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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 후 교실엔 두 사람 외에 아무도 없었다.
“금별아.. 저기... 나는... 아직 어떤 게 사랑인지 잘 모르겠어.”
목이며 귀까지 새빨개진 얼굴로 유환은 더듬더듬 힘겹게 입을 열었다.
쿠당탕 누군가 요란하게 발을 구르며 복도를 뛰어가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다시 멀어졌다.
운동장에선 아직 야구부원들 연습이 한창이었다.
조금은 후덥지근한 여름 저녁의 미풍이 교실 안으로 불어와 커튼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하지만 너만 보면 자꾸 가슴이 뛰어. 만지고 싶고.. 끌어안고 싶어. 네가 다가오기만 해도 숨쉬기가 벅차.”
고등학교에 입학해 옆자리에 앉은 인연으로 처음 사귄 친구였다.
그 친구로부터 들은 뜻밖의 고백에 금별은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한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싫거나 당황스러워서가 아니었다.
그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함께 운동장을 달리고 교실에서 뒹굴며 지낸 지난 반년 간 금별의 마음속엔 늘 유환을 향한 동경과 사랑이 가득했다.
학년 수석으로 입학해 선생님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수재였고, 체력도 남달라 운동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친구가 금별은 언제나 자랑스러웠다.
성적도 외모도 그저 그런 평범한 금별에게 뭐든 거뜬히 해내는 유환은 그야말로 동경의 대상이었다.
단순한 동경이 사랑으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동성을 연애대상으로 바라보는 남다른 성벽에 홀로 고민하며 괴로워하기도 했지만 좋아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감히 고백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랬다간 지금 있는 친구란 위치도 얻지 못할 테니까.
그렇게 소심한 성격으로 자신의 마음을 숨긴 채 지내던 어느 날 뜻밖에 먼저 고백을 받은 것이다.
금별은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역시 좀 그런가?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놀란 표정으로 굳어버린 금별을 보고 유환은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아니야! 그게 아니라...”
금별이 다급히 외쳤다.
“저기... 나도..... 그러니까..... 나도 널...”
금별은 유환의 팔을 잡고 얼굴을 붉혔다.
발그레한 두 뺨과 꽉 부여잡은 손길만 봐도 금별의 마음은 쉽게 드러났다.
유환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나도 널... 좋아해”
금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작은 목소리로 고백했다.
“응. 고마워.”
그 날, 어둑해진 교실 안으로 붉은 노을이 비춰들 때 두 사람은 첫입맞춤을 나누었다.
떨리는 입술이 맞닿을 때의 그 부드럽고 간지러운 느낌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리고는 어색하게 서로에게 팔을 두른 채 다시 입을 맞췄다.
숨조차 멎은 채 터질듯 뛰는 심장을 겨우 누르며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던 첫키스였다.
***
6시 30분.
요란하게 울리는 알람소리에 금별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아련한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떠밀리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러나 이내 떨쳐내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서둘러 준비를 하고 간단히 아침식사를 한 뒤 집을 나섰다.
거리에 마른 낙엽이 가득했다.
간밤에 창문이 흔들릴 정도로 바람이 불더니 가로수 낙엽들이 우수수 다 떨어진 모양이다.
사각사각 운동화 아래 밟히는 나뭇잎 소리를 들으며 금별은 걸음을 재촉했다.
교복을 입은 한 무리의 남자아이들이 서로 장난을 치며 금별의 옆을 지나쳐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멈춰 서 아이들이 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가방을 던지기도 하며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모습이 활기차 보여 저절로 미소가 그려진다.
그러다 이내 입가가 경직되며 미소는 씁쓸함으로 바뀌었다.
다시 어깨를 움츠린 채 전철역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안녕 하세요”
라커룸으로 들어서며 인사하자 먼저 와 있던 사람이 반갑게 맞아준다.
“오늘도 일찍 왔네.”
“아저씨도 일찍 오셨네요. 쌍둥이는 어린이집에 보내고 온 거에요?”
