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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에 올라(登海雲臺)
石臺千尺勢凌雲(석대천척세릉운)-구름을 넘어설 듯 누대(樓臺)는 천척(千尺) 높이고
下瞰扶桑絶點氛(하감부상절점분)-굽어보는 동녘바다 티 없이 맑구나
海色連天碧無際(해색연천벽무제)-바다와 하늘빛은 가없이 푸른데
白鷗飛去背斜曛(백구비거배사훈)-나는 갈매기 등 너머로 노을이 불타네
이안눌(李安訥)
친구가 여행지에서 보내온 해운대(海雲臺) 사진
친구가 가족과 남해안 여행 중에 부산 해운대(海雲臺) 사진을 보내 왔다.
필자가 카페에 글을 올리기에 간혹 사진을 보내온다.
우리가 “부산(釜山)”하면 한반도의 제1의 항구도시, 인구 약 400만 제2의 도시,
부산 국제시장을 떠올리면서 6.25 한국 전쟁때 북한을 위시한 각도의 피난민이
운집(雲集)한 도시---
로 먼저 떠올리게 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부산으로서는 약간 서운한 생각이다.
부산은 한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도시라 하여도 과찬이 아니다.
바다와 육지 산과 강의 절경이 조화된 명승지가 대단히 많기 때문이다
그중의 절경(絶景)하나가 해운대(海雲臺)다.
“해운대(海雲臺)”이름은 어떻게 지명되고 어디에서 유래 되었을까?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1동 동백섬 안에 있는 바위에 “해운대(海雲臺)”라 새겨진
석각(石刻)글씨가 있다.
부산기념물 제45호다.
위에 있는 사진이다.
이 석각(石刻)글씨는 신라시대의 학자 최치원(崔致遠)이 쓴 것이라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최치원이 신라의 정치 현실에 실망하여 세상을 등지기 위해
합천 가야산(伽倻山)으로 가던 도중에 이곳에 잠깐 머물 때 주변 경관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든 다음, 이 바위에 “해운대(海雲臺)”라는 글씨를 새겼다고 한다.
이때부터 해운대(海雲臺)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최치원(崔致遠)의 호(號)가 “해운(海雲)”이다.
최치원의 글씨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고려시대 문신(文臣)이었던
정포(鄭誧)의 시구(詩句)중에
臺荒廢後無痕迹(대황폐후무흔적)-대(臺)는 황폐(荒廢)하여 흔적이 없고
只有海雲名字餘(지유해운명자여)-오직 해운(海雲)의 이름만 남아 있구나 !
라는 시(詩)가 있어 고려시대 그 당시에도 이 석각(石刻)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백섬 언덕 마루에는 최치원(崔致遠)의 동상(銅像)과 그의 시비(詩碑)가 있다.
시비 중에 한시 한수를 옮겨 본다.
비 오는 가을밤에(秋夜雨中)
秋風唯苦吟(추풍유고옴)-쓸쓸한 가을바람 애달픈 노래
檅路少知音(세로소지음)-세상엔 날 알아주는 이 없고
窓外三更雨(창외삼경우)-깊은 밤 창밖에는 비 듣는 소리
燈前萬里心(등전만리심)-등불 아랜 만 리 먼 길 외로운 마음
최치원(崔致遠)
최치원(崔致遠)은 후대(後代)에 해운대(海雲臺)를 찾은 문인(文人)들의 작품에서
방랑객(放浪客)또는 신선(神仙)의 모습으로 자주 등장(登場)하게 된다.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 권반(權盼) 해운대에서 지는 해를 보면서 아래의 시를 남겼다.
해운대 일몰
波恬鏡面淨無風(파념경면정무풍)-거울처럼 맑은 물결 바람도 한 점 없고
坐見浮上日浴紅(좌견부상일욕홍)-떠올라 지는 붉은 해를 앉아서 바라보면,
馬島如眉靑一抹(마도여미청일말)-대마도 속눈썹인 푸른 점(點) 하나 긋고
乾坤納納入胸中(건곤납납입흉중)-하늘 땅 가슴 가득 펄럭이며 들어온다.
