있던 조선인 국경감시대를 폐지하는 대신에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창설된 기구였으며 사령부는 간도성(젠다오 성) 연길(延吉, 옌지) 부근 명원구에 있었다. 보병 기갑 혼성 부대로 출발한 이 부대는 당초 360명으로 발족되었으나 나중에는 800명 가까이 늘어났다 한다. 부대장은 일본인 장교였으나 중대장의 반수와 소대장 이하 전 사병은 조선인이었다.
이 부대는 1938년 12월 창설 직후 간도, 길림, 통화 일대에 출몰하는 안창길(安昌吉), 양정우(楊靖宇), 진한장(陳翰章), 최현(崔賢) 등의 반만 항일(反滿抗日) 세력의 토벌에 투입되었다.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패망으로 해산할 때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에 대해 모두 108차례 토공(討攻) 작전을 벌였다.
백선엽의 간도특설대에서의 구체적 역할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백선엽이 남긴 회고록에 그의 활동 내역이 일부 보인다. 《군과 나》에 따르면,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서 김찬규(金爛奎), 송석하(宋錫夏), 김석범(金錫範), 신현준(申鉉俊), 이용(李龍), 임충식(任忠植), 윤춘근(尹春根), 박창암(朴菖岩) 등과 함께 근무했다.[2]
1944년 봄 열하성(熱河省)과 중국 북부에서는 팔로군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에 일제는 만주군 3개 여단을 파견했다. 백선엽과 간도특설대는 만주군 철석부대 산하에서 정보수집, 반공 선전, 체포된 항일세력 심문 등을 맡았다.
1944년 여름, 간도특설대는 러허 성(熱河省)을 떠나 허베이 성(河北省)으로 이동했다. 백선엽과 간도특설대는 여기서 1945년 1월까지 항일 세력을 상대로 한 작전을 벌였다.작전이 끝나자 그는 원대복귀명을 받고 귀대했다. 1944년 가을, 평양에서 노인숙과 결혼하였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할 당시 백선엽은 만주군 ""헌병"" 중위였다. 그는 만주로 진격해 오는 소련군을 만나 명월구에서 강제 무장해제를 당했다.
1993년 일본에서 출간된 ‘간도특설대의 비밀’에서 백선엽은 아래와 같이 회고 했다. [3][4]"간도특설대가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어 커다란 전과를 올린것은 당연한 일이였고 간도특설대가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고 했다. 그는 회고에서 간도특설대를 우리라고 표현하였는데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동포에게 총을 겨눈것이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라고 했다. 또한 간도특설대의 활동에 대해 "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2000년 일본어로 발간된 회고록 《젊은 장군의 조선전쟁》에서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 대해 "일종의 특수부대로서 폭파, 소부대 행동, 잠입 등의 훈련이 자주 행해졌다"고 썼다.
간도특설대는 對비정규전 특수부대 형식을 취하고 있어 기동타격, 공작, 정보, 심리, 매복, 추격, 섬멸작전을 주로 행했고 또한 만주군 헌병대에도 종전까지 근무하여 향후 국군 육군 정보국장을 하고 한국전쟁시 빨치산토벌의 선봉장이 되는 계기가 된다. 또한 이는 그의 일본어 저서 대 게릴라전-미국은 왜 졌는가'로 이어지며 같은 1사단장을 지낸 전두환이 對비정규전 부대인 '특공여단'을 후방 2군직할부대로서 창설하는 것으로 맥을 잇는다.
종전 후, 조선으로 돌아와 당시 민중들로부터 많은 신망을 받고 있었던 고당 조만식을 찾아갔다. 이때 조만식은 그를 비서로 채용하여 백선엽은 해방직후 잠시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자신의 친일행적을 감추기 위한 방편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5] 이후 조만식의 민족주의 운동에 참가하지만, 북한에서의 공산주의체제 성립을 피해, 1945년 12월 24일에 월남하였다. 소련군의 일제 부역자에 대한 처벌과 지주들에 대한 재산 몰수에 반감을 품게 된 그는 반공주의자로 변신한다. 그러나 그는 반공주의 청년단체에는 가담하지 않는다.
