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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업실~~카페지기 스크랩 한국근현대음악사 흐름과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대풍선생 추천 0 조회 130 11.05.03 23: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40년사 중

                     한국근현대음악사 흐름과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김태균

 

 

1. 한국음악사의 시대구분과 근대적 역사의식

 

 

1) 시대구분 일반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 그것은 바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시대구분(時代區分)으로 나타난다. 이태리 사학자 크로체는 곧 “역사를 사고한다는 것은 역사를 시대 구분하는 것”이라 하며 이를 단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특히나 한국음악사와 관련해서는 시대구분의 의미가 더욱 새롭다.

현재 한국음악사의 당면한 과제는 올바른 역사인식(歷史認識)과 함께 올바른 현실관(現實觀)을 갖는 것이다. 즉 올바른 현실분석에 대한 바탕이 있어야 바로 과거를 올바로 평가할 수 있으며, 또한 이를 바탕으로 미래를 전망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인 문맥(文脈)에 대한 전반적인 해석이 없다는 사실은 즉 한국음악의 역사학적 전개에 대한 계통적 인식의 결여는 물론 역사에 대한 자의적(恣意的)인 해석만 분분(紛紛)한 현상만을 가져올 우려가 있다.

역사를 통해 반성(反省)하지 않는 사회는 발전이 없다. 또한 현실을 위한 미래를 전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음악계가 당면한 현실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전(傳)은 있는데 통(統)은 없다’는 지적이나, ‘행(行)만 있고 지(知)는 없다’는 등의 지적은 뼈아픈 대목이기도 하다. 기실 이런 지적은 충분히 현실적인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아악(정악)과 민속악이라는 전대미문의 종(種)과 류(流)를 무시한 음악분류법의 횡행(橫行)은 한국음악에 대한 역사적인 인식이 얼마나 천박한가를 드러내 준다. 음악에 대한 신분적인 차별인식을 드러내는 이런 분류법은 곧 역사인식에 대한 부재일 뿐만 아니라, 역사발전경로에 대한 무지에서 문제인 것이다. 과연 정악 따로 민속악 따로의 역사가 존재하며, 이를 곧 음악신분(音樂身分)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차별화될 수 있는 지 묻고 싶다. 이는 유학자 원천석의 지적대로 ‘자기도 나귀를 타고 다니면서 남이 나귀 타고 다는 것에 대해 나무라는 격’과 같다. 즉 자신만이 옳다는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이다. 무릇 음악은 인간을 위하고 인간을 지향한다. 인간의 지대한 정신적인 산물이 음악을 가지고 누가 그 음악을 했고 누가 그 음악에 즐겼는지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아(雅)정.(正)과 속(俗)으로 인식하는 전근대적인 인식이 아직도 여진(餘震)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이런 인식의 문제는 곧 역사인식에 대한 결여로 비롯된다. 즉 근대 이후 새롭게 전개되어 현존음악의 전통이 되고 있는 민속악에 대한 왜곡은 곧 우리 역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무시(無始)하는 몰 역사적인 태도라 할 것이다. 결국 이런 몰 역사적인 인식은 곧 시대구분에 대한 역사인식의 결여(缺如)에 기인한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통사적 국악사는 안확(安廓)의 『조선음악사』이다. 안확은 삼한시대,삼국시대,고려조악,이조악으로 구분하며, 일제시대 음악을 궁정악과 민중악 구분하고 있다. 이후 국악연구의 1세대라 하는 함화진?장사훈?성경린?이혜구 등이 시대구분에 있어 안확의 성과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1980년대까지 쓰인 한국음악사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시대구분은 편년체의 왕조사를 바탕으로 고대. 근세(근대)의 개념을 한계 설정 없이 혼용하고 있다. 그러나 시대를 규명하고 하나의 맥을 통한 일관된 논술을 위해서는 체계적인 역사적 맥락을 잡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인식의 부재로 인해 전통음악의 변천을 막연히 진화론적(進化論的)인 해석 즉 세월이 흘러서 변했다는 정도의 해석만 낳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한국음악사에 있어 시대구분에 대한 본론은 1980년대 송방송(宋芳松)에 의해 제기된다. 한국음악사를 체계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시대구분에 대한 문제제기와 강론적(講論的)인 개설(槪說)을 통해, 시대구분에 대한 각론이 개진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이런 송방송의 시대구분에 대한 입장개진이 이루어진 뒤에 백대웅(白大雄)과 노동은(魯棟垠)이 각기 그들의 저작을 통해 시대구분론을 전개했다.

한국음악학 역시 현실에 대한 반성을 기초로 올바른 역사기술(歷史記述)을 위한 노력은 80년대부터 본격화된다.

송방송 박사는 민족음악사관(民族音樂史觀)에 기초한 음악사 시대구분을 시도했다. 이런 사관에 기초한 『한국음악통사』(韓國音樂通史)는 80년대 한국음악계가 거둔 값진 성과라 하겠다. 이 통사의 전체적인 문맥은 향악(鄕樂)을 바탕으로 서역악(西域樂),당악(唐樂),아악(雅樂)의 수용(收容)과 재창조(再創造) 즉 향악화(鄕樂化)의 과정이 바로 우리 음악역사이며, 조선후기의 민속악의 등장은 궁극적으로 민족음악사(民族音樂史)의 창조적인 옹호였다 할 수 있다. 그리고 현대사는 민족음악으로의 모색단계라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다고 정리하고 있다.

 

이런 논지에 따라 송방송은 한국 음악사의 시대구분에 대한 구체론을 제시한다.

“첫째시기 :향악의 전성과 발전시대?둘째시기 :향악의 전성시대?셋째시기 :당악과 아악의 수용시대?넷째 시기 :아악의 정비시대?다섯째 시대: 민속악의 새 양상시대?여섯째 시대: 양악의 수용시대?일곱째시대:민족음악의 모색단계”로 구분하고 하고 있다.

위의 시기구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송방송 박사는 굳건한 믿음에 기초하여 자주적인 관점에서 민족음악의 내재적(內在的) 변화 추이(變化推移)를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어 백대웅은 한국음악학의 정립을 위해 음악이해의 방법으로 역사적 이해와 체계적 이해라는 틀을 제시하고 우선 역사를 고대,중세,근대의 개념으로 나누고 있다. 백대웅은 한국음악의 구조적 양식(構造的樣式)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에 기초하여 역사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실제 음악사가 일반사(一般史)가 아닌 특수사(特殊史)인 경우에 비추어 볼 때, 결국 음악 자체에 기초한 구조적 이해만이 역사를 종횡(縱橫)으로 가를 수 있는 즉 공?통시적(共. 通時的)인 중요한 근거를 만들고 있다.

곧 백대웅은 한국음악사를 기술하는데 있어 뼈대가 되는 체계(體系)를 중심으로 “고대음악 : 1) 태고부터 1116년 대성아악 수입이전?2)중세음악 : 1116년부터 임진란(1592년)이전?3)근대음악 : 1600년경부터 1890년 사이?4)현대음악 : 20세기 이후”로 구분하고 있다.

 

백대웅의 한국음악사 시대 분류는 음악양식에 대한 체계적 이해를 통해 통시적인 구분을 하고 있다. 다분히 음악 내적인 요인에 의해 변화되고 발전되어 나간 추이(推移)를 기술한 것이다. 즉 음계론(선법론) 장단론 등 음악 내적인 구조를 통해 음악사의 변천을 보았다. 이들의 역사인식에 의하면 향악(鄕樂)-당악(唐樂)-아악(雅樂)-민속악(民俗樂)-민족음악(民族音樂)으로의 역사적 변천을 읽고 있다. 그리고 그 역사적인 변천은 자주적 수용과 재창조의 과정을 통해 민족음악의 지평을 넓혀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가 처음 『한국음악통사』를 통독한 독후감은 한마디로 “마침내 민족음악이여”라는 감동이었다. 향악이란 민속악의 전통이 이후 당악과 아악의 수용을 통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나, 이후 당악의 향악화와 민속악의 등장을 통해 한국민족음악사를 역전(逆轉)시켜나가는 강인한 생명력을 느낀 것이다. 민중적 삶의 토대에서 외래음악을 자양분으로 새로운 창조적 변신을 거듭한 것, 바로 그것이 민속악이고 오늘 우리음악의 전통임을 시대구분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2). 한국음악에 있어 근대 기점

 

 

  한국학(韓國學)에 있어 시대구분(時代區分)과 함께 근대기점(近代起點)에 대한 논의(論議)는 1960년대 이후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기실 한국 역사 및 근대사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일제 때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들에 의해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상당부분 한국사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과 왜곡된 면들이 많을 것임은 지레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제로부터의 독립(獨立)과 해방(解放)은 타율성(他律性)정체성(停滯性)으로 함축되는 일제 식민사관(日帝植民史觀)을 극복하고 민족사관(民族史觀)을 확립하는 과제를 주었다. 특히 1960년대는 한?일 회담 반대라는 시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식민사관을 극복하려는 활발한 학술활동이 본격적(本格的)으로 전개된 시기라 할 수 있다. 이런 역사연구는 곧 시대구분에 대한 논의로 개진되며 구체적으로 근대(近代)에 대한 논쟁(論爭)으로 집약된다.

 

한국음악학 또한 마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근대전통을 형성하고 있는 민속악(民俗樂)이 일제에 의해 집중적인 탄압과 왜곡을 거치며 천한 기생?광대의 소리나 미신행위로 매도되고, 또한 해방 후 좌우익분리공간을 거치면서 친일세력(親日勢力)이 해방정국의 전면에 재등장하며 역사의 수레바퀴가 되돌려진 것처럼 한국음악사 또한 근대 이전(近代以前)으로 되돌려있다. 즉 조선전기와 같이 아악의 부흥이 시대적인 과제에 다름 아닌 상황을 맞았다. 이는 곧 근대에 대한 역사인식의 부재이다. 근대는 현존음악의 시작이란 점에서 의미 있다. 아악이 현존음악의 전통이라면 그것은 곧 역사적으로 확인되어야 한다. 그러나 역사적인 문맥을 보면 아악은 조선의 유물(遺物)이며, 아악에 대한 부정(不正)을 통해 근대음악의 전통이 형성되고 현존음악으로 진행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되풀이하지만 역사(歷史)를 고구(考究)하는 궁극적인 목적(目的)은 현실(現實)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다. 아전인수적인 자기합리화(自己合理化)가 아니다. 오늘 우리시대의 과제(해방후 상황과 똑같이)는 일제잔재 청산과 힘으로 밀고 들어와 있는 서양문화에 대한 비판적 수용이다. 이것이 곧 근대를 바로 세우고 현실을 올바로 옹호하는 힘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를 바로 세우는 것이 바로 근대에 대한 역사인식을 분명하게 해준다.

 

근대는 곧 일제에 의해 이식(移植)됐다는 이식문화의 연장으로 오해되거나 아니면 아직도 우리사회는 전근대성(前近代性)에 머물러있다는 정체성(停滯性)으로 오해받게 해선 안 된다. 그러나 오늘 우리 음악계는 아직도 전근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해방후 서양음악이 주류로 등장하고 있는 현실에서, 또한 봉건성을 대변하는 아악(雅樂)이 국악을 대변하는 이른바 몰 역사성에 빠져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돌려져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근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보는 것이 우리 시대 우리가 해결할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를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3) 조선후기 음악문화사

 

 

  한국음악사에 있어 임진왜란 이후 영?정조(英正朝) 시대를 거친 한국문화사(韓國文化史)는 근대(近代)로의 이행기(移行期)이다. 즉 조선조의 사상적인 기반을 이루는 성리학적 세계질서가 차츰 완화되는 한편, 사회기반을 이루는 민중들의 정치 사회적 의식이 각성되며 활발한 근대적인 문화양상을 보인다.

이는 곧 조선조의 사회질서의 기반을 이루던 성리학적 예악사상이 부정되며, 봉건적인 사회질서가 해체된다는 사실이다. 조선조의 정치 사상적인 기반을 이루던 성리학적 사회질서가 해체되며 새로운 사회징후는 사회 곳곳에 퍼져나갔다.

이런 양상의 예는 사회계급질서의 해체와 더불어 농공상업의 발달 그리고 중인층의 대두라 하겠다. 또한 성정(性情)에 대한 공리적(公利的)인 논란에 머물던 성리학의 퇴조와 함께 실사구시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내세운 실학(實學)의 대두는 새로운 사회의 징후를 나타내는 문화를 만들었다.

 

위와 같은 사회의 물적 토대를 변화시킨 주요 원인으로는 이앙법(移秧法)이란 농법의 등장이다. 이앙법은 토지의 생산력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농법으로, 이앙법으로 가속된 경제토대의 변화는 조선사회의 경제질서를 가속도(加速度)로 변화시켰다. 경제토대의 변화와 함께 일어나는 신분제의 동요, 그리고 중인이라는 새로운 신분 층의 대두와 함께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란과 함께 민중의식의 각성은 조선조의 봉건적 사회질서를 해체했다.

 

 

 

4) 근대음악의 전개

 

 

  예술의 본령은 현실에 있다. 즉 시대성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시대에 대한 반영과 함께 시대의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예술을 예술답게 하는 본질이라 하겠다. 조선조의 음악역사가 갖는 시대성이라면 바로 성리학적인 예술관과 관련을 갖는다. 예악사상은 성리학적 음악관을 반영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예악입국(禮樂立國)이라 할 정도로 조선조의 이상국가 실현이라는 것이 바로 조선조의 음악문화의 핵심적인 요인이라 할 것이다.

고려조 예악의 수입을 시작으로 조선조 세종 조를 거쳐 성종에 이르는 기간동안 조선을 떠 받히는 음악사상의 형성과 이를 옹호하는 시기라 하겠다. 조선조가 지향한 예악사상의 음악적인 발현은 아악(雅樂)으로 집약된다. 아악은 크게 동양음악의 원의(原義)를 담은 이상적인 음악이지만, 현실에서는 유교적 음악관에 기초한 궁중음악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아악은 흔히 궁중음악으로 통칭하는데, 음악문화의 근대성은 곧 탈 아악(脫雅樂)이란 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근대성(近代性)은 바로 ‘예악에 대한 반작용(反作用)’에서 그 함의(含意)를 찾을 수 있다.