권반(權盼)
가까이로는 해운대(海雲臺) 엘레지를 손인호, 조용필등이 노래로 이어 오고 있다.
부산(釜山)은
釜-큰 가마솥 부. 山-뫼산큰 가마솥이 있는 산(山)의 도시라는 의미다.
가마솥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융합(融合)을 상징한다.
큰 가마솥은 여러 가지 성격이 다른 요소들을 뒤섞어 삶는데 적합한 용기다.
융합(融合)은 녹아서 하나로 합쳐지는 의미다.
그래서 부산을 융합(融合)의 도시라고 한다.
부산하면 유명(有名)한 것이 많다.
먼저 부산은 한국 차(茶)의 중심이다. 수준 높은 다인(茶人)들이 가장 많다.
오래된 골동 보이차와 고급스러운 명품 다기(茶器)는 부산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
서울이 커피의 도시면 부산은 차(茶)의 도시라 할 수 있다.
부산은 또 불교의 메카이다.
불교 신도들이 전국 어느 도시보다도 많다.
조계종의 오랜 역사를 지닌 범어사(梵魚寺)를 비롯하여 “불지종가(佛之宗家)”라
일컬어지는 양산의 통도사(通度寺)는 부산 불교도들의 신앙 중심지다.
부산의 특이한 문화중 또 한 가지는 “역술계(易術界)의 메카”라는 점이다.
역술업계에 입문하려면 부산에 포진하고 있는 여러 문파의 장문인(掌門人)급 초식(招式)들을 접해 보아야만 한다는 말이 있다.
원래 사주, 풍수등 명리학(命理學) 고수들은 이북에 많았다고 전한다. 이로 인해 조선시대에 이북 출신은 높은 벼슬을 못하고 지역 차별을 받은 원인도 있었다.
그래서 재능 있는 이북의 인재들이 중인들 업종에 대거 투입됐다고 한다.
6.25 전쟁 때 이 명리학 대가들이 월남했다.
그들이 부산에 피란 와서 영도다리 밑에서 명리학 영업을 시작한 것이 현대한국역술사의 시작이라고 한다.
이렇게 융합(融合)도시 부산은 역사 문화가 많지만 그중 손꼽히는 것이 “대(臺)”의
명승지(名勝地)다.
부산(釜山)하면 《해안(海岸) 8대(臺)》와 《내륙(內陸)8(臺)》가 절경이다.
아래에 16대의 명승지를 소개하지만 이 16명승지 외도 많은 대(臺)의 명승지(名勝地)가 있다.
모두 해안(海岸)을 낀 절경과 날아갈 듯한 바위나 산위에 조성된 아름다운 곳이다.
▲해안(海岸) 8대(臺)
동백섬의 해운대(海雲臺)
영도의 태종대(太宗臺)
다대포의 몰운대(沒雲臺)
용당동의 신선대(神仙臺)
용호동의 이기대(二妓臺)
가덕도의 연대(烟臺)
기장의 시랑대(侍郞臺)
수영의 점이대(覘夷臺)
▲내륙(內陸)8(臺)
범일동의 자성대(子城臺)
금정산의 의상대(義湘臺)
오륜동의 오륜대(五倫臺)
회동동의 동대(東臺)
달음산의 장군대(將軍臺)
동래성의 동장대(東將臺)
동래읍의 학소대(鶴巢臺)
덕포동의 강선대(降仙臺)
▲해안(海岸) 8대(臺) 간단한 설명
1.해운대(海雲臺)
해운대란 이름은 신라 말 대문호인 최치원 선생이 지금의 동백섬 일대를 거닐다가 이곳의 절경에 심취하여 동백섬(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6호) 남쪽 암벽에 자신의 호(號) 해운(海雲)을 따서 “해운대(海雲臺)”라는 세 글자를 새겼다.
