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신부는
“잘 잤느냐?”
결혼식 날 아침이 밝자마자 영친왕은 덕혜를 찾았다.
“네, 오라버니.”
오늘따라 덕혜의 대답이 순했다. 그것이 영친왕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오늘은 유난히 새들이 곱게 지저귀는구나.”
누가 보아도 치욕스러운 결혼이었다. 그렇다 해도 평범하고 행복한 여인으로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죄가 아닐 것이다.
“오라버니, 아무 걱정 마세요.”
오히려 덕혜가 영친왕을 위로했다. 영친왕은 덕혜의 등을 가만히 쓸어주었다.
순백의 실크 원피스가 하얀 피부와 잘 어울렸다. 목에 걸린 영롱한 빛의 진주목걸이는 더없이 우아했다. 영친왕은 덕혜의 자그마한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
“준비되면 나오너라.”
영친왕이 방을 나가자 복순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복순은 덕혜에게 바투 다가가 귀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결혼식이 있기 직전에 거사가 있을 것이라 하옵니다.”
은밀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덕혜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오늘만 잘 견디어내면 되겠구나.”
“잘 다녀오십시오.”
복순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 들었다.
덕혜를 만나고 돌아온 구국청년단 단원들은 세워두었던 계획을 다시 한 번 면밀히 검토했다. 만일을 대비해 가짜 덕혜 노릇을 해야 할 수도 있기에 복순이 입을 의복까지 준비해두었다. 그들은 결혼식장을 거사 장소로 삼았다. 사람들의 눈이 많은 곳일수록 오히려 주의가 산만한 법이다. 이동 중에는 경계가 삼엄했고, 자칫 옹주를 다치게 할 수도 있었다. 차라리 결혼식장의 혼란을 틈타 조용히 빼내는 게 상책이라 판단했다.
“나 좀 어디 다녀와도 되겠소?”
기수가 박무영에게 물었다. 무영은 촌각을 다투는 이때 웬일이냐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녀와서 말씀드리리다.”
무영은 기수가 허튼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수는 모자를 챙겨 들고 단원들의 비밀 아지트를 나섰다.
기수는 형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일본에 온 뒤 수소문을 해서 형의 행적은 알아냈지만, 형을 만날 용기는 없었다. 그토록 보고 싶은 형이었건만 일본군의 앞잡이로 지내는 그를 만났을 때 자신이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알 수 없었다.
기수는 형이 자주 드나든다는 식당 앞 길목 모퉁이에 자리 잡았다. 조금 뒤 식당을 나서는 무리들에 섞여 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더 살이 오르긴 했지만, 형이 틀림없었다. 기수는 자신도 모르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갑수를 불렀다.
“형.”
그 소리가 들릴 리 없건만 갑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던가. 갑수도 동생의 기운을 느꼈는지 모른다. 기수는 갑수 무리를 은밀하게 뒤따랐다. 헌병대 앞에서 갑수는 일행과 헤어져 홀로 걸었다. 기수는 적당한 곳에서 형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리라 마음먹었다. 갑수는 기수가 뒤따라오는 걸 아는 것처럼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건들건들 걷는 폼이 영락없는 건달이었다.
저렇게 버젓이 활보해도 되는 건지 기수는 의문스러웠다. 갑수의 전력을 아는 유학생들이나 구국청년단원들이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을 터인데. 손을 봐주겠다며 벼르고 있다는 걸 갑수가 모를 리 없을 터인데.
갑수는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때 기수는 자신처럼 누군가가 갑수 뒤를 쫓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모자를 깊이 눌러쓴 두 명의 사내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기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갑수는 이미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미행당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구나. 형은 내가 저들과 한패인 줄 알겠지?’
기수는 잠시 고민했다. 저들을 가로막아 형이 도망칠 틈을 마련해줄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모른 척할 것인지. 잠시 고민하던 기수는 곧 고개를 저었다. 친형이었다. 모른 척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갑수를 노리는 사람들이라면 동지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들을 해코지하는 척할 수도 없었다. 진퇴양난이었다.
그때 갑수가 옆으로 난 골목으로 꺾어져 들어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사내들이 달려갔다. 갑수 뒤쪽에서 따라오던 사내들이 기수를 밀치고 달려갔다. 기수도 그들을 뒤따랐다. 그들이 품에서 권총을 꺼냈다. 기수는 마음이 급했다.
기수는 갈림길에서 멈췄다. 앞서 달려갔던 사내들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갑수는 보이지 않았다. 영리하게도 사내들을 따돌린 듯했다. 사내들의 얼굴에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불쾌한 표정도 그대로 드러냈다. 기수는 고개를 숙였다. 사내들은 품에서 꺼내 들었던 권총을 넣고 다시 두 패로 나뉘어 흩어졌다.
