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4일
큰돌개혁장로교회 주일예배 ▣주일경독시간 인도: 안기철 집사 ▶시편찬송 시편69편 다같이 ▶경 독 시편69편 고린도전서4장 다같이 ▶합심기도 다같이 ① 성령과 말씀의 예배 / 설교자와 회중을 위해 ② 성찬의 예배/ 은혜언약 안에서의 하나님의 영광 과 성도의 교제가 풍성하게 드러나는 예배를 위해 ③ 믿음과 순종의 예배/ 배움(교리)과 실천(삶)이 있는 예배를 위해 ▶목사;“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갈1:3) ▶회중;“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2) * 예배부름과 송영 시편98편 *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신경 다함께 *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제5주일 * 십계명낭독 다함께 * 참회기도 다함께 * 시편찬송 시편56편 헌 상 안기철 집사 목회기도 담임목사 말씀의 강설 요일2:12-17③ 요한일서 강해(25) 주의만찬 막6:34-44 다함께 * 찬 송 찬송가 453장 다함께 * 강복선언 설교자 * 교제의 인사 다함께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12:10) * 표는 기립해주시기 바랍니다. ☞ 헌금은 미리 준비해 미리 봉헌함에 넣어주세요. *주일 오후 교리공부:“성경과 교리”(52) 교리와 함께 읽는 야고보서 본문연구 |
제1부 인간의 비참 제5주일 제12문: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우리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이 형벌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답: 하나님은 자신의 정의가 만족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나 다른 이가 그의 정의를 완전히 만족시켜 드려야 합니다. 제13문: 우리 스스로 죄 값을 치를 수 있습니까? 답: 절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날마다 죄를 더해 가고 있을 뿐입니다. 제14문: 그러면 다른 피조물이 우리를 대신해서 죄 값을 치를 수 있습니까? 답: 없습니다. 우선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 때문에 다른 피조물을 벌하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더구나 어떠한 피조물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감당할 수 없으며 다른 피조물을 구속할 수도 없습니다. 제15문: 그렇다면 어떤 중보자와 구원자를 기대해야 합니까? 답: 그는 참 사람이면서, 진실로 의로우시고 모든 피조물보다 큰 능력을 소유하신 참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
▣성찬본문/ 막6:34-44
▶(막6:34-4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5)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42) 다 배불리 먹고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설교본문/ 요일2:12-17③
『 (요일2:12-17)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사도는 그리스도와의 사귐의 여정을 위한 첫 출발점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았는가’에 관한 질문을 던집니다. 회심하지 않은 영혼에게 그리스도와의 사귐은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회심을 미루는 영혼에게!
▶요한은 그의 회중을 향해‘테크니아!’(자녀들아!)라고 부름으로 이 사귐의 초청을 시작합니다. 이 호칭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받았고 또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양자됨’의 은혜를 확언합니다.
▶(요일2: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요일2: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요한은 기독교신자로서 태어남의 조건을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는 죄사함’이라고 정의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행20:21)으로 구성되는 이 죄사함의 교리를 분명하고 확고하게 가르치지 않으면 그 이후의 사귐의 여정은 시작되지 않습니다. 회심을 경험하지 않은 신자는(그가 택자라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버성기며, 복음을 거부하고 죄 가운데 거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 행하는 자’(요일1:6)며, 필연 형제를 사랑하기는커녕 형제를 미워하는 본성의 의지를 견지하는 자입니다. 그는 ‘어두움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는 어둠에 눈이 먼 사람’일 뿐입니다.(요일2:11) 그렇습니다. 중생하지 못한 영혼은 ‘사랑할 줄 모르는 자’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형제를 향한 저항 받지 않는 ‘미움’의 본성을 따라 행합니다.
