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0/15 체육의 날, 문화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9 - 김연아, 대한민국체육상 수상 밴쿠버동계올림픽 금메달에 도전하는 `피겨요정' 김연아(19.고려대)가 대한민국체육상을 받았다. /0200000000AKR20091015116400007.HTML
2007 - 세계 최대항공기 A380 첫 상업비행 스타트 싱가포르항공 A380 인도..오는 25일 싱가포르-시드니 첫 운항 세계 최대 규모의 점보 항공기인 에어버스 A380이 역사적인 첫 상업 비행의 준비를 마쳤다. 머니투데이 최명용 기자 /MT 뉴스 2007.10.16 14:16 http://stock.mt.co.kr/view/mtview.php?no=2007101611534184598&type=1&EVEC
2006 - 서울대학교 ‘개교 60돌’ ‘겨레와 함께 60년’ 서울대 개교 60돌 기념 그림·조각전 등 축제 한마당 15일 개교 60주년을 맞는 서울대가 ‘겨레와 함께 60년’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다채로운 축제 한마당을 펼친다. 13일 문화관 대강당 개교기념식에서는 세계적인 대학으로 도약하기 위한 비전이 선포되고 〈서울대 60년사〉를 이태진 편찬위원장(인문대 학장)이 이장무 총장에게 전달한다. 또 제16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상 시상식에서는 권이혁(성균관대 이사장·전 서울대총장) 김성호(미 UC버클리대 화학과 교수) 김재순(샘터사 고문·전 국회의장) 박영희(독일 브레멘 국립예술대 작곡과 교수) 이어령(성결대 석좌교수)씨가 수상한다. 또 법학교육 100주년 기념관에서는 ‘서울대 60년 변화와 비전’ 심포지엄이 열린다. 교내 박물관에서는 동문 작가의 그림 및 조각 300여점을 60만원 균일가에 판매하는 ‘60만원전’이 12~22일 열린다. 14일에는 동문과 가족이 관악산을 등반한 뒤 안양수목원에서 친목 행사를 갖고 15일에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동문 교향악단 축하공연이 펼쳐진다. 서울대는 60년 동안 학부 졸업생 18만2천여명, 석사 6만4천여명, 박사 1만6천여명을 배출했다. 이상기 기자 /한겨레 2006-10-12 오후 07:11:45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163927.html
2004 - 하벨 전 체코 대통령 서울평화상 받아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각) 프라하 인터콘티넨털호텔에서 제7회 서울평화상과 상금 20만달러를 받았다. 이날 시상식에는 이철승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을 비롯해 한국과 체코의 주요 인사 50명이 참석했다. 김창금 기자 /한겨레 2004.10.17(일) 19:30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4/10/005000000200410171930027.html
2003 - 정부,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를 확정 [사설] 뜻깊은 4·3 진상 정부보고서 확정 해방 후 한국전쟁 다음으로 비극적인 사건인 4·3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진상보고서가 확정 채택됐다. 제주 4·3특별법에 따라 진행돼온 정부 차원의 진상 조사결과가 이념적인 논쟁에도 불구하고 사건발생 55년만에 정부 보고서로 확정된 것은 역사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보고서는 4·3사건이 ‘1947년 3·1절 경찰발포 사건으로 시작돼 1954년 9월21일 한라산 입산금지령이 풀릴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25000~30000명의 무고한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공식 규정했다. 발발 원인 역시 ‘3·1절 발포사건과 이어진 검거선풍, 테러·잇따른 고문치사 사건 등에 대한 주민 항거와 남로당 제주도당의 단독정부 반대투쟁이 접목된 것’으로 밝혔다. 희생자의 80% 이상이 토벌대에 의해 학살됐다는 내용은 당시 미군 정보보고서와 정확하게 일치해 조사가 공정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전체 희생자의 3분의 1이 열살도 안된 어린이와 노인, 부녀자였음을 밝혀내고, 이승만 대통령이 강경진압을 지시했음을 입증하는 문헌과 증언을 확보하는 성과도 거두었다. 그러나 미국과의 관련부분이 여전히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은 점이 흠이라면 흠이다. 미군정 시절 일어난 4·3사건에 미국의 개입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 미국은 작전통제 전권을 갖고 한국군을 지휘했을 뿐 아니라 자국군 대령을 직접 지구사령관으로 보냈다. 특히 전체 1948년 11월 국군 9연대의 중산간마을 초토화작전을 진두 지휘하는 등 주민 학살에 개입했었다. 4·3사건은 제주민을 비롯한 전국민의 다각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 문서 폐기와 관련자 증언 거부 등으로 아직도 그 실체를 모두 드러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희생자 유족들의 고통을 멈추게 할 위로와 관련자 명예회복 조처를 늦출 수는 없다. 국가는 지체없이 당시 집단학살 행위에 대해 공식 사죄해야 한다. [사설] /한겨레 2003.10.16(목) 19:01 http://www.hani.co.kr/section-001001000/2003/10/001001000200310161901294.html
2003 - 중국 첫 유인우주선 선저우 5호 발사 중국이 옛소련과 미국에 이어 세계 세번째로 사람을 태운 우주선 발사에 성공했다.
2000 - 독일 태생 미국의 생화학자 블로흐(Bloch, Konrad) 사망 블로흐 [Bloch, Konrad Emil, 1912.1.21~2000.10.15] 미국의 생화학자. 1912년 독일 나이세에서 출생하였다. 뮌헨 공과대학에서 화공학을 배운 뒤, 1936년 나치스 치하를 떠나 미국에 망명하여 1938년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44년 미국에 귀화, 1950년 시카고대학 생화학 교수, 1954년 하버드대학으로 옮겨 불포화지방산 성분을 주로 연구하였다. 1982년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교환교수를 지냈다.