기수는 형이 사라진 골목을 바라보았다. 옆 담장은 쉽게 뛰어넘을 수 없을 만큼 높았다. 설령 그 담을 넘었다 해도 사내들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으리라. 골목 끝은 막다른 곳이었다. 사내들은 막다른 골목이기에 반대편으로 넘어갔을 거라 추측한 것 같았다. 하지만 기수는 갑수가 골목 어디엔가에 숨어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직감이었다. 그는 천천히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어딘가에서 갑수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권총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기수는 골목 끝까지 갔다. 그러나 형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가 되돌아 나오려 할 때 그의 관자놀이에 차가움 총구가 느껴졌다.
“나를 노리는 놈이렷다!”
기수는 가슴이 떨렸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형의 목소리인가. 기수는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형 나 기수야.”
기수는 관자놀이에서 총구가 슬며시 떨어져 나가는 걸 느꼈다.
“고개를 돌려라.”
눈앞에 있는 사람이 동생이 맞는다는 걸 확인한 갑수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갑수의 얼굴에 분노가 떠올랐다.
“너도 나를 죽이러 온 거냐?”
기수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자들은 나도 모르는 사람들이야. 난 그저 형을 만나보고 싶었을 뿐이야. 공교롭게도 비슷한 때에 그자들과 마주쳤던 것뿐이야.”
갑수가 총 든 손을 내려놓더니 비웃음을 흘렸다.
일본까지 와서 총을 지니고 다니는 걸 보니 독립운동 운운하는 녀석들과 한패인 게 분명하구나, 어리석은 놈, 네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어서 돌아가라.”
“형, 우리 거의 10년 만이야. 그런데 할 수 있는 말이 겨우 그것뿐이야?…… 보고 싶었어.”
“흥, 날 죽이러 온 게 아니라면 나를 설득하러 온 거겠지. 나는 설득당할 사람이 아니다.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한번 떵떵거리며 살아보겠다고. 진득하게 조선에 붙어 있을 것이지 왜 여기까지 온 거냐?”
기수는 마음이 아팠다. 다투기 위해 만나려고 했던 게 아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목숨의 위협을 받아온 탓인지 형은 쉽게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어차피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만남이었다. 기수는 형에게 사실대로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형, 나 내일이면 죽을지도 몰라. 그래서 형을 만나러 온 거야. 형이 어떻게 사는지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 하지만 형을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았어. 그런데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니 꼭 만나고 싶어지더군.”
갑수의 눈빛이 잠깐이나마 흔들렸다. 하지만 여전히 비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천황 암살이라도 계획한 거냐? 내 장담하건대 반드시 개죽음을 당할 것이다. 포기해라.”
기수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옹주마마를 구출할 생각이야. 결혼식장에서. 모든 계획을 세웠고 준비도 마쳤어. 조금 뒤면 거사가 시작될 거야. 시간이 별로 없어.”
갑수의 눈빛이 조금 더 흔들렸다. 기수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깨달은 듯했다.
“넌 어렸을 때나 자라서나 어리석은 건 똑같구나. 덕혜옹주? 그 여자가 대체 뭐 길래 목숨을 건다는 거냐?”
“그렇게 말하지 마. 형이 아무리 일본인 행세를 해도 형의 몸속에 흐르는 피는 조선인의 것이야. 우리 부모님도, 할머니 할아버지도 그 피를 타고 태어났어. 조선인이라면 마땅히 독립을 위해 일해야 해. 옹주마마는 황족이야. 황족을 구출하는 건 일본 놈들 아래에서 고통 받는 민족의 사기를 높이는 일이야. 일본 놈과의 혼사는 옹주마마만의 수치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수치이기도 하니까.”
“포기해라.”
“아니, 못 해.”
“포기 해!”
“내 목숨이 안타까워서 그렇게 말하는 거지? 형을 만나러 오길 잘했네..”
“개자식.”
갑수는 으르렁대듯 한마디를 내뱉은 뒤 뒤돌아섰다. 기수는 허탈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별러왔던 만남인가. 그런데 정작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한 채 보직의 비밀만 누설해버렸다. 하지만 이게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기수는 갑수의 등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잘 가, 형’
그때였다. 총소리가 한적한 골목을 울렸다. 앞서가던 갑수가 허수아비처럼 쓰러졌다. 골목 모퉁이에서 차례로 사내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쓰러진 갑수에게 다가가 발로 툭툭 쳐보더니 총구를 쓰러진 갑수의 머리에 겨누어 확인사살을 했다. 한 방, 두 방, 세 방, 네 방. 처음 한 발까지 포함해 모두 다섯 발의 총탄이 갑수의 몸 여기저기에 박혔다. 기수는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그는 꼼짝도 못 한 채 형이 죽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내들은 기수가 숨어 있는 쪽을 한 번 쳐다본 뒤 다급하게 사라졌다.
