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을 쓰기 전에 먼저 역사적인 배경을 알아야 이해가 쉽다.
성경은 소설처럼 역사책 처럼 순서대로 쓰여 진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목적에 의해서 씌여진 것이기에 해석하기 위하여서는
우리가 스스로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이해하여 나가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사실 역사적인 배경이 중요하게 작용해야 이해가 쉽다.
그래서 다니엘서를 알아가기에 앞서서
다니엘이 씌여 졌던 시대적인 배경과 어떤 상황 이었는가를 알아 보는게 중요하다.
다니엘서는 기원 전 586년에 바벨론으로 끌려 갔을때 부터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멸망 할때 기원전 539년에 예루살렘으로 귀환 할때의
역사적인 시대적 배경을 안고 다니엘에 의해 쓰여졌다.
특히 다니엘은 예언과 계시로 심오한 책이며 그의 꿈으로 인한 예언은
거의 다 사실적으로 이루어 졌음을 우리는 역사를 보면서 알수 있다.
다니엘이 겪었던 10대 시절의 일들을 우선 알아야 한다.
요시야 왕이 기원전 640년에 유다의 왕위에 올라서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것을 보고 대대적으로 종교 개혁을 하였다.
그때 당시 앗수르가 강대국이 되어서 모든 나라들을 점령 시키면서
승승 장구 하며 뻗어 나갈때 신흥 강대국인 바벨론이 앗수를 쳐서 세력을 펼치고 있었다.
바벨론은 곡창 지대인 애굽이 탐이 났을 것이고
애굽은 신흥 바벨론을 견제하기 위해서 앗수르를 도와 제 1차 갈그미스 전투를
하려고 군사를 일으켜 갈그미스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요시야 왕이 애굽의 왕 느고를 므깃도에서 제지하고 나선 것이다.
느고 왕은 요시야 왕에게 앞을 막지 말고 길을 트라고 하였지만 듣지 않았고
안타깝게도 요시야 왕은 므깃도에서 느고의 손에 죽고 만다.
1차 갈그미스 전투는 흐지부지 무산되고
애굽의 왕 느고는 갈그미스에서 진것도 아니고 이긴것도 아닌채로
애굽으로 내려 가다가 요시야 왕의 뒤를 이어 그의 둘째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이 된지 석달만에 여호아하스를 폐위 시키고 그를 애굽으로 잡아 가고
그 여호와하스 대신에 첫째 아들인 엘리야 김(여호야 김)을 왕위에 앉혔다.
그 이유는 똑똑한 왕이 유다를 다스리면 또 다시 배신을 할까봐
애굽이 맘대로 조정할수 있는 만만한 엘리야 김을 왕으로 세우고
그의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꾸었다.
정복을 당한 나라의 위신을 세우고 기를 잡는다는 의미로 속국이 된 나라에는
이렇게 자기들이 정한 이름을 사용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벨론의 나보폴라살이
그의 아들 느부갓네살에게 명하여 앗수르를 치러 갈그미스로 갔는데
그 전쟁 중에 아버지 나보폴라살이 죽는 바람에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으로 돌아가서
그해 기원전 609년 9월 7일에 바벨론의 왕으로 등극했다.
그리고 기원 전 605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쳐서
그해 유다의 왕 여호야 김과 다니엘과 그 세 친구가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되었던 시대적인 배경을 마음에 두고 다니엘을 읽어 내려 가야 한다.
이때에 활동 했던 선지자가 하박국이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비록 우상 숭배를 하여 잘못은 저질렀다고 하지만
어떻게 저렇게 악한 나라가 일어나서 권력을 움켜 쥐고 날뛰게 하는걸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보고만 계시냐고 탄식 했던 것이다.
대영 박물관에 블랙 오벨리스크에 가보면..
북 이스라엘의 왕이 앗수르 사신에게 땅에 납작 엎드려서 부복하고 있는
부조를 볼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약탈하는 광경을 세밀하게 묘사 해 놨는데
그 부조의 윗부분을 보면 앗수르가 섬기던 우상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수 있다고 한다
고대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라고 할 정도로 신과 신의 대결 이었다고 한다.
1절에 보면..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지 삼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 쌌더니..
기원 전 605년에 유다의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성전에 있던
성전 기물 얼마를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왕에게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
여기서 하나님께서 넘기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이 범죄하여 징계하시기 위하여 허락하심을 뜻한다.
이는 유다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 오게 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에
바벨론이 그런 행동을 할수 있도록 허락 하셨다는 말씀이 된다.