2.태종대(太宗臺)
옛 문헌인“동래부지(東萊府誌, 1740)”에
신라 태종 무열왕이 삼국통일의 대업을 성취한 후 전국의 명승지를 탐방하던 중 이곳에 들러 궁인들과 함께 울창한 수림과 수려한 해안절경에 심취되어 잠시 머물며 활을 쏜 곳이라고 하여 태종대라 이름하였다”고 전해진다.
3.몰운대(沒雲臺)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일대로 16세기까지만 해도 “몰운도(沒雲島)”라는 섬이었으나, 낙동강 상류에서 운반된 토사의 퇴적으로 다대포와 연결된 전형적인 육계도(陸繫島)이다.
몰운대 일대의 해안선은 파도의 침식으로 인한 파도의 침식 작용과 풍화 작용에 의해 해안에 생긴 낭떠러지인 해식애(海蝕崖sea cliff)와 파도로 인해 생긴 동굴(洞窟)인 해식동(海蝕洞 sea cave, sea arch)으로 인한 빼어난 경승지(景勝地)이다.
4.신선대(神仙臺)
부산시 남구 용호동 산 185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기장군 일광면 달음산에서 시작한 금련산맥(金蓮山脈)은 장산(萇山)·금련산(金蓮山)에 이어져 황령산(荒嶺山)에서 뻗어 나온 봉래산(蓬萊山) 산등성이가 부산만에 몰입하는 우암반도(牛岩半島)의 남단에 해당된다.
신선대의 해안선 지질 구성은 화산암질로 오랜 세월 동안 파도의 침식작용에 의해 발달된 해식애와 해식동으로 절경을 이루고 있다.
지척의 오륙도(五六島)와 함께 부산 제일의 절경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5.이기대(二妓臺)
이기대(二妓臺)는 남구 용호3동 산 1번지 해안일대를 말한다.
이기대(二妓臺)이름은 두 기생(妓生)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경상도 동래부 경상좌수영에서 편찬한 내영지(萊營誌, 1850) 산천조에 기록하기를
“본영(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에서 남쪽 15리에 있다.
위에 두 기생의 무덤이 있다”라고 한데서 이기대(二妓臺)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향토사학자 최한복(1895~1968, 수영출신)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수영성을 함락시키고 경치가 좋은 이곳에서 베푼 축하잔치에 수영 기녀 두 사람이 참석하여 왜장(倭將)에게 술을 잔뜩 권하고, 술 취한 왜장과 함께 물속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 두 기생(妓生)의 무덤을 썼다’고 하여
의기대(義妓臺)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고 구전(口傳)으로 전할 뿐이다.
이기대는 바다에 접한 암반이 비스듬한 경사로 기울어져 바다로 빠져드는 자리이다.
해안절벽이 기암괴석으로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한다.
6연대(烟臺)
부산 강서구 천성동 산 가덕도(加德島)중심에 가장 높은곳 해발 459m의 연대봉 정상에 봉수대가 있다.
연기를 올려 여러 가지 신호를 보내는 파수대((把守臺)인 돈대(墩臺)를 말한다.
“연(烟)”은 “연(煙)”으로 쓰기도 한다.
주봉(主峰)과 일봉거암(一峯巨岩)의 장군봉으로 되어있다.
7.시랑대(侍郞臺)
기장군 기장읍 동암리 남쪽해변에 있는 암대(岩臺)로 옛부터 기장 제1의 명승지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은 용녀(龍女)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으로 옛부터 “원앙대(鴛鴦臺)”라 하였다.
오색 찬란한 원앙새 같은 비오리((飛鳥)가 원앙대 아래 출렁이는 파도를 타고 큰무리를 떼지어 날아다닌다 하여 비오포(飛鳥浦)라 하였다.