멍하니 섰던 기수가 뒤늦게 형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 형이 쓰러진 자리 주위로 피가 흥건하게 고였다. 몸 여기저기에서 피가 쿨럭쿨럭 흘러나왔다. 눈을 허옇게 뒤집고 죽어가는 갑수의 몰골은 처참했다. 기수는 피투성이가 된 갑수를 끌어안았다.
“형, 형! 눈을 떠! 눈을 뜨란 말이야!”
갑수가 경련을 일으켰다.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듯했다.
“바보 같은 자식! 이렇게 죽을 거면서 왜 그랬어? 응? 왜 그랬냐고! 일본 놈들에게 빌붙었으면 오래오래 명줄이나 길게 호의호식하며 살아야지 왜 이렇게, 왜…….”
기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갑수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수의 피 묻은 입술이 혼신의 힘을 다해 어떤 말을 하려하고 있었다.
“기수 내 동생, 기수, 옹주의, 결혼식은, 호텔이 아니라 다케유키의 저택, 기수야, 꼭 너만은 살아서, 조선으로 돌아가라.”
힘겹게 말을 내뱉은 갑수의 고개가 툭 꺾였다. 기수는 형의 이름을 목 놓아 불렀다. 어디선가 아련하게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기수는 벌떡 일어났다. 그 자리를 떠날 때 기수는 한사코 뒤를 돌아보았다. 갑수가, 그의 형이 외롭고 쓸쓸한 주검이 되어 골목 안쪽에 누워있었다.
덕혜는 소 다케유키의 저택으로 이동했다. 미우라 공사가 동승 하고, 한 조선국 장관과 죠다 차관, 사무관 등이 다른 차로 그 뒤를 따랐다. 11시 20분. 마침내 옹주 일행이 백작의 저택에 도착했다. 구죠 공작 부부의 영접을 받고 나서야 덕혜는 결혼 예복을 입은 다케유키와 마주했다. 그때가 11시 25분. 그는 덕혜를 향해 어색하고 엷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난 후 한창수가 들어왔다. 은회색 양복 차림이었다.
“이제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준비하십시오.”
시계는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준비라니요?”
덕혜의 말에 한창수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결혼식장이 변경되었습니다. 옹주마마의 안전을 위해서 취한 조치입니다.”
덕혜는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 꼭 쥐었다.
“장소를…… 바뀌었다고요? 호텔에서 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 하여 갑자기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마마의 결혼식은 여기서 할 것입니다. 다케유키의 저택에서.”
갑자기 눈앞이 새하얘졌다. 덕혜는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그들이 이 소식을 알고 있을까? 정말 날 구해낼 수 있을까?’
덕혜는 식장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음식을 나르는 사람들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날 솔숲에서 마주했던 사람들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복순은 동경을 빠져나간 후 조선행 밀항선을 타는 것까지 세세히, 면밀히, 차질 없이 준비해두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최악의 경우 신부를 바꾸는 방법까지 생각해두었다 했다. 복순이 식장으로 들어가고 복순의 옷을 입은 덕혜가 식장을 빠져나오고 그 말을 들었을 때 덕혜는 ‘이제는 되었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온몸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결혼식은 화려하지 않았다. 다케유키와 덕혜, 모두 부모를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결혼식장엔 쓸쓸한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가까운 친족 50여 명이 함께했지만 모두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이민족(異民族)과의 결혼이라고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한제국 황실의 가족과 친척들은 초대받지도 못했다. 이왕직 고등관들도 정식 통보를 받지 못했고, 옹주의 양육을 담당했던 여관(女官)들도 결혼식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덕혜의 학습원 동기들은 조선왕조의 오야 꽃 문장이 새겨진 그릇을 선물로 보냈을 뿐,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다케유키가 먼저 입장했다. 덕혜는 일본인 하녀의 축복을 받으며 겨우 걸음을 옮겼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덕혜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화려한 기모노를 입은 여인들이 보이고, 잔뜩 멋을 낸 신사들도 보였다. 저들 중에 나를 구해줄 사람은 누구인가.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경비를 담당한 제복 입은 남자들이 매서운 눈으로 주위를 지키고 있었다. 주변은 고요했다. 그 고요함이 덕혜의 숨통을 옥죄었다.
피투성이가 된 기수가 아지트로 돌아왔을 때 단원들은 거사를 실행하기 위해 막 움직이려던 참이었다.
“기수, 도대체 어찌 된 거야!”
박무영이 고함을 질렀다. 기수는 피 묻은 옷을 벗어버리면서 재빨리 말했다.
