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골 마을의 변화
靑山 손병흥
유난히도 춥고 긴 겨울이 지나간 뒤에, 마침내 반가운 얼굴로 다가선 어느 산촌의 봄날 하루 풍경은, 온통 푸른 싹이 돋아나고 꽃들이 피어나는, 온갖 봄꽃들의 향연이 마구 펼쳐졌다.
하지만 겨우 시골 중학교를 마친 뒤 열여덟 나이에 호구지책으로 일자리를 찾아서 고향을 떠나, 그저 각박한 도시 생활 속의 고단하고 외로웠던 삶을 성실하게 영위하는 동안에, 어느 조그마한 공장에서 프레스공 기능직 직공으로 일을 하다가, 오로지 자신의 순간적인 방심과 실수로 인해, 불행하게도 중지 일부가 훼손된 절단 사고를 당한 뒤에, 병원에 입원하여 그야말로 가슴 쓰리고 뼈아픈 수술과 입원 치료를 받고 나서, 그저 떠밀리듯이 그렇게 떠나왔던 고향 땅을 다시금 요양차 밟게 되었다.
그 뒤에 어느 정도 몸과 마음을 추스린 뒤에, 재차 외지로 나갈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잦은 병마에 시달렸던 부친과의 갑작스러운 이승에서의 영원한 이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그냥 그곳에 눌러앉게 되었다.
그 이유인즉슨 그 당시 몇 살 위의 누님이 먼 곳으로 시집을 가버렸던 처지였던지라, 부득이 다소 왜소한 어머님을 도와 집안일과 농사일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긴 했을지언정, 물론 그만큼 그의 마음 역시 쉽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아주 혼란스럽고 무겁기만 하였다.
그것은 그동안 고되고 힘들게 시리 삶의 터전을 갈고 일구면서도, 어렵고 궁핍하게만 살아가시던 부모님의 고단했던 삶과 일상적인 생활 속 풍경이, 마치 그의 뇌리를 영사막처럼 순간적으로 스치며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날따라 산천초목을 적시며 아주 조용하게 내리던 빗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으레 마을 뒷동산에 올라가 소에게 풀을 뜯어 먹여가며, 소동 친구들과 마음껏 뛰어놀았던 청소년기의 그 시절이 저절로 생각나는 것이었다.
하기 사 몇십 호밖에 되지 않는 동네였던지라, 모두가 정겨운 이웃사촌처럼 정답게 지내며 살아가던, 인심만큼은 철철 넘쳐났던 곳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간 한푼 두푼씩 모아뒀던 통장을 털어, 먼저 낡아버린 본 채를 헐고서 양옥으로 새집을 짓고, 사랑채는 옛 모습 그대로 둔 채 다소 리모델링을 하여, 집안에 놓여있었던 비록 볼품없고 자질구레한 가구들과 함께, 다소 민속적인 생활소품들도 정성껏 소중하게 보관을 하였다.
그리고 가끔씩 그 방에 군불을 지펴 뜨끈해진 방에서 낮잠을 자거나, 향수에 젖어 추억을 회상하면서 철없던 개구쟁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곤 하였다.
낡고 쓰러져 가던 흙벽의 목조 건물이, 비의 장막에 가려진 저편의 자연스런 풍경과 함께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면서, 그동안 잊고만 살았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아 계시던 생전의 옛 추억들도, 새록 새록 소환이 되어 떠오르기도 하였다.
비록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났을지라도 그 시절의 생활상을 떠올리면 마냥 빗소리처럼 울림이 되었고, 그 마음 한구석에는 조금씩 빗물이 스며 흐르는 것만 같았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철이 없었던 어린 시절은, 언제나 그 모습과 모양새로 비에 젖어 늘 한 켠에 머물러져 있었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마음껏 회상에 젖어 들었던 어느 봄날에, 그는 이웃집으로 이역만리 필리핀에서 결혼이민자가 된 동네 형님의 형수가 찾아와서, 자기가 참한 처녀를 한사람 소개할 테니, 한번 만나볼 의향이 있느냐고 하는 말을 하였다.
