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야 탑은 남아 있는데
은사님은 가셨습니다.
청양에 있는 정산중학교 2학년 때 입니다. 교장 선생이 급히 부른다 하여 갔더니 동국대 박물관장 황수영 박사, 부여박물관장인 홍사준 박사와 공주 박물관장을 소개 해 주더군요. 읍내 들녘에 서있는 9층 석탑을 해체 복원하기 위해서 왔다고 했습니다. 당시 나는 고고학에 거의 미쳐 있었지요. 국사 선생이신 박은목 선생이 소개 한 것 같습니다. 황 박사의 추천으로 나는 조수로 발탁되어 발굴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라말기에 조성된 9층 석탑은 피사의 탑처럼 기울어 있었지요. 발굴 작업은 성과가 없었습니다. 이미 도굴당한 흔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탑이 이렇게 기울어 있었던 것은 아마도 도굴과정에서 생긴 현상은 아닐까요.
황박사 말대로 일본인들의 소행인 것 같습니다. 조선 방방곡곡에 그들의 만행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참으로 독하고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황박사를 비롯해 발굴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분명 쌍 탑이 있었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들은 선생과 나를 보며 이 두 사람의 숙제로 남기고 그만 철수하자 했습니다. 나와 선생은 그날부터 운명처럼 탑재를 찾아 나섰습니다. 정산 읍내의 집집마다, 면사무소, 지서, 장터의 쉼돌 등 내 손을 거치지 않은 곳이 없었지요. 물론 파악한 것의 삼분의 일도 못 모았지만요. 고등학교 입학 시험공부는 안하고 참으로 한심한 작업이었습니다.
중간에 선생님은 천안에 있는 공업고등학교로 승진하여 전근을 가셨습니다. 나는 혼자서 손수레에 탑재들을 실어모아 교무실 앞 잔디밭에 삼층탑을 세웠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정 내에 몇 번을 옮겨 다니며 그나마도 많이 훼손된 모습으로 초라하게 서있더군요. 아무리 미완성 탑이지만 어느 누구도 교정에 세워진 사연을 알려고 하지도 않은 채 말입니다.
선생님이 전근 가시기 며칠 전의 일입니다. 인근의 두릉윤산성에서 함께 탁본을 하고 내려오다 9층탑에 이름을 지어 주기로 했습니다. 절의 이름도 모르니 탑의 이름이 있을 리가 없지요. 한참 생각 끝에 선생과 나는‘녹야 탑(綠野塔),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푸른 들녘에 혼자 서있는 외로운 탑이라는 뜻이죠. 나는 다음날 목수이신 아버지가 만들어 준 팻말에 [錄野塔]이라고 한자로 써서 세웠습니다. 그 후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기도 하더군요. 그러나 몇 년 후 선생님은 대전대 교수로 계시다 교통사고로 작고 하셨습니다. 많은 제자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으시던 스승인데 말입니다.
하느님은 아마도 착하고 훌륭한 사람들은 대체로 일찍 데려가는 것 같습니다. 그 반대였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얼마 전까지 모 방송국에서 사람을 찾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모았지요. 은사를 찾아 큰절을 올리며 어린애처럼 울먹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울었습니다.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은사님이 생각나서입니다. “한곳의 샘을 파라 단물이 나올 때까지” 전근을 가시면서 나에게 격언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키지를 못했습니다. 여러 곳의 샘을 파고 다니느라 단물은 맛도 보지 못했으니까요. 나의 태몽을 어머니한테 듣고 몽진((夢辰)이라는 호를 지어준 것도 이 때입니다.
수 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더욱 간절히 생각나는 어른이십니다. 사람에게 이렇듯 어려울 때마다 생각나는 스승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매우 행복한 사람입니다.
서정리 9층석탑(녹야탑: 나랑 선생님이 지은 이름)
( 인터넷을 검색하면 아직도 별칭으로 녹야탑으로 부른다고 하더군요. )
무명탑(내가 쌓은 탑) 분명 3층탑을 쌓았는데 다 어디가고 요지경이.......
첫댓글 사진이 잘 나온건지 ... 탑이 참 멋지네요. 회장님의 추억도 아름답고...
어느 탑이 멋지다는 것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