그러나 중생한 신자는 영혼의 본성의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날 뿐 아니라 인격과 삶에 있어서 새로운 관계를 맺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가 되고, 교회의 지체로서 형제관계로의 결속을 경험합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내세는 현재의 세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영광스러운 기업이 됩니다. 세상은 그의 믿음 안에서 거절됩니다. 그렇게 세상과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됩니다.(요일2:15) 옛적 자아에 대한 지속적인 불신과 하나님(성령)께 대한 온전한 신뢰, 그리고 세상에 대한 저항은 거듭난 신자에게 나타나는 근본적인 본성이 됩니다.(그 정도의 차이를 고려할 수 있음)
▶이것은 흥미로운 유비입니다만, 탯줄을 끊고 태어나는 아이를 마치 홍해를 가르고 애굽을 빠져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과 중첩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엡01:0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들은 모두 홍해를 건넙니다. 홍해는 물, 곧 죽음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은 그 홍해의 ‘구름아래서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음’으로(고전10:2) 사실상 옛적 본성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 육지로 올라옴으로 그들은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홍해를 건넌 사건은 중생에 관한 탁월한 이미지입니다. 한 생명이 태어날 때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산혈과 양수가 터지며 밖으로 터져나오는 생명은 흡사 출애굽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탯줄은 그의 이전의 존재의 뿌리인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분리되는 경험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죽음의 경험입니다. 옛적 생명의 원리가 더 이상 작동되지 않습니다. 이제는 코와 입과 폐로 자가 호흡하는 새로운 생명의 원리가 작동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중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과 믿은 후의 변화란 본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의 원리가 발동되는 새로운 탄생의 경험인 것입니다.
▶오늘 날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나 심지어 보수적 개혁주의자들 가운데서 이 같은 회심의 교리를 혐오하거나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중생이 언제나 믿음을 앞서며, 믿음 없이 회개에 이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회개를 촉구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사도적 선포(행20:21)는 ‘유대인들에게만 한정된 회심의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율법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을 제시하고 그것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자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후에 자연스럽게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와 성화가 따른다고 말입니다.1) 물론 논리적으로는 하나님의 중생의 은혜가 없이 누가 복음을 듣고 회개할 것이며, 믿음이 없이 회개할 수 있겠습니까? 칼빈도 믿음은 언제나 회개를 선행하고, 회개에는 이미 믿음이 내포되어 있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17세기 개혁자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중생의 은혜가 선행되어 택자로 하여금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게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회심하는 현장에서는 논리적 순서가 아니라 경험적 순서가 강조됩니다. 복음을 듣는 자들이 회개해야 하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내용으로 하는 믿음의 고백이 수반됩니다.2) 그리고 마침내 예수를 믿을 때 일어나는 자아와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 곧 중생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이 신자를 중생과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은 참이지만 그 은총의 경험적 효과는 언제나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적 믿음을 통한 중생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이 양자 간의 중생론은 모두가 진리입니다. 성경은 이 두 가지 중생의 가르침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교리서신에서는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사역에 방점)을, 복음서와 사도행전, 공동서신에서는 하나님의 후행적 은총(죄인의 의지적 회심에 대한 방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참입니다.3)
어거스틴은 이것을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 사이의 역설적 모순’이라고 말합니다.4)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의 신비적 모순(?)을 다루면서 성경의 구절 안에서 하나의 실천적 결단을 내립니다.
▶(롬10: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시22: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마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하나님을 찾아서 발견하게 되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오, 여호와 하나님! 나는 하나님을 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부를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부릅니다. 오,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믿음 가운데서, 독생자의 인성을 통해 나에게 불어넣어주신 신앙 가운데서,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자(암브로스와 같은)의 말씀을 통해서 나는 당신을 부릅니다!”(고백록1.1하)
어거스틴은 그가 듣고 깨달은 복음의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부르겠다고 선언합니다. 그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은 은총은 언제나 그의 찬양의 주제이지만, 그가 고백하고 결단하며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그가 듣고 깨달은 복음의 전도를 통한 의지적 결단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험적 회심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중생의 은총은 항상 우리의 회심을 앞서지만, 중생의 섭리는 항상 우리의 회심을 통한 경험(증거들)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이름, 존재의 이유를 아는 지식
자, 이제 사도는 같은 부류의 회중들을 두 번째로 부릅니다.
