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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랑방 스크랩 북한산 - 대서문 기점 북한산 열두대문 13km 일주 산행
최영기 추천 0 조회 9 10.05.18 21: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북한산

 

대서문 기점 북한산 열두대문 13km 일주 산행

 

 

 

산성길 따라 열두대문 지나며 서울의 진산을 온몸으로 느끼다
북한산에서 가장 멋스럽고도 뻐근한 당일산행로

 

북한산(北漢山·836.5m)은 명산이다.

국내에 17개의 육상 국립공원이 있지만 북한산처럼 도심 속에서 사방 어디서든 웅장하고 화려하면서도 넉넉한 산세를 보여주는 국립공원은 없다.

최고봉인 백운대나 인수봉의 모습이 아이를 업은 듯하다 하여 부아악(負兒岳), 백운대·인수봉·만경대가 3개의 뿔처럼 보인다 하여 삼각산(三角山)이라 불렸고, 그 밖에도 횡악(橫岳)·화악(華嶽)·화산(華山)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온 북한산은 어느 기점으로든 산 안으로 파고들면 변화무쌍한 경치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널찍한 암반에 비단 같은 계류를 흘리는 골짜기가 여기저기 파여 있고, 그 양옆으로는 기암이 얹은 능선이 힘차게 솟아 있는가 하면 산릉에 서면 삼각산을 이룬 백운대와 인수봉 만경대는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와 가슴 설레게 한다.

이렇듯 아름답고 기운찬 산세에 숲도 울창해 서울과 경기도 고양시·의정부시·양주시에 둘러싸여 녹색 허파 역할까지 해주고 있다.


북한산은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비봉(碑峰·560m)의 신라 진흥왕순수비가 증명하듯, 고구려와 신라가 맞부딪치던 곳이 북한산이다.

그로 인해 일찍이 백제 개루왕 5년(132) 산등성이를 따라 토성을 쌓았고, 조선 숙종 37년(1711) 삼각산 서쪽 골 안의 중흥동을 피란처로 점찍고 그 중흥동을 둘러싼 의상봉~문수봉~백운대~원효봉 산줄기를 따라 석성을 둘러쌓은 것이다.

 

 


▲ 북한산이 속살을 드러내면서 삼각산을 이룬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세 암봉이 우뚝 솟아올랐다.

나월봉으로 이어지는 바위 능선.

 

“열두대문이라 하지만 실제 14개 문이에요. 지금은 터만 남아 있지만 시구문도 문이고 북한산성계곡에 있는 중성문도 성문이니까요.

아무튼 오늘 고생들 각오해야 할 거예요.

의상봉, 용출봉, 용혈봉 등 대남문까지 가는 데만 해도 암봉 7개를 넘어야 하고, 주능선을 탄 뒤 위문에서 계곡으로 내려서다 다시 원효봉을 넘어서려면 8시간 이상 걸릴 겁니다. 8.2km라 하지만 실제로는 12km 이상 되는 거리예요.”


북한산성탐방안내소 앞에서 만난 북한산국립공원 북한산성분소 탐방안내원 이세흥(李世興·62·녹색순찰대)씨는 북한산성을 한 바퀴 도는, 일명 열두대문 종주 코스에 대해 설명해주며 만만치 않을 거라 하고, 그 말에 블랙야크팀 박용학씨와 유성용·박세영씨는 얼굴이 굳어진다.

더욱이 북한산성 진입로로 들어서는 사이 눈에 들어온 염초봉과 백운대, 노적봉은 3월의 문턱을 넘어섰음에도 흰 눈에 덮여 냉랭함과 함께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대남문을 빠져나가자마자 오른쪽 산길을 타고 능선에 올라서자 묘법사 부근 숲에서 까치가 깍깍댄다.

열두대문 종주산행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였다.

그 소리에 산성길 따라 가벼운 발걸음을 내디뎠으나 평범한 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와이어로프 길로 바뀌고, 하루 전날 내린 진눈깨비가 얼어붙은 바윗길은 복병을 만난 듯 긴장케 한다.

그러면서도 원효봉에서 염초봉을 거쳐 백운대로 이어지는 웅장한 암릉이 눈에 들어오면 모두들 감탄스러워했다.


