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와 장로의 관계를 중심한 제직 세미나 원고
이 강의는 제가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가르친 제직 세미나의 원고입니다. 이 강의의 특징은 목사와 장로의 관계를 성경적, 신학적, 목회적 입장에서 확실히 규명했고 집사들의 사역을 분명히 가르쳐 목사님들의 목회를 도울 수 있도록 성경적, 신학적 근거에 입각하여 구성된 “교회의 직분론”입니다.
다시 말해서 혼란해진 목사, 장로, 권사, 집사의 바른 위치를 찾아 주님의 교회를 잘 섬기게 하기 위한 강의입니다. 목사님들의 목회에 참고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강의는 몇 번에 걸쳐 이곳에 올려질 것이지만 저의 홈 페이지에 오시면 모두 받을 수도 있습니다. 주소는 Http://www.GodisLove.net/moksa입니다. 저의 강의가 필요하신 분들은 전화나 메일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전화는 031-763-1460 (HP 018-285-1419) Mail은 Kchungsoo@yahoo.co.kr입니다.
제직 세미나 (제 1 강의)
제목 : 부르심을 받은 종들 (목사와 장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연구)
성경 : 엡 4:8-16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 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 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교회의 직분론을 말하기 전에 바울의 지체론을 상기해 보자. 바울 사도는 고전12:12-31에서 교회의 지체론을 말씀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하셨는데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머리(골1:18, 2:10, 19)로 한 성도의 여러 가지 직분을 말씀 하신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고전12:12, 27; 골1:18, 24)의 지체들은 서로 상대를 무시하지 말고 존귀히 여길 것이며, 분쟁이 없이 서로 상합하며, 고통과 영광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하셨다.(엡4:15,16)
그 직분들은 (고전12:28)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라고 하시면서 (고전12:29-30)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라고도 하셨다. 즉 교회의 지체인 성도들이 하나님께 받은 직분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신 것이다.
그런데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오늘 교회 안에 생겨지는 많은 문제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자기의 지체된 위치를 모르고 망각한 직분자들에 의해 생긴다. 주님 대신 교회의 머리가 되고자 하는 목사들, 교회의 주인 행세를 하는 장로들, 교회의 실질적인 실세라고 착각하는 집사들 때문에 생겨지는 문제들은 과히 주님의 몸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사단의 첨단적인 무기가 되어 교회를 헤치는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
이런 교회를 헤치는 어리석은 직분자들의 가장 앞에 장로들이 있다. 그래서 이미 나는 목사 장로들에 대해여 ‘목사가 하나님의 종으로 해서는 안되는 일’들을 본인의 저서인 “금기”에 기록했다. 그래서 이 제직 세미나에서는 목사, 장로, 집사, 권사에 대한 원론적인 강의만 하겠다.
성경은 목사와 치리 장로의 위치와 차이점을 확실히 구분해 놓고 있다. 그런데 이 점에 연구와 교육이 부족해서 목사 장로와 치리 장로의 구별이 애매 모호해졌다. 이로 인해 치리 장로들이 목사 흉내를 내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들이 내 세우는 목사와 장로의 구별 없음의 근거는 만인 제사장론(벧전 2:9)이다. 그들은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목사와 장로가 같은 제사장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그릇된 생각은 칼빈이 강력히 주장한 목사의 고유한 의무와 권리를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칼빈은 목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선지자의 직분을 위임받았고 그리스도로부터 사도의 직분을 위임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설교(고전 4:1)와 성례전 집행(마 28:19, 눅 20:19-20)과 치리권(행 20:31. 딛1:9)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명백한 성경적인 근거에 의한 목사 장로와 치리 장로의 엄연한 구별이 극히 일부의 치리 장로들에 의해 침해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범죄를 저지르는 당사자들은 그것이 어떤 잘못이며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전혀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큰 문제다.
우선 목사와 치리 장로에 대하여 크게 오해하고 있는 장로의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글은 2003년4월 20일 제729호 기독교 연합 신문에 실린 김철규 장로(예장 통합측 전국 원로 장로회)의 글이다.
제목 : 성경 속 설교자는 '평신도'…장로 권한 인정해야
손병호목사(한국 복음 신학 연구 원장)는 “장로도 성직자이고 목사도 장로이며 장로도 설교할 수 있다. 장로도 성례를 집례할 수 있으며 장로도 축도할 수 있다”는 두 가지 장로설에 대해 “목사도 장로라는 잘못된 헌법 때문에 온 과오와 혼란과 무질서”라고 주장했다.
손병호목사의 주장에 의하면 두 장로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헌법 제4장 교회의 직원 제22조 ‘항존직은 장로, 집사, 권사이며(행20:17-28, 딤전 3:1-13) 그 시무는 70세로 한다. 장로에는 2가지가 있으니
① 설교와 치리를 겸한 자를 목사라고 하고
② 치리만 하는 자를 장로라 한다’는 내용을 근거로 한다. 그래서 손병호목사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헌법의 장로론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했으며 이것은 지당한 말이다.
이 헌법은 성경을 임의로 해석하고 부정한 죄를 지었으며 아전인수격인 해석이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 5장17절에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사람으로 여기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란 말씀을 악용하고 있다. 이는 장로 가운데 법에 조예가 깊고 또 성경에 능한 장로를 지칭하는 말씀이다. 결코 목사가 아니다.
◆ 예수교(정경 신약)에는 목사란 직분이 없다.
개역 신약 에베소서 4장11절에 목사로 번역한 것은 분명 오역이다. 원어로는 ‘포이메나스’인데 이 말은 “보호한다”는 뜻이 있다. 선진국은 목자로 번역하고 우리 나라도 바르게 번역해 놓았다. 예수교 정경 신약에는 직분이 장로와 집사, 전도인 뿐이다.
또 손병호목사는 “목사 직분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 받으면서 나온 직분”이라고 했다.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예수님 당시에 목사가 없다. 야고보서 5장 14절에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으나 그 때 목사가 있었다면 “너희 중에 목사들이 있느냐 청할 것이요”라고 했을 것이다.
◆니케아 예루살렘 공의회에 목사의 참석이 없었다.
주후 200년 후기에 와서 특별히 영성이 있고 성경 지식이 능한 사람을 선별하여 세운 직이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1977년 신구교가 공동으로 원래의 뜻을 살려 목자로 번역해 놓았다는 점이다.
◆ 목사직의 기원
목사직의 궁극적 기원은 제사장, 선지자, 랍비와 서기관에 서기 인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결코 구약적 제사 시대가 아니다.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피로 드린 속죄제를 이어온 성도가 제사장이 되어 각기 자기 몸을 드려 산 제사를 드리는 성도 시대라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만인 제사장이다. 히브리서 9장 11절에서 28절을 기록한 히브리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 자신이 제사장이 되시고 친히 자기 몸으로 제물을 삼으셨음을 나타내고 있다.
◆ 목사의 축도 대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말씀한 바 없다. 바울은 오히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라”(딤전2:5)고 가르쳐 주셨다. 목사는 이 허망한 권위를 깨끗이 불식하고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대로 서로 섬기는 겸손의 허리를 동여야 할 것이다. 목사만 축도권을 내세우는데 성경적인 입장에서 목사에게만 축도권이 한정됐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다. 오스트리아 개혁 교회, 독일의 복음주의 개혁 교회와 네덜란드의 개혁 교회, 미국 킴벌린 장로 교회 등은 장로에게도 당회장권과 축도권이 열려 있으며 성경에도 아기 예수가 결례를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대제사장이나 서기관이 아닌 평민으로 다만 성령을 받은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과 안나가 축복해 주었다(눅 2:25-38).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성도가 축복해 주었듯이 성령 받은 경건한 성도라면 누구든 간에 축도해 주어야 한다. 고린도 후서 13장 13절에 기록된 것은 분명하게 분류한다면 편지 끝말의 축복문이지 축도문이 아니다. 또 “있을 찌어다”라는 구절의 부분은 원어 성경에는 없는 것을 원어 번역자가 독자를 위해서 주석으로 달아 놓은(소문자) 것이다. 우리말 개역 성경의 역자는 번역 과정에서 어체(語體)를 하대어로 채택 한데서 원어의 뜻 표현은 완전하게 표출하기에는 불편스러움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공동 번역 성경의 “주 예수그리스도인의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합니다” 기고자는 구약 성경의 구절을 이용하면서 목사의 권위를 내세워 축도 권을 말하는데 지금은 구약 시대가 아니다.
◆ 당회 장은 목사의 당연직에 대해서
당회는 치리의 기구이다. 장로는 치리 장로이다. 치리 기구인 당회원은 목사와 장로가 된다고 하였고 목사와 장로는 동등하다고 하였다. 목사도 장로라는 터무니없는 법을 만들어 놓았으면서 치리자가 아닌 목사만 당회 장이 되고 치리를 전담한 장로는 당회 장이 되지 못한다고 법으로 규정했다. 목사의 주임무는 설교다. 목사가 당회 원이 되는 것은 목회 계획 수립과 예배 행정을 반영시키기 위하여 당회 원이 되는 것으로, 치리 권은 목사 전담 사항이 아니다.
그러므로 목사만이 ‘당회 장 당연직’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목사가 당회 원이 되었으면 회원 규정에 따라 동등한 회원 자격으로 그 회에 당회 장을 선출하면 되는 것이다. 통합 측은 목사 없는 당회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목사의 치리 권을 과대 행사케 한 통합측 교단이 치리 권을 말살한 법을 만들어 쓰고 있다. 당회에서 목사와 장로가 함께 의논하여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 정당하겠으나 장로 없는 미 조직 교회인 경우 치리권을 목사에게만 허용하는 경우가 문제다. 그러므로 이 조항은 폐기되고 당회장은 당회원 총의에 의해서 장로든 목사든 그 지교회 당회원 중에서 신앙생활이 모범이고 인격적으로 덕망 있는 분이 매년 선거로 선출되어 당회장이 되어야 마땅하다. 목사의 적을 노회에다가 두는 것 자체가 악법이다. 노회는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 장로 설교에 대하여
성경 어디를 상고해 보아도 장로가 설교하지 말라는 말이 없다. 설교가 목사의 독점 물인가. 야고보서 5장 14절에 청함을 받은 장로가 분명히 설교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우선 스데반 집사와 빌립이 명설교를 했다. 장로도 성경 지식이 해박하고 성령 충만한 장로가 설교하는데 설교권이 없느니 있느니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과거에 경산 하양읍 교회 김순도장로님이 전국적인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김인서장로님이 전국적인 부흥사로 활동했다. 장로 설교권이 없다는 성경적 근거가 있는지 알고 싶다.
◆ 빌립이 세례준 사실이 있다
일개 집사가 세례 주었다는 성경적인 근거는 있어도 목사가 세례 주었다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
이제 말을 맺고자 한다. 상술한 바와 같이 목사직은 제사장직에 계승이며 예수님이 직접 부르셨다는 말씀은 전혀 성경에 근거가 없다. 장로 교회는 헌법을 성경 위에 두어서는 안되며 그렇다면 천주교회가 되는 것이다. 잘못된 헌법을 하루속히 개정하고 비 성경적인 제도 개혁, 비 성경적인 의식 개혁, 비 성경적인 헌법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음 주일에 계속됩니다.
제목 : 부르심을 받은 종들 (목사와 장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연구)
성경 : 엡 4:8-16
2. 목사와 장로에 대한 일반적 연구
나는 모든 장로들이 목사와 장로에 대한 이런 잘못된 생각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1,000명의 장로 중에 한 사람이라도 이런 잘못된 직분 해석을 하고 그것이 진리 인양 착각하고 있으면서 교회를 섬긴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목사와 장로에 대한 성경적이며 신학적이고 목회학적인 입장에서 교회 직분론을 말하겠다.
우선 김 장로의 글에 대한 해명으로 직분론을 전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장로교 헌법에 설교 장로인 목사와 치리 장로를 구분해 좋은 것은 잘못이다.
김 장로는 “손병호목사의 주장에 의하면 두 장로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헌법 제4장 교회의 직원 제22조 ‘항존직은 장로, 집사, 권사이며(행20:17-28, 딤전 3:1-13) 그 시무는 70세로 한다.
장로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① 설교와 치리를 겸한 자를 목사라고 하고
② 치리만 하는 자를 장로라 한다’는 내용을 근거로 한다.
이 헌법은 성경을 임의로 해석하고 부정한 죄를 지었으며 아전인수격인 해석이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 5장17절에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사람으로 여기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란 말씀을 악용하고 있다. 이는 장로 가운데 법에 조예가 깊고 또 성경에 능한 장로를 지칭하는 말씀이다. 결코 목사가 아니다.
답변 : 장로교의 헌법에는 오류가 없다.
성경은 분명 장로가 두 종류가 있음을 명시한다. 나이 많은 연장자로서의 장로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의 장로가 그것이다. 김 장로가 말한 디모데전서 5장17절의 장로는 치리 장로를 말하지 않고 말씀을 전하는 장로를 말한다. 사도들은 자신들을 가르쳐 장로라고 했다. (벧전5:1, 요이1:1, 요삼1:1) 그러나 그들은 백성들에 의해 선출되고 뽑혀진 장로들이 아니라 주님에게 부르심을 받은 사도들이었다. 오늘의 목사가 사도직을 계승하고 있다는 성경과 신학적인 근거는 다음에 기술하겠다.
