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의 4번타자로 서며 '신바람 야구'를 하고 있는 정의윤. 4월에는 1할대의 타율에 머물렀지만, 5,6월 3할대의 타율을 유지하며 LG 상승세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5월부터 불기 시작한 LG의 ‘신바람 야구’에 중심 역할을 하는 선수가 있다. LG의 새로운 4번타자로 각광을 받고 있는 정의윤(27)이다. 어느새 프로 입단 9년차. 데뷔 첫 해부터 ‘유망주’라는 꼬리표가 붙기 시작하더니 오랫동안 ‘만년 유망주’라는 타이틀이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녔다. 상무 제대 후에도 그의 수식어는 변함이 없었다. 그라운드보다는 덕아웃의 벤치를 달구는 시간이 훨씬 많았던 그에게 올시즌 이진영의 부상이 새로운 기회로 다가온 부분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팀 상승세와 함께 4번타자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정의윤을 만났다.
- 사전 정보에 의하면 정의윤 선수가 가장 듣기 싫어 하는 말이 ‘잘생겼다’ ‘에릭 닮았다’는 말과 ‘만년 유망주’라고 들었다. 이유가 궁금하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절대로 잘 생기지 않았다(웃음). LG에는 ‘미남과’의 선수가 ‘수두룩 빽빽’이다. 난 그 수준에 끼지도 못한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절로 민망해진다. 그리고 유망주라는 단어를 맨 처음 들었을 때는 상당히 기분 좋았다. 그러나 그 수식어를 상무 제대 후에도 들어야 했을 때는 참담했다. 더욱이 ‘만년’이라는 단어까지 붙었다. 할 말이 없었다. 모두 내 탓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 그랬던 ‘만년 유망주’가 요즘 빵빵 터지고 있다. 4월에는 1할대의 빈타로 허덕이다가 5월 들어 3할대가 넘는 성적을 보였다. 6월에도 그 상승세가 이어지고 있는데 그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김무관 코치님의 조언에 타격폼이나 스탠스를 바꿨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던 폼이 지금은 상당히 자연스러워졌고, 그게 성적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칭찬과 관심을 받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김기태 감독님 말씀대로 타격 5위 안에는 들어야 4번타자라는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 한 달 바짝 잘한 것 같고 상승세 운운하기에는 이른 듯 하다.”
- LG의 두터운 외야수 벽들(이병규, 박용택, 이진영, 이대형)로 인해 그동안 선발 출전 기회가 적은데 대한 아쉬움이 있을 것 같다.
“해마다 우리 팀의 국가대표급 외야수 선수들을 보며 절망할 때가 많았다. 워낙 쟁쟁한 선배들이 많다 보니 몸이 안 좋거나 부상당할 때 출전 기회가 생긴다. 그 외에는 주로 왼손 투수가 나올 때, 아니면 대타로 타석에 서게 되는데 출전 횟수가 많지 않아서 그런지 짧은 시간 동안에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인해 자꾸 서두르게 된다. 주전일 경우에는 처음 못 쳐도 다음 세 번의 기회가 더 남아 있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받아들이지만 대타로 나가서는 몸에 힘이 들어가다 보니 원하는 결과를 얻기가 힘들다. 오늘 4타수 무안타를 쳤을 때, 주전은 ‘내일 만회하자’라고 생각하는 반면, 비주전은 ‘내일 다시 나갈 수 있을까’하며 절망한다. 백업 멤버들은 하루살이 인생이라 4타수 무안타를 칠 경우 ‘내일’이 없다. 지금의 성적은 주전으로 나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수치들이다. 비주전이었다면 이런 성적을 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지난 5월 24일 끝내기 안타의 주인공이 된 정의윤. 주전타자로 출전하면서 성적에 대한 부담을 덜고 즐기는 야구를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 그래서 상무 시절이 ‘아름답게’ 기억되고 있는 건가.
