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 금도장(金刀莊)의 혈풍(血風)
그들이 덕주(德州)에 이른 것은 거의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석양(夕陽) 무렵이었다.
금도장(金刀莊)은 덕주 교외 한적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두두두두…
단사영 등을 태운 마차가 금도장 정문을 향해 이십여 장 가까이로 접근해 갔을 때
갑자기 둥둥 커다란 북소리가 울렸다.
그러더니 거대한 보문(堡門)이 열려지는 것이었다.
그그긍…
보문을 지나자 다시 사방은 울울창창한 수림으로 둘러싸이고
곧은 대로가 보였다.
붉고 노란 낙엽이 금도장 정원의 숲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단사영 등을 태운 마차는 빽빽한 수림 사이로 뚫린 길을 따라
전면에 보이는 내성문(內城門)을 향해 갔다.
금도장은 사방을 둘러싼 외곽의 석성(石城) 외에도
사실상 내부에 또다른 성곽이 있는 셈이었다.
숲이 끝나는 곳에 이르자 너비가 오십여 장에 달하는 푸른 호수가 나타났다.
그리고 호수 건너편에 아담한 성채가 보였다.
호수의 물줄기는 그 성을 에워싸고 흘렀다.
펑- 펑-
돌연 내성 쪽에서 호포소리가 터졌다.
이어 높은 성에서 기다란 다리가 서서히 드리워졌다.
그그그긍…
마치는 호수를 가르며 내려진 호교(護橋) 위를 질풍처럼 달려 내성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마차에서 내린 일행은 내성 중심지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염자강이 앞장 서서 일행을 인도하였다.
그때 칠순 가량의 금의(錦衣)를 입은 노인이 나타났다
. 반백(半白)이 성성한 머리칼이 바람에 흩어져 날리는데
얼굴이 깡마르고 턱끝이 생쥐처럼 뾰족해
그리 너그럽고 인자한 인상을 풍기는 것은 아니었다.
일신에 휘감은 금의는 거무튀튀한 얼굴에 크게 대조되어
그의 체모에 과분할만큼 호사롭고 어색해 보였다.
그러나 턱 밑 제비꼬리만한 수염을 열심히 쓸어내리는 모습이
멀리서 보기에도 거만하고 깐족한 성격을 나타내는 듯했다.
그의 뒤에는 십여 명의 건장한 체격을 가진 호장무사(護莊武士)들이
양 옆으로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은 황토빛 장삼을 길게 걸쳐 입고 눈알을 번뜩이면서
굳은 자세로 꼼짝도 않고 있는것이 잘 길들여진 짐승처럼 보였다.
금의노인은 만면에 여유있는 미소를 지으며 염자강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염현질(廉賢姪), 어서 오게.]
염자강은 처음 그를 보고 몹시 의아해 하더니 재빨리 포권을 취했다.
[아니, 정단주님(丁團主)께서 웬일로 본장을 찾아 주셨습니까?]
[핫핫, 이곳을 지나다 잠시 볼 일이 있어서…]
[지금 부친께선 어디 계십니까?]
[염노제(廉老弟)는 잠시 일이 있다면서 제남(濟南)에 다녀 오겠다고 했네.]
금의노인은 처음부터 계속 염자강과 단사영 일행을 번갈아 보았다.
특히 단사영을 바라보는 그의 눈초리가 예리하기 그지없었다.
(철검혈랑 단사영, 스스로 호굴로 들어왔구나.)
정단주라 불리운 금의노인은 힐끔 염자강을 바라보았다.
(새파랗게 어린 놈에게 공(功)을 빼앗길 수는 없지,
단사영만 잡으면 흑련에서 내 위상이 높아진다.
이곳이 금도장이긴 하지만 장소가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후후후,
염자강, 수작은 네가 부렸지만 공은 노부가 챙긴다.)
금의노인은 흑련의 사방호총 가운데 남방(南方)의 호령(護令)인 흑호단(黑虎團)의 단주였다.
-태산호왕(泰山虎王) 정위(丁威)!
삼국(三國)의 조조(曺操)의 뺨을 치는 효웅(梟雄)의 기질을 가진 자이지만
장비(張飛)못지않은 신력(神力)을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간사한 머리와 패도적인 무공을 익힌 그는 기회주의자의 표본이기도 했다.
정위는 중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 어서 안으로 듭시다.
내가 주인은 아니오만 이곳 금도장의 보주는 나와 두터운 친분이 있으니
오늘 내가 잠깐 그를 대신 행세했다 해서 크게 나무라진 않을 것이오. 하하하.]
그는 까닭없이 호탕하게 웃어 젖히며 앞장섰다.
작달막한 체구에 넓은 금포자락을 휘저으며 짐짓 위엄차려 걷는 폼이
뒤에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쿡쿡 웃음이 나게 했다.
거대한 의사청(議事廳).
넓은 대청 안은 잘 꾸며져 있었다.
그곳엔 어느새 진수성찬의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다.
일행은 염자강의 안내로 모두 좌정하여 앉았다.
좌중에는 염자강과 정위, 단사영 일행 뿐이었다.
곁에서 잔심부름을 하거나 어른거리는 사람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대청 밖은 이렇듯 고요했으나 대청 안에서는 염자강의 잇따른 웃음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나왔다.