장로가 사도직은 계승한 목사 장로와 치리 장로가 있음을 분명히 밝히는 기록은 사도행전 15장에 있다. 할례를 받는 문제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였을 때에 사도들과 장로들이 함께 모였다고 말했다. (행15:2) 이로 보건대 김 장로의 한가지 장로설은 전혀 근거가 없는 오해다.
☞ 예수교 (정경 신약)에는 목사란 직분이 없다.
예수교 (정경 신약)에는 목사란 직분이 없다. 개역 신약 에베소서 4장11절에 목사로 번역한 것은 분명 오역이다. -------예수님 당시에 목사가 없다. 야고보서 5장 14절에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으나 그 때 목사가 있었다면 “너희 중에 목사들이 있느냐 청할 것이요”라고 했을 것이다.
에베소서의 목사 “(엡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의 목사라는 말은 원어로는 ‘포이메나스’인데 이 말은 “보호한다”는 뜻이 있다. 선진국은 목자로 번역하고 우리 나라도 바르게 번역해 놓았다. 예수교 정경 신약에는 직분이 장로와 집사, 전도인 뿐이다. 그러므로 손병호목사는 “목사 직분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 받으면서 나온 직분”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답변 : 성경에는 분명히 목사가 있다.
김 장로의 지론에 의하면 구약에는 천국이라는 말이 없는데 그 말이 없으므로 구약에는 천국이 없었다는 말인가? 주님의 “7형제와 함께 산 여자”의 말씀에서 분명히 천국을 믿지 못하는 사두개인들 에게 천국이 있음과 부활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눅20:37-38) 하늘로 올라 간 엘리야는 지금 어디에 있으며 무덤을 찾을 수 없었던 모세는 어디에 있다고 믿는가? 야곱과 씨름한 천사는 어디에서 왔으며 모세와 선지자들을 만나신 하나님의 집은 어디인가? 구약에 천국이라는 말이 없어도 수 없는 많은 말씀들을 통해 천국이 있음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장로는 예수님 당시에 목사라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야고보서 5장 14절의 장로는 목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장로를 말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목사의 직분이 없었기 때문에 목사는 없다는 지론은 올바르지 않다. 예수님 당시에는 대 제사장과 제사장, 서기관, 바리세인과 사두개인, 랍비들이 있었고 주님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있었다.
♠ 성경에서 말씀하신 목사
① 신약에서 목자라는 말이 예수님을 가르치는 경우는 (마2:6, 9:36, 25:32, 26:31; 막6:34, 14:27; 요10:2,11,12,14,16; 히13:20; 벧전2:25, 5:4)가 있다.
주님을 목자라고 기록해서 주님께서 양을 치신 목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이런 어법은 주님의 사역적 특징을 비유한 말씀이다.
② 주님께서는 마지막 제자들과의 만남에서 목자가 양을 치는 것과 같은 비유의 말씀으로 교회를 보살피도록 당부하신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요21:15), “----내 양을 치라”(요21:1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21:17)라고 하셨는데 김 장로 식으로 해석하면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모두 양치기가 되어야 할 판이다.
그런데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후에 그 양을 치는 일을 누가 했을까? 장로들이 했는가? 그런 역사적인 기록은 없다. 사도 후에 사도들의 제자인 속 사도들이 그 일을 감당했고 속사도 이후의 목양자들을 감독 또는 교부라고 불린 직분을 가진 하나님의 종들이 감당했다. 그리고 교부들은 종교 개혁 이후에 케도릭에서는 신부로 개신교에서는 목사로 불리게 된다.
③ 목사에 대한 다른 칭호들이 있다.
양치기 (눅2:8,15,18,20), 악한 거짓 목자 (유1:12)라는 말이 있으며 목양자, 양치는 자라는 말도 없다. 그러나 이런 단어들이 목사를 가르치는 말이라는 것은 성경 전체의 문맥으로 아무도 부인해서는 안되는 확실하고 분명한 것이다.
♠ 한국 기독교 성서 사전은 목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목사 (牧師) :
성경 원어인 그리스어로는 poimhvn (poimen)이라고 하는데 이 말을 영어로 Pastor이라고 번역했다.
Pastor [목사]라는 말은 엡 4:11에 1회 보여지는데, 교회에 있어서의 직제상의 목사에 대해 쓰여져 진다. 이 말은
70인 역(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성경)에서는 [로에 h[,ro (ro'eh)]라고 번역했고 이 말의 뜻은 “양떼를 치는 자”를 의미하며 곧 [목자] [목양자] [양치는 자] 등으로 번역되었다. (마 9:36, 25: 32, 26:31, 막 6:34, 요10:2, 벧전 2:25).
이 말은 목축 생활에 있어서의 목자와 양과의 애정 관계에서 생긴 표현으로서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오늘에 있어서는 목사들에 대하여 쓰이고 있다. 모두 영혼을 사랑해 키우는 자로서의 성격이 현저하다.
그런데 목자, 목양자, 양치는 자로 비유된 교회 사역자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김 장로의 지론에 따라 목사라는 말이 없다고 하자. 그럼 목자는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문자 적으로 그 단어가 없다고 해서 사실상 있어서는 안되는 직분인데 목사들이 만들러 쓰고 있다는 오해는 정말 답답한 일이다.
☞ 니케아 예루살렘 공의회에 목사의 참석이 없었다.
교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니케아 예루살렘 공의회에 목사의 참석이 없었다. 목사라는 직책은 주후 200년 후기에 와서 특별히 영성이 있고 성경 지식이 능한 사람을 선별하여 세운 직이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1977년 신구교가 공동으로 원래의 뜻을 살려 목자로 번역해 놓았다는 점이다.
답변 : 김장로의 말하는 주후 200년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니케아 회의에 목사들이 참석이 없다는 말은 크게 오해한 것 같다.
AD 325년과 786년에 소집된 종교 회의로서 니케아에서 그리스도는 신과 동일인이 아니라고 하는 아이리우스를 둘러싸고 알렉산드로스 주교 등과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아이리우스는 이단시되어 추방되었다.
(참고 : 주후 355년 경에 일어 난 이단 분파의 창시자인 아이리우스는 니케아회의의 결정에 의해 이단으로 단죄된 이단의 괴수이다. 그는 ① 주교와 장로들이 동등하다고 주장했으며, ② 부활절은 유대인들의 미신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했다는 것은 버려야 한다고 했으며, ③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와 헌물을 쓸대없으며유해하다고 했고, ④ 지정된 금식을 비난했다.-기독교 대 백과 사전)
이 회의의 장소는 처음 앙카라로 예정되었으나 후에 니케아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앙카라가 내륙이어서 참석자들의 여행에 어려움이 있고 황제의 거주지로부터 멀리 있었기에 황제 자신의 회의 참여에 효과적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황제는 '공적인 길' (Cursus Publicus)을 제공하고 숙박과 음식을 부담하고 의사 일정을 결정하였다. 회의는 325년 6월 19일 니케아의 황제의 궁에서 콘스탄틴이 참석한 가운데 시작되었고 8월 25일 폐회될 때까지 거의 두달 동안 계속되었고 318명의 감독들이 참석했다. 황제는 각각의 감독들에게 장로 두 사람과 시종 한 사람을 대동하게 하여 감독을 시중 들게 했다.
회의에 참석한 감독들은 세 개의 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가이샤라 유세비우스를 포함한 대다수의 중도파, 안디옥의 루시안에게서 공부한 아리우스와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이끄는 좌파, 그리고 정통 우파인 알렉산더와 아타나시우스 및 기타 소수파로 갈라져 있었다.
참고로
▷ 회의에서는
① 부활절의 날짜 (봄을 맞아 첫 번째 만월 후 첫 번째 주일 : 폴리캅과 소아시아 지방은 니산월 14월로 주장)
② 20개의 교회 계율 제정 (디오클레티안의 래로운 제국의 구획에 따른 새로운 교회의 조직 즉 교구 관할권 확정 : 로마,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을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으로 )
③ 성직자의 직위
④ 공적인 참회에 대하여
⑤ 분열 자들과 이단자들의 재입회에 관하여
⑥ 예배 의식의 규정 등이 다뤄졌고 아리우스의 견해를 누르고 아들과 아버지는 동일 본질 (homoousios) 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 니케아 신조 내용
♤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 아버지, 전능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만드신 자를 믿는다.
♤ 하나님과 주님은 한 분이시다.
또한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 이는 아버지로부터 특유하게 나시었고, 즉 아버지의 본질(substance, 즉 ousia)로부터 나신, 하나님으로부터의 하나님이 시요 빛으로부터의 빛이 시요, 참 하나님으로부터의 참 하나님으로서 출생하시되 만들어지지는 아니 하시었고, 아버지와 동일 본질(homousios)이시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모든 것이 다 그를 통하여 만들어졌다. 그는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시고 성육신 하시고 사람이 되시었다. 그는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시사 하늘에 오르시었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오신다(is coming).
♤ 하나님과 성신도 한 분이시다.
또한 성신을 믿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자들은, 즉 그는 계시지 않은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나시기 전에는 그는 계시지 아니하시었다. 또한 그는 없는 것들로부터 생겨나셨다고 말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다른 존재 물이나 본질로부터 되었다거나 창조되었다거나 변할 수 있다거나 달라질 수 있다거나 주장하는 자들을 카톨릭 적이요 사도적 교회는 정죄한다.
이 회의는 사도행전 15장에 이은 기독교의 참된 교리를 정립하고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아주 중요한 희의로 평가된다. 그런데 이 회의에 참석한 주교들은 누구이며 감독은 누구인가? 그들을 시중 든 장로들은 누구인가.
☞ 목사의 축도 대해서
김장로는 목사만 축도권을 내세우는데 성경적인 입장에서 목사에게만 축도권이 한정됐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성도를 축복해 주었듯이 성령 받은 경건한 성도라면 누구든 간에 축도해 주어야 한다.
답변 : 목사들이 흔히 사용하는 성경에 나오는 축복문은 고후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이다. 이 축도는 사도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축복하는 기도이므로 주님을 대신한 사도들과 사도들을 대신한 목사만이 해야 하는 복을 비는 축원이다.
☞ 목사의 당회장 당연직에 대해서
목사만이 ‘당회 장 당연직’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답변 : 김 장로는 목사의 당회장 당연직에 대한 의의를 제기한다. 우선 당회의 치리권에 대한 오해가 있는 듯 싶다. 교회 성도들에게 바른 이치를 가르치며 모범을 보여 성도들을 바르게 인도한다는 치리가 아닌 다스린다는 개념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듯 하다. 이 말이 틀리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강조 점이 차이는 장로의 바른 자세를 확립하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목사가 당회장권을 당연직으로 가져야 함은 성경적인 근거에 의해서다. 목사는 주님의 교회를 주님 대신 맡아 치리 하는 자로서 그 근거는 요한 복음 21:15-17에 있다. 목사는 교회에서 성도들에 의해 선출된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교회에 파송된 직분인 것이다. 결단코 성도의 투표에 의해 선출된 치리 장로가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 대신 다스릴 수는 없다.
이와 같은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모든 장로 교회의 헌법에서는 당회장에 대하여 이렇게 규정했다.당회장은 지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될 것이나 특별한 경우에는 당회의 결의로 본 교회의 목사가 그 노회에 속한 목사 1인을 청하여 대리 회장이 되게 할 수 있으며 본 교회 목사가 신병이나 출타한 때에도 그러하다.라고 했다. (합동측 헌법 정치 제9장 당회 제3조). 그리고 당회장은 목사가 되는 것이므로 어떤 교회에서든지 목사가 없으면 그 교회에서 목사를 청빙할 때까지 노회가 당회장 될 사람(목사)은 파송할 것이요, 노회의 파송이 없을 경우에는 그 당회가 회집 할 때마다 임시 당회장 목사를 청할 수 있으나 부득이 한 경우에는 회장될 목사가 없을지라도 재판 사건과 중대 사건 이외에는 당회가 사무를 처리할 수 있다(제4조)라고 했다.
김장로의이 조항은 폐기되고 당회장은 당회원 총의에 의해서 장로든 목사든 지 교회 당회원 중에서 신앙생활이 모범이고 인격적으로 덕망 있는 분이 매년 선거로 선출되어 당회장이 되어야 마땅하다“라는 주장은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이 주장하시지 않으시고 성도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위험 천만의 발상이다.
예) 성경에 이런 김장로의 주장과 비슷한 주장을 해서 나라를 망친 기록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다스리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선지자를 배척하고 왕을 달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물론 그들이 그런 요구를 한 이유는 있다. 사무엘의 아들들은 요엘과 아비야인데 사사가 되었으나 그 아비의 행위를 다르지 않고 뇌물을 받으면서 판결을 굽게 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삼상 8:1-4) 이르자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나아가 사사가 아닌 왕을 구했다.(삼상 8:4-6) 이들의 요구를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했는데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같이 네게도 그리하는 도다(삼상8:7-8)라며 대단히 진노하셨다. 그러나 결국 장로들의 요구대로 베냐민 지파의 사울을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그 왕은 호세아 선지자가 호세아서 13장 11절에 말씀하신 대로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응답이 되고 말았다.