월남 후 1945년 12월 5일에 만들어진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고, 1946년 2월 26일에 임관하여[6], 국방경비대 육군부위(중위)가 되었다. 그 뒤 같은 해 1월 15일에 창설된 국방경비대에서 입대하여 제5연대장을 맡았다.[6] 연대장 부산에 도착, 부산항에 도착한 미군의 물자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업무를 완벽하게 처리하여, 군수품을 중간에서 빼돌리는 군납업자와 내부에서 협조한 하사관과 장교들을 적발하고 분실률을 2-3%로 낮추게 된다. 물자 분실률을 50%대에서 10%대 미만으로 줄이게 되자, 미군은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됐고, 이후 백선엽의 능력을 믿고 신뢰하게 되었다.
조병옥의 건의로 미군정 하에서 국방부격인 통위부가 조직되자 그는 통위부로 대기발령되었다가, 곧 통위부장 유동열에 의해 능력을 인정받아 1948년 4월 통위부 정보국 국장에 임명되었다.
1941. 12. XX. : 만주 봉천군관학교 졸업, 제2차 세계대전 종전시 만주군 육군 헌병 중위 - 당시 헌병은 Military Police가 아닌 지금의 정보,기무,특수전 병과와 유사
1946. 02. XX. : 군사영어학교 졸업
1946. 02. 26. : 국방경비대 부위(중위) 임관, 보병 제5연대 A중대장
1946. 09. XX. : 제5연대 제1대대장
1947. 01. 01. : 중령, 제5연대장
1947. 12. 01. : 제3여단 참모장
1948. 04. 11. : 통위부 정보국장 겸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정보처장 - 만주군 간도특설대(정보,첩보, 對비정규전 항일토벌부대), 헌병(역시 비정규, 공작, 정보) 경력을 바탕
1948. 12. 25. : 대령
1949. 07. 30. : 제5사단장
1950. 04. 23. : 제1사단장
1950. 07. 25. : 준장
1951. 04. 15. : 소장, 제1군단장
1951. 07. 10. : 휴전회담 한국 대표
1951. 11. 16. : 백 야전군 사령관 - 만주군 간도특설대(정보,첩보, 對비정규전 항일토벌부대), 헌병(역시 비정규, 공작, 정보) 경력을 바탕
1952. 01. 12. : 중장
1952. 04. 05. : 제2군단장
1952. 07. 23. : 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1953. 01. 31. : 대장(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대장)
1953. 05. XX. : 육군대학 총장 겸직
1954. 02. 14. : 제1야전군 사령관
1957. 05. 18. : 육군 참모총장
1959. 02. 23. : 연합참모의장
1960. 05. 31. : 전역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방경비대가 정식으로 국군으로 재편되면서 그는 국군 제5연대장과 육군본부 정보국장을 거쳐 1950년 4월에 개성을 관할로 하는 1사단장(당시 계급 대령)으로 부임하여 1951년까지 사단을 지휘하였다.
육본 정보국장 재직 중에 발생한 여순 14연대 반란사건(194810)이후 공산 게릴라 소탕 및 숙군 사업을 지휘하였다. 국방부는 1948년 12월 15일, 육군본부 정보처 소속이던 백선엽 등 8명의 중령을 대령으로 특진발령하였다.[7]
이후 그는 남로당 빨치산의 토벌과 군내 좌경 인사 숙군 작업에도 주력한다. 이때 김창룡의 강경책과 달리 좌익 혐의자 중 단순가담자를 선별하여 가벼운 징계를 내릴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킨다.