[핫핫… 자, 드시지요.]
낭노가 잔을 내려 놓으며 담담한 웃음을 짓고 말했다.
[긴 여행이라 마침 지치고 목이 타던 참인데 이런 환대를 받게 되니 정말 기쁘군,
그런데 우리가 진정 이런 대접을 받을 만큼 금도장의 귀한 손님이 될 수 있는지
염려스러운데…?]
그는 이렇게 말하며 의미있는 눈길로 염자강을 쳐다보았다.
그 말에 염자강이 웃음 띤 얼굴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더니 갑자기 호방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을 본장에 모시게 된 것을 다시 없는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는데요.]
그는 말끝을 맺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더니 갑자기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시며 표정이 굳어졌다.
[사실 제가 이렇게 여러분을 초청한 것은
사형(社兄)께 한 가지 물건을 얻었으면 하는 청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 말에 순간적으로 단사영의 눈꼬리가 가늘게 떨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담담한 신색을 찾았다.
염자강은 그러는 단사영의 두 눈을 쏘아보며 말했다.
[사형, 본인이 원하는 것은 바로 네놈의 목이다!]
단사영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네가 나의 정체를 알고도 모른 척하고 있었음을 안다.
하지만 네 목을 가질 자격은 너에게 없다.]
[핫핫핫… 과연 그럴까?]
염자강이 벼락같은 광소를 터뜨렸다.
순간이었다.
꽝!
요란한 소리가 울리며 그들의 중앙에 있던 주안상이 허공으로 날았다.
그와 동시, 단사영 등은 갑자기 발 밑이 푹 꺼지는 것을 느꼈다.
(함정(陷穽)!)
단사영은 직감적으로 그것을 느꼈다.
그는 공력을 끌러올려 몸을 솟구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뿐이었다.
휴류류륭…
가공할 흡인력(吸引力)!
하늘에 떠 있는 태양조차 끌어당길 정도로 엄청난 흡인력이
단사영을 바닥으로 잡아끌고 있었다.
(으읏! 가공할 흡인력이다.)
단사영은 혈마충천의 경공을 펼쳐 몸을 솟구치려는 듯
발바닥의 용천혈(湧泉穴)로 혈염지력을 몰아갔다.
바로 그때, 그의 귀로 당황해하는 냉가려의 비명성이 들려왔다.
[아앗!]
흠칫 놀라 바라보니 냉가려의 몸이 하염없이 밑으로 빨려가는 것이 아닌가?
그녀 뿐만이 아니었다.
낭노도, 정위도 단사영처럼 함정에 빠져 있었다.
하나 낭노와 정위는 이 순간 진력을 끌어올려 흡인력에 저항하고 있었다.
다만 어두컴컴한 어둠과 느닷없는 함정의 출현으로 인해
놀란 냉가려만이 채 진기를 고르지 못한 채 정신없이 떨어져 내릴 뿐이었다.
(바보 같으니…)
냉가려의 무공은 상당한 수준에 달해 있다.
하지만 그녀는 여자(女子)였다.
단사영은 힐끔 바닥을 바라보았다.
함정은 빛줄기 하나 들어오지 않은 암흑천지였다.
하지만 그에겐 통하지 않았다
. 일순 단사영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나왔다.
[헉!]
구우우우우웅…
함정의 밑바닥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다.
거대한 풍차(風車)가 돌 듯,
무엇이든 빨아당기고, 짤라낼 듯한 거대한 바람개비 모양의 풍차가
선풍(旋風)을 일으키고 있었다.
바람개비가 돌아가면서 일어난 흡인력에 의해 그들이 하염없이 빨려가고 있었다.
만약 저기에 닿는다면 온몸은 걸레조각마냥 찢겨지고 말 정도였다.
(저 바람개비는 일반 철(鐵)이 아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깰 수 없는 만년한철(萬年寒鐵)로 만든 바람개비다.)
단사영은 냉가려를 바라보았다.
이미 그녀는 바닥 지척까지 내려가 있었다.
(혈마충천의 경공술을 펼치면 이곳을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다.
하지만 이대로 두면 냉가려의 몸은 산산조각이 난다.)
단사영은 이를 앙물었다.
(염자강을 칠 기회는 아직 있다. 일단 그녀를 구하자.)
그는 즉시 천근추(千斤錐)의 신법을 펼쳤다
. 찰라 그의 몸이 급격히 밑으로 하강(下降)했다.
슈아앙-
그와 동시 그는 냉가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냉낭자! 냉…이런!]
빠른 속도로 하강해 냉가려의 몸 옆에 당도한 순간
단사영의 얼굴에 어이없는 기운이 스쳤다.
냉가려는 혼절을 한 상태였다.
(자기 능력을 발휘했다면 이깟 함정을 충분히 벗어날 수 있는데도
놀란 나머지 기절해 버리다니…)
단사영은 즉시 공력을 일으켰다.
이어 마치 물건을 허공 높이 던지듯
냉가려의 몸을 낚아챔과 동시에 위로 휙 내던졌다.
[낭노, 그녀를 돌봐 주시오.]
[헐헐헐, 이 나이에 노부보고 장가를 들란 말인가? 그녀를 돌봐 달라니?
하나 그만한 미인이면 평생을 돌봐 줄 수 있네.]
