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원군·운천군 묘(파주 향토유적 12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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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원군(성종의 서3남) 묘역 뒷편에서 바라 본 모습 |
완원군은 1480년(성종 11)에 성종대왕의 4남으로 태어나 1509년(중종 4)에 별세하였다. 공은 숙의(淑儀) 남양 홍씨(1457∼1510)가 낳은 7왕자 3옹주 중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이 때 성종대왕은 보수(寶壽) 24세(재위 11년)였고, 숙의 홍씨 또한 춘추 24세였는데 입궁 10년 8개월만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수(심방변부수+遂), 자는 득지(得之), 시호는 소도(昭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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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 입구에 있는 재실 |
1489년(성종 20) 10세 때 완원군(完原君)으로 봉군(封君)되었는데 종친 품계는 정1품 흥록대부이다. 1492년(성종 23) 13세 때 같은 나이인 면천군부인(沔川郡夫人) 전주 최씨(全州 崔氏 : 1480∼1500)를 맞이했다. 최씨는 시집온 지 9년만에 어린 딸을 남겨둔 채 1500년(연산군 6) 12월 11일 별세하니, 향년 21세였다. 이듬해 2월 을유일에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원리(마장2리) 사패지 종산의 신좌 인향 언덕에 폄봉하고 입석(立石)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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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실 내부에 있는 신도비 |
▲ 재실 안쪽에 위치한 완원군별묘 |
1502년(연산군 8) 23세 되던 해 여름, 정선군부인(旌善郡夫人) 양천 허씨(1489∼1521)를 맞아 이듬해 9월 3일 이성군(伊城君)을 낳았다. 그러나 첫 돌도 되기 전인 1504년(연산군 10) 3월에 폐비 윤씨의 복위 문제를 배경으로 한 갑자사화에 연루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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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원군 묘역 전경(재실 좌측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묘역이 있음) |
공은 1508년(중종 3) 29세에 이천군(伊川君)을 얻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509년(중종 4) 10월 26일, 서울 중부 수진방(壽進坊) 수진동(壽進洞 : 현재 한국일보 본사와 종로구청 사이) 사저에서 30세로 별세하였다. 2남 2녀를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난 공에게 중종대왕은 소도(昭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1510년(중종 5) 2월 병오일에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사패지 종산의 간좌곤향 언덕에 장례지내니 그 곳이 완원군 묘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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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원군 묘역 좌우로 세워져 있는 무인석 모습 |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씻겨 묘비의 표석이 파손되고 마멸되어 글의 형체도 읽어내기가 어려워, 공이 별세한 지 472년이 지난 1980년 4월 상순에 묘비를 새로 세웠다. 내외간 상제(喪祭) 예문(禮文)을 준수하되 조금도 결함없이 처신한 정선군부인 양천 허씨는 측실과 그들 소생의 딸들을 기출(己出)과 같이 여기다가 1521년(중종 16) 4월 14일에 병환으로 별세하니, 춘추 33세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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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원군 묘역 전경 |
공의 덕행이 돈후함을 부왕이 총애하여 공부자(孔夫子) 영정을 하사하였는데 공은 이를 사저에 모셨다. 공이 별세한 이후에도 대대로 4백년간 종가에서 모셨으나 15대종손 종구(宗九 :1896∼1977)때인 1917년 파주 · 양주 유림들과 협력하여 선파(璿派) 사패지 종산에 `성사영묘(聖師影廟)'를 축공하고, 공부자 영정을 모시게 되었다. - 전주이씨 홈페이지 내용 발췌 - |
운천군 묘역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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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원군 묘역에서 바라 본 운천군 묘역 |
▲ 운천군 묘역 전경 |
운천군은 조선 왕조의 중흥을 이룩한 성종대왕의 14남으로서 휘는 인(썎), 시호는 소회(昭懷)이다. 운천군은 숙의(淑儀) 홍씨(洪氏) 소생의 7왕자 완원군(完原君) · 회산군(檜山君) · 견성군(甄城君) · 익양군(益陽君) · 경명군(景明君) · 운천군(雲川君) · 양원군(楊原君)과 3옹주 혜숙(惠淑) · 정순(靜順) · 정숙(靜淑) 중의 6남이다. 운천군은 1490년(성종 21) 11월 임인일에 태어나 1524년(중종 19) 5월 14일, 향년 35세로 별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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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천군 묘역 아래에는 완원군의 아들이었던 수례(이천군)를 운천군의 계자로 삼은 이천군의 묘역 앞뒤 모습 |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성종대왕은 빈천(賓天)의 호를 내리고 그 뛰어남이 남달라 9세에 운천군으로 봉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난폭한 통치와 왕자들에 대한 박해로 날마다 근심걱정으로 세월을 보내다 중종반정으로 시름을 거두고 종사에 크게 공헌해 갈 즈음 장년의 한창 나이에 별세했다. 중종대왕도 3일간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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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천군(성종의 서13남) 묘 |
운천군은 형조참의 증 좌찬성 인손(仁孫)의 딸 안동권씨와 혼인하여 4녀만을 두었다. 사위는 사헌부 감찰 이구(李嶇), 신천군수 이종효(李宗孝), 종묘서령 박순년(朴舜年), 선감주부(繕監主簿) 이경종(李慶宗) 등이고 후사가 없어 형인 완원군의 아들 수례(壽禮 : 후에 伊川君으로 봉함)를 계자(繼子)로 삼았다. 따라서 오늘의 운천군 후손은 혈통적인 측면에서는 완원군의 후손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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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천군 묘역 전경 |
운천군의 계자인 가덕대부 이천군(伊川君)은 남달리 뛰어난 인품과 극진한 효심을 지녔다. 아버지 완원군과 어머니 허씨 사이에서 2남 2녀 중 차남으로 1508년(중종 3) 12월 계유일에 태어나 1568년(선조 1) 6월 임진일에 별세하여 향년 61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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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천군 묘역 뒷편에서 바라 본 모습 |
제9대 성종대왕(成宗大王) [1457 ~ 1494] 가계도
정비 공혜왕후 한씨(恭惠王后 韓氏) [1456 ~ 1474] : 소생 없음
제1계비 폐비 윤씨(廢妃 尹氏) [1445 ~ 1482]
제2계비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 [1462 ~ 1530]
서1남 계성군(桂城君) [1478 ~ 1504] (숙의 하씨) |
완원군·운천군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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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화살표 ↑ 부근에 완원군·운천군 묘역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