“응. 이번에 옮긴 곳이 일찍부터 아이를 받아주더라고. 다행이지 뭐야.”
“잘됐네요. 지각한다고 반장님이 엄청 벼르고 있잖아요.”
“그래서 오랜만에 좀 서둘러봤지.”
지씨 아저씨는 올해 나이 쉰이지만 쌍둥이 딸들은 겨우 다섯 살이었다.
늦둥이 딸들을 남기고 부인이 집을 나가는 바람에 적지 않은 나이에 일과 육아를 동시에 하느라 요즘 지각이 많았다.
가끔 아저씨가 일이 늦어지거나 하면 금별이 대신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데리러 가기도 할 만큼 지씨 아저씨는 금별이 유일하게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었다.
10년 넘도록 혼자 살고 있는 금별은 재잘거리는 쌍둥이 여자아이들로 늘 북적이는 아저씨네를 좋아해 종종 놀러가기도 했다.
“반장 벌써 출동했네. 얼른 옷 갈아입고 가자.”
아저씨의 말에 금별은 서둘러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아직 회사원들이 출근하지 않은 이른 시각. 반장은 청소직원들을 모아놓고 조회를 시작했다.
어제청소상태가 불량했던 구역의 담당직원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기도 하고, 무슨 요일엔 중요한 손님들이 오니 더 신경 써서 일하라는 등의 얘기를 하기도 했다.
청소 직원들 중 금별은 스물여덟 살로 가장 나이가 어렸다.
대다수가 사십대 후반이거나 오십대였다. 일이 힘들기도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청소부란 직종을 꺼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금별은 빌딩 청소가 싫지 않았다.
건물 내에서 하는 일이니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했다.
그것만으로도 좋은 근무조건이었다.
지난 10여 년간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그가 처음으로 한 일은 세차장 아르바이트였다.
온종일 서서 비누거품과 찬물을 뒤집어써야 했다.
앞 유리에 얼룩이 조금 남았다고 세차비를 주지 않고 그냥 가버리는 손님도 있었다.
주인은 금별의 시급에서 그 손님의 세차비를 빼버렸다.
분명 차 내부를 청소하기 전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도 나중에 귀금속이 없어졌다며 생떼를 쓰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한달 내내 일한 돈을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났다.
이제 겨우 열여덟 어린 소년에게 사회는 겨울보다 춥고, 얼음보다 차가운 세상이었다.
밤새 길거리에 서서 술 취한 사람들에게 나이트클럽 전단지를 나눠주기도 하고, 새벽잠을 설치며 신문과 우유배달을 하기도 했다.
한여름 공사장에서 온종일 시멘트를 나르다 열사병으로 쓰러지기도 했고, 공장에서 익숙하지 않은 작업을 하다 손가락이 잘릴 뻔 한 적도 있었다.
치킨, 피자, 자장면 등 각종 음식은 모조리 배달해 보았다.
그렇게 밑바닥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경험하며 가출한 지 10년 만에 이제야 반 지하 월세 방이나마 쉴 공간을 마련했다.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인간이 누구의 도움도 없이 대도시에서 살아남기란 그렇게 힘겨운 일이었다.
그나마 생활이 안정기에 들 수 있었던 건 빌딩청소를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4대 보험은 물론 수입도 안정적으로 지급되는 덕분에 얼마 전부터 처음으로 적금통장도 갖게 되었다.
그건 금별에게 큰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저 하루하루를 겨우 버텨내기 힘겨웠는데 이제 그 가운데 작게나마 희망이란 빛을 품게 된 것이다.
미비하지만 통장 속 금액이 조금씩 올라갈 때 마다 금별은 흐뭇하고 든든했다.
“자, 모두 각자 맡은 구역으로 해산!”
반장의 지시에 회색 작업복 차림의 직원들은 각자의 구역으로 흩어졌다.
금별이 맡은 곳은 1층부터 5층까지의 사무실과 복도, 화장실 청소였다.