낭노는 웃으며 솟구쳐 올라오는 냉가려를 가슴으로 안았다.
그 순간 단사영의 외침이 들렸다.
[바람개비를 깨겠소.]
[이크!]
낭노는 놀란 눈을 하며 급급히 호신강기를 일으켜 자신의 몸 주위에 막강한 강막을 쳤다.
정위 역시 호신강기를 끌어올렸다.
그 순간 단사영의 쌍장에서 시뻘건 불길이 일어났다.
[혈령파천(血靈破天)-!]
꽈우우우우---꽈우우우우---
암흑천지를 태우는 시뻘건 화기(火氣)가 지옥의 불길처럼 일어났다.
화기는 화룡(火龍)처럼 밑으로 쏘아져 내려갔다.
꽝! 꽈아아앙--!
화룡이 먹이를 잡아먹듯 바닥을 휘감는 순간 견고하기 그지없는 만년한철이
요동을 치더니 이내 산산히 부셔져 나갔다.
꽈장창--쌔앵- 쌔앵--
깨진 철조각들이 함정의 공간을 마구 날아다닌다.
하지만 절정의 공력을 가진 단사영 등은 무사히 바닥에 내려서고 있었다.
그 때였다.
[으핫핫…!]
천정 꼭대기에서 염자강의 광소소리가 마귀의 울음같이 들렸다.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 하지만 본 장의 금석연옥(金石煉獄)에 갇혔으니
여기서 살아나갈 생각은 아예 않는 게 좋을 거다.]
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 꽝! 하는 소리가 둔탁하게 일어나며 천정이 닫혔다.
찰라 정위는 안색이 대변해 크게 소리쳤다.
[아니, 염자강! 이게 무슨 짓인가?]
[핫핫…!]
천정 꼭대기에선 득의한 광소만이 울려왔다.
정위는 왈칵 분노가 끓어올랐다.
[이놈아, 네가 나에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네 부친과 나와의 친분을 봐서도 네가…]
그는 목청이 터져라 노성을 질러댔다.
그 순간 어디서 들려오는지 방향을 잡을 수 없는 염자강의 음성이 들렸다.
[정단주께는 매우 죄송한 일이지만 어쩔 수가 없소이다.
하지만 장단주께서 본장을 방문한 까닭은
나를 제쳐두고 단사영을 잡겠다는 흉심 때문이 아닙니까?
그곳에 단사영이 있으니 그를 죽이던지 살리던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핫핫핫!]
그 말에 정위는 천정을 노려보며 멍하니 섰더니 이를 바드득 갈았다.
[흥, 교활한 놈, 네놈의 심기(心氣)를 능히 짐작할 수가 있겠구나.]
그는 분통을 이기지 못해 주먹으로 가슴을 꽝꽝 치며 소리쳤다.
[너희 부자의 흉심을 미리 알아채지 못한 것이 내 불찰이지!
이십여 년 동안이나 여길 드나들면서도 여기 이런 설비가 있다는 걸 몰랐다니
, 분하다!]
그는 야수가 몸부림치며 울부짖듯 크게 요동을 치더니 갑자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눈을 허옇게 뒤집어 뜨고 쉴새없이 이를 갈아붙였다.
그의 분노는 하늘도 꿰뚫을 지경이었다.
단사영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주위를 살폈다.
낭노 역시 침착하고 담담한 모습으로 사방의 벽면을 한가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놀랄만큼 담담하지만 희끗한 눈썹 아래의 번뜩이는 눈은 수정체처럼 밝았다.
그리고 그 눈빛은 막막하기만 한 지하 석옥의 벽을 꿰뚫어
밖을 보는 듯한 날카로움이 있었다.
언제 깨어났는가?
냉가려는 염자강에 대한 분노를 삭히지 못하고
양손을 꺾어 허리를 짚고서 천정을 노려보았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싸늘한 안광을 발하는데
그녀 특유의 사납고 날카로운 성미가 발동했다.
갑자기 두 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눈빛이 더욱 짙고 날카로와지는가 싶더니
그녀는 갑자기 짧다란 일갈을 지르며 일장을 내갈겼다.
[얏!]
쾅!
굉장한 폭음과 함께 귓고막을 찌를 듯한 금속성이 뒤섞여 울렸다.
그녀의 일장에 짧은 순간 석실이 진동을 일으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우장이 축 늘어진 채 비틀거리며 두어 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바로 이 때다.
[핫핫핫… 공연히 힘 낭비할 필요 없소이다.
가만 있어도 며칠 후엔 기력이 빠져 죽고 말 테니!]
염자강의 음성이 다시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닥쳐랏, 교활한 놈!]
손목의 통증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냉가려가 대뜸 성난 일갈을 터뜨렸다.
[빙백용녀, 그대의 무공이 절정에 달했다는 것을 아오만
그 벽은 모두 다섯 치 두께의 강철로 만들어진 금강모철(金剛母鐵)이니
설사 그대가 금강역사라 해도 뚫지 못할 것이오, 하하하…]
냉가려는 피가 배어 나오도록 입술을 깨물며 화를 이기지 못해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때 낭노가 나직하게 한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저 자의 말이 맞소, 소저!
이 벽들은 모두 금강모철(金剛母鐵)로 만들어져 있소.]