 

탈 아악의 징조는 임진왜란 이후 가속화한다. 이미 한국어에 있어 근대국어의 시작을 임진왜란 이후로 통칭되고 있는데, 언어와 긴밀하게 호응하고 있는 음악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임진왜란을 통해 중국과 일본의 정권이 재창조됐다면 한국사회에서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근대성을 확인하고 있다. 오히려 근대를 지향하는 민중의 거센 물결이 도도하게 문화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즉 임진왜란 이후 궁중의 악사들이 임진왜란 이후 왕조의 위상이 근본적으로 뒤흔들리면서 호구지책마저 어려워지며 각지로 산개(散開)하고, 궁중음악을 지탱해온 아악은 말 그대로 현란(懸欄)한 현상을 보인다. 역으로 근대적인 생산양식과 사회구조의 발전과 더불어 근대를 향하는 도도한 물길이 대세(大勢)를 이룬다.

그런 근대성은 곧 ‘궁중 중심의 관념적이고 규범적인 음악을 벗어나 민중들의 삶의 맥락을 함께 하는 자율적이고 개성적인 음악’으로 표현된다. 이는 근대성을 감성적(感性的)인 형태로 이해하고, 중세음악을 이성적(理性的)으로 경향성을 나누고 있는 서양음악사와 같은 궤(軌)를 그리고 있다 하겠다.

 

궁중이 아닌 민간(民間)의 음악문화의 융성과 이상과 관념 및 제도 중심이 아닌 자율과 감성 그리고 개성과 창의성을 통해 우리는 근대음악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민간으로의 음악중심의 이동은 곧 민간이 주체가 되는 각종 음악양식의 발생과 관련한다. 민간중심의 음악양식은 잡(雜)이나 속(俗)이란 의미로 함의된다.

특히 17세기,18세기는 금속화폐의 발달과 상품경제의 활성화가 이루어지면 서울을 중심으로 도시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진다. 이런 경제구조의 변화와 함께 예능활동이 돈으로 환산되는 가치를 갖게되며 직업적인 ‘전문예능인’이 탄생된다. 또한 축적된 경제적인 부를 가진 신흥갑부가 생기는데, 광작농민, 의관, 경아전, 무역업을 해서 돈을 번 역관 등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전문예능인의 활동을 지원하는 패트런으로 등장한다. 이에 가객,기생,광대,무당,사당패,잡가패,선소리패 등등 전문예능인 집단의 활동이 왕성해지며, 오늘날 현존 전통음악이라 하는 정악, 판소리, 산조, 잡가, 민요, 선소리 등등 새로운 전통음악이 생성된다. 이들 음악과 함께 삼현육각 패의 활동이 빈번해 지며 기악의 발전이 가속된다. 위와 같은 전문적인 뜬 패의 활동과 함께 생활과 함께 음악행위를 영위하는 두레의 활동 또한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생활 속에서 일과 놀이 그리고 믿음의 민중공동체적인 삶을 바탕으로 하여, 민요와 두레풍물 그리고 굿 등 다양한 음악이 발전한다.

 

위와 근대음악의 양상을 백대웅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근대음악은 1600년부터 1900년 사이의 약 300년 동안 이 땅에서 생성. 변화된 음악인데, 현존음악과 직접 관련되어 있어서 그 음악구조나 어법에 접근하기가 중세음악보다 용이하다. 지금까지 발견된 옛날 악보와 기록을 참할 때, 근대음악 초기의 중대엽 이나 삭대엽 등의 곡은 18세기 이후에는 전하지 않지만 현존하는 모든 장르의 전통음악이 이 시대에 새롭게 생성된 것이고, 중세음악에 속하는 궁중음악도 이 시대에 모든 리듬구조가 크게 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시대에 궁중음악은 재창조되었고 민간음악은 새롭게 생성되었기 때문에 현존 전통음악은 모두 근대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중략) 근대음악에서 중요한 시기는 18세기이다. 이 시대는 임진란과 호란의 격랑에서 벗어나 무르익은 실학의 시대사조 아래서 음악뿐만 아니라 미술과 문학에서도 개성적인 문화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이 어느 정도 성숙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음악사에서 나타나는 커다란 징후는 가객?광대?무당?사당패 등 전문예능인 집단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오늘날 각 장르로 분류된 새로운 전통음악이 생성되는 점이다. 중인층 가객들이 실학자들과 어울려 ‘가단’을 만들어 가곡과 영산회상을 정착시킨 것, 소리 광대들이 판소리를 만들어 판놀음이라는 연예공간에서 활동한 것, 사당패나 걸핍패들이 잡가나 풍물을 발전시킨 것이 모두 이 시기의 일이다.”

 

 

가) 민요의 확장과 발전

 

 

 조선후기 음악문화에 있어 주목할만한 것은 민요(民謠)이다. 민요는 민간의 노래라는 광의(廣義)의 의미에서 한민족의 발생과 관련된다. 이미 최남선은 민요를 ‘주몽의 언덕을 넘어 단군의 마루턱에 나아가도 그 역사는 끝없이 펼쳐져 있다’ 할 정도로 무궁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민요는 시대에 따라 속요, 풍요, 타령 등 다양한 명칭들이 사용됐는데, 분명한 것은 민중들의 삶과 역사와 함께 발생되고 발전하고 변화한 노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요는 민중 주체의 민족의 노래이다. 조선후기 농업의 발달은 삼남일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농사를 전국적으로 확장하게 했다. 또한 17세기 이후 광범위하게 보급된 ‘농자천하지대본야(農者天下之大本也)와 같은 권농(勸農)의식의 확장과 함께 수공업 광업등 각종 산업이 발달하면서 전례 없이 일과 관련된 노동요(勞動謠)의 발달을 본다. 여기서 주목할 만 것은 농요(農謠)와 어로요(漁撈謠)이다.

 

농요는 이앙법의 발달과 일년절기의 농사와 농법과 관련을 갖는다. 이른 봄 논을 갈고, 물을 대고, 모(茅)의 파종과 이앙(移秧), 모내기와 초벌과 두벌 그리고 세벌로 이어지는 김매기, 추수의 과정으로 이어지는 농사의 전 과정이 노래로 풀어진다. 이런 일의 과정을 ‘밭갈이 소리’ ‘거름 내는 소리’ ‘모내는 소리’ ‘김매는 소리’ ‘물 푸는 소리’ ‘질꼬내기 소리’ ‘벼 베는 소리’ ‘도리깨질 소리’ ‘타작 소리’ 등 농사와 관련된 수많은 민요들이 불려진다. 특이나 기존에 있던 노래들이 일의 과정에 맞게 새롭게 채용되거나 아니면 새롭게 창작된다. 그런 면에서 조선후기는 민요창작 및 민요양식의 획기적인 전기를 이루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그야말로 민중생활의 성장과 민중의식의 각성과 함께 한국음악의 기층을 이루는 민요(民謠)의 만화백경(萬花白鏡)시기가 아닐 수 없다. 고정옥은 『조선민요연구』에서 민요를 노동과 놀이와 의식이란 속성을 파악하여 이에 따른 분류를 한 바 있다.

특히나 노동과 관련하여 오늘날까지 전하는 들노래는 바로 이 시기에 획기적인 발전을 한다. 상사소리, 정자소리라고 하며 다양하게 지역적인 분포를 보이는 모심기소리나 만두레 때 마을축제와 함께 이루어지는 만두레소리, 질꼬내기소리등은 여느 소리에 비해 보아도 충분한 음악성을 가지고 있다.

 

민요라는 음악양식에 있어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은 우선 토리적인 특성이다. 즉 지역적인 바탕을 이루면서 다양한 선율을 전개하고 있는 점이다. 예악이란 이데올로기 속에서 중국의 오음(五音)과 오음의 위계질서(예로 宮 중심의 선율배열이나, 궁음 아래에는 어느 음도 위치하지 못하는 이데올로기적 한계)를 벗어나 개인과 지역의 감성 그대로, 마치 방언(方言)처럼 지역적인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예로 서도소리가 갖는 독특한 수심가 토리나 남도소리가 갖는 육자배기 토리나 동부지역의 메나리토리와 같은 지역성과 다양성을 반영하는 음악언어의 창출은 예악이란 지배이데올로기가 폭압적으로 음악문화를 장악하고 있는 중세적인 음악환경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민요는 민중들의 자유로운 음악환경 즉 일과 놀이를 통한 민중생활예술언어의 확장이란 면에서 주목된다. 또한 민중들의 일구조 즉 두레라는 집단적인 협업구조를 능동적으로 반영한 ‘맺고 푸는 구조’는 한국음악의 새로운 형식구조를 창출했다.

우리가 민요를 통해 주목할 것은 한국음악의 전통적인 토대를 이룬다는 점이다.즉 한국음악의 기층적 전통(基層的傳統)을 형성하며, 한국음악의 다양한 갈래형성의 자양분을 마련해 준다. 소위 오늘사회를 통해 되짚어 볼 때 이런 토양조건의 귀중함을 새삼 느낄 수 있다. 기층 생활속에서의 음악행위는 곧 판소리나 산조와 같은 예술음악을 이해할 수 있는 귀명창문화를 만들 수 있었다. 생활속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자연스런 교육이야말로 통합음악문화권의 튼튼한 기반이 아닐 수 없다.

 

민요를 통한 민중생활예술의 왕성한 전개는 곧 두레공간을 통해 발현되는데, 풍물의 발전 또한 주목된다. 두레풍물은 두레공동체의 노동과 놀이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동네굿이나 지신밟기, 대동을 치는 모내기철이 오면 두레풍장을 두들겼다. 생활로부터 이루어지는 집단적인 풍물행위는 장단과 가락의 일체화는 물론 민중생활의식적인 일체감을 형성해주었다. 일과 놀이 그리고 의식과 관련한 풍물 및 탈춤연희 등 다양한 민중예술 양식이 성자하며 근대음악사회의 기반을 이루었다.

 

 

나) 중인음악, 정악(正樂)의 형성

 

 

   민중의식의 자각과 함께 조선조 사회구조의 근간인 신분제가 타파되며 중인(中人)이란 새로운 계층의 형성을 본다. 중인이란 조선후기(17세기~19세기) 새로운 신분계층으로 등장하여 독자적인 목소리를 형성한다. 주로 기술직 종사자, 서얼(庶孼), 지방관아종사자, 역관, 부유한 농상업인 등 다양한 계층으로, 이들은 조선후기 사회발달을 통해 사회경제적인 지위를 획득한 계층이다. 한만영은 이를 중인층의 음악인 “정악(正樂)”이란 개념을 사용했고, 송방송 또한 “중인들의 풍류활동에 의한 음악문화를 총체적으로 의미하는 용어가 정악”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들 중인층의 형성과 중인층의 풍류문화가 바로 정악문화의 발원인 셈인데, 으레 정악이라 함은 기악으로는 영산회상과 보허자계통 음악과 가곡?가사?시조를 칭하고 있다.

 

중인층의 등장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을 보면, 중인은 지배세력인 양반사대부와 일반평민 사이에서 위치하는데, 중간자적인 신분층의 한계가 이들을 독자적인 횡보를 자극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사대부의 의미처럼 출사(出仕) 즉 관직진출은 막혀있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반면 일반평민에 비해서는 높은 교양과 소양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 하나의 신분층으로 고착화되며 시(詩).서(書).예(禮).악(樂)에 걸쳐 두드러진 활동을 보여준다. 중인층의 문화활동은 곧 위항시사(委巷詩社)와 연관된다. 위항(委巷)은 말그대로 고불고불한 길을 말하는데, 위항인(委巷人)은 도시 주변에 사는 사람들을 칭한다. 이들은 ‘서울변두리에서 일정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임을 형성하며 살았다. 위항의 시사(詩社)가 바로 이들의 풍류모임으로, 조선후기 극성을 했다. 시사에서는 주로 시.서.예.악으로 음영(吟詠)을 했는데, 거문고를 뜯으며 젓대를 불고 시를 읊으며 글을 쓰며 풍류를 즐겼다.

 

이들은 사대부들의 관변시학(官邊詩學)과는 다른 근대적인 시학을 형성하여, 시절을 풍미했다. 이런 문화 힘입어 사대부들의 시가와는 다른 가곡문화가 극성을 하며 김천택(金天澤),김수장(金壽長)등 수많은 가객(歌客)들이 등장하여 만년장환의 탄(歎)을 노래했다. 이들은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노가재가단(老歌齋歌壇)을 조직을 형성했다.

김천택은 젊은 시절 포교(捕校)라는 서리(胥吏)였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소리생활을 청산하고 인생의 대부분을 야인으로 남아 여항풍류객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당시 경천산가단에 모인 가객들은 김천택을 중심으로 김수장, 탁주환,박상건,김유기,이차상 등등 당대 유명한 가객들이 운집했다.『청구영언』은 이 가단의 성립과 활동을 통해 편찬된 작품집이다.

 

노가재 가단은 경천산가단에서 활동했던 김수장이 중심된 가단이다. “노가재”는 풍류모임의 성격을 넘어 풍류인들의 집합장은 물론, 가객들의 교육과 가객들의 공연활동을 하는 보다 적극적인 가단이었다. 당시 김수장과 동년배 혹은 후배들이 이 간단에 운집하였고 김수장은 가론(歌論)을 논하며, 『해동가요』를 편찬했다. 김수장은 서문에 역대임금의 작품 및 이름있는 벼슬아치와 선비,가객,어부,아전,서리,민간의 한량,명기와 무명시의 작품.그리고 스스로가 지는 장?단가 149장을 정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든다고 적고있다.

그외 서리출신의 구로회(九老會)가 결성됐고, 매화점 장단을 창안한 장우벽(張友璧)이 등장하여 가단을 풍미한다. 이후 장우벽의 가보는 박효관(朴孝寬)과 안민영(安玟英으)으로 이어지며 근세가단의 역사를 만든다. 이들의 가단활동은 『가곡원류』편찬활동으로 이어지고, 또한 노인계(老人契)와 승평계(昇平契)를 조직하여 가단활동을 전개한다. 안민영은『金玉叢部』를 만드는데, 이 책에는 당시 박효관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활동이 정리되어 있다. 또한 당대 판소리 광대인 모흥갑과 송흥록등과 소리교류를 했다 하는 기술이 있어 주목된다.

