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보리수필>>제10집을 내며
올해로 창립한 지 12주년을 맞이한 보리수필문학은 회원들의 섬세한 글뿐만 아니라 친목 또한 단단해서 지역 문단을 이끌어가는 견인차 역할을 해내고 있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작가들은 벌써 중년을 넘기고 사위와 며느리를 본 사람들도 생겼으니, 세월의 흐름이 곧 시가 되고 수필이 되었나 봅니다. 12년을 한결같이 함께 해 준 회원들의 정성과 열정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사연과 생각들이 제각각 다른 사람들이 서로 모여 한마음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만 어찌 그동안 좋은 일만 있었겠습니까. 때론 토닥대고 마음상한 적도 있었겠지만 그것조차 없었다면, 아니 번득이는 눈빛조차 없다면 우리는 무서운 세월 앞에 고개를 떨어뜨려야 했을 것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회원들이 그리움과 사랑, 체험, 그리고 인간사에서 저마다 느낀 정서들을 담백한 수채화로 그렸습니다. 신선한 무기로 어색한 세상을 정갈하게 꾸며보고 싶다며 붓을 든 필자들의 마음이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향기로 다가옵니다.
<<보리수필>> 제10집은 크게 3편으로 나누어 졌습니다. 앞쪽에는 회원들이 자유제목으로 각자 1편씩의 수필을 썼고, 뒤쪽에는 공통 소재를 정하여 각자가 “인연” 이라는 소재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과 추억들을 글로 표현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회원 이외의 작품인 초대수필, 교류수필, 고전수필을 중간에 넣고, 중국 연변에서 문학 활동을 하고 있는 리태근 선생의 글을 특별회원 란에 실었습니다.
이 책이 회원들 뿐 아니라 수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전해 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책 발간을 위해서 특히 노력해준 편집부와 사무국장님, 그리고 화보를 찍어주신 여러 회원님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아울러 문예진흥보조금을 지원해 주신 포항시에도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2015년 11월 10일
보리수필문학회장 이상준
<초대작품>
케이블카와 동심(童心)
정호경
어린 아이들은 자동차타기, 기차타기, 말타기 그리고 방 안에서의 아버지나 형의 등말타기 등 무엇이든 타기 놀이를 하면서 자란다. 한자성어에 죽마고우(竹馬故友)란 말이 있다. 대꼬챙이를 다리 사이에 끼워서 하는 말타기 놀이로서 이는 어렸을 적부터 같은 동네에서 허물없이 가까이 지낸 친구를 뜻하는 한자성어이다. 나도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밖에서는 온갖 타기를 즐기고 신나게 놀다가도 집에만 들어오면 조심스러워져 숨을 죽인다. 아버지가 몹시 엄한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엄한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는 철없는 동심으로 인한, 짓궂은 사건들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겨울방학 때의 집 앞 무논의 얼음판에서는 팽이치기보다는 썰매타기가 더 신이 났다. 나는 앉아서 타는 썰매가 시시해서 마루 밑에서 찾아낸, 아버지의 낡은 문패 나무토막 아래 굵은 철사를 받힌 외발스케이트에 열중해 있었는데, 서울에서 중학을 다니던 형이 맞춘 경기용 칼날스케이트의 구두가 발에 맞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내 몫으로 돌아왔다. 베어버린 벼 포기가 쫑긋쫑긋한 시골의 얕은 논바닥 얼음판이지만, 나는 아버지의 문패로 만든 외발스케이트에서 승격한, 이 마을의 영웅적인 스케이트쟁이가 되어 싸늘한 겨울 하늘에 희망의 깃발을 날리고 있었다.