와이어로프 길과 바위를 깎아내 만든 계단길은 험한 데로 길을 찾아낼 수 있었지만 바위와 흙, 나무가 뒤섞인 급사면 험로는 어제 내린 눈이 살짝 덮여 길은커녕 지형조차 분간키 어렵다.

 


의상봉 능선은 산 안을 샅샅이 살필 수 있는 북한산 조망대


“아야!”


의상봉 정상을 앞두고 박세영씨가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잔뜩 긴장한 상태로 눈 덮인 바윗길을 걷다보니 산행을 시작한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다리에 쥐가 나고 말았다.

그런데도 의상봉 정상에서 조망이 터지자 박세영씨의 얼굴이 환해진다.

어젯밤 밤하늘을 밝힌 둥근 달에 오늘은 분명 쾌청하리라 기대했건만 짙은 안개가 한강 조망을 가로막고 있다.

그래도 백운대·만경대·노적봉은 기운찬 암봉의 전형을 보여주고, 용출봉에서 용혈봉을 거쳐 나월봉으로 이어지는 바위 능선은 수묵화를 보는 듯하며, 지금 당장이라도 학 탄 신선이 나타날 듯 신비롭게 느껴진다.

 


▲ 아침 햇살에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의상봉 정상 바위지대.

 

따스한 햇살에 힘을 잃고 주저앉는 눈을 밟으며 가사당암문(袈裟堂暗門)으로 내려선다.

험한 의상봉 등로 대신 백화사 길(2.8km)이나 국녕사 길을 따라 올라설 수 있는 가사당암문은 한낮의 맑은 햇살에 유난히도 반짝였다.

용출봉 오르막에 접어들자 다시 한겨울이다.

눈이 두텁게 쌓이고 나뭇가지마다 상고대로 치장을 하고 있다.

미끄러워 긴장되고 이마와 등에서 땀도 흘러내리지만 올 겨울 마지막 눈이라 생각하니 이른 봄 눈길 산행이 반갑게 느껴진다.


용출봉(571m) 정상에 올라서자 이제 문수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웅장하게 치솟고 그 오른쪽으로 비봉능선이 하늘금을 긋고 있다.

반대편으로는 북한산성 계곡과 계곡 상부를 형성하고 있는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의상봉 능선은 산 안에서 북한산을 샅샅이 둘러볼 수 있는 북한산 조망대였다.


“저기 보이는 게 동장대죠? 저기서 산성을 총괄하는 장군이 지휘를 했다면서요?”


유성용씨는 대동문과 용암문 사이의 동장대(東將臺)를 가리킨 뒤 “오늘 북한산성의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게 되었다”며 즐거운 표정을 짓는다.


북한산성계곡에 지금도 남아 있는 금위영이건기비(禁衛營移建記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7호)에 의하면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37년(1711) 4월부터 10월까지 단 6개월 만에 성곽과 성문 공사가 끝났고, 조선 영조 21년(1745) 승려 성능(聖能)이 지은 <북한지(北漢誌)>에 의하면 당시 성의 길이는 21리 60보이고, 시설로는 14개 성문과 동장대(東將臺)·남장대·북장대와 행궁·군창(軍倉)이 있었으며 성내에는 승군이 주둔했던 중흥사 등 12개 사찰과 우물 99개소, 저수지 26개소가 있었다 한다.


그러나 틀림없이 수많은 백성들의 피와 눈물로 지어졌을 어마어마한 규모의 북한산성은 숙종이 대서문과 행궁을 거쳐 동장대에 올랐다는 기록 외에는 왕조의 피신처로 사용된 적이 없었고 더욱이 승군의 은거지인 중흥사가 일제강점기 헌병 분견소로 이용되었고 1915년에는 폭우로 당우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하니 씁쓸한 역사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산성길을 따라 용혈봉을 올려치는 사이 바위에 걸린 고드름은 한낮의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자 견디지 못하고 물을 뚝뚝 떨어뜨린다.

그 박자가 빨라지며, 마치 거기에 맞추는 듯 국녕사 스님의 독경 소리 또한 유난히 급하게 느껴진다.