[아니,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소?]
낭노는 나직하게 소리쳤다.
[노부는 일평생을 철과 함께 살아온 사람이오.
금강모철은 단단하기가 만년한철에 열배도 넘소.]
다른 사람은 그 말을 믿지 못하겠지만 단사영은 낭노의 말을 믿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앗, 뜨거워!]
벽에 등을 기대고 생각에 잠겨 있던 냉가려가
뾰족한 비명을 지르며 퉁겨내 듯 몸을 떼었다.
그와 동시 다른 세 사람은 지독한 열기가 함정 가득 뿜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츠으으으…화르르르…
사방 벽에서 뜨거운 열기와 증기가 함께 뿜어져 나왔다.
채 일각도 안 되어 숨이 탁탁 막히기 시작했고
이 뜨거운 열기 속에서 숨을 몰아쉬면 가슴 속에서 불길이 일어나는 듯해
견딜 수가 없었다.
[어서 운기해서 열기를 막아내야 한다.]
낭노가 나직하나 다급하게 소리쳤을 때
정위는 벌써부터 눈을 감고 운공에 들어 있었다.
당황하기만 하던 냉가려는 그의 말을 듣고서야 급급히 진기를 운행시키기 시작했다.
처음엔 진기의 대항으로 그 열기를 조금은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엔 바닥에서도 열기가 뿜어져 나와 감옥 안은 살갗을 익히고
뼈까지 흐물흐물하게 만들 것 같은 뜨거운 열기로 충만되었다.
그러자 모두들 더 이상 그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얼굴이 불덩이가 된 듯이 붉어졌다.
몸은 물에서 건져놓은 것처럼 땀으로 후 줄근하게 젖었다.
뜨거운 입김과 함께 몸 속의 기운이 밖으로 흘러나와
네 사람은 금방 기진맥진해 버리고 말았다.
[이놈이… 여우같은 놈이, 우리를 익혀 죽이려고…]
정위는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가쁘게 숨을 몰아 쉬며 떠듬떠듬 중얼거렸다.
이젠 벽면을 향해 일장을 내휘두를 힘도 용기도 없었다.
금방이라도 꼴깍 숨이 넘어가 버리고 말 것 같은 위기에
모두들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다.
바닥에 주저앉으면 엉덩이 살갗이 익어 버릴 것처럼 뜨거웠고
벌떡 일어서면 발바닥은 불로 지저지는 것 같은 고통이 왔다.
[핫핫핫…]
이 뜨거운 열기로 가득찬 감옥 속으로 염자강의 웃음소리가
불기를 품고 달려들었다.
[죽일 놈!]
정위는 눈알을 허옇게 뒤집어 뜨고 천정을 향해 이빨을 갈았다
. 눈을 감고 있던 단사영도 천정 쪽을 한 번 힐끗 노려보더니
이내 눈을 내리 감았다.
그만이 한 귀퉁이에 꼼짝 않고 앉았을 뿐
정위와 냉가려는 어쩔 줄을 모르고 석옥 안에서 우왕좌왕했다.
[이 죽일 놈아, 어서 나를 꺼내주지 않으면 네 아비의 목을 베고 말겠다.]
정위는 악에 받쳐 몸을 부르르 떨며 고함쳤다.
그러나 천정 쪽에선 아무 대꾸가 없었다.
이때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당황하여
석옥 안을 왔다갔다 하는 냉가려의 귀에 낮은 전음이 들렸다.
[낭자, 어서 내 곁으로 오시오.]
그건 바로 낭노의 음성이었다.
냉가려가 몸을 홱 돌려보니 그는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아직도 처음의 그자리에 꼼짝도 않고 있었다.
냉가려는 얼른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낭노의 손이 어느 곁에 뻗쳐 오는 것 같더니
냉가려의 손을 덥썩 쥐었다
. 이어 그의 전음이 들려왔다.
[낭자, 현빙마공(玄氷魔功)을 몇 성까지 익혔소.
적의 이목이 있으니 전음으로 말하시오.]
그의 느닷없는 질문에 냉가려는 의아했으나
어떤 묘책이 있어 묻는 것이라 생각하고는 서슴없이 대꾸했다.
[십성(十成) 정도예요.]
[그 정도면 어느 정도 되었군, 그럼 냉혼검법(冷魂劍法)을 몇 성 익혔소?]
(허억! 어떻게 그걸!
냉혼검법은 내기 구운룡주를 통해 익힌 구룡비예 중 하나다.)
냉가려는 흠칫했다.
자신 혼자만이 전설의 검법, 냉혼검법을 안다고 믿었다.
하나 그 믿음은 신검황 자운량 역시 냉혼검법을 연성하고 있음을 아는 순간
여지없이 깨졌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시 냉혼검법의 말을 듣고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으랴?
[노선배, 노선배께서 어떻게 그 사실을…]
[지금은 자세한 내막을 말할 시간이 없네. 몇 성 익혔나?]
[…]
냉가려는 선뜻 대꾸치 못하고 낭노의 눈을 응시했다.
낭노의 눈엔 진실만이 가득했다.
[삼성(三成) 정도 입니다.]
[됐네, 그럼 어서 눈을 감고 노부가 전수해 주는 구결을 암기 하게.]