오늘 오후 운동 겸 산책하러 돌산공원에 갔더니 여느 날과는 달리 주차장에 승용차며 관광버스까지 빈자리 하나 없이 꽉 차 있기에 웬일인가 했더니 '여수해상케이블카'가 드디어 개통을 했다는 것이다. 찾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꼬마들이 앞장 선 가족이거나 젊은 연인들 쌍쌍이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운동 겸 산책을 하다가 바람이 너무 차서 다시 차속에 들어와 앉아 쇠줄을 타고 내왕하고 있는 케이블카를 먼 거리에서나마 신기하게 구경했다. '돌산공원'에서 오동도 앞에 있는 '자산공원'을 수십 대가 종일 왕복한다. 애당초의 계획은 돌산공원에서 오동도까지라고 했는데, 무슨 사유에서인지 계획이 변경되어 왕복거리가 기대보다 짧아지고 보니 탑승객들은 무척 아쉬워하는 표정들이었다. 왕복의 거리야 어떻든 여수 명물이 또 하나 생긴 것은 틀림없다.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보면, 바다 속의 고기들이 한가하게 헤엄치며 노니는 모습도 볼 수 있으려니 했는데, 이는 배고픈 갈매기들 눈에만 보일 뿐,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어떻든 비행기나 차를 타는 것과는 또 다른 기분일 것이다. 모두들 모처럼 동심(童心)으로 돌아가 보자며 싱글벙글했지만, 나는 그 동심에 앞서 점심 때 모처럼의 소 갈빗살 맛에 과식을 해서 어린 시절 추억의 그 목탄차(木炭車) 버스멀미가 문득 떠올라 두꺼비 폼으로 엎드려 쏟아 내야 할 것을 걱정했지만, 그보다는 집사람과의 전화 한 통화 없이 나 혼자만의 탑승 재미를 본 것에 대한 후환이 두려워 단독 탑승은 포기해야 했다. 구운 오징어 다리처럼 말라비틀어진 결혼식 주례사에서의 그 ‘백년해로’가 자꾸만 마음에 걸려 나 혼자만의 결정은 조심스러웠다. 나의 ‘동심’이란, 매사의 후환을 두려워하는, 순진무구하고 정직한 마음일 뿐인데, 혹시 성질 급한 어느 이웃 노인이 이 사실을 안다면, ‘이 나이에 참 불쌍한 노인도 다 있구나.’ 하고 나에게 연민의 정을 보내지나 않을까 괜히 걱정이 되었다.
오늘은 미국 사는 제자가 서울에 일보러 온 길에 또 한 사람의 제자와 함께 여수에 놀러 왔다. 점심때는 지났지만, 저녁때는 아직 일러서 우리도 ‘동심’을 앞세우고 돌산공원의 케이블카 정류장으로 곧장 행했다. 날씨는 싸늘했지만, 우리 일행과 같은 동심애호가들이 북적거렸다. 우리는 왕복표를 사서 바로 차에 올랐다. 나는 바다 위를 높이 떠가는 케이블카 타기가 이번이 두 번째여서 무섭지는 않았다. 종점인 자산공원에서 내려 커피를 한 잔 하면서 주변 경관을 둘러보며 잠깐 쉬었다 다시 시발점인 돌산공원으로 가려고 줄을 서 있는데, 바람이 세어서 갈 수 없으니 잠깐 기다리든지 아니면 산언덕 나무계단을 통해 평지로 내려가 택시를 타고 돌산공원 시발지로 가면, 택시요금과 탑승요금을 전액 환불해 준다고 안내원이 말했다. 우리는 바람이 잘 때까지 막연히 서서 기다릴 수가 없어서 백 미터 거리의 긴 나무계단을 걸어 내려가 택시를 타고 출발지점으로 되돌아갔다. 어렸을 적의 이런 ‘동심’은 비록 편도일망정 케이블카는 물론이거니와 택시까지 공짜로 탔으니 정말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었을 것이지만, 백 미터가 넘는 평지까지의 꼬불꼬불한 구절양장 나무계단이 고역스러워 다리가 휘청거리는 이 노인의 ‘동심’은 전혀 즐겁지도 신나지도 않았다. 나는 그 뒷날 양쪽 다리 근육이 굳어 일어서지도 걷지도 못해 이웃 한의원에 가서 침도 맞고 뜸질도 했더니 오늘은 다리가 많이 풀렸다. 어렸을 적 죽마 타던 그 시절의 ‘동심’과 늘그막 케이블카타기의 이 ‘동심’은 신나는 즐거움과 휘청거리는 피로감의 차이였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간다는 저승길이 이처럼 팍팍하고 피곤하다면, 옆에서 나를 부축해 줄 제자들도 없이 그 멀고 어두운 길을 어떻게 갈까 싶었다.
*정호경: <<수필과비평>>, <<에세이스트>> 편집고문. 작품집 <<폐선>>, <<낭패기>> 외 다수.