역사도 이렇게 고드름이 물로 바뀌듯이 허망하게 흘러갔다 하니 괜스레 허망해진다.


하지만 북한산성 길은 감상에 젖어 있게 하지 않는다.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며 가슴 설레게 하고 길을 재촉하게 한다.

용혈봉 정상 직전 바위를 끼고 왼쪽으로 돌아서는 사이 증취봉은 오히려 계절을 역행하는 모습이다.

봄이 왔건만 온통 흰 눈으로 덧칠하고 나무마다 설화가 만발해 있다.

반면 원효봉에서 염초봉을 거쳐 백운대로 이어진 바위능선은 시간이 흐를수록 뿌연 안개가 짙어지고 파스텔톤 풍광에 여성스런 면모를 보여준다.


증취봉에 올라서자 문수봉(727m)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진다.

하지만 부왕동암문(扶旺洞暗門)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급경사 오르막을 타고 나월봉과 나한봉을 넘어서야 문수봉에 오를 수 있다.

그래도 부암동암문에 내려서자 블랙야크팀은 “벌써 문을 세 개 돌파했다”며 즐거워한다.


나월봉은 한때 의상봉 능선에서 가장 험한 구간이었으나 능선 동쪽 허리를 따라 우회로가 나면서 순탄한 구간으로 바뀌었다.

그 허리길은 삼각산 조망대이기도 하다.

백운대와 인수봉, 만경대가 뫼산(山) 자를 그린 채 기운차게 솟구치고 그 앞에 노적봉은 세 암봉을 떠받든 듯 든든한 형상이다.

 

태극기 휘날리는 백운대 바라보이자 다리에 힘 실려


“벌써 12시 반인데 가능하겠어요?”


숲 우거진 중성문 갈림목(대남문 1.4km, 가사당암문 1.2km, 중성문 입구 1.7km)에 이르자 벌써 체력이 떨어졌는지 모두 표정이 편치 않다.

그러나 산성 길은 머뭇거릴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다시 가팔라지고 또다시 일망무제의 봉우리 위에 올라서자 백운대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다리에 힘을 실어준다.


715m봉(의상봉 2.4km, 대남문 0.4km, 행궁지 입구 1.1km, 산성탐방안내센터 5.2km)을 지나 청수동암문(淸水洞暗門)으로 내려서는 사이 문수봉은 마치 한 송이 눈꽃처럼 아름답게 바라보인다.

바윗길을 따라 문수봉을 오르는 이들은 눈꽃을 파고드는 신선이자 선인이었다.


청수동암문(의상봉 2.4km, 대남문 0.3km, 비봉 1.8km, 산천탐방지원센터 4.3km)을 거쳐 문수봉 정상에 올라서자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점심상을 펼쳐놓고 있고, 대남문으로 내려서는 사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져간다.

주능선길과 구기동 계곡길·북한산성 계곡길이 갈리는 대남문은 지리산으로 치면 노고단이나 화개재 격이다.

주능선을 종주하거나 가로지르는 등산객들로 늘 붐빈다. 오늘도 그랬다.

널찍한 터마다 사람들이 점심상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점심을 먹거나 백운대나 서울 남서부 일원의 조망을 즐기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 1 열두대문 산행기점인 대서문. 2 용혈봉으로 향하는 블랙야크팀.

3 용출봉 철다리 구간. 4 용혈봉과 용출봉 사이 능선은 조망이 뛰어나다.

 

대남문을 지나면서 길은 한결 순해지고 발걸음도 빨라진다.

의상봉 능선에 비해 산성도 잘 다듬어져 있으나 새롭게 보수되는 과정에 너무 높게 쌓인 산성이 조망을 망쳐 아쉽게 한다.

그나마 내리막이나 둔덕에 올라설 때면 조망이 터져 다행이다 싶다.


오전에는 서울 남서부와 고양시를 바라보며 의상봉 능선을 걸었다면 오후 1시 문수봉을 지나면서 산성을 경계로 오른쪽으로는 서울 북동부와 남양주 일원을 바라보고, 또 왼쪽으로는 열두대문을 형성한 북한산성 능선과 삼각산 세 암봉을 바라보며 산길을 걷는다.

