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는 글은 스마트폰 📸 와이드(WIDE) 화면으로 볼 수 있게 조정하였습니다. 감사로 이루는 기적 누가복음 17장 11-19절 / 김병삼 목사 “11. ¶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한가운데로 지나가시니라. 12. 그분께서 어떤 마을로 들어가시매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을 만나 멀찍이 떨어져 서서 13. 목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님이여,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하거늘 14. 그분께서 그들을 보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시니 그들이 가다가 정결하게 되니라. 15.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돌아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16. 그분의 발 앞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그분께 감사를 드렸는데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더라. 17.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정결하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그 아홉 사람은 어디 있느냐? 18. 이 타국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들을 찾지 못하였다.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네 길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온전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눅 17:11-19 KJV) 어느 달에 부목회자님들과 함께 남해를 갔습니다. 무작정 출발한 짧은 여행에서 언젠가 집회 때 대접을 받았던 횟집이 생각이 났습니다. ‘갈릴리’ 횟집 그리고 그 횟집을 운영하는 권사님의 배가 ‘갈릴리’호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새벽에 일찍 나가면 갈치를 잡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새벽 예배를 마친 후 바다로 나갔습니다. 잘 잡히던 갈치가 뜸해질 무렵 이 권사님의 간증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타고 있는 배가 나오기 전, 목선을 타고 어부생활을 할 때 고기를 잡으러 제주도로 추자도로 나갔던 때가 있었답니다. 취사도구를 다 싣고 2일쯤 걸려서 갔다 오는데, 제법 돈이 되는 물고기를 잡지만 어김없이 2일이 지나면 돌아와야 했답니다. 왜냐하면 주일을 지켜야 하는 하나님과의 약속 때문이지요. 하루는 어촌교회에서 예배를 하는데 음향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부인에게 바로 은행에 가서 돈을 찾아 음향 장비를 바꾸라고 부탁을 했답니다. 그런데 고기를 잡으러 나간 후에 그렇게 고기가 잡히지 않은 적이 없었답니다. 배를 움직이는 기름 값도 나오지 않을 만큼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너무 이상해서 부인에게 음향을 해 놓았느냐고 따져 물었더니 아직 귀찮아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단을 치고 바로 음향을 해 놓고 다음날 또 고기를 잡으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날 하루에 손해 본 모든 것을 만회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권사님이 저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저는 이래봬도 체험 신앙이지요!” 배를 타는 내내 참으로 편안하고 아름다운 신앙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혹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무언가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 설교의 의도가 뭐야?” 오늘 말씀의 의도는 딱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 앞에 순전한 마음을 가지면 복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감사하는 삶을 사는 자에게는 더 큰 감사의 열매가 맺는다는 것’ 말입니다. 계속해서 더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그 배를 타고 나가기 전에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배를 타면 얼마의 돈을 지불해야 하나요?” “예, 보통은 한 사람이 3만 원씩을 냅니다.” 그래서 돈을 준비해 갔는데, 내릴 때 굳이 돈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우리를 내려놓고 볼일이 있다고 하고는 배가 떠나 버렸습니다. 제가 누굽니까? 절대 그냥 갈 수 없어서 그 식당에 우리가 잡은 갈치를 다 가져갔습니다. 30마리에 가까운 갈치를 요리해 달라고 했습니다. 갈치구이, 갈치 회, 갈치조림, 등등. 점심때 갔더니 갈치 파티가 열렸습니다. 먹고 나서 음식 값을 물었더니 목사님이 잡아온 고기인데 또 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저는 그분에게 돈을 줄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배를 탄 가격의 두 배 정도를 준비하고는, “권사님, 이 돈을 안 받으면 다시는 이곳에 제가 올 수가 없어요. 이 돈을 받고 제가 혹시라도 올 기회가 있다면 잘해 주시면 돼요.” 그리고 돈을 주고 왔습니다. 우리가 새벽부터 나가서 고생해서 잡은 고기를 가지고 먹으면서 몇 배의 돈을 주고 오는 제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돈이 아까웠을까요? 아니면 흐뭇한 마음이었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머물렀던 숙소에서 계산을 하고 나오려고 하는데, 그 숙소를 소개해준 작은 어촌 교회의 목사님이 이미 비용을 지불하셨다는 겁니다. 제가 또 그렇게 말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무 소리하지 않고 왔지만, 오자마자 좋은 선물을 그곳에 보내도록 했습니다. 아마도 그 비용보다는 훨씬 좋은 선물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스펄전 목사님의 말입니다. “촛불을 보고 감사하면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면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면 천국을 주신다.” “불행할 때 감사하면 불행이 끝나고, 형통할 때 감사하면 형통이 연장된다.” 감사는 펌프로 물을 끌어올릴 때 펌프에 붓는 마중물과 같습니다.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먼저 물을 한 바가지 붓습니다. 