“결혼식장이 바뀌었어요! 호텔을 정탐 중인 동지들을 빨리 불러와야 합니다. 결혼식장은 다케유키의 저택이에요.”
박무영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다케유키의 집은 예의상 둘러오는 게 아니었나……?”
그새 옷을 갈아입은 기수가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저들은 우리의 계획을 알고 있는지도 몰라요. 서둘러야 합니다. 확실한 정보에요.”
박무영이 주위의 단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모두 잘 들었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빨리 다케유키의 집으로 간다!”
박무영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큰일을 도모하면서 그들의 미끼를 의심 없이 덥석 문 꼴이었다. 그렇게 틈을 보였다니, 그렇게 허술하게 생각했다니. 무영은 돌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찧고 싶은 심정이었다. 옹주의 결혼식장이라고 알려졌던 호텔의 경비는 그 어느 곳보다 삼엄했다. 그것이 사람들의 눈을 교란시키기 위한 한창수의 계략이었다는 것은 박무영은 미처 알지 못했다. 이미 동지들의 대부분이 그 호텔로 이동한 상태였다.
‘마마……!’
“다케유키 저택 근처에도 우리 동지들이 매복하고 있소. 일단은 그곳으로 빨리 갑시다.”
동지의 말에 무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거리는 멀지 않았다.
‘일단은 그곳으로 간다!’
복순은 초조했다. 손바닥에서 땀이 솟았다. 흰 드레스 옷자락이 자꾸만 두 다리에 감겼다. 최악의 경우, 옹주마마 대신 결혼식장에 들어서야 했다. 결혼식은 1시였다. 시각은 이미 12시 30분을 가리켰다.
‘별일 없는 것일까.’
복순은 좋은 쪽으로 생각해보았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려서 자신이 나설 필요도 없는 게 아닐까. 그러나 자꾸만 불안감이 엄습했다. 명색이 황녀의 결혼식인데 주변이 너무나도 조용했다.
‘이게 어찌 된 것일까. 마마는 괜찮으실까.’
복순은 방문에 귀를 갖다 대보았다.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녀는 자꾸만 입술을 쥐어뜯으며 답답한 호텔방을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교활한 놈들!
무영은 차를 몰아 다케유키 집으로 행했다. 경비가 삼엄했다. 높게 둘러친 담장 주위로 일본 경찰들이 빽빽하게 서 있었다. 근접조차 할 수 없었다. 결혼식 며칠 전 부터 매복을 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장소가 바뀌는 바람에 모두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결혼식은 이미 진행중이었다. 무영은 분노에 찬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동지,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되오. 매복해 있던 동지들이 은밀한 길을 알아뒀다 하오. 그곳을 통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소.”
“정말인가? 어서 가봅시다.”
무영은 걸음을 재게 놀렸다. 어쩌면, 이라는 희망이 다시금 가슴속에 차올랐다. 그만큼 두려움도 극심해졌다. 무영은 터질 듯 벌떡거리는 심장을 온몸으로 느끼며 뛰다시피 걸었다. 이번 일은 마마를 위해서도, 동지들을 위해서도, 대한제국을 위해서도 꼭 성사시켜야 한다.
“탕!”
그때 한 발의 총성이 메마른 공기를 찢었다. 경찰들이 우르르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무영은 얼굴을 숙이며 불안한 눈길로 경찰무리를 좇았다.
“무슨 일인가?”
옆에 서 있던 기수에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일을 그르친 것 같아요. 먼저 잠입하려던 동지가 꼬리를 밟힌 것 같아요.”
무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탕!”
그때 또 한 발의 총성이 푸른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식장 안에 있던 경찰들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모두들 웅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뒤쪽을 기웃거렸다. 덕혜는 두 주먹을 꼭 쥐었다.
‘그들이 온 것인가!’
한창수가 들어와 빠른 목소리로 말을 했다.
“결혼식을 계속 진행하시오.”
“무슨 일인가요? 밖에 시끄러운 것 같은데…….”
덕혜가 초조한 마음을 감추려고 목소리를 억누르며 물었다.
영친왕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했다.
“탕!”
별안간 거친 총소리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덕혜가 공포에 질려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 이것은 총소리가 아닌가요? 도대체 무슨 일이…… 나가봐야겠어요.”
“별일 아니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미꾸라지 몇 마리가 흙바람을 일으키는 것뿐입니다. 정리 되고 있는 중이니 좋은 날 그늘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래도…….”
“마마!”
한창수가 매서운 눈길을 던지며 덕혜의 손목을 꼭 그러쥐었다.
“마마, 계속 결혼식을 진행하겠습니다.”