“다른 건 없다. 상무 때는 주전으로 활약했고, 경기 때마다 출전이 보장됐기 때문에 신나게 운동했던 것 같다. 군 생활을 하면서도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행복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삼진을 먹고 수비하다 ‘알’을 까도 ‘내일’을 떠올리며 위안 삼을 수 있었다. 그런 생활을 하다 다시 LG에 복귀했을 때는 1군과 퓨처스리그의 차이를 실감하며 잠시 절망을 곱씹기도 했었다.”
- 2005년 LG 입단 후 좋은 일 보다는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이 훨씬 많았다.
“매년 힘들었다. 신인 때는 그런 느낌이 없었다. 매일 시합 나가고, 많은 관중들 앞에서 야구하는 게 신이 났다. 그러나 성적이 안 나면 자꾸 욕심을 부리고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특히 팬들의 반응이 기대에서 실망으로 바뀌고, 욕도 먹을 만큼 먹다 보니 자꾸 민감해지더라. (한참 생각을 하다가)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잘 버텨왔다는 생각이 든다. 팬들이 기다려 주신 만큼 이제는 보답을 해야 할 시간이 아닌가 싶다.”
- 넥센 박병호와 입단 동기였다. 박병호가 LG를 떠나 지난해 넥센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과정을 지켜보는 심정이 만만치 않았겠다.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기에 (박)병호가 저렇게 펄펄 날 수 있는지가. 그래서 당시에는 병호한테 자주 전화를 걸었다. 왜 잘하게 된 건지, 뭐가 달라졌는지, 새로운 훈련법이 있는 건지…, 생각나는 대로 물어봤다. 그때마다 병호는 비슷한 대답을 내놓았다. 넥센에서는 삼진 먹고 들어와도 박수를 쳐준다고, 선수를 신뢰하는 덕아웃 분위기로 인해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야구는 테크닉보다 심적인 부분이 더 중요한 것 같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지금 우리 LG 얘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올시즌 LG의 가을야구의 염원이 이뤄질 수 있을까. 정의윤은 입단 9년차 만에 그 맛을 진하게 느껴보고 싶다고 말한다.
- 그로 인해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LG에서 다른 팀으로 이적한 선수들은 모두 성공한다는 이야기가 회자되기도 한다.
“특히 넥센이 그렇다. 병호 외에도 서건창, (이)성열이 형, (서)동욱이 형 등은 LG를 떠나 넥센에서 자리 잡은 선수들이다. 내가 부진할 때는 LG팬들이 나만 남았다면서 다른 팀 가서 잘하라고 얘기하더라. 한때 흔들린 적도 있었고, 섭섭한 마음도 들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오기가 생겼다. 다른 선수들과 달리 난 LG에 끝까지 남아 내가 나가기를 바랐던 팬들의 박수와 인정을 받고 싶다.”
- 지난 5월 26일 SK전에서 끝내기 안타의 주인공이 된 후 ‘물 세리머니’ 사건으로 그 여운이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물 세리머니로 인해 한동안 야구계가 시끌벅적했는데….
“내가 좀 더 앞에 나가서 그 물을 다 맞았어야 하는데, 그랬으면 아무 일 없이 넘어가는 건데, 내가 그러지 못한 바람에 여자 아나운서 분이 물벼락을 맞게 되었다. 후폭풍이 상당했고, 당사자들이 많이 아파했다. 다행이 잘 마무리됐지만, (임)찬규의 물 세리머니를 제대로 못 맞춰준 내가 문제였다. 결론은…”
- 올시즌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 지난 2일 KIA와의 원정 경기를 꼽았는데, 이유를 알 것 같다(웃음).