낭노는 전음으로 이름도 알 수 없는 현천선강(玄天仙 강)의 구결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냉가려는 그가 일러주는 대로 구결을 머리 속에 담아 암기하면서 저으기 놀랐다.
(이런 현음강기가 있었다니! 믿을 수 없다.
이 무공은 본궁의 현빙마공보다 더 뛰어나다.
대체 이 노인의 정체가 뭐란 말인가?)
하나 의혹을 일으키기엔 그들이 처한 환경은 극히 위험한 처지!
냉가려는 잡심(雜心)을 버린 채 낭노가 일러주는 구결을 암기하며
그 오의를 새기기 시작했다.
낭노가 일러주는 구결은 극히 심오했지만
현빙마공과 냉혼검법과 유사한 점이 많아
오의를 깨닫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 무렵,
정위는 잠시도 안정하지 못하고 초조하고 불안감에 쫓겨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는 숨이 탁탁 막히고 호흡조차도 어려운 이런 상태에선 잠시도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시커먼 손이 목을 꽉 조여 오는 것 같은 압박(壓迫)!
[아…]
그는 머리를 흔들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다 비명 같은 신음을 지르고 말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는 품 속에서 작은 검을 꺼내 쥐고는
닥치는 대로 벽을 찌르기 시작했다.
[얏!]
그의 빠른 몸놀림으로 손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다만 검의 광채만이 이 희미한 공간 속에 번뜩였다.
챙- 채앵-
검날이 벽을 찌를 때마다 날카로운 금속성이 귓고막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세게 휘둘러지는 그의 검도 겨우 견고한 벽면을 긁는 흔적만 낼 뿐이었다.
파파팟--챙--
쇳조각과 쇳조각이 긁히면서 살점을 얇게 져며내는 듯
몸서리쳐지는 쇳소리를 일으켰다.
그 때마다 새파란 광채가 사방으로 뻗쳐가고
번뜩이는 검날은 허공으로 파닥이며 솟아 오르는 은어(銀魚)의 비늘같이 보였다.
낭노와 냉가녀는 눈을 감은 채 뭔가 괴이한 일에 열중해 있었다.
단사영은 조용히 묵상하듯 앉아 있었다. 오직 정위만이 미친 사람마냥 발광을 할 뿐이었다.
챙- 챙-
요란한 금속성이 칠흑 같은 어둠의 막을 마구 뒤흔들어 산산조각으로 깨뜨려갔다.
그의 몸놀림이 어둠 속에서 사자(死者)의 옷자락처럼 희뜩희뜩 보이는 것 같았다.
[야잇!]
그는 더욱 손끝에 공력을 돋구어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금속성은 몸서리쳐지도록 더욱 날카롭고 커져
저주의 신(神)이 이를 갈아붙이는 소리 같았다.
그가 휘두르는 검은 전래보검(傳來寶劍)중에 하나로 꼽히는 어장보검(御長寶劍)이었다.
그런데 이 절세보검으로도 겨우 벽면을 긁어내는 흔적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얍!]
정위는 마지막 기합을 지르며 팔을 휘둘러대다 마침내 기력이 탈진되어
두 어깨를 크게 흔들며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의 오른손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바로 이 때였다.
[이야아압-!]
우뢰와 같은 기합음이 석옥 안을 뒤흔들며
갑자기 번개불 같은 푸른 광채가 어둠 속에 번쩍하지 않는가?
정위는 소스라치게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홱 틀었다.
[이야아아아-!]
기합음은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고 감옥 안에서 웅웅거리며 맴돌았다.
이 때다.
버--언--쩍--!
푸른 광채가 번쩍하더니 냉가려가 정좌한 자세로 벽면을 향해
길게 쌍장을 뻗치지 않는가?
그녀의 자세는 매우 단아해 보였는데
쌍장의 장심에서 적(赤)과 백(白)의 두 줄기 광채가 빛살처럼 길게 뻗쳐나갔다.
쏴아아아…쿠아앙…
그 모습은 마치 허공을 가르는 번갯불을
그녀가 두 손에 잡아 다시 발출하는 것 같았다.
정위는 한 순간 몸이 석상같이 뻣뻣하게 굳어져
일련의 놀라운 광경 앞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그런데,
콰쾅- 꽈아아앙--
갑자기 거대한 산악의 중심부가 떠밀려나가는 듯한 굉음이 일며
그의 면전에 있는 벽면이 사방 한 자 크기로 떨어져나가지 않는가?
그와 동시 사각의 틈으로 무수한 빛줄기가 화살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아!]
빛을 본 순간 네 사람은 동시에 비명같은 탄성을 질렀다.
이들의 얼굴은 일순 말할 수 없는 환희로 가득차고
죽음의 늪으로부터 벗어났다는 벅찬 기쁨에 전율했다.
냉가려의 놀라움도 컸지만 단사영은 냉가려의 실력을 보고
내심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보다 더욱 강해졌다. 조금전 낭노와 무슨 말을 서로 오고간 것 같았는데 혹시 그때?)
그는 낭노를 힐끔 바라보았다. 하나 그 뿐이었다.
그는 낭노에게도, 냉가려에게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이순간 단사영의 얼굴은 무표정하게 잔뜩 굳어져 있었다.