☞ 장로 설교에 대하여
성경 어디를 상고해 보아도 장로가 설교하지 말라는 말이 없다. 설교가 목사의 독점 물인가. 야고보서 5장 14절에 청함을 받은 장로가 분명히 설교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우선 스데반 집사와 빌립이 명설교를 했다. 장로도 성경 지식이 해박하고 성령 충만한 장로가 설교하는데 설교권이 없느니 있느니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과거에 경산 하양읍 교회 김순도장로님이 전국적인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김인서장로님이 전국적인 부흥사로 활동했다. 장로 설교권이 없다는 성경적 근거가 있는지 알고 싶다.
답변 : 빌립, 스데반, 김순도 장로, 김인서 장로들은 교회에 적을 두고 성도들을 돌보는 치리 장로가 아니라 전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던 성령 충만한 분들이었다. 그러므로 이 분들을 일반 집사나 치리 장로로 보아서는 안된다.
칼빈은 강요 하권 직분론에서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복음을 전하는 자”(전도자)는 사도들 보다 지위가 낮지만 그들의 다음에 처하면서 그들을 대신하여 활동한 사람들이다. 누가, 디모데, 디도 및 그 외에 비슷한 사람들이었고 그리스도께서 사도들 다음 두 번째로 임명하신 70명의 제자들도 아마 전도자들이 였을 것이다.“(눅 10:1)
이렇게 해석한다면 이 사도와 선지자 전도자는 교회 내에 항존직으로 정하신 것이 아니라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거나, 교회를 모세에게서 그리스도께 옮기고자 하실 때 한한 일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별한 비상시기에 이런 위대한 전도자들을 세우셔서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게 했던 것이다.
☞ 빌립이 세례 준 사실이 있다
일개 집사가 세례 주었다는 성경적인 근거는 있어도 목사가 세례 주었다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 이제 말을 맺고자 한다. 상술한 바와 같이 목사직은 제사장직에 계승이며 예수님이 직접 부르셨다는 말씀은 전혀 성경에 근거가 없다.
답변 : 빌립이 세례를 준 일도 비상시기에 쓰신 하나님의 한 방법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별한 경우에 당나귀를 쓰시기도 하시고 막대기를 쓰시기도 하시며 사단도 쓰신다. 이적과 기적을 베푸시며 자연을 이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 빌립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지역에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신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히 알려져 있으며 주의 종들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 주일에 계속 됩니다.
제직 세미나 (제 3 강의)
제목 : 부르심을 받은 종들 (목사와 장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연구)
성경 : 엡 4:8-16
치리 장로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다. 그리고 치리 장로는 목사를 돕는 하나님의 종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의 오해에서 치리 장로들이 자신의 고유한 사명과 직분과 버렸다. 그들은 스스로를 생각하기를 자신들은 성도들에 의해 뽑혀진 교회의 대표자로 자기 교회의 모든 것을 수호하며 목사에게 성도들의 불만을 전하고, 목사를 감시하며, 목사의 잘못을 교정하고, 목사의 독주를 견제하여 민주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고유한 사명 인줄 착각한다. 이런 비 성경적인 자리 떠남이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하나님의 거룩 성을 침해한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하권 제3장 교회의 직분론 제 8항에서(p59-67) “다스리는 사람들은(고전 12:28) 신자들 사이에 선택된 장로들이었으며, 감독들과 함께 도덕적인 견책과 권징을 시행하는 일을 맡았다. 그리고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롬 12:8)하신 바울의 말은 달리 해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각 교회는 경건하고 근엄하고 거룩한 사람들 가운데 선택된 장로회가 있어서 과오를 시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직분이 한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 다스리는 직분은 모든 시대에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장로(長老) : Elders, Presbyter
영어의 Elders, Presbyter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신분 있는 정치 참여 지도자에 대한 술어이고, 교회에 있어서는 가르치고 다스리는 직책의 직분 명. 구약성서에 있어서 보통 "장로"로 번역되어 있는 히브리어 "자-켄-"은, "자-칸- @q;z; (zaqan)"즉 "턱수염"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하고, 턱수염을 길게 기른 사람, 즉 연장자를 말한다.
① 고대
이스라엘의 옛 역사에 있어서는, 성읍의 지도자들이 "이스라엘 장로"로 불렸다(출 3:16, 19:7, 24:1). 이러한 장로는 이스라엘 민족 이외의 민족들 사이에도 있었다(창 50:7, 민 22:7). 신 16:18등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성읍들에, 지파를 따라 "재판장"과 "유사"가 세워졌는데, 그 성읍의 장로들 중에서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② 가나안 정착 후
가나안 정착 후 이스라엘 민족이 차츰 민족으로서 통일되고, 국가의 형태를 갖추어 감에 따라, 성읍의 장로들이, 가족이나 종족을 대신하여 행정 기구에 참여했다(신 19:12,21:3,22:18). 거기서 주요 거주지인 성읍의 “장로들"(수 9:11, 삿 8:14,,삼상 11:3,16:4, 왕상 21:8, 신 19:12,21:3,19)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③ 왕조 시대
왕조의 제정과 중앙집권의 경향에 의해 “장로"의 백성에 대한 신앙적, 도덕적 영향력은 쇄퇴하고 오히려 정치적인 입지가 강화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사무엘의 자식들의 백성 다스림을 배척하고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데 앞장을 선 이후부터 생겨진 현상이다. (삼상 8:4-20, 11:3, 15:30, 30:26; 삼하 3:17, 5:3) 즉 장로들이 정치에 관여하여 힘을 얻게 된 것이다.(삼하 17:4-15)
그래서 사울 이후의 왕들은 언제나 “장로들"의 의견을 고려치 않을 수 없었다(삼상 30:26, 삼하 3:17, 5:3, 왕상 12:4, 20:7-9, 왕하 10:6, 23:1). 장로들은 왕의 고문이기도 했다(왕상 20:7-9). 솔로몬은 성읍들에 관장을 두어, 징세 및 행정에 임하게 했는데(왕상 4:7-19), 성읍의 장로들은 계속 종래의 특권을 보유하고 있었다(삼상 11:3,16:4, 왕상 8:1, 21:8-14).
④ 바벨론 포로 시대
포로로 유대인의 상당수가 멀리 바벨론에 옮겨진 때, 그들은 거기서 회당을 세우고, 회당을 중심한 유대인 무리 중에서 “장로"를 세웠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유대인 부락의 대표자임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회당에 대해 커다란 책임을 가지는 임원 같은 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⑤ 포로 귀환 후
회당에 있어서의 장로의 존재는, 후에 그리스도 교회가 생겨난 때,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 교회의 장로가 생겨난 계보(系譜)로 된 것으로도 여겨지고 있다. 포로 귀환 후, 바사는 유대인에게 어느 정도의 가치를 허락하고, 지도자들은 “장로"로서 지방자치의 권력을 가졌고(스 10:8,14), 그들은 주로 올바른 행정의 책임을 가졌다(스 5:9-,6:7-, 이것과 유딧 6:11-, 8:9, 10:6, I마카 12:6,35 비교).
⑥ 마카비 시대
마카비 시대(성경의 구약과 신약 사이의 약 400여년 시기)의 “장로 gerousiva(gerousia)"는 산헤드린(→) 의회의 의원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이것은 모세에 의해 세워진 70인 장로의 고사에 기초한 제도였다(민 11:16-). 120인 (행 1:15비교). 또는 그것 이상의 공동체에서는 7인의 장로를 선출했다. 이들은 “성읍의 7인"(seven of a city)으로 불렸다. 행 6장의 공궤를 일삼는 자로서 임명된 7인은 이러한 장로에 해당되는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⑦ 신약 시대의 장로
신약성서에 있어서 “장로"는 보통 헬라어 “프레스뷔테로스"으로 말해져 있는데, 그것은 단지 “옛 사람"(마 15:2,막 7:3,5, 히 11:2), 혹은 “연장의 사람" (눅 15:25), “맏아들"(행 2:17), “늙은이"(딤전 5:1, 벧전 5:5)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으나, 다른 곳에서는 모두 구약에 있어서의 “자-켄-"(연장자)과 대체로 비슷한 의미로 씌어졌다. 또한 70인 역에 있어서도, 구약 외전에 있어서도, 또한 요세푸스에 있어서도, “프레스뷔테로스"가 구약의 “자-켄-"의 그리스어 역으로 씌어진 예가 많다.
신약 시대 특히 복음서에는 유대인의 장로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유대인의 장로들(마 16:21, 21:23, 26:3,57, 27:1,12, 28:12 등)은 보통 70인으로 말해지는, 유대인의 정치 및 종교에 관한 최고 기관인 “율법 허가자" 및 “제사장들"과 함께 구성된 사람들을 말한다. 이 “장로들"은 서기관, 제사장과 함께 기록되고, 예수께(마 16:21,27:1), 또는 사도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행 6:12).
그러나 복음서가 아닌 사도행전 일부와 서신 서에서의 장로는 거의 대부분 감독이라고 불리는 목사를 지칭한다. 이 부분의 강의는 후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⑧ 계시록의 24 장로
계시록에는 24장로가 보여 지는데, 이것은 구약의 12지파의 선조, 신약의 12사도에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계 7:13, 4:4,10, 5:5,6,8,14, 11:16, 19:4). (딜럭스 바이블 성경 사전)
① 모세 오경의 장로들
☞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된 역할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70인 장로들이 동참했다.(출 24:1, 24:9, 24:14)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로부터 전해 들었다. (출 19:7)
▸모세에게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고 가르쳤다. (출 3:16, 신 31:9-13)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와 함께 바로에게 전했다. (출 3:18)
▸모세의 마지막 설교에 말씀의 증인이 되다. (신 27:1-)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맹세했다. (신 29:10)
▸말씀의 증인이 되었다. (신 31:28)
☞ 하나님의 종 모세와 함께 있었다.
▸기적의 현장에 있었다. (출 17:5, 17:6)
☞ 백성의 원망과 반역에 모세를 도와 수습했다. (민 11:16-30, 16:1-31)
☞ 잘 모르는 것은 모세에게 물었다.
▸여호와를 만난 모세를 두려워하여 이상한 징조를 물어 봄. (신 5:23)
☞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앞장을 섰다.
▸유월절을 준비하게 했다. (출 12:21)
▸모세가 아론과 장로들에게 제사 드리도록 명령했다. (레 9:1)
☞ 백성의 죄를 속죄하는 역할이 있었다.
▸온 회중이 죄를 범했을 때에 죄를 대속하는 예식을 했다. (레 4:15)
☞ 백성의 순결과 거룩함을 지켰다.
▸고의적으로 살인한 자를 보수자의 손에 넘겼다.(신 19:12)
▸범인을 알지 못하는 피살자의 시체 처리했다. (신 21:2-8)
☞ 윤리와 도덕적인 지도자였다.
▸불효자를 징치했다.(신 21:18-20)
▸백성들의 가정을 다스림.(신 22:15-29)
☞ 약한 자를 보호했다. (신 25:7-10)
☞ 장로로서의 대접을 받았다.
장로로서 모세와 아론과 함께 이드로에게 대접을 받았다. (출 18:12)
우리는 모세 오경에 나타난 장로들의 직분에 대하여 깊은 사려(思慮)가 있어야 한다. 모세 오경의 장로들의 모습은 사사기와 룻기에서도 보인다.
② 사사기와 룻기의 장로들
☞ 하나님의 종인 사사들을 도왔다.
▸하나님의 종 여호수아와 함께 회개 기도를 함. (수 7:6)
▸하나님의 종과 위험을 함께 함. 아이성을 치려 올라 감. (수 8:10)
▸여호수아에게 후계자를 부탁 받았다. (수 23:2)
▸여호수아의 마지막 설교에 순종을 맹세했다. (수 24:1-16)
▸기드온을 도와 배신자들을 처벌하게 함. (삿 8:14-16)
▸입다를 세워 미스바를 물리쳤다. (삿 11:5-11)
☞ 하나님을 섬기는데 앞장을 섰다.
▸가나안 정복 후 에발산과 그림신산에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고 축복할 때에 앞장을 서다. (수 8:33)
☞ 백성의 거룩함과 성결을 지켰다.
▸도피성의 규례를 집행함. (수 20:4)
☞ 이스라엘 족속의 어려움을 해결했다.
▸베냐민 족에게 아내를 얻게 함. (삿 21:16)
☞ 백성의 가정을 돌아보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
▸보아스와 룻의 결합에 증인이 됨. (룻2:1-12, 4:4-11)
☞ 좋은 장로가 살아 있을 때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음.
(수 24:31)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의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삿 2:7)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그러나 그들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나타난 장로들은 어떤 짓을 했으며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가를 역사서는 명백히 보여 준다.