1997 - 카시니-하위헌스 호가 토성을 향해 발사되다 카시니-하위헌스 호(Cassini-Huygens 號)는 미국과 유럽의 공동 토성 탐사선이다. 카시니-하위헌스 호는 크게 NASA 카시니 오비터와 ESA 하위헌스 탐사선(네덜란드의 천문학자, 수학자, 물리학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둘로 나눌 수 있다. 카시니-하위헌스는 1997년 10월 15일 발사되었으며 2004년 7월 1일 토성 궤도에 진입하였다. 제트 추진 연구소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하위헌스 탐사선은 2004년 12월 25일 UTC 2:00 무렵 모선에서 분리되어 2005년 1월 14일 타이탄의 표면에 착륙하였다. 하위헌스 탐사선은 타이탄의 대기에 진입한 뒤 착륙하기까지 타이탄의 자료를 지구로 보내 왔다. 카시니-하위헌스는 토성 주위를 공전하는 탐사선으로는 최초이며, 토성을 방문한 기체로는 네 번째이다. 역사 /위키백과
1990 - 고르바초프, 노벨평화상에 선정 고르바초프(Gorbachyov, Mikhail) 소련 대통령이 1990년 오늘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1988 - 제8회 서울장애인올림픽대회(Seoul Paralympics) 개막 역사속의 오늘-서울 장애인올림픽대회 개막 1988년 제8회 서울 장애인올림픽대회가 개막됐다. 하계올림픽을 개최하는 국가가 같은 해에 장애인올림픽대회를 주최하는 관례에 따라 10월 15일부터 24일까지 10일간 열렸다. ‘도전과 극복, 평화와 우정, 참여와 평등’을 기치로 내세운 대회는 최대규모인 61개국 4천220명의 선수단이 참가, 16개 종목에 걸쳐 732개의 금메달을 걸고 경기가 치러졌다. 경기장은 서울올림픽대회 때와 마찬가지로 서울종합운동장을 주경기장으로 이용했고 경기는 척수장애·절단·뇌성마비·시각장애·기타장애의 장애유형으로 나뉘어 실시되었다. 자원봉사자 6천 명이 경기진행·통역·의료·선수안내 등 각 분야에서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봉사활동으로 대회 성공에 큰 도움을 주었다. 경기 성적은 미국이 금메달 92개로 1위를 차지했고 전종목에 319명이 출전한 한국은 금메달 40개로 7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서울 장애인올림픽대회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장애인스포츠 저변 확대와 장애인 복지의 전기를 열었다. 장애인올림픽대회는 1960년 로마 올림픽대회를 시작으로 4년마다 개최되며 한국은 1968년 제3회 대회부터 참가하고 있다. 정보관리부 /매일신문 2007년 10월 15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4772&yy=2007
1980 - 서울타워 개관 서울타워는 한국의 전통미를 살린 최초의 종합전파탑으로서 텔레비 전과 라디오 방송을 수도권 일원에 송출하기 위하여 1969년 12월 3 일 착공해 1975년 7월 30일 완공됐으며, 1980년 10월 15일에 전망대가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철따라 그 자태가 다르게 보이고 새롭게 느껴지며 독특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90만평의 넓고 쾌적한 남산 위에 우뚝솟아 있는 해발 480미터의 서울타워는 한국 전통미를 살린 동양 최고의 탑으로서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춘 국내 유일의 관광명소이다. 600년의 긴 역사의 숨결과 현대 문명의 맥박이 함께하는 수도서울의 모습과 남산을 에워싸고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따라 멀리 인천 앞바다와 개성 송악산을 해발 370미터의 전망대에서 볼 수 있다. http://www.bestwesternnewseoul.com/2005-old/k_sub_tour_tour_seoultower.html
- 'Frontline Soldier with Canteen, Saipan, 1944
1978 - 미국의 사진기자 유진 스미스(Smith, Eugene) 사망 스미스 [Smith, W(illiam) Eugene, 1918.12.30(20)~1978.10.15] 미국의 포토저널리스트. 인간애가 넘치며 사람의 심리를 파고드는 포토에세이로 유명하며 20세기 중반의 가장 중요한 사진가로 꼽힌다. 14세 때 항공학 연구의 보조수단으로 사진을 이용하기 시작했고, 채 1년도 못 되어 2개의 지방신문사에서 사진가로 일하게 되었다. 뉴욕 시로 가려고 1년 만에 대학을 중퇴했으며 그곳의 여러 유명 잡지사에서 일했다. 1942년 〈라이프 Life〉지의 종군기자가 되어 타라와·사이판·괌·이와지마를 비롯한 태평양 전쟁의 가장 중요한 전투지역들을 취재했다. 1945년 오키나와[沖縄] 침공을 취재하다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그뒤 2년 동안 32번의 수술을 받고 1947년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이 끝나갈 무렵 그는 자신의 가장 유명한 사진이 된 〈천상의 정원에 이르는 산책 The Walk to Paradise Garden〉을 찍었다. 자신의 아이들이 숲속의 빈터로 막 들어서는 장면을 찍은 이 사진은 부상당한 뒤 찍은 첫번째 작품이었는데, 1955년 뉴욕 현대미술관을 위해 에드워드 스타이컨이 기획한 전시회 〈인간가족 The Family of Man〉의 끝을 장식했다. 1947년 〈라이프〉지로 돌아와 일련의 아주 훌륭한 포토에세이 〈시골의사 Country Doctor〉(1948)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그당시 심리적으로 가장 감동적인 포토에세이였다. 또다른 포토에세이 〈스페인 마을 Spanish Village〉(1951)은 메마른 토양으로부터 삶을 얻기 위한 시골사람들의 매일의 투쟁을 표현한 것으로 그의 가장 기억할 만한 작품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조산원 Nurse Midwife〉(1951)·〈자비로운 사람 Man of Mercy〉(1954)은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에 헌신하는 시골 벽지의 조산원과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를 묘사하고 있다. 1956년 스미스는 피츠버그 시에 관한 야심적인 포토에세이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6번가에 자리잡은 창고의 2층 창문에서 뉴욕 시 거리를 내려다보며 일련의 사진을 찍었다. 이들 중 일부가 〈도시의 창문 아래 펼쳐지는 드라마 Drama Beneath a City Window〉라는 제목으로 1958년에 〈라이프〉지에 실렸고, 사진집 〈일본─이미지의 장 Japan-Chapter of Image〉(1963)이 발간되었다. 그의 위대한 마지막 포토에세이 〈미나마타 Minamata〉(1975)는 근처의 화학회사에서 버린 수은폐기물에 중독된 한 일본 마을의 주민들을 다룬 작품이다. 3년 이상 그곳에 살면서 취재를 계속한 스미스는 그를 쫓아내려는 화학회사와 맞서 싸움으로써 그 마을 사람들의 영웅이 되었다. /브리태니커
