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는 스포츠신문<굿데이>
기냥 신문보다 나오길레 올려봅니다 뭐 중요한건 아니지만 알구하면 더재미있지 않을까여 타팀들도 마니 있던데 반응이 좋으면 계속 업 하겠습니다...
아메리칸리그 38회 우승, 월드시리즈 26회 우승에 빛나는 뉴욕 양키스는 메이저리그 뿐만 아니라 미국 프로스포츠를 통틀어 최고의 명문으로 꼽힌다. 그렇다고 양키스가 처음부터 잘나갔던 것은 아니다.
양키스는 1901년 볼티모어에서 오리올스로 출발했다. 하지만 밴 존슨 아메리칸리그 회장은 뉴욕에 팀을 갖고 싶어했고, 이에 따라 1903년 뉴욕으로 이전, 하이랜더스라는 이름을 얻었다. 지금의 양키스란 명칭은 1915년에 와서야 굳어졌다.
양키스는 첫 20년 동안 2위 3번이 고작이었을 정도로 대표적인 약체팀이었다. 1904년에는 41승으로 20세기 최다승을 올려준 잭 체스브로의 활약에 힘입어 보스턴 필그림스(현 보스턴 레드삭스)와 끝까지 우승을 다퉜지만, 체스브로는 최종일 더블헤더 1차전에서 우승을 날려버린 폭투로 오히려 역적이 되고 말았다.
1914년 제이크 루퍼트가 구단주가 되면서 본격적인 투자가 시작됐다. 공교롭게도 루퍼트에게 양키스 구입을 권유한 인물은 이후 최대의 라이벌이 될 뉴욕 자이언츠(현 샌프란시스코)의 존 맥그로 감독이었다. 양키스는 이듬해부터 현재의 줄무늬 유니폼을 입었다.
1919년 시즌이 끝난 후,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건이 일어났다. 연극사업에서 막대한 손해를 입은 보스턴의 헨리 프레지 구단주가 특급 왼손투수이자 29홈런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베이브 루스를 양키스에 판 것. 프레지는 루스의 대가로 12만5,000달러를 받았다.
루스를 팔기 전까지 첫 20년간, 보스턴은 아메리칸리그 최다우승팀(6회)이자 월드시리즈 최다우승팀(5회)이었다. 특히 5번 나선 월드시리즈에서는 한번도 패하지 않는 괴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루스를 잃은 후 지금까지 83년 동안은 리그 우승 4회에 그쳤으며, 그나마 4번 나간 월드시리즈에서도 매번 이상한 일이 일어나며 모두 7차전 끝에 패했다. '밤비노의 저주'가 탄생한 것이다.
반면 리그 우승이나 월드시리즈 우승이 단 한차례도 없었던 양키스는 이후 1964년까지 44년간, 리그 우승 29회와 월드시리즈 우승 20회를 석권하며 보스턴으로부터 정상의 자리를 빼앗았다.
1920년 양키스는 3위에 그쳤지만, 루스는 혁명적인 54홈런을 터뜨렸다. 시즌이 끝나자 루퍼트 구단주의 두번째 중대한 결정이 단행됐다. 이번엔 보스턴에서 에드 배로 감독을 데려와 단장에 앉힌 것. 보스턴 감독 시절, 루스를 전업타자로 돌린 장본인인 배로는 보스턴에서 웨이트 호이트, 조 부시, 샘 존스, 에버렛 스콧, 조 더간, 허브 페노크 등의 주축선수들을 싹쓸이해왔다.
이듬해 양키스는 첫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루스는 58홈런 171타점으로 맹활약했다. 하지만 월드시리즈에서는 동향의 자이언츠에게 5승3패로 물러났다. 양키스는 그 이듬해에도 자이언츠에게 도전했지만 패배하기는 마찬가지.
1923년 양키스타디움이 개장되면서 자이언츠 폴로그라운즈에서의 셋방살이를 끝낸 양키스는 자이언츠를 꺾고 마침내 26회 우승의 시발점이 된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양키스는 이듬해 월터 존슨의 워싱턴 세너터스(현 미네소타)에 밀려 2위에 그쳤고, 1925년에는 루스가 부상으로 결장하며 7위로 추락했다. 그러나 1루수 루 게릭과 중견수 얼 콤스, 2루수 토니 라제리가 등장하면서 '살인타선(Murderer's Row)'의 기초가 다져졌다. 1926년에는 다시 전력을 회복, 월드시리즈에 도전했지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4승3패로 분패했다.