③ 역사서의 장로들 (자기 위치를 벗어나기 시작한 장로들을 볼 수 있음)
☞ 장로들의 잘못된 판단이 화를 부른다. (삼상 4:3)
☞ 장로들이 왕을 구하고 벌을 받음. (삼상 8:4-20)
☞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고 사울에게 도움을 구함. (삼상 11:3)
☞ 장로들에게 구속을 당하고 있는 사울을 볼 수 있음. (삼상 15:30)
☞ 장로들이 다윗을 찾아 온 사무엘을 두려워 함. (삼상 16:4-5)
☞ 다윗의 탈취 물을 선물 받음. (삼상 30:26)
☞ 다윗을 왕으로 세움. (삼하 3:17; 삼하 5:3)
사무엘이 죽은 후에(삼상25:1) 이스라엘에게는 일시적으로 장로들에 의해 하나님의 뜻이 실행되고 있는 점을 발견한다. 즉 장로들의 주도하에 다윗을 임금으로 삼게 된다. 이 일에 하나님의 듯대로 된 일이다. (대상 11:3)
☞ 정치적인 힘을 가짐. (삼하 17:4-15)
☞ 다윗을 궁으로 모시는 일을 뒤로 미루는 일을 책망 받음. (삼하 19:11)
☞ 언약 괘를 다윗 성으로 모시는 일에 동참하다. (왕상 8:1-3)
☞ 아람 왕 벤하닷과의 전쟁에서 왕을 충고함. (왕상 20:7-8)
☞ 아합의 간계에 동참함. (왕상 21:8-11)
☞ 아람 왕 벤하닷의 위협을 당하는 엘리사와 동참함. (왕하 6:32)
☞ 예후의 살인에 동참함. (왕하 10:1-5)
☞ 히스기아 왕을 대신하여 이사야에게 감. (왕하 19:2; 왕하18:17)
☞ 요시아 왕이 하나님의 율법 책을 읽을 때에 동참함. (왕하 23:1; 대하 34:29)
☞ 왕과 함께 회개함. (대상 21:16)
☞ 성전 재건에 공을 세움. (스 5:5, 6:7-8, 14, 10:8, 14)
왕정 시대의 장로들은 왕과 함께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여 큰 영향력을 가진다. 여기서 우리는 모세 오경과 사사기 서에서 볼 수 있는 지방 유지로서 백성들의 도덕, 윤리, 성결 같은 신앙 지도자로서의 역할이 퇴색되고 중앙 정치와 지방 정치의 수장(왕하 10:1-5)이 되는 장로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런 장로들은 권력과 부를 가진 자로 지배 계층으로 변질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왕정 시대의 장로들이 하나님의 뜻을 쫓아 왕을 잘 도울 때에는 그 백성들이 바로 서서 축복을 받았지만 그릇된 장로들로 인하여 백성들이 큰 화를 당하고 왕의 정치 생명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기록도 볼 수 있다.
④ 시가서와 선지서의 장로들
▶ 시가서에서는 장로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시 105:22, 107:32; 잠 31:23)
▶ 선지서의 장로들 (19)
선지서는 역사서의 이면적인 원인을 계시하시는 말씀이다. 즉 역사서의 History는 나타난 표면적인 사건들이며, 선지서는 그 일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말씀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선지서의 장로들은 역사서의 장로들과 그 내용이 같다.
☞ 하나님과 백성에게 버림받은 장로들 (사3:1-7)
☞ 버림받은 이유 (사 3:14-15)
☞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하여 망하게 하는 장로들. (사 9:13-16)
☞ 그릇된 장로들 앞에 영광을 나타내시므로 그들을 책망하신 하나님. (사 24:23)
☞ 몇 사람의 착한 장로들. (렘 26:17)
☞ 선지자의 권고를 받은 장로들. (렘 29:1)
☞ 패망한 유다의 장로들과 백성들의 비참한 모습 (애 1:19, 2:10, 4:16, 5:12)
☞ 망하게 된 유다의 지도자들에게 지도자의 역량이 없어지고 말았다. (겔 7:26)
☞ 하나님의 성전에서 가증한 일을 행하는 장로들을 보여 주심. (겔 8:1, 11-12)
☞ 우상을 마음에 둔 장로들을 보여 주심. (겔 14:1)
☞ 여호와께서 범죄한 장로들의 면담을 거절하심. (겔 20:1-3)
☞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 중에 예언했던 선지자다. 그의 책에서는 장로를 찾을 수 없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향해 예언했던 선지자다. 그의 책에서는 장로를 찾을 수 없다.
☞ 기타 다른 선지서에서도 장로들을 찾을 수 없다.
이것은 바벨론 포로 중에 장로의 역할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 하나님께서 장로들과 백성들이 회개하라 하심. (욜 1:14, 16)
우리는 선지서의 장로들이 역사서의 장로들과 비슷한 것을 발견한다. 극히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장로들은 왕의 측근이나 권력과 제물을 가진 가진 자가 되어 백성들을 돌보지 않았으며 교만과 자만심에 빠져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길 뿐 아니라 백성들을 오도(誤導)하여 범죄에 빠지게 하므로 망하게 한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가 되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과의 면담까지 거절하시고 회개하도록 큰 책망과 경고를 하신다.
그들은 자기 위치를 떠나 사단과 마귀가 되어 버린 악 천사의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바벨론 70년 노예 생활 후 장로들을 선지자를 잘 도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느헤미아서와 에스더는 민족의 수난을 어떻게 피할 수 있었으며 나라의 재건 과정을 기록했는데 장로의 역할이 전혀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 특이하다.
신약 성경에서 장로(Pre=sbyteros)란 단어는 총 65회 등장한다. 공관 복음서에 가장 많은 24회, 사도행전 18회, 목회 서신 5회, 일반 서신 9회, 그리고 계시록에 12회 나타난다.
① 복음서의 장로들
마태복음에 12번, 마가복음 7번, 누가복음 5번, 요한 복음에는 없음.
복음서에 기록된 장로들은 제사장들과 함께 유대교를 지도하는 역할을 했는데 모두 주님에 대하여 극도로 적대적인 관계를 가졌다.
② 사도행전의 장로들
사도행전에는 장로라는 말이 18번 나오는데 세 종류가 있다.
☞ 복음서의 장로들을 지칭한 장로가 있다.
복음서에 나오는 주님을 적대했던 장로들과 같은 장로들이다.
(행 4:5, 8, 23, 6:12, 22:5, 23:14, 24:1, 25:15)
☞ 치리 장로(사도들을 돕는 장로)
사도들과 아울러,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로서 존경을 받고 있던 사람들이다.
(행 11:30, 15:2, 4, 6, 22, 23, 16:4)
☞ 목사 장로들
여기 기록된 장로들은 감독이라고 불렸던 목사들을 말한다.
(행 14:23, 20:17, 21:18)
③ 서신 서에 나타난 장로들
서신 서에는 장로라는 말이 9번 나오는데 모두 목사나 전도자들을 지칭한다.
(딤전 4: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딤전 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딤전5:19)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딛1:5)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약 5: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
(벧전 5: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벧전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요이 1:1)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요삼 1:1)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④ 계시록의 장로들
계시록에는 장로라는 말이 12번 나오는데 모두 24장로를 말한다. 24장로는 12명의 사도들과 12지파의 어른들을 말한다.
이와 같이 신약에 나타난 장로는 여러 종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회가 점점 조직화되어 가면서 바울은 교회마다 장로를 임명했다(행 14:23). 그들은, 한 지방 교회의 감독으로서(딛 1:5), 신자의 영적 생활의 지도를 하고, 회중을 가르쳤다.
어떤 경우에 큰 교회에는 몇 명의 감독(빌 1:1)이나 일반 장로(행 11:30)가 있었다. 감독들은 정규의 목사이고, 교사이며, 안수 받아 임직된 사람들이다(딤전 4:14). 이 초대 교회의 감독들인 장로는, 가르치는 일과 다스리는 일을 했다(딤전 3:1-5, 5:17-, 딛 1:9, 약 5:14, 벧전 5:1-4). 일반 장로는 목사들 도와 교회를 치리(治理)하는 일을 했다.
다음 주일에 계속됩니다.
제직 세미나 (제 4 강의)
제목 : 부르심을 받은 종들 (목사와 장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연구)
성경 : 엡 4:8-16
1) 칼빈의 직분론 (기독교 강요 하권 p59-67)
제3장 : 교회의 교사들과 목회자 : 그 선정과 직분
(1)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봉사를 필요로 하시는가? (하나님이 주신 직분: 이 기능은 고귀하고 꼭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중에 눈에 보이게 계시는 것이 아니므로(마 26:11), 그가 사람들의 봉사를 이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우리들에게 명백하게 선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일을 위임하셨으나 그것은 자신의 권리와 영광을 위임한 것이 아니고 단지 그들의 입을 통하여 자신의 사업을 성취하시려는 것이다. 노동자가 일을 할 때 연장을 쓰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아무의 도움이나 연장이 없이도 사업을 친히 하시거나 천사들을 시켜서 하실 수 있으시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을 수단으로 삼아 일하시는 편을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우리들에게 관심을 표명하신다. 사람들을 택하여 세상에서 그의 사자가 되게 하시며 (고후 5:20 참조) 그의 비밀한 뜻을 해석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를 대표하게 하신다.
또 이것은 겸손을 위한 가장 훌륭하고 유익한 훈련이 된다. 우리와 같은, 때로는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통해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들이 말씀에 복종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하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하늘에게 말씀을 하신다면 모든 사람이 즉시 경건한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누가 그의 능력의 임재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누가 그 한없는 광채에 당황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흙에서 나온 보잘 것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할 때, 그가 우리 보다 낳은 점이 없을지라도 그를 하나님의 일군으로 여겨 배우는 태도를 보인다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경건과 순종을 가장 잘 증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늘 지혜의 보화를 약한 질그릇에 숨기신 것은(고후 4:7) 우리가 얼마나 그 보화를 귀히 여기시는가를 시험하시기 위함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결합해서 상호간에 사랑을 보다 바르게 양육하는 끈이 있다. 그것은 한 사람이 목사로 임명되어 다른 사람을 가르치며, 제자가 되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은 한 입에서 공통된 교육을 받는 것이다. 만일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만으로 충족케 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인간은 늘 교만해서) 서로가 남을 멸시하고 멸시를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의 교회를 한 끈으로 묶으시고 이것이 연합을 유지하는 가장 강한 힘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구원과 영생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맡기시고 그들의 손을 거쳐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케 하셨다.
이 점을 생각하여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 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 4:4-7”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이어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 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8-16)라고 하셨다.
바울은 사람의 봉사는 신자들을 결속하여 한 몸을 이루는 힘줄이라는 말로 봉사가 하나님이 교회를 다스리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가장 중요한 힘이 된다고 말씀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교회를 손상 없이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도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간구하신 안전 대책이다.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엡 4:10)라고 한 그 말씀이다.
이 일이 실현되는 방법을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이 직책을 목회자들에게 위임하시고 직책을 수행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은 통해 선물을 교회에 분배하시며, 그의 이 제도하에서 성령의 능력을 나타내심으로써 친히 임재 하신다는 것을 어느 정도 보이심으로써 그 제도가 허망한 것이나 무익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신다. 성도의 갱신은 이렇게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의 몸은 이렇게 세워지며(엡 4:12), 이렇게 우리는 범사에 머리이신 그에게까지 자라 가며(엡 4:15) 서로 함께 자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 사이에서 예언 활동이 왕성하고 사도들을 영접하며 우리들에게 전한 교리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연합은 잘 이루어 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이 질서와 이런 교회 장치를 폐지시키려고 한다든지 불필요한 것이라고 무시하려 하는 자들은 교회를 파멸시키며 파괴하려는 자들이다. 현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태양의 빛과 열과 음식이 필요하지만, 지상의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도적 및 목회적 직분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성직 제도를 옳게 보시고 온갖 가능한 방법으로 그 위임을 칭찬하셨는데, 이는 성직이 우리 사이에서 최고의 존경을 받으며 심지어 가장 훌륭한 일로 인정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위해서 교사를 세우신 것은 그들에 대한 특별한 은혜라고 증언하신다. 예언자들에게 명령하셔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외치게 하시며(사 52:7) 사도들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어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 우지 못할 것이요”(마 5:13-14)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비할 데 없는 훌륭한 찬사로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눅 10:16)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바울이 이 문제를 고린도 후서에서 마치 고의로 논의하듯이 했을 때 기록한 구절이 가장 명백하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성령과 의와 영생을 전파하는 것이므로 교회 안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했다.(고후 4:6, 3:9) 이 구절과 그 밖에 유사한 구절들은 성직자들을 통해 교회를 다스리시며 유지하는 방식, 곧 주께서 영원히 제정하신 이 방식이 우리들의 무지와 멸시 때문에 폐지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성직이 극히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실 뿐 아니라, 실제로 공포하신다. 고넬료에게 진리의 빛을 더욱 풍부히 비추려 하실 때 하늘로부터 천사를 보내어 그를 베드로에게 인도하셨다.(행 10:3-6) 바울을 불러 자신을 알게 하시며 교회에 접붙이고자 하셨을 때, 친히 말씀을 하시지 않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보내어 그 사람에게 구원의 교리와 세례에 대한 성결을 받게 하셨다.(행 9:6)
하나님의 대변자인 천사가 하나님의 뜻을 발표하지 않고 그렇게 할 사람을 부르셨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신자들의 유일한 교사이신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사람들에게 맡겨 배우게 하시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는 바울을 셋째 하늘에 이끌어 가 말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놀라운 계시를 받을 만하게 만드시기로 이미 정하셨다.(고후 12:2-4) 그러면 누가 감히 하나님께서 이런 증거로 그 유용성을 증명하신 성직을 멸시하거나 또는 무용지물이라고 해서 폐지할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교회 정치를 주관하는 사람들은 바울은 첫째로 사도, 다음은 선지자, 다음은 복음 전하는 자, 목사, 끝으로 교사라고 말했다.(엡 4:11) 이 중에서 끝에 있는 둘만이 교회 내에 있는 평상직이요, 처음 셋은 주께서 그의 나라의 초창기에 세우셨고 필요에 따라 가끔 부활시키셨다.