1973 - 소양강 다목적댐 준공 소양강댐 준공 소양강은 오대산 부근에서 발원해 남으로 흐르다가 춘천시 인근에서 북한강과 합류하는 총길이 166.2km의 강이다. 한강의 고질적인 홍수를 해결하고 부족한 용수와 전력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 강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는데 해결책은 다목적댐을 짓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73년 10월 15일, 6년반 동안의 난공사 끝에 동양최대를 자랑하는 소양강댐이 준공됐다. 높이는 수풍댐보다 높은 123m였고 총저수량은 화천ㆍ춘천ㆍ청평 등 한강수계 5개댐 저수용량의 거의 2배에 가까운 29억t이었다. 한국의 총수력 발전용량 62만KW의 3분의1에 해당하는 20만KW의 발전용량은 준공 후 바로 불어닥친 오일쇼크 때 큰 도움이 됐다. 공사과정에서 37명이나 숨졌고 1만8000명의 주민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다. 원래 설계는 콘크리트 댐이었으나 이를 생산할 능력이 안돼 진흙과 자갈을 사용해 댐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1984년 대홍수 때는 붕괴위험을 걱정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소양강댐은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원동력이었고 여전히 한국 최고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조선
1971 - 서울 일원에 위수령, 10개 대학에 군대진주 1971년 10월 15일 `학원의 난동행위를 단연 용납하지 않겠다`면서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이 발동되고 무장 군인들이 각 대학에 투입됐다. 위수령은 양택식 서울시장의 요청에 따라 수도경비사령부가 발동했다. 양시장은 날로 극심해지는 학원소요사태를 경찰력만으로는 진압하기 어렵다고 판단, 군당국에 위수령 발동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3~4월의 교련 교육강화 반대 4~6월의 대통령선거와 총선을 전후한 부정선거획책 규탄과 선거참관 요구, 사토 일본 수상의 방한 반대 9~10월의 교련 완전폐지와 함께 부정부패일소 등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자 정부가 이같은 조치를 취했다. 이에 따라 2차에 걸쳐 대학가에 휴업령을 내리고 데모 주동학생 검거에 나선 정부는 10월 20일 23개 대학, 학생 1백77명을 제적했다. /조선
1969 - 가장 큰 규모의 '베트남 반전의 날' 시위 집회 (발췌) 학자와 지식인들은 미국의 베트남 개입의 합법성에 대하여 조사·분석하는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65년 봄, 프린스턴대학교 교수 R.A.포크를 위원장으로 하여 설치된 '미국의 베트남정책에 관한 법률가위원회' 등이 그것이다. 위원회는 미국의 베트남 개입이 몇 가지 기본점에서 국제법에 위배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것을 공표하였다. 의회에서는 정부의 베트남정책에 관한 공청회가 열렸으며, 텔레비전·라디오 등에서도 갖가지 공개토의가 행하여졌다. 북폭(北爆)이 강화되어 고엽작전(枯葉作戰)과 양민학살 등의 진상이 밝혀짐에 따라, 베트남전쟁에 대한 의혹은 전쟁반대운동으로 확대되고,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집회와 데모가 연이어 일어났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1969년 10월 15일을 '베트남 반전의 날'로 정하여, 워싱턴을 중심으로 미국 각지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베트남반전통일행동이다. 이 반전운동은 그해 11월, 12월에도 계속되었으며, 1971년 6월에도 일어났다. 또 베트남전선(戰線)으로부터의 탈주병을 숨겨주거나 국경을 초월하여 보호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국방부는 베트남전쟁의 전모에 대해 조사·연구하고, 이것을 47권이나 되는 방대한 〈미국방성 비밀보고서〉(펜타곤 페이퍼)로서 총정리하였는데, 그 개요가 《뉴욕 타임스》에 게재되었다. 이것은 미국의 베트남정책의 허상을 드러내는 것이 되었고, 반전운동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베트남반전운동) /네이버
- Leonid Brezhnev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말렌코프와 불가닌을 거쳐 1958년 2월에 흐루시초프가 수상이 되었다. 1956년 2월에 개최된 제20회 당대회에서는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으며, 소비에트 사회주의 체제하에서의 개인적·정치적 자유의 회복이 큰 의제가 되었다. 1964년 10월에는 흐루시초프 대신에 코시긴(Kosygin, Aleksei, 1904~1980)이 수상이 되었으며, 브레주네프(Brezhnev, Leonid, 1906~1982) 당서기장, 포드고르니(Podgornyi, Nikolai, 1903~1983) 최고회의간부회의 의장과의 집단지도제인 트로이카(三頭政治) 체제가 형성되었다. (소련) /naver
1963 - 제5대 대통령 선거 역사속 오늘[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 실시 1963년 오늘 군사정부의 민정이양 방침에 따라 제5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된다. /YTN 2012-10-15 월 http://www.ytn.co.kr/_pn/0422_201010150256375661
[책갈피 속의 오늘]1963년 5대大選 박정희후보 신승 가장 치열했던 대통령선거는? 판단 기준을 1, 2위 득표차로 한다면 1963년 10월 15일 치러진 제5대 대선이 정답이다. 470만2640표를 얻어 당선한 민주공화당 박정희(朴正熙) 후보와 2위 민정당 윤보선(尹潽善) 후보(454만6614표)와의 표 차는 15만6026표에 불과했다. 16대 대선 때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는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를 55만980표 차로 눌렀다. 15대 대선에서는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 후보가 39만557표 차로 당선됐다. 두 선거 모두 피 말리는 박빙 승부였지만 5대 대선 때의 ‘기록’을 깨지는 못했다. 5대 대선 초반부는 박 후보의 독주였다. 공화당은 군대식의 막강한 조직력과 풍부한 자금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반면 야권은 후보도 단일화하지 못한 채 분열돼 있었다. 선거 구도를 뒤흔든 것은 박 후보에 대한 사상 공세. 민정당과 윤 후보는 투표를 20여일 앞두고 ‘박 후보는 여수순천 10·19사건과 관련 있는 공산주의자였을지 모른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른바 ‘사상 논쟁’, 요즘 말로 하면 ‘색깔론’에 불을 붙였다. 이에 박 후보도 10월 9일 부산 유세에서 “내가 빨갱이라면 전방 사단장, 야전군 참모장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내가 사단을 몰고 이북에 넘어가면 어떻게 할 뻔했는가”라며 정면승부를 걸었다. 투표일인 15일부터 17일까지 3일간 진행된 개표도 엎치락뒤치락했다. 개표 상황을 전한 동아일보 16일자 1면 머리기사의 제목은 ‘박, 윤 두 후보, 초유의 시소게임’. 표심은 추풍령을 경계로 남북이 극명히 갈렸다. 서울 경기 강원 충청은 윤 후보, 영남 호남 제주는 박 후보를 선택했다. “남북한을 가르는 38도선에 이어, 남한을 가르는 36도선이 생겼다”는 농담이 돌았다. 기이한 표심 향배는 사상논쟁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고 정치학자들은 분석했다. 역사는 반복됐다. 그것도 나쁜 방향으로. 8년 뒤인 1971년 박정희 대통령과 김대중 신민당 후보가 격돌한 7대 대통령 선거. 개표 결과 영호남을 동서로 가르는 표심이 처음 표출됐다. 이후 한국사를 질곡으로 몰아넣은 지역감정의 시작이었다.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 /동아닷컴 2004-10-14 18:35:00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41014/8117139/1
