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관오포를 배우면서
올 봄에 이순신을 연구하는 지인과 여수 돌산에 있는 방답진을 견학하면서
선조들의 지혜로움을 엿볼 수 있게 되면서 오관오포에 관심을 갖게되었고 그 중에서도 오포를 중점으로 배우면서 그 지역에서 있었던 사건, 인물에
대해서도 알게되었다
특히나 여수에 있는 방답진을 보면서 방답진 터가 훼손되면서 여수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씁쓸함을 감출수가 없다 여수는 이순신과 관련된 많은 유물과 자료가 있음에도 알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여수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게 생각하며 역사적 문헌이나 고증을 통해서 더 많은 홍보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는 귀한 시간이 되었다
기회가 된다면 더 많은 유적지를 견학하면서 이배사 회원들과 관련 내용들을 배우는 많은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이하 자료를 바탕으로 조사했던 내용들을 알아보기로 한다
조선시대 전라좌수영이 관할하던 행정구역
전라좌수영이 관할하던 행정구역인 오관오포는 순천도호부(順天都護府)·낙안군(樂安郡)·보성군(寶城郡)〔현 전라남도 순천시〕·광양현(光陽縣)〔현 전라남도 광양시〕·흥양현(興陽縣)〔현 전라남도 고흥군‚ 여수시 삼산면〕의 다섯 군현(郡縣)과 방답진(防踏鎭)·사도진(蛇渡鎭)·여도진(呂島鎭)·발포진(鉢浦鎭)·녹도진(鹿島鎭)의 다섯 진포(鎭浦)를 말한다.
방답진성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에 있는 조선 중기 석축성이다.
방답진성이 위치한 곳은 외적이 들어오는 요지이기 때문에 1523년(중종 18) 이곳에 진을 설치하고 첨사를 두었다. 1895년(고종 30)에 폐진될 때까지 약 370여 년간 존속하였다. 아래 사진은 방답진성의 서쪽 성벽을 촬영한 것이다
사도진성 사도진(蛇渡鎭) [현 고흥군 점암면 금사리 지역]
조선시대 전라남도 고흥군 금사리에 설치한 수군진영.조선전기에는 전라도 흥양현(현 고흥) 사도진에 수군진성을 축조하여 왜적을 방어하였다
조선 초기에 설치된 수군기지인 사도진의 방어성(城)으로, 전라남도 고흥군 영남면 금사리 사도마을에 있었다.
해창만(海倉灣) 어귀를 지키는 수군의 해안 방위기지였던 사도진(蛇渡鎭)의 성(城)으로, 1491년(성종 22) 10월 축성되었다. 종3품 무관직인 첨절제사(僉節制使, 첨사)가 배치된 첨절제사진성(鎭城)이었던 사도진성은 현재의 전라남도 고흥군 영남면 금사리 사도마을에 있었다.축성이 논의된 것은 1485년(성종 16) 3월이었는데 당시 심정결과(審定結果)에 ‘좌향은 서향이며 둘레 1,440척(436m), 남북 길이 400척(121m), 동서 너비 1,000척(303m)으로, 성내에 샘이 2개 있다. 서북쪽으로 흥양현까지 육로로 60리(23.6km), 동쪽으로 돌산포까지 수로로 1식 25리(21.6km)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심정결과에 따라 1491년 둘레 1,440척, 높이 15척(4.5m)의 진성(鎭城)이 완공되었다.
조선 초기에 사도진성은 회령포·달량·마도·여도·녹도·발포·돌산포의 7개 만호성(萬戶城)을 거느리는 전라도 최대의 수영(水營)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사도첨사 김완(金完)이 사도함대를 이끌고 사천·당포·한산도에서 많은 공을 세웠으며, <난중일기>에 충무공 이순신이 이곳에 들러 군기를 점검하고 부하장병을 독려한 기록이 있다. 1895년(고종 32) 폐진되었으며, 현재 성(城)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도진성 [蛇渡鎭城]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여도진성 1994년 12월 5일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고흥 여도진은 임진왜란 때 전라좌수영 관내 5관 5포에 속하는 수군진으로서 당시 매우 중요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여기에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주둔하였으며, 진성(鎭城)을 세워 견고하게 방어하였으나 지금은 석성의 일부만 남아 있다.
