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풍수지리학의 역사(歷史)
풍수지리학의 기원은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연재해(수재, 풍재, 화재)를 피하고 동물들의 공격을 피하며, 먹을 것을 얻고 편히 쉬고 잠자고 거처하기 유리한 장소를 찾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이 바로 풍수지리의 시작이다.
풍수지리의 역사는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기(理氣)의 근본이 되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은 약 5600년 전 복희씨(伏羲氏)의 용마하도(龍馬河圖)로 거슬러 올라가고, 방위를 분별할 수 있는 도구인 나경의 근원이 되는 침법(針法)의 등장은 약 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침법은 그 당시 전쟁터에서 방향을 분간하기위해 쓰였으며, 약 3000년 전에는 자침(磁針)을 수레에 장착하여 생활에 활용하였고, 약 2200여 년 전에는 오늘날과 같은 24방위의 나경이 만들어졌다.
초기에는 이론적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던 풍수지리학이 이론적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2000여 년 전에 중국 후한(後漢)때 청오자(靑烏子)라는 사람이 풍수의 원전(元典)인 청오경(靑烏經)을 저술 반포한 것을 풍수지리의 이론적 시발점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한나라 시대에는 청오경(靑烏經)이라는 책이 쓰여졌다. 청오경은 작자미상으로 청오경이라는 책이름에 따라서 편의상 청오자(靑烏子)라고 부른다. 조선시대 지리과(地理科)시험에는 청오경(靑烏經), 금낭경(錦囊經), 호순신(胡舜申), 명산론(明山論)이 4대 필수과목이었으며, 그중에서 청오경(靑烏經)과 금낭경(錦囊經)이 가장중요시 되었다.
진나라 시대에는 금낭경(錦囊經)이 저술 되었다. 1700년전 진나라 곽박(郭璞 : 276~324))이 청오경(靑烏經)을 인용하여 금낭경(錦囊經)을 저술하였다. 이 로 인해 청오경을 장경(葬經)이라 하고 금낭경(錦囊經)을 장서(葬書)라고 부르게 되었다.
당나라 시대는 우리나라 통일신라시대에 해당되며, 풍수지리가 크게 발전되었으며, 패철을 이용한 좌향을 측정하였다. 양균송(楊均松), 장설(張設), 홍사(弘師), 장일행(張日行), 증문적(曾文迪), 요금정(寥金精), 복응천(卜應天) 등 많은 풍수지리 인재가 배출되었다.
송나라 시대에는 소강절(邵康節:1011~1077)은 하도와 낙서를 응용하여 방원육십사괘도진(方圓六十四卦圖陳)를 만들었다.
명나라 시대의 풍수지리는 우리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구성법의 이론으로 이기론 분야에서 새로운 학설이 대두 되었다. 택일(擇日)에 의해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조명택일(造命擇日)을 중시하면서 장택론(葬擇論)을 발전시켰다.
우리나라는 언재부터 풍수사상이 생겼는지 명확하지는 않다. 우리고유의 자생풍수에 관해서는, 삼국유사에 신라4대왕인 석탈해왕이 토함산에 올라가 어느 마을을 내려다보니 초승달처럼 생긴 집터가 길하여 그 집을 빼앗아서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도선국사(道詵國師)가 통일신라 말 중국의 풍수지리 일부를 도입했다는 주장이 있다. 기록만을 의지하고 추종한다면 당연히 우리나라의 풍수지리 중 일부가 통일신라 말 유입되었다고 믿어야 하지만, 역사적 유물로 보아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미 삼국사기에 고구려·신라·백제의 풍수에 대한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땅의 풍수지리는 전통적인 풍수에 중국에서 유입된 일부 풍수이론이 보태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풍수지리는 일종의 자연과학(自然科學)으로, 이 땅의 환경에 부합된 이론이다. 만약 지형과 풍습 및 역사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배척을 당하고 소멸되었을 것이다. 또한 중국이론의 유입은 중국 북부지역의 환경요인과 용맥(龍脈)이 유사하기 때문에 무리 없이 적용되었을 것이다.
통일신라 말기에 들어 중국의 풍수가 문자로 들어와 우리의 풍수와 접목되어 우리나라 풍수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고, 중국 북부의 지형은 한반도의 지형과 문화의 유사성이 많아 더욱 밀착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중국에서 유입된 일부의 풍수마저도 애초에 이 땅의 조상인 동이족(東夷族)이, 풍수가 만들어지고 발전한 중국 장강과 황하 이북지역에서 살았기 때문에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의 풍수지리가 동이족의 산물이라는 이론도 어느 정도는 합리적인 논리성을 가지고 있다.