사도들이 하는 일의 성격은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라는 명령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주님은 사도들에게 아무 제한도 가하시지 않고 전 세계를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라고 하셨는데, 이는 각 국민 사이에 어디서든지 할 수 있은 대로 복음을 전파하므로 써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자기의 사도직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는 어느 한 도시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두루 전파하였고 다른 사람이 놓은 터 위에 교회를 세우지 않고 주님의 이름을 듣지 못한 곳에 교회를 세우노라 하였다. (롬 15:19-20)
그러므로 사도들이 파견된 목적은 반역하는 세상을 돌이켜 올바르게 복종하게 만들며 복음을 전해서 세계 각지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다. 즉 교회의 창시자로 온 세계에 그 터를 닦아 두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전 3:10)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다 선지자라 부른 것은 아니다. 어떤 특별한 계시에 있어서 탁월한 사람들을 선지자라고 불렀다.(엡 4:11) 이런 사람들은 현재는 없거니 옛 날처럼 흔히 볼 수는 없다.
“복음을 전하는 자”(전도자)는 사도들 보다 지위가 낮지만 그들의 다음에 처하면서 그들을 대신하여 활동한 사람들이다. 누가, 디모데, 디도 및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 전도자였고 그리스도께서 사도들 다음 두 번째로 임명하신 70명의 제자들도 아마 전도자들이 였을 것이다.(눅 10:1)
전도자들은 사도들이 세운 사람들로서 사도들을 대신하여 교회를 대적하는 반역으로부터 교회를 바르게 하기 위해 세워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직책은 바르게 조직된 교회에서는 자리가 없기 때문에 임시직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이 세 가지 직책은 교회 내에 항존직으로 정하신 것이 아니라,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거나, 교회를 모세(율법)에게서 그리스도(복음)께 옮기고자 하실 때 한한 일이다.
목사와 교사는 교회 안에 없어서는 안되는 직책들이다.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 목사
제자 훈련이나 성례 집행이나 경고와 권면하는 일과 성경을 해석하고 선포하는 일을 맡았다.
☞ 교사
성경을 해석하는 일만을 맡았다. 이는 신자들 사이에 건전하고 순수한 교리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현재의 선지자와 사도들은 누구인가?
전도자와 사도를 한 덩어리로 뭉친다면 우리는 상응하는 두 쌍을 볼 수 있다. 현대의 교사들은 고대의 선지자들을, 그리고 목사는 사도들에 해당된다. 선지자의 직급은 그 탁월한 특수 계시의 은혜 때문에 더욱 두드러졌다. 그러나 교사의 직분도 성격이 매우 비슷하며 그 목적이 똑같다. 그래서 새로운 복음을 세상에 널리 선포할 목적으로 주님은 택하신 제자들을 가장 높은 서열에 두셨다.(눅 6:13; 갈 1:1])
그런데 사도라는 말은 원래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교회의 사역자들은 주께서 자기의 사자들로 파견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교회에 파견된 사람들이 ‘사도’라 부름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듣지 못한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세상이 확실히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열두 제자 후에 (후에 바울이 첨가한 그들에게) 특별한 칭호를 주어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할 필요가 있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이 명칭을 적용하고 “사도들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았던” 사람들이라고 했다.(롬 16:7)
그러나 그가 엄격히 구별하여 말하고자 했을 때에는 처음 등급에만 이 말을 적용했다. 또 이것이 성경의 일반적인 용법이다.(마 10:1)
그러나 목사들은(각각 그에게 맡겨진 교회를 다스린다는 점을 제외하면) 사도들과 똑같은 책임을 가졌다.
① 사도에게 주신 거룩하고 영원한 특권-복음 선포와 성례
주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셨을 때 이미 말한바 와 같이 복음을 전파하며 믿는 자에게 세례를 주어 죄사함을 얻게 하라고 하셨다.(마 28:19) 그러나 주님은 이미 그들에게 자기를 본받아 그의 몸과 피의 거룩한 상징인 떡과 잔을 분배하라고 말씀하셨다.(눅 22:19-20) 여기서 사도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신성 불가침의 영원한 법이 부과되었고, 이 법에 의해서 그들은 복음을 선포하며 성례를 집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것을 간단히 그리면 그리스도→사도→속 사도→교부→감독→목사. 신부가 된다.
② 목사
목사들은 어떠한가? 바울은 자기뿐 아니라 그들 전부에 대하여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도 “감독은---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 1:9)라고 하였다. 이 구절들과 빈번히 나타나는 구절들로 보아서, 우리는 목사의 직분에는 복음을 전하며 성례를 집행한다는 특별한 기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그러므로 목사가 하는 일들은
☞ 복음을 선포하며
☞ 거룩한 성례를 행하고
☞ 교사로서 그리스도의 교훈으로 사람들에게 진정한 경건을 가르치며,
☞ 치리 장로로서 올바른 치리를 유지하며 실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와 목사가 다른 한가지 점은 사도들이 전 세계를 위하여 한 일을 목사들은 각각 자기가 맡은 목장에서 양떼들에게 해야 한다.
교회를 다스리는 사람들을 ‘감독’ ‘장로’ ‘목사’ 또는 ‘사역자’라고 부르는 것은 성경에 이 말씀들을 구별 없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성경에서는 모두 ‘감독’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디도에게 각 도시에 장로들을 임명하라고(딛 1:5) 명령한 직후에,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딛 1:7; 딤전 3:1 참조)라고 하시고, 다른 곳에서는 한 교회에 있는 여러 감독들에게 문안하였다.(빌 1:1) 사도행전에서는 그가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이야기한 기사가 있는데(행 20:17), 그는 그들을 감독이라고 부른다.(행 20:28)
2). 칼빈의 감독(목사)과 장로의 차이점 (강요 하권 P 79-86)
제4장 : 고대 교회 상태, 교황 제도 이전의 교회 정치
우리는 이 장에서 로마 케도릭 이전의 교회 정치를 논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교회가 어떻게 운영이 되었는가를 논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논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순수하게 우리들에게 전해진 교회 정치 질서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직분들이다. 이 문제를 더욱 분명히 하고 진지하게 하기 위해 고대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였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고대 교회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정하신 제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교회에 적용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고대 감독들은 교회의 여러 제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도록 세밀하게 주의를 했다. 그래서 그들의 결정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 거의 없었다. 혹 그들의 처리에 미비한 점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으나 사실 그들은 거의 완벽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교회를 운영했다.
우리는 성경에 세 부류의 사역자들이 있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고대 교회의 사역자들도 세 부류가 있었다.
장로 계열에서
☞ 일부는 목사와 교사로 선택이 되고
☞ 나머지 장로들에게서 도덕적인 문제들을 견책하고 지도하는 일을 맡겼으며
☞ 빈민을 돌보고 구제 물자를 분배하는 일은 집사들에게 위임했다.
그리고 讀經師와 侍祭를 맡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제롬(AD 331년에 태여 난 저명한 라틴 교부, 신학자)은 교회의 계급을 다섯 가지로 나누어 감독, 장로, 집사, 신자, 학습 교인으로 했다. 그 밖의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에게는 특별한 직분을 주지 않았다.
가르치는 직분을 가진 사람을 모두 ‘장로’라고 불렀다. 각 도시에서는 장로들이 자기들 가운데 한 사람을 뽑아 ‘감독’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지위가 같은 사람들끼리 생길 수 있는 불화를 막으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감독이 훨씬 더 많은 권리를 가졌지만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감독은 원로원의 집정관과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다. 즉 사무에 대한 보고를 하고 의견을 물으며, 말하고 충고하며 권고하는 모임의 의장이 되어 모든 행사를 그의 권위로 주장하고 회의 결정을 심사하는 등 집정관이 한 일을 감독이 장로회에서 수행했다.
제롬은 그의 디도서 주해에서 “감독과 장로는 꼭 같다. 마귀의 유혹으로 교회에 불화가 생기고 사람들이 나는 바울 파다. 나는 ‘게바’파라 하기 전에는 (고전 1:12; 3:4 참조) 장로들의 협의로 교회를 운영했다.” 그 후에 이러한 불화를 없이하기 위해서 감독권을 한 사람에게 맡긴 것이다.
☞ 그러므로 장로들은 교회의 관습에 따라 주관하는 사람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감독이 장로들 보다 지위가 높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질서를 위한 관습이며 장로들의 협력을 얻어 교회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 제도는 심히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 마가 시대부터 헤라크레스와 디오니시우스의 시대까지 장로들은 항상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을 선택하여 감독을 삼았다.
그 때에는 각 도시에 장로회가 있었고 그 장로회는 목사와 교사로 구성되었으며 그들은 신자들을 가르치고 권고하고 징계하는 직무를 이행했다. 이것은 바울이 감독들에게 명령한 것이었다.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 1:9) 또 그들은 후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거룩한 교회에 들어 온 청년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그 때는 각 도시에 일정한 지역이 배당되어, 그 지역 내에서 장로들을 선출하였으며 그 지역을 교회의 일부로 생각했다. 장로회는 교회의 조직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한 감독을 세워 그 밑에 있었다. 감독은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높은 위엄을 가졌지만 동시에 형제들의 화합에 복종했다. 그러나 감독이 맡은 지역이 너무 넓어 일들을 원만히 처리하기 어려울 때에는 장로들을 배치하여 작은 일을 대신 처리하도록 했다. 이들은 지방 전체의 감독을 대신 했기 때문에 ‘지방 감독’(전도자)이라고 불렀다.
(3) 감독과 장로의 중요한 임무
원래 감독과 장로는 말씀을 잘 전하며 성례를 집행하는 사람이었다. 일반 장로가 설교를 해서는 안된다고 결정한 것은 이단 아이리우스가 교회를 소란하게 만든 후였으며 이 결정은 알렉산더에만 있었던 일이다.
(참고 : 주후 355년 경에 일어 난 이단 분파의 창시자인 아이리우스는 니케아회의의 결정에 의해 이단으로 단죄된 이단의 괴수이다. 그는 ① 주교와 장로들이 동등하다고 주장했으며, ② 부활절은 유대인들의 미신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했다는 것은 버려야 한다고 했으며, ③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와 헌물을 쓸대없으며유해하다고 했고, ④ 지정된 금식을 비난했다.-기독교 대 백과 사전)
이것은 대단히 불쾌한 일이었다. 그러나 감독이 설교를 하지 않는다면 교회가 아무리 타락했어도 용인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레고리우스는 말하기를 “감독에게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그는 죽은 것이다. 설교를 하지 않는 감독은 숨은 심판자의 진노를 자기 위에 내리게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나는 깨끗하다고 바울이 말할 때,(행 20:26) 우리 자신에게 죄악이 있을 뿐 아니라 감독이 다른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잠잠할 때를 경고하는 말이다.”라고 했다. 그가 ‘잠잠하다’라고 말한 말은 감독이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을 두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감독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며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건전한 교리로서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 감독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다스리는 사람들은(고전 12:28) 신자들 사이에 선택된 장로들이었으며, 감독들과 함께 도덕적인 견책과 권징을 시행하는 일을 맡았다.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롬 12:8)하신 바울의 말은 달리 해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각 교회는 경건하고 근엄하고 거룩한 사람들 가운데 선택된 장로회가 있어서 과오를 시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직분이 한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 다스리는 직분은 모든 시대에 필요하다.
제직 세미나 (제 5 강의)
제목 : 부르심을 받은 종들 (목사와 장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연구)
성경 : 엡 4:8-16
5. 목회학적 입장에서 본 목사와 장로 연구
한경직 목사 외 10명이 함께 쓴 장로 시무 지침서인 「장로 시무 핸드북」에서 박창환 교수는 신약 성경 시대 장로 제도에 대해서 기술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한다.
"교회의 장로들이 목회적 책임을 수행했으리라는 것은 베드로전서 5장 1-4절과 야고보서 5장 14절에서 추리할 수 있다. 이 구절들에서 나타나는 장로는 확실히 목회자를 가리키고 있다. 거기서 베드로는 자신과 같이 장로가 되었다고 하면서 동료 장로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베드로가 사도이면서도 자신을 장로라고 부른 것으로 미루어 그 당시의 그의 동료 장로들도 베드로처럼 목회의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볼 때 거기에 언급된 장로는 그 지방에 살면서 존경을 받는 어른으로서 아직 목사라는 직제가 확정되지 않은 시대라 오늘의 목사들이 하는 일을 거의 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준다. 초대 교회에 있어서 교회를 다스리고 의논을 하는 회의에 사도들과 장로들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같이 행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도와 장로를 혼동한 일은 없었던 것이다. 사도는 사방에 돌아다니며 선교하는 자들이었고 장로는 일정한 지방 교회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박창환 교수는 신약 시대 장로직을 오히려 오늘날의 목사직과 밀접하게 연결을 시키면서도, 당시에는 "선지자와 교사들", "감독과 집사들"이 "장로"라는 직분과 혼동되는 경우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이상근 박사는 그의 디모데전서 주석서에서 신약 성경에는 유대교의 장로와 함께 기독교의 장로들이 종종 언급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 장로직의 임직에 대한 언급은 없음을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이 장로직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시작되어 갈라디아, 에베소, 그레데 등 각 교회에 파급되었다.