올해의 수필인상. 조경희수필문학상 외 다수 수상. jhk31227@hanmail.net
<교류작품: 서라벌수필문학회>
무장골에 들다
정서윤
조락을 끝낸 나무들의 행렬이 산정에서 칼바람 앞에 마주설 준비마저 끝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겨울나무들. 깨달음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구도자의 모습 같다. 삭풍은 득달같이 달려와 나무의 살 속으로 파고든다. 나목들이 토해내는 속울음이 골짜기로 내려와 흩어졌다.
겨울산은 꽃을 달고 잎을 피워 숲을 살찌우던 풀과 나뭇잎들을 된서리로 잠을 재웠다. 뿐만 아니다. 산에서 소리를 내는 모든 것들을 일제히 안으로 불러들였다. 많은 날짐승과 산곡의 물소리에 화음을 맞추어 노래하던 곤충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조차 얼음 속에다 본래의 소리를 감추어 버렸다. 산은 다시 봄을 맞이하기 위해 기운을 저장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겨울나무가 다시 잎을 피우기 위해 기운을 모으듯 사람들의 고독 또한 삶의 겨울을 이겨내려는 몸짓이 아닐까. 싶다.
봄의 소란함과, 여름의 격정, 가을의 수런거림을 침묵으로 가라앉힌 겨울 숲. 웬일인지 포효하듯 산정을 뒤흔들던 바람이 어느새 잠이 들었다. 산봉우리에 서서 바람에 항거하던 나목들도 선채로 졸고 있다. 그러고 보니 하늘이 산맥에 닿을 듯 내려앉았다. 목화솜 같은 백설을 내려 산정에서 떨고 있는 나목들을 덮어줄 모양이다. 잎을 떨군 나무들이 뿜어내는 빛깔이 마음을 한층 편안하게 한다. 산은 지금 선정에 들 준비를 끝낸 선승이 잿빛장삼을 여미며 무채색의 거대한 경전을 펼쳐놓고 앉아 있는 것 같다.
저물어 가는 인생에 대하여 깨달음의 말을 남겨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육조 혜능은 “낙엽은 뿌리로 돌아간다.”고 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근원으로 돌아가 새로운 탄생이 이어진다는 것을 겨울 산이 보여주고 있다.
무장사지(鍪藏寺址) 가는 길. 뿌리로 돌아가는 낙엽들이 길을 덮고 있다. 가고 오는 세월이 쌓여 허물어진 절터. 탑하나 간신히 외롭게 서 있다. 무엇을 찾기 위해 깊은 산골 얼어붙은 폐사지로 왔는가? 조용히 나에게 물어본다. 폐허를 만나는 것은 바로 근원을 만나는 것이라 했던가. 홀로 서 있는 탑 주위를 감도는 고요에 휩싸여 바로 이 순간을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삼국을 통일한 후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이 골짜기에 병장기와 투구를 묻어 감추었다고 전한다. 무장(鍪藏)골, 무기를 묻은 곳에 탑을 세우고 절을 지은 것은 다시는 전쟁이 없길 바라는 신라인들의 간절한 염원이었을 터이다. 천년을 이끌어온 왕국. 영원하리라 믿었던 신라의 찬란한 역사는 흥망성쇠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 가버리고, 절터가 헤아려 온 세월이 천삼백여 년이다.
겨울 폐사지를 지키고 서 있던 나무들이 모두 승복으로 갈아입었다. 동안거에 들어갈 모양이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바위들이 골격을 드러내놓고 앉아있다. 마치 노승이 앉아 면벽수행을 하는 모습 같다. 어쩌면 저 바위와 나무들의 수행으로 인해 긴 세월의 뒤안길에 그나마 탑이라도 남아 있었는지 모른다. 삼라만상이 선정에든 무장사지. 문득 나도 나무들과 어울려 산에서 겨울을 났으면 싶다. 천년을 건너 온 걸까. 어디선가 들려오는 환청 같은 독경소리가 나를 다시 고요 속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무장골에 들어 산을 읽는다. 겨울 산이 펼쳐놓은 무채색의 책갈피를 천천히 넘기며 느린 걸음으로 읽고 간다. 대자연과 경서가 둘이 아님을 산이 넌지시 내게 일러 주는 것 같다. 오래 전 불교에 입문을 해서 초발심을 낼 때다. 그때 나는 아무런 뜻도 모른 채 경전을 열심히 독송했다.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해도 경을 외우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알 수 없는 환희로 가득했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길을 덮은 나뭇잎을 밟으며 무장무장 걸어 나오는 무장사지에 또 한 겹의 세월이 쌓여가고 있다.