그리고 빨리 펌프를 움직이면 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감사의 물 한 바가지를 부으면 복이 넘치는 감사의 생수가 수 없이 올라오게 됩니다. 복을 받았습니까? 복을 감사로 표현하십시오. 복을 받은 후가 더욱 중요합니다. 복을 잘 가꾸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한 번의 축복이 아니라 지속적인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복을 감사로 가꾸십시오. 복을 받은 후에 더 큰 복으로 끌어내는 것이 감사입니다. 누구에게나 소원은 있다! 우리 인간들은 누구나 마음의 소원을 품고 살아갑니다. 시편 103편 5절에서 하나님은 ➤“5. 좋은 것들로 네 입을 만족하게 하사 네 젊음을 독수리의 젊음같이 새롭게 하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의 기도제목을 볼 때마다, 제 각기 얼마나 많은 소원들을 다양하게 가지고 있는지 보게 됩니다. 우리는 본문말씀을 통해 인생에 정말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실 때 찾아온 10명의 문둥병자가 그 주인공들입니다. 이들의 소원이 간절했음을 잘 표현하고 있는 부분이 본문말씀의 12절과 13절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먼저 12절에서는 “그분을 만나 멀찍이 떨어져 서서”라고 되어 있는데, 당시의 풍습에 의하면 문둥병자들은 격리되어 살 수밖에 없었기에 감히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질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거리 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13절로 미루어 보건대, “목소리를 높여 이르되,” 부르짖지 아니하면 들리지 않는 거리였던 것 같습니다. 먼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소원의 절박성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당시 문둥병은 불치병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병을 앓고 있을 때에도, 병명을 알고 고칠 방법이 있다면 소망이 있습니다. 참고 견디며 치료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목표를 이룬다는 것, 소망이 있다는 것보다 더 큰 인내의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또한 이들에게 도와줄 그 누군가가 있어도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들 주위에는 동일한 문둥병 환자들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어쩌면 도움의 손길조차 받을 수 없는 절망의 상황이 아니었을까? 그들에게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불치의 병인 문둥병이 문제가 아니라, 나면서 소경 된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어떤 죄인도 거절하지 않으시는 그분이 지금 그곳을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이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스티브 도나휴가 쓴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이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그는 인생을 바라볼 때 산을 타는 것과 같이 목표가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목표도 보이지 않고, 인생의 방향조차 잃어버렸을 때, 즉 사막과 같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그 사막을 벗어나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때로 사막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목표도 보이지 않는 경우들, 아이를 가지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될 수 있으나, 아이를 키워나가는 과정은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과 같습니다. 결혼을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될 수 있으나, 결혼 생활을 하는 것은 마치 사막 가운데서 건너가야 하는 일은 아닐까? 때로 우리가 인생에서 실패와 병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이겨나가야 하는 것이야 말로 사막을 건너야 하는 일들이 아닐까? 도나휴는 사막을 건너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고 말을 합니다. 바로 ‘나침반’입니다. 어떤 목표도 보이지 않을 때, 우리가 가야 하는 올바른 방향을 알고 있다면 지금 사막 가운데 있는 그 순간, 한 걸음을 옮기는 그 순간이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을 이유가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동일하게 문둥이의 문제를 안고 사막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올바른 방향을 향해 걸어가며, 올바른 방향을 향해 소리를 높여 부르짖느냐는 것입니다. ➤시편 145편 18-19절에 “18. {창조주}께서는 자신을 부르는 모든 자 곧 진리 안에서 자신을 부르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계시도다. 19. 그분께서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그들을 구원 하시리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막과 같이 목표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나가는 것이 복입니다. 10명의 문둥이들이 그들의 삶에 수없이 반복되던 실패와 절망 가운데서도 주님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나아간 것이 축복의 순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소원을 아뢰며 여기에 앉아있다는 것이 감사할 조건입니다. “그들을 보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올바른 방향을 향해 가면 우리의 인생에 결코 후회함이 없습니다. 물론 그 길에는 많은 장애가 있습니다. 문둥병자들이 주님 앞에 나가기 위해 많은 장애를 경험했지만, 그 장애가 그들의 소원을 앞서지는 못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자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14절에 “14. 그분께서 그들을 보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시니 그들이 가다가 정결(淨潔)하게 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주 쉬운 표현으로 하면 “He said"입니다. 