▶(요일2:14) 아이들아(파이디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교회안의 초심자를 부르면서 두 번째 호칭이 달라진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앞에 테크니아(자녀들)라는 호칭이 중생을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신분의 변화를 강조한다면, 파이디아라는 호칭은 이들이 신생자로서 교육과 성장이 필요한 과도적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는 호칭입니다. 앞으로 성장해야하는 과정과 성숙의 여백이 남겨진 존재로서의 초신자의 초상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왜, ‘아버지를 알았다’고 말하는가입니다. 여기서 아버지(pathvr, father)라는 단어가 함의하는 신학적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아버지’는 존재의 근원이며, 또한 존재의 목적이 됩니다. 다윗은 ‘이새의 아들’(시72:20)로 불리고 베드로는 ‘요한의 아들 시몬’(요1:42)으로 불립니다. 지옥에 떨어진 부자는 아브라함을 그의 존재의 아버지로 부르고(눅16:27) 나아가 레위는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났다(히7:5)고 말함으로서 언약의 조상들을 그들의 존재의 근원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럼으로 죄사함을 받은 신자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게 되었다(요일2:14)는 의미는 신자가 그의 존재의 근원과 목적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교리적으로 정리한다면, 첫 번째 호칭인 ‘테크니아’라는 말은 ‘죄사함을 받음’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구속주 되심에 대한 강조점이 있다면. ‘파이디아’라는 호칭에는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아버지를 앎’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에 대한 강조점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중적 복음신앙은 ‘구원받음’에 방점이 있습니다. 죄의 용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면제, 영원한 형벌로서의 지옥으로부터의 안전, 천국과 영생이라는 주제를 구원의 전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관은 복음이 이끄는 구원의 전체성을 생략하거나 왜곡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은 창조의 목적에 기여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구원’의 필연성‘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에 방점이 있으나 복음주는 인간의 구원과 행복에 방점이 있다.
▶우리는 바빙크의 계시론을 배우면서 특별계시와 일반계시의 관계를 빗대어 ‘재창조(특별계시)는 항상 창조(일반계시)에 적응한다’라는 바빙크의 정의를 배운바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신앙의 궁극적이고 항구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데도 중요한 개념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모든 의미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구속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전 구속사역, 이를테면 성육신, 생애적 순종,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까지의 모든 사역은 성부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위한 사역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는 구속의 중보자이면서 동시에 창조의 중보자이셨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요01:0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히01:0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그분의 창조사역에 귀결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는 인간이 봉착한 난관을 해결하기 위해 역사 속에 개입하신 구원투수(one point relief)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성부 하나님과 창조를 위한 협의를 하신 분시시고(창1:26-28) 모든 창조의 중보자가 되셨으며(히1:3;11:3) 성부의 뜻을 따라 타락한 세상을 위한 구속의 중보자(요3:16)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히13:8)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어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은 신자는 즉각적으로 그의 존재의 근원과 목적에 대한 이해로 초청받습니다. 요한은 그래서 아버지를 알았고, 알아가 이해의 성숙으로 나아가야하는 ‘아이들아!’(파이디아)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신자는 그 구원의 감격이후에 구원이 이끄는 창조의 본래적 목적을 배우고 그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전향과 성숙을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신론적 삶을 동경하는 이들에게
▶한 방송에서 이경규씨가 법륜스님이라는 분께 묻습니다. “스님, 왜 제가 태어나게 되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러자 특유의 선문답이 시작됩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질문이 잘못되었어요. 우리는 이유가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태어났기 때문에 이유가 생기는 것이에요. 삶은 이미 주어져 있기에 우리는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지 선택하면 되는 거예요.”
언젠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인문학자인 유시민씨가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고, 다만 삶의 주체로서 어떻게 살아야할 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본인의 몫이며 권리라는 논리였습니다.
보십시오. ‘나’라는 존재의 탄생은 우발적 사고였다는 말입니까? 이 잔인한 세상, 허무한 삶의 현실에 무의미하게 ‘던져진 존재’라고 생각할 때 삶은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 잔인하고 폭력적인 신념 앞에서 인간의 삶은 존엄함과 가치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철학자는 그래서 철학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의미와 통일성’을 찾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므로 하나님을 찾기 까지는 어디서도 안식할 수 없노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다!’라고 말합니다.