1927년은 '살인타선'의 해였다. 60홈런의 루스를 비롯한 양키스의 타자들은 총 158개의 홈런을 날렸는데, 양키스를 제외한 아메리칸리그 7개팀이 평균홈런은 40개에 불과했다. 27년의 양키스는 31년의 양키스, 76년의 신시내티 레즈와 함께 역사상 3대 강타선으로 꼽힌다. 양키스는 월드시리즈에서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를 4연승으로 꺾었고, 이듬해에도 세인트루이스에게 4연승 우승을 따냈다.
하지만 이후 3년간은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현 오클랜드)에 막혀 월드시리즈에 나서지 못했다. 1927년부터 32년까지의 6년간, 아메리칸리그는 양키스와 어슬레틱스 간의 전쟁터였다. 둘은 나란히 3번씩 우승을 차지했으며, 그 중 5번은 서로 1·2위를 나눠가졌다. 당시의 어슬레틱스에는 레프티 그로브, 알 시먼스, 지미 팍스, 미키 코크린, 조지 언쇼, 맥스 비숍 등의 스타선수들이 빼곡했다.
1929년에는 12년간 양키스를 이끌었던 밀러 허긴스 감독이 시즌 중 폐혈증으로 사망하는 안타까움 있었지만, 빌 디키가 등장해 양키스 안방의 전통이 시작되는 기쁨도 있었다. 허긴스의 지휘봉은 1931년 조 매카시에게로 넘어갔다. 매카시는 이후 15년간 7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매카시 감독의 2번째 해인 1932년, 양키스는 어슬레틱스의 리그 4연패를 저지한 다음, 월드시리즈에서 시카고 컵스를 4연승으로 격파하며 월드시리즈 14연승을 기록했다.
1934년을 끝으로 노쇠해진 루스가 보스턴 브레이브스(현 애틀랜타)로 떠났지만, 2년 뒤에는 조 디마지오가 등장, 루스를 대신해 게릭과 원투펀치를 이뤘다. 양키스는 디마지오가 출현한 1936년부터 39년까지 월드시리즈 4연패의 대업을 이뤘다. 특히 38년과 39년에는 신시내티와 컵스를 4연승으로 격파하면서 1923년부터 기록한 8차례 우승 중 무려 5번을 무패우승으로 이끌었다.
당시 양키스에는 디마지오 이외에도, 2루수 조 고든, 3루수 레드 롤페 외야에 조지 셀커크, 찰리 켈러 같은 강타자들이 버티고 있었으며, 마운드에는 레프티 고메스를 비롯한 강속구투수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1939년 루 게릭은 불치명에 걸려 눈물의 은퇴식을 치르고 그라운드를 떠났다.
1940년 3위로 잠시 주춤했던 양키스는 이듬해 걸출한 유격수인 필 리주토가 등장하면서 동향의 브루클린 다저스를 꺾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양키스는 1942년에도 월드시리즈에 나섰지만 세인트루이스에게 4승1패로 패해 월드시리즈 9연속 우승을 저지당했다. 하지만 이듬해의 월드시리즈에서는 세인트루이스를 꺾고 설욕에 성공했다.
세인트루이스는 다저스와 함께 월드시리즈에서 양키스의 발목을 가장 많이 잡아본 팀이다. 하지만 다저스의 대 양키스전적이 3승8패인 반면, 세인트루이스는 3승2패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
1947년 팜디렉터였던 조지 와이스가 단장으로 승격되면서 양키스는 팜시스템과 트레이드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게 된다. 요기 베라가 디키의 뒤를 이은 이 해, 양키스는 다저스를 꺾고 다시 월드시리즈를 우승했다.