소원을 이루는 것은 그분의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의 몸을 보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는 것은 나은 것을 제사장의 입을 통해 증명 받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소원의 기적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은 그분의 말씀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야기처럼 접하는 것이지만 제사장에게 찾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이들 가운데는 몸의 상태가 좋아졌을 때, 제사장을 찾아갔으나 퇴짜를 맞은 경험이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아직 낫지 않은 상태에서 마을에 들어갔다가 사람들을 만나면 돌을 맞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들이 주님께 희망을 걸고,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제사장에게 찾아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실, 펼치실 일에 대하여 순종하며 나아간 것입니다. 오늘 소원을 가지고 나온 여러분에게 주님을 무엇을 말씀하시며, 명령하십니까? 10명의 문둥병자들에게 말씀하신 것도 결코 순종하기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우리의 소원에 대하여 늘 ‘yes’로 응답하시는 주님의 말씀만을 듣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은 주님께서 여러분의 소원에 ‘No’라고 대답하실 때도 순종하며 나아갈 자신이 있으십니까? ‘No’라는 응답에도 감사하며 나아갈 자신이 있으십니까? 오늘 본문과 조금 빗나가는 내용일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질문입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기도에 대하여 응답하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해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사무엘하 12장 16-17절에 다윗의 기도가 나와 있습니다. “16. 그러므로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청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더니 17. 그의 집 장로들이 일어나 그에게 가서 땅에서 그를 일으키려 하되 그가 원치 아니하고 그들과 함께 빵도 먹지 아니하더라.” 이 기도는 다윗이 밧세바와 불륜을 저지른 후에 낳은 아이가 죽게 되었을 때 기도하는 다윗의 모습입니다. 불륜이었지만 얼마나 그 아이가 귀했으면, 잘못을 알았지만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7일을 기도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신하들이 왕에게 그 아이의 죽음을 보고하지도 못했을까? 그런데 그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 다윗의 모습을 보십시오. 다윗은 아기의 죽음을 알고는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은 후 창조주의 전에 들어가 경배하고 궁에 돌아와 음식을 먹기 시작합니다. 이 모습을 본 신하들이 놀라 묻습니다. ➤“20. 이에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주}의 집에 들어가 경배하고 그 뒤에 자기 집으로 돌아 오니라. 그가 요구하매 그들이 그 앞에 빵을 차려 놓으니 그가 먹으므로 21. 이에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아 있을 때에는 왕께서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셨으나 아이가 죽은 뒤에는 왕께서 일어나서 빵을 드시니 도대체 왕께서 행하신 이 일이 무엇이니까? 하매 22. 그가 이르되, 아이가 아직 살아 있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내가 말하기를, 혹시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푸사 아이를 살려 주실지 누가 알리요? 하였기 때문이거니와 23. 지금은 그가 죽었으니 어찌하여 내가 금식하리요? 내가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삼하 12:23)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순간 다윗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그가 실패한 사람입니까? 단순히 그의 인생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이 났습니까?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습니까? 그가 금식하며 통곡하고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은 소원 때문에 그는 불평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순종하며 겸허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의 소원이 깨어진 그 순간에도 그는 올바른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결코 그의 인생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으며,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솔로몬이 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이루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하나님 앞에 소원을 가지고 나오십시오.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명령에 순종하십시오. 여러분의 소원이 끝이 났습니까? 끝나버린 그것 때문에 슬퍼하며 금식하고 있습니까? 다윗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길은 사막 가운데 있을 지라도 믿고 따르는 자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감사의 표현에 따라서 본문말씀은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가는 데 있어서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더 큰 복을 소유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복과 기적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말씀에 등장하는 10명의 문둥병자가 있습니다. 이들은 동일하게 소원을 가지고 있었고, 동일한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하지만 동일한 태도를 가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태도에 따라 나머지 인생이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병이 나은 것으로 그쳤으나, 어떤 사람은 구원을 선물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목회자님들과 함께 들렀던 어느 식당 중에 사훈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사를 잘하자!” 