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어느 날 불쑥 튀어나온 노래 하나가 식민지 조선을 뒤흔들게 됩니다.
바로 목포 출신의 18세 신인 여가수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입니다.
이 한 곡으로 이난영은 벼락스타가 되어 조선가왕, 국민 여동생으로
칭송받게 되는데, 이는 이 노래의 곡조 및 가사내용이 시대상을 잘
반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난영 특유의 비음 섞인 음색과 흐느끼는
듯한 창법으로 남도판소리 처럼 한(限)이 스며있어서 이 노래와
찰떡궁합이 된 게 요인일 수도 있겠습니다.
당시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듯 이난영도 몹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불우하게 성장했습니다. 아버지의 폭력으로
어머니가 가출하고, 몇 년 후에는 이난영도 결국 견디지 못하고 집 나간
어머니를 찾아나서 제주도에 정착하게 됩니다. 제주도에서는 일본인
가정의 식모살이를 했는데, 정말 뜻밖에 일본 집주인이 이난영의 노래
재능을 발견하고 자신이 소유한 극장의 가극단에 그녀를 추천하여 노래
세계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고, 이후 그녀의 실력이 알려지면서 1933년
‘오케레코드’라는 대형 음반사에서 그녀를 전속가수로 스카우트하면서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밟게 되었습니다.
‘오케레코드’는 당시 일제의 조선문화 말살정책에 저항하기 위해 1935년
경성, 평양, 목포 등 전국 10대 도시의 향토가요 노랫말 공모전을 개최
했는데, 이 때 3,000대 1의 경쟁을 뚫고 와세다대학을 나온 목포 출신의
무명시인인 ‘문일석’이 ‘목포의 사랑’이란 제목으로 응모하여 1등에 당선
되었고, 이 노랫말에 작곡가 ‘손목인’이 곡을 입히고, 오케레코드가
제목을 ‘목포의 눈물’로 바꾸어 드디어 이 곡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탄생된 ‘목포의 눈물’은 호남인들의 애창곡을 넘어서 나라 잃은
국민들의 울분과 설움을 달래주는 국민가요로 인정받게 되는데, 당시
신곡을 발표했을 때 레코드가 1천장만 팔려도 대히트인데, 단숨에 3만장이
팔렸다고 하니 그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갑니다.
목포는 목화산지로 유명한 항구도시라서 '목화포구'로 불렸고, 이를 줄여서
목포가 되었는데, 당시 목포는 군산과 더불어 호남일대에서 생산된 쌀과
목화를 일본이 배에 싣고 수탈해가는 대표적인 항구였습니다. 이러한 가혹한
식민지 수탈로 인해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가족이나 연인과
생이별하고 떠나는 경우가 많아서 이 노랫말 자체로도 많은 사람들을 눈물
짓게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1절과 3절에만 평범한 남녀간의 이별인 것처럼 꾸미고,
2절 가사에는 망국의 한을 달래는 내용이 비밀스럽게 담겼는데,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임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노적봉’이란 유달산의 별칭으로 ‘노적(露積)’이 ‘밖에 쌓아둔 곡식”이란 뜻인데,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교란하기 위해 봉우리 3곳에 볏짚을 쌓아
마치 쌀가마니 처럼 보이게 하여 군량이 풍부하다고 속임수를 썼던 전략에서
유래된 명칭입니다.
‘삼백년’의 의미 또한 임진왜란부터 일제강점까지의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가사 내용을 다시 읽어 보시면 대략 어떤 심정인지 이해가 가실 겁니다.
그렇게 지켜낸 조국인데, 이 넘들에 빼앗겼다는 생각에 얼마나 비통했을까요.
그런데 당시 모든 노래는 반드시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거쳐야 했고, 이 곡도
가사 검열 과정에서 2절 내용이 불손하다고 금지곡 처분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어쩔수없이 궁여지책으로 ‘삼백년 원한품은’을 대충 비슷한 발음의
‘삼백련 원한풍(三栢淵 願安風)은’으로 급조했는데, 재검열 과정에서 이게
뭐냐 하니 “세 그루 잣나무가 있는 연못에서 떠난 이의 안녕을 비는 바람”
이라고 둘러댄거죠. 사실 이런 연못은 존재하지도 않는데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그렇게 둘러댄 것입니다. 이로 인해 아직도 일부 사람들은 그 가사로
잘못 알고 있기도 한다네요. 선조들의 지혜가 대단합니다.