하나의 산에서 이처럼 다양한 조망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역시 산의 덩치가 크고 산세가 다양하면서 또한 주변에 다양한 볼거리를 갖췄다는 얘기일 게다.


대성문에 이어 보국문을 지나면서 등산객이 한결 많아진다.

평창동이나 국민대, 혹은 정릉 일원에서 올라오거나 내려가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뒤에서 힘겹게 쫓아오는 박세영씨의 집이 정릉이다 보니 직장 상사인 박용학씨는 “이쯤에서 집으로 내려가는 게 어떻겠느냐?” 권하지만 박세영씨는 다부진 표정을 지으며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남은 밥마저 먹고 가지요. 아직도 한참 더 걸어야 하잖아요?”

 

 


▲ 북한산성 전형을 보여주는 대성문~보국문 사이 산성 주능선길.

 

박용학씨는 오후 2시30분경 대동문에 도착하자 아내가 정성껏 싸준 도시락을 꺼내놓는다.

오전 8시경부터 산행을 시작했으니 벌써 6시간 반이 지나가는 상황.

용출봉에서 이른 점심을 먹기는 했지만 이후 3시간 넘게 진을 짜내다 보니 허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동장대를 지나면서 오후 3시를 넘어서자 등산객이 줄어들면서 썰렁해진 북한산대피소를 지나고 용암문(대동문 1.5km, 백운대 1.5km, 용암문공원지킴터 1.1km)을 거쳐 노적봉 안부에 올라서자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그래도 태극기 휘날리는 백운대 정상이 바로 눈앞이다 싶으니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바윗길로 접어들면서 산길 왼쪽 와이어로프 너머로 바위벼랑을 이루어 아찔아찔하다. 그래도 좋다.

정면으로는 알바위 백운대가 균형잡힌 모습으로 치솟아 가슴 설레게 하고, 등뒤로는 노적가리 형상의 노적봉과 그 뒤로 펼쳐지는 의상봉 능선이 거대한 산괴를 보는 듯해 가슴 벅차게 하니.

게다가 북한산성계곡이 시원스럽게 터지고 한강 물줄기도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열두대문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위문에 올라서는 사이 데크 길 한쪽에서 한 등산객이 “대남문까지 오는 데만 해도 바위 봉을 7개나 넘었다”며 무용담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다.

우리와 같은 의상봉 능선과 산성주능선을 타고 위문을 넘어 우이동으로 하산하는 등산객이었다.

그러다 찬바람 매섭게 몰아치는 위문을 빠져나간 다음 백운대 길에 들어서자 또 다른 중년의 등산객이 “저 바위가 히말라야 원정 나가는 젊은이들이 훈련 삼아 오르는 암벽”이라고 동료에게 설명해주며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1 나월봉을 지나 철난간을 붙잡고 오르는 박세영씨. 2 사통팔달의 위치에 있는 대남문.

3 노적봉 안부에서 위문 갈림목까지는 절벽길로 이어진다.

4 백운대를 오르노라면 등뒤로 우뚝 솟구친 만경대가 눈에 들어온다.

 

이렇듯 아마추어 등산인에게는 도전의 대상으로 각인돼 있는 북한산 최정상 백운대 등로는 데크와 와이어로프로 안전 시설물이 잘 갖춰져 있지만 난간 아래로 수십 길 바위벼랑을 이루고 있어 역시 아마추어에게는 긴장감 넘치는 구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섯 발짝만 더 걸으면 정상인데 왜 포기하려고 그래요. 용기 내서 올라보시라니까요.”


오후 4시가 다가오자 곧 날이 어두워지리라는 걱정에 백운대를 오르다 말고 “백운대는 열두대문 종주산행 코스에 끼지도 않으니까 그냥 하산하는 게 어떻겠냐?”는 정정현 기자의 말을 들은 아줌마 등산객은 하산하다 말고 물끄러미 바라보며 “백운대 정상을 꼭 밟으라”고 용기를 북돋아준다.


그 말에 마지못해 오른 백운대 정상이지만 일망무제의 조망은 우리 모두에게 큰 즐거움을 주었다.