아주 간단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 가게에는 모든 종업원들이 인사를 잘합니다. 여름이 되면 냉면을 하루에 1500그릇 이상 파는 가게입니다. 돈을 많이 벌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오는 손님에게 인사를 잘하는 것이 사업의 비결입니다. 손님은 친절한 대우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같은 값에, 같은 맛이면 그 가게에 속한 사람들의 태도가 많은 것을 좌우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동일한 원리가 작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 주시 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복을 누리지는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태도는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복주시기를 원하시는 우리의 모습은 무엇일까? 그것은 감사를 아는 백성을 복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온전한 감사로 우리가 온전한 복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사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큰 복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감사를 모른다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열 사람의 문둥이 중 ‘단 한 사람’의 태도가 우리를 감격스럽게 합니다. 본문말씀 15-16절입니다. ➤“15.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돌아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16. 그분의 발 앞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그분께 감사를 드렸는데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더라.” 우리는 환난 중에 큰소리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환난 중에서 구원을 받은 후에 큰 소리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의 감사하는 소리는 기도하는 소리와 같았습니다. 큰 소리로 기도하고 큰 소리로 감사한 것입니다. 감사의 가장 큰 특징은 ‘표현’하는 것입니다. 받은 것은 받았다고 표현을 해야 하며, 인정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아마도 다른 아홉 사람의 문둥병자들도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표현되지 않았기에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입니다. 또한 감사를 표현하지 못하여 더 좋은 구원의 기회를 잃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이 경험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정말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사람을 보면 감사한 마음이 들고, 또 그 감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주 큰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감사를 표현하면 행복해진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 감사를 표현하는 능력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줍니다. 본문에서 이 문둥병 환자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 순간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간증을 들으면 눈물이 나고, 그동안의 그 사람의 아픔이 얼마나 컸을까를 생각하면서 더 큰 감동이 몰려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그 사람의 큰 감사의 소리를 들으시면서 마음이 기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더 큰 것을 주셨습니다. 본문말씀 19절에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네 길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온전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7.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정결하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그 아홉 사람은 어디 있느냐?”라고 하신 것은 주님의 섭섭한 마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섭섭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감사를 표현하지 못한 아홉 사람이 더 큰 축복의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헌금에 대한 설교를 한다는 것이 아주 부담스럽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목사가 헌금에 대한 설교를 할 때 교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1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도대체 전능하고 부요하신 만물의 주인 하나님께서 왜 부요하게 살지도 못하는 내 돈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여기에 앉아 있는 분들 가운데도 같은 생각을 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알아서 하는데, 왜? 하필이면 감사절을 만들어서 헌금을 해야 하는가?’라고 말입니다. 먼저 정답을 말씀드리면 헌금은 하나님의 부족을 채워드리는 행위가 아닙니다. 감사로 드리는 헌금, 우리의 표현은 믿음의 표현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을 드리고 감사를 드린다는 것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존재에 대한 고백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은 가장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링컨 대통령에 관한 일화입니다. 한 번은 한 할머니가 대통령을 찾다가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을 한 모양입니다. 