1층엔 로비가 있어 사원들이 출근하기 전 깨끗하게 바닥을 닦아 놓아야 했다.
서둘러 일을 시작했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다보면 잡생각도 사라지고, 시간도 빨리 가기 마련이다.
오랜 방황 끝에 얻은 진리였다.
금별은 익숙해져 몸에 익은 일들을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면서도 빠르게 해 나갔다.
로비가 깨끗해지자 사무실을 돌며 휴지통을 비우고 탕비실을 정리했다.
사무실 청소가 끝나면 화장실 차례였다.
휴지가 빈 곳은 없는지, 바닥은 깔끔한지, 세면대에 물기는 없는지 꼼꼼하게 청소하고 점검했다.
그러는 사이 텅 빈 사무실이 사람들로 채워지고 조용하던 건물은 생기를 되찾은 듯 소란스러워진다.
복사기가 돌아가고 전화벨이 사방에서 울리며 바쁘게 복도를 오가는 구두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온다.
금별은 이따금 마주치는 사원들과 눈인사를 하며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나갔다.
금별이 일하는 이 빌딩은 스마트폰 앱서비스와 컴퓨터게임 회사로 유명한 J소프트 소유였다.
회사 대표 한치산은 대학 1학년 때 친구들과 재미삼아 만든 게임이 소위 대박을 치면서 벤처붐을 타고 회사를 차렸는데, 그 후로 잇달아 새로운 게임소프트를 히트 시켰다.
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보급되며 이젠 게임뿐 아니라 모바일 앱과 메신저, 애니메이션과 웹툰 사업까지 영역을 넓혀 순조롭게 대기업으로 성장 중인 견실한 회사가 되었다.
J소프트는 굴지의 대기업 못지않은 근무조건과 연봉, 자유로운 사내 분위기와 직원복지로 유명한 덕분에 명문대 졸업자들이 1순위로 뽑는 꿈의 직장으로 경제지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런 회사의 CEO 한치산은 이제 겨우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였다.
금별은 로비를 청소하며 먼발치로 지나가는 치산을 몇 번 본적 있었다.
수영선수처럼 넓은 어깨에 큰 키를 자랑하며 성큼성큼 빠르게 걸어가는 모습은 주변을 압도했다.
그건 거침없이 추진하는 그의 사업 스타일만큼이나 잘 어울리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가 지나갈 때면 마치 연예인이라도 만난 소녀 팬처럼 여직원들이 황홀한 표정을 짓는 걸 종종 목격했다.
그걸 보며 금별은 나와는 사는 세계가 틀리구나 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금별은 종종 사무실 청소를 하며 새로 입사한 신입사원들을 볼 때면 씁쓸한 감정에 휩싸이고는 했다.
그건 같은 또래면서도 누구는 꿈의 직장이라 불리는 곳에 입사해 잘 닦인 구두와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사무실에 앉아 일하고, 자신은 회색 유니폼을 입고 허리를 굽힌 채 바닥이나 닦고 있다는 질투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을 보면 유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살아있었다면 지금쯤 저렇게 양복 차림으로 그 누구보다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사회에 나와 멋지게 자신의 몫을 다하며 살고 있겠지 라는 생각이 불쑥불쑥 마음에서 솟아오르기 때문이었다.
성적도 우수하고 외모도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멋진 아이였다.
그대로 고등학교를 졸업해 대학을 나와 사회생활을 시작했더라면 지금쯤 저 신입사원들 중 하나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면 마음 한 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 허탈하고 씁쓸해졌다.
어느 정도 청소를 마무리한 금별은 점심을 먹기 위해 라커룸으로 갔다.
“어서 와. 배고프지?”
먼저 와 있던 지씨 아저씨는 도시락을 꺼내 바닥에 펼쳐놓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금별도 서둘러 라커에서 가방을 뒤져 도시락을 꺼냈다.