“선발 1루수 문선재가 경기 막판 포수 마스크를 쓰고 결승타를 날린 장면들은 인지 못할 것 같다. 아마도 내 야구인생에 있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명승부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게임을 또 언제 해볼까 싶다. 선재가 공을 잘 받더라. 어떻게 해서든 이기려고 하니까 기특했고, 진짜 대단해 보였다. 마무리 투수의 공을 상대로 블로킹도 하고, 사인도 내고(웃음)…. 나 같으면 심장이 벌렁벌렁했을 듯한데, 선재는 시종 침착한 표정으로 (봉)중근이 형 공을 받았다. 아쉬운 사람은 중근이 형이었다. 타석에 들어섰을 때 안타라도 하나 때리셨어야 한다. 우리들한테는 메이저리그 시절 랜디 존슨의 몇 마일짜리 공을 어느 카운트 때 때려서 기립박수까지 받았다고 큰소리치셨는데, 그 타석에서는 ‘왕년의’ 타격 솜씨를 발휘하지 못하셨다. 아무래도 다음 투구 때문에 신경이 쓰이셨던 모양이다. 아마 그 경기 이후로 중근이 형이 우리들 앞에서 메이저리그 시절의 타격 솜씨를 자랑하는 일은 당분간 없을 것 같다(웃음).”
그라운드에서 땀을 흘리고 성적을 내고 동료들의 환호를 받는 야구인생이 정의윤한테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안겨준다.
- LG에서 가장 믿고 의지하는 선수가 누구인가.
“아무래도 (이)병규 형 아니겠나.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선수들이 병규 형을 믿고 따라간다. 병규 형이 일본에서 돌아와 다시 LG 유니폼을 입으셨을 때, 이런 얘기를 하셨던 게 기억이 난다. ‘성적에 연연해하지 말고, 오후 6시 반부터 밤 10시까지 재미있게 놀다 간다는 생각으로 야구하자’라고. 즉 매 경기에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고 즐기는 마음으로 야구를 대하라는 메시지였는데, 야구가 잘 될 때는 놀든 즐기든, 문제가 안 되지만 야구가 안 될 때는 놀려고 해도 놀아지지가 않더라. 재미있는 건 정작 병규 형도 제대로 놀지 못하셨다는 사실이다. 그게 야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 올시즌 LG의 ‘가을야구’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지금의 상승세라면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감독님을 비롯해 선수단 전원이 똘똘 뭉쳐있다. 모두가 ‘이번에는 한 번 해보자’하는 집념이 대단하다. 내가 입단 9년째인데 8년 동안 가을야구를 경험하지 못했다. 9년 되는 해에 생애 첫 가을야구를 경험하고 싶고, 플레이오프는 물론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가장 멋진 한 시즌을 만들고 싶다. 그때까지 내가 4번타자를 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떤 위치에 있든지 간에 LG가 플레이오프에만 진출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 같다.”
정의윤은 메이저리그 추신수의 부산고 후배이다. 정의윤이 부산고 재학 중에는 추신수와 함께 3년간 동계훈련을 했다고 한다. 시즌 마치고 귀국할 때마다 모교에서 훈련을 했던 추신수가 돌아가신 부산고 조성옥 감독이 이끄는 야구부에 들어가 동계훈련에 참여했던 것이다.
당시 정의윤에 눈에 비친 추신수는 마이너리그에서 절치부심 중인 추신수가 보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윤 입장에서는 메이저리그를 향해 뛰어가는 추신수가 한없이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추신수는 정의윤을 기억하고 있을까? 추신수는 직접 얘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롯데 정인교 코치의 아들 정의윤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외삼촌인 박정태를 통해 정인교 코치를 소개받았고, 그의 아들이 정의윤이란 사실을 알았다는 것.
추신수는 “요즘 정의윤이 LG에서 4번타자로 맹활약 중이라는 사실을 기사를 통해 봤다”면서 “부산고 후배이다보니 관심있게 챙겨보게 된다”는 얘기로 남다른 애정을 나타냈다.
LG 입단 9년차인 만큼 올시즌 '정의윤'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어긋나지 않도록 팀에 보탬이 되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하며 활짝 웃는 정의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