고려의 건국에 도움을 준 도선국사(道詵國師)의 풍수는 계속 이어져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조선 초기에 한양에 수도를 잡는 등의 영향을 준 이래로 지속적으로 계승 발전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이어 풍수사(風水師)들은 국가시책(國家施策)과 왕권강화(王權强化)를 이루는 데 일조했으며, 풍수지리는 출세와 가문의 영달을 바라며 출사(出仕)를 하는 학자의 기본학문 중 하나였다.
학문을 익힌 지식인들은 풍수를 통해 가문의 영달을 추구하였고, 이후 풍수지리는 일반인들 속으로 전파되었다. 학문이 깊은 승려들은 물론이고, 유교계(儒敎界)에서는 학자(學者)와 명신(名臣)이 풍수사로 이름을 얻는 경우가 많았고, 국가에서는 과거를 통해 관리로서 풍수사를 뽑기도 하여 도읍건설과 왕릉축조 등에 활용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불교(佛敎)가 국교(國敎)였으므로 종교적 영향으로 다비문화가 저변에 깔려 있었기에 매장문화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으나, 조선시대에는 유학의 이념과 가문의 건승(健勝)에 따른 출세의식의 변화에 따라, 조상숭배(祖上崇拜)를 통한 발복풍수(發福風水)가 지배적인 이론을 형성하여 매장문화가 더욱 강조되었다.
이 땅에 인간이 주거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양택풍수(陽宅風水)가 먼저 발달하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조선시대에 조상숭배와 발복이라는 대전제 아래 음택풍수가 비약적으로 발달되었다.
불교계(佛敎界)에서도 고승들이 사찰을 짓거나 궁궐을 중수할 때 대대적으로 활동하였고, 인연이 닿은 사람들에게 명당을 구해 주었다는 일화를 남기도 했다. 고승들은 풍수를 익혀 절을 세우거나 비보풍수(裨補風水)를 전수하기도 하고, 고승의 사리를 모시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이름난 풍수사로 유교계에서는 정도전(鄭道傳), 남사고(南師古), 이지함(李芝菡), 맹사성(孟思誠), 채성우(菜成雨), 성거사(成居士), 이의신(李懿信), 안정복(安鼎福), 안효례(安孝禮), 하륜(河崙)과 같은 명사들이 있었고, 불교계에서는 도선국사(道詵國師), 무학대사(無學大師), 사명대사(泗溟大師), 서산대사(西山大師), 일지대사(一指大師), 일이대사(一耳大師), 성지대사(性智大師), 성원대사(性圓大師), 진묵대사(眞黙大師)가 풍수지리의 대가로 이름이 전한다.
일정시대에는 그들의 식민지 통치를 원활하게 할 목적으로 풍수탄압 정책이 시행되었으며, 한반도의 지하자원이나 쌀 등 곡물을 수탈해갈 목적으로 전국에 토지조사와 지리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때 풍수지리에 밝은 조선인 13명을 선정하여 “13인 위원회” 를 만들어 이 땅의 명당들을 모두 물색하여 혈맥을 끊고, 도로나 철도를 내는 방식으로 고의로 산맥을 끊었다. 또한 이것에 그치지 않고 명산에는 쇠말뚝을 박아서 산의 정기(精氣)를 끊어서 조선의 훌륭한 인물의 탄생을 풍수적인 방법으로 막았다. 명리학이나 풍수지리가 미신(迷信)이라고 한국인들에게 교육시키면서 자신들은 철저하고 은밀하게 명리학과 풍수지리를 이용하여 우리민족의 말살정책에 이용 했던 것이다. 한반도는 호랑이가 발을 들고 동아시아 대륙을 향하여 나르듯 생기 있게 달려든 형상인데, 일본은 이것을 나약한 토끼의 형상으로 우리민족에게 교육시켰으며, 조선왕조 500년 동안 왕의 집무실인 근정전(勤政殿) 앞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日(날일자)로, 경성시청(현, 서울시청)에는 本(근본본)자의 건물을 지어, 하늘에서 보면 북한산-조선총독부-경성시청이 大日本 글자가 되도록 만들었다. 일본은 매장과 화장에 관한 규칙을 만들어서 개인묘지를 불허하고 화장과 공동묘지를 적극 권장했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으로 우리나라의 풍수사상은 왜곡되고 침체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국의 풍수사상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풍수지리에 대한 관심이 일반인에게도 확대 되고 있는 추세이다. 최근 뜻있는 젊은 풍수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국고유의 풍수사상을 세계화 하는데 노력을 하고 있다. 가장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문화상품이 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한국의 풍수지리를 문화상품으로 만들면, 한국의 풍수는 세계적인 문화상품으로 우뚝 설 수 있다고 필자는 자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