구내식당을 이용해도 된다고 하지만 식권을 사야 하니 그 대신 도시락을 싸오기로 아저씨와 약속했다.
멸치조림에 구운 김, 김치며 콩나물이 전부지만 금별은 아저씨와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야아, 이거 진짜 맛있는데? 멸치가 짜지도 않고 달달하니 바삭바삭해. 우리 쌍둥이들이 좋아하겠는데?”
“그래요? 그럼 잔뜩 했으니까 내일 한통 싸드릴게요.”
“진짜?! 이거 매번 미안해서...”
“괜찮아요. 제 요리솜씨는 다 아저씨한테 배운 거잖아요. 이제 혼자서 김장도 거뜬히 할 수 있어요.”
금별은 주먹까지 불끈 쥐어 보이며 말했다.
“하하, 내가 제자 하나는 잘 키웠다니까. 그러지 말고 이번에 나랑 같이 김장하자. 한꺼번에 해서 나누면 재료도 적게 들고 힘도 덜 들고 좋잖아.”
“네. 언제든 불러주세요.”
지씨 아저씨는 금별에게 청소일을 소개해 준 사람이기도 하지만 유일하게 금별이 집을 나오게 된 사정이며 여태껏 혼자 살고 있는 이유를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친 동생처럼 위하고 챙겨주었다.
금별 또한 다른 사람들과는 일부러라도 거리를 두는 편이지만 아저씨에게만은 응석도 부리고 의지도 많이 했다.
“오후엔 바쁘겠어. 외부 손님들이 온다고 대회의실 청소하라고 하더라.”
“그래요? 혼자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도울게요.”
“아니야. 나 혼자도 거뜬해. 그런데 말야. 오늘 또 나왔어.”
갑자기 아저씨가 주위를 살핀 뒤 목소리를 낮췄다.
“또요?!”
눈이 휘둥그레진 금별을 보며 아저씬 짓궂은 표정으로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그 사람도 참 대단하네요. 뻔뻔한 건지 청소부를 사람 취급 안하는 건지... 어떻게 사무실에서...”
금별이 혀를 내두르며 어이없어하는 사람은 바로 이 빌딩의 소유주인 J소프트의 대표 한치산이었다.
“이번엔 무려 T팬티. 그것도 빠~알간 망사!”
“쿡...”
“정말 손바닥 반 만 한 팬티가 소파 사이에 끼어 있었다고.”
“본인 소유의 회사니 우리가 뭐라 할 순 없지만 정말 심해요. 사무실에서 대체 무슨 짓을 벌이는지...”
“그거야 뻔하지. 매일 모델 같은 여자를 옆에 끼고 사는 사람이잖아. 직원들 퇴근하면 사무실로 불러 실컷 즐긴다는 소문이야. 뭐, 실제로 대표실 휴지통을 치우는 내 입장에선 그게 소문이 아닌 사실이란 걸 알지만. 큭큭큭...”
그런 어이없는 사람이 용케 회사를 이끌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한심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금별이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짧은 점심시간이 끝났다.
오후에 금별은 반장의 지시로 옥상 화단에 있는 나무들 월동준비를 했다.
겨울에 돌입하는 시기인 만큼 매서운 바람에 상하지 않게 지지대도 설치해주고 볏짚으로 만든 옷도 입히고 떨어진 낙엽도 정리하다보니 어느새 서쪽 하늘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옥상문이 벌컥 열리며 같은 청소직원 한 명이 다급하게 외쳤다.
“금별아! 큰일 났어! 지씨가 계단에서 굴러서 지금 구급차 부르고 난리야!”
“네?!”
금별은 깜짝 놀라 뛰쳐나갔다.
1층 정문 앞엔 벌써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사람들로 북적였다.
금별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갔다.
지씨 아저씨는 머리에 피를 흘리고 다리에 부목을 댄 채 들것에 실려 구급차로 옮겨지고 있었다.
“아저씨!!”