전방에 원주도, 북쪽에 내백일도·우모도·계도, 남쪽에 팔영산, 그리고 동쪽으로 항도에 둘러싸인 해상요충으로서 여자만 해역을 방어할 수 있는 천연의 요새지이다.
언제 이곳에 수군진이 처음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수군제도가 기록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에 나온 《세종실록지리지》이다. 당시의 전라도 수군편제를 보면 지금의 함평관내에 속하는 무안현에 전라수군처치사영을 두고, 그 밑에 좌우의 도만호영(都萬戶營)을 두었다. 좌도 도만호영은 고흥 여도에 있었고, 우도 도만호영은 무안 원포(지금의 해제면)에 있었다.
여도의 전라좌도수군 도만호영은 내례(內禮:여수)·돌산(突山:여수)·축두(築頭:고흥)·녹도(鹿島:고흥)·회령포(會寧浦:장흥)·마도(馬島:강진)·달량(達梁:해남)·어란(於蘭:해남) 등 8개소의 수군만호영을 통할지휘하는 전라좌도의 수군본부 구실을 하였다. 그뒤 세조 때 개편된 진관체제하에서 여도진은 도만호영에서 만호영으로 격하, 같은 고흥반도에 위치한 사도진(蛇渡鎭)의 수군첨절제사 예하에 속한 뒤부터 큰 변화없이 임진왜란을 맞았다.
전란 기간 중 여도진 수군은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여도만호 김인영(金仁英)의 지휘 아래 해전에 참전해 일본군을 섬멸하는 데 큰 공을 세웠는데, 그 기록이 《이충무공전서》와 《난중일기》에 자세히 나온다.
여도진성은 1491년(성종 22)에 축성된 것으로 둘레가 1,320자, 높이가 15자였다고 《성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성터의 유구 일부만 남아 있다.
1991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이 펴낸 자료에 따르면, 남벽의 경우 길이 약 200m, 높이 60∼150㎝, 서벽의 경우 길이 약 95m, 높이 180㎝ 정도라고 한다. 사실상 서벽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벽이 그 윤곽만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흥 여도진 성지 [高興 呂島鎭 城址]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발포진성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에 있는 조선 초기에 해안 방어의 요충으로 축성된 성. 1977년 10월 20일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내발리의 옛이름이 발포이며, 성촌부락을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 전라좌수영 산하의 5관(순천, 낙안, 보성, 광양, 흥양) 5포(사도, 여도, 녹도, 발포, 방답) 중 사군만호가 다스린 수군진성이다. 1490년(성종 21)에 만들어져 1894년(고종 31)에 폐지되었다. 또 1580년(선조 13) 이순신 장군이 36세 때 발포만호로 18개월 동안 지냈던 곳이기도 하다.
발포만호성에 관한 기록은 《성종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권245 〈경술 구월조〉에 ‘전라도발포성주일천삼백육심척병고십삼척’이라 하였으며, 1490년에 적량성, 지세포성, 안골포성 등과 함께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성벽은 항아리 비슷한 사다리꼴로 전체 둘레는 560m이고 높이는 약 4m이다. 동서남북 4벽이 거의 원래의 모습대로 남아 있기는 하나, 동벽과 남벽은 민가의 담으로 되었고 동벽이 서벽보다 얕다. 현재 성안의 건물지로는 동헌과 객사, 배수로, 무기고, 동문과 서문, 그리고 남문 망루지 등이 남아 있다. 이것은 1977년 전남대학교 최몽룡 교수팀이 발굴과정에서 조사한 것이다.