하긴 그 형님 역시도 사십을 넘긴 나이에 어렵사리 국제결혼을 한 처지였고, 그는 아직 삼십 대 중반밖에 되질 않기에, 오로지 외로움은커녕 고된 농사일과 유실수인 사과나무도 심고 가꾸며, 부농을 꿈꾸고 있던 처지였던지라 아예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어쩌다 어머님이 나도 외손주가 아닌, 이젠 친손주를 보고 싶다고 중얼거리시던 혼잣말을, 내심 들어왔었던 참인지라 가슴이 콩 딱 그려지기도 하였기에, 잠시 마음이 들뜨고 혼란스럽기도 하였다.
물론 원앙새와 같은 짝을 만나 알콩달콩 잘 살고픈 마음이야 가득했지만, 그간 벌여 놓은 일들과 일련의 바쁜 농사일들로 인해 쉽게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이번 기회에 생각을 곰곰이 해보라고 하시던 그 형수는, 남들보다도 우리나라 말을 빨리 익혀 의사소통을 쉽게 잘할 수가 있었고, 동네에서도 부지런하고 살림도 알뜰하게 잘하며, 슬하에 애들도 아들과 딸을 낳아 슬기롭게 잘 양육하면서 기르고 있었다.
물론 나도 그 형수처럼 항상 표정이 밝고 친절하며 싹싹한 사람이 있다면, 참 부럽고 좋을 것 같다고 하는 생각은 짐작에부터 갖고는 있었다.
더군다나 서로 알뜰살뜰하게 살림을 꾸려, 슬하에 떡두꺼비 같은 아들자식과, 토끼 같은 귀엽고 발랄한 딸도 갖고 싶은 바람과 욕망은, 늘 간직한 채 도사리고 있었다.
휴일이 따로 없이 어쩌다 가끔 비가 오는 날에만 일을 쉬는 날인지라, 연로하신 어머님이 솥뚜껑을 뒤집어 정성으로 부쳐주시던 파 부침개와 함께 막걸리도 마시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왠지 가슴 한쪽이 어쩐지 다소 허전해지기는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여느 사람들처럼 애주가(愛酒家)는 아니었을지라도, 별도의 취미생활은 하지 않은 채 그저 자주 음악을 들으며, 마냥 무미건조한 삶을 영위해 나왔던 그였기에, 조금씩 밀려오는 외로움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홀로 잔을 들어 한 방울도 아까워서 흘러내리지 않도록, 그는 혀끝으로 마지막 잔을 핥을 때도 있었다.
물론 엄한 가정에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성격마저도 비교적 온순하고 다소 내성적인 성향을 갖춘 사람이었던지라, 쉽사리 남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선뜻 말을 걸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도시 생활과 사람들과의 친교와 교류를 통해서, 그나마 자신의 소신과 할 말조차도 꾹 참지 않고 내뱉을 정도로 성격이 조금은 바뀌었다.
요즈음은 다소 멋쩍지만 슬쩍 웃으며 이따금 한 번씩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여전히 아직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에 쌓여, 내가 먼저 숨이 막힐 것 같기도 하였다.
그는 사치는커녕 옷소매와 깃이 너덜너덜할 정도로 낡은 작업복을 입고서 살았고, 시골 장날 일지라도 뚜렸한 일이 없으면, 비록 읍내 나들이조차도 아예 삼갔다.
그러다보니 그의 차림새는 온통 구제품이나, 군복을 검게 물들인 차림새로 사계절을 지냈을 정도로, 전혀 사치와 낭비와는 도통 거리가 멀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구두는 신발장에 고이 모셔둔 지가 꽤 오래되었고, 단벌인 양복 역시도 옷장 속에 그저 고이 모셔둔 지 오래되었다.
그나마 불철주야 일이 있으면 몸을 움직이고야 마는 성미였기에, 키도 크고 여전히 개미허리처럼 중간이 잘룩 하였고, 옷을 걸쳐 입어도 배가 나와 단추가 잘 잠겨지지 않는, 그런 불편한 일은 아직 발생하질 않았다.
그런데 어느 땐가부터 남들에게 손가락 끝이 뭉뚝해진 것을 감추려고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걷는 버릇이 생겨났다.
그런 연유를 잘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가끔씩 건방지다고 하는 오해를 받거나 지적을 당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의 고질적인 버릇을 고쳐 나가기는 커녕, 아예 그동안에 아주 안 좋은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건 남들이 입을 뗄 만큼 꼭 고쳐야 할 버릇이었건만, 그보다도 남들에게 뭉툭해진 손가락을 좀처럼 내보이기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작은 열등의식이 더욱 성실함과 열정을 불러일으켜, 남들보다도 더 열심히 아껴가며 절약해서 살아가고자 하는 소중한 원동력이 되었다.