“...윽.. 금..별아.. 우리 애들... 좀... 부탁한다.”
아저씨는 괴로운 듯 신음하면서도 금별에게 손을 뻗었다.
“걱정 마세요! 애들 데리고 병원으로 금방 갈게요!”
아저씨는 작업반장과 함께 구급차로 병원을 향해 떠났다.
금별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쌍둥이들이 있는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에 도착하자 이미 아저씨는 머리와 다리에 붕대를 감고 침상에 누워 있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아빠를 보자 매달리기 바빴다.
머리의 상처는 크지 않아 꿰매면 되는데 다리가 부러져 석고붕대를 했고 족히 서너 달은 재활치료까지 받아야 한다는 진단이었다.
어린애 둘을 키우며 근근이 살아가는 청소부에게 그건 너무 긴 시간이었다.
착잡해하는 아저씨를 두고 잠시 복도로 나오자 작업반장이 금별을 기다리고 있었다.
“치료비는 나오겠죠?”
금별이 묻자 반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나오지. 그런데... 몇 달이나 일을 못하는 건 좀 곤란한데...”
“.. 하지만...”
“당장 담당구역 일손이 비잖아. 너도 알다시피 우린 용역업체일 뿐이야. J소프트와 계약을 맺은 것뿐이지 거기 직원이 아니야. 다쳤으니 쉬다가 나오겠다는 건 안 통해. 당장 사무실에 새 사람을 보내달라고 해야겠다. 일에 공백이 생기게 할 수야 없지. 이건 우리 용역 사무소 신용이 달린 일이니까”
“그럼 아저씨는...”
“안됐지만 그만둬야지.”
반장은 냉정하게 말하고 돌아섰다.
“잠깐만요! 반장님!”
금별이 다급히 팔을 잡아 세웠다.
“제가 할게요! 아저씨 담당 구역까지 제가 완벽히 해낼게요!”
“뭐? 그걸 어떻게 혼자 다 해?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해도 못 끝낼걸?”
“밤을 새서라도 제가 깨끗하게 청소해 놓을게요. 진짜에요! 저 일 열심히 하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야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두 사람 몫을 어떻게 혼자서...”
“할 수 있어요! 아저씨가 다 나아서 출근할 때 까지 제가 지금 월급 그대로 받으면서 일은 두 배로 할 테니까 아저씨 자르지 말아주세요.”
“금별아, 그게 가능하겠니?”
“일단 시켜보시고 마음에 안 들면 그땐 저도 같이 자르세요. 그럼 되죠?”
금별은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강하게 말했다.
“평소엔 얌전한 녀석이 갑자기 이러니까 무섭다. 알았어. 네 말대로 해 보자. 그 대신 봐주는 건 없어. 제대로 못 해내면 지씨도 너도 당장 해고야.”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금별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반장은 어이없단 듯 헛웃음을 지으며 병원을 나갔다.
다음날부터 금별은 평소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일어나 출근했다.
아침나절과 점심시간, 휴식시간이며 모두가 퇴근한 뒤까지 남아 남보다 두 배는 더 일했다.
아저씨가 담당하던 구역은 최상층 부근으로 각종 회의실을 비롯한 비서실, 대표실 등이 집중되어 있어 청소하기도 더 까다로웠다.
게다가 대표실은 괜히 주눅 들고 조심스러워 더 세심하게 청소했다.
바닥에 머리카락 하나, 테이블 유리에 지문 한개 남지 않게 공을 들여 꼼꼼하게 청소하다보면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향해 가기 마련이었다.
날이 더할수록 몸은 천근만근 힘들었지만 이제와 포기할 순 없었다.
병원에 입원한 아저씨는 딸들을 돌볼 수 없어 결국 먼 시골 친척에게 아이들을 보내야했다.
하루도 안 보면 눈에 밟혀 어찌 사나 슬퍼하는 아저씨에게 직장에서까지 해고당했다고 말할 순 없었다.