▶보십시오. 무신론자 사르트르는 인간을 잉여의 존재라고 촌평했습니다.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는 인간이 우주에 던져진 존재라고 말합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신이 없이 살아가는 인간, 곧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창했습니다. 무신론자들은 인간은 신이 없는 참된 자유를 얻어야 참된 삶을 살수 있다고 웅변했습니다. 그러나 무신론적 삶을 동경하는 자들이 알아야하는 진실이 있습니다. 이 땅에 무신론적 삶을 살아갔던 모든 이들은 그들의 절망과 불행을 은폐하고 포장했으나 삶이 그들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예외 없이 모두 비참하게 생을 마쳤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없다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며 부패하고 행실이 가증함으로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고 선언합니다.(시14:01)
▶(시107:10-11)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11)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신이 없는 세상을 살아갔던 사르트르의 삶은 계약결혼과 불륜으로 일관한 삶을 살았고, 니체는 실연의 고통으로 길거리에서 노숙자로 비참하게 생을 마쳤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신앙을 버리고 무신론자가 되었지만 그의 말년에는 자살예찬론자로 그가 즐겨했던 사냥에 사용했던 총으로 자살했습니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불행한 자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자신이 무신론적 삶을 계속 살아가면서 행복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신기루 같은 인생’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힘들다고 불평하는 신자들은 들어야 합니다. 무신론자로 살아가는 것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통스러운 삶의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며, 죽음이후에 영원한 심판이 기다린다(히9:27)히는 성경의 증언만이 참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지체여러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게된 것은 여러분의 인생에서 비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나의 존재의 이유와 목적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신자로서 살아가는 삶의 모든 역정들이 의미 있고 감사한 여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영적성장의 단계를 생물학적 연령순으로 배열한 것은 매우 의미있습니다. 생물학적 성장원리는 창조의 원리입니다. 구원은 연령이나 이력과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이, 성별, 지식, 도덕적 차이와 상관없이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구원은 그래서 절대적 은혜의 결과이며 인간의 모든 공로와 노력들을 철저히 배제합니다. 그러나 구원이후의 성장은 다릅니다. 성장은 창조의 원리와 같이 성령과 말씀 안에서 양육되어 성장하는 과정을 경험합니다. 생물학적 성장과정처럼 시간이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하고 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배워야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계속 알아가야 합니다.
▶(벧후0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
1) 이들은 믿음이후에 회개와 성화가 성령의 주도적 사역이기 때문에 믿기 위해 먼저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인간스스로 구원을 위해 준비할 수 있다는 알미니안적 준비론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의 선행적이고 협력적인 사역의 동시성을 간과한 것이다. 성령의 사역은 복음의 전도와 함께 죄인의 지성을 일깨우고 그 의지를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통해 죄인의 회심을 돕는다.
2) 바울은 전도의 현장에서 복음전도를 ‘회개의 촉구’로 설명하기도 했다. 곧 복음을 들은 죄인들에게 회개는 믿음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바울의 복음은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동일한 것이었다.(롬3:9;10:12;고전1:24)
▶(행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행11: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4) “오,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먼저 하나님께 부르짖고 간구하고 난 후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지, 혹은 먼저 하나님을 알고 난 후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옵소서!”(어거스틴, 고백록 1.1)
▣말씀의 반추를 위한 생각들
▣ 시편으로 기도하기!(피터 버미글리)
시편70편
1.오 위대하시고 선하신 하나님,
우리가 매일 드리는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당신의 긍휼하심과 확고부동하심으로 날아갑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위험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고 우리의 구원의 원수들로부터 안전한 것도 전혀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적대감과 속임과 잔인함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위험하고 적대적이고 부담스럽게 경험합니다.
우리 자신의 잘못이 가볍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죄에 대한 당신의 공의로운 처벌을 우리가 받고 있다는 사실을 무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합니다. 당신은 선하시나 우리가 저지른 수치스러운 일들을 용서해 주시고, 우리가 합당하게 마땅히 받아야 할 그 처벌을 당신의 친절하심과 상냥하심으로 경감해 주시거나 아례 없애주시길 원합니다.
그렇게 당신이 우리를 도우실 때, 우리가 고백하는 바 당신께 드리는 경배를 반대하는 모든 자들이 얼굴을 붉히고 수치스럽게 될 것입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당신의 이름을 열망하는 사람들은 기뻐하며 즐거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자들이 거듭 반복하여 그들이 준비한 비난들을 우리에게 던지지 못하도록 우리를 도우시는 일을 더 이상 미루지 마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