어쩌다 명절을 맞아 고향을 찾는 사람들로부터, 그동안 무얼 하며 어떻게 지냈느냐고 하는 말을 듣고서도, 그저 미소를 지으며 그럭저럭 잘 지내노라고 거리낌 없이 둘러댔다.
정든 고향 땅에서 부모님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사는 것도, 아주 헛일은 아니며 보람찬 일이라고 하면서, 되려 웃으며 하루빨리 힘든 타지 생활 접고, 함께 와서 같이 어울려 이웃으로 살자고 부추길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이젠 농촌도 과거와는 달리, 점차 기계화 영농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농민후계자가 되어 정부지원금과 이런저런 혜택들도 받을 수 있으므로, 그럭저럭 살만하다고 먼저 설득을 할 정도였다.
물론 그 역시도 연로하신 동네 어르신들의 논밭을 위탁받아 농기계로 영농을 하면서, 본의 아니게 벌써 부농이 된 기분으로 늘 농사일에 전념했다.
그에게 어떤 숙명적이고 운명적인 일임을 감지하며, 혼자서 감당할 수 없을 때까지 일머리와 일손을 놓질 않았다.
남들로부터 대체 어떻게 그처럼 힘든 농사일을 마다하지 않느냐고 하면,‘어디 제가 일을 합니까, 기계가 다하지.’하면서, 일감이 있으면 무조건 맡겨 달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동네방네 크고 작은 일들은 아예 그의 몫이 되어버렸고, 타고난 성실성과 책임감으로 인해, 다들 안심하고서 일거리를 맡기곤 하였다.
이구동성으로 진솔하고 성실했던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 부전자전이라고들 하면서, 부디 건강 해치지 말고 조금씩 일을 줄여나가라고들 당부를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군말 없이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꽤 잘하더니, 다들 일찌감치 농사꾼으로 떡잎부터 알아봤다고 하는 말도 들었다.
어렸을 적에도 그는 다른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달리, 논두렁과 밭두렁을 넘나들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부모님의 일손을 도우면서 자랐다.
그 사이 삼십여 년이라고 하는 세월이 흐르고 보니, 자연스레 그의 모습은 일벌레가 되어 현장을 숨 쉴 새도 없이 마구 넘나들었다.
그다음 해에 주민들이 이구동성으로, 요새 다른 마을에도 젊은 이장이 하나둘씩 생겨나듯이, 우리 마을 이장일도 맡으면 너무 잘할 것 같다고들 하면서, 몇 번이나 손사래를 쳤건만 그를 덜컥 추대하여 이장직을 맡겨버렸다.
물론 아직 미혼이고 홀로 되신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형편인지라 거절하였지만, 그야말로 정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는 지나간 세월과 자기 나이에 비추어서, 단지 속어림으로만 따져 보아도 무척 힘에 겨운 일이겠지만, 이왕지사 맡게 된 이상 더욱더 온 정성을 다해서 봉사를 하겠다고 하는 심정으로 다짐을 하였다.
그런데 거듭하여 이웃집의 그 형수가, 그간 암만 생각해도 인물이 너무 아까워서 그런다며, 혼사에 관한 말을 재차 되풀이를 하였다.
그리고는 휴대폰을 꺼내어 어여쁜 예비 신부감의 모습이 담긴 문제의 동영상을 보여주었지만, 그는 아예 고개를 흔들어 대며 재빨리 자리를 뜨려고만 하였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그녀의 행동에 당황하여, 그는 무슨 뜻인지는 잘 알겠지만, 자기는 아직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다고 했다.
하기 사 애초에 시골인 농촌으로 시집을 오겠다고 하는 아가씨가 없기도 했지만, 오로지 못다 이룬 부농의 꿈에 대한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는, 아예 혼인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던 그였다.
그쯤에서 일찌감치 중신에 관한 포기를 하라고는 했지만, 막상 어쩌다 문득 영상 속의 그 아가씨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기도 하였다.
비록 너무 일에 파묻혀 지낸다고는 하지만, 수확 철인 가을 추수기가 지나 다소 한가해진 농한기에는, 그 역시도 동네일 말고는 내내 집안일에만 매달렸다.