1959 -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자 스테판 반데라(Bandera, Stepan) 암살 반데라 [Bandera, Stepan Andriyovych, 1909.1.1~1959.10.15] Stepan Bandera Stepan Andriyovych Bandera (Ukrainian: Степан Андрійович Бандера) (1 January 1909 – 15 October 1959) was a Ukrainian politician and one of the leaders of Ukrainian national movement in occupied Western Ukraine (Galicia), who headed the 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 (OUN), a right-wing movement that engaged in acts of political violence. The son of a clerical family, Bandera was an activist, a scout, and eventually the leader of the Ukrainian nationalist movement. During his political career, the 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 (OUN) split into two factions: the OUN-M and the OUN-B. Stepan Bandera was responsible for the proclamation of an Independent Ukrainian State in Lviv on 30 June 1941. On July 6, 1941 Bandera was arrested and later imprisoned by the Nazis; in September 1944 he was released. Soviet authorities authorised the KGB to assassinate him which took place in Munich, West Germany, on 15 October 1959. Assessments of his work have ranged from totally apologetic to sharply negative. On 22 January 2010, the outgoing President of Ukraine Viktor Yushchenko awarded to Bandera the title of Hero of Ukraine (posthumously). The award was condemned by Jewish, Polish, American and Russian opinion, and was declared illegal by a Ukrainian court in April 2010. In January 2011, under President Viktor Yanukovych, the award was officially annulled. Biography
1952 - 백마고지 전투 종료(1952.10.6~15) 백마고지 전투는 한국 전쟁 당시인 1952년10월 6일~10월 15일까지 한국군과 미군이 중공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이다. 전투 과정 당시 강원도철원 서북방에 위치한 395고지는 광활한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는 군사지정학상 요지가 되어 중공군과 국군의 치열한 전투가 재개되었다. 10월 6일 저녁 중국인민지원군 대장 장융후이는 제38군단의 6개 연대와 지원부대병력 등 총병력 4만 4056명과 각종포 55문의 지원을 받으며 국군을 기습 공격했다. 이에 국군은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여러 사단과 무기, 미군의 지원을 받아 중공군을 성공적으로 격퇴시켰다. 9일 동안 12차례의 공방전으로 백마 고지는 황폐화되었고 중공군은 1만 명, 국군은 35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 승리의 요인은 우수한 정보활동과 보병과 포병의 적절한 협동, 전투부대의 적절한 임무교대 등으로 통한 충분한 휴식이 있었다. /위키백과
1949 - 문교부, 국기제작법 공고 국기시정위원회의 연구결론 보고서가 국무회의에 제출되었고, 국무회의에서 이를 접수 하여 문교부에서는 10월 15일 문교부 고시 제2호로서 국기 제작법을 공포하였다. 1950년 1월 25일에는 문교부 개정고시 제3호로 국기의 종류와 규격을 제정하여 보완 하였다. 이로써 종래 통일성이 없이 여러종류가 혼용되어 오던 태극기는 확고한 도안과 규칙을 갖추어 통일되고 정확한 모습으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http://namu-ro.com/treebank/hwamok01/mu02.htm
[국기 관련자료] 1883.03.06 - 조선 고종이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 선포 1949.10.15 - 국기제작법(문교부고시 제 2 호) - 깃면, 깃봉, 깃대 등 제작방법 규정 1950.01.16 - 국기게양방법(국무원고시 제 8 호) - 국기의 게양·강하 및 경의표시 방법 등에 관한 사항규정 1950.01.25 - 국기제작법 개정(문교부고시 제 3 호) - 깃봉의 규격 개정
- 저우언라이(周恩來) - 주더(朱德)
1934년 10월 15일 새벽 중국 남부 강서성 서금 소비에트(공산당 점령지역). 아직 걷히지 않은 어둠을 뚫고 8만명의 중국 홍군(공산당 군)이 군수품과 온갖 물자를 등에 지고 탈출하기 시작했다. 장제스나 다른 관측자들의 눈에는 이들이 마침내 뿌리가 뽑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장정은 중국 공산당사에서 패배가 아니라 승리, 그것도 역사를 바꾼 대승리로 기록됐다. 홍군은 장정을 통해 엄청난 고난과 역경을 이겨냈다는 '신화'를 만들어냈고 사회주의 혁명의 이념을 도처에 전파했던 것이다. /조선
1934 - 프랑스의 정치가, 대통령 푸앵카레(Poincaré, Raymond) 사망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대통령을 지낸 레이몽 푸앵카레(Raymond Poincare)가 1934년 오늘 74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 Japan, 5000 Yen (Banknote)
