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게, 더 단순하게 1
네이버블로그/ 섬에서 단순하게 살아보기 - 홍기
① 실험
그대, 어디서 무얼 하며 살았는가?
이만하면 족하다 하려는가?
그러지 말고 이제,
온전히 마음 가는 대로 살아 보게.
내일이면 늦을지 모르네.
나는 한 가지 실험을 하려고 한다. 삶에서 군더더기를 모두 걷어내고 알짜만 남겨, 주어진 시간들이 스스로 빛을 뿜어내게 하고 싶다. 적게 소유하고 풍족하게 사는 것, 그것이 내가 하려고 하는 삶이다. 그러자면 어떻게든 내 삶을 단순하게 해야 했다.
나는 늘 잡다한 물건들과 일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어느 하나 거부할 수 없는 가치가 되어 운명처럼 삶을 지배했다. 나도 모르게 더 많은 물건을 사들이고, 더 많은 일을 하며, 그로 인해 얻게 된 만족감을 성취의 기준으로 삼았다.
어느 순간 문득, 그 가운데 대다수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꼼꼼히 따져보니 정말 그랬다. 현실의 모든 것은 먹으면 먹을수록 더 배고프고 마시면 마실수록 더 목마른 것이었다.
옷장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박스에 담아 창고에 넣어 둔 옷들이 정말로 다 필요한 것일까? 서가와 베란다 뒤편에 수북이 쌓아놓은 책들 중에서 앞으로 다시 읽게 될 책은 과연 몇 권이나 될까? 집 안 구석구석 숨어 있어 존재조차 까마득히 잊은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한 번이라도 새로 쓰게 될 날이 올까?
지금 당장 사용할 몇 가지 옷이며 물건과 몇 권의 책을 남겨 두고 싹 다 버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나를 지탱하던 에너지가 한꺼번에 빠져나가 정신조차 혼미해질까? 아니면 사라진 것들에 대한 미련 때문에 몇 날 며칠 눈물과 한숨 속에서 살게 될까? 대답은 단호히 ‘아니다’다.
일도 마찬가지다. 그리 중요할 것도 없는 모임과, 얼굴을 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참석해야 하는 회합과, 문화생활이란 이름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게 하는 마음에도 들지 않는 공연 관람 따위는 당장 그만두어도 미련이 없는 것들이다. 스스로 책정한 가치에서 벗어난 일은 허무만 남길 뿐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기존의 것을 모두 버리고 내 방식대로 살아 보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났다. 가정이나 직장, 또는 사회에서의 삶은 상당 부분이 강요된 것이었고 그건 결코 나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렇게 이끌리듯 사는 삶은 어딘지 모르게 건조하고 불편하며 부자연스럽기 마련이다.
적당히 타협하여 현실에 익숙해지라는 내면의 외침에 자기최면이 걸려 결국 거기서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이 뿌리내린 자유를 향한 갈증만은 씨앗으로 남게 되어 언젠가 주어질지 모를 토양과 수분과 햇볕을 기다리고 있었다.
욕구가 점점 강렬해져 힘껏 당겨진 새총의 고무줄처럼 탄성이 생겨났다. 팽팽한 긴장 상태에 놓여, 조금이라도 힘이 풀리면 즉시 꿈꾸고 있는 시·공간으로 날아갈 터였다. 그러던 차에 은퇴를 하여 평생 종사하던 일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막연히 뭔가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러지 않으면 원하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 바로 코앞에 낙원이 있다 해도 지금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만 들어갈 수 있는 법이다.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자의에 의한 선택에 따라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운명의 올은 순간순간의 선택으로 엮여지므로 무척 조심스럽게는 하다. 살아오는 동안 해 온 참으로 많은 선택에 의한 결과물이 지금의 나 아니던가. 꽤 만족스러운 성취를 이루었다고 자평하지만 그것은 갈빗대 밑에 똬리 틀고 앉아 좀처럼 물러나려 하지 않는 작은 허전함을 숨겨둔 채다. 이제 그 녀석을 강제로라도 끌어내지 않으면 알 될 때가 되었다.
강요에 의한 선택을 모조리 쓸어 모아 신들의 유배지 안으로 밀어 넣고, 삶 안에 오직 자의의 선택만을 남길 작정이다. 그렇게 스스로 삶의 주도권을 잡을 생각이다. 이는 실험이라는 이름의 독립 선언이다. 기회가 왔을 때 마땅히 독립을 선언해야 한다. 기회는 다가왔다가 주인이 망설이는 기색이 보이면 즉시 달아나 버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제 실험을 시작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실험은 창의나 창조의 출발점인 동시에 그동안의 기득권에 대한 포기 선언이기도 하다. 잃는 것도 있겠지만 얻는 것에 비하면 그것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미미할 것이다. 실험을 하려는 것은 삶에서 우선순위를 새롭게 배치하라는 내적 명령에 따르는 것이므로 얻는 것이 없다 해도 괜찮다.
이 실험을 위해 어디로 떠날 것인가 모든 곳에 가능성을 열어 두고 따져 보았다. 공기 맑고, 조용하고, 오염되지 않았으며, 자연환경이 아름다운 곳이 좋겠다. 일단 도시와 멀리 떨어진 깊은 산속이나 오지 마을, 바닷가 등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을 외진 곳을 중심으로 범위를 좁혀 갔다.
자꾸만 남해의 작은 섬 두미도로 마음이 기울어졌다. 위의 조건들을 충족할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자주 다녀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난 이미 그곳에서 맛보기로 이 실험을 실행해 본 경험이 있다. 은퇴하기 좀 전에 맞이한 연구년을 고스란히 거기서 보낸 것이다.
가족의 동의를 얻어 무작정 두미도로 떠났다. 이제 나는 집보다 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거기서 단순하게 더 단순하게 살게 될 것이다. 진정한 자유란 기존의 삶을 버리고 새 삶을 향해 떠나는 것을 말한다. < ‘단순하게, 더 단순하게(홍기, 도서출판 그루, 2023.)’에서 옮겨 적음. (2023. 6.25. 화룡이) >
첫댓글 며칠전 뒷베란다를 정리하였습니다.
하얀 벽이 드러났습니다.
거기 벽이 있었구나!
내 마음이 시원해졌습니다.
시간도 비워봐야겠습니다.
홍기 선생님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늘 웃음을 잃지 않던 '홍기 선생님'의 얼굴이
자주 떠오르는 나날입니다.
삶 조차도 실험적으로 살아본 실천기가
때론 내 앞길을 열어주기도 합니다.
망고 시인님!
늘 함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온전히 마음 가는 대로 살아 보게.
내일이면 늦을지 모르네."
시인이 꼭 저에게 하는 말 같습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시인이 독자에게 '꼭 나에게 하는 말 같다'는 말을 듣는다면
이는 성공한 작품일 터입니다.
그런데다 이 글은 본인의 실천기이니
시인의 발자국을 한번 따라 가봄직하지 않을까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