1949년 와이스 단장은 트리플A에서 무명의 케이시 스탱걸을 데려와 감독에 앉혔다. 와이스의 선택은 탁월했다. 양키스는 스탱걸 부임 후 1953년까지 월드시리즈를 5연패, 4연패 기록을 경신했다. 스탱걸은 71세로 은퇴한 1960년까지의 12년 동안 10번의 리그 우승과 7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1952년에는 미키 맨틀이 주전으로 도약, 전년도에 은퇴한 디마지오의 뒤를 이었다. 통산 536홈런으로 스위치히터 최다홈런기록을 갖고 있는 맨틀은 메이저리그 최장거리홈런기록(172m)의 보유자이기도 하다. 1953년에는 군복무를 끝낸 화이티 포드가 양키스의 새로운 에이스로 떠올랐다. 포드는 1963년까지 양키스에서만 풀타임 14시즌을 뒤며 월드시리즈의 최다승투수(10)가 됐다.
1954년 양키스는 12년만의 최다승인 103승을 올렸음에도 111승의 클리블랜드에게 리그 우승을 빼앗겼다. 이듬해에는 리그 타이틀을 탈환했지만, 월드시리즈에서 '55년의 다저스'에게 패했다. 하지만 양키스는 1956년 월드시리즈에서 다저스에게 퍼펙트게임의 수모를 선물하며 타이틀을 되찾아왔다.
양키스는 1957년 워렌 스판-행크 애런-에디 매튜스의 삼각편대가 이끈 밀워키 브레이브스(현 애틀랜타)에게 7차전 끝에 월드시리즈 타이틀을 내줬지만, 곧바로 이듬해 7차전 승리로 복수했다. 양키스는 1942년, 1955년, 1957년 월드시리즈에서 각각 세인트루이스, 다저스, 브레이브스에게 패한 후, 바로 그 이듬해 같은 팀을 상대로 복수에 성공했다.
1960년 양키스는 캔자스시티 로열스에서 로저 매리스를 영입해 공포의 'MM포'를 구축했다. 하지만 월드시리즈에서는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 득점수에서 55:27로 앞서고도 우승을 내주는 황당한 경험을 했다. 피츠버그의 2루수 빌 마제로스키는 7차전에서 극적인 9회말 끝내기홈런을 날렸다.
1961년은 매리스와 맨틀의 홈런대결로 양키스타디움이 후끈했다. 매리스는 결국 61홈런으로 루스의 홈런기록을 34년만에 경신했지만, 포드 프릭 커미셔너는 그 사이 경기수가 늘어났다는 것을 핑계로 매리스의 홈런기록 옆에 별표를 붙였다. 월드시리즈에서 신시내티를 꺾은 양키스는 이듬해에도 샌프란시스코로 연고지를 옮긴 자이언츠를 격파했다. 하지만 1963년과 64년에는 각각 다저스와 세인트루이스에게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1964년 CBS가 구단주가 된 이후 양키스는 11년간 2위 2번에 그치는 최악의 침체기를 보냈다. 1965년에는 40년만에 5할승률에 실패했으며, 이듬해에는 54년만에 꼴찌 추락의 쓴맛을 봤다.
1973년 선박 재벌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구단을 매입하면서 양키스에 다시 봄날이 찾아왔다. 스타인브레너는 1루수 크리스 챔블리스, 3루수 그레그 네틀스를 영입하며 전폭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이후 양키스는 6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추가하며 최고명문의 위치를 되찾았지만, 방법 면에서는 예전과 사뭇 달랐다. 예전의 양키스 제국이 탄탄한 팜시스템과 현명한 트레이드로 건설됐다면, 스타인브레너의 양키스는 무수한 FA선수들의 영입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빌리 마틴 감독의 풀타임 첫 해인 1976년, 양키스는 동부지구 1위에 오른 후 챔피언십시리즈에서 캔자스시티를 꺾고 12년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오랜만에 나간 월드시리즈에서는 '빅레드머신'의 신시내티에게 4전전패로 물러나는 망신을 당했다. 양키스가 월드시리즈에서 전패로 물러나기는 다저스에 당한 1963년 이후 2번째. 자존심이 상한 스타인브레너는 FA시장에서 레지 잭슨을 영입했다.