그럭저럭 시간이 흘러 어느덧 봄이 오고 가을이 지나 다시 겨울에 접어든 어느 날, 이번에는 믿고 따랐던 동네 형님이 연말을 겸해서 처가 나들이를 할 때 여행을 함께 가자고 하면서 그를 부추겼다.
내심 못 이기는 척하고 다녀오고픈 마음이 있었지만, 냉큼 그럴 수는 없었기에 일단 거절부터 하고야 말았다. 그러다가 어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이번에는 좀처럼 입을 떼지 않으시던 모친까지도, 해외여행 삼아 바람도 쇨 겸해서 다녀오라고 권유를 했다.
물론 이 역시도 나중 에사 그 형수가 이미 짜놓은 각본에 따라서, 다들 쿵짝으로 움직였음을 알게 되었다. 하여튼 우여곡절 끝에 현지에서, 어느 정도 한국말을 익혀왔던 그녀와의 만남을 갖게 되었고, 다소 어색하나마 둘만의 소중한 데이트도 하였다.
귀국한 뒤로는 자주 영상통화를 하면서 연정의 끈을 이어 나갔고, 그 이듬해 수확을 끝낸 시점에 날을 받아 일사천리로 국제적인 혼인을 치렀다.
그렇게 해서 아내를 맞은 그가, 지금 이젠 어엿한 초등학생이 된 사내아이의 아빠가 되어, 다소 나름의 삶에 대한 경제적인 여유까지도 생긴 지라, 가정 공용으로 중형승용차도 구입하여 안팎 간에 번갈아 운행을 하며 지냈다.
더군다나 나이도 아직 젊고 대학까지 나왔던 그의 아내는, 이젠 어엿한 원어민교사로 학교에 취업까지도 하였다.
단지 그의 모친은 이참에 아들이든 딸이든 자식을 하나 더 낳았으면 했지만, 좀처럼 그 말에 대한 시원스런 대답이 없는 것이 몹시 안타까울 뿐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그때 떠밀리듯 서둘러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지금같이 오순도순 단란한 가정을 꾸릴 기회조차 없었을 것 같다고 하는 생각도 내심 얼핏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덩굴 째 굴러온 호박덩이처럼, 그다음 해에 아주 귀엽고 예쁜 딸까지도 낳아, 온 가정에 활짝 웃음꽃이 피어났다.
아울러 뒤늦게 사 이런저런 사정으로 도회지 생활을 접고서 귀촌한 사람에게 마을 이장직을 넘겼지만, 한사코 지속적으로 우리 마을을 잘 가꾸며 살게 해달라고 하는 주민들의 신임으로 새마을지도자가 되었으며, 그를 따라 한두 집씩 사과나무를 식재하고 영농재배 기술을 습득하여, 이제는 마을회관 옆에 공동창고도 짓고 출하도 하는등 ‘사과작목반까지도 생겨날 정도로 과수 재배의 활성화가 되었다.
이처럼 힘든 삶의 고비와 우여곡절을 겪어가면서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일종의 끈기와 인내의 근성이야말로, 타인들로부터 변화와 할 수 있다고 하는 자신감과 성취감을 갖게끔 해주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합심하여 비록 힘들더라도 우렁이를 통한 제초작업까지 하면서 농사를 짓는, 이른바 친환경 벼농사를 지어 ‘메뚜기쌀’도 생산하고, 저농약으로 재배한 과일도 출하하여 주민들의 소득을 상승시켰다.
그러자 오래전에 정든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 중에서도, 정년이 지난 뒤에 귀농과 귀촌을 하는 행렬마저 이어져, 이젠 시골 소재 마을치고는 꽤 가구 수가 늘고 인구수도 늘어났다.
거기에다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마을회관 옆의 공터에, ‘노인회관’도 건립하고 안마기도 들여놓았다. 이제는 노인이 살기 좋은 친환경적인 마을로 거듭나게 되었고, 너나 할 것없이 일심단결하여 대소사를 챙겨가며, 마치 한 가족처럼 단합하고 화목하며 잘 지내게 되었다.
언론을 통해 인구소멸로 인해 사라져 가는 시골 동네가 많아진다고들 하지만, 소문을 듣고서 시골살이를 자처한 타지인들까지도 생겨나, 모처럼 마을에는 따스하고 온화한 생기마저도 마구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