한창수는 낮지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한 자 한 자 내뱉었다. 덕혜는 잡힌 손을 빼내려 힘을 써보았지만 그럴수록 그의 손은 더 단단하게 그녀의 손목을 옥죄고 들어왔다. 덕혜는 그에게 이끌려 식장 가운데로 나아갔다.
결혼식은 이 이바다시 대신궁과 구죠의 축사. 신전에 바치는 제례 순서로 계속 진행되었다. 덕혜는 극심한 불안감으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총소리가 먼저 났다는 것은…… 일을 그르친 것인가.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자꾸만 다리가 떨려서 곧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눈앞이 어찔했다. 지금이라도 저 문을 박차고 뛰어나갈 수만 있다면, 차라리 총에 맞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덕혜는 고종을 떠올렸다. 그리움과 설움이 견딜 수 없이 밀려들었다.
“탕!”
그때 또 한 발의 총성이 공기를 차갑게 갈랐다. 덕혜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나무 그늘이 우거진 창밖으로 교전을 벌이는 구국청년단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그들 가운데 그 사내도 있을 것만 같았다. 덕혜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박무영 일행은 소리 나는 쪽을 응시했다. 무영은 총을 꺼내 들고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경찰 무리의 뒤를 쫓아 달려가려 했다. 그때 누군가가 강하게 무영의 팔을 붙들었다. 기수였다.
“여기서 돌아가야 합니다. 이번 일은 이미 글렀어요.”
“비켜!”
박무영의 절규하듯 소리쳤다.
“형님, 안 됩니다. 지금 갔다가는 모두 개죽음이오.”
일경의 호루라기 소리가 가까워오자 기수는 발버둥 치는 무영을 끌다시피 하며 서둘러 몸을 피했다.
한 달 넘게 계획한 거사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잠입에 앞장섰던 동지는 정원으로 들어가는 순간 발각됐고, 곧바로 자결을 택했다고 나중에야 전해졌다. 무영은 주저앉아 두 주먹으로 땅을 쳤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분노가 앞서 눈이 흐려졌던 것일까. 무영은 벽에다 이마를 세게 들이받았다. 벌건 피가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1931년 5월 8일. 덕혜는 대마도 번주(藩主)의 아들 소 다케유키의 아내가 되었다. 그 소식을 전하는 전문이 이날 오후 2시쯤 창덕궁 낙선재에 도착했다.
불행한 만남
소 다케유키는 고개 숙인 덕혜를 바라보았다. 그가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덕혜는 좀처럼 고개를 들려하지 않았다. 결혼식 내내 굳은 얼굴로 일관했던 그녀였다.
“우리 마음과는 상관없이 맺어졌으나 어쨌든 우리는 이제부터 부부요.”
덕혜는 다케유키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지금 자신 앞에서 말하고 있는 이자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부부가 된다는 건 일생을 두고 가장 큰일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기뻐해야 마땅하고 다른 이들의 축복을 받아야 마땅할 일인데 덕혜는 그렇지 못했다.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큰 환난(患難)을 겪은 듯 참담(慘憺)했다. 다케유키가 계속 말을 걸어도 덕혜는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덕혜의 기분을 헤아리는 듯 다케유키의 목소리가 아주 조심스러웠다.
“고귀한 그대가 일개 대마도 번주의 아들에게 시집온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오. 그러나 어쩌겠소. 그것이 우리의 운명인 것을.”
“…….”
“나 역시 황실의 부름을 받았을 뿐이오. ……그대에겐 부당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 피해자요.”
피해자. 덕혜는 입술을 깨물었다. 스스로를 피해자로 여기고 있구나. 그녀는 몹시 불쾌했다.
“피해자라고요? 피해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덕혜가 고개를 들고 반문했다.
“그렇소. 다른 게 있다면 나는 지배국의 백성이고, 그대는 속국의 황녀라는 차이뿐이오!”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덕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차마 내뱉지 못한 말들이 가슴속에 가득하게 차올랐다.
‘당신은 일본인이고 나는 조선인이야.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모르겠어? 그게 얼마나 엄청난 차이인지 모르겠냐고. 지배국의 백성과 속국의 황녀가 그처럼 간단히 섞일 줄 알아?’
하지만 덕혜는 그런 생각들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다케유키는 한낱 개인일 뿐이었다. 그에게 항의한다고 달라질 리 없었다. 결혼을 없었던 일로 치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덕혜는 다케유키를 쏘아보던 눈길을 거두었다. 다케유키는 덕혜 쪽으로 다가앉았다. 덕혜가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났다. 다케유키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소. 당신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는 이제 하지 않겠소. 그러니 이제 긴장을 풀었으면 좋겠소.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서 서로에게 충실 하자는 말이오.”
다케유키는 진심으로 덕혜와 잘 지내고 싶었다. 그 자신도 순탄한 길을 걸어온 건 아니었다.