디모데전서 5장 17절 이하 석의와 관련하여 이 문제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약 교회의 장로는 교회를 다스리고(5:17), 감독직을 수행하고(장로와 감독이 같은 직은 아니었으나, (행 20:17;딛1:5~7), 또 장로 의회라는 것도 있었다. 그들은 사도 아래 있었으나(행 21:18; 딛 1:5), 베드로도(벧전 5:1), 요한도(요삼 1) 장로로 자칭한 것을 보면, 또 신약 교회의 직위의 서열에 장로직이 언급되지 않은 사실은(고전 12:28~29; 엡 4:11) 장로직은 고정된 직이 아니라 연장급의 지도자를 가리켰다고 볼 것이다.
또한 그는 오늘날 장로 교회에서 말하는 치리 장로와 설교 장로(목사)가 당시 목회 서신 시대에는 두 종류 장로직으로 제도화됐던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설교 장로는 "장로들 중에서 특별한 은사를 받은 이가 담당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주 : 일반 장로가 설교를 해서는 안된다고 결정한 것은 이단 아이리우스가 교회를 소란하게 만든 후였으며 이 결정은 알렉산더에만 있었던 일이다.)
임택진 목사는 이 분야의 전문가로서 "장로학", "장로와 종에 대한 지시" 등의 글을 발표했다. 그는 "장로학"에서 '장로의 직무', '장로직의 성경적 기원', '장로와 목사의 관계'등에 대해서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는 목회 서신 성서 연구 논문에서 디모데전서5:17-6:2주석과 관련하여 초대 교회의 장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 "사도 바울은 각 교회에서 장로를 세워 교회를 조직하였다(행14:23). 장로를 회중에서 선출하여 약간의 경험을 쌓은 후 안수하여 임명하였다. 장로의 임무도 교인을 감독하고 다스리고 보호하는 것이요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은 장로의 본래적 임무는 아니었다. 초대 교회에서 감독과 장로는 동의어로 사용되었다(행 20:17, 28; 딛1:5, 7). 그러나 교회가 어려움에 부딪치고 복음의 순수성을 수호해야 할 상황이 되어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딤전 5:17)로 구분하게 되었다.
교회를 영적으로 먹이고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을 전담하는 자를 감독이라 부르고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생명을 유지하도록 지키고 다스리고 관리하는 자를 장로라고 하였다. 교회가 조직화되면서 감독직과 장로직이 점점 중요시되어 감독은 목회를 위해 부름 받은 직책이요 장로는 교회를 위해 선택받은 명예직으로 이해되었다.“
6. 목사와 치리 장로에 대한 결론
성경은 목사와 치리 장로의 위치와 차이점을 확실히 구분해 놓고 있다. 그런데 이 점에 연구와 교육이 부족해서 목사 장로와 치리 장로의 구별이 애매 모호해졌다. 이로 인해 치리 장로들이 목사 흉내를 내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들이 내 세우는 목사와 장로의 구별 없음의 근거는 만인 제사장론(벧전 2:9)이다. 그리스도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제사장론을 직분론으로 잘못 해석하여 목사와 장로가 같은 제사장으로 교회를 섬기는 직분에도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그릇된 생각은 칼빈이 강력히 주장한 목사의 고유한 의무와 권리를 훼손하고 치리 장로가 가진 아름다운 직책을 버리고 월권하여 사도직을 계승한 목사의 직무를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목사와 치리 장로는 바른 관계를 유지하여 언제나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역할을 잘 해야 한다. 치리 장로는 평신도 대표로서 교회의 발전에 도움을 주는 촉매자로 일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 장로가 본연의 역할을 오해해서 목회자를 견제(Constraint)하여 긴장(Tension)관계를 이루는데 이는 교회 발전에 많은 문제점을 발생케하여 주님의 나라를 훼손한다.
목회자와 장로가 모두 함께 교회를 섬기는 동역자로 피차 존경하고 신뢰하며 힘을 합한다면 성숙하면서 성장하는 교회를 세울 수 있다. 이 거룩한 일에 부름 받은 장로는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항상 기도하는 자로서 자신의 신앙을 성숙시키고 성도들의 본이 되는 믿음의 상태를 언제나 유지해야 한다.
제직 세미나 (제 6 강의)
제목 : 영광된 주님의 지체들 (집사와 권사)
성경 : 딤전 3:8-10
(딤전3:8)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딤전3: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딤전3:10)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요
(딤전3:11)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딤전3:12)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딤전3:13)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1) ‘집사’(헬, 디아코노스)란 원래 ‘종’ 또는 ‘시종 드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제도가 초대 교회 안에 정착되면서 ‘섬기는 자’, ‘봉사하는 자’라는 의미로 발전하게 되었다.
2) 이들은 사도들을 돕는 일을 일을 주로 하였고 특별히 성도들 중에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힘썼다. 사실 집사가 교회 안에 자리잡게 된 것은 구제 사업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다. (참조, 행6:1-6)
3) 그런데 이 직분은 초대 교회 내에서 제도화되기 전까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되어졌다. 즉 공적인 면에서 집사의 직제를 가르쳤고 (참조, 빌1:1). 비공식적인 면에서는 봉사하는 자 모두를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참조, 엡 6:21). 여하튼 집사는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온 교회를 섬기며 봉사하는 직책임에 분명하다.
4) 오늘날에 있어서도 집사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교회를 섬기며 성도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교회 안에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고 성실한 집사가 얼마나 많으냐에 따라 그 교회는 참된 부흥을 맛이 하게 될 것이다. 쉽게 집사 직분을 획득 할 수 있는 요즈음 하나님이 기뻐할 만한 집사, 희생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집사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집사의 직분(집사와 부감독; 재산과 구제 물자의 관리; 하부 성직자)
초대 교회 당시의 집사 직분은 사도 시대와 같았다. 그들은 매년 신자들이 하나님에게 바치는 예물과 교회에 들어오는 수입을 받아 적당하게 쓰는 일을 맡았다. 즉 감독이 정한 데로 사역자들과 빈민들의 생활비를 지급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매년 그 분배 상황을 감독에게 보고했다. 교회 법은 어디서나 감독이 모든 재산의 관리인으로 집사를 지정한 사실은 감독이 직접 그 일을 하지 않고 집사들에게 구제의 일을 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집사가 충실히 수행했는지를 조사했다.
그래서 사도들이 정한 교회 법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는 감독에게 교회 일을 관할하는 권한이 있다고 선포한다. 사람들의 영혼이 (이것은 더욱 귀한 것이다) 감독에게 위탁되었다면 그가 재산을 관리하는 것은 더욱 타당하다. 그의 권위에 의해서 모든 것이 장로들과 집사들을 통해 빈민에게 전달되고 두려움과 상당한 주의를 기우려 처리되어야 한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에서는 장로와 집사들 모르게 교회 일을 처리하는 감독을 제거하도록 결정했다.
처음에는 빈민 사업을 돕는 부집사가 있어서 집사를 도왔다. 뿐만 아니라 부 감독을 임명하여 더욱 확실히 교회 재산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것은 교회 재산이 많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 태만하거나 속여서 교회의 재산에 손상을 입힌다면 죄로 인정될 것이라고 그레고리우스는 말했다. 또한 부감독은 신자들에게 복음을 읽어 주는 일과 기도를 권고하는 일도 맡았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영적 직무를 수행했다.
① 집사는 단정하고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하지 아니하며 술에 인 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利)를 탐하지 아니하여야 한다.
② 집사에 관한 성격상 최초의 언급은 행 6장에서 발견되는데 그곳에서 집사 임명의 목적은 주로 실무적인 것이었다 (참조, 행6:4). 그런데 그들은 구제의 일을 담당하였기에 누구에게도 흠 잡힐 것 없는 도덕적인 높은 품성이 요구되었다.
③ 집사들이 구제를 위해 각 가정을 다녀야 하는데 만일 그들이 술을 즐긴다면 자신이 맡은 일을 올바로 수행할 수 없을 뿐더러 당연히 말이 많아져 험담과 쓸데없는 논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덕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④ 권사와 여집사의 자격
여기서 특별히 강조하는 점은 단정하며 절제하고 모든 일에 충성된 자가 여집사로 합당하다는 데는 남 집사의 자격 요건과 다름이 없으나 여집사들에 있어서는 특별히 ‘참소 하지 않는’ 요건이 추가된다.
여기서 ‘참소 하다’는 말은 남을 비방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곧 사단 적인 행위로서 온 교회를 어지럽히며 마침내 파멸시킬 수도 있는 것을 말한다 (참조, 계12:10).
만약 집사로 피택된 자가 형제를 구제하는 중에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여기 저기 옮기며 다닌다면 큰 말썽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더욱이 남을 고자질한다거나 신의를 떨어뜨리는 번잡스러운 말은 교회 전체에 분란을 야기시킬 수 있을 것이다.
⑤ 또한 집사들이 구제를 위해 거둔 기금을 탐한다면 그 자신에게 뿐 아니라 교회 적으로 큰 문제가 됨은 물론 하나님의 영광에 먹칠을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⑥ 더욱이 집사의 직분으로 말이 많음은 물론 이 사람에게 이 말을 저 사람에게 저 말을 하면서 일정하지 못한 나쁜 소문만을 퍼뜨리고 다닌다면 교회는 싸움판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⑦ 이와 같은 집사로서의 요건은 평신도들에게도 요구되는 것이지만 교회의 실무를 담당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는 집사에게는 필수적인 것이다.
⑧ 오늘날 교회는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이지도 않고 믿음의 생활도 올바로 하지 않는 사람을 재력과 학식, 사회적 지위가 있다고 해서 집사로 임명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임명된 집사들로 인해 교회 안에서 시끄러운 일들이 발생하며 또한 매사에 세상의 가치 기준을 따라가게 된다 (참조, 렘50:6).
⑨ 거룩한 공회인 교회에 필요한 봉사자는 세상적인 조건이 만족하다고 해서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합치된 자라야 선택될 수 있다. 비록 교회 안에 일군이 필요하고 제정 적으로 쪼들린다 하더라도 성급하게 집사 직분을 맡기는 일은 삼가해야 할 것이다.
① 그는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한다.
② 즉 집사는 실무적인 일을 위한 조건도 구비해야 되지만 영적인 확신과 정결함 또한 소유해야 한다.
③ 특히 그는 교회의 재정을 다루는 자로서 거짓되어서는 안 되며 어떤 일을 하든지 불의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교회의 제정을 다루는데 있어서 명심할 일은 자기 멋대로 생각대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임받은 사도들 즉 목사들의 지시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제정의 사용 한도는 구제하는 일로 정해져 있음을 명심할 일이다. (참고. 행6:1-4)
④ 그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산지식이 필요하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도리를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깨달음을 통해 양심적인 신앙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참조, 고전15:51).
⑤ 이처럼 교회의 봉사적 직분을 감당할 자는 종교적인 것 뿐 아니라 윤리적인 관점에서도 온전한 자라야 한다. 오늘날 교회가 병들어 가는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신실한 믿음과 순결한 양심의 소유자들이 아닌 부도덕하고 세상적인 인물이 교회의 살림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1) 먼저 후보들을 시험하여 보고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기는 것이 좋다.
2) 그런데 이 시험은 주제와 어떤 기간을 정해 놓고 합격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의 진실성과 구원의 도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졌는지를 알아보는 교회 전체의 관찰이라 할 수 있다.
3) 그리하여 그 후보자들이 비방 받을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을 만한 자라고 판단된 후 그들을 집사로 임명해야 한다. (참조, 행6:3-6).
4) 이와 같이 오늘날의 한국 교회에서도 집사의 임명을 서두르거나 무조건적으로 해서는 안되며 그것이 거룩한 직분이라는 점에서 엄정성을 기해야 한다.
그래야만 집사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조차도 그 직책의 중요성을 인식할 것이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활동할 수 있을 것이다 (참조, 요15:16).
그릇의 재료가 아니다. 무엇으로 만들었느냐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깨끗한가 더려운가가 중요하다. 이 말씀을 하나님의 종의 인간 조건들을 즉 학력, 가문, 혈통, 외모적 인품 같은 외부적 인간 조건들이 아니라, 사람의 됨됨이, 인격에 대한 말씀이다.
인격은 사람의 됨됨이를 말한다. 바울은 이것을 그릇이라고 했다.
바울은 (딤후 2:20-21) “큰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벧전1:22)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② 무엇에서부터 깨끗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은 본래부터 악하다고 하셨다.
(롬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 교만함.
☞ 거룩한 욕심의 지배를 받음.
☞ 지혜롭지 못한 처신.
☞ 세속적 탐욕을 가짐.