이때 낭노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자, 어서 이곳을 빠져 나가세. 그 자가 또 무슨 흉계를 꾸밀지 모르니…]
[그렇소!]
정위는 재빨리 소리치더니 번개같이 몸을 날려 제일 먼저 석벽을 뚫고 나갔다.
밖은 의사청의 대청 아래로 이어지는 뜰이었다.
그런데 정위가 밖으로 뛰어 나가자마자 목청이 째지는 듯한 고함소리가 울렸다.
[쏘아라!]
ㅆ-! 슈슈슈슉---!
정위가 몸을 홱 트는 순간 무수한 은빛 암기가 빛발치듯 날아오지 않는가?
수백 수천의 암기들은 마치 빛살처럼 온통 허공을 빽빽이 누비며 날았다.
그걸 본 정위는 눈알을 허옇게 뒤집어 뜨며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 염자강! 감히 노부 앞에서 마지막 발악을 하려는 게냐?]
그는 몸을 기우뚱하더니 갑자기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가려는 거대한 괴조(怪鳥)처럼
넓은 소맷자락을 휘둘렀다.
팍-! 파파파파팍-!
화살같이 그의 몸으로 박혀들던 은빛 암기들이 그의 소맷바람에 부딪치자
소나기처럼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와 동시 정위는 차갑게 냉소하며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마치 한 마리 비응(飛鷹)같이 쑤욱 솟아오르던 그의 몸은
허공 중에서 갑자기 팽그르 하더니 다시 날개짓을 하듯
길게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맞은편 지붕 위로 날아갔다.
[으악!]
[크아아악!]
지붕 위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며 핏 줄기가 사방으로 뻗쳤다.
그와 동시 잘리고 토막난 몸뚱이들이 우박 쏟아지듯 지붕 아래로 떨어졌다.
지붕 위에 숨어 이들에게 암기를 전개하던 금도장의 무사들이었다.
[하하하!]
정위는 성난 독수리처럼 우짖으며
미친 듯이 양 날개를 퍼덕이며 지붕 위에서 날뛰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백여 구의 시체들이 찢기고 잘린 채 지붕 끝에 걸쳐지거
나 땅바닥에 겹겹으로 수북이 쌓였다.
지붕의 골을 타고 핏물이 처마 끝으로 흘러내리는데
정위는 지붕 꼭대기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깍깍거리며 웃었다.
그의 금포자락이 바람에 심하게 나부껴
막대기처럼 깡마른 몸뚱이가 부러질 듯 위태롭게 보였다.
그런데 허공을 향해 까마귀처럼 우짖는 모습과 반대로
그의 두 눈은 단사영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광소소리는 여전히 울리는데 그의 두 동공에서는 핏빛 살망이 그려지고 있었다.
이때 낭노와 단사영, 냉가려는
미친 듯이 살수를 전개하는 정위를 힐끗 바라볼 뿐이었다.
문득 낭노가 단사영의 어깨를 툭 쳤다.
[…?]
조용히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낭노가 웃으며 손가락으로 등뒤를 가르켰다.
이 기회에 후원 쪽으로 빠져나가자는 암시였다.
단사영은 그의 뜻을 눈치챘다.
(이곳을 빠져나가자고? 천만에, 난 이곳을 초토화 시키기로 이미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달리 이미 낭노와 냉가려는 후원 쪽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홀로 우두커니 서 있게 된 단사영
은 냉가려가 걷던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자 시선을 외면했다.
냉가려의 교구가 파르르 경련했다.
같이 갈 줄 알았는데 가만히 서 있는 단사영이 미웠다.
바로 그 때였다.
[아악!]
잠잠하던 지붕 위에서 또다시 단말마의 비명이 터지지 않는가?
냉가려가 놀라 고개를 홱 돌리니 경사진 지붕 반대편에서
서너명의 무사들이 정위의 등 뒤쪽으로 암격해 오다 그의 살수를 맞고 날아가는 것이다.
그들은 정위가 몸을 틀며 두어 번 소맷자락을 펄럭이자
그대로 비명을 지르며 뒷뜰 쪽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마지막 한 명까지 처치했다고 생각되는 순간
갑자기 정위가 앞으로 푹 쓰러지지 않는가?
[앗!]
냉가려는 경악해 눈이 크게 벌어지다
한순간 발끝으로 지면을 박차고 지붕 위로 날아갔다.
휘릭-!
지붕 위는 온통 붉은 피로 뒤덮여 질퍽하고 미끄러졌다.
그녀는 재빨리 걸음을 옮겨 정위에게 다가갔다.
때마침 몰아치는 바람에 피비린내가 코와 입 속으로 훅 끼쳤다.
숨이 콱 막히자 그녀는 재빨리 들이키던 숨을 크게 뿜어냈다.
정위는 피바다 위에 죽은 듯이 엎어져 있었다.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이지? 그가 왜 갑자기 쓰러진 걸까?]
냉가려는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런데 그 찰나 정위가 맹렬하게 몸을 틀며 그녀의 맥문을 나꿔챘다.
[앗!]
그녀가 황망히 놀라 외치는 순간
너무나 음산해 소름이 끼칠 것 같은 음소가 정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흐흐흐!]
[아니, 이게 무슨 짓이오?]
냉가려는 너무나 놀라 잠시 동안 넋을 잃고 있다 버럭 소리쳤다.