1933 - 일본의 사상가, 농정학자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 사망 니토베 이나조 [新渡戶稻造, Nitobe Inazo, 1862.9.1(8.3)~1933.10.15] [역사 속의 인물] '무사도' 만든 니토베 이나조 일본 군국주의의 정신적 기반은 무사도(武士道)이다. 일본 우익은 이를 전래의 윤리규범이라고 떠들어대지만 실상은 20세기의 산물이다. 역사적 실체가 아닌 상징조작이다. 20세기 이전까지 일본의 어떤 기록에도 무사도에 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이를 날조해 제국주의 침략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자가 '무사도'란 책을 쓴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이다. 1862년 모리오카 번 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도쿄대 교수, 국제연맹 사무차장을 지냈으며 1933년 오늘 캐나다에서 사망했다. 1899년 미국에서 출간된 '무사도'는 나오자 말자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러자 일본으로 역수입됐다. 이를 전후해 서양인은 물론 일본인 스스로 무사도 일본 고유의 도덕규범이나 미덕으로 착각하게 됐다. '무사도'는 서양의 기사도를 모델로 무사도를 설명하고 있다. '서양에 기사도가 있다면 일본에는 무사도가 있다'는 식이다. 서양으로부터 '검은 머리 백인'으로 인정받고 싶은 열등감의 표현이다. 반면 일본 이외의 동양에 대해서는 철저한 오리엔탈리스트였다. 그는 당시 조선인을 이렇게 매도했다. "조선인의 생활풍습은 죽은 풍습이고, 조선인은 민족적 명맥이 끊어지려 하고 있다. 이 반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죽음이다." 정경훈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0년 10월 15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1730&yy=2010 - 1st North Atlantic crossing, 50th Anniv., Costes and Bellonte
1927 - 프랑스의 비행사 코스테 남대서양 논스톱 황단 비행 [오늘의 항공역사](10월 15일) 1927년 - Dieudonne Costes 가 2,100 마일을 18시간에 걸쳐 비행해 남대서양을 최초로 논스톱 횡단 /항공여행정보 http://www.airtravelinfo.kr/xe/45107
- Jean Peters and Marlon Brando
1926 - 미국의 배우 진 피터스(Peters, Jean) 출생 피터스 [Peters, Jean, 1926.10.15~2000.10.13] Jean Peters (October 15, 1926 – October 13, 2000) was an American actress, known as a star of 20th Century Fox in the late 1940s and early 1950s and as the second (or possibly third) wife of Howard Hughes. Although possibly best remembered for her siren role in Pickup on South Street (1953), Peters was known for her resistance to being turned into a sex symbol, preferring to play unglamorous, down-to-earth women. Early life http://en.wikipedia.org/wiki/Jean_Peters
1925 - 서울역사 운수 영업 시작 [오늘속으로(10월15일)] 서울驛舍 1925년 10월15일서울 중구 봉래동의 서울역사가 운수영업을 개시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2&oid=038&aid=0000104257
- 'Moulin Rouge', by Toulouse-Lautrec
1917 - 마타 하리(Mata Hari) 총살 마타 하리 [Mata Hari, 1876.8.7~1917.10.15] 1917년 10월15일, 여성 스파이의 대명사 마타 하리가 파리 교외에서 총살돼 41세로 생을 마감했다. “마타 하리가 훔친 군사기밀은 연합군 5만명의 죽음에 상당하는 것”이라는게 프랑스 군사법정이 밝힌 사형선고 이유였지만 구체적인 활동내용을 밝히지 않아 지금까지도 사실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하다. 한번도 본적이 없는 이국적인 춤과 관능적인 몸짓에 파리 사교계는 몸이 달았고 그는 서서히 고급 콜걸로 변신해갔다. 독일이 그를 포섭, ‘H21’이란 암호명을 부여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마타 하리는 보다 높은 수입을 위해서라면 이중 스파이도 마다하지 않았다. 독일에서 정보를 빼내 프랑스에도 넘긴 것이다. 체포경위도 설들이 무성하다.
1914 - 아프가니스탄의 왕 자히르 샤(Zahir Shah, Mohammad) 출생 자히르 샤 [Zahir Shah, Mohammed, 1914.7.15~2007.7.23] 아프가니스탄의 왕(1933~73 재위). 그의 통치 기간에 나라가 안정되었다. 모하메드 나디르 샤의 아들인 자히르 샤와 그의 형제들은 1920년대말의 무정부상태와 도적떼가 들끓던 시기에 중앙집권적 통치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자히르 샤는 내각의 각료직을 맡고 있다가 1933년 11월 아버지가 암살당하자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자히르 샤는 친척들이 정부를 이끌어가는 여러 해 동안 뒷전에 앉아 있었으나, 1964년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고 왕의 척족이 공직을 맡는 것을 금지하는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친정체제를 확립했다. 자히르 샤는 주로 미국과 소련으로부터의 원조에 의존하여, 관개시설과 고속도로를 비롯한 많은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했다. 또한 국제관계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중립적 입장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카불 바깥으로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초 아프가니스탄은 가뭄과 기근으로 고통을 당했다. 파키스탄 국경지대의 파쉬토족은 계속해서 자치를 요구했고, 카불의 정치구조로는 아프가니스탄의 경제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었다. 1973년 7월 17일 무혈 쿠데타가 일어나 자히르 샤는 폐위되었다. 쿠데타의 지도자이며 자히르 샤의 처남인 모하마드 다우드 칸 장군은 자신을 대통령으로 하는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선포했다. 자히르 샤는 공식적으로는 1973년 8월 24일 퇴위했다. /브리태니커
1880 - 영국의 가족계획 운동가 스톱스(Stopes, Marie) 출생 스톱스 [Stopes, Marie (Charlotte Carmichael), 1880.10.15~1958.10.2] 임신·출산의 스트레스로부터 여성을 구해주기 위해 산아제한운동을 전개한 영국의 운동가이다. 스코틀랜드에든버러 출생. 1904년 뮌헨대학에서 식물학박사 학위를 받고 맨체스터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1916년 결혼에 실패한 뒤 결혼과 성생활 계몽서인 《결혼 후의 사랑》(1918)과 《현명한 부모가 되는 길》(1918)을 집필하였다.