숙군 과정에서 박정희의 재능을 아깝게 생각한 그는 박정희에게 전향을 권고한다. 백선엽은 숙군 과정에서 검거되었던 박정희의 구명에 대해서 적극적이었다. 당시 박정희는 육군사관학교 좌익 용의자의 한 사람으로 검거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은 상태였다. 1949년 초 어느 날 특무대의 김안일 소령은 백선엽에게 박정희 소령이 조사 과정에서 군내 침투 좌익 조직을 수사하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점을 들어 박정희를 만나 줄 것을 부탁했다. 박정희를 만난 백선엽은 도움을 부탁하면서도 시종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던 그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옥석을 가리기 힘들었던 만큼 무리한 일이 없었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바로 1년 후에 터지는 동족상잔의 대 전란을 앞두고 적어도 군내의 좌익 조직을 일소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으로서도 다행이다[8]
박정희를 남로당의 총책으로 본 김창룡 등은 박정희를 숙청하려 했으나 그는 박정희의 구명에 적극적이었다. 백선엽은 정보국 고문관인 이드 미 육군 대위에게 부탁하여, 하우스만 미 육군 대위와 로버츠(William Roberts) 미 육군 준장에게 박 소령의 구명을 요청했고, 육군본부에 재심사를 요청하여 박정희에 대한 형 집행정지 조치를 얻어냄으로써 그를 불명예 제대시키는 선에서 문제를 매듭지었다. 그 후 그는 국군 내부의 반대와 일부 장교들의 비난을 감수하고, 박정희가 문관 신분으로 정보국에서 근무하도록 배려했다. 공식 보직이 부여되지 않은, 편제외 인원으로 비편제 군무원 자격으로 근무하던 박정희에게는 급여가 없었으나, 백선엽은 동료, 부하 장교들을 설득하여 장교들의 월급에서 일부 갹출하여 박정희의 문관 월급으로 주었다. 백선엽은 어머니를 옥중에서 잃고, 연인과도 사별하여 의기소침한 박정희를 독려하여 동기를 부여한다.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박정희는 기적적으로 회생하여 현역으로 복귀하여 정보국 제1과장으로 전쟁에 참여한다.
1949년 7월 백선엽은 국군 제5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4월 22일, 광주에 주둔하던 5사단장에서 1사단장으로 부임해 [9] 부대사정을 소상히 파악하기도 전에, 6월 14일부터 시흥(始興)소재 보병학교에서 고급간부 재훈련교육을 받고 있었다.[10] 그러다가,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경, 서울에 있던 백선엽은 사단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의 숨가쁜 전화를 받았다. "사단장 각하, 전방에서 적이 전면적으로 침공해 왔습니다. 개성이 대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개성은 벌써 점령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것이 백선엽이 받은 6.25 전쟁에 대한 제1보였다.[11] 백선엽은 급거 귀대하여 육군 제1사단을 지휘하였으나, T-34/85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 밀려 후퇴를 했다.
6월 25일 오후 신속히 1사단 병력과 김점곤 대령, 김익렬 대령이 이끄는 부대가 합류하면서 개성과 문산지구로 출동하여 남하하는 중인 조선인민군과 맞서 교전하였다. 6월 26일에는 경기도 장단군 고랑포에서 최경록 대령이 이끄는 연대와 함께 조선인민군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6월 26일 화력과 장비의 준비 부족으로 부득이 퇴각하게 되었고 사단 편제는 그대로 유지하는 데 성공하였으니, 개전 초기 한국군 전방 사단 중에서 편제를 유지하며 후퇴한 사단은 김종오 대령의 6사단(춘천 주둔), 이성가 대령의 8사단(강릉 주둔)이 유일하였다. 대구로 후퇴하던 중 이 공로로 백선엽은 대령에서 준장으로 승진한다.
이후 낙동강까지 후퇴한 1사단은 한국군 부대 중에서 유일하게 미국 1 군단에 배속되어 지원나온 미군 2개 연대와 함께 경북 칠곡의 다부동 전투를 치렀다. 전투 중 한국군 병력의 후퇴와 무단이탈이 심하자 함께 다부동을 지키던 미군 27연대장 마이켈리스(Michaelis) 대령이 "전선 좌측의 한국군 부대가 무단 이탈하고 있다"며 다급하게 전황을 알려왔다.[5] 그가 나가보니 한국군이 후퇴하고 있었고, 당시 병사들은 이틀을 굶은 상태였다 한다.[5] 그는 후퇴하는 한국군을 막으며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이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며 싸울 것을 호소하였다.[5]
그 후 미국 1 기병 사단, 24 보병 사단과 평양 점령을 경쟁하여 제일 먼저 평양에 입성하는 부대가 되기도 하였다. 평안북도 운산까지 진출한 1사단은 중공군의 반격에 밀려 다른 유엔군과 함께 38선 이남으로 철수하였다.
미국이 북한 및 중국과 휴전협상을 시작했을 때 백선엽은 휴전회담의 한국군 대표로 참석하였고, 회담 도중 동부전선 상황이 악화되어 군단장으로 다시 강릉으로 부임하였다.