이 당시 ‘목포의 눈물’과 ‘이난영’이 온 국민에 끼친 영향이 워낙 대단해서
1968년부터 지금까지 매 년 목포에서 ‘난영가요제’를 실시하고 있는데,
작년에도 10월 15일에 ‘이난영 전국 트로트 가요제’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바
있습니다. 이렇게 특정 가수 이름으로 가요제가 매 년 개최되는 사례는
‘난영가요제’가 유일하다고 합니다. 물론 미스터트롯 출신 장*호가 작년
4월에 모 방송프로에서 ‘장*호 가요제’라는 이름으로 진행한 게 있지만
이건 즉흥적인 거라 그냥 무시할게요. 그리고 이난영과 동시대에 ‘애수의
소야곡’ 등으로 인기를 누렸던 당대 최고의 남성가수인 남인수 이름의
가요제가 작년 11월에 첫 개최된 바 있으나, 남인수의 친일행적 때문에
워낙 반대가 심해서 지속될 지는 미지수입니다.
남인수는 이난영 보다 2살 연하로 이난영이 오케레코드의 전속 작곡가인
정해송과 결혼하기 2년 전부터 서로 연정을 품었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고,
정해송이 6.25때 납북되어 사망하자 다시 만나서 로맨스를 불태웠지만
이 또한 결실을 맺지 못하고 스캔들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69년에는 한국 최초로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유달산 중턱에
세워졌고, 이난영은 아직까지도 작곡가 박시춘, 작사가 반야월과 함께
‘한국 가요계의 3대 보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사실 이난영은 대중에게 트로트 가수로만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일제시대에
다른 가수들이 감히 넘보지 못했던 블루스나 재즈장르에도 애정을 뽐냈던
선구자적인 만능 가수였고, 더욱이 이난영-김해송의 아들, 딸, 조카들이
김시스터즈와 김브라더스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미국까지 진출했었는데
혹자는 이들이 우리나라 아이돌 그룹의 효시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실제 김시스터즈는 미국의 ‘에드 설리번 쇼’에 22회 최다 출연 기록도 갖고
있는데 이 쇼는 비틀즈가 미국에 첫 진출하여 처음으로 공연했던 쇼이며,
BTS 또한 이 쇼에서 공연한 바 있습니다.
지금까지 ‘목포의 눈물’에 대해 알아봤는데, 재미있으셨는지 모르겠네요.
우리 서주공주님도 가수 이난영을 능가하는 노래 뿐 아닌 향후 활동범위와
영향력 측면에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가치를 뽐내는 훌륭한 가수로
성장하기를 기대하고, 기원합니다. 서주양이 아직 어리지만 자질과 능력과
인성과 외모가 훌륭하기에 계속 노력한다면 충분히 이 꿈이 이루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앞으로 거대한 팬덤을 형성하게될 '동분서주' 모두가
함께 할겁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정서주 공주님 화이팅~~
동분서주 화이팅~~
네 화이팅입니다. 감사합니다.
아주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타향살이 사막의한의 손목인선생 작곡이죠^^ 임진왜란때부터의 한이 담긴 가사가 있었군요^^ 사실상 90년만인 2024년에 울 공주님이 응답한 목포의 눈물 가히 21세기 이난영이라 부릅니다♥
우리 서주공주님이 지금 진정한 도장깨기 하는 거 같아요. 이미자-주현미-이은하(심수봉)-김광석 등
어쩜 부르는 노래마다 저를 울려대는지 너무하는 거 같아요. ㅎㅎ
옛노래들은 우리 민족의 한들이 모두 서려있어 슬픈감정이 더해집니다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한맺힌 역사와 노래의 역사를 잘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수가 노래를 부를때 곡을 해석하는데 이러한 역사적 측면도 담을 수 있다면 어느누구도 범접을 못할 명품이 나올꺼에요
감사합니다. 서주양 음색은 그 자체로 모든 걸 담아내는 능력이 있는 거 같아요.
솔직히 제가 노래 잘부른다고 아무 가수나 막 좋아하지 않는데, 그냥 빠져 버렸네요.