1852 - 독일의 '체조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얀 (Jahn, Friedrich) 사망 얀 [Jahn, Friedrich Ludwig, 1778.8.11~1852.10.15] 독일의 '체조의 아버지'. 독일에 체조 클럽 운동의 기초를 세웠다. 그는 열렬한 애국자로 체육 교육이야말로 국민 건강과 체력의 초석이며, 개인의 인격과 민족의 동질성을 강화하는 데 중요하다고 믿었다. 얀은 할레·프랑크푸르트안데어오데르·괴팅겐·그라이프스발트 대학교에서 신학·역사·문헌학을 배웠다(1796~1802). 그뒤 몇 년 동안 예나와 괴팅겐에서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강의를 듣거나 여행하며 지낸 뒤, 1809년에 베를린에 정착하여 몇몇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무렵부터 그는 학생들에게 옥외 체육 훈련을 시키는 한편, 평행봉·링·평균대·뜀틀·철봉 등을 고안해냈는데, 이러한 것들이 표본적인 체조 기구가 되었다. 청장년층을 중심으로 그를 추종하는 이들이 많아졌고, 1811년에는 그의 첫번째 체조 클럽이 문을 열었다. 1813년에 뤼트조프 의용군에 들어가 1815년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까지 제3대대를 지휘했다. 그뒤 베를린으로 돌아와 자신의 체조 클럽에서 정식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1816년에 에른스트 아이젤렌과 함께 쓴 〈체조론 Deutsche Turnkunst zur Einrichtung der Turnplätze〉(1828 영역)이 출판되었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이 짙었던 1819년에 얀은 민족주의적 견해를 공공연히 밝히고 청년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년 정도 투옥되었으며, 그의 클럽은 문을 닫았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도 콜베르크 시에서 연금생활을 했는데, 1825년에 자유가 주어졌다. 그러나 그는 대학이나 중등학교가 있는 도시에서 사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프라이부르크안데어운스트루트로 옮겨가 거기서 여생을 보냈다. 1840년에 그는 군대에서 세운 공적으로 철십자 훈장을 받았으며, 2년 뒤에는 1819년 이래 실시되어온 체조에 대한 국가적 금지 조치가 해제되었다. 그는 1848~49년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독일 언어와 문화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문화적 민족주의를 강력하게 옹호한 〈독일의 민족성 Das Deutsches Volkstum〉(1810)을 썼다. /브리태니커
1844 - 독일의 철학자 니체(Nietzsche, Friedrich) 출생 니체 [Nietzsche, Friedrich (Wilhelm), 1844.10.15~1900.8.25] 독일의 시인·철학자. 레켄 출생.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을 계승하는 ‘생의 철학’의 기수(旗手)이며, S.A.키르케고르와 함께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지칭된다. 1869년 리츨의 추천으로 스위스의 바젤대학 고전문헌학의 교수가 되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지원, 위생병으로 종군했다가 건강을 해치고 바젤로 돌아왔다. 그 이후 그는 평생 편두통과 눈병으로 고생하였다. 1873~1876년에 간행된 4개의 《반시대적 고찰 Unzeitgemässe Betrachtungen》에서는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독일국민과 그 문화에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유럽 문화에 대한 회의를 표명, 위대한 창조자인 천재(天才)를 문화의 이상으로 삼았다. 이 이상은 1876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1878∼1880)에서 더욱 명확해져 과거의 이상을 모두 우상(偶像)이라 하고 새로운 이상으로의 가치전환을 의도하였다. 이미 고독에 빠지기 시작한 니체는 이 저술로 하여 바그너와도 결별하였고, 1879년 이래 건강의 악화, 특히 시력의 감퇴로 35세에 바젤대학을 퇴직하고, 요양을 위해 주로 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남부에 체재하면서 저작에 전념하였다. 《여명(黎明) Morgenröte》(1881) 《환희의 지혜 Die fröhiliche Wissenschaft》(1882)의 뒤를 이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Also sprach Zarathustra》(1883∼1885)로 그의 성숙기(成熟期)가 시작된다. 신의 죽음으로 지상(地上)의 의의를 설파하였고, 영겁회귀(永劫回歸)에 의해 삶의 긍정(肯定)의 최고 형식을 밝혔으며 초인(超人)의 이상을 가르쳤다. 《선악의 피안(彼岸) Jenseits von Gut und Böse》(1886)에서는 위의 사상에 부연하여 근대를 형성해 온 그리스도교가 삶을 파괴하는 타락의 원인이라 하여 생긍정(生肯定)의 새로운 가치를 창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 《도덕의 계보학(系譜學) Zur Genealogie der Moral》(1887)에서는 약자(弱者)의 도덕에 대하여 삶의 통일을 부여하는 강자(强者)의 도덕 수립을 시도하였으며, 미완의 역작 《권력에의 의지(意志) Wille zur Macht》(1884∼1888)에서는 삶의 원리, 즉 존재의 근본적 본질을 해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1888년 말경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다음해 1월 토리노의 광장에서 졸도하였다. 그 이후 정신착란인 채 바이마르에서 사망하였다. 니체 사상의 기조를 이루는 것은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이며 그것의 극복이다. 그는 2000년 동안 그리스도교에 의해 자라온 유럽 문명의 몰락과 니힐리즘의 도래를 예민하게 감득하였다. 사람들은 지고(至高)의 가치나 목표를 잃어 이미 세계의 통일을 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왜소화(矮小化)되고 노예화하여 대중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근대의 극복을 위해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피안적(彼岸的)인 것에 대신하여 차안적(此岸的)·지상적인 것을, 즉 권력에의 의지를 본질로 하는 생을 주장하는 니힐리즘의 철저화에 의해 모든 것의 가치전환을 시도하려 하였다. ‘초인·영겁회귀·군주도덕’ 등의 여러 사상은 그것을 위한 것이었으며, 인간은 권력에의 의지를 체현(體現)하는 초인이라는 이상을 향하여 끊임없는 자기 극복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네이버