고대 그 시절에는 나라와 나라간의 싸움이 곧 신들의 전쟁이라고 할 정도로
너희 신이 크냐 나의 신이 크냐 하는 다툼으로 전쟁이 벌어 졌었고
승리를 하면 함락 당한 나라의 신전에 있던 것을 가져다가 자기 신 앞에 두게 하였다.
그때 유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성전 안에만 계시고 일상 생활에서는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여 일상 생활 하는데 필요한 우상들을 기웃 거리고 있었다.
3절에 보면..
바벨론의 왕(느부갓네살)이 환관장 아스부나스를 시켜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 중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만한 소년을
데리고 오게 하여 그들에게 갈대아(바벨론)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다.
환관장이란 왕을 측근에서 보필하는 특허가 있는 사람으로써
남자의 심볼인 성기를 거세하고 그 대신 정권을 잡아 권력을 가지는 특허를 얻은 사람들이다.
원래 중국이나 우리 나라에서는 역사적으로 볼때 환관은 거세를 하고 왕을 섬기게 했으나
성경에는 거세를 했다는 말씀이 없으니 거세를 당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지만
왕과 측근들 앞에서 권력을 사용하게 하니 아마도 거세하였을 것이라고 짐작한다고 한다.
5절에 보면..
왕이 환관장 아스부나스를 시켜
그들에게 왕의 음식을 주게 하고 그가 마시는 포도주를 주며
날마다 쓸것을 주어 삼년을 교육 시켜서 왕 앞에 나가게 하였다고 한다.
그들 가운데는 유다 자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다.
7절에 보면..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다.
이 환관장이 그런 훌륭한 인물로 발탁한 소년들이 바로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 그리고 아사랴 네 소년이었는데..
그들을 철저하게 굴복 시키기 위해서 그 소년들을 마르둑 신전에서 수종들게 하려고
이름 까지 바꾸어 가면서 다니엘과 세 친구를 교육 시켰다.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라는 뜻인데
그의 이름을 벨드사살(마르둑이여 당신의 아들을 보호하소서)로 바꾸고
하나냐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인데 사드락(달의 신 '아쿠'의 명령이다)로 바꾸고
미사엘은 하나님 같으신 자가 누구인가 인데 메삭('아쿠'와 같은 신은 어디 있는가)로 바꾸고
아사랴는 하나님께서 도우셨다인데 아벳느고('느고'신의 종이다)라고 바꾸었다.
여기서 말하는 벨드사살의 벨은 바벨론의 최고의 신인 마르둑을 가리키고
아쿠는 달의 신으로 섬기는 달의 여신 아쿠를 말하고
느고는 마르둑의 아들 신이었다.
다니엘과 그 세 친구의 나이는 그때 당시 약 14살이나 16살 정도 였었다.
이렇게 이름을 그들이 섬기는 마르둑 신에 관한 이름으로 바꾼것을 보면
그들을 신전에서 사용할 인물들로 교육 시켰으며 아마도 그들에게 자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다니엘과 세 친구는 이웃나라의 신전에서 봉사 하였으므로
스스로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 갈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은 바벨론이 망하고 페르시아가 귀환을 하라고 해도 귀환하지 않았다.
8절에 보면..
다니엘은 나이가 어린데도 왕이 주는 진미의 음식을 먹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몸을 더럽히게 된다고 생각을 하여
환관장에게 가서 왕이 주는 음식을 먹을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환관장이 난처해 진것이다..
만약에 이 소년들에게 왕에게 올리는 진미의 기름진 음식들을 먹이지 아니하면
얼굴이 초최하게 되어 자기의 목이 달아날까 겁이 나서 소년들의 말을
들어 주지 못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은혜와 긍휼을 주셔서
그 소년들을 불쌍히 여겨 도와 주려고 하는 마음이 들게 하셨다..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게 한 자에게
자기 들에게 고기와 진미를 먹지 않고 채식과 물을 주어 먹게 하여
열흘이 지나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보고 나서 초최하게 보이면
그때는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는 청을 환관장에게 올려 달라고 하였다.
환관장이 그들의 말을 듣고 그대로 시행 하였는데
열흘 후에 보내 과연 그들의 얼굴이 아름답고 살이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고 살았던 소년들 보다도 더 좋아 보인지라 감독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에게는 기름진 음식을 제하고 채식을 주고 포도주 대신에 물을 주게 하였다.
그런데 사실 이 다니엘과 세 친구는 불과 10대의 소년들이었다.
철이 없다면 없을수 있는 어린 소년들이 목숨을 건 위험한 일에 도전을 한것이다.
만약에 이런 청을 하고 나서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수도 있는 위험한 일인데
그 소년들은 어릴적 부모님께 물려 받은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알았던 것이다.
아마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이 주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환관장이나 환관장이 부리는 감독관이나..