 

영산회상 또한 대표적인 풍류기악곡으로 이 시기를 풍미한다. 앞다시 영산회상은 세조조 상령산(上靈山)을 원본으로 하여 아홉곡의 모음곡으로 완성된 곡이다. 상령산?중령산?세령산?가락더리는 상령산을 뿌리로 하고 있으나 도드리나 염불,타령,군악은 민간음악을 차용한 것이다. 영산회상의 역사는 대략 18세기의 급격한 변화를 통해 19세기 현행의 체계를 갖추었다. 영산회상은 현악영산회상,관악영산회상,평조회상으로 분립되는데, 현악은 줄풍류로 관악은 대풍류로 명칭하듯 풍류음악의 대표격으로 위치하고 있다. 당시 서울출신의 실학자들의 풍류방을 풍미하던 음악이 바로 영산회상이었다. 특히나 연암 박지원과 홍대용등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중시하는 북학파의 풍류활동이 두드러 진다. 연암 박지원과 형암 이덕무, 낙서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담헌 홍대용 등이 박지원의 집 주변에 모여 살며 문화를 형성해나갔다. 이들 중 박지원과 이서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울출신의 중인신분이었다. 특히나 담헌은 음률은 물론 악기에도 능했는데, 북경을 방문했을 때, 천주교당에 잇는 파이프 올갠으로 가야금곡을 연주했다 할 정도로 실학자이면서도 뛰어난 음악가였다. 연암 박지원과 담헌 홍대용은 이들은 음악이론 및 실기에도 능통하였고 각자 자신의 특기로 악기연주를 할 정도로 조예가 깊었다.

 

 이들의 악회(樂會) 풍경에 대해

“홍대용은 가야금을 앞에 놓고, 홍성경(洪性景)은 거문고를 고르고 경산은 소매에서 퉁소를 꺼내들고, 김억(金檍)은 양금을, 악원공(樂院工)인 보안(普安) 역시 국수(國手)라 생황을 연주하며 담원의 유춘오(留春塢)에 모였다. 김성습(金聖習)은 노래로 거드는데, 교교재 김공은 나이가 많으니 높은 자리에 임한다. 술이 거나해지니 바야흐로 모든 악기가 함게 어울어지니 깊은 정원은 그림같이 교요하고 떨어진 꽃잎은 뜰에 가득하다. 궁조(宮調)와 우조(羽調)가 번갈아 찾아드니 그 곡조 그윽하고 절묘하다.”라고 성대중(成大中)이 그의 ‘기유춘호악회’라는 글에 적고 있다.

조선후기 풍류는 조선전기의 예악적인 지향과는 다르다. 오히려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이용후생(利用厚生)과 같은 실물적인 이론이 중시되며 미학 또한 맛(味)이라는 실제적인 감각을 중시하는 경향과 함께 하찮은 초동급부의 노래속에서도 천리(天理)를 얻을 수 있다는 가론(歌論)까지 전개된다. 인간 이상의 추상이 아닌 인간의 삶과 함께 하는 구체성을 논하는 것이다.

 

위항의 시사(詩社)와 악회(樂會),가단(歌壇)을 형성하며 조선후기는 자연과의 교감을 통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풍류했다. 이들의 이런 문화는 신분의 속박으로 벗어나며 문화로서 연대한 새로운 이상향이었다. 바로 조선이 얽어 놓은 유교신분사회를 벗어나 풍류로서 정(正)을 지향하는 음악을 창출했다. 끝으로 중인의 음악을 통하여 우리는 민간 및 천인들과의 광범위한 음악교류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음악신분사회의 변동을 알 수 있다.

 

 

다) 판소리와 산조

 

 

 판과 산(散)에는 한국문화 형성의 논리가 있다. 또한 민중성(民衆性)과 근대성(近代性)을 웅변하는 힘있는 단어이기도하다. 이들 음악이말로 민간음악의 대표격이고, 근대적인 음악양식성을 대변하고 있다. 서민들의 생활속에서 서민들의 애환과 함께 하며 그들의 역사적인 삶를 대변한 음악이다.

판은 곧 ‘모음’과 ‘엮음’의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판소리는 우리역사를 통해 창출된 모든 소리를 엮고 있다. 그러므로 판소리는 이전의 소리를 묶어 새로운 차원의 음악양식을 창출한 소리라 하겠다.

판소리 형성에 있어 무가(巫歌)기원설, 잡가기원설, 설화기원설, 중국 강창기원설, 도인설등 많은 설이 있으나, 이들 모든 소재들이 판소리에 용해되어 있다. 오히려 판소리의 더늠에 영향을 준 민요에서 서사민요 그리고 판소리라는 극가(劇歌)로의 발전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인데, 판소리형성에 있어 가곡의 영향 또한 만만치 않다.

우선 판소리의 조격(調格)에 있어 우조(羽調)와 계면조(界面調)의 조격이 있는데 우조는 웅화심장(雄和心長)함을 바탕으로 온화하면서 씩식한 느낌을 주는 창법이고, 계면조는 미려청고(美麗淸高)하고 애원처절(哀怨悽絶)하며 감성적인 소리로 한스럽고 고독한 애수가 얽히어질 때는 계면이 창법이 더욱 효과적이다 한다. 예컨데 우조가 화란춘성(花爛春成)의 만물이 성장하는 봄을 상징한다면 계면조는 서리 내리는 가을 달밤에 기러기 소리 지저귀는 ?음을 상징하는 격조(格調)라 한다.

 

위의 표현에 의하면 이는 가곡에서의 창조(唱調)에 대한 논의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가곡에서의 영향을 재고해 볼 수 있는 데, 그러나 판소리의 장단과 조(調)를 통한 극적 구조 즉 이면 창출은 이를 넘는 소리와 이야기 세계의 무궁한 판벌림과 판엮음을 보여준다. 그 것이 바로 판소리의 위대함이다.

판소리의 역사를 명창의 역사를 통해 간략하면, 판소리 초기 역사는 숙종조를 넘어간다. 초기판소리사는 권삼득의 덜렁제와 염계달의 경제,호령제로 대표된다. 기존의 이야기소리구성에 그들만의 독특한 더늠을 형성하여 판소리가 형성되는 단계였다. 그리고 순,헌,철종 삼대에 걸친 명창으로 가왕(歌王)의 칭호를 받고 있는 호풍환우(呼風喚雨) 송흥록(宋興祿)에 의해 동편의 창제가 만들어졌다. 당시 송흥록은 안동김씨 세도가인 김병기(金炳冀)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농을 할 정도였는데, 한번은 그 농이 심해 김병기에게 혼이 나자 평소 김병기가 좋아하는 적벽가 한 대목을 시원하게 불러 화를 풀어주었다는 일화도 전한다. 그의 귀곡성(鬼哭聲)은 참으로 신접(神接)할 정도로 요묘했다 한다. 또한 그의 창조는 호걸제로 유명한데, 적벽가에 특히 많이 사용되었다. 송흥록은 김병기의 실각과 함께 화려한 막을 접고 함경도 길주에서 쓸슬히 여생을 마쳤다 한다.

 

다음은 8명창 시대로 모흥갑(牟興甲)과 고수관(高壽寬)이 주목할 만하다. 모흥갑은 적벽가를 특장으로 했고, 그의 더늠으로는 춘향가 중 이별대목이 유명하다. 고수관은 소년명창으로 유명했는데, 춘향가중 이별가 대목이 그의 더늠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판소리 더늠에서 현대적 감각을 풍부하게 지닌 석화제를 더늠한 김계철이 있고, 얇은 바람에 가는 비 휘날리듯 간드러진 단창성(斷脹聲)으로 유명한 신만엽이 있다. 신만엽은 수궁가 중 토기의 간을 오려내는 처절한 대목을 잘 불렀다 한다. 신만엽의 적통은 이날치, 정창환, 김채만, 임방울 등으로 이어지며 서편의 한줄기를 이룬다. 박유전은 서편제의 대표격인데, 한 쪽 눈이 없어 일목명창으로 유명했다. 박유전은 대원군의 총애를 받는데, 말년에 보성으로 내려온 박유전은 서편소리에 동편의 맛을 가미해 강산제를 창시하며 최후의 8명창이 된다.

 

8명창이후 고종조에 또다른 5명창 시대가 열린다. 이들은 협률사와 조선성악연구회를 통해 판소리사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흥보가의 제비노정기를 작곡한 김창환(金昌煥)와 귀곡성음으로 새타령을 잘불렀던 이동백(李東伯)과 중고제 명창인 김창룡, 그리고 판소리 2백년사의 대천재 명창인 송만갑이 있다. 송만갑의 소리는 구김살없는 꼬장꼬장한 통상성(通上聲)으로 힘에 찬 일구일절은 대명필의 필력과도 같다고 한다. 송만갑은 동편의 소리에 서편을 가미했고, 이것을 또 다시 동편화시키며 송만갑제라는 독특한 가풍(歌風)을 창출했다. 비록 동편 보수파에게 축출당했지만, 송만갑제는 파죽지세로 판소리계를 석권하며 어전진가(御前進歌)로 명성을 날렸다. 그리고 천부적인 목의 한계를 붙임소리로 극복한 정정렬이 있고, 그리고 명고(名鼓)이자 명무(名舞)인 한성준(韓成俊)의 역사 또한 귀중하다. 또한 쑥대머리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임방울 또한 판소리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인물이다. 판소리는 이후 창극시대와 무형문화재 시대를 통해 새로운 역사적인 전기를 맞는다.

산조는 악기(樂器)로 타는 판소리라고도 한다. 혹자(或者)는 시나위를 모태로 하여 판소리를 통해 자란 것이 바로 산조라고 한는데, 산조의 기원 또한 오리무중이다. 산조를 허튼 가락이라 한다. 그러나 허튼 짓이라고 하기엔 산조에 담긴 무궁한 예술성을 충분히 해석할 수는 없다.

 

산(散)에는 펼침의 미학이 내재해 있다. 무엇으로부터 펼침인가? 우선 펼침에 있어 되돌아듬에 대한 펼침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조선조 내내 변화(變化)를 거듭한 영산회상(靈山會上)이나 보허자(步虛子)와 같은 음악은 환입(換入)이라는 음악양식을 가지고 있다. 환인은 되돌아드는 반복을 의미한다. 돌고도는 반복을 통해 새로움을 창출하는 그런 음악양식은 마치 화두(話頭)와 같은 철학적인 사유를 연상하게 한다. 근본으로의 부단한 회귀를 통해 화두의 세계를 넓히는 동양철학적인 사유를 연상하게 한다. 산(散)은 그런 회귀를 통한 화두를 확장하는 새로운 영역을 보여준다.

 

산조는 판소리의 영향은 자명한 것이고, 또하나 영산회상의 확장이란 면에서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이미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근대사회에 오면 위항의 풍류에 천인출신의 악공들이 대거 참여한다. 그리고 악기를 잘하면 그 것으로 충분히 존중을 받는 사회문화가 되어 있었다. 그런 면에서 악회(樂會)에서의 문화적인 공유야말로 산조의 미학형성의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이다.

다만 산조의 형성과 관련하여 영상회상 이후를 대표하는 기악곡이란 만에선 자명하다. 우선 영산회상과 관련하여 ‘느리고 -보통- 빠르게’ 라는 생성론적(生成論的) 장단형식을 갖고 있다는 면에서, 오히려 산조는 이런 장단구조의 완성이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체험적인 장단구조의 가락을 펼쳐서는 노는 기악놀음이라는 면에서 산조는 바로 영산회상 이후의 근대적 사회미학을 구현하고 있는 셈이다.

초정 박제가(朴齊家)는 새로운 미학(美學)을 전개하며 ‘맛이란 어떤 것인가. 저 은하와 금수에서 볼 수 있다. 한순간에 마음과 눈이 함께 움직여 지척의 땅에 펼쳐진 이태(異態)를 대강 살펴 본다면, 족히 그 정을 알 수는 없지만, 세밀히 살펴보면 무궁한 맛을 얻을 수 있다. 무릇 물건의 무궁한 변화가 족히 마음을 움직이고 눈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미(味)인 것이니, 비단 입에서만 그 맛을 느낀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논을 개진한다.

 

산조에서의 맛은 곧 성음이다. 영산회상이 반복을 통해 무념무아(無念無我)의 세계로 진입했다면 산조는 무구한 인간주의적 감성을 펼쳤다. 조이고 푸는 감정과 시름놀음을 하며 말이다. 바로 맛(味)과 같은 구체적인 소리를 통해 주자의 무궁한 성음을 펼쳐놓을 수 있었던 문화환경이야말로 바로 산조를 발전시킨 토양이었을 것이다.

산조의 역사는 가야금을 통해 집약되는데, 대략 제4세대로 분립된다. 제1세대는 1850년부터 1925년 정도이고,장단형성기라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드는 명인은 김창조와 한숙구, 심창래, 박팔괘 등이다. 이 시기는 장단틀의 정형화로 음악형식의 뼈대를 갖추고, 여러 조로 단락 연결된 진양조가 성립되었다. 제2시기는 1890년에서 1950년 정도인데, 대략의 가락이 형성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연대의 폭이 커서 1.5세대와 2세대로 분류되는데, 1.5세대에 드는 명인은 심상건, 강태홍, 한성기 등이고 제2세대 명인은 김종기, 최옥산,안기옥,서공철,박상근, 정남희 등이 있다. 이 시기는 1세대들에게 배운 가락을 바탕으로 하여 자기의 가락을 더늠하여 유파를 형성하는 시기이다. 특히나 시기에는 귀곡성이나 말발굽소리, 비오는 소리 등 가야금 표현기교를 더하며 명인기를 자랑하던 시기이다. 제2세대는 모두 남자인 점이 이채로운데, 이들은 20대에 명인기를 터득한 후에 음반취입을 하거나 권번 선생을 활동하며 제3세대 명인을 길러냈다. 이들은 가야금산조는 물론 판소리,병창,시나위도 연주할 수 있었고 다른 악기의 연주나 장고반주 및 춤에도 능숙했다.