저는 가족이 모두 멀리 있어서 연휴 동안 그냥 서주양 노래에만 묻혀 살았네요.
며칠 동안 서주양 조회수 증가에 정말 기여 많이 했습니다. ㅎㅎ
감사해요 브라이언님 목포의눈물 브라이언님 때문에 새롭게 되새겨 봅니다 좋은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라이언님
숨어있는 노래에 담겨있는 비화 등을 알고 들으니 더욱 좋네요...
이런것을 서주양이 다 표현해주니
또 다른 느깜의 정서주란 장르입니다!
사실 현재 유*브에 올라와 있는 서주양 노래만 봐도 놀랍게도 서주양의 음색과 가창력이
장르불문 좋아요. 보통 가수들은 어떤 장르에는 강하지만, 또 다른 어떤 장르에는 약한 법인데...
앞으로 영화/드라마 OST도 많이 참여하면 좋겠어요.
대단합니다!
존경스럽네요.
목포의눈물에 대한 서사시 잘 읽었습니다.
목포가 목화포구에서 유래된 점, 목포의 눈물 탄생과정, 자신의 딸 김시스터즈의 탄생, 일제검열 과정이 무척 흥미롭고 새로운 사실이네요. 그당시 최신기술인 레코드가 막 출시되고 있던 시기였을텐데 3만장이 팔렸으면 어마어마한 대박이었을것으로 짐작됩니다. 요즘으로치면 BTS나 울 공주님의 출현처럼 대형가수의 등장이 아닐까요? 그당시 이난영의 나이가 18세였다니 특히 흥미로운 점이네요. 이미자, 하춘화 등 전설적이 분들이 대부분 10대후반에 혜성처럼 등장하는데, 왜 자꾸 울 공주님과 오버랩 될까요? 울 공주님이 한국나이로 열일곱이라 초신성급 가수의 탄생을 우리가 함께하고 있음을 몇십년 후의 감회가 기대되는 순간입니다.
자료수집 하고 긴글을 작성하시느라 너무나 고생많으셨습니다.
부담을 드리는거 같지만 다음 연재가 또 기대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연휴라서 한동안 다소 한가했는데, 내일부터는 좀 바빠지겠지요. 그래도 회원님들
생각해서 부지런히 후속편 만들어 보겠습니다.
덕분에 새롭게 알게되는 가요사 너무 좋네요 숨은 스토리를 생각하며 서주양의 목포의눈물을 다시 듣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이 참에 이것저것 많이 찾아 보는데, 서주양이 선곡하는 노래들이 특히 사연이 많은 거 같습니다.
그 노래의 숨겨진 비화나 전후좌우 상황을 알면 서주양의 음색으로 전달되는 내용의 깊이가 더 깊어지지
않을까 싶어서 제가 아는 건 별로없지만 연재를 시도해봤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브라이언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공주님의 청아하면서도 안정감있는 애잔한 음색~ 이난영님도 이런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다만 우리 공주님보다 청명함과 안정감은 다소 덜하고 애잔함은 더욱 짙고요. 강한 비음때문일까요.
10년전에 유*브에 등록된 이난영 가수님의 노래를 들어보니,
솔직히 저로서는 서주양이 부른 게 훨씬 좋지만, 아무래도
시대가 다르니 현재 관점에서 평가하기는 어려워 보이네요.
암튼 그 당시에는 독특한 비음이 매력적으로 평가되었을 수도
있겠다 싶어요.
아 그렇게 구슬픈 사연이
다시 한번 가사를 새겨 들어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세상에 사연없는 노래는 없는가보네요.
특히 옛노래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속사정이 참 많아보이고요.
감사합니다.
아이고
감사 한 글이네요
구구절절
사연이 많군요
노래도 애절하구요
LP를ㅡ3천장 정도
소장 하고 있는데
그때 음반 은 현재로 찾을수가 없네유 현재유통되는건
손목인 작곡 가
아닌 목포는 항구다 곡이신ㅡ이봉룡 작편곡 노래가
대다수 이네요
3천장~전문가이신가봐요.^^
ㅠ ㅠ 그럼 이거라도... ㅎ
좋은 글 감사합니다
1탄, 2탄에 이어 3탄까지 정말 재밌고 뜻깊게 잘 읽었습니다.
경의를 표합니다
브라이언님의 애독자가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