우리가 지나온 능선은 예사롭지 않은 설릉이었고, 이제 계곡길을 따르다 상운사 길을 따라 북문을 거쳐 올라야 할 원효봉도 만만치 않았다.

7시간 만에 오른 북한산 최고봉을 올랐다는 뿌듯함에 장쾌한 조망이 더해지고, 바람까지 불어대니 바로 옆 암봉 위에서 맴도는 까마귀처럼 훨훨 날아올라 더 높은 곳에서 북한산을 내려다보고픈 욕망까지 인다.

하나 이렇게 감상에 빠져 있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다. 서둘러야 북문과 시구문을 거쳐 열두대문 종주산행을 마무리할 수 있는 것이다.

 

쏜살같이 밀려온 어둠에 2000년 역사 덮여버려


“와~, 물소리 좋다. 정말 좋네요.”


위문에서 대서문 쪽으로 내려서면 내려설수록 물소리가 점점 커진다.

한낮의 햇살에 무너진 눈은 물로 변해 골이란 골, 바위벼랑이란 벼랑을 다 적시고 있었다.

아무리 많은 눈이 내리고 제아무리 강추위가 몰아친다 해도 북한산은 이미 봄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까 산을 실컷 다닐 수 있어 좋겠다고 물어봤었죠. 이제 대답할게요. 나도 이럴 땐 그냥 내려가고 싶어요.”

 

 


▲ 위문 가는 길은 웅장하게 치솟은 백운대 조망이 일품이다.

 

의상봉을 오를 때 유성용씨가 기자에게 던졌던 질문의 답은 늦은 오후 북문 오르막에서 나왔다.

온종일 오르내리막이 반복되는 능선 길을 따르다 겨우 하산길에 접어들었는데 또다시 북문을 거쳐 원효봉에 올라야 한다는 게 즐거운 일일 수는 없었다.


“이런 걸 두고 홍예문(虹霓門) 건축기법이라고 하지요. 이렇게 돌덩이를 깎아 맞물리게 해서 아치형 성문을 만들었다는 건 정말 대단한 건축 기법이 아닐 수 없어요.”


어둠이 몰려오는 시각인데도 정정현 기자는 예사롭지 않은 북문의 모습에 감탄, 한동안 자리를 뜰 줄 모른다.

북문은 성문 형태는 깨끗하게 남아 있지만 문 위쪽은 터져 하늘이 그대로 보이는 상황이다.

 

 


▲ 1 험한 바위로 이루어진 원효봉 정상. 효자리 일원이 내려다보인다.

2 대서문을 출발한 열두대문 종주산행의 마지막 문인 시구문. 서암문이라고도 불린다.

원효봉을 오르는 사이 등뒤로 북한산 주릉이 솟구치며 빛나는 듯하다. 산 안의 절에서는 저마다 종을 울려댄다.

이제 산을 내려서라는 소리인가.

원효봉을 넘고 인적 끊어진 원효암을 거쳐 시구문(屍口門·서암문)에 내려서자 어둠이 빠른 속도로 밀려온다.

성 안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을 바깥으로 옮길 때 드나들던 문이라선지 시구문은 한결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


그 을씨년스러움 때문일까, 일행은 계속 산성길을 따라 계곡으로 내려서서 수문 터를 확인하려던 계획을 깜빡 잊고 허리길을 따라 덕암사를 거쳐 서문안으로 들어서고 그 사이 어둠이 쏜살같이 밀려와 골짜기를 덮으며 북한산성의 2000년 세월을 묻어 버리고 말았다.



[산행 길잡이]

 

암릉 우회해도 8시간 이상 걸리지만 곳곳에 멋진 조망


북한산 열두대문 산행은 암릉 마니아들이라면 원효·염초봉 암릉과 만경대 암릉을 이어 산행하지만 아마추어 등산인들은 두 암릉을 우회하는 도보 코스를 따르는 것이 안전하다.

그렇더라도 산행시간만 해도 8시간 안팎이 걸리는 뻐근한 코스다.