이때 그의 돌연한 비행(非行)에 놀란 낭노가 몸을 날려 지붕 위에 나타났다.
그는 면전의 상황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낭노는 분노를 금치 못해 얼굴빛이 말이 아니었다.
[정위, 기껏 살려준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는단 말이냐?]
정위는 냉가려의 맥문을 쥔 손에 힘을 가하며 낭노를 쳐다봤다.
[흐흐흐, 늙은이는 빠져라!]
낭노는 그의 얼굴에 침이라도 콱 뱉아주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누르며
한 발 다가갔다.
[움직이지 마라.]
정위는 손에 더욱 힘을 가하며 그의 접근을 막았다.
[윽!]
그가 손끝에 힘을 가함에 따라 냉가려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낭노는 어쩔 수 없이 이를 갈며 걸음을 멈췄다
. 냉가려를 쳐다보니 그녀의 안색은 점점 파리하게 질려가고
구슬같은 식은땀이 솟아났다.
그녀는 고통을 참느라 얼굴을 잔뜩 일그러 뜨린 채 이를 악물었다.
금방 이빨 끝이 살 속으로 박혀들어 피가 흘렀다.
[저런 죽일 놈!]
낭노는 그녀의 피를 보고는 더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주먹을 쥔 채 부르르 떨며 정위를 노려보았다.
정위는 냉가려의 맥문을 놓지 않은 채 엎어졌던 자세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가에는 살괭이 같은 교활이 맴돌았다.
낭노는 그의 얼굴을 보자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한 줌에 그의 목을 꺾어 놓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견딜 수가 없이 크게 일어났다.
그는 이를 악물며 속으로 그 분노를 삭혔다.
(아서라, 자칫 잘못하다가는 냉낭자가 변을 당한다.
단 한 번의 기회! 한 번의 기회만 있으면…)
이 때다. 정위가 힐끔 지붕 아래 단사영을 주시했다.
이 무렵 단사영은 수수방관(袖手傍觀)한 채
지붕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그러한 모습은 마치 강건너 불구경을 하는 것 같았다.
정위는 고개를 갸웃였다.
(이 계집과 저 놈은 보통 사이가 아님이 분명한데 저 놈 눈치를 보면 남보다 더하군?)
그러나 그에 반해 엄청난 고통이 밀려오는 가운데
단사영을 바라보고 있는 냉가려의 눈빛엔 믿음이 담겨 있었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도 이랬어, 나부사흉의 꾀임에 빠져 들어
쌍부혈마 탁천에게 사로 잡혔을 때도 그랬어,
저분은 이런 일에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아.
하지만 곧 날 구해주실 거야, 그 때처럼…)
장소와 상대가 다를 뿐 몇 달 전 단사영과 냉가려가 처음 만났던 상황은 같았다.
문득 정위가 단사영에게 말했다.
[단사영, 이 계집을 살리고 싶으면 스스로 연마혈을 찍어라!
그럼 이 계집 뿐만 아니라 너와 저 늙은이 목숨까지 살려주겠다.]
그 말에 냉가려가 고통 중에서도 내심 웃었다
(정위, 꿈을 깨라.)
과연 그러했다.
왠 개가 짖느냐는 듯 단사영은 외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아예 등을 돌렸다.
갑자기 정위는 더 참다 못해 냉가려의 맥문에 더욱 압박을 가함과 동시
다른 손으로 그녀의 사혈을 찍어가며 소리쳤다.
[흥, 이 년의 목숨을 거두기 싫단 말이오?]
[아앗!]
냉가려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그러나 단사영은 여전히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침착한 눈길로 그의 하는 양을 지켜보기만 했다.
[아아악!]
냉가려는 맥문에 극심한 압박이 가해오자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몸을 틀었다.
그녀의 얼굴과 입술에 핏기가 싹 가시고 몸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그녀의 몸은 축축하게 땀으로 젖었고
불규칙한 호흡을 보아 생명의 위험이 어디까지 미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때였다.
정위가 단사영에게 신경을 쓰고 있자
낭노가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양의분심(兩儀分心)이면 일당만적(一當萬敵)이라.]
[왠 잡소리냐, 노인네!]
정위는 눈알을 뒤집어 뜨고 낭노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이를 악물며 얼굴이 일그러뜨렸다.
냉가려의 맥문을 쥔 손이 마치 불덩이를 쥔 듯이 뜨거워지지 않는가?
살가죽이 벗겨져 나갈 듯이 화끈거리며 뼈마디까지 흐물흐물하게 녹아버릴 것 같았다.
[윽!]
정위는 당황한 비명을 지르며 얼른 뿌리치듯 맥문을 놓았다.
그 순간 그는 냉가려의 사혈을 쥔 손에 진기를 꾸역꾸역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허억!]
이번엔 불에 덴 손이 얼음구덩이 속에 파묻힌 듯 오싹한 한기가 덮쳐오지 않는가?
뼈 속까지 얼려 버릴 듯한 싸늘한 냉기가 손목 끝에서 머리 속까지 찌르르 저려왔다.
[앗! 이게 대체 무슨 일…!]
정위는 소스라치게 놀라 양손을 떨치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이었다.
[정위, 지옥에나 가랏!]