*정서윤(본명 정옥자) :매일신문 신춘문예 수필당선, 서라벌수필문학회, 한국 문인협회, 한국 수필가협회, 경주 문인협회 회원, 문맥 동인
강길수
<<에세이21>> 추천완료(2006)
제1회 포항소재 문학상 수필부문 최우수상 당선(2009)
제1회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수필부문 우수상 당선(2015)
수필집 『바다로 가는 자전거』(공저) 『존재의 향기』(공저)
산영수필문학회 회원
kboni@hanmail.net
똬리
작은 물방울이 포르르 날린다. 어머님 제삿날, 고향집 주방 앞 수도꼭지다. 물방울 앞으로 그 옛날, 물자배기를 인 젊은 어머니의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나타난다. 어머니 얼굴 앞에 자배기의 물이 조르르 넘쳐 흘러내리며 물방울 되어 흩날린다. 어머니는 자배기 밑동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한손으로 훑어내고, 물자배기를 부뚜막에 내려놓으신다. 이어, 손때 묻은 똬리를 머리에서 집어 문설주에 거신다.
지금은 주방으로 변한 부엌, 그때 우리는 ‘정지’라고 불렀다. 어머니가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정지다. 성긴 판자 두세 쪽으로 만든 커다란 양쪽 여닫이 정지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받침돌을 밟는다. 우리 집 여인들이 대대로 이어오며 밟고 살아온 받침돌. 그 돌을 밟고 한 켜를 더 내려서야 바닥이다. 바닥 왼쪽에 땔나무가 있고, 북쪽 구석에는 커다란 물 항아리가 자리한다. 맞은편 낮은 단 위에는 새로 장만한 산뜻한 찬장이 올라있다. 오른쪽 부뚜막 가운데에 까맣게 윤나는 무쇠 솥 두 개가 오누이처럼 정답다. 큰 것은 밥솥, 조금 작은 것은 국솥이다. 솥 양옆 부뚜막에는 쌀 함지박이나 찬거리, 물자배기, 도마, 그릇 같은 것들이 필요에 따라 사이좋은 동기들처럼 놓여졌다.
오른쪽 문설주에 큰 못 한 개가 박혀있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 못도 까맣게 그을려 있다. 못엔 늘 똬리가 집지킴이인 양 걸린다. 어린 나는 똬리가 있으면 그냥 좋았다. 어머니가 집에 계시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똬리가 없으면 어머니가 물 길으러 혹은, 다른 일을 하러 가시어 안 계심을 금방 알아채고 시무룩해지곤 했다. 하지만 이제 어머니는 가시고 정지도, 성긴 판자 정지문도, 똬리도 다 스러지고 없다. 그나마 집이라도 남아 있으니 참 다행이다.
봄 버드나무 그늘에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막걸리를 한 사발씩 들이 킨 사내일꾼들과 아낙모내기꾼들이 주고받는 농담들 때문이다. 어머니가 집에서 똬리위에 이고 오신 커다란 점심함지의 보자기가 걷힌다. 반찬들이 고루 놓아지고, 검은콩 섞인 고슬고슬한 고봉밥과 구수한 국 한 그릇씩이 나누어진다. 먹는 즐거움의 시간이다. 웃음소리대신 밥 먹는 소리에 곁들여 이웃 정담들이 오간다. 밥이 참말로 맛있다든가, 더 먹으라든가, 누군 장가들고, 누구는 시집간다든가, 뉘 집 아이는 무슨 시험에 합격했다는 등 동네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들이다. 우리 집 모내기하는 날, 논 가 냇둑에서 점심을 먹는 모습이다. 후딱 점심 그릇을 다 비우고 잠시 쉬고 나면, 누군가 멋진 노래 한곡을 뽑아낸다.
“자!”, “자아!” 하고 다시 못줄을 대는 구성진 소리에 맞춰 오후모내기가 시작된다. 그때, 어머니는 빈 그릇들을 담은 함지를 똬리위에 얹어 이고 집으로 가신다. 나는 막걸리를 담았던 커다란 양은 주전자를 손에 들고, 졸랑졸랑 어머니를 따라 나선다. 논둑길을 벗어나 냇바닥을 지나고, 큰길에 접어든다. 얼른 어머니 옆에 서면, 무명적삼을 입고 흰 수건을 쓴 어머니의 옆얼굴이 보인다. 땀방울 송송 맺힌 얼굴 위로 똬리의 한 쪽이 초승달처럼 숨은 듯 드러나 보인다. 어머니와 나란히, 혹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무얼 사달라고 칭얼대기도 하고,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며, 노래도 부른다.