 

제 3세대는 1910년에서 1980년 사이로 이 세대에 드는 명인은 김죽파, 함동정월,김윤덕, 성금연, 원옥화등이 있는데, 이들 중 김윤덕을 제외하고 모두 동기(童妓)로 출발,권번에서 가야금을 배웠다. 가야금과 양금으로 기초를 닦고, 산조는 독선생을 들여 7~8세 무렵부터 배워 10대 후반 이미 명인으로의 반열에 오르며 음악활동을 전개했다. 이들 대개가 40대 이후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으며, 독특한 유파(流波)를 형성한다.

현재는 제4세대로 전통적인 방법과 제도화된 학교교육을 통해 산조를 학습하고 활동하는 세대이다. 이들에 의해 산조가 어떻게 확장될 지는 두고볼 일이다. 그러나 산조는 이미 거대한 집과 같은 튼튼한 고전건축물이라서, 이를 넘는 새로운 창착물을 구성하는 것은, 이 세대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현재 산조는 가야금을 필두로 거문고, 대금, 아쟁, 해금, 피리산조 분립되며 백가쟁명을 맞았다. 산조는 20세기를 장악했다.

 

 

라) 전문잡가패와 민요명창의 활동

 

 

   근대이후 주목되는 것은 민간의 전문예능집단들이 대거 행장을 수습하여 전문패로서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다. 특히나 잡가는 사계축소리꾼들이 주도하는데, 사계는만리동과 청파동일대를 가리킨다. 당시 잡가는 추조박(秋曺朴)에 의해 주도됐는데, 추교신(秋敎信)?조기준(曺基俊)?박춘경(朴春景)을 말한다. 박춘경은 추교신의 제자인데, 박춘경의 수제자로 근대 잡가와 재담의 명인 박춘재와 주수봉이 있다. 조기준의 문하에는 최경식과 장계춘이 있는데, 이들 모두 일제시대를 풍미했다 잡가의 명인이다. 그리고 주수봉의 제자로 이진홍, 묵계월, 김옥심이 있고, 최경식의 문하에는 유개동, 정득만, 김순태가 있다.

 

한편 서도잡가는 19세기 허득선.김관준을 시도로 삼는데 허득선의 전통은 김칠성에 이어 김옥선에게 전승된다. 서도 선소리는 평양의 날당패라는 선소리꾼들에 의해 20세기초 서울에 소개됐고 원각사 시절에 문영수와 이정화가 주로 활약했다. 문영수와 이정화의 전통은 이후 박춘재등 경기선소리명창들에 의해 전승된다.

한편 남도 잡가는 고종 때 신방초(申芳草)에 의해 시작되는데, 화초사거리는 그의 작품이라고 하며, 이후 장판개?김정문에 의해 보렴?성주풀이?산타령이 전승되었다.

경기선소리는 주로 서울 오강(五江)의 소리꾼에 의해 발전된다. 오강이라 함은 한강,용산,마포,지호(支湖),서강을 말하는데, 19세기 후반 의택이와 신낙택(申洛澤)을 시조로 삼는다. 선소리는 산타령을 말하는 것은 산타령은 놀량, 앞산 타령, 뒷산타령, 자진산타령으로 구성된다. 산타령은 소고를 들고 노래를 하는데, 이에 판소고라고도 한다. 산타령패는 주로 정월대보름 다리밟기때 공연을 하는데, 잡가와 풍물 등을 결합하여 공연했다. 당시 유명한 산타령패는 뚝섬패?과천방아다리패?한강패?삼개패?왕십리패?호조다리패?진고개패등이 있다. 특히 뚝섬패의 이태문(李泰文)과 왕십리패의 이명길(李命吉),호조다리패의 월선(月仙)이 그리고 과천방아다리패의 소완준(蘇完俊)이 일제시대까지 풍미했다. 소완준의 제자로 정득만이 있고,이명길의 문하에 이창배가 있다.

1902년 협률사가 설립되자, 잡가명창과 선소리패는 판소리명창과 함께 희대(戱臺)라는 무대에서 일반대중을 위해 공연을 했다. 당시 박춘재는 가무별감(歌舞別監)이라는 직책을 맡아 활동했다. 또한 1908년 원각사 설립 이후 연흥사?장안사?광무대에서 줄타기?땅재주?재담?창극?민요?잡가의 명인 명창들이 활발한 연주활동을 벌였는데, 이들은 일제시대 SP음반사업에 총아로 등장하여 수많은 음반을 남겼다.

 

일제시대 SP음반을 통해 널리 알려진 명창들을 보면 경서도소리명창 박춘재?김홍도?문영수?이정화등이 1920년대를 주름잡았다. 1930년대는 이진봉?김옥엽(金玉葉)?이영산홍(李映山紅)?박부용?신해중월?김태운?차대감이 경기소리명창으로 활약했고 남도소리는 강남중(姜南中)?김추월?신금홍(申錦紅)에 의해 20년대에 주로 취입되었고 30년대에는 이화중선?박록주?김소희?이옥화가 등장하여 음반녹음을 하였고 남도잡가는 이옥화?이소향(李素香)?김추월?김옥진등이 있어 음반활동을 했다.

 

 

 2. 일제하의 민족음악

 

 

  1910년 한일합방이라는 민족사적 비운기를 맞는다. 일본에 의한 일방적인 합방(合邦)은 곧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총체적인 면에서 위기를 맞는다.18세기말 열강의 식민지 영토확장이란 서세동점(西勢東漸)과 함께 한반도 또한 서구열강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근대적인 민중의식의 자각은 곧 실학이란 새로운 학풍과 동학(東學)을 앞세운 반봉건반외세(反封建反外勢) 농민항쟁을 통해 대응했지만 서구문명의 폭압앞에 무참히 무너졌다. 한일합방은 이미 군국주의로 무장한 일본에 의해 예정된 절차였다. 무너지는 조선조를 옹호하려는 대원군의 척양운동(斥洋運動)과 신진지식인들의 개화운동(開化運動)이 있었지만 이 또한 한낮 도로(徒勞)였다. 조선은 이미 임진왜란과 정자호란을 거치면서 왕조로서의 면모는 물론 통치력까지 상실하고 있었다. 오히려 양란이후 중국과 일본의 정권교체와 같이 조선 또한 정권교체를 새로운 변법자강(變法自疆)이 일어났다면 동아시아의 역사는 다르게 전개됐을 것이다.

 

하여튼 조선조 마지막 임금 고종(高宗)이 대한제국 선포를 통한 구국운동도 수포로 돌아가고, 조선은 45년에 걸친 일제의 폭압통치(暴壓統治)를 받는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제1기는 무단통치시기(武斷統治時期)로 정리되고 제2기는 문화통치시기(文化統治時期)로 정리되고 마지막은 황민화통치시기(皇民化統治時期)로 정리된다. 이미 일본은 한반도의 통치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고, 계획된 각본처럼 조선을 일본화(日本化)하는 통치를 전개했다.

일본식민통치의 이론적인 근거를 세운 동향실(東鄕實)의 ‘식민통치와 민족심리’라는 정책문을 보면 식민통치에 있어 1. 식민지에 있어 이민족(異民族)이 가진 민족정신(民族精神)을 존중할 것 2. 이를 토대로 삼아 모국(즉 일본)의 문화를 주입하여 이에 일종의 신문화(新文化)를 발전시킬 것 3. 국가의 신축(新築)을 기함과 함께 식민지에서의 이민족에게 행복한 문화의 은전(恩典)을 입할 수 있게 할 것으로 요약하고 있다. 동향실은 만약 이런 정책이 통하는 않는다면 최후에는 식민지 전대중을 몰살해야 한다는 극언을 서슴치 않을 정도로 극악무도한 관변학자였다.

 

위와 같은 동향실의 이론은 문화통치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그러나 이미 헌병. 경찰을 동원한 무단통치기간 동안 조선은 삶의 본질로부터 완전히 뿌리 뽑힌 상태였다. 단적인 예로 척식사업(拓植事業)을 통해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북만주로 이주하는 등 삶으로부터 뿌리 뽑히고 있었으며, 민요와 굿 성황당이나 유교 등 한민족의 정신적인 근원을 이루는 문화적 통(統)에 대한 조사와 함께 동시적인 해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바로 조선은 일제에 의해 삶이 뿌리 뽑히는 비운을 당하고 있었다.

 

동향실의 지적처럼 식민지 민족의 민족정신에 대한 해체와 함께 일본문화를 주입한 신문화(新文化)의 기축은 한반도에서 그대로 현실로 나타났다. 일본유학생을 중심으로 문화전반에 일어난 신문화운동은 정작 일본문화의 아류화(亞流化)였으며, 신문화운동을 주도한 대개의 유학생이 친일파로 전락한 사실을 볼 때 신문화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는 더욱 자명하다. 이후 황민화정책을 통해 이루어진 민족문화말살정책과 내선일체를 앞세운 전시동원명령은 그야말로 한민족을 전면적으로 말살하고 완전히 일본국가화하는 식민정책이었다. 비록 50년이란 식민통치기간이었지만 한반도에서 일제가 저질러 놓은 식민통치는 한민족의 근본이 뒤바뀔만할 정도의 강진(强震)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지키는 것만으로도 철저한 항거였을 것이다. 그러나 비타협적인 무장항쟁과 합법,비합법을 넘나드는 다양한 대중조직운동이 전개하며 식민지의 어둠을 헤치고 새벽을 열어나가고 있었다.

특히나 민족정신과 관련한 문화에 있어 근대를 열어나간 음악들은 그에 맞는 방식으로 새로운 역사를 전개했다. 소리와 산조, 민요, 잡가등 근대적인 전통을 계승한 음악들을 일제시대를 통해 새로운 양상을 전개됐다.

 

 

1) 협률사의 전통

 

1902년 대한제국 말기 정부가 세운 협률사(協律社)는 한마디로 관립극장(官立劇場)이다. 나라의 제사와 시호를 맡고 있던 봉상시(奉常時)에 속해 있던 협률사(協律司)가 재정충당을 목적으로 운영했던 극장이다. 당시 협룰사에는 관기(官妓)는 물론 김창환(金昌煥), 이동백(李東伯), 송만갑(宋萬甲) 등 당대를 호령하던 명창 그리고 박춘재 등 경서도 명창등 170명이나 되는 예인들로 구성된 협률사는 판소리, 민요, 잡가,춤,재주넘기,줄타기,재담, 잡희, 승무,검무,사자무 등을 공연하였다. 이들 종목들은 근대사회 이후 민간사회에서 활발히 이루어지는 공연종목이다.

이미 협률사 형성이전에 도시화와 함께 상업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상설무대(常設舞臺)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며 우후죽순 양산됐는데, 용산무동연희장, 연흥사,광무대,단성사,장안사등 설치되어 각종 공연을 하고 있었다.

 

협률사를 통해 주목할 바는 대한제국의 정부가 세운 관립극장의 레파토리가 주로 민간에서 이루어지던 공연종목을 수용했다는 점이다. 이는 판소리가 국창(國唱) 혹은 어전광대로 대접받던 당시 풍토로 보면 당연한 문제지만, 국가를 대표하는 극장의 주요공연 종목이란 점에서 이미 근대음악문화양식이 사회문화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게해 준다.

협률사는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이 몰락하자 협률사를 주도하던 명창들이 낙향을 했다. 이후 협률사의 전통은 원각사로 이어지는데, 그 때 지방으로 낙향한 명창들은 혈률사를 다시 조직하여 공연활동을 했는데 그 중 송만갑협률사,김창환협률사, 광주협률사 등이 유명했다.

 

 

  2) 창극과 조선성악연구회

 

 

  조선후기 판소리명창의 국창 등극과 같은 입신출세는 판소리를 당대 최고의 예술로 성장하게 했다. 일제시대 전후로 직업적 예술로 성장한 판소리는 창극이란 새로운 양식을 마련하며 판소리사의 새로운 장을 연다.

판소리와 창극은 동일하게 창(唱)을 중심으로 하지만, 판소리가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어 광대가 부르는 소리인 반면, 창극은 창극 대본에 따라 여러 창악인이 등장하여 연기하며 소리를 부르는 무대예술을 말한다. 즉 창극에는 연기라는 너름새의 중요성이 강조되는데, 이미 신재효는 판소리의 너름새의 중요성을 그의 광대가(廣大歌)를 통해 밝힌바 있다. 즉 판소리의 극적 표현력의 중요성을 감지한 것이다.

 

창극은 판소리의 극적 구조를 연희화 한 것인데, 청나라의 창희(唱戱)가 일정부분 영향을 주었다한다. 당시 청계천 2가에는 청상(淸商)의 집단거주지인데, 여기 청국인의 창극관이 있었다 한다.이 창극관에서 날마다 청국인 창우(唱優)의 삼국지와 같은 연희가 있었는데, 창극 ‘삼국지’가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한다. 이에 강용한 명창이 청국인의 창극관에서 살다시피하였는데, 강용환이 청국의 창희를 모방하여 판소리 춘향가를 창극으로 발전시켰다고 명창 이동백이 구술하고 있다. 당시 이동백은 송만갑, 김창환과 함께 창극을 주도한 인물이다.

중국의 경우 당의 변문(變文), 송의 제궁조(諸宮調)와 같은 강창예술(講唱藝術)이 원대에 잡극(雜劇)이라는 무대예술로 정립됐고 명대에 곤곡(昆曲)으로 청대의 평면적인 난탄(亂彈)으로 반전했는데, 당시 청상의 창극은 이 난탄인데, 당시 명창 강창용이 본 것은 바로 이 난탄(亂彈)이다. 강창룡이 바로 판소리 창극화에 공헌한 인물이었으며, 창극의 태동에 대한 것을 이동백이 구술한 것이다.

 

창극은 새로운 문화환경에 적극 대응하는 양식이다. 18세기 이후 축적된 상업자본의 영향아래 상업자본의 비호를 받으며 발전한 것이 바로 창극인데, 당시 서울에 진출한 중국자본은 청극을 통해 일본자본은 신파극장을 통해 상업권을 확장해 나갔던 정황을 보면, 창극은 국내 상업자본과 이해관계가 긴밀히 결합됐음을 알 수 있다. 창극은 판소리사 있어 판소리 공연을 판에서 무대로 전환했으며, 또한 일인 창에서 다인창으로 변화하는 역할을 했다.