- Napoleon - 'Napoleon' by Canova
1815 - 나폴레옹, 망명생활을 위해 세인트헬레나에 상륙 나폴레옹 1세의 세인트헬레나에서의 망명생활 1815년 10월 15일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에 상륙해 원래 부총독 관저로 지어진 롱우드(Longwood)에 자리잡았다. 그는 영국군 장교가 수행하는 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으나 스스로 롱우드에 틀어박혔다. 그의 첫번째 비서였던 라스 카즈는 이때의 생활을 나중에 〈세인트헬레나의 회상 Mémorial de Sainte-Hélène〉으로 엮어냈다(1823). 나폴레옹은 단조로운 은둔생활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아내인 마리 루이즈에게서는 소식도 없었다. 나폴레옹은 그녀가 경호원인 오스트리아 장교와 바람피운다는 사실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또한 빈에 살고 있던 아들의 소식도 전혀 듣지 못했다. 그리고 세인트헬레나의 총독으로 부임한 허드슨 로와도 사이가 매우 나빴다. 1817년말에 처음으로 위궤양이나 위암으로 보이는 병세가 나타났고 1821년초부터는 병이 급속히 악화되어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4월에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내 유골을 센 강변에 묻어 내가 그토록 사랑한 프랑스 국민들 속에 있게 해달라…… 나는 영국의 과두정치(寡頭政治)와 그에 고용된 암살자들 때문에 내 명을 못다 살고 가노라." 5월 5일 오후 5시 49분에 그는 52세도 채 안된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유해에는 그가 좋아했던 군복을 입히고 마렝고 전투 때 입었던 잿빛 외투를 덮었다. 루퍼트 밸리에서 소박한 장례식이 치러졌고, 묘비에는 이름도 없이 "여기에 눕다"(Ci-Gît)라는 말만 새겼다. /브리태니커
(나폴레옹은 7월 15일 로슈포르에서 영국 전함에 승선한 뒤 3개월 만에 세인트헬레나 섬에 상륙했습니다. ^.@)
1814 - 러시아의 시인, 소설가 레르몬토프(Lermontov, Mikhail) 출생 레르몬토프 [Lermontov, Mikhail Yuryevich, 1814.10.15~1841.7.27] 레르몬토프는 27세에 요절한 러시아의 대표적 시인이며 소설가이다. 러시아 역사의 영웅시적 전통과 낭만주의적 배경을 빼어나게 소화했다. 그의 낭만주의는 세계에 대한 사실주의적 인식도 함께하는 것으로 1850년대의 사실주의 문학 발전에 토대가 된다. 많은 서정시와 풍자시, 희곡 등을 발표했으며, 죽기 1년 전 발표한 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 Geroy nashego vremeni>으로 유명하다. 1830년대 사회와 동시대를 사는 세대의 운명을 바라보는 자신의 비판적인 견해를 잘 드러낸 이 소설은 주인공에 대한 세밀한 심리묘사와 그 비극적인 결말로 러시아 산문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2차례의 변방 카프카스 유배 등 차르 체제의 탄압에 아랑곳없이 자유를 향한 열망과 시대 비판의 정신을 담은 시를 발표해, 푸슈킨의 후계자로 일컬어졌다. 탁월한 진보 성향의 비평가 벨린스키는 그를 러시아 문학의 위대한 희망으로 우러렀다. /브리태니커
"<우리 시대의 영웅>은 분명 초상화이지만 특정한 한 개인의 초상화는 아니다. 그것은 우리 세대 모두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
- 미하일 레르몬토프, <우리 시대의 영웅> 서문 중에서
1809 - 러시아의 농민시인 콜초프(Koltsov, Aleksey) 출생 콜초프 [Koltsov, Aleksey Vasilyevich, 1809.10.15~1842.11.10] 러시아의 농민시인. 볼로네 출생. 가축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교육은 1년 반밖에 받지 못했지만, 가축의 무리들과 농촌을 돌아다니던 중에 아름다운 러시아의 자연에 매혹되어 16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민요의 리듬과 모티프로 방언 ·속어를 교묘하게 안배한 그의 시는 농촌생활의 애환과 근로, 청춘남녀의 사랑의 기쁨 등을 노래한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농민이여, 너는 잠들어 있는가》(1839)와 같은 농노제(農奴制)에 대한 항의의 노래도 불렀다. 상용(商用)으로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에 갔을 때 푸슈킨을 비롯한 뛰어난 작가 ·배우들과 만나 자기계발에 힘썼고, 벨린스키의 도움을 얻어 1835년에 처녀시집을 출판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농부의 노래 Pesnya pakharya》(1835) 《수확 Urozhai》(1835) 《풀 베는 사람 Kosar’》(1836) 《숲 Les》(1838) 등이 있다. /naver
1784 - 프랑스의 육군 원수 뷔고(Bugeaud, Thomas-Robert) 출생 뷔고 [Bugeaud, Thomas-Robert, 1784.10.15~1849.6.10] Marquis de la Piconnerie, duc d'Isly라고도 함. 프랑스의 육군원수. 알제리 점령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폴레옹의 황실근위대에 들어갔고 나중에 반도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내 육군대령이 되었다. 제1차 왕정복고(1814)를 지지했으나 백일천하 동안 휘하 부대의 설득에 굴복해 나폴레옹의 편을 들었다. 제2차 왕정복고 때는 돈 많은 여자와 결혼해 혁명으로 잃었던 가문의 토지를 다시 사들여 농사를 짓다가 1830년 7월혁명에 의해 다시 군장교로 활동할 수 있었다. 1836년 잠시 알제리로 배치받아 7월 6일 시카에서 마스카라의 아미르(군사령관)이자 아랍 저항군의 영웅인 아브델카데르를 물리쳤다. 프랑스로 돌아온 뒤 알제리에서 썼던 전통적이고 둔한 프랑스 군사전술을 비판하고 비정규전에 알맞는 전술을 개발했다. 1841년 알제리 총독으로 다시 파견되었고 자신의 새로운 전술로 알제리인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1843년 프랑스 육군 원수가 되었고 1844년 이슬리 전투에서 아브델카데르의 모로코 동맹군을 패배시켜 공작작위를 받았다. 1845, 1847년에도 잠깐 알제리로 전속되었으나 자신이 계획한 알제리의 군사 식민지안을 정부가 무시하자 이에 항의해 1847년 9월 총독직을 사임했다. 1848년 파리에서 2월혁명이 일어났을 때 루이 필리프의 군대를 지휘했지만 패배했고, 그뒤 제2공화정 때에는 반(反)사회주의 소책자를 발행했으며 알프스 군대의 사령관을 맡았다. 1883년에 간행된 그의 군사서적 전집은 식민지 전쟁에서 지침서로 읽혔다. /브리태니커