어머니는 똬리를 주로 샘에 가실 때 썼다. 가끔 농사철에 새참이나 점심을 가져갈 때나, 밭에서 푸성귀를 가져올 때 쓰기도 하셨지만, 대부분 물을 길을 때 쓰셨다. 그 물로 밥 짓고, 설거지하고, 온 가족이 세수하였다. 또 정지에서 나오는 쌀뜨물과 개숫물을 모아 쇠죽을 끓이고, 때론 개죽도 쑤었다. 모름지기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똬리 위 물자배기에 어머니가 이고 오신 물로 사람도, 짐승도 살아온 것이다. 그러니 똬리는 우리 집의 숨은 생명줄이었다.
똬리는 여자들이 짐을 이고 나를 때, 머리위에 얹어 쓰도록 만든 고리모양의 머리 보호구다. 짚과 왕골 잎, 헝겊 같은 재료로 만든다. 짚을 도넛모양으로 감은 다음, 그 위에 왕골 잎을 엮어 외피를 입히면 된다. 똬리의 아랫부분은 얹는 사람의 머리에 맞게 오목하고, 윗부분은 평평하다. 똬리는 겉보기에는 가볍고 연약해도 짐과 머리사이에 자리하여, 제 몸에 내려누르는 짐의 무게를 푹신한 온몸으로 나누어 감당한다. 짐의 무게를 사람의 머리위에 넓게 분산시켜 정수리만 내려 누르는 위험을 없애고, 고통을 줄이며, 짐 흘러내림도 막는다. 똬리는 어릴 때의 농촌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하중荷重완충기였다.
일제 강점기 보릿고개가 극심하던 시절, 우리 집은 산골에서 변변한 땅뙈기도 없이 사래논밭 얼마로 살림을 꾸리는 형편이었다. 가난한 집안의 맏며느리로 시집 온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은 돈 벌어 살림 펴보겠다고 징용으로 일본에 갔다. 스무 살 새댁은 홀로 엄한 시부모 모시고, 세 시동생의 뒷바라지를 하며 살았다. 가끔 학교에 다니는 시동생이 콩밥도시락에 삐쳐 안가지고 가면, 이십 리 길을 부리나케 걸어서 가져다주곤 했단다. 어린 시동생의 밥투정이 젊은 형수에겐 무척이나 안쓰러운 일이면서도 한편, 외롭고 고된 시집살이새댁이 오랜만에 똬리와 함께 쉴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을 터이다.
위에 얹힌 짐과 짐을 인 사람의 머리 사이에 감추어져, 잘 보이지 않는 것이 똬리다. 짐을 이고 나를 때 똬리를 보기위해서는, 위치를 잘 골라 쳐다보아야 한다. 꼴이라든가 남새묶음, 소나무갈비포대, 잔가지삭정이 같은 푸석한 것을 이고 나를 경우, 똬리는 짐 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할 때도 많다. 똬리도 그렇다. 잘 보이지 않아도, 머리에 짐을 이고 나르는 일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니까.
어머니는 첫아들은 낳아 한 달 만에 실패하였다. 그 와중에 남편은 돈 벌러 바다건너로 떠났으니, 장부丈夫 같았다는 시어머니의 등살이 어떠했을까. 남편이 옆에 없는 터에 누가 위로가 되었으랴. 아버지는 오년 만에 일본에서 돌아오셨다. 그 후 삼년이 다되어서야 어머니는 나를 낳으셨다. 그 오랜 시간, 시부모님의 손자타령은 또 오죽했을까. 자식 없이 석삼년 넘게 매운 시집살이 동안, 어머니의 똬리도 문설주에서 제대로 쉴 날이 없었으리라.
그뿐 아니다. 내 바로 밑의 여동생은 유아 때 병으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어머니 가슴에 더 피멍이 들게 한 사건은, 집안의 웃음이던 똘똘한 세 살배기 막내가, 졸지에 끔찍한 변을 당하고 만 사건이었다. 모내기 하던 날, 동네 아이들과 냇가에 놀러 갔다가 불어난 냇물에 그만 떠내려가 먼저 하늘나라로 가버리고 만 것이다. 낳은 자식들 일곱 남매 중에 셋을 가슴속에 묻고 살아낸 어머니시니, 그 가슴은 다 타버려 새까맣게 재만 남은 똬리 같았으리라.