원각사는 협률사의 재조직으로, 당시 원각사를 주도한 명창들은 협률사 시절의 창극실험을 기반으로 새로운 창작판소리 [최병두타령]을 장기간 연습에 걸쳐 무대화한다. 최병두타령은 실제 최병도 라는 한 평민의 민란에 얽힌 이야기를 창극화한 것이다. 당시 창극 최병두 타령은 서울 극장가에 공전의 히트를 하며 창극을 청극이나 일본신파극을 물리치고 당당히 최고의 무대로 자리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한 사전대본검열, 일본연극에 대한 모방강요등 갖가지 탄압이 자행되자, 다시 한일합방전인 1909년 자진 해산한다.

 

조선성악연구회는 1934년 결성된 조선성악원을 모태로 발족됐다. ‘조선의 가무의 연구는 물론 각개의 양성과 선전’을 위하여 송만갑,이동백,정정렬,김창룡등이 모여 활동했다. 그해 9월 조선성악연구회는 장곡천정 공회당에서 추계공연을 갖는다. 이후 각 언론사의 후원을 받아 명창대회를 열었고,남선(南鮮)지방을 순회하는 공연을 가졌다. 그리고 1936년 봄부터 새로운 레파토리 개발에 나서 고전소설인 [유충률전]을 창극화하고, 연쇄극(連鎖劇)으로도 촬영을 했다. 또한 판소리 12바탕 중 전승이 끊겼던 [숙영낭자전][배비장전]의 발굴,복원 공연을 가졌으며 곧이어 [편시춘]이라는 창극을 무대에 올렸다. 또한 동양극장이라는 연극전용극장에서 공연을 주로 하여 무대에 대한 새로운 기법을 익혀나가며 창극의 예술성을 고양해 나갔다. 조손성악연구회는 새로운 창극개발과 함께 고전에 대한 재해석에도 주력하여 창극 [춘향가] [심청가][흥보가]를 정교하게 선보여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중심을 이루전 이동백,송만갑의 타계로 인해 서서히 조선성악연구회는 내부 분열되며 창단 9년만에 막을 내린다.이후 창극단이라 명칭의 공연단체가 명멸하며 각종 창극이 새롭게 만들어지며 해방을 맞는다.

한편 안기옥은 일제의 공연요청을 거부하여 구류생활을 했고, 최옥산은 사상가를 불렀다는 죄명으로 수차례 감금을 당하고, 박동실은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열사가류의 창작판소리를 만들어 공연을 했다. 적극적이든 소극적으로 일제에 대한 부단한 항거야말로 해방을 맞는 떳떳한 발걸음이었을 것이다.

 

 

 

   3) 정악(正樂)과 조양구락부

 

 

   일제시대 정악은 그나마 근대사회를 구가하던 중인층의 풍류문화가 일제에 의해 찬서리를 맞고, 또한 판소리와 산조, 창극과 같은 새로운 민간음악의 절대적인 인기를 얻고 서양음악이 새로운 음악으로 등장하자 자신의 위치존립마저 위태롭게 된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정악교육기관을 설립하는데 조양구락부(調揚俱樂部)가 바로 그것이다. 조양구락부는 정악을 교습하면서 신악(新樂)을 발전시킨다는 명분을 내걸고 1909년 12월 발기한다. 조양(調揚)이란 의미대로 고르고 밝게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 가악의 정취를 세인들이 몰라 음란한 채로 속세의 흐름에 버려진 지 오래니 이러한 때에 전통을 연구하고 새 것을 익혀 참모습을 가려내고 가르쳐 국민의 입지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고 그 취지를 밝히고 있다.

 

당시 구락부는 친일사교단체를 대변하는 이름이었다. 영어의 클럽의 일본식 발음으로 조양구락부는 이미 친일단체로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출발했다. 애국단체가 우후죽순처럼 무너져갈 때 말이다. 더구나 1911년 2월 이준용외 11명의 친일세력이나 귀족들로 구성된 정악유지회(正樂維持會)를 발족한다. 그리고 1911년 6월 <조선정악전습소>라는 본격적인 학교 체체를 갖고, 학생모집을 한다. 그리고 학칙에 따라 조선악과 서양악을 함께 가르쳤다. 그러나 조선정악전습소는 내부갈등으로 1915년 폐쇄되고 이후 수요회(水曜會)로 명맥을 유지한다. 그리고 1947년 조선정악원으로 개칭했고, 사단법인 한국정악원으로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한편 하규일은 조선정악전습소 내에 분교실 형태로 향기들을 모아 다동조합을 만들고, 기생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치는 음악교육을 실시했다. 여기서 실시한 가곡과 궁중정재의 지도는 오늘날 가악과 정재무로 맥을 이어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끝으로 정악의 역사적인 맥을 보면 실학파에서 개화파로 그리고 친일파로 이어지는 한 맥과 일통함을 느끼게 해준다. 오늘날 정악은 아악과 같은 용어라 하여 의도적인 혼용을 하는데, 역사적인 맥이 다르다. 장사훈의 국악대사전에 정악(正樂)을 칭하여, ‘아정(雅正)한 음악을 칭하는 말. 현재 일반적으로 아악과 정악을 구분하여 정악은 1910년 무렵부터 영산회상, 가곡 등에 새로 붙여진 음악인 양 소개되고 있으나, 아악과 정악은 같은 성격을 띤 음악이다. 즉 아정(雅正)한 음악이나 정대(正大)한 음악은 같은 뜻이다 하며 민간의 정대한 음악이 정악이 아니고, 아악을 가리치는 말이라고 자가당착적(自家撞着的인) 풀이를 하고 있다. 또한 성경린은 “아악이란 역대 궁중에서 나라의 제사, 또한 궁중의 조회와 연향에서 연주되어 온 존귀한 정악(正樂)” 이라 하여 정악의 실체를 부정하고 있다.

 

이에 반해 이혜구 박사는 정악을 보통 거문고,가야금,양금,해금,젓대,피리,장고의 관현악합주와 주로 상령산에서 염불, 타령, 군악의 무용곡을 집성한 것으로 서양의 실내 소타타를 연상시킨다 하며 정악을 요약하고 있다.

 

 

4) 이왕직아악부와 아악의 전통

 

 

   1910년 한일합방은 조선의 몰락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조선의 영고성쇠를 과 함께 궁중의 제례, 회례, 군례를 담당했던 장악원은 존폐의 위기에 놓인다. 그러나 이미 장악원은 1897년 장례원 협률과로 흡수되고, 1900년 협률과에서 교방사로 개칭되었는나, 그나마 1905년 일제통감부의 통제권하에서는 장악과로 축소된 상태였다.

한일합방후 조선왕조가 이왕직(李王職)이라는 특수집단으로 전락한다. 장악과는 아악대(雅樂隊)라는 이름으로 몇십명씩 인원만 유지하다, 1925년 이왕직아악부라는 명칭으로 정비되며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나 창경원과 아악부 폐지에 대한 논란 속에 폐쇄될 위기를 맞다가 해방을 맞는다.

 

특히나 아악부 폐지와 관련하여 田邊尙雄(다나베 히세오)라는 일본인 음향학자가 총독부에 건의하여 아악부를 승격해주고 대우를 높게 해주어 아악부 존폐의 위기를 모면하게 해주었다는데, 이런 그의 행적을 기려 아악보존에 크나큰 행적을 가진 은인으로 추앙하고 있는 진풍경도 연출되고 있다. 그러나 그 본질에 가면 앞서 일제의 교묘한 식민통치 전략과 긴밀한 연관을 가진다.

전변(田邊)은 『중국?조선음악조사기행』에서 “어쨌든 조선에서 정통의 길비악(吉備樂)을 장려하는 것은 대단히 만족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길비악이 조선음악과도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부터 미래 새로운 음악도 탄생해 나올 수 있다고 생각되어 진다. 그 것이 아니라 해도 일선융화라고 하는 점에서도 극히 의의가 있다.” 이 글을 보면 조선의 아악이 일본의 길비악(아악)과 같은 계통의 음악이기 때문에 일선융화에 있어서는 중요한 음악이라 하고 있다. 앞서 동향실의 식민정책론처럼 새로운 국가의 신축(新築)을 기하는 데 있어, 조선의 아악이야말로 일선융화의 첨병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왕직 아악부는 총독부 행사에 불려 다녔고 1930년대 말부터는 일본국가인 기미가요를 연주했다. 더욱이 1940년 한반도가 일본의 병창기지화되며 식민통치의 서슬이 시퍼럴 무렵, 이왕직 아악부는 부민관에서 일본개국 2600년을 기념하는 특별연주회를 개최한다. 여기서 이왕직아악부는 김기수 작곡, 이능화 작사의 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을 발표한다. 이 곡은 창작국악의 효시이지만, 일제를 찬양한 대표적인 친일곡이다. 누구의 말대로 식민통치가 그렇게 빨리 끝날 줄을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1930년대 신문화를 통해 개량화와 1940년대의 황국신민화라는 일제의 간사한 정책은 대다수 조선의 지식인들을 친일 앞잡이로 몰아세웠다. 최소한 이왕직아악부의 친일행위에 잘?잘못을 떠나 이왕조의 음악양식을 통해 친일행위를 한다는 그 자체가 별로 좋은 모양세가 아니다.

 

 

  5) 조선음악협회 산하 조선음악부

 

 

  일제의 황민화 정책은 1930년대 들어서면 더욱 그 간교한 계교를 더해간다. 1940년 조선내의 모든 음악단체를 묶어 일제시대 최대의 어용음악단체인 조선음악협회가 결성됐다. 당시 조선음악협회에는 양악부,방악부,경음악부,조선음악부등이 조직되어 있었는데, 당시 이 조선음악부에는 함화진을 비롯한 전통음악계가 집결했다. 주요 활동은 음악보국주간(音樂報國週間)을 열며 대동아공영의 문화건설 참여를 위한 활동이었다. 산하에 조선음악단과 조선가무단을 두고 다양한 활동을 했다. 당시 조선음악부에는 정악, 향악, 가악, 속곡, 민요, 무용등이 결합되어 있었다. 이 때의 정황에 대해 박헌봉은 “몇몇 동지들과 합의하여 양악부(洋樂部)와 방악부(邦樂部)(日本音樂部)밖에 없던 어용단체(御用團體)인 조선음악협회(朝鮮音樂協會) 산하에 조선음악부(朝鮮音樂部)를 새로 조직하였다. 부장은 함화진(咸和鎭)씨가 맡았고 나는 상무이사(常務理事)로 있으면서 남도지방 공연을 위한 음악단과 서도 지방을 위한 가무단의 두 단체를 갖도록 경기도 경찰부(警察部)의 허가를 받기로 했다.

 

그러나 벌써부터 정책적으로 우리 문화를 말살시키려고 덤비던 일제가 선뜻 허가해줄 리가 만무했다. 세 번씩이나 시연회(試演會)를 가졌건만 좀처럼 허가해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음악활동의 구심점이 없이 제각기 방황하고 있던 민속음악인들을 단합하여 명맥을 유지시킨 두 단체를 탄생시켰지만 그 단체들도 그리 명이 길지는 못했다.

창설이념(創設理念)아래 활동도 하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개전(開戰)이래 승승장구(乘勝長驅)하던 여위(餘威)를 가지고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을 적극적으로 들고 나온 일제는 심지어 ‘춘향전(春香傳)’까지도 일어로 공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우리 보고 일본말로 공연하라니 이건 사형선고였다. 불과 두해만에 헤어지는 건 정말 가슴아픈 일이었지만 차라리 단체를 해산하기로 했다.

전쟁말기에 소위 증산장려(增産?勵)를 위한 정책에 참여하라는 총독부의 지시로 잠시 부활되어 평양, 함흥 등지로 순회공연을 가기도 했으나 패전을 눈앞에 둔 시기에 이나마 오래 계속되지 못 할 것이 분명했다. 여러 동지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졌고 나도 고향인 진주로 내려가고 말았다. 그때가 해방 17일전 1945년 7월 29일이라고 기억된다.”고 회고했다.

 

 

 3. 민족광복과 정부수립후 민족음악

 

 

   1945년 8,15일 일제로부터 해방(解放)이 된다. 급작스럽게 찾아온 해방처럼 보이지만 근대사회를 지향했던 민중의 항쟁이 도도했던 그 역사를 되세겨 보아야 할 것이다. 항일의병, 항일독립군, 그리고 이름없이 조국독립을 위해 산화해간 무수한 넋들이 있다. 그런 도도한 힘이 있었기에 극악무도한 일제의 몰락이 있었던 것이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바로 인 것처럼, 일제가 몰아넣은 민족사적인 불행이라는 먹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광복(光復)의 신천지가 열렸다.

해방이 되던 해 1945년 8월 16일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약칭 문협) 산하의 음악건설본부(약칭 음건)가 설립되고 여기에 작곡부, 성악부, 기악부, 국악위원회가 분립했다. 당시 문협은 일제잔재 청산과 봉건잔재의 소탕을 골자로 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음건은 국악과 양악에 걸친 모든 음악가의 조직이었는데, 문화인의 대동단결을 고취하는 데는 일정부분 기여했다. 그러나 좌우익분리공간 동안 이데올로기적 대립과 갈등, 또한 친일에 대한 갈등으로 인해 해체되며 일제시대의 비극에 상응하는 새로운 갈등을 낳는다.

 

 

1) 해방정국과 음악계의 동향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음악계에 대두된 주요한 현상 중에 하나가 바로 서양음악이다. 이미 음악이란 일반 명칭을 도용하며, 서양음악계는 주류음악문화로 대두된다. 앞서 음악건설본부에 국악위원회가 별립한 것처럼 말이다.

또한 해방정국에 있어 좌우익의 대립은 곧 음악계에 있어서도 같은 문제였다. 1945년 9월 15일, 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이 건설되며 한쪽에서는 고려교양악협회가 조직된다. 즉 좌,우익음악진영을 표방하는 대표적인 단체가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한쪽에는 순수음악지상주의를 표방하고 또한쪽에서는 시대와 민족,역사에 있어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올바른 삶에 있어 음악의 의미를 묻는 표제를 통해 대립됐다.