1951년 겨울에는 지리산의 빨치산 소탕을 위한 "백(白) 야전사령부"를 구성하였으며, 이 사령부를 모태로 이듬해인 1952년 4월에는 한국군 최초로 근대화된 2군단을 창설하게 된다. 기존에도 2군단이 있었으나, 1952년 11월 중공군 2차 공세시 덕천, 영원에서 괴멸하자 해체된 바 있다(이후 한동안 한국군 사단들은 군단급 이상 사령부 없이 미군 각 군단에 분산배치되기도 하였다).
전쟁 중 그는 국군과 경찰의 유자녀, 전쟁 중 학살과 실종 등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위해 서울에 보육원 성격의 유아원을 설립하고 '백선 유아원'이라 하였다.
백선유아원은 1952년 지리산 토벌 작전 뒤 버려진 고아들을 수용해 생활토록 하는 시설로, 당시 전라남도 광주 송정리에 세워졌다.[12] 한국 전쟁 이후 그는 손을 뗐지만 그 뒤 83년 백선사회봉사원으로 이름을 변경했다가 88년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에 넘겨져 운영되고 있다. 현재는 보건복지부와 광주광역시의 요청으로 정신지체인 아동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원래 명칭은 설립자인 백선엽을 기리는 의미의 ‘백선’이었으나 여기에 수녀회 성인인 사도 바오로의 영성을 뜻하는 ‘바오로’를 담아 ‘백선 바오로의 집’으로 바뀌었다.[12] 이때 세운 보육원은 후일 그가 정계에서 은퇴한 후 교육 사업에 투신하는 시발점이 된다.
1951년 11월 야전전투사령부 사령관에 선출되었다. 그는 지리산의 빨치산 소탕을 위한 "백야전사령부"를 구성하였으며, 이 사령부를 모태로 한국군 최초로 현대화된 2군단을 창설하게 된다.
1952년의 휴전 회담이 체결되자 그는 한국측 대표단의 한사람으로 휴전문서에 조인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 후, 육군 제2군단장을 거쳐 1952년 7월,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32세였다. 이때 그는 미군의 밴 플리트 장군과 함께 한국군 증강계획을 세워 추진한다. 미국의 신뢰 외에도 영어를 잘 구사했던 그는 대한민국의 입장과 이승만 대통령을 변호하여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의 관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였다.
참모총장 재직 시 그는 군 훈련체계의 개혁, 보급체계 개편, 상이군인들에 대한 복지 향상 등에 힘쓰기도 하였으며, 군 근대화를 위한 미국 군사유학 강화(본인 자신도 레벤워스 미 참모대학으로 군사 유학을 다녀옴), 10개 상비사단 창설(11사단~20사단), 10개 예비사단 창설 등을 추진하였다. 열악한 한국군의 피복과 식량 등의 처우 개선을 건의하기도 하였으나 묵살되었다.
1953년 1월 대한민국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였고, 1954년 2월에는 동양 최초로 제1야전군을 창설하고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155마일 휴전선 방어책임을 미8군으로부터 사실상 인수 받아, 43개월의 장기간 동안 초대 1군사령관으로 야전군의 기틀을 다져놓았으며, 1957년 5월, 다시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이후 1958년부터 발생한 일방적인 감군 여론에 반대하였으며 그해 11월 출국하여 유럽 각국의 소년단 운용을 시찰하고 11월 25일 귀국하였다. 1959년에는 연합참모본부 의장으로 취임, 최신식 무기 도입 등 한국군의 근대화에 공헌했다. 그러나 육군중령 김종필 등을 중심으로 하는 신진 장교들에 의한 청군 운동으로 스스로 용퇴를 결심, 1960년 5월 31일 퇴역했다.
퇴역 후는 외교관에 임명되어 1960년 7월 주중화민국대사로 부임하였다.
1961년 7월 주프랑스 대한민국대사 겸 네덜란드·벨기에 대사를 지냈고, 중화민국·프랑스 대사를 역임했다. 5·16 이후 자신을 살려준 은혜에 대한 특별 보답으로 해임되지 않고 1961년 7월 16일 한국-세네갈 친선사절단의 대표로 세네갈을 방문하여 세네갈 수상 두두 티암을 만나 면담하고 돌아온 뒤 윤보선 정권에서는 1962년 가봉, 토고, 세네갈, 카메룬, 차드, 모리타니 주재전권대사를 겸임했다. 1963년 8월 27일, 신임 카메룬 주재 한국 대사 백선엽(당시, 주프랑스 대사 겸임)은 아마두 아히조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였다.[13]
박정희 정권에서는 1965년 7월 캐나다 대사로 전보되었다가 1969년 10월 교통부 장관이 되었다. 교통부 장관으로 서울의 1기 지하철 건설을 지휘했다. 퇴임 후 반공, 안보 강연을 다녔다.