이 사람들이 다른 마음을 먹고 그 아이들을 건방지게 생각하여
왕에게 사실대로 고하였다면 과연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느부갓네살의 잔인한 성격으로 다들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아이들은 물론이거니와 만약에 그들이 아이들의 청을 들어 준 것을
왕이 알게 된다면 그들도 처형을 당하는 처지를 당할텐데
그들도 죽음을 각오하고 그 아이들의 청을 들어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환관장의 마음에 긍휼한 마음을 넣어 주지 아니 하셨다면
절대로 이루어 질수 없는 엄청난 큰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니엘과 세 친구가 참으로 위대 한것은..
바벨론의 왕의 눈에 들어 바벨론 까지 와서 그런 후한 대접을 받게 되면
바벨론에서 출세 할수 있는 길이 환하게 열려 있는 상태가 되어 있는 것인데
그 엄청난 출세길을 마다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려고 했던 바로 그것이다.
앞날이 보장 되어 있는 편한 길을 마다하고 하나님을 선택했다.
그럼 왜 음식은 죄가 없는데 맛있는 음식이라고 거절 한걸까?
아니다...
그 음식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부정한 것이라고 금지하신 돼지 고기가 있었고
대부분의 음식이 이방신의 우상 앞에 바쳐 졌던 것이기 때문이다.
또 포도주는 마실수 있는 것이지만 취하게 되면 그들처럼 향락의 세계로 빠질까봐
아예 포도주도 마시지 않고 물을 마시겠다고 한 것이다.
어린 소년들이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소년들을 귀히 여기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심어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며 다니엘 에게는 또
꿈과 환상을 깨달아 알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목숨을 건 도전을 한 이 소년들에게
모든 학문과 지혜를 주셔서 문학을 함에 능통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들이 머리를 뛰어나게 하여 천문학 지식이나 모든 면에서 뛰어나게 하셔서
모두가 감탄 할 만한 엘리트들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렇게 왕이 말한 3년이란 기한이 차서 왕의 앞에 나가 갔는데
느부갓네살 왕이 보니 과연 많은 무리들 가운데 그들 만큼 뛰어난 자가 없으므로
다른 모든 소년들을 제치고 다니엘과 세 친구가 최종적으로 왕앞에 뽑힌것이다.
느부갓네살 왕이 그들에게 학문에 관해 묻자
그들의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의 박수와 술객 보다도 십배나 나은줄을 알더라..
여기서 박수와 술객은 무당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박수는 히브리어로 '하르톰'이라 하는데 하르톰은 마술사나 점성술사
점쟁이 남자 무당을 뜻하는 말이지만 여기 바벨론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국정의 중요한 자리에 앉혀서 정사를 보게 하였다,
그러므로 바밸론에서는 특수한 관료 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지혜자로 볼수 있다.
술객은 아쇠프인데 주문을 외우는 이방신의 제사장이나 주술사를 뜻하지만
박수와 마찬가지로 바벨론의 특수한 지식층의 관료 집단을 가리킨다.
바벨론이 갈대아 학문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2천년 이상의 학문을
집대성한 책과 문서들 구전을 망라해서 지혜의 총 집합함 그 자체였다.
박수와 술객 그들은 최고의 천문학자들이고 과학자들이었고
지식층 중에서도 최고의 지성인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세 친구를 이 최고의 지식층의 사람들 보다도
더 열배나 뛰어난 소년들로 만들어서 그들 보다도 더 탁월하고 총명하게 하신 것이다.
거기다가 다니엘은 꿈을 해몽하는 지혜까지 더 주셨다.
그 당시 바벨론에서는 신들이 꿈을 통해서 계시를 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꿈을 잘 해몽하는 사람들이 대접 받던 사회였다.
그러나 정말 마지막 절이 가장 통쾌한 말씀이다..
21절에 보면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
기원전 605년에 포로로 잡혀 왔는데 바벨론이 망하는 그 날 기원전 539년..
거의 70년이 차가는 그때까지 포로로 잡혀 갔던 다니엘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느부갓네살 왕은 이미 25년 전에 죽어 버렸으니
느부갓네살 왕과 다니엘의 대결에서
느부갓네살 왕도 죽고 바벨론도 망하는 모습을 눈으로 보고
원수와 함께 오던 터널의 끝에는
다니엘이 의연히 승리자로 서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슬픈 것은..
결국 다니엘은 본인의 의사는 아니지만 바벨론의 체제하에 들어 갔었으므로
그는 부정한 사람이 되어서 귀환 할수가 없었고
페르시아의 고레스 원년까지 환관의 운명으로 그곳에 남아 있게 된 것이다.
거세를 당한 사람은 죄인이 되어서 거룩한 백성의 자리에 앉을수가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