낡아 못쓰게 된 똬리는 아궁이에서 마지막으로 제 몸을 태워 밥을 짓거나, 쇠죽을 끊이거나, 아랫목을 덥힌다. 타고 남은 재는 논밭에 뿌려져 작물의 자양분이 되고, 아궁이에 못간 헌 똬리는 두엄자리에 가 썩어 논밭의 거름이 된다. 이렇게 마지막 한 가닥까지 다 타거나 썩어,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남김없이 내어주는 것이 똬리다. 자기희생의 표본이다.
어머니도 중년이 되었다. 가끔 아버지가 늦어지시는 날, 어머니는 아이들 잠든 밤 머리맡 등잔 앞에 혼자 앉아, 몰래 꽁초 몇 모금씩을 피우셨다. 어쩌다가 내가 잠들지 않아 기척을 하면, 죄지은 사람처럼 얼른 꽁초 불을 끄셨다. 담배 몇 모금만으로는 마음 다스리기가 부족했던지, 어머니는 급기야 속병을 얻으시고 말았다. 건넌방 군불솥에 초피나무가 그득 삶아지는 날은, 어머니가 속이 아프신 날이라는 신호였다. 초피나무 삶은 까만 물은 어머니가 스스로 체득하여 진단하고, 처방하신 속 다스리는 평생 탕약이었다. 탕약 드시는 날도, 우리 집 똬리는 여전히 쉬지 않았다.
한 봄날, 고향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연락이다. 사과나무의 적과摘果를 하시다가 떨어져 다쳤단다. 심각한 것은 아니라 하여, 사흘 후 토요일 날 부랴부랴 달려간 병원. 어머니의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말도 못했다. 어머니의 아랫배 부분이 홑이불 속에 똬리를 넣은 듯, 봉곳이 솟아올라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순간, 어머니의 고통이 바로 내 심장에 와 꽂히는 듯 했다. 소변을 못 보아서 그러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가늘게 끄덕였다. 나는 자기도 모르게 병원이 떠나가도록 큰 소리를 질렀다. ‘환자가 이지경인데, 뭐하는 게 병원이냐!’고. 평소 큰소리 잘 지를 줄 모르던 내가 어찌 그랬는지 의아하다. 의사는 못마땅한 얼굴로 가는 고무호스를 가져와 어머니가 소변을 보실 수 있게 하였다.
참을성 하나로 생을 버텨 오신 어머니가, 병원 침상에서 마저 억지로 고통을 참아내기만 한 것이 한 눈에 드러나 너무 아팠다. 무거움이 온 몸을 조여와 터질 듯해도 용케 짐의 무게를 감당해내는 똬리처럼, 까무러칠 고통을 사흘간이나 온 몸으로 감내하신 어머니. 고난의 한평생에 스스로 고통완충기가 되어버린 어머니. 소변을 다 보시자 구름 걷힌 하늘처럼 얼굴이 해맑아지는 바보 어머니. 꼭 당신이 쓰던 똬리 같이 미련스레 무던하신 어머니…….
가족들과 의논하여 어머니를 동생 가게에서 가까운 큰 병원으로 옮겼다. 한 달가량 입원 후, 어머니는 퇴원하셨다. 그때 회갑을 갓 넘긴 어머니는, 이 일로 방광 쪽이 좋지 않게 되어 남모르는 고통을 하나 더 감내해야 했다. 소변을 보실 때마다,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자식들은 아무도 모른다. 한 번도 내색한 적이 없어서다. 어머니는 그 고통을 참아 받으며, 강산이 두 번 변하는 세월을 더 사셨다. 훗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는 원인도, 노환에 겹친 방광의 악화였다. 이때부터 어머니는 똬리를 쓰지 못하게 되셨다. 똬리를 두고도 쓸 수 없는 몸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어떤 마음이 드셨을까.
어머니는 ‘똬리’처럼 사셨다. 아니, ‘우리 집의 똬리’로 사셨다. 고된 집안일은 물론, 집안의 크고 작은 바람을 다 받아들여 참아내고, 이겨냈으니 말이다. 오랜 매운 시집살이에다, 세 시동생을 돌아가신 시어머니대신 출가시키고 살림 내보냈다. 먼 저 간 자식 셋을 가슴에 묻은 채, 속병을 홀로 초피나무 삶은 물로 다스리며 평생 사신 어머니. 똬리같이 가족과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에 눌리고 묻혀, 자신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으신 어머니.