아저씨가 돌아올 때 까지 열심히 이 자리를 지켜주겠다고 결심했다.
***
“아아, 이제 한계야.”
한치산은 의자를 한껏 뒤로 젖힌 채 팔다리를 축 늘어뜨렸다.
“더는 짜증나서 못 참겠어. 여자들은 대체 왜 그래? 아주 지긋지긋해”
치산이 우는 소리를 하자 책상 앞에 보고서를 든 채 서 있던 그의 비서 상윤이 한심하단 듯 인상 쓰며 말했다.
“글쎄요. 대표님 입에서 여자가 지겹다는 말이 나오니까 이상하네요.”
“너도 한번 당해봐. 갓 시골에서 상경한 듯 순진한 얼굴을 하더니 밤이 되니까 홀딱 벗고 갑자기 침대 속으로 파고드는 거야. 아아, 그런 걸 막으려고 일부러 딱 봐도 처녀 같은 순진무구한 아가씨로 고른 거였는데... 이제 내 안목이 다 됐나봐. 여자가 무서워지기 시작했어.”
“그래서 그 시골아가씨는 바로 해고하신 겁니까?”
“당연하지! 난 가사도우미가 필요한 거지 잠자리도우미가 필요한 게 아니야. 내 상대는 차고 넘친다고. 아무 여자나 들이댄다고 받아줄 내가 아니야.”
“아아.. 네...”
전혀 신용할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비트는 상윤.
“지금 그 표정은 뭐야?”
“제가 뭘 어쨌다고요?”
“아무튼 이번 가사도우미도 탈락이야. 제발 사인도 보내기 전에 먼저 자자고 덤비는 여자 말고 좀 더 조신하고 도도한 아가씨 없어? 물론 집안일의 달인이어야 하고 말야.”
“애초에 가사도우미 대상이 왜 아가씨인 겁니까? 아줌마나 할머니쯤으로 대상을 옮겨보는 게 어떠실지...”
“...음.... 문제의 핵심은 그게 아니야. 아가씨든 아줌마든 누구에게 일을 시켜도 만족스럽지가 않아. 어째서 다들 이여사님처럼 일을 하지 못하는 거지?”
“그건 무리라고 봅니다. 이숙희여사님은 대표님이 어릴 때부터 가사 일을 도맡아 해 오신 분 아닙니까? 그런 프로페셔널한 분의 역량을 따라갈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아아... 얼른 우리 이여사께서 건강을 되찾아 돌아와야 할 텐데 말야.”
그녀는 올해 60세로 치산이 유치원을 다닐 무렵부터 엄마를 대신해 그를 돌보며 가사일을 해 주던 사람이었다.
속옷이며 양말 한 켤레까지 정성껏 다려 입히고, 뭐든 직접 요리한 음식만 먹인 탓에 치산은 다른 가사도우미들의 일솜씨가 영 눈에 안차는 것이었다.
그녀는 얼마 전 지병인 당뇨가 악화 돼 병원에서 요양 중이었다.
본가에서 독립한 후에도 이 여사가 치산의 맨션을 드나들며 요리, 빨래 뭐 하나 부족함 없이 돌봐주던 터라 그녀가 입원해 못 오게 되자 집안 꼴은 형편없게 되었고, 치산은 하는 수 없이 다른 도우미를 고용해야 했다.
하지만 새로 오는 도우미마다 젊은 여자인 건 둘째 치고 집안 일 솜씨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청소를 잘한다 싶으면 요리를 못하고, 음식이 좀 괜찮다 싶으면 다림질이 엉망이었다.
게다가 젊고 돈 많은 독신남을 여자들이 가만 둘리 없었다.
가사도우미로 위장한 섹시한 여자들이 몰려들어 정작 중요한 가사 일은 팽개치고 치산을 유혹하는 데만 열을 올리고는 했다.
결국 이래저래 짜증이 난 상윤은 도우미고 뭐고 다 내쫓아 버렸다.