특히 대서문에서 대남문까지 가려면 의상봉에서부터 용출봉, 용혈봉, 증취봉, 나월봉, 나한봉, 문수봉 등 암봉 7개를 넘어야 하기 때문에 제법 힘이 빠지게 된다.


의상봉은 대서문 기점 코스 외에 북한산성분소에서 대서문 방향으로 50m쯤 오르다 오른쪽 산길을 따라 오를 수도 있다.

어떤 길이든 바윗길을 거쳐야 하는데, 의상봉 험로를 피하고 싶다면 대서문과 식당가를 지나 북한산성계곡 길을 따라 오르다 법용사~국녕사 길을 따라 가사당암문으로 오르도록 한다.


피너클을 이룬 나월봉 구간은 동쪽 사면으로 허리길이 나 있어 큰 힘들이지 않고 넘어설 수 있다.

문수봉 역시 청수동암문을 지나 왼쪽 허리길을 따르면 우회할 수 없으나 조망 감상을 위해 오를 만도 하다.


대남문에서 위문까지 산성을 따라 이어지는 주능선길은 오르내리막이 반복되기는 하지만 길이 잘 나 있는 편이다.

단, 노적봉 안부에서 위문 직전 데크 갈림목까지는 벼랑을 가로질러 길이 나 있으므로 미끄러지거나 넘어지면서 와이어로프 밑으로 추락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백운대는 열두대문 산행과 관계없지만 북한산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뷰포인트라는 점에서 올라볼 만하다.

위문에서 왕복 30분 정도 잡으면 된다.

 

 


 

 

 

북문으로 올라서려면 위문에서 남한산성유원지 쪽으로 하산하다가 대동사 입구를 지나

상운사 갈림목(원효봉 0.7km, 백운대 1.5km)에서 오른쪽 산길을 따라야 한다.

갈림목에서 북문까지 약 20분, 북문에서 원효봉까지는 약 5분 거리다.

원효봉을 넘어선 다음 산길 따라 5분쯤 가면 자그마한 암자인 원효암에 닿고,

이어 5분쯤 더 내려가면 시구문 앞이다(효자리 1.2km, 덕암사 0.3km).

여기서 수문 쪽으로 가려면 계속 산성 길을 따르고, 효자리로 내려가려면 시구문을 빠져나가도록 한다.

덕암사는 문 앞에서 왼쪽 허리길을 따라야 하며, 허리길은 북한산성분소 앞으로 이어지는 계곡길과 만난다.


열두대문 산행은 제법 길기 때문에 중식과 간식을 넉넉히 준비하도록 한다.

도중에 북한산대피소에 약수가 있기는 하지만 대장균이 많이 발견돼 마시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위문에서 우이동 방향으로 200m 거리에 있는 백운산장(02-904-0909)에서 국수·컵라면·두부와 간식류, 음료수를 구입할 수 있다.


교통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1번 출구 부근에서 북한산성행 704번·8772번·34번·350번 버스 이용. 북한산성 들머리에 대형 주차장 2개소가 있다.

중형 승용차 기준 이용료 최초 1시간 1,500원 이후 10분당 300원(성수기 350원). 21시간까지 최대 1만5,000원.

문의 북한산성분소 02-357-9698. 평일에는 제2주차장에서 1.2km 떨어진 북한동 식당가까지 차량으로 오를 수 있다.


맛집


북한산성분소 아래 상가단지에 식당이 여럿 있다. 능이명가(354-5292)는 능이버섯을 이용한 요리를 내놓는다. 능이오리백숙 5만 원, 능이닭백숙 4만5,000원, 닭도리탕 3만5,000원. 안동칼국수 6,000원. 가야밀냉면(356-5546)은 한방오리백숙(4만 원), 한방닭백숙(3만5,000원), 파전(1만 원) 감자전(8,000원) 도토묵(1만 원), 칼국수(6,000원), 갈비탕·육계장(7,000원) 등의 메뉴를 취급한다.


대서문 위쪽 북한동 마을 일원에 식당가가 형성돼 있다. 금강산장(385-3064), 만석장(385-2093), 팔경정(387-5902). 토종닭(4만5,000원), 오리(5만원), 돼지고기숯불바비큐(2인분 1만6,000원) 등의 음식이 주 메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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