낭노의 입에서 더할 나위가 없이 차가운 냉갈이 터졌다.
ㅆ아앙--
동시에 낭노의 소매 속에서 엄지손톱만한 구슬 하나가 쏜살같이 쏘아져 나왔다.
정위가 그것을 발견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퍼억-!
정위는 구슬이 미간에 박히는 끔찍한 고통을 받았다.
[아악-!]
정위는 황망히 손을 들어 이마에 박힌 구슬을 뽑아내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휴류류륭…
구슬이 스스로 자전(自轉)을 하며 뼈를 깍으며 뇌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 아닌가?
[아앗! 안…안 돼…!]
정위는 섬뜩한 죽음의 공포를 맛보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의 절규는 한낱 몸부림일 뿐이었다.
펑! 퍼퍼퍼퍼퍽!
정위의 머리통이 한순간에 공기 가득 든 풍선이 터지듯 터져 버렸다.
하얀 뇌, 붉은 피와 살점이 마구 날아다니는 가운데
단사영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탈명환(奪命丸)! 당신은 사천당가의 사람이었군.]
낭노가 씨익 웃었다.
[들켰군.]
-탈명환(奪命丸)!
언제였던가?
가을 비가 내리던 밤, 단사영의 목숨을 노리던 초백(草魄)의 앞을 막으며
풀의 혼백을 영원히 구천으로 날려 버렸던 죽음의 암기(暗器) 탈명환!
그것이 사천당가(四川唐家)가 만든 암기 가운데 가장 무섭다는 탈명환이었다.
낭노는 바로 방랑하는 영혼, 낭혼(浪魂)이었다.
그는 사천당가의 사람이었다.
사천당가의 고수인 그가 어떻게 흑라제후의 파천무영비 중 일 인이 되었는지는
낭혼만이 아는 일이다.
낭혼은 어느새 차가운 기운을 뿜어냈다.
조금 전 보여준 헤프고, 해학적인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자네 눈을 피해 조금 더 자네 곁에 있고 싶었는데 정체가 발각된 이상 떠나야 하겠군
. 하지만 자네에게 말해 줄 것이 있네.]
[……]
[그 누구도 믿지 말게, 내 비록 자네의 적은 아니지만 나도 믿지 말게.
이 세상엔 자네 혼자밖에 없네.]
[난 누구도 믿지 않소, 나 자신조차 믿지 않는 사람이 나요.]
[후후후…자기 자신조차 믿지 않는다. 밤의 비(夜雨)를 조심하게.]
[야우?]
[후후후, 조만간 자네와 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네.]
그의 말은 점점 잦아들었다.
말을 하면서 낭혼의 신형은 허공 높이 치솟아 오르더니
이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단사영은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천당가의 탈명환이 나타났다면 당문이 다시 부활했단 말인가? 복수의 한을 품고…)
난세(亂世)-
강호 무림이 끝도 보이지 않는 혼돈(混沌)의 수렁 속으로 깊이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이 때였다.
팍-! 파파팍-!
갑자기 번쩍 섬광이 발해지면서 눈이 부셨다.
그와 동시 사방이환하게 불이 밝혀졌다.
단사영과 냉가려는 짧은 순간에 일어나는 어둠과 빛의 교차에 일시 눈을 뜨지 못했다.
빛은 그들 두 사람을 향해 집중적으로 밝혀지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 하나, 손 끝의 움직임 하나, 눈빛의 변화까지도 감춰질 수 없었다.
단사영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장엄한 지붕의 능선이 천 장 만 장 밭이랑처럼 눈 앞에 펼쳐지고
깊게 패인 기와골은 꿈틀거리는 뱀의 움직임처럼 보였다.
이때 그의 얼굴이 갑자기 묘하게 변해갔다.
그는 갑자기 시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강렬하게 뻗쳐오는 빛 속에 눈을 떴을 때
그 빛 반대편에 서 있는 하나의 물체를 느꼈다.
그 물체는 요란한 빛 속에 휘말려 시각을 크게 자극시켰다
. 그리고 그 빛이 점차 그의 안광에 수그러지기 시작했을 때
그 물체는 뚜렷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아주 침착하고 담대한 모습으로, 그리고 점차 크게 확대되어 눈에 들어왔다.
다음 순간 단사영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져갔다.
맞은편 건물 지붕 위에 육순쯤 되어보이는 흑의노인 하나가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그의 풍체는 가히 발을 구르면 만천하를 호령하기에 손색이 없을 만큼 위엄이 있었다.
완벽할 만큼 단단하게 균형이 잡힌 근골은 무궁무진한 힘을 품고 있는 듯했다.
흑의장포를 걸친 육순의 노인으로 안색은 마치 검은 숯덩어리를 보는 듯 검었다
. 뿐만 아니라 가슴까지 드리워진 흑염(黑髥)은 은연중 위엄을 나타내고 있었다.
일대종사의 면모가 은은히 뻗쳐지지만
흑의노인의 얼굴에 드리워진 것은 존경(尊敬)과 두려움의 기운이었다.
-흑절신제(黑絶神帝) 소섭랑(蘇燮郞)!
흑의노인이 바로 흑련의 련주, 흑절신제 소섭랑이었다.
계 속
첫댓글
잘 읽어 봅니다
고은 밤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