-(중 략)-
덕혜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온몸이 쑤시고 저렸다. 결혼식 내내 기대와 절망에 휩싸여 기력을 소모했던 탓이다. 가슴속에는 수치스러움과 분노가 부글거렸다. 그런 덕혜에 비해 다케유키의 태도는 비교적 평온했다. 마치 수십 년 함께 산 부인을 대하기라도 하듯 허물없는 태도를 취했다. 덕혜는 그것마저 역겨웠다. 그가 덕혜에게 호의를 보이면 보일수록 불편하기만 했다. 시혜자(施惠者)의 위치에 선 자는 그걸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의 심정을 모르기 마련이다.
“피곤한데 그만 잡시다. 우리 사이의 벽은 천천히 허물도록 하지요.”
다케유키가 불을 끄려고 했다. 덕혜는 그와 단둘이 어둠 속에 있을 자신이 없었다.
“덴끼오 케사나이!”
다케유키가 불을 끄려다 말고 덕혜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창백한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꼭 다문 입술에 경계심이 그대로 드러났다.
“왜 그러오? 자지 않으려오?”
“덴키오 케사나이데 쿠다사이.”
목소리가 심하게 떨고 있었다.
“무섭소?”
“…….”
“아무 염려 말아요. 손끝도 대지 않으리다.”
덕혜는 다케유키의 말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손끝이 아니라 그의 목소리도, 아니 숨소리조차 듣고 싶지 않았다.
“결혼식 내내 모른 척하더군요. 총소리가 나는데도, 그래요, 그들은 나를 구하기 위해 왔던 사람들이에요. 나는 이미 알고 있었어요.”
“…… 나도 알고 있었소.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결혼식 내내 당신을 응원했소. 그자들이 성공하기를 바랐소.”
덕혜는 뜻밖의 말에 눈을 떴다.
“나 역시 피해자 가운데 한 사람이오. 나는 영문학도요. 세상을 편협하게 보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이오. 당신이 어떤 기분일지, 이 결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짐작도 못 할 만큼 덜떨어진 녀석은 아니라는 뜻이오. 그래서 당신이 탈출에 성공하면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었소.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소. 결혼식은 끝났고, 당신이 원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부부가 되었소. ……부부의 연은 맺기도 어렵지만 한번 맺고 나면 끊기는 더 어려운 것이라 생각하오. 그러기에 나는 당신에게 최선을 다하려는 것이오. 우리는 이미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이오.”
“…….”
“당신이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리겠소.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다른 방으로 가면 괜찮겠소? ……하긴 첫날밤에 신랑이 쫓겨났다 하면 말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것이오. 무턱대고 당신에게 비난을 쏟아낼 거요.”
다케유키는 덕혜를 한참 바라보다 불을 껐다. 덕혜는 두 눈을 꼭 감고서 여전히 그 자리에 붙박힌 듯 앉아 있었다.
“그렇게 앉아서 밤을 샐 참이오?”
어둠을 밀어내듯 넌지시 말했으나 덕혜는 대답이 없었다.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케유키는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상처 난 마음을 어떻게 다독거려야 하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먼저 자겠소, 그만 잠을 청해보시오.”
다케유키는 눈을 감았다. 그녀는 아직도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을 듯했다. 침묵이 흘렀다. 그는 어머니 레이코를 떠올렸다. 단아한 모습이 덕혜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내 어머니를 참 많이 닮았소.”
“…….”
“아주 다정하고 섬세한 분이셨지. 그분이 있는 곳은 언제나 평온하고 아늑했소. 요츠야에서 살 때가 생각나는구려. 꽤 넓은 집이었소. 마당에는 벚나무가 다섯 그루나 있었다오. 봄이 되면 벚꽃이 화사한 나무 아래서 어머니와 함께 차를 마셨소. 벚꽃이 지는 풍경이 특히 아름다웠지. 흩날리는 꽃잎을 보며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시기도 하셨소.”
덕혜는 여전히 어둠 속에서 웅크린 채 말이 없었지만 다케유키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원 가운데는 연못도 있었다오. 그 곁에는 아주 오래된 노송이 멋진 자태를 뽐내며 서 있었지. 나는 그 노송 밑에서 어머니와 이야기 하는 걸 아주 좋아했소.”
“…….”
덕혜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다케유키는 쓸쓸하고 허전한 감정에 휩싸였다.
“나도 그렇게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소.”
그 말을 듣고 있을까. 다케유키는 일부러 눈을 뜨지 않았다. 덕혜가 어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었으나 서두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녀가 스스로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급하게 서두르면 탈이 나게 마련이다.