 

 

  2) 국악원의 등장과 활동

 

  

   한편 음건의 국악위원회는 국악건설본부라고 개칭을 하며, 아악부와의 일정부분 통합을 이루어낸다. 그리고 8월 29일 국악건설본부가 국악회로 발전하며, 11월 10일에는 국악원으로 명칭을 개정한다. 한편 박헌봉은 “민속음악인의 대동단결(大同團結)을 목표로 국악건설 본부를 창설하였는데 오랫동안 민속음악을 천시해온 사람들의 그릇된 인식을 깨우침으로서 민속음악을 올바른 위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국악(國樂)이라는 어휘를 최초로 사용했다” 하며 국악이란 용어사용에 대해 밝히고 있어 주목된다.

당시 중앙신문 1945년 11월 11일자에 국악원 설립에 대한 기사를 통해 국악원의 전반을 읽어보면 우선 국악원의 강령에 대해서 다음과 밝히고 있다.

 

1. 세계음악사상(世界音樂史上)에 특독(特獨)한 조선국악의 원리를 파악하야 조선국악의 체계적인 이론을 수립하고 진지(眞摯)한 연구와 완전한 발전을 기함.

2. 조선전통의 음악예술을 확보하고 과거 특권계급에게 독점되었든 음악예술을 조선민중에게 절대 개방을 기함.

3. 본악이나 외래악을 물론하고 저열경부(低劣輕浮)한 음악은 철저히 배격하고 전통적 유아(幽雅) 명랑하고 순수한 신조선 음악건설을 기함.

 

이른바 국악원의 강령을 보면 근대음악정신에 대한 맥을 정확히 집고 있음을 알 수있다. 또한 음악사관을 이루려고 함을 알 수 있다. 소위 역사서술을 사관(史觀)으로 인식하는 근대 이후의 일이다. 함화진을 국악원 건설시기의 과제를 ‘민족음악의 수립’으로 인식했다. 이는 곧 근대음악에 대한 계승을 의미한다. 즉 특권계급에 독점됐던 음악예술을 조선민중에게 절대개방을 기함이란 문맥은 민중 즉 민간중심의 음악문화에 대한 계승을 의미한다.

 

당시 국악원의 부서 및 임원을 보면 위원장은 함화진(咸和鎭)이었고, 부위원장은 박헌봉(朴憲鳳)이었고, 총무국은 유기룡(劉起龍)이었다. 그리고 문화국은 장인식(張寅湜),김윤덕(金允德),김천흥(金千興),정남희(丁南希), 최경식(崔景植),이병성(李炳星)이었다. 그리고 산하부서는 아악, 정악, 기악, 창악, 무용부로 구성됐다. 국악원의 구성원 면모나 사업부서를 볼 때 당시 국악원은 소위 국악계의 모든 역량을 결집했음을 알 수 있다. 국악원은 전통에 대한 해석과 조선음악의 원리 파악이라는 근본에 대한 연구작업은 물론 각종 공연활동을 전개했으며, 또한 농악경연대회,농악채보에 관한 좌담회, 음악서적발간, 우리음악을 오선보에 옮기는 작업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했다.

또 한편으로는 국악원은 프로 음맹과 교류를 가져, 그들이 개최하는 행사에 동참하며 좌파활동을 한다. 민족문화건설 전국회의에 음악동맹과 공동의 논문을 발표하고, 남조선문화예술가 총궐기대회에 음악준비위원으로 프로음맹과 김순남과 국악원의 함화진이 선임되어 활동했다. 그리고 1947년 좌익계 대량검거선풍이 일어나며 함화진, 정남희가 피검된다. 또한 국악원의 주요간부를 맡았던 안기옥(1946년6월), 정남희(1950년 6월), 박동실(1948년 4월), 조상선(1950년 6월), 공기남(1950년 6월), 최옥산, 임소향, 이규남 등이 월북을 하며 박헌봉이 위원장을 맡아 국악원을 운영했다.

국악원은 ‘국악대발표’와 같은 대공연과 함께 국악원 산하의 다섯 창극단체의 활동과 창극제전, 전국농악경연대회, 전국향토민요발표회, 민속무용발표회등 다양한 공연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국악원의 활동 중에 주목되는 것은 창극이다. 1946년 1월 국악원은 창설기념으로 “대춘향전”을 공연했다. 대춘향전은 아악,창악,무용,민요,속곡을 종합한 공연이었다. 이 공연에는 아악지도/장인식,창악지도/이동백,박동실, 무용지도/이주환,조상선등이 참여하여 본격적인 종합공연물로 만들었다. 이 공연을 계기로 국악원에는 창극단체로 국극사(대표/정남희,조상선),국극협회(대표/박동실), 조선창극단(대표/안기준), 김연수창극단(대표/김연수), 임방울일행(대표/임방울)이 모여 활동을 했다.

해방 후 창극과 창극계는 국악의 주류로 자리잡으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는데, 이는 곧 창극이 종합적이면서도 서민들의 편에서 그들의 애환과 정서를 대변하고 있는 대표적인 공연물로 위치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 당시 공연된 창극을 보면 5대 판소리외에 <아랑애화> <고구려의 혼> <햇님달님><청실홍실><만리장성><남강풍운> <단종과 사육신>등 많은 창작창극들이 공연됐다. <남강풍운>은 동학혁명을 주제로 창작창극이며, <햇님 달님> <장화홍련전> 등 많은 창극이 해방 후 공전의 희트를 했다.

국악원은 산하의 “아악부 국영화안”이 국회통과 한 이후 대한국악원으로 명칭을 개정했고, 현재 한국국악협회가 그 명맥을 잇고 있다. 또한 국악원의 창극단은 현재 국립창극단으로 그 명맥을 잇고 있다.

 

 

  3)아악부와 국립국악원

 

  

   해방이 되자 아악부는 국악원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일부도 있었지만, 이왕가의 운명처럼 뚜렷한 명분없이 해방공간을 위치했다. 미군정은 법령 제26호 규정에 의해 구왕궁아악부(舊王宮雅樂部)로 명칭을 개정한 후 구왕궁아악부는 “우리에겐 강령같은 것은 없다. 그제 이제까지와는 달리 부질없는 소극적인 묵수(墨守)에 좌좌(座座)할 것이 아니라는 신념만은 누구에게나 넘치고 있다. 아악부는 무엇을 하느냐의 대답은 시간이 금후의 사업을 말해 줄 것이다”는 강령과 함께 조직을 발표했다. 조직은 아악사장 대리에 장인식 그리고 총무부(성령린 등) 장악부,교양부,아악사로 구성했다. 강령 아닌 강령에서 처음 아악부는 해방공간과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친일잔재 청산과 민족문화예술 건설이란 대전제에 대해 뚜렷한 입장 표방 없이 소아적인 원론만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좌익계 대량검거와 함께 국악원의 주요간부들이 피검(被檢)되며 인해 조직이 흔들이던 때, 장사훈? 성경린 등이 주동되어 민족음악연구회를 결성하여 “국악건설논의”라는 글을 내놓는다. 국악건설논의는 음악적으로 많은 연구를 하고 음악적 기량을 쌓는데 정진한 것을 촉구하는 것이 주 내용이다. 또한 아악부의 자랑스런 악기와 의복, 악서를 망라한 음악박물관의 건설과 본격적인 연구활동에 지탄 없을 확보된 인원과 우수한 기술의 아악부 악기와 악곡의 정리 및 신작(新作)과 이론을 규명할 민족음악연구소 등의 주요한 시설을 국가에서 경영하도록 조속 마련되어야 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런 제안내용은 이후 정치권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며 <아악부 국영안>으로 구체화된다. 이에 1948년 ‘아악부 운영에 관한 청원’을 국회본회의에 단독으로 제출해 가결하게 된다.

 

아악부 일동 대표 이주환의 명의로 제출된 이 청원서의 골자는 “아악부는 이조(李朝) 전기(全期)를 통(通)하여 정부에 예속(隸屬)되어 국악의 주요한 의식(儀式) 와사(外使)의 접대(接待) 궁중(宮中)의 연례(宴禮) 급(及) 제례(祭禮)에 봉사(奉仕)하였고 한일합방 이후로는 전혀 이왕가의 종묘(宗廟) 성균관(成均館)인 문묘(文廟)에 형식적인 주악과 내외 국빈객에 조선아악을 소개하여 오늘에 이릅니다. 과거 아악의 용도로 이르자면 오늘날 아악부에 존속의의로는 실로 모호타 할 것이로되 아악은 조선민족이 보특(保特)한 유일의 예술음악이요 고귀한 문화유산의 하나인 점에 상도(想到)하면 오히려 석일(昔日)로부터 논의할 수 없는 게 있습니다. 조선민족의 정신을 순화하자해도 아악을 두고 필진(乏眞)할 것을 못 봅니다. 한걸음 나아가 새롭고 빛나는 대한민족음악의 수립도 아악의 과학적인 검토와 정상한 계승에서 비로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중략). 아악부의 국가경영을 요망함은 한갓 관존적(官尊的) 인습(因習)이거나 과거의 퇴폐적인 안일을 탐하여서는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앞으로 아악부의 권위와 부원의 민족음악 발표건설에 대한 적극적인 노력은 정부의 책임과 감독에서만 가능한 것을 믿는 때문입니다. 삼가 아악부의 국영을 이에 건의하는 소이입니다.”로 되어 있다. 이 청원은 표결에 붙여져 117표 찬성에 60표 반대로 가결되었다. 그 뒤 1950년 아악부가 아닌 국립국악원으로 명칭 개정되어 공포되었다. 국립국악원은 민족음악의 보존과 발전을 도모함을 위해 설치된다 했는데, 아악부의 국영화 청원 내용을 보면 ‘아악은 조선민족 유일의 예술음악’ 으로 규정하며 아악부의 권위와 민족음악 발표건설에 대한 적극적인 노력은 정부의 책임과 감독하에서만 가능하다는 청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악부 청원의 흐름을 보면 정치권과의 긴밀한 내응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국립국악원의 설립은 아악이 새로운 시대의 중심으로 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몰락한 이왕가(李王家)의 운명에 비해 이왕가의 정신을 표현한 음악이 다시 대한민국의 적통(嫡統)을 잇게되는 그런 상황이 만들어졌다.

 

 

  4) 최근의 국악계 근황

 

 

   국악원(國樂院)과 국립국악원(國立國樂院)은 해방공간의 역사적인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 일제잔재 청산과 민족문화 대건설이란 전제명분은 좌우익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산산조각 난다. 소위 민속악과 아악으로 두 집단이 양분되며, 현대국악을 아악과 민속악으로 분류하게 되는 희귀한 상황까지 야기했다.

해방이후 대한민국의 밑그림을 그린 미군정의 문화정책의 결과, 서양음악이 제도 및 교육적인 기반을 바탕으로 주류를 형성한다. 정작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에도 일제 때의 탄압과 마찬가지로 국악은 사회적인 홀대를 받았다. 또한 해방공간에서도 국악은 진보(進步)와 친일(親日)이라는 두 가지 성향으로 갈등하다, 이승만 정권에 의한 대한민국정부 수립이 이루어지면 마침내 아악이 역사에 전면적인 재등장으로 하는 상황을 맞는다. 국악은 다시 근대 이전으로 회귀(回歸)하는 몰역사성에 함몰된다. 소위 근대이후 형성되며 일제시대 및 해방공간까지 밀고 올라온 국악의 역사가 아악부 국영화를 통해 새로운 국면을 맞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속악과 아악>의 대립 아닌 대립은 해방공간이 준 숙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악의 보존과 전승에서 말리암은 국립국악원이 그 영역과 사업내용을 확장하며 현재까지 국악문화의 지평을 넓혀온 점은 간과할 수는 없다.

 

현실 국악계의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 들라면 하나는 무형문화재제도와 국악관현악 활동이다. 무형문화재는 근대이후의 국악장르에 대한 전통적인 전승 및 교육구조라면 국악관현악은 60년대 이후 설립된 대학 국악과 교육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무형문화재는 1961년 5.16이후 군사정권의 국가적 정체성과 관련하여 제도화됐다.

무형문화재 제도는 사라질 위기에 있는 전통문화유산을 보호 육성해야 한다는 절박한 시대인식으로 이루어진 자구책이었다. 중요무형문화재지정자료가 정리되며 종묘제례악이 제1호로 지정되었고 이후 판소리, 산조, 농악12차, 거문고산조,선소리산타령,대금정악,가야금산조 및 가야금병창,서도소리,가곡,가사,대금산조,대취타,범패,경기민요,남도들노래,판소리고법 등등이 문화재로 지정되며 오늘에 이루고 있다. 무형문화재 지정사업은 교육부에서 문화부로 이관되었다가 현재는 문화재관리국에서 소관하고 있다. 무형문화재 제도는 전통문화 전승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화재가 생활이나 현실과 유리되어 그야말로 박물관 품목화된 현실에 대한 반성에 기초하여 무형문화재 제도에 대한 수정론이 제기되고 있다.

한편 1954년 덕성여대에 국악과가 최초로 설립됐으나, 2년만에 폐과되고 이후 1959년 장사훈과 성경린의 주도로 서울대학교에 국악과 설치된다. 이후 전국적으로 국악과가 만들어지며 대학교육 내에서 국악교육이 이루어진다.

한편 국립국악원의 부설 교육기관이었던 국악사양성소가 1955년 설립됐고 이후 국립국악고등학교로 그 전통을 이어간다. 국립국악고등학교는 이왕직 아악부의 전통을 전승하여 궁중아악 위주의 교육기관이며, 현재는 민속악도 포함하고 있다. 현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는 최초의 민간 교육기관으로 지난 1960년 설립됐다.

이렇듯 현재는 고등학교와 대학 국악과의 교육구조가 확립되며 국악문화 진흥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고 있다. 대학 국악과의 정립과 함께 국악관현악단이 전국적으로 설립되며 국악은 새로운 창작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또한 대학국악교육은 무형문화재 전승교육과는 달리 학과교육을 통해 체계적인 국악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어 무형문화재를 한편으로 옹호하며, 새로운 국악문화 여건을 조성해 나가고 있다.

