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고향, 아프리카의 예술과 문학
네이버블로그/ 검은 여인_상고르
아프리카는 우리에게 어떤 대륙일까? 아직은 문명과 산업화로 오염되지 않은 원시적 자연의 숨결과 야성의 동물이 가득한 땅일까? 아니면 굶주림과 질병, 부족 간의 갈등과 전쟁의 참상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불행의 땅일까? 어스름한 새벽을 연상케 하는 희망의 세계일까? 아니면 황혼이 빛처럼 저물고 몰락하는 세계일까?
지난날 유럽의 열강들에 의해 식민지의 땅으로 전락했던 어두운 과거의 후유증으로부터 오늘의 아프리카가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아프리카 대륙을 떠올릴 때 불행의 역사를 먼저 생각하기보다 강렬한 햇빛의 대초원, 사막과 밀림의 자연을 연상하고 온갖 야생동물과 원주민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지리학적 상상력의 습관 때문인지 아니면 유년 시절의 꿈과 동경의 이미지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아프리카는 잃어버린 고향이나 어린 시절의 모성과 연결되어 떠오른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아프리카는 인류가 마지막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의 고향일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세네갈의 시인이자 대통령이기도 했던 상고르가 젊은 날 프랑스 유학 시절에 아프리카를 그리워하며 부른 다음의 노래에 깊이 공감할 수 있다.
알몸의 여인이여
검은 피부의 여인이여
탄력적인 살결로 무르익은 열매, 검은색 포도주의 어두운 황홀
내 입에 정열 불어넣는 입
순결한 지평의 대초원
뜨거운 애무의 바람으로 침묵하는 대초원
조각처럼 새겨진 탐탐의 북소리
― 「검은 여인」
이러한 아프리카의 이미지와 함께 시인이 이 시에서 “머나먼 촌락 안개 속에서 울리는 아프리카의 깊은 고동 소리에 귀 기울이자”고 했을 때, 아프리카는 집단 무의식의 원형처럼 어느새 우리의 깊은 내면과 근원적 정서를 뒤흔든다. 상고르가 그리워하는 아프리카의 모습은 우리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모성적인 고향의 부드러움과 풍요로움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대명사이기도 한 자연은 사실 동질성보다 이질성이 많다. 광대하고 무더운 사막이 있는가 하면, 들짐승이 떼 지어 사는 대초원이 있고, 고온다습한 정글이 있다. 또한 열대지방 특유의 기후가 있는가 하면, 남아프리카공화국처럼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온대지방의 기후도 있다. 이러한 자연환경과 기후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아프리카 사회의 풍속과 삶, 문화와 예술의 공통점은 개인주의적이 아니라 공동체적이며, 내세주의적이 아니라 현세주의적이라는 것이다. 아프리카 흑인의 예술은 건축·조각·춤·음악·시 등, 다양한 표현이 있지만 그것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동시적이거나 연결된 형태로 이루어진다. 또한 그것은 일상생활의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 아프리카에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예술은 사회적이고 참여적이며, 생활 속에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이나 마을의 행사와 모임에서 시가 낭송되거나 시의 리듬은 이야기가 있고, 함창의 노래가 따르고 춤이 곁들여지는 일은 아주 흔하다.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식에서 각종의 성인식과 장례식에 이르기까지, 혹은 풍성한 수확이나 사냥을 기원하는 의식 등 여러 행사에서 이러한 문화적 표현들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전문적인 역할의 시인이나 화가, 조각가 들이 있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시와 예술의 표현 행위는 만인에 의한 것이고 민인을 위한 것이라고 말해도 틀림이 없다. 그만큼 민중적이고 집단적이다. 노래나 이야기의 내용, 그림과 조각의 대상은 같은 것이 반복될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대상을 같은 내용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도 그것은 상황이나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표현된다. 그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은 자신의 개성과 삶, 자신이 속한 집단의 역사와 애환을 개성적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이란 결코 영원히 변함없는 것이 아니며, 시인 역시 영원히 살아남는 작품을 쓰려고 애쓰지 않는 것이다.
아프리카적 예술양식의 기본 특징은, 상고르가 말한 것처럼 이미지와 리듬이다. 그 이미지는 유추적인 이미지이고, 초현실적인 이미지이다. 아프리카인은 직선을 싫어하고 사물을 정확하게 지시하는 말이나 논리보다 암시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들은 사물의 이름보다 사물의 의미와 상징을 더 가깝게 이해하므로, 코끼리는 힘, 거미는 신중함, 뿔은 달, 달은 풍요로움으로 인식된다. 아프리카인의 언어는 정확하고 논리적인 이성의 언어라기보다 암시성과 이미지가 더 많은 초현실주의적 언어라고 말할 수 있다. 유추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의 언어로 아프리카인은 생명력의 다양한 세계를 표현한다. 물론 그 언어의 이미지는 리듬화가 되지 않으면 그 효과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리듬은 이미지와 공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리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존재하는 것에 형태를 부여하는 내적 역동성이자 생명력의 순수한 표현이라도 하다. 시에서의 리듬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리듬은 시뿐 아니라 음악이나 조각, 회화 등, 그 어느 장르에서도 본질적인 요소로 나타난다. 가령 그림이나 조각에서 리듬은 선과 색, 형상, 기하학적 형태 등 여러 가지 반복을 통해서 나타날 수 있다. 아프리카인의 춤이 율동적 리듬의 특징으로 이루어진 점을 연상해도 좋다. 그 리듬은 육체적이거나 외형적인 형태로 표현되더라도 보이지 않는 정신적 세계의 심층적 리듬과 맞닿아 있다. 아프리카인이 춤출 때 다리나 하체가 관능적인 떨림으로 심하게 요동칠 때라도, 그들의 머리나 눈빛은 영원의 세계나 심층적 정신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리듬이야말로 존재의 뿌리에서 인간을 사로잡는 힘이자, 정신의 세계를 빛나게 하는 수단이다.
그 리듬이 어떤 형태로 표현되건 아프리카인의 표현 양식에서 리듬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면, 이미 당신은 아프리카적 문화와 예술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는 경지에 들어선 셈이다. 그 리듬은 인종이나 지역의 차이를 떠나서 모든 인류가 공감하는 마음의 고향을 찾아 나서게 되는 ‘여행에의 초대’이기도 할 것이다. [1996] < ‘시인과 나무, 그리고 불빛, 오생근 산문집(오생근, 문학판, 2020)’에서 옮겨 적음. (2023. 6.28. 화룡이) >
첫댓글 배우지 않았어도 기본이
튼튼할 것 같은 아프리카입니다
가보고 싶었는데, 점점 멀어집니다
'가보고 싶었는데, 점점 멀어집니다'
그렇기에 더 그립고 애착이 가는 것일테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