1971년 충주비료 사장에 선출되어 기업인이 되었고, 한국종합화학공업의 사장을 겸임하였다. 곧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의 한사람에 선출되었다. 1972년 2월 28일 호남비료 사장에 겸임되었으나 얼마 뒤 사퇴하였다. 그 뒤 1972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하였고 1973년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하였다.
1973년 4월 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에 재선임되었으며, 같은 해 (주) 한국에탄올 사장에 선출되어 1980년까지 재직하였으며, 겸임으로 1974년 겸임 대한화학펄프 사장에 선출되었다가 1975년 비료공업협회 회장이 되었다. 1976년부터 1981년까지는 한국화학연구소 이사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1976년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하였다.
그밖에도 그는 자신이 가난한 가정에서 면학하였으므로 일부 고학생들의 장학금을 후원하다가 친동생인 백인엽과 함께 인천광역시에 소재해 있는 인천대학교를 비롯한 선인재단의 여러 사립학교를 설립과 운영하였다. 그러나 선인재단은 재단 내부의 극심한 비리와 부패 행위로 말미암아 1994년 선인재단의 모든 학교는 공립학교로 전환되었다.
그는 1979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붕괴 뒤에도 한국 전쟁에 참전한 공로가 인정되어 사회원로로 각종 행사에 초빙, 초청되었으며 1981년초 선인재단의 간부들의 비리, 부패행위가 문제가 되자 책임을 지고 선인재단 이사장직을 사퇴하였으며, 그해 3월 한국종합화학 사장직에서도 사퇴하였다. 1980년 3월 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을 사임한 뒤 그해 한국후찌쯔 사 고문으로 위촉되었고, 이후 비료공협 회장, 한국화학연구소 이사장, 국제상공회의소 국내위원장 등에 피선되었으며, 안보, 강연활동 등을 다니다가 1986년 국토통일원 상임고문에 위촉되었다.
1988년부터 경향신문에 그의 자전적 칼럼 "군과 나"를 연재하였고, 이를 단행본으로 엮어 출판하기도 하였다. 1989년에는 성우회 회장에 선출되어 1991년까지 재직하였고, 1990년 주식회사 한국후지쯔사 고문에 재선출되었다.
1998년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위원에 위촉된 뒤, 동 기념사업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99년 11월 한국후찌쯔 사 고문직을 사퇴하였으며, 1999년부터 2001년에는 노근리사건 대책단 자문위원회 자문위원장으로 위촉되었다.
2002년 4월 9일 경기도 동두천시 미 보병 제2사단 캠프 케이시에서 열린 '제너럴 백선엽 히어로 룸' 개관식에서 백선엽 예비역대장(왼쪽)이 러셀 아너레이 미 2사단장과 함께 자신의 흉상과 업적이 새겨진 현판을 보고 있다. 동두천시 미2사단 캠프 케이시에서 2002년4월9일 개관식을 갖은 이 기념관은 미군측이 부대 근접전투 전술훈련장(the Close Combat Tactical Trainer)을 백 장군 이름으로 명명, 사후 강평실로 사용한다. 100여평 규모의 기념관은 중·소대 전투훈련 상황을 부대원이 시뮬레이션을 통해 강평할 수 있도록 시설을 마련했다.[14]
만주군의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경력이 있기에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군 부문에 수록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그 뒤 2008년 5월 '대한민국 건국 6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됐다. 2009년 3월 23일,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한국전쟁 발발 60주기를 기념하여 백선엽을 명예 육군 원수로 추대할 계획임이 보도되었다. 실행된다면 백선엽은 대한민국 최초의 원수계급 보유자가 된다.[15][16][17] 대한민국 정부는 그를 명예 원수로 추대함에 따라 한국 전쟁 참전군인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국민들의 안보의식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15] 그러나 언론과 시민단체의 반발로 통과되지 못하고, 백선엽 원수 추대건은 계류중에 있다.