그러다보니 집안은 점점 더러운 쓰레기장이 되어가고, 흡족하지 않은 식사 탓에 소화불량에 걸려 성질만 더 날카로워졌다.
“본가로 들어가세요. 이여사님 만큼 우수한 전문가들이 있지 않습니까?”
상윤의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하며 치산은 보고서를 넘겼다.
본가엔 늘 의견 차이를 보이며 대립하는 아버지가 버티고 계신다.
서로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거리는 부자지간이었다.
고상한 대학교수이자 문학가인 아버지에게 게임이나 만드는 아들은 늘 골칫거리였다.
본가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쓰레기장에서 사는 걸 택할 것이다.
그때 문이 열리며 청소도구를 잔뜩 실은 트레이를 밀고 금별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 죄송합니다! 점심시간이라 비어 있을 줄 알고... 죄송합니다.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원래는 오후에 청소해야 하지만 점심시간에 틈틈이 해 두기 위해 온 길이었다.
“아아, 괜찮아요. 마음껏 청소해요.”
치산이 상관없단 듯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손을 휘저었다.
금별은 어떡해야 할지 망설이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그대로 청소를 시작했다.
치산은 진지하게 보고서를 살폈다.
연말에 출시를 앞둔 새로운 모바일서비스에 대한 것이었다.
완성단계였지만 뜻밖의 버그가 발생해 지금 문제해결을 위해 다각도로 접근 중이었다.
점심식사도 미룬 채 보고서에 빠져있다 문뜩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야에 테이블을 닦는 금별의 모습이 보였다.
“원래 여기 담당입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든 금별.
“아..아니요. 다른 분인데 잠깐 병원에 입원하셔서 제가 대신하고 있습니다.”
“혹시 지난번에 계단에서 굴러 실려 간 사람이 있다던데...”
“네, 맞습니다.”
“아아. 그렇군요. 계속하세요.”
“......네.”
금별은 다시 테이블 정리를 시작했다.
하지만 마음속에 남는 씁쓸함은 어쩔 수 없었다.
한치산에겐 아아, 그렇군요 란 말로 단순히 끝낼 일인 것이다.
얼마나 다쳤냐, 이젠 괜찮냐 등등 안부를 묻는 것조차 관심 없는...
서둘러 한 덕분에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 청소를 마쳤다.
그때까지도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는 치산을 향해 금별은 다시 인사를 하고 대표실을 나왔다.
5분여 남은 점심시간 안에 식사를 마치려면 서둘러야 했다.
금별이 나간 후 보고서 검토가 끝난 치산은 서류를 덮고 고개를 들었다.
마침 도시락을 사러 나갔던 상윤이 돌아왔다.
치산은 책상에서 벗어나 푹신한 소파가 있는 테이블로 와 앉았다.
“테이블 유리에 지문 하나 없군.”
치산은 새삼 사무실을 둘러보며 감탄조로 말했다.
“청소 담당자가 바뀌었는지 대표실 뿐 아니라 비서실도 이전보다 훨씬 쾌적합니다.”
“그래. 바닥에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아. 아까 나간 그 사람이 청소한 거겠지?”
“네. 아직 젊어 보이던데 일은 야무지게 하는 모양입니다.”
“흐음... 괜찮군.”
치산은 깔끔하게 정돈된 각종 집기들과 깨끗한 사무실을 둘러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도시락으로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화장실에 들른 치산은 또 한번 놀랬다.
세면대는 물론 바닥도 물 한 방울 튀지 않게 반짝반짝 걸레질이 되어 있었다.
변기며 휴지통도 방금 청소한 듯 깨끗해 기분까지 좋아진다.
담당자가 바뀌었다더니 청소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점점 마음에 드는데?”
치산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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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랜 만에 시작하는 연재라 떨리네요. ㅜㅜ...
읽어주신 것 만으로도 정말 감사합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1.26 08:35
첫댓글 잘봤습니다^^
너무 잘봤습니다. 정말 글 잘쓰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