☞ 허영
☞ 권위 의식
☞ 기타
본문에 이런 것이라고 하신 것들
☞ 망령되고 헛된 말
(딤후2:16-17)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참고 : 후메내오 - 딤전 1:20에서는 알렉산더와 딤후 2:17에서는 빌레도와 관련 기록되어 비난받고 있는 거짓 모사이다. 그는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기 때문에 바울이 사단에 내어 주어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즉 교회에서 제명 처분했다고 기록했다(고전 5:5참조). 딤후에서 그는 진리에서 벗어나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사고 방식은 그노시스(Gnosis)의 사상과 통하는 점이 있다.
빌레도 - 후메내오와 같이 기록되어 있는 배교자의 한 사람이다. 그는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므로 육체의 부활의 교리를 부정하였다(딤후 2:17, 18).)
☞ 부활을 부인함.
(딤후2:18-19)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 청년의 정욕 - 욕심과 탐욕을 가진 자가 됨
(딤후2:22)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탐욕, 욕심.
☞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 - 교리적, 목사 흉,
(딤후2:23-26)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줄 앎이라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우리 성도들의 아름다운 인격의 표준은 그리스도의 인격이다.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하셨고
(고전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하셨다.
그리스도 인격은 신구약 전체에 그 모습을 찬란하고 확연히 드러내시고 있습니다. 그 중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산상보훈의 팔 복에 잘 나타나 있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 5:7)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 잘 알면서도 이 말씀에 맞는 인격 훈련을 어떻게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마음의 가난 훈련을 받아 보신 일이 있으신 지요. 온유, 청결함. 긍휼. 마음의 평화. 핍박을 받는 중에 기쁨의 훈련을 받아 보신 일이 있는가?
① 하나님께서 직접 하심
(행11:9)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대답하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 하더라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신 것처럼 죄인을 깨끗하게 하신다.
② 성령의 감화와 말씀으로
(엡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딛2:14)
③ 주님의 거룩하신 피로
(요일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④ 연단 하심으로
(히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⑤ 순종함으로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1) 아름다운 지위를 얻게 됨(13상).
그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게 된다. 여기서 ‘지위’란 문자 적으로 ‘터’, ‘기초’, ‘계단’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얻었다는 말은 자신의 맡은 바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는 집사들은 교회 안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뿐 아니라 신앙의 발전도 꾀하게 될 것임을 가리킨다.
(2) 믿음에 큰 담력을 얻게 됨 (13하).
더욱이 그 일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그들은 보다 나은 봉사를 위한 담대함을 얻게 되어 믿음의 확신 속에서 일하게 될 것이다 (참조, 요일4: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04:17) 모세, (히 11:24-29) 여호수아, (수 1:5-9) 다니엘 (단 6:10).
※ 참고
칼빈의 장로교의 정치 제도에 대한 두 분 목사님들의 글을 참고로 올렸습니다.
1. 심창섭교수의 (총신대원)장로교 정치제도의 기원은 무엇인가?
1997년 4월 28일 교갱협 공개 심포지엄 "오늘의 한국 장로교 정치제도 이대로 좋은가" 주제 강연
I. 서론
대부분의 칼빈주의 개혁파 교회는 칼빈(John Calvin)을 장로교 정치제도의 원조로 인식하고 있다. 개혁파 신학자들도 이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이들이 전통적으로 이러한 견해를 갖게 된 이유는 개혁파 교회의 산실인 제네바(Geneva)에서 칼빈이 장로 정치제도를 실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이 장로 정치제도를 독창적으로 창안했거나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칼빈 이전에 혹은 동시대에 이미 장로 정치에 대한 시행이 다른 종교 개혁자들에 의해 시행되었다. 칼빈은 제네바 종교개혁 때 이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장로 정치제도를 제네바 교회에 적용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칼빈은 장로 정치제도의 성경적 이론적 근거를 위해 성경과 초대 교회의 자료를 인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장로교 정치제도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 칼빈에게 있었던 두 가지 정황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즉 역사적 정황(Historical Context)과 성경적 정황(Biblical Context)이다. 본 논문은 이와 같이 두 가지 정황을 먼저 논한 후에 논자의 결론을 통해 장로교 정치제도와 그것의 기원에 대한 재조명(reappraisal)을 평할 것이다.
II. 본론
1. 역사적 정황(Historical context)
칼빈이 장로 정치제도에 있어서 스트라스부르그(Strassburg)의 종교 개혁자들, 특히 마틴 부쳐(Martin Bucer)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단순한 추론이 아니라 역사적인 정황에서 볼 때 확실한 것 같다. 16세기 개혁파 교회의 장로 정치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한 교회는 보헤미안-모라비안(Bohemian-Moravian)형제 단들의 교회에서부터였다. 이들은 1467년에 장로들을 카톨릭의 교황 감독제 대신 채택했으며 목사들을 장로들이 감독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공동체에 장로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1877년 세계 개혁파 교회 연맹(World Alliance of Reformed Church)의 에딘버러(Edinburgh)에 파송 되었던 그들의 대표가 재확인 해주었다.
"나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장로 교회인 형제단 교회를 대표한다고 믿는다. 요한 칼빈이 태어났을 때 형제교단은 이미 장로들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 심한 것은 여자 장로들도 있었다. 성실하고 경건한 장로들이 당시 장로교 회의 중심 역할을 했다. 우리들의 교회가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증인이다. 교회가 존재했었고 존재해 왔고 지금도 존재하는 것은 장로라는 수단을 통해서였다."
새롭고 확고한 개혁 교회의 장로 제도의 구조를 가지고 있던 형제단 멤버들은 다른 종교 개혁자들과 접촉을 가졌으며 일찍이 루터를 만났고, 1540년에는 스트라스부르그를 방문하여 부쳐와 칼빈도 만나 토론을 하였다. 토론 후에도 그들은 서로 서신을 주고받을 정도로 관계가 발전하였다. 이와 같은 접촉은 스트라스부르그의 종교개혁에 있어서 교회의 정치제도에 아무 영향을 주지 않고 지나가지는 않았다.
형제단과 더불어 이곳의 개혁 교회 정치제도에 영향을 주었던 자는 바질(Basil)의 종교 개혁자 오코람파디우스(Oecolampadius)였다. 그는 1530년경 바질에 새로운 교회 조직을 만들기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마태복음 18:15~18절을 자신의 시대에 교회를 위해 필요한 성경적인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사도들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어떤 장로들"이 교회의 치리(discipline)를 조종하기 위해 임명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조직의 의도는 개혁 교회의 독립적인 치리 조직을 위해 세속의 간섭을 배제하려는 것이었다. 이때 견책자(censors)들을 성경의 장로들과 동일시하였다. 시 당국으로 부터 교회의 독립적인 치리를 구성하기 위해 이미 서신을 통해 그는 제네바에 있는 쯔윙글리에게도 독립을 강력하게 강조하였다.
"교회의 권위를 가져가는 이러한 당국들은 적 그리스도보다도 참기 힘들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형제가 죄를 범하면 당국에 가라고 하지 아니하고 교회에 가라고 하였다."
그의 개혁은 그의 사후에 시 당국에 의해 폐지되었지만 그러나 후에 스트라스부르그와 제네바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부쳐에게 영향을 미쳤다. 부쳐는 1530년에 오코람파디우스를 만났으며 그는 오코람파디우스의 주장은 바람직하며 치리(discipline)는 교회를 위해서 필요함을 주장하였다. 부쳐는 오코람파디우스가 만들었던 위원회 중심과 유사한 성격의 교회 관리단(a board of Kirchenpfleger)을 1532년에 세웠다. 이 구성회는 목사들의 설교를 간섭하였고 신도들의 신앙 훈련을 책임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1533년 열렸던 스트라스부르그 총회에서는 부쳐의 영향을 받아 스트라스부르그 교회 규정(Ordinances)을 제정하였다.
1536년 부쳐는 "복음서의 주석"(Commentary on the Gospels)에서 일반적으로 치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확대시켰다. 그는 여기서 장로들을 특별히 치리를 위해 책임을 진자들로 규정하였다. 참회(Cofession)까지도 장로들 앞에서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제3판을 내면서 성도들의 치리에 대한 수정을 가했고, 주로 목사들에게 이임되도록 규정하였다. 2년 뒤에 사목(pastoral care)에 관한 논문(De Vera Animarum Cura)에서 사목의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일임을 주장하였으며, 동시에 죄인들을 치유하고 영혼을 돌보기 위해 특별히 임명된 자들이 필요함을 또한 강조하였다. 여기서 그는 다시 지금까지 언급한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의 장로들의 경우를 교회의 치리의 중요한 기능 그룹으로 주목하였다. 신약의 이러한 장로들의 그룹을 부쳐는 개혁 교회의 치리를 위한 특정한 그룹의 교회 지도자들과 일치시키므로 개혁 교회의 장로단의 존재 형성에 신기원을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이 스트라스부르그에 왔던 때는 1538년이었으며 이때는 이미 부쳐를 중심으로 개혁 교회에 장로 정치제도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상태였다. 칼빈은 3년간 이곳에서 프랑스 피난민 교회에 사역하였고 스트라스부르그의 장로 제도를 도입하게 되었다. 칼빈은 1541년 제네바에 다시 돌아와서 본격적인 교회 개혁을 주도할 때 바로 이 장로 제도를 시행하려고 시도함을 볼 수 있다.
역사적인 정황에서 볼 때 분명히 개혁 교회의 장로 제도는 칼빈에게서부터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칼빈 이전에 부쳐가 있었고, 부쳐 이전에 오코람파디우스가 있었고, 오코람파디우스 이전에 형제들의 개혁 교회가 있었다.
그러면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이 이처럼 장로 제도를 주장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공통적으로 치리(discipline)문제였다. 당시 교회 국가(church state)의 정황에서는 교회의 치리를 시당국이 담당하고 있었다. 교회 국가는 로마 가톨릭과 결탁되어 있었고 개혁 교회가 이러한 구조 가운데서는 제대로 교회 개혁을 성취할 수 없었다고 보았다. 개혁자들은 교회를 제대로 치리하며 개혁하기 위하여 이러한 시 당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감독을 도와 일할 수 있는 제 3의 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함을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점이 개혁자들과 칼빈이 장로 정치제도를 도입한 시대적, 역사적 정황이었다.
2. 성경적 정황(Biblical context)
칼빈은 1541년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제네바로 돌아와서 종교개혁의 박차를 가할 때 제네바 교회 규정(Geneva Ordinances ; Draft Ecclesiastical Ordinances)을 제정하였다. 그는 여기서 오늘날의 장로교의 정치제도인 4가지의 체제(목사, 교사, 장로, 집사)를 제네바 교회의 직제로 삼았다. 칼빈은 이러한 개혁 교회의 직제를 창안(invention)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제도를 재발견(rediscovery)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칼빈이 교회의 장로 직제의 성경적인 근거로 인용한 대표적인 성경 구절은 롬 12:8("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하므로"), 고전12: 28("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웠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딤전 5:17("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절이다.
롬 12:8절의 초기 주해(1536)를 통해 칼빈은 다스린다는 직분을 신적 기원에 두며 동시에 정치, 사회적인 함의로 이해하면서 교회를 들어 세우기 위한 직책으로 이해하고 있다.
"주님은 일반 통치자들의 직분을 그가 승인하고 또한 수용될 수 있는 것으로 증언하였을 뿐 아니라 가장 영광스로운 칭호들을 가지고 권위들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에게 그것을 맡겼다..... 하나님이 그들의 직책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을 맡겼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이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마치 모세와 여호수아가 사사들을 유다의 여러 도시에 임명했을 때 말한 것처럼)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재판 권한을 위임했다는 것 외에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신.1:16~17; 역하.19:1)....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권위가 왕들이나 다른 통치자들 손에 있다는 인간적인 왜곡된 사고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이며 거룩한 제정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사람들의 일들을 다스리시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바울도 하나님이 주신 은사들 가운데 '다스림'(ruling)이라는 은사를 기입할 때 이 점을 분명히 가르쳤다.(롬.12:8) 그런데 이러한 은사들은 '교회를 들어 세우기'(upholding of church)위해 그리스도의 종들에 의해 사용되어져야 함을 가르쳤다."
그러나 1543년 이 구절을 확대 해석하면서 칼빈은 새로운 직분론을 이야기한다. 그는 목사 외에 교회의 영원한 직분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감독들과 더불어 도덕의 견책과 권징의 행사의 임무를 띠고 있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있어야 함을 논한다. 그리고 그는 이들을 고전 12:28절에 나오는 통치자들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직무는 영속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고전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고전 12장 28절에는 다스리는 자들은 내가 믿기로는 감독들과 더불어 도덕의 견책과 치리의 업무를 맡은, 사람들로부터 뽑힌 장로들이다. 로마서 12장에서 부지런하므로 다스리게 하라는 바울의 말을 아무도 다르게 해석할 수 없다. 초대 교회는 그러므로 처음부터 잘못을 교정하는 재판권을 가진 거룩하고 엄정하고 경건한 사람들 가운데서 뽑은 원로회(senate)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들의 경험 자체가 이러한 종류의 체제(order)는 한 시대에 국한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통치 관리의 직분(office of government)은 모든 시대에 필요한 것이다."
칼빈은 여기서 특히 신약의 직분들에 대한 리스트를 언급하면서 다스리는 자들은 신자들 사이에 선택된 장로들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칼빈이 두 종류의 장로를 언급한 곳은 딤전 5:17절 주해에서였다.
