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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희년에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아야 한다.”
<레위기의 말씀 25,1.8-17>
1 주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8 “너희는 안식년을 일곱 번, 곧 일곱 해를 일곱 번 헤아려라.
그러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마흔아홉 해가 된다.
9 그 일곱째 달 초열흘날 곧 속죄일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라.
너희가 사는 온 땅에 나팔 소리를 울려라.
10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고, 저마다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야 한다.
11 이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씨를 뿌려서도 안 되고, 저절로 자란 곡식을 거두어서도 안 되며, 저절로 열린 포도를 따서도 안 된다.
12 이 해는 희년이다.
그것은 너희에게 거룩한 해다.
너희는 밭에서 그냥 나는 것만을 먹어야 한다.
13 이 희년에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아야 한다.
14 너희가 동족에게 무엇을 팔거나 동족의 손에서 무엇을 살 때, 서로 속여서는 안 된다.
15 너희는 희년에서 몇 해가 지났는지 헤아린 다음 너희 동족에게서 사고, 그는 소출을 거둘 햇수를 헤아린 다음 너희에게 팔아야 한다.
16 그 햇수가 많으면 값을 올리고, 햇수가 적으면 값을 내려야 한다.
그는 소출을 거둘 횟수를 너희에게 파는 것이다.
17 너희는 동족끼리 속여서는 안 된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 복음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4,1-12>
1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2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3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4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5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6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7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8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9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11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12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나쁜 사람’ 안 되는 법: 사랑은 ‘나’를 포기하게 만든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 왕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기가 죽인 헤로데가 되살아난 것이라 여깁니다.
두려움에 머리가 이상해진 것입니다.
그는 동생의 아내와 살기 위해 그것을 비판하는 요한을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군중이 두려워 죽이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잘 추자 그녀의 뜻대로 요한을 처형하였습니다.
헤로데는 왕이면서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정상적이지 않은 생각을 하고 군중과 가족들에게 휘둘립니다.
그리고 결국 예언자를 죽이는 나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 자신의 주인공으로 살다가는 나뿐인 사람, 곧 나쁜 사람이 됩니다.
나뿐인 사람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주인공으로 삽시다.’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남에게 휘둘리지 말고 자기 주관대로 살자는 말입니다.
책 제목들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야 나』,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산다는 것』, 『잊지마, 내 삶의 주인공은 나라는 걸』 등의 제목으로 책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나’로 산다는 것의 깊은 의미를 성찰하지 못한 말들입니다.
헤로데도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노예가 되어버렸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나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나의 주인공이 되어 살려는 사람들의 결과입니다.
‘나’라는 말은 나의 정체성과 내가 사는 세상과 내가 사귈 사람을 규정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화 ‘트와일라잇’은 ‘벨라’란 한 인간 여인을 사랑한 뱀파이어 ‘에드워드’와 늑대인간 ‘제이콥’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현실에서는 말도 안 되는 판타지 영화이지만 ‘나’라는 정체성이 어느 세계에 속하게 만들고 누구와 사귀게 되느냐를 말해주는 좋은 영화이기도 합니다.
처음에 벨라가 뱀파이어 에드워드와 사랑에 빠집니다.
뱀파이어지만 착한 뱀파이어입니다.
동물들의 피만 먹고 사람의 피는 먹지 않습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로 작정한 몇 안 되는 뱀파이어 가족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는 벨라 옆에는 사람의 피를 먹는 뱀파이어들도 득실댑니다.
자신을 사랑하다가는 그녀의 목숨이 위태로운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녀를 위해 그녀를 떠납니다.
이때 늑대 인간 제이콥이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녀는 뱀파이어가 아닌 한 보통 인간을 사랑하고 싶어 조금씩 그에게 의지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처음에 사랑했던 뱀파이어 에드워드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제이콥은 벨라가 걱정돼 전화를 건 에드워드에게 벨라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에드워드는 살 의욕을 잃고 햇빛에 자신을 노출시켜 자살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벨라는 자살하려는 에드워드를 구해주고 자신도 뱀파이어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에드워드는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뱀파이어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큰 위험인지 알면서도 그 청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인간들 안에서 숨어 살며 인간을 해치지 않고 모든 위협을 참아내며 살아가야 하는 뱀파이어의 삶은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벨라는 이것을 다 받아들입니다.
둘의 사랑이 너무 강렬했기에 뱀파이어는 그녀를 뱀파이어로 만듭니다.
여기서 ‘나’는 늑대, 인간, 뱀파이어로 나뉩니다.
그리고 뱀파이어도 좋은 뱀파이어와 나쁜 뱀파이어로 나뉩니다.
이 모든 것을 나누는 것은 ‘나’라는 정체성입니다.
내가 뱀파이어를 사랑하고 뱀파이어의 세상에서 뱀파이어를 사랑하려면 ‘나’가 뱀파이어가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에드워드는 뱀파이어지만 인간을 사랑하는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인간은 뱀파이어가 되기 위해 인간의 삶을 포기합니다.
헤로데는 이 세상에 살며 이 세상 사람들과의 친교를 위해 예언자 요한을 죽였습니다.
나를 바꾸지 않기 위해 나를 바꾸기를 원하는 이를 죽인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믿는 ‘나’가 ‘사람’이라는 인간들이 세상에 속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이 친교를 넘어서는 더 높은 수준의 친교가 있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새장이나 어항에 머물며 그 안에서 아웅다웅 살아가는 것이 아닌 바다와 창공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고 그들과 친교를 나눌 수 있음을 예언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로워지는 길은 나를 이 세상에 가둬놓는 ‘나’라는 정체성을 더 큰 ‘나’와 교환하는 것입니다.