시랑대 이름은 조선 영조 9년(1733) 시랑 권적이 기장현감으로 좌천되어 이곳의 경치를 보고 자기의 벼슬인 시랑을 따서 '시랑대'라는 세글자를 바위에 새긴 후로는 오랑대(五郞臺)의 북쪽은 원앙대(鴛鴦臺), 남쪽은 시랑대라 구분하였다.
이곳은 옛날부터 시인 묵객들이 남긴 한시도 많다.
시랑대의 절경을 월천(月泉)선생(新澳, 1714-1786)의 “시랑대기(侍郞臺記)”에
“대바위 가운데 바닥은 평탄하게 방바닥이 되어 있고, 사오십명이 앉아도 자리가 남을 만큼 넓다.
~~
대바위 앞쪽이 탁 끓어져 큰 단애(斷崖)가 되어있다.
그 아래를 내려다 보면 현기증이 생길 정도다
돌문처럼 되어 있는 큰바위 아래 쪽은 커다란 바다동굴이 있다.
큰 파도가 치면 쾅, 쾅, 우레 같은 소리를 토하면서 물보라가 공중으로 높이 치솟고,
햇빛을 받아 찬란한 일곱가지 무지개를 수놓는다. 높아진 파도는 돌바닥을 천갈래 만갈래 솟아 흐르면서 분수가 되어 옥처럼 반짝인다”고 감탄하고 있다.
8.점이대(覘夷臺)
부산 수영구 백산(白山)에 있다.
점이대(覘夷臺)는 좌수영 수군들이 바다와 나라를 지킨 전초기지였다.
점이대(覘夷臺)는 임진왜란 전부터 왜구의 침략을 살피던 군사 요충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곳이다.
▲내륙(內陸 8대(臺) 간단한 설명
1.자성대(子城臺)
부산진지성(부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은 동구 범일동 670-5번지 일대다.
자성대(子城臺)라는 이름은 부산진성을 모성(母城)이라고 하고 그 자식인 자성(子城)이라는 뜻으로 말하였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성의 일부분은 1593년(선조 26) 일본군 장수 모리휘원(毛利輝元) 부자(父子)에 의해 쌓은 성이다.
1597년(선조 30) 일본군 장수 소서행장이 주둔하였다고 하여 소서성이라고 하였다.
자성대에는 임진란에 참가한 명장 천만리(천만리)의 후손이 세운 천장군기념비가 남아 있고, 동쪽 산중턱에는 최영장군 비각이 보존되어 있다.
2.의상대(義湘臺)
양양 낙산사 입구에 있는 의상대(義湘臺)가 아니다.
부산 범어사(梵魚寺의 말사의 말사인 원효암(元曉庵)에 있는 의상대(義湘臺)는 의상대사와 관련이 깊은 유적이다.
의상대(義相臺)는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범어사와 연관이 깊다.
범어사(梵魚寺)는 1600여 년의 역사속에 민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담당해 온
한국 불교의 태동과 발전을 함께 해온 천년 고찰이다.
의상대(義湘臺)는 범어사의 말사인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에 있는
원효암(元曉庵)에서 왼편 길을 따라 50m쯤 오르다 보면, 경사진 사면에 타원형 화강암 바위에 “의상대(義湘臺)”라고 행서체(行書體)로 음각(陰刻)되어 있다.
범어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왜구의 침입으로 위태로운 나라의 안녕을 위해 이곳에서 동해를 바라보며 국태민안을 기도했던 성스러운 자리이다.
또한 의상대사가 금정산에서 해탈의 깨달음을 위해 수도하던 석대(石臺)가 바로
의상대(義湘臺)이다.
이곳에서 남해를 바라보는 절경을 “의상망해(義相望海)”라고 불리우는 금정팔경(金井八景)중의 하나이다.
3.오륜대(五倫臺)
오륜대(五倫臺)는 부산시 금정구 오륜동의 회동수원지 부근 아름다운 경치를 일컫는다.
산과 새, 바위의 조화로 병풍을 이룬 기장군 철마면의 개좌산을 비롯하여 사방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는 골짜기에 봉황과 백구가 날아 올 듯이 경관이 빼어나다 하여 ‘오륜대’라고 하였다 한다.