비서진들이 가뜩이나 정적들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달래서 보내려고 합니다. 그때 마침 링컨 대통령이 나왔습니다. 할머니는 대통령에게 "잠깐이면 됩니다. 잠시만 만나 주세요."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링컨은 집무실에 들어오라고 한 후 물었습니다. "부인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그런데 할머니는 뜻밖에도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무것도 도와주시지 않아도 돼요. 그저 각하가 좋아하시는 과자를 조금 구워 왔는데, 맛있게 잡수셨으면 좋겠어요. 나랏일로 늘 바쁘신데 조금이나마 보답을 하고 싶어서요. 우리 모두 각하를 사랑하고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답니다." 링컨은 자기 생애에서 이 짧은 순간이야말로 모든 스트레스가 달아나고 진정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10명의 문둥병자 중에 한 사람만이 그의 몸이 나은 것에 대한 감사를 처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와 표현했습니다. 다른 9명의 사람들이 감사하는 마음이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도 역시 예수님께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감사의 우선순위와 대상이 예수님이 아니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최고의 존재가 되기를 원하시며, 우리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감사의 표현은 우리 존재의 첫 번째 원인이 되어주신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표현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십니다. 얼마 전 저는 친하게 지나는 목사님 몇 분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너무 감사해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정말 감사해요."라고 말입니다. 정말 바쁜 목사님들이 제가 아픈 동안 일정을 취소하고 함께 보내려던 모습들, 내가 그 목사님들을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사람을 받음 것이 너무 고마워서 전화를 했습니다. 그 전화를 받는 목사님들이 너무 당황해하셨습니다. 그런데 너무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전화를 하지 않는다고 관계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감사를 표현하면서 마음에 기쁨이 생기는 것은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헌신과 결단을 드리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감사와 사랑을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하나님 정말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저를 사용하시든, 그렇지 않든지 그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제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나를 향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무척 감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큰 소리로 표현하십시오. 하나님은 이 고백을 들으시고, 기뻐하면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네 길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온전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내가 너의 감사와 사랑을 받아들이고, 너와 평생을 동행하겠노라” 사마리아인의 감사가 더욱 감동적이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이란 한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늘 소외되어 있던 사람들입니다. 특히 그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 와서 감사를 표현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감동이 큰 것입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에게서 나온 감사의 표현이기에”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방법이 오히려 쉽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감사를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여러분의 감사에 주님이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감사에 더 큰 기적을 준비하고 계실 것입니다. 한 해를 지나면서 함께 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날이 오늘입니다. 지금까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끝이 나지 않도록, 감사를 통해 더 큰 은혜를 소유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표현하시겠습니까? 어떤 이는 물질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 앞에서 헌신을 서약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나도 남을 섬기며 살겠다고 다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그 감사로 인하여, 하나님께 일정한 삶의 부분을 드리겠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표현하지 않는 감사는 감사가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구체적인 감사의 표현이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설교를 마치고 가장 행복한 시간이, 때로는 편지로 감격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저를 만나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를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감사의 표현을 원하십니다. Just Do It! Do it Now! 그리고 더 큰 기적이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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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一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