덕혜는 분명 버거운 여인이었다. 하지만 노력해보리라. 그녀의 사나워진 마음이 누그러지고 평온해질 때까지 기다리며 애써보리라.
다케유키가 덕혜와의 관계를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덕혜는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았다. 다리가 저렸지만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등을 꼿꼿이 세웠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을 지키고 싶었다.
탈출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지자 높은 곳에서 굴러 떨어진 것처럼 몸과 마음이 욱신거렸다. 온 마음을 다해 결사단의 결행을 기다리고, 그녀를 구하러 오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전에 없이 설레던 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계획이 불발로 끝났을 때 뱃속에서부터 밀려오던 지극한 고통 역시 여전히 생생했다.
덕혜는 자신 앞에 누워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자신은 이자의 여자가 되었다. 일본인의 아내가 된 조선 황녀.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덕혜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흐느꼈다.
‘내게도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습니다. 다정한 어머니, 자애로운 아바마마, 아름다운 꽃이 피는 정원을 거닐며 행복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름드리 향나무도 있었습니다.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나 역시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하였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떠나왔으나 나는 그곳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망국의 서러움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조선의 황녀로서의 기품 또한 잃지 않을 것입니다.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렸다. 창덕궁 후원일까?
덕혜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지난밤 쪼그리고 앉아서 날밤을 샐 작정이었는데, 새벽녘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든 모양이었다. 다케유키는 보이지 않았다. 어깨에서 흘러내린 이불자락이 발치쯤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속이 깊었다. 옷도 벗지 않은 채 웅크리고 자는 게 측은했던지 슬며시 이불을 덮어두고 나간 모양이었다.
새소리가 청량하게 들렸다. 방 안으로 비껴든 햇살로 보아 늦잠을 잔 것 같았다.
“고젠사마, 세숫물을 대령할까요?”
그녀가 깬 기척을 느꼈는지 문밖을 지키고 있던 하인이 나긋하게 물었다.
“그리하여라.”
덕혜는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며 방안을 살폈다. 그가 허물 벗듯 빠져나간 이부자리가 낯설었다.
“백작께선 후원을 산책하고 계십니다. 마님 기침하시면 그리 오시라 하셨습니다.”
세숫물을 가져온 하인이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덕혜는 그 말을 들은 듯 만 듯 세숫물만 바라보았다. 따뜻하게 데워진 물이 까칠해진 피부에 닿자 마음이 한결 평안해졌다. 덕혜는 정성 들여 세수를 했다.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경건하게, 새로운 날들에 대한 준비처럼. 세수가 끝나자 하인이 대야를 들고 나갔다. 하지만 그 후로도 덕혜는 후원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묶이기는 했지만 그들은 아직 서로에게 낯선 사람일 뿐이다.
방 윗목에 옷이 얌전하게 개켜져 있었다. 기모노였다.
“누가 이 옷을 여기다 갖다 놨느냐?”
덕혜의 목소리에 분노가 스며들었다.
“제가 가져다 두었습니다만…… 주인님께서 그리하라 하셨습니다.”
하인이 머리를 조아린 채 대답했다. ‘그렇겠지, 밖에는 게다가 있을 테고.’
연한 살굿빛이 도는 고급 기모노였다. 기품 어린 은은한 광택이 무척 아름다웠다. 다케유키가 그녀를 위해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해둔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입고 싶은 생각은 결코 없었다. 덕혜는 한숨을 내쉬며 저만치 옷을 밀어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문밖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여전히 단정하고 예의 발랐다.
“복순이는 어디 갔느냐?”
“복순 상은 아침 일찍 영친왕 전하 댁에 갔습니다.”
“내 허락도 없이 누가 그 아이를 보냈어?”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주인님께서 어제 못 가져오신 짐을 가져오라고 보내셨습니다.”
하인이 여전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 또한 다케유키가 특별히 지시해두었을 것이다. 빈속이 좀 쓰렸다. 하지만 밥을 먹을 생각은 없었다. 보나 마나 싱거운 일본 음식일 터. 차라리 안 먹는 게 나았다.
“고젠사마, 오늘 아침 메뉴는 조선식입니다. 복순 상이 도와주고 갔습니다.”
덕혜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하녀가 단정하게 말했다. 그 역시 다케유키의 배려일 것이다.
덕혜는 윗목에 있는 기모노를 조금 더 멀리 밀쳐두고 물색 실크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집안에서 입기에는 불편한 양장이었지만 마르고 살 없는 덕혜에겐 아주 잘 어울렸다. 일본인의 아내가 되었다고 기모노를 입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덕혜는 정장 차림으로 식당에 나갔다. 하까마를 입고 창밖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던 다케유키가 덕혜의 옷차림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곧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오. 내가 제대로 배려하지 못한 것 같소. 하지만 이제는 기모노에 익숙해져야 하지 않겠소?”