이듬해 양키스는 잭슨-챔블리스-네틀스-서먼 먼슨으로 이어진 타선이 위력을 발휘하며 14년만에 100승을 돌파했다. 또한 챔피언십시리즈에서 최종전 끝에 캔자스시티를 물리친 후 월드시리즈에서 다저스를 꺾고 15년만에 월드시리즈 타이틀을 찾아왔다. 잭슨은 최종 6차전에서 '초구홈런 3방'을 날려 '미스터 10월'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78년 양키스는 동부지구 1위 결정전 단판승부에서 유격수 버키 덴트의 깜짝 3점홈런으로 보스턴 레드삭스에게 '밤비노의 저주'를 선물했다. 챔피언십에서 캔자스시티를 누르고 월드시리즈에서 다저스를 꺾은 것은 1977년과 마찬가지. 하지만 1979년에는 양키스의 포수이자 주장이었던 먼슨이 비행기 사고로 요절하는 불운한 사건이 일어났다.
1980년 양키스는 동부지구를 우승하고 챔피언십에 나갔지만, 이번에는 캔자스시티에게 3연패로 물러났다. 이듬해에는 사상 최대규모계약으로 데이브 윈필드를 영입한 후, 4자간의 플레이오프에서 밀워키 브루어스와 오클랜드를 연파하고 월드시리즈에 나갔지만 다저스를 넘지 못했다.
양키스는 이후 토론토-보스턴-디트로이트-볼티모어에 밀리며 지구 중하위권에 머물렀다. 1루수 돈 매팅리만이 썰렁해진 라인업에서 고군분투했다. 매팅리는 양키스가 리그 우승을 차지한 이듬해인 1981년에 데뷔하고, 월드시리즈를 차지하기 바로 직전인 1995년에 은퇴함으로써, 역대 양키스 스타 중 하나의 우승반지도 얻지못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됐다.
1992년 벅 쇼월터가 감독에 앉으면서 점차 전력이 다져지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3년간 소유권을 잃었던 스타인브레너가 다시 구단주의 위치를 회복했으며, 지미 키, 폴 오닐, 버니 윌리엄스가 등장했다. 양키스는 1995년 와일드카드를 따내며 15년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지만, 쇼월터 감독은 스타인브레너와의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애리조나의 창단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1996년에 부임한 조 토레는 쇼월터와 달리 괴팍한 스타인브레너를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 해 유격수 데릭 지터와 셋업맨 마리아노 리베라가 등장했으며, 시애틀에서 티노 마르티네스와 제프 넬슨이 건너왔다.
동부지구 우승을 차지한 양키스는 챔피언십시리즈 1차전에서 지터의 플라이타구를 잡아 홈런으로 만들어준 12세 소년 덕에 볼티모어를 격파하고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는 첫 2경기를 모두 내준 후 3차전에서도 7회까지 2-1로 뒤졌지만, 8회초에 터진 포수 짐 레이리츠의 역전 3점홈런을 발판으로 내리 4연승, 18년만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양키스는 이듬해 와일드카드로 포스트시즌에서 나섰다가 디비전시리즈에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게 패했다 하지만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월드시리즈 3연패를 달성하며 3번째 제국의 건설에 성공했다. 이 기간 동안 양키스는 데이빗 콘(95) 데이빗 웰스(97) 올랜도 에르난데스(98) 로저 클레멘스(99) 마이크 무시나(2001) 등 FA시장에거 주로 거물 투수들을 데려와 재미를 톡톡히 봤다.
지난해 양키스는 통산 3번째 월드시리즈 4연패에 도전했지만, 랜디 존슨-커트 실링의 원투펀치를 앞세운 애리조나에 패했다. 양키스는 제이슨 지암비를 영입하며 탈환을 노렸던 올해에도 애너하임 에인절스에게 충격적인 디비전시리즈 패배를 당했다.
올시즌으로 양키스의 총연봉은 1억2,000만달러를 돌파했다. 이는 최하위 탬파베이 데블레이스의 4배에 달하는 규모다. 양키스가 계속되는 '돈 퍼붓기'로 지금의 위치를 유지할지, 올시즌을 계기로 체중감량에 나설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첫댓글 이팔청춘님 감사함니다 그런데 이런글 바로 복사해서 해주시지마시고 이왕이면 정리 쫌 해서 올려주세여.. 글이 길면 머리 아파서요...;;
양키스가..이렇게 최강팀으로 성장한것도 다 그만큼의 노력이있었기 때문이군요...좋은자료 감사합니다.^^
스크롤바의 압박...
베이브 루스가 투수엿군요;;몰랏는데..
핸리 브레지 단장...... '니돈으로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