1608 - 이탈리아의 수학자, 물리학자 토리첼리(Torricelli, Evangelista) 출생 토리첼리 [Torricelli, Evangelista, 1608.10.15~1647.10.25]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수학자. 기압계를 발명했으며, 그의 기하학 연구는 적분학의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갈릴레오의 저술에서 영감을 얻어 역학에 대한 논문 〈운동에 관하여 De Motu〉를 썼는데 이것은 갈릴레오에게 감명을 주었다. 1641년 피렌체를 방문했고, 거기서 천문학자 갈릴레오의 생애의 마지막 3개월 동안 비서 겸 조수로 있었다. 그뒤 갈릴레오의 뒤를 이어 피렌체 아카데미의 수학교수로 임명되었다. 2년 후 갈릴레오의 제안을 따라 1.2m 길이의 유리관을 수은으로 채운 다음 접시 위에 거꾸로 세웠을 때 수은의 일부가 흘러나오지 않고 관 속 수은 위의 공간이 진공으로 되는 것을 관찰했다. 토리첼리는 처음으로 지속적인 진공을 만든 사람이 되었다. 여러 번 관찰한 끝에 수은의 높이가 매일 변하는 것은 대기압의 변화에 의해 생기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회전하는 바퀴의 둘레에 있는 한 점으로 그려지는 기하곡선인 사이클로이드(cycloid)의 계산을 포함해 순수 수학의 연구에 너무 깊이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발견한 것을 결코 출판하지 않았다. 그의 〈기하학 연구 Opera Geometrica〉(1644)에는 유체운동과 포물체운동에 관한 자신의 발견이 포함되어 있다. /브리태니커
1582 - 로마 교황 그레고리 13세, 새 달력 '그레고리력' 선포 [역사 속의 오늘] 교황, 새 달력 '그레고리력' 선포 현재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용하는 그레고리력이 1582년 오늘 처음 실시됐다. 이전까지는 로마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5년에 제정한 율리우스력이 사용됐다. 율리우스력은 1년을 365일로 정하고 4년에 1번 오차를 줄이기 위해 윤년을 넣었다. 그러나 윤년의 계산을 잘못해 1582년에 와서는 실제 날짜와 약 10일의 오차가 생겼다. 이를 고치기 위해 당시 로마 교황이었던 그레고리 13세는 1582년 10월 5일부터 14일까지 10일을 없애고, 10월 4일 다음날을 10월 15일로 정하는 새로운 달력을 선포했다. 그레고리력의 시작이었다. 그레고리력에는 비교적 정확한 윤년 계산을 통해 태양년과의 차이를 3000년에 하루 정도로 줄였다. 가톨릭 국가들은 그레고리력을 즉각 받아들였지만, 신교 국가들은 교황이 만든 것이라며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전 세계에서 그레고리력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반이다. 우리나라는 1895년부터 그레고리력을 사용했다. /소년조선일보 2008.10.15 09:14 http://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0/14/2008101400977.html
BC 70 -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Vergilius Maro, Publius) 출생 베르길리우스 [Vergilius Maro, Publius, BC 70.10.15~BC 19.9.21] 고대 로마의 시인. 버질(Virgil)은 영어 이름이다. 이탈리아 북부 만투바 근교의 농가에 태어나, 크레모나와 밀라노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다시 로마에서 공부를 했다. 철학 ·의학 ·수사학(修辭學) 등을 배웠는데, 처음에는 법률가를 지망하였으나,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도중에 단념하고, 문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20세 때 《에클로가에(田園詩) Eclogae》의 작시(作詩)를 시작하여 33세에 완성하였다. 그 시의 태반은 그리스의 테오크리토스의 작품을 모방한 것이지만, 그 중의 2편만은 그리스의 벽지 아르카디아를 무대로 한 작품이며, 번거로운 속세를 떠난 이상향(理想鄕)으로서의 아르카디아의 전통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무렵부터 당시의 유명한 문인들과 사귀기 시작하였으며, 문인의 보호자였던 마에게나스를 통하여 옥타비아누스(후일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후대를 받게 되었다. BC 30년 제2작인 《농경시(農耕詩) Georgica》를 발표하였는데, 완성하는 데 7년이 걸린 이 작품으로 그의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그 후 11년에 걸쳐 장편서사시 《아이네이스 Aeneis》를 썼는데, 이 작품으로 그의 이름은 후세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아이네이스》는 미완성 작품으로 현재 12권이 남아 있다. 그는 키가 크고 안색은 약간 검은 편이었으며, 체격이 단단하여 마치 건강한 농부처럼 보였다. 그러나 건강은 그다지 좋지 않아 위(胃)와 인후(咽喉)를 자주 앓았으며, 두통으로 고생하였고 치질에도 시달렸다. 건강 때문에 평소에 소식(小食)을 하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았으며, 독신생활을 하면서 근직하게 처신하였다. 그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형태로 서양문학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그의 애국심과 종교적인 경건함, 풍부한 교양과 시인으로서의 모든 면에서 완벽한 기교, 이러한 점들로 해서 그는 문자 그대로 ‘시성(詩聖)’으로서의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단테가 《신곡(神曲)》에서 그를 안내자로 삼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런데도 자신은 이 미완성의 대작에 자신을 가질 수 없었던지, 죽기 직전 그리스로 여행을 떠날 때 친구에게 만약에 자신에게 어떤 사고가 일어나거든 《아이네이스》의 원고를 불살라 달라고 부탁하였다. 예감한 대로 그는 여행 도중 열병에 걸려 부득이 귀국하게 되었는데, 이탈리아의 땅을 밟자마자 숨을 거두었다. 그때 이 대작을 불태우지 못하게 하여 이를 소멸에서 구해낸 사람은 황제 아우구스투스였다. 헤르만 블로흐의 소설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은 그 내용이 좀 난삽하지만, 이 무렵의 사정을 다룬 감동적인 작품이다.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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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