"나는 통치(governments)라는 것을 치리를 위해 책임을 지고 있는 장로들(elders, seniors)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에서 사람들의 바로 세움에 있어서 장로들의 회(councils of elders), 즉 원로회(Senatus)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딤전 5:17절에서 장로들의 이중직제(duplicem ordinem)에 관해 언급할 때 이 점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통치는 인격의 무게와 경험 그리고 권위가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는 장로들에 의해서 이행되어져야 한다."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또한 두 종류의 장로들을 구분한다. 즉 말씀에 사역하는 자들과 말씀 사역에는 종사하지 않지만 잘 다스리는 자들이다.(딤전 5:17) 의심할 여지없이 후자는 도덕적인 문제들을 감독하기 위하여 임명된 자들이며 그리고 교회의 열쇠의 권한을( power of the keys)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지금까지 다룬 칼빈의 장로 정치제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1. 칼빈의 장로 정치제도는 부쳐를 중심한 스트라스부르그의 개혁자들의 영향 속에서 발달되었다.
2. 칼빈은 장로 정치제도의 타당성을 일반 사회나 초대 교회의 일반 통치 원리의 경험론 위에서 조명하였다.
3. 칼빈의 장로 정치제도는 세속 정치의 교회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4. 칼빈은 필요에 의해 장로 정치제도의 성경적인 근거를 찾아갔다.
5. 초기에 태도의 교정(Correction of manners)을 위해 있었던 연장자들(Seniors)의 개념이 후에 목사를 도와 교회의 관찰(oversight)역할을 하는 장로의 개념으로 분명해져 갔다.
6. 초기 직분의 이러한 의무들은 점점 교회의 행정(government of church)의 정황에서 이해되어지므로 일반 원로회(Senate)의 개념들이 교회의 장로직의 것으로 전환되었다.
7. 교회 정치제도는 성경과 연결하여 이해하고 권위를 갖게 됨으로 성경적인 규범들(norms)을 추적하게 되었다.
8. 칼빈의 교회 직분의 개념은 사상의 발전(progression)으로 성숙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진보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고 의식적인 고려의 결과였다.
9. 칼빈의 장로 제도는 발명된 산물들(inventions)이 아니고, 재발견의 산물(re-discovery)이다.
10. 칼빈은 두 종류의 장로 직분(장로 목사와 치리 장로)을 분명히 구분한다.
11. 칼빈은 장로 직분은 감독과 함께 감독을 도우는 사역으로 인식한다.
12. 칼빈이 말하는 장로 직분은 시 당국의 간섭을 배제한다는 차원에서는 교회의 전권(the whole power of the keys)이 주어지지만 주로 교회 내의 도덕적인 문제의 치리 사역이다.
13. 칼빈은 말씀과 성례 직분은 감독 / 장로들에게 국한시킨다.
14. 칼빈은 감독 중심의 교회 행정과 치리를 선호한다.
15. 칼빈은 교회 직분의 이러한 제도는 영원히 필요한 직제로 보고 있다.
III. 결론: 장로 정치제도의 기원에 대한 재조명(Reappraisal)
1) 성경적 조명
신약 교회의 장로 제도는 헬라 문화 환경 속에 있었던 장로 제도, 고대 근동 지역의 장로 제도, 그리고 구약의 전통을 계승한 회당(synagogue)이나 산헤드린(sanhedrin)의 장로 제도 중에서 유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셋 중에서 신약 교회에서 모방한 제도는 회당과 산헤드린의 장로 제도였다. 그리고 둘 중에서도 회당의 영향이 더 컸던 것으로 나타난다.
"교회의 팽창으로 즉각적인 어떤 조직의 필요성이 있자 마자 교회는 자신의 회당을 형성하였다.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는 처음부터 이방 지역으로부터 유래되었지만, 팔레스틴에 있는 크리스챤 공동체는 오랫동안 회당이라는 이름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호칭되었다. 이에 회당이라는 이름 자체를 가진 그들은 자연적으로, 필연적인 것은 아니지만, 회당의 정상적인 행정제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장로들의 체제(body of elders or presbyters)가 종교적인 예배와 부분적으로는 당시 사회의 번영을 위해 돌보도록 출범되었다."
신약 교회에 나타난 장로 제도의 적용에 있어서 오늘 장로교회의 문제가 되는 것은 감독(목사)와 장로와의 관계이다. 감독/목사와 장로와의 관계는 교회 직분을 이 직분론으로 보느냐 삼직분론으로 보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러나 두 경우 다 감독/장로와 장로의 관계는 직분상(office)의 구분이 아니라 기능상(function)의 구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더 분명한 것은 신약 교회의 직분론이 오늘날 각 교파들이 자신들의 교회 직제가 더 성경적인 규범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확정된 상태는 아니었다. 감독/목사와 장로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관계를 신약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이해하려면 미완성된 일치와 조화의 관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재조명(Reappraisal)
칼빈이 장로 정치제도를 시도한 정치 사회적인 배경은 3 가지로 분석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로마 카톨릭의 교황제의 독선을 방지하고, 둘째로는 급진 종교 개혁자들의 무정부주의(anarchism)적인 교회의 반 제도화를 반대하면서, 셋째로는 교회의 치리와 행정관리를 제네바 시민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독립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면 칼빈의 장로 정치사상은 자신이 밝힌 대로 영원히 고수해야 할 교회의 유일한 성경적인 제도인가? 여기에 칼빈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칼빈은 교회 제도 문제에 대해 사실은 자유 함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칼빈은 고전 14: 34~37절을 주해하면서 교회의 외적인 통치나 관리 조직(externa politia)은 정황이 바뀌었을 때 가변성이 있다고 하였다. 특히 칼빈은 도덕적으로 중성인(indifferent) 교회의 행정관리, 정책 등은 영원히 우리의 양심을 묶어 둘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칼빈은 당시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개혁 교회의 성경다운 교회 직제를 위해 신약과 초대 교회의 장로 정치제도를 도입하였지만 칼빈의 전체적인 교회 직제관의 관점에서 조명해 볼 때 교회의 직제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칼빈의 장로 정치제도 사상을 더 잘 이해한 경우가 될 것이다.
장로 정치제도의 성경적인 기원을 검토해 본다면 사도들은 분명히 장로 정치제도를 초대 교회의 모델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도나 초대 교회의 장로 정치사상은 역시 발명품은 아니고 헬라 문화나 근동 지역의 이방 세계에 편재해 있던 장로 정치제도를 모방했던지 아니면 회당이나 산헤드린의 장로 제도를 수용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헬라 문화와 근동 지역의 관습에서 나왔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쿰란 공동체나 회당에 있었던 장로 제도의 관습을 받아들였다는 주장이 더 타당한 것 같다.
사도들의 시대나 초대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와의 관계는 기능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분리나 구분이 가능하겠지만 직분에 있어서는 공유 개념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김의환 박사의 주장처럼 분명히 사도 시대에 장로 제도가 있었지만 손병호 박사의 주장처럼 사도 시대의 교회에서 분명하게 거론된 공식적인 행정적 직제는 장로직이 결여된, 주로 사도, 선지자, 교사요(고전 12:28), 그리고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혹은 목사와 교사(엡 4:11)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교사, 선지자, 전도사, 목사 등은 신약 교회에 새로 생긴 직분들이기 때문에 동시에 그리고 자주 언급되었지만 장로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명할 필요가 없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목사라는 개념 속에는 본 논문에서 지적했듯이 장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생략했을 수도 있다.
장로의 직분이 다른 직분들과 불가분의 관계로 초대 교회에 있었으며 또한 교회의 행정과 치리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지만 여전히 감독/목사를 보필하는 고문이요 원로격이 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이 점에 있어서는 칼빈도 마찬가지였다. 칼빈이 목사와 장로 직제를 연계해서 설명할 때는 언제든지 장로는 "목사와 함께" 사역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칼빈은 로마 카톨릭의 교황 감독의 독재를 극복하기 위해 장로를 세우지만 여전히 장로와 함께 감독/목사 중심의 교회 정치제도를 구상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감독 없이 교회가 없다"(no bishop no church)는 초대 교부들의 교회론에 충실하였다.
칼빈은 감독 / 목사 중심의 교회 체제(order)를 선호하지만 동시에 교회 정치에 평신도 장로의 참여의 문을 열었다. 1400년간 성직자들에 의해 다스려 왔던 교회가 평신도의 참여로 적극적인 전환을 한 것이 바로 장로 제도의 기원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평신도 장로들의 교회 사역 참여는 바로 시 정부의 간섭과 국가권력의 독주를 견제하면서 교권을 회복하려는 민주적인 제도였다. 칼빈은 장로회를 통해 시정부와 조화를 이루면서 교회 개혁의 민주적인 방법론을 채택한 것이다.
그러나 장로 정치제도의 역사적, 성경적인 기원의 이러한 고찰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칼빈과 같은 종교 개혁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말씀 중심의 교회 개혁과 복음 전파를 위해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복음의 그릇을 창출해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칼빈에게서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다.
2. 엄상석목사의 「장로 교회란 무엇인가?」
목사와 장로 문제는 장로 교회 정치 체계를 가진 교회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러나 장로라는 직분을 가장 먼저 시작한 교회가 장로 교회이기 때문에 간단히 장로 교회에 대한 글을 쓰신 엄상석목사의 「장로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올린다.
장로교는 국내 개신교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며 가장 많은 신도를 가지고 있다. 장로교는 프랑스의 종교 개혁가 칼뱅에 의해 발생했으며 현재 영국 스코틀랜드의 국교로 지정돼 있다.
◀장로 교회의 창시자 칼빈
1) 장로 교회란 교회 생활의 고착된 형태가 아니라, 연속성과 다양성을 함께 지닌 하나의 발전해 가는 형태이다.
2) 이 제도의 많은 특징들은 공간과 시간에 따라 다르다. 미국의 장로교는 회중에서 노회, 대회 그리고 총회 순으로 발전한 반면,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총회에서 아래로 발전하였다.
3) 장로교라는 용어는 교회 정치가 주요한 논점이 되었던 17세기 초반 스코틀랜드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여, 영어권의 개혁 주의 공동체의 대부분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4) 하지는 다음과 같은 일반 원리들의 관점에서 장로교를 규정하였다.
① 교회의 모든 속성과 특권은 성령의 임재에서 비롯되며, 따라서 성령이 임재 하는 곳에는 그러한 속성들과 교리들이 존재한다.
② 성령은 교역자 안에만 임재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안에 임재 하므로, 모든 능력은 일차적인 의미에서 그 백성 안에 있다.
③ 이러한 특권들을 행사함에 있어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규정된 원리들에 의해 다스려지며, 그 말씀은 특정한 여러 제약들 속에서 교회의 직분과 조직 형태를 결정한다. 그러나 교회는 그러한 원리를 넘어서 방법, 기관 및 시행자를 선택할 수 있는 폭넓은 자유를 갖는다.
④ 장로교 체제의 근본 원리는 첫째 성직의 동등성, 둘째 교회 다스림의 실질적인 부분에 대한 교인의 권리, 셋째 소수가 다수에게, 다수가 전체에게 종속된다는 의미에서의 교회의 연합이다.
5) 한편, 톤웰은 장로 교회의 정치 원리를 진술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① 첫 번째 원리는 교회의 통일성의 원리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이다.
② 장로교 체제의 둘째 원리는 그 통일성이 대표 회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③ 세 번째 원리는 이 대표 회의를 이루는 구성원들은 장로들로서, 이들은 교인들에 의해 자유로이 선택된 통치자들이다.
④ 네 번째 원리는 힘은 주로 집단 속에 있으며, 조직된 회의를 통해 행사된다. 당회, 노회, 총회가 살아 있는 힘을 행사할 때, 그것들은 올바른 교회라고 불린다.
6) 제임스 모펫은 이렇게 말한다. 장로교는 장로들에 의해 통치되는 사도적, 보편적 교회를 지시하는 용어이다. 그 구성 원리는 다음과 같다.
① 장로들의 동등성,
② 대표 회의 혹은 평신도 장로들을 통하여 교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교인들의 권리,
③ 신앙과 질서에 있어서 뿐 아니라, 영적 공동체로서 교회의 공동의 권위를 표현하고 시행하는 일련의 교회 회의에서의 교회의 통일성.
7) 헨더슨은 장로교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엄격히 말하자면, 장로교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채택하고 있는 교회 정치의 한 형태이다. 그 교회는 안수 받은 목회자와 평신도 장로들을 그 구성원으로 하는 일련의 통치 기구들을 주요 특징으로 한다. 모든 장로는 토론과 의결의 문제에 있어서 목회자와 동등한 권리와 책임을 가진다.
8) 장로교에 대한 이러한 정의들에서 네 가지 기본 원리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① 장로 교회의 지속적인 한 가지 특성은 성경의 권위에의 호소이다.
② 장로교의 두 번째 원리는 교인들이 선출한 장로들로 구성된 교회 회의를 통한 교회의 통일성이다.
③ 장로교의 세 번째 원리는 목회자의 동등성이다.
④ 장로교의 네 번째 원리는 자기들의 목회자를 청빙할 수 있는 교인들의 권리이다.
9) 개혁 주의 전통은 집사의 직분에 관해서 충분히 주장하기를 주저했다. 그래서 집사의 직분은 장로교의 원리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중요성은 마땅히 주목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