발포만호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좌수영 산하의 수군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여수선소 유적과 함께 당시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기초 자료가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흥 발포진성 [高興 鉢浦鎭城]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녹도진성
조선 초기에 설치된 수군기지인 녹도진의 방어성(城)으로, 전남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녹동1구에 있었다.
조선시대 수군의 해안 방어기지였던 녹도진(鹿島鎭)의 성(城)으로, 1490년(성종 21) 10월 축조되었다. 종4품 무관직인 만호(萬戶)가 배치된 만호성(城)이었던 녹도진성은 현재의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녹동(옛 지명은 녹도)마을에 있었다. 녹도진의 설치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을 통해 조선 초에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녹도진성 축성은 1484년(성종 15) 10월에 논의되었는데 이때의 심정결과(審定結果)에 ‘성은 남향으로, 둘레 2,020척(612m), 동서 길이 810척(245m), 남북 너비 404척(122m)이고, 샘이 2개 있다.’라고 되어 있다. 이에 따라 녹도진성은 1490년 10월 둘레 2,020척, 높이 13척(3.9m) 규모로 축성되었다.
전라좌도의 수군본부 역할을 담당하였던 여도진(呂島鎭)의 관할이었다가 세조 때부터 사도진(蛇渡鎭)에 귀속되었다. 1895년(고종 32) 폐진되었으며, 현재 성(城)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네이버 지식백과] 녹도진성 [鹿島鎭城]
사도진성과 녹도진성은 현재 성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형성 및 변천
전라좌수영 관할 오관오포 가운데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흥양현 경내에 일관사포의 구군진이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흥양반도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이 4면에 거의 바다를 끼고 있어 왜침의 위협이 컸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고산대수가 4면에 둘러싸인 천험의 요새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군사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지역은 전라좌도의 해방기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현지 수군의 역할 또한 그만큼 컸을 것이 분명하다. 그 예로써 이순신 휘하 전라도수군 지도층 인사들 가운데 흥양 출신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들 수 있다. 또한 임진왜란 초기에 집계된 전라좌수군 사상자 가운데 이 지역에 소속된 군사들이 전체의 반수 이상을 차지하였던 사실을 통해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관오포 [五官五浦]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첫댓글 오관오포님 덕분네 공부가 깊어집니다~~
제고향이 흥양(금산면/절이도)땅이고,!
지금 살고있는곳이 전라좌수영(여수)이니!
오관오포와 가까우나 게으름이 더욱 깊어져 늘 미루고 있습니다~~
여유가 생기면 답사여행을 떠날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
오래된 회원들은 흥양의 1관 4포를 다 답습하였지요..
당시 고흥 문화관광과의 임정모 계장의 배려로..1박 2일의 멋진 여행을 하기도..아련한 추억이 돋습니다!..ㅎㅎ
감사합니다 ~~
이번 여수 신년회 때도 뵐 수 있겠네요..닉 연구 하신 것을 보니 타루비님 못지 않은 열성입니다.
타루비님이 결국 남편을 내편으로 만들었네요...하하🤣🤣
숙제 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오관오포에 대해 잘 정리해 주셨습니다. 너무 분량이 많으니 거북선축제와 정운 부문은 제외시켜도 좋겠습니다. 숙제를 잘하신 269번째 회원으로 우수회원에 등업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우수회원 등업을 축하드립니다.
오래오래 두터운 인연 어어 가시길 소원합니다.
감사합니다 ~
우수회원되심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우수회원 등업을 해 주시니 기쁘기 한량 없습니다 숙제를 미루다 하긴 했는데 칭찬을 해 주시니 더 기쁘네요 다가오는 2024년 새해에도 이배사 회원님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우수회원되심을 축하드립니다.
공부 잘 했습니다! 우수회원이 되심을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우수회원 되심을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숙제를 넘 잘 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