 

 

   4) 국악문화의 문제

 

 

   최근 국악(國樂)이란 말을 이란 기피되는 형편이다. 국악을 한국음악의 준말로도 강변하지만, 양악이 음악이란 보통명사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반성이 담겨 있다. 한편으론 자의식(自意識)의 각성이 엿보인다. 자기 존재에 대한 의미를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다.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 그것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접경이다. 한국음악의 역사적인 전개과정을 통해 오늘 우리 음악의 전통을 이루는 근대성(近代性)의 회복이야말로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해방 후 민족음악 진영의 일제잔재 청산과 민족음악 건설이란 동시대적인 과제가 좌절되고 양악 일방도로 악단(樂壇)문화가 편재됐다. 전통음악계는 그야말로 일제때의 박해와 왜곡 당한 그대로의 상태로 대한민국의 시대를 맞았던 것이다. 또한 ‘전통(傳統)의 단절(斷絶)’이라는 서구문화이식주의자들의 날조된 유언비어는 국악을 현실과 분리시켜 과거로 몰아넣었다. 그런 과거이기 때문에, 아악(雅樂)이 전통이 되든 아니든 그것은 상관할 문제가 아니었다.

 

민족문화의 암흑기라 할 일제시대 전통음악은 여러 면에서 굴절과 왜곡 그리고 심하게는 악의적인 폄하(貶下)를 당했다. 대표적인 예를 보면, 전통음악이 삶으로부터 역사성으로부터 거세당하는 것이다. 즉 일제의 문화정책은 우리 민족문화를 박멸하는 것이었으므로, 삶으로부터 민족예술을 뿌리뽑는 것이었다. 문화를 삶에서 뿌리뽑기 위해 상호간에 반복을 하게 하는 것 그 것이 바로 전형적인 식민지 분할통치 방식이었다. 서로간에 반복을 하게 하고 일제의 정책에 유용한 부분은 수용을 하고 적대적인 세력을 박멸해 나가는 것이 전형적인 식민통치방식인 것이다.

이런 조작과 분열속에 이런 분열의 양상은 현재 스스로 고착화되고 있다. 가령 ‘남을 밟아야 자기가 산다’는 논리가 바로 그 것이다. 오늘 우리사회에 만연된 이런 논리가 똑같이 국악계에 고정되어 있다.

국악계에 만들어진 분열논리는 바로 ‘아악과 민속악’이란 논리이다. 알다시피 해방 후 여러 민족주의적인 전통음악인이 모여 결성한 국악원이 좌우익 분리공간에서 일부는 월북을 하는 등 조직이 와해되자, 일제 시대 이왕직 아악부가 바로 국회에 아악원을 설립할 것을 청원하는데, 국회(國會)를 통과하며 국립국악원(國立國樂院)으로 명칭을 개정하여 오늘날 국립국악원이 설립된다.

 

국립국악원은 설립이후 아무런 반성 없이 이왕직 아악부를 계승한다. 또한 아악 위주의 논리와 기득권이 형성되며 민속악에 대한 역차별과 천시등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기득권은 기득권을 옹호하는 논리를 만드는 것처럼 아악 따로의 역사관이 형성된다. 그런 기득권적인 역사서술의 대표로서 장사훈의 학문적 성과인 『증보한국음악사』를 비겨 노동은은 그의 “한국음악사연구의 회고와 전망”에서 운초 장사훈의 학문적 성과에 대해 ‘양식사적 자료사(樣式史的資料史)이자 특정궁정사(特定宮庭史)이고, 복원사(復原史)이자 분단사(分斷史)로 역사적 특징’을 갖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즉 한국음악사 연구를 사료해독의 양식사를 중심에 둠으로 인해 한국음악사의 현실역사적인 문맥을 간과하고, 그 결과 서구음악사 방법론에 흡수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즉 학문과 현실의 상관관계를 유리시키고, 역사를 과거의 현상에만 가두는 자세를 갖게 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아악류의 특정 왕조사를 대변하는 역사서술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이로 인해 정치지배세력을 계급화(階級化)한 구체체(舊體制)의 음악을 대변했고, 그 결과 조선시대까지의 복원사(復原史)를 역사서술하고 있다는 치명적인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이는 곧 이왕직 아악부의 전통을 그의 역사서술 관점에 복판으로 두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며, 나아가 이런 역사인식을 통해 아악 보존을 중심과제로 둔 국립국악원을 합리하고자 하는 의도였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왕조의 계승이 아닌 대한민국(大韓民國)이란 국가적인 정체(政體)가 성립됐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의 아악을 통해 국가의 정체성을 대변한다는 구시대적인 발상도 문제지만, 음악사를 조선왕조사로 가둔다는 것은 역사발전에 대한 전망을 부정하는 심각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셋째로 장사훈 이전 한국음악사의 토대를 만든 자산(自山) 안확이 ‘한국음악사 서술에 있어 ‘아악과 민중악이 서술본위가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아악중심의 잘못된 서술을 한다’는 비판에 대해 오히려 ‘음악을 음악에 대한 몰이해의 자가당착’이라는 반비판처럼 철저한 아악 본위를 역사서술로 인해 음악사 전개를 왜곡했다. 이런 아악 본위의 태도는 곧 민속악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나타나는데, 조선후기 유득공이 그의 소설 『유우춘전』에서 “아악은 고악(古樂)으로 속악은 후대지악(後代之樂)”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이 보다 더 못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인식은 곧 한국음악사의 근?현대음악사를 무시하는 태도로 나타나며, 궁극적으로 역사적 본질을 과거사건의 자료적 역사로 복구하는 교훈적 역사관으로 인해, 현재적인 삶과 음악의 정체성을 확인해 나가기 위한 해석학적 작용을 단절시키고 있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또한 분단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반영하는 역사해석을 벗어나지 못해 한국음악사를 조선음악사로 머물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남한음악사로 위치하게 하는 기술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위와 같은 역사기술은 곧 특정 음악을 위한 특정집단을 위한 자기합리화요 자가당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요하게는 일제시대 이왕직 아악부의 친일행각 등 과거의 오류를 역사기술하지 않고 침묵하는 자세로 과거에 매몰될 때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없다. 또한 일제시대는 물론 해방이후까지 진행되어온 근현대음악사를 굳건히 지켜온 민속음악인에 대한 매도와 폄하는 분명 같은 음악인으로서 할 도리가 아닌 것이다.

지금은 분명 아악과 민속악으로 분리되는 시기가 아니다. 이미 창작국악(創作國樂)이 국악문화의 본령에 위치하며 서양음악의 비판적 수용을 위한 적극적인 대화를 하고 있는 현실이다. 또한 근현대음악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해 역사관이 올바로 형성되고 있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내일은 곧 어제다. 어제의 문제가 오늘로 이어지면 내일로 연관된다. 20세기 민족문화의 좌절 혹은 몰락에서 20세기를 민족문화적으로 옹호한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과연 아악인가 아니면 민속악인가! 바로 사물놀이와 국악관현악이다. 시대성을 상실한 예술은 오직 보존만 유의미할 뿐이다. 보존을 통해 존립하는 문화는 곧 박물관문화에 다름 아니다.

결국 한국적인 것, 한국인만이 갖는 문화적인 유전인자를 어떻게 재창조하여 세계문화로 보편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 바로 21세기를 준비하며 우리가 오늘 해야할 일이다. 결국 20세기에 대한 올바른 준비가 없었기에 우리는 20세기 그런 문화적인 몰락과 아픔을 겪었다. 21세기의 문화적인 역전을 위해서는 우리는 지금 우리의 현실을 반성할 필요가 있다. 현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분석하되 미래적으로 풀어가는 것, 어찌보면 지금은 그런 것이 필요하다.

 

국악을 진흥하는 것, 그것은 무형문화재같은 틀로 문화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다. 전통음악이 현실에서 굳건히 자생하며 민족을 옹호하며 세계적인 문화로 확산될 때 진흥의 참다운 의미가 있다. 정명훈이 백명되어도 우리 민족의 복된 삶하곤 무관하다. 그는 유럽음악인이다. 그는 이미 서양인이다 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김 덕수가 백 명이 되면 분명 문화의 양상을 달라진다.

이런 마인드의 변화와 함께 국악의 진흥을 위해 조직적인 측면에서 구조조정을 이루어져야한다. 그 핵심에 국립국악원이 있다. 국립국악원은 해방 후 아악이란 틀 아래 일제시대 문화적인 왜곡을 그대로 확산했다. 국립국악원이 만약 아악보존 특히 조선조 궁중아악을 보존하기 위해 있다면, 일본처럼 경복궁에 궁중아악청(宮中雅樂廳)을 설치하여 이 임무를 맡겨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한시대의 문화유품 보존에 허다한 국민혈세만 낭비했다. 과연 국립국악원에서 내놓을 만한 국립국악을 이루어 놓은 것이 무엇인가! 국립국악원에 대표적인 친일국악인 김기수의 동상을 세워 놓은 것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

 

국립국악원은 국립이란 틀에 어울리지 않게 이왕직 아악부의 전통을 내세우며 소위 특정화된 세력을 위한 그리고 특정한 학교출신이 주도하는 사당(私黨)이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전통음악을 진흥하고 세계화할 수 있는 역량이나 생각이 있느냐이다. 현실은 냉정해야한다. 문화정책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현실이나 역사적인 바탕을 두고 볼 때 국립국악원은 그동안 소홀했던 음악을 수용하여 민속반을 두고 있지만, 과연 근본적인 역사인식을 바꾸지 않는 한 새로운 음악이나 세계화를 주도할 음악문화를 만들어갈 수 없다. 굳이 21세기를 전망하는 20세기말 종묘제례악연주회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은 우리 역사에 대한 비극이자, 부정이다. 또한 세종대왕의 신악(新樂)정신을 올바로 계승한 것이 아니다. 세종은 아악을 정비하며 고려가요인 민속악으로 종묘제례악을 창제했다. 그런 세종의 음악정신은 오늘에 이어받아야 하지만, 수세기 동안 아니 20세기동안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종묘제례악이라는 것은 반성할 문제이다.

 

전체적인 안목에서 우리음악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그런 다양성을 가능성으로 열어나가는 진흥정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역사적인 임무를 생각해 볼 때 국립국악원른 국립민족음악원과 같이 위치로 새로운 변신을 해야한다. 국악과 양악 그리고 역사적인 맥락을 새로운 계승해야 하며, 국악진흥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제시하며 이 시대에 새로이 자리 매김 해야 한다.

소위 연주논리만으로 예술을 주도해 나갈 수는 없다. 엄밀히 보면 전통음악계에 있어 아악과 민속악의 분열과 다툼은 연주논리(演奏論理)가 갖는 보수성에 다름 아니다. 민족음악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국악에 대한 창조적인 발전과 함께, 오늘날까지 한국사회에서 수용한 음악을 새롭게 재창조하는 연주문화조성만이 아니라, 민족음악의 정보화를 주도할 방안을 마련하고 또한 한국사회를 대상으로 민족음악에 대한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송 및 교육조건을 개선해 나가는 등의 역할을 할 대안이 필요한 것이다. 결국 부분적인 해결을 가능해도 문제를 일괄적으로 타결한 방안이 필요하다. 역사는 분명 반성을 위해 있는 것이고, 여기서 해결방안이 나온다.

 

 

  5.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의 태동과 개교

 

 

   한국음악사에 있어 최초의 민간교육기관(民間敎育機關)이라 할 수 있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설립은 한국근대음악의 교두보(橋頭堡)를 만드는 새로운 역사였다. 국악원의 발족과 함께, 국악의 진흥과 새로운 세대로의 전수를 위한 필요성이 대두하며 학교설립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다. 교육은 백년대계(百年大計)라는 말처럼, 학교설립은 백년을 내다보는 대계였다. 또한 학교설립은 교육을 통해 근대의 전통을 현대로 계승하는 역사적인 작업이었다.

1949. 1.25 국악예술학교 설립기성회가 발족된다. 이미 아악보존을 위한 국립국악원 설립된 상태였으므로, 민속악의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당시 학교설립을 위해 국악원장 박헌봉은 정계요로를 찾아다니며 국악교육기관 설립에 대한 다각도의 설득작업을 했다. 당시 국악운동에 필요한 재정적 후원과 함께 국악학교 설립을 위한 자금까지도 마련해보자는 뜻에서 마련한 국악감상회를 개최했고, 그런 노력의 결과 1954 국악학교설립기성회(國樂學校設立期成會)가 조직되어 학교설립을 위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다시 1958년 2월 김은호 화백과 문영회, 이병각, 박귀희씨를 중심으로 해서 장교구락부(長橋俱樂部)를 조직하고 다시 국악학교 설립을 위한 모금운동에 나섰다.

1959년 학교설립이 지지부진하자 박헌봉은 정계 인사가 모인 자리에 사십년을 두고 꾸준히 정리해온 판소리 가사와 국악이론 원고 뭉치가 들고,

“각종 경축행사나 외국 귀빈이 올 때마다 국악을 소개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왔습니다. 장고와 가야금을 짊어지고 그 고생을 하면서도 언젠가는 사람들이 국악의 진가(眞價)를 알게 될 날이 오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당대의 고관대작인 여러분들 마저 이처럼 국악을 무시하고 홀대하는 것을 보면 지난날 우리들의 노고(勞苦)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나는 오늘 저녁을 마지막으로 이 4천장에 달하는 원고를 모두 불살라 버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의 절을 찾아 여생을 마칠 작정입니다......” 하며 학교설립과 자신의 인생을 맞바꾸는 중대한 발언을 한다. 그런 노력이 하나의 밀알이 되어 관훈동에 학교 건물을 장만하게 된다. 그리고 문교부의 설립인가를 받아 드디어 국악예술학교 설립의 빛을 본다.

 

1960년 3월 5일. 드디어 5千年 한국사상(韓國史上) 민속악 교육을 위한 최초의 민간교육기관인 국악예술학교(國樂藝術學校)가 그 문을 연다. 초대교장으로 취임한 박헌봉은 그 날 목이 메어 취임사를 제대로 읽을 수 없었고 자리를 같이 했던 국악인들도 모두 뜨거운 감루(感淚)를 흘렸다 한다. 소위 그 뜨거운 감루는 한(恨)이었다.