최린
·1운동에 참가했으나 이후 변절해 1945년까지 친일행각으로 일관했다.
호는 고우(古友), 도호(道號)는 여암(如庵). 창씨명은 가야마[佳山麟]. 아버지는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덕언(德彦)이며, 어머니는 김씨이다. 8세 때 서당에 들어가 도필두(都必斗)에게서 한학(漢學)을 배웠으며, 13세 때 밀양박씨와 결혼했다. 18세에 고향을 떠나 각지를 유람했다. 1895년(고종 32) 함경남도관찰부 집사가 되었다. 1902년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 유학생들의 비밀결사로 정부개조의 쿠데타를 음모한 일심회(一心會)에 가담했다가 계획이 발각되자 일본으로 망명해 손병희를 만났다.
그해 7월 귀국해 외부주사(外部主事)가 되었다. 1904년 황실특파유학생으로 뽑혀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부립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學校]에 입학했다. 1905년 봄부터 일요일마다 손병희를 만나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동맹휴학을 벌이다가 퇴학당했다. 1906년 일본유학생회 부회장을 거쳐 2대 회장이 되었고,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에 진학했다. 190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조선 왕이 굴복하는 인형극을 보고 분격, 100여 명의 유학생들과 함께 공연장을 습격해 영업방해·기물파손죄로 검거되기도 했다.
1909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시국을 비관하며 지내던 중 1910년 국제여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각국 영사관에 방화하려는 모의를 하다가 체포되었으나 한일합병이 되자 석방되었다.
같은 해 천도교에 입교하여, 천도교가 경영하는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의 교장으로 약 10년간 재직했으며 보성전문학교에서 헌법·행정학·재정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에 준비단계에서부터 참여하여, 불교계의 한용운(韓龍雲)에게 계획을 설명하고 응낙을 얻었으며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을 이룰 수 있게 하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泰和館)에서 독립을 선언한 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출판법·보안법 위반과 치안방해 등의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12월 가출옥했다.
1923년부터 당시 총독이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의 정치고문인 아베[阿部充家]의 배후관여로 민족개량주의자들과 접촉하기 시작하여 1924년 1월 자치운동단체인 연정회(硏政會)를 결성할 것을 논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26년 거의 결성단계에 이르렀으나 김준연(金俊淵)·안재홍(安在鴻) 등에 의해 연정회의 반민족적 성격이 폭로되고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가 이에 대한 응분의 조처를 결의하는 등 반발이 확산되어 연정회 결성은 다시 좌절되었다. 그해 9월부터 1928년 3월까지 아일랜드 등 구미 30여 개 나라를 유람하고 돌아와 12월 천도교 도령(道領)이 되었다. 1932년 천도교가 합법적 자치운동으로 기울어진 신파와 비타협적 민족운동을 주장하는 구파로 분열하자 신파의 대도령(大道領)이 되었다.
1933년말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내세워 "동아(東亞) 제민족(諸民族)은 일본을 맹주(盟主)로 하여 매진해야 하며, 특히 조선은 내선융합(內鮮融合)·공존공영(共存共榮)이 민족갱생의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일제에 협력할 것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1934년 4월 중추원 칙임참의(勅任參議)가 되었으며 6월에는 일본정계를 시찰했다. 8월에는 총독부의 후원 아래 김사연(金思演)·박영철(朴榮喆)·박희도(朴熙道) 등의 친일파와 정광조(鄭廣朝) 등 천도교 신파를 모아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정치단체인 시중회(時中會)를 조직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중추원 시국강연반으로 호남일대에서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을 유세했다. 같은 해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사장이 되어 내선일체·성전완수 등의 각종 시국행사를 주최했다.
1938년 6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 조선연맹의 발기인이 되었고, 7월 이 단체가 출범하자 이사로 참가했다. 1941년 10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을 결성하고 단장에 취임했다. 그밖에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위원,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조선언론보국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각종 시국강연에 참가했고, 여러 차례 친일 담화를 발표했다. 1949년 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나 이후 병보석으로 석방되었고 담당 검찰관은 공소를 취하했다. 6·25전쟁중에 납북되었다.
친일매국노 생존 여부 및 친일매국노 후손 및 뉴라이트출신을 연구,탐문하는 작업은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에 우리 민처협이 유일합니다.
진실을 알리는데 노력하겠습니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민족반역자에게 안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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