지금은 그 옛날 노래하던 새들과 시인·묵객들은 간 곳 없다.
옛 문헌인“동래부지(東萊府誌, 1740)”고적조에 오륜대는
“동래부의 동쪽 사천(絲川)에 있고, 시내(溪)에 접하고 암석이 기이하며 아름답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대(臺) 부근에 사는 사람이 오륜(五倫)을 갖추었기에 이를 기려
오륜대(五倫臺)라했다”고 전한다.
또한“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 1832)”고적조에는
“동래부(東萊府)의 북쪽 15리에 천암(川岩)이 기이하여 옛날 5인의 노인이 지팡이를
꽂아놓고 놀았다 하여 이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4.동대(東臺)
부산 금정구 회동동에 있던 이름난 절경지(絶景地)다.
“동래부지(東萊府誌)”에서 동대(東臺)가 “부(府)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생긴 이름으로 추정된다.
동대(東臺)의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신라 때부터 이름난 절경이었다.
“동래부지(東萊府誌)”의 기록에는
“동대(東臺)는 사천 변에 15m 내외의 바위가 깎아지른 듯 서 있었다.
계곡의 물은 굽이쳐 돌아 수십 척의 맑고 깊은 못을 이루어 물고기가 많았으니
낚시하기 좋았다.
봄여름에 이곳에 오르면 가슴이 확 뚫리는 운치가 있을 정도로 멋진 조망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5.장군대(將軍臺)
부산 기장군 정관읍 달산리에 있는 바위다.
장군대(將軍臺)는 신라 시대에 한 장군이 무술을 닦았다고 하는 바위다.
항상 구름에 싸여 있어 운장대(雲將臺)라고도 부른다.
장군대(將軍臺) 동쪽으로 동해가 펼쳐있고 남쪽으로는 함박산(含朴山), 천마산(天馬山), 달음산(達陰山)이 병풍처럼 솟아 있다.
서쪽으로는 거문산(巨文山), 백운산(白雲山)이 위용을 뽐내고 있고 멀리로 공덕산 봉우리가 눈에 들어오는 절경이다.
6.망월대(望月臺)
부산 동래고등학교 뒷산 정상에 동장대(東將臺)가 있는 산을 망월산(望月山) 또는
망월대(望月臺)라고 한다. 망월대라 한 것은 높이 솟아 달을 바라보는 경관이 좋았기 때문이다. 이 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동해에서 달이 떠서 주위 산하를 비추는 경관이 일품이다.
“동래부지(1740)”에는 이 산을 증산(甑山)이라 했다.
시루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시루 증(甑)”자를 사용한 것이다.
7.학소대(鶴巢臺)
부산 동래구 칠산동에 있던 명승지(名勝地)다.
노송이 우거진 동산(東山) 같은 높은 대를 학소대(鶴巢臺)라 불렀다.
학소대는 지난날 동래에 학(鶴)이 많이 찾아들었고, 그곳에 학이 무리 지어 둥지를 틀었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
8.강선대(降仙臺)
부산 사상구 덕포동 주민들이 안녕과 평안을 빌던 화합 장소다.
강선대(降仙臺)는 매년 음력 11월 1일이면 신선(神仙)이 지상으로 내려와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노닐다 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큰 바위나 고목 등의 자연을 숭배하는 것은 우리 고유한 토속 신앙이다.
조선 시대 동래부 사천면 덕포리에는 주민들이 화합을 위하여 윗마을(上隣)과
아랫마을(下隣)으로 나누어 각기 상강선대(上降仙臺)와 하강선대(下降仙臺)에 모였다.
신선(神仙)이 놀았다는 이곳에서 주민들이 만든 동약(洞約)의 규정에 따라 동제(洞祭)를 지내고 덕개(德浦) 나루에서 진선(津船)을 모아 공동으로 운영하였다.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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