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 여행기 11] 넷째 날(12월 20일)
제지기 오름 올라가는 길은 계단이었다. 돌계단과 나무계단이 이어져 있는 길이다. 오르막 계단은 정말 싫다. 헉헉거리면서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무릎에 무리도 가고. 그래서 천천히 걸어 올라간다. 힘들면 쉬고. 제지기 오름 정상에 오르니, 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멋진 전망을 볼 수 있는 자리에 의자가 놓여 있다. 의자에 앉아 포구를 내려다본다. 보목포구가 보인다. 포구 안에는 몇 척의 배가 머물고 있다.
시원하다고 느껴졌던 바람이 시간이 지나자 차갑게 느껴진다. 내려가야 할 시간인가 보다. 오름에서 내려와 보목포구를 지난다. 이곳은 6코스. 예전 2코스다. 구두미 포구를 지나 보목하수처리장으로 들어선다. 이곳도 올레 코스에 포함되어 있다. 잔디밭에 떨어져 있는 솔방울들이 눈길을 끈다.
검은여 근처 길을 지나는데 길 위에 하얀 조각들이 잔뜩 흩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저게 뭐지? 저런, 담배꽁초들이다. 한두 개가 아니다. 마치 담배꽁초를 버리는 지정장소인 것처럼 몇 십 개는 족히 되는 것 같다. 길 위의 쓰레기를 줍지는 못할망정 버려서야 되나. 증거를 남긴다는 생각으로 사진을 찍었다.
담배 피우는 분들, 이런 짓 하지 맙시다.
칼 호텔에도 제주 올레는 이어져 있다. 그곳에는 손질이 잘된 정원이 있다. 정자도 있고 연못도 있다. 멀리 야자수도 보인다. 주변 풍경을 두리번거리면서 살피다가 걸음을 재촉한다.
3시 50분이다. 1시간 남짓 걷고 나면 오늘밤에 잘 숙소를 찾아야 한다. 그곳이 어디쯤 될까? 벌써부터 마음이 조급해졌다. 오늘은 모텔이 아닌 곳에서 자고 싶다, 고 어제에 이어 같은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거라도 없다면 어떻게 할 건가. 주변에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이 없는 길을 걷는 것에 이제는 익숙해졌다. 그런데, 저 앞에서 한 남자가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남자는 운동복 차림인데 머리가 하얗게 셌다. 흰 머리는 굵은 파마를 한 흔적이 역력하다.
남자를 스쳐 지나가면서 슬쩍 곁눈질을 했다. 한데 이 남자도 나를 곁눈질을 하면서 보는 게 아닌가. 시선이 딱 마주쳤다. 그 순간은 아마도 1초도 채 되지 않으리라. 시선이 마주친 다음 나는 나대로, 그는 그대로 지나쳤다. 순간적으로 곁눈질해서 본 남자, 낯이 익다. 누구지? 오오, 영화배우 신성일. 내가 매스컴을 통해서 접한 얼굴과 조금 다른 것 같지만 영화배우 신성일이 확실했다.
제주 올레를 걸으면서 영화배우를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따지고 보면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왕년의 대 스타를 만났는데 아는 체도 안하고 그냥 지나쳐 버린다면 나중에 아쉬울 것 같았다. 그래, 아는 체라도 하고 가자. 내가 앞으로 살면서 길 위에서 영화배우 신성일과 단 둘이 마주칠 일이 또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해서 나는 뒤로 돌아 그가 걸어간 방향을 향했다. 그는 칼 호텔 앞의 연못 앞에 서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향해 활짝 웃는다. 저 여자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구나, 하는 표정으로.
영화배우 신성일 선생님이시죠?
당연히 맞단다. 그는 왕년의 스타답게 여유롭게 대답한다. 먼저 인사를 할까 하다가 여자라서 오해를 할까봐 그냥 지나갔다는 말을 덧붙인다. 반갑다고 인사를 하고 명함을 내밀었다. 그는 명함을 보더니, 국회에 있을 때 오마이뉴스 기자는 피해 다녔다고 말하다가 멈춘다.
뭐, 피해 다녔다기보다는 껄끄러웠지요. 아, 그러셨어요.
그는 내가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포즈를 취해줬다. 그는 잘 아는 동생의 49재가 있어서 제주에 왔다고 한다. 영천에 한옥을 근사하게 짓고 거기서 살고 있다면서 홈페이지를 보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을 거라고 설명한다. 그는 편안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몇 분간 이야기를 하고 나는 그와 작별인사를 나눴다. 그는 무사히 잘 걷고 돌아가라는 덕담을 해준다. 그는 제주 올레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제주에는 걷기 좋은 길이 많다는 이야기만 하는 것을 보니. 돌아서면서 나는 아는 체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어쨌거나 이야깃거리는 하나 건졌지 않나.