기실 명분 하나만 가지고 학교를 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는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국가적인 대표성을 가지며 아악이 위치한 반면, 민간기구화된 대한국악원을 기생, 광대 소리나 하는 민속악이라 폄하하며 내부분열과 갈등이 조장된 상황에서 학교의 설립은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낸 돌파구였다. 그 돌파구는 한국음악사를 새롭게 만드는 역사가 됐다. 즉 학교설립이란 작은 의미를 벗어나 국립국악원이 간과한 수많은 문제를 해결한 즉 국악문화를 새롭게 만들어 나간 실천사(實踐史)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

 

국악예술학교는 설립이후 한국음악의 현대화(現代化)를 위한 왕성한 작업을 실행하였다. 물론 민간인(民間)인 세운 학교라는 점에도 수없이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역사적인 명분을 만든 그야말로 국악운동(國樂運動)이었다.

박헌봉 교장은 국악전반에 대한 발전계획을 수립하여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우선 박헌봉 교장은 국악의 육성과 보급을 위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우리음악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전국의 초?중?고등학교 교사를 상대로 한 국악강습을 실시했다. 이 강습은 국악 및 무용으로 확산됐는데, 당시 음악교과서가 양악 일방적으로 짜여져 있어 무엇보다도 현장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교사들을 상대로 국악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는 것이 중요했다. 이 교사강습회는 1960년부터 1973년까지 14회 개최되어 수천명의 교사가 이수할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국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교사강습을 통해 국악에 대한 인식전환을 물론 국악인구의 저변을 확대하는 작업과 함께 내부의 학생교육은 그야말로 전인적인 실기인 교육을 통해 훌륭한 연주인을 양성했다. 당시 학생이었던 김영재의 회고를 통해 당시 교육과정을 읽을 수 있다. “필자가 1961년 국악예술학교에 입학한 이후 오전 수업에는 인문과목들을 배웠고, 제일 먼저 받은 실기수업은 박초월 선생님에게서 배운 단가(短歌) ‘죽장망혜(竹杖芒鞋)였고, 이어 이창배 선생님에게서 경기민요를 배웠다. 다음으로는 홍원기 선생님으로부터 가곡과 시조를 배웠고, 이병우 선생님에게는 양금과 국악기초이론을 배웠고, 지영희선생님으로부터 해금을 익혔다. 신쾌동 선생님께서는 거문고를, 과외로 성금연선생님에게서 가야금을 배웠으며 조병학선생님으로부터 악전(시창)을 익혔다. 박헌봉 교장선생님은 국악사를 가르치셨고, 홍윤식(현 교장)선생님으로부터 국악개론을 배웠다. 과외로 학생전원은 농악연습에 참가해야 했는데, 필자는 꽹과리 연주와 상모를 돌렸다. 실기선생님께서 한 학생이 여러 실기를 잘할 수 있도록 밤에까지 수업을 연장해야 했기 때문에 한영숙 선생님께서 무용을 가르치느라 매우 힘들어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처음 한 학생이 전공악기를 잡기 이전에 모든 음악장르를 섭렵했고, 그에 따른 소양교육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이런 학교교육은 이후의 사회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중요한 것은 이런 교육체계를 통해 근대음악양식들이 재정비되며 이후 무형문화재제도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는 점이다. 소위 아악은 국영화안이 반영되어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근대적인 전통을 잇고 있는 민속악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출중한 기량을 가진 이들 민속악의 명인들이 학교교사로 재직하면서 교육을 통해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됐다. 당시 교사들의 면면을 보면 지영희?이병우(피리), 성금연?김윤덕?이영희(가야금), 신쾌동(거문고) 홍원기. 김월하(가곡.가사.시조), 한범수와 김동식(대금), 한일섭(아쟁), 한영숙(무용),김 연수?정권진?박초월?김소희?김여란?정정수(판소리) 남운용(남사당.꼭두놀음), 김성대(양주별산대놀이), 이근성(봉산탈춤), 김진옥. 윤영춘(북청사자놀음), 전사섭? 황일백? 정오동?전사종(농악), 이창배? 김순태? 이소향(민요. 선소리산타령) 등이 재작했다. 또한 조동일?심우성?이보형?황병기?김희조?김동진 등 오늘날 국문학과 양악계의 이름 있는 이들이 모두 학교와 인연을 맺었다. 위와 같이 국악계의 대가들이 모이면서 자연 무형문화재 전수사업이 병행됐다. 당시 무형문화재 전수사업은 문공부 문화재관리국 소관이었다. 박헌봉 교장은 문화재관리위원으로 활동하며 이들 명인들의 교육과 문화재전수활동을 연관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운 여건을 풀어나갔다. 궁하면 통하는 것처럼 국악예술학교의 국악교육은 무형문화재 전수교육과 연관되어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근대이후 형성된 음악양식들이 이런 전수교육을 통해 체계적으로 정리됐으며, 생존의 문제를 넘어 현대음악을 주도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는 데 있다. 과연 산조나 판소리가 전승되지 않았으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바탕으로 현대음악사를 창출해 나갈지 자못 의심스럽다.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종묘제례악 이외에 나머지를 민속악이 차지하고 있는 현실은 이를 더욱 자명하게 한다.

학교교육에 수렴되며 무형문화재는 새로운 전기를 맡지만 또 한편으로는 70년대 이후 한국사회를 풍미한 전통문화계승운동인 탈춤부흥운동, 풍물운동, 남사당 부흥운동등 사회문화운동을 벌여나가는데 있어 충실한 교과서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물론 당시 전통문화부흥운동이 원형보존이나 과거에 대한 딜레당티즘이 아닌 전통의 재창조운동이었지만, 창조를 위한 텍스트를 제공했다는 면만으로도 중요한 대목이다.

 

또한 아세아 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향토민요채집운동은 오늘날 MBC한국민요대전으로 이어졌는데, 우리음악의 원형질(原形質)을 이루는 향토민요에 재정리는 사라져 가는 우리음악을 본원하고 정리하는데 첩경(捷徑)이었다. 국악예술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런 활동은 이후 국문학에서 꾸준한 영향을 미쳤고, 또한 국악예고와 관련을 가진 임동권 및 조동일 등의 민요론으로 이어지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런 민속악에 대한 전승과 함께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국악의 현대화를 위한 작업이다. 당시 학교 부설 국악연구소에서는 우리의 전통문화유산을 육성하고 계승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래를 대비하고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형태의 국악을 창작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라는 인식하에 국악관현악을 창설한다. 당시 국악연구소안의 회의장은 국악관현악 창설을 논의하며 국악기는 대개 독주악기이며 실내악에 맞는데, 또한 악기 수나 음량이 서양악기에 비해 너무 작으며 화음악기 아닌데 가능하겠는가 하는 격론들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개월 국악관현악에 대한 세심한 연구 끝에 공후?양금?비파?북?피리?해금등 악기를 국악관현악 연주에 적합하도록 개량하여 1962년 역사상 최초의 학교부설 국악관현악단이 창단한다. 당시 국악관현악단 창단은 국악계에 혁명적인 정도로 선풍적인 관심을 끌었다. 지영희가 바로 그 핵심에 있다. 지영희는 전통적인 기악곡을 정리하여 관현악곡화했다. 지영희는 피리는 물론 해금,장구 등 모든 악기에도 능했고 작곡 및 지휘에도 출중했다. 학교부설 국악관현악단은 1964년 서울시로 이관되어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으로 정식 출범했다. 이후 국악관현악단은 KBS국악관현악단을 비롯 전국시도로 확장되어 창작국악문화를 이끌고 있다. 한 학교에서 이룬어 낸 성과지만 국악계의 문화지도를 뒤바꿀 정도로 그 파장은 엄청났다. 또한 중요하게는 국악문화를 새롭게 전환시켰다는 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학교설립 이후 해마다 개최한 <민속예술대제전> 또한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학교수업현장과 무대공연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졌던 이 무대는 국악공연문화를 대중화,현대화하는데 톡톡히 기여했다.

 

민속예술대제전은 1961년 학생국악발표회를 시작으로 해마다 열렸다. 처음에는 화관무,장고춤,부채춤, 춘향전춤, 구고무 등 전통무용과 민요 및 산조합주 및 가야금병창 합주 및 판소리로 공연됐다. 이후 1965년부터는 “국악관현악과 민속음악의 밤”이라는 부제를 달고 국악관현악 공연을 했다. 관현악 연주로 본영산 등 풍류곡과 취타풍류곡,시나위 등 많은 곡들이 관현악으로 편곡되어 연주됐다. 또한 악장가사인 민속연례곡을 작사,작곡하여 발표했고, 관현악과 민요? 관현악과 춤?관현악과 가사 등등 다양한 공연이 행해졌다. 또한 입체창극과 창작무용으로 “학과 선녀” “경성무” “관동무” “가야금 선율 따라” “가을놀이” 등 많은 창작무용이 한영숙의 안무로 공연됐다. 그리고 무형문화제 각 종목들이 공연됐으며 각 악기의 산조합주와 시나위합주 및 농악 등이 선보였다. 당시의 공연을 보면 총3부로 구성되는데, 1부는 관현악 무대 2부는 전통을 선보이는 무대 3부는 종합적인 창작무대로 구성되었다.명인들로 구성된 교사와 학생이 펼치는 정기공연은 해방 후 국악원 공연만큼이나 서울시민에게 대단한 볼거리였다.

이상으로 보면 매년 열린 민속예술대제전은 여느 공연에 비해 다양하며 종합적인 공연이었으며, 새로운 창작의 전통을 만드는 중요한 판이었다. 또한 이런 공연을 통해 일반시민에게 우리음악을 알리는 전령사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 국악문화를 진흥하게 하는 초석을 다졌음을 알 수 있다.

 

전통과 창작을 하나의 지평으로 열며 국악문화의 신기원을 이룩한 학교교육은 이후 학교 출신의 사회활동을 통해서도 연장된다. 1969년 학교동문들로 이루어진 <민속악회시나위>는 국악을 일반대중(一般大衆)과 일반사회(一般社會)를 이으며 국악을 새롭게 위치하게 했다. 처음 민속음악의 발굴과 전승 그리고 재창조를 목표로 세우며 지방도처에 뭍혀 있는 굿과 민요, 농악 및 민속예능을 발굴하여 소극장 무대작업을 통해 일반인에게 널리 알리는 작업을 했다. 이는 학교교육의 연장선상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민속악회 시나위는 특히 국악을 무대화하는 작업을 통해 새로운 방식의 공연물을 창출했다. 예컨데 굿 산조를 여러 악기로 합주하는 방식이나 무용반주로 연주하던 개별곡을 하나의 모음곡으로 묶어 연주하는 방식, 농악을 사물놀이만으로 연주하는 방식, 평상복장으로 연주하는 방식, 민요를 기악곡화하는 방식 등을 개발하여 보다 대중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했다. 또한 일정한 주제의식하여 연주회를 꾸며가기도 했다. 위와 같은 새로운 방식의 연주회 중 사물놀이 공연은 새로운 충격으로 발전했다. 1979년 공간사랑 소극장에서 연주된 사물놀이는 원래 당시 축소 연행되고 있는 농악의 현실을 비판하며 판굿에서 소홀히 되는 풍물가락을 지켜낸다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는데, 율동이 억제된 사물놀이 가락은 오히려 실제 농악이 주는 역동성 보다 더욱 자극적이고 충격적이었다. 이를 계기로 김덕수패 사물놀이가 형성되고 사물놀이의 세계적 보급이 마련됐다. 또한 굿에서 무속음악이라는 독립장르를 개척하여 서울지방의 굿음악, 경기도당굿음악, 진도씻김굿음악, 진도의 만가, 가거도뱃노래, 해남의 강강술래 등 굿과 민요, 탈춤의 종합형태에서 음악을 독립장르로 창출하는 등 많은 역할을 했다.

한편 국악예술학교의 국악관현악 전통은 이 학교 출신인 박범훈에 의해 새로운 사회적 전기를 맞는다. 학생국악관현악단 활동과 국악실내악단 <민속악회 시나위>를 통해 성장된 창작역량은 새로운 전기를 요구한다. 박범훈은 민속악회 시나위의 기운은 최초의 민간국악관현악단인 중앙국악관현악단 창단으로 모여진다. 높이 나는 새가 더 멀리 간다는 말 그대로, 창작국악운동을 표방하며 펼쳐진 국악관현악운동은 다시 악가무(樂歌舞)를 종합하여 국악예고의 창작전통을 획기적으로 확대한다. 생활국악과 다양한 대중매체와 만남, 한중일 악기의 만남, 무용 및 창극 및 음악극 등 종합극으로의 전환은 국악을 민족음악의 중심으로 위치하게 했다.

또한 창작국악이 서양음악적인 방식에 의존하던 풍토를 걷어치우고 민요와 굿 그리고 산조와 판소리 및 사물놀이 등 근대적인 전통을 가진 장르를 바탕으로 새롭게 도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박범훈은 주로 민요와 굿 및 사물놀이를 계승하는 창작관현악의 세계를 구현했다면 백대웅은 산조와 판소리를 바탕으로 하는 창작관현악을 작곡했다. 또한 종교음악의 민족음악화를 위한 실천으로도 확대되어 불교음악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도했다. 80년대의 민간악단이 주도한 이런 변화는 곧 90년대 오케스트라 아시아 창단 및 국립국악관현악단 창단으로 이어졌다.

근대음악문화가 민간음악의 융성을 통해 이루어졌던 것처럼 해방 후 역류하던 국악사가 민간학교 및 민간실내악단 그리고 민간국악관현악단을 통해 다시 융성했다는 사실은 역사적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니 비극일 지 모른다. 이런 실천들을 국가정책적으로 보조했다면 지금 국악의 양상은 분명 다른 상황이었을 것이다.

비록 민간활동이라는 환경이었지만, 이런 자생적인 실천은 곧 역사였다. 즉 실천하는 곳에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바로 전통이 되는 것처럼, 국악예고의 역사와 이후 동문들의 활동은 새로운 창조를 만들었다. 이는 곧 근현대민족음악사의 곧추 새우는 역사적인 작업이었다.

이상 간단함에도 불구하고 국악예술학교의 역사는 일개 학교(學校)라는 의미를 떠나 근대음악을 집대성하며 국악의 현대화를 위한 작업을 행하여 현대국악을 살아있게 한 장본인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7,80년대 전통문화부흥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토양을 창출했으며 나아가 국악관현악과 사물놀이라는 20세기 창작국악문화를 일구었다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국악예고는 한국음악사의 근대적인 맥을 계승하며 한국음악사의 현대사를 일구어 놓은 대역사(大役事)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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