벨라가 인간이라는 협소한 세상을 벗어나 영원히 죽지 않는 뱀파이어의 사랑을 하기를 원해 한 일은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녀는 이제 “나는 뱀파이어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상대를 위해 ‘나’를 내어주어 교환하는 행위입니다.
나뿐인 사람은 나를 지키기 위해 누구와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타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죽이는 나쁜 사람이 됩니다.
인간인 ‘나’를 포기하고 ‘나는 나다!’라고 하시는 그리스도를 ‘나’로 삼으면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법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나’로 살면 나를 살리기 위해 ‘나’가 속은 세상의 법칙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노예가 됩니다.
헤로데처럼 괜히 삶의 주체가 ‘나’가 됨으로써 세상의 노예이면서도 자기가 왕이라고 착각하며 세상의 노예로 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겐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른다는 말은 우리 전 존재의 정체성이 이제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하느님 자녀들이라 믿는다는 뜻입니다.
“나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세상에 속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위선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면 나도 그리스도요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나뿐인 사람, 곧 나쁜 사람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자신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나’를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내 안에 약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강점도 있습니다. 추함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아름다움도 남아 있습니다>
언젠가 짧게나마 맛봤던 영신수련의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1491~1556)가 우리 신앙의 후예들을 위해 선물로 남겨주신 소중한 유산입니다.
지도 신부님의 안내에 따른 집중 관상기도를 통해 제 자신의 적나라한 내면 상태를 뚜렷이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 영혼 안에 웅크리고 있는 짙은 어둠과 무질서를 확인하며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하는 실망감도 컸습니다.
그러나 계속된 성찰 작업은 저를 한 가지 특별한 깨달음에로 안내했습니다.
‘내 안에 약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강점도 있구나. 추함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아름다움도 남아있구나. 결핍만 있는 것이 아니고 넘치는 부분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 말입니다.
‘이토록 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항상 나를 지속적으로 사랑해주셨구나!’ 하는 깨달음, ‘이토록 부족하고 불충실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나를 당신 눈동자처럼 소중히 여기시는구나!’ 하는 깨달음 말입니다.
스페인 로욜라에 있는 이냐시오 성인의 생가를 들렀을 때였습니다.
고풍스런 성채 안에는 그분께서 탐독했던 책들부터 시작해서 그의 가족들이 쓰던 식기, 가구, 입던 옷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성 이냐시오 대성당 중앙 제대 뒤편에는 그분의 청동상이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인의 손은 어떤 글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글귀는 예수회 회원들의 살아가는 이유이자 모토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Ad Majorem Dei Gloriam)’
예수회 회원들은 창립자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과 정신에 따라 오직 하느님에게 영광을 돌릴 뿐 자신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서원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
창립자나 카리스마는 다르지만 ‘동종 업계 종사자’인 동료 수도자로서 생각할수록 멋진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오늘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혹시라도 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이 아니라 내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심각한 성찰을 하게 만듭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생애는 풍파 많고 우여곡절 투성이인 우리네 삶에 큰 위안과 위로를 건네주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향해 걸어갔던 그의 여정은 참으로 파란만장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기사(騎士)로서의 큰 성공을 꿈꾸었습니다.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그는 왕에 대한 대단한 충성심을 드러내며 목숨까지 걸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한 하느님의 뜻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1521년 침략해온 프랑스군과 맞서 싸우던 그는 큰 부상을 입게 됩니다.
날아온 포탄에 맞아 한쪽 다리는 부러졌고, 다른 쪽 다리마저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얼마나 상황이 심각했던지 의사는 고개를 가로 저었고 병자성사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은혜롭게도 이냐시오는 그 시점에서 자신의 인생 여정 안에 중요한 터닝 포인트 하나를 마련합니다.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 그는 회복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인열전’이란 영성서적을 손에 듭니다.
처음에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읽기 시작했던 그 책들이 그를 천천히 주님께로 안내했습니다.
그는 조금씩 세상의 덧없음과 허무함을 알아갔습니다.
그리고 보다 가치 있는 일, 보다 의미 있는 일, 보다 영양가 있는 인생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세속적인 성공하기 위해 아낌없이 쏟아 부었던 에너지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왕의 충직한 기사를 꿈꾸었던 그는 이제 하느님의 충성스런 군사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앞에서 당당하라>
한 사기꾼이 사회적으로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선택하여 전화를 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의 잘못을 알고 있으니 이 계좌로 돈을 송금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 공개하겠습니다.”
그랬더니 거액의 돈을 보낸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답니다.
그래서 그는 수 차례 같은 방법으로 못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을 보낸 사람들은 억울함을 호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드러낼 수 없는 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잘못을 범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마음이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마음, 양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 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일잔치에 흥을 돋구어준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헛된 약속을 하였고, 소녀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올 것”을 청했습니다.
헤로데는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라 그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왕으로서의 위신과 체면을 유지하려고 큰 잘못을 저질러 놓고는 평생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마음은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허영심에 함부로 내뱉은 말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은 분입니다.
자기보다 더 훌륭한 분이 오시는 데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고 했습니다. (마르 1,7)
그리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자기는 작아져야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요한 3,30)
그는 철저히 주님을 앞세웠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왕인 헤로데에게도 할 말을 다했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진리를 뜯어 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
(막시 밀리안 콜베)
그러므로 참으로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불의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는 양심 때문에 그 괴로움을 참아 내면 그것이 바로 은총입니다.”
(1베드 2,19)
자기를 포장하는 허세를 부려 위신, 체면을 지키려 한다면 결국은 그것뿐 아니라 마음의 자유를 잃게 되고 근심, 걱정, 불안의 나날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이며 여러분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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