정방폭포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걷기 좋은 길이 펼쳐진다. 소정방폭포를 지나 소라의 성으로 가는 길로 갔는데, 길이 막혔다. 계단에 줄을 쳐 길을 막아 놨다. 그 앞에서 한동안 서서 어떻게 해야 하나 궁리를 했다. 막아놓은 길을 막무가내로 갈 것인지 아니면 다른 길을 찾을 것인지. 하지만 다른 길은 모른다. 아, 어쩌지. 결국 막아놓은 길로 가기로 했다. 소라의 성으로 올라가서 내려다보니 길에서 공사가 한창이다. 소라의 성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정방폭포를 지나고 서복전시관을 지나 드디어 서귀포시로 들어섰다. 이중섭미술관 앞에서 잠시 쉬었다가 이중섭 문화의 거리로 갔다. 거리 한복판에서는 공연무대가 만들어져 있고, 몇 사람이 모여서 공연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어린 학생들이 무리지어 모여서 구경을 하고 있다.
아, 크리스마스가 며칠 안 남았구나. 연말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걷는 것에만 열중하다 보니 날짜가 어떻게 가는 줄 모르겠다. 카페 <미루나무>를 지나가고, 60년이나 되었다는 중국음식점 <덕성원>도 지나간다. 오늘 저녁식사는 자장면을 먹어야겠다, 는 생각을 덕성원 앞을 지나가면서 했다. 그런데, 결국 거기에 가지 못했다. 내가 정한 숙소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천지연 폭포 앞에 도착하니 시간은 다섯 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숙소를 잡아야 할 시간이다. 자전거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묵는다는 모텔이 보인다. 하지만 그곳에서 자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주변에 모텔이 몇 개 보인다. 오늘도 모텔에서 자야 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길 건너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서귀포시에서 나를 부를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그냥 무시하고 가려니 다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 나는 쪽을 보니 작은 배낭을 멘 여자가 나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다.
나를 부르는 거냐고 손짓으로 물으니 그렇단다. 제주 올레를 걷는 올레꾼인가, 싶어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자는 올레지기 왕 여사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배낭을 메고 걷는 나를 보고 올레꾼으로 짐작하고 불렀단다. 이 날 숙소는 왕 여사가 잡아줬다. 왕 여사는 숙소를 찾는다는 내 말에 애순이네집, 피정의 집 등에 전화를 하고, 제주 올레 사무국장에게 전화를 해서 숙소를 수소문해줬던 것이다. 애순이네집이나 피정의 집에는 빈방이 없었고, 결국 나는 이 날도 모텔에서 자게 되었다. 아, 나는 모텔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인가 보다.
2만5천 원이라는 방값을 2만원으로 깎아준 것도 왕 여사였다. 이 분, 내가 저녁식사를 하려고 마음먹었던 중국음식점 덕성원 집 딸이란다. 인연도 참. 왕 여사가 소개해준 <민중각 모텔>은 천지연 폭포에서 뚝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한 십여 분쯤 걸어가야 한다.
해가 떨어지고 그만 걷자고 마음을 먹는 순간 종일 탈 없이 걸었던 다리가 무겁게 느껴진다. 발뒤꿈치가 아프고, 종아리에는 철근이 매달린 것 같아져 그만 걷고 이대로 주저앉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숙소가 천지연 폭포 근처가 아니라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니. 그냥 내가 알아서 숙소를 정하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처음 만난 사람의 호의를 무시할 수 없어 다리를 질질 끌면서 따라 갔다.
이 분, 제주토박이답게 길에서 아는 사람을 어찌나 많이 만나는지, 인사를 나누느라 몇 번이나 멈춰 섰는지 모른다. 게다가 가는 길에 친구네 집이 있는데 들러서 커피를 마시고 가자는 권유도 한다. 나는 빨리 숙소를 정하고 널브러지고 싶은데 말이다. 그렇다고 빨리 가자고 재촉을 할 수도 없고. 그래도 왕 여사에게 좋은 정보를 얻었다. 내가 정한 숙소 근처에 싸고 맛있는 닭곰탕집이 있다는 거다. 1인분에 삼천 원. 위치를 자세하게 알려줘서 외웠다. 오늘 저녁 메뉴는 덕성원의 자장면이 아니라 <희신이네>의 닭곰탕이다, 하면서.
제주올레 6코스(총 14.4Km) 쇠소깍 --> 소금막(756m) --> 제지기오름(2.34Km) --> 보목항구 --> 구두미포구(3.95Km) --> 서귀포 보목하수처리장(5.06Km) --> 서귀포KAL호텔(6.82Km) --> 파라다이스호텔(7.92Km) --> 소정방폭포/소라의 성(8.17Km) --> 서귀포초등학교(10.2Km) --> 이중섭 화백 거주지(10.6Km) --> 천지연폭포 생태공원(11Km) --> 남성리 마을회관 앞 공원(12.2Km) --> 남성리 삼거리(13.6Km) --> 찻집 솔빛바다 (14.4Km)
담배꽁초 버리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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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주올레 6코스.. 제지기오름에서 본 구두미포구 잊을수가 없네요. 민중각 모텔.. 지금은 올레 게스트하우스가되었어요(일인 만원.) 서귀포 시내쪽에 있어서 교통편도 좋고 맛집도 많고. 5.6.7.8.9코스 가실때 이용하기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