수저를 들던 덕혜의 미간이 좁아졌다. 손이 파르르 떨렸다.
“보기보다는 이 옷이 편하다오. 집에서 그런 차림으로 지내기에는 불편하지 않겠소?”
다케유키의 말에 덕혜는 말없이 수저를 놓았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일본인이었다. 다케유키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덕혜를 바라봤다.
“그렇다고 식사를 안 하면 어쩌려고 조금이라도 들어요.”
다케유키는 낯선 조선식 상차림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덕혜를 응시했다. 그녀를 위해 일부러 첫 아침은 조선식으로 하라 일렀다. 맑은 무국, 너비아니구이, 식욕을 돋우는 맛깔스런 김치, 구운 김, 하얀 쌀밥. 애써 준비한 조선식 아침을 덕혜는 한술도 뜨지 않았다. 마음이 상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자신의 아내가 아닌가. 조선의 황녀지만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살 수는 없었다.
“앞으로 옷은 기모노를 입도록 해요.”
다케유키 역시 호락호락한 남자는 아니었다.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를 띠고는 있지만, 자신의 주장을 굴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덕혜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모노, 새삼스럽게 그 옷이 낯설고 불편했다. 처음 입은 옷도 아니다. 히노데 소학교에 다닐 때 입었고 일본에 와서도 입었던 옷이다. 하지만 지금은 입을 수 없다. 일본 백작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입을 수 없다. 만약 그 옷을 입는다면 그대로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덕혜는 방으로 돌아와 기모노를 집어 들었다. 방을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찾았다. 자신의 방이었지만 물건들이 어디에 어떻게 놓여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가위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그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덕혜는 기모노의 옷깃을 단단히 그러잡았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찢기 시작했다. 자잘한 꽃무늬가 예쁘게 수놓인 부드러운 비단은 생각보다 질겼다. 덕혜는 안간힘을 썼다.
“마님!”
뒤쫓아 온 하인이 놀라서 소리쳤다.
“나는 이 옷 안 입을 것이다!”
덕혜는 하인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하녀의 뒤에 다케유키가 서 있었다. 그는 놀란 눈빛을 감추며 덤덤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누구도 내게 이 옷을 입으라 강요할 수 없다!”
덕혜가 감추어 두었던 분노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다케유키의 표정은 암담했다. 그는 덕혜가 쥐고 있는 기모노를 붙잡았다.
“그렇다고 해서 찢을 것까진 없잖소? 이리 주시오.”
빼앗으려는 자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 사이에 잠시 실랑이가 벌어졌다.
“화를 내려면 내게 내시오. 왜 멀쩡한 옷을 찢으려고 하시오!”
덕혜가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대를 이 소처럼 갈기갈기 찢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다케유키는 기가 막히다는 듯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덕혜가 느끼는 분노는 상상 이상이었다. 이해해야 한다. 받아들여야 한다. 다케유키는 스스로를 달랬다. 그녀는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한 조선의 황녀가 아니던가?
“우리는 부부요. 그까짓 기모노 안 입는다고 해서 내가 당신을 어쩌겠소? 하지만 지금 그 말은 나를 모욕하는 거요.”
“모욕이라고요? 모욕이 무엇인지나 아나요? 그대의 나라에 짓밟힌 우리만이 그 말을 쓸 수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옷이 아니라 이 나라, 일본이라는 이 나라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습니다.”
덕혜는 한마디도 더듬지 않고 또박또박 내뱉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움켜쥐고 있던 기모노를 내던졌다. 다케유키는 찢어진 기모노를 주웠다. 기우고 꿰매도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는 옷, 다케유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들은 사사건건 부딪쳤다. 덕혜는 자기주장이 강했고, 다케유키는 부드러워 보이지만 고집이 셌다.
기모노 사건 이후 덕혜는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조선의 물건들을 방에다 늘어놓기 시작했다. 떨잠, 조선의 궁에서 입었다는 궁중의상, 초록 당의와 붉은 댕기, 조선의 글자가 빼곡한 서책도 일부러 펼쳐서 늘어놓았다.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러시오?”
다케유키의 말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덕혜를 볼 때마다 다케유키는 벽을 떠올렸다. 다케유키는 웃음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무표정한 덕혜를 볼 때마다 숨이 막혔다.
“도대체 왜 이러느냔 말이오?”
평화로워야 할 집 안이 답답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긴 내 방이에요. 내 물건을 내 방에 늘어놓는 게 뭐가 나빠요? 난 저 물건들을 보면서 조선을 생각해요.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절망, 앞으로 얼마나 더 큰 절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덕혜와 살려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감내 해야 할까. 불현듯 그의 가슴이 답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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