어머니는 세상 떠나는 날까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다. 오로지 자식들과 집안을 위해서만 자신을 쓰셨다. 세상 떠나시면서 어머니가 남긴 유일한 유산은, 손자에게 건네준 현금 만 천원이 전부였다. 쓰는 사람 위해 모든 걸 바치는 똬리처럼,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자신을 모두 바쳤다.
생각해보면, 삼대가 함께 사는 가족에다 먼저 간 가슴에 묻은 자식들, 그리고 친척 모두가 ‘어머니란 똬리’위에 올리어진 물자배기 같은 사람들이었다. 가난한 대가족 살림살이는 어머니란 똬리위에 얹혀 있었기에, 일제강점기로부터 육이오동란을 거쳐 오는 민족수난의 험난한 보릿고개 길을, 용케도 잘 버텨 온 게 틀림없다. 때문에, 우리 동기들에게 어머니는 ‘우리 집 똬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어머니 가신지 벌써 강산이 변하는 세월이 흘렀다. 주위에서나 고향에서도 똬리를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어머니가 자식들의 마음에 새겨주신 보이지 않는 똬리는 생생히 살아있다. 그 힘으로, 남은 우리 동기 네 남매는 다툼 없이 이제껏 잘 살고 있다. 아마 우리도 어머니처럼, 서로에게 똬리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나아가 세상도 기실, 서로 똬리가 되어주며 살아가도록 마련되어있다고 깨닫는다.
똬리사진을 인터넷에서 검색하였다. 어머니가 그리워 서다. 나온 몇 가지 사진 중에서 하나를 골랐다. 그 옛날, 어머니가 이고 다니시던 것과 같다. 겉 왕골 잎은 색이 바랬다. 만져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싶어졌지만 그럴 수 없다. 대신, 모니터에 비친 똬리에 손가락을 대어본다. 어디선가 짚과 왕골 냄새에, 땀내와 아주까리 머릿기름 냄새가 밴, 어머니의 똬리냄새가 짙게 퍼져오는 것만 같다. 마음속에서 젊은 어머니가 똬리월계관 쓰고 웃으신다.
오는 휴일에는 민속박물관에 가봐야겠다. 똬리를 만나러…….
(2015 제1회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우수상 당선작)
김병래
초곡서신(草谷書信)
* 촌놈
초곡에서는 사람 만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소들을 돌보거나 채소를 가꾸는 게 일이니 나무와 풀, 짐승과 벌레가 이웃입니다. 햇볕과 바람과 비를 나누어 맞으며 각자 제 삶에 열중하는 이웃들이지요. 자연에는 과욕이나 태만 따위는 아예 없이 언제나 나름의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입니다. 나만 게으르고 어정쩡하게 끼어들어 있습니다.
초곡에 묻혀 있으면 문화적 감각이 둔해집니다. 한마디로 단순무식한 촌놈이어서 세련된 인간관계에는 서툴게 마련이지요. 대신 자연의 감각이 회복된다고 할까요. 인간사 잡다한 시비곡직에는 단순명료해집니다. 사색 따위가 따로 필요 없도록 자명한 것이 자연의 이치지요. 변화무쌍에 불가사의하고 무궁무진한 자연현상도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집니다. 어부가 바다를 바라보듯, 농부가 들판을 바라보듯 무덤덤해진다고 할까요. 아, 물론 그들에게도 삶의 현장으로서의 감회야 없지 않겠지만요.
촌놈이란 문화적 혜택(?)을 적게 받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문화적 감각이 세련되지 못한 것을 촌스럽다고 하고요. 나는 너무 촌스러워서 인간의 위대한 업적이라는 문화유산이나 예술품 같은 것에도 잘 감동하지를 못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듯한 상상력과 기술과 노력이 놀랍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대단한 감동이나 위대함으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소위 인류의 불가사의로 꼽히는 유적들에 대해서도 인간의 위대함을 느끼기보다는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듭니다. 그걸 완성하느라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억울한 희생이 있었을까를 떠올리게 되지요. 높은 산꼭대기 같은 데서 내려다보면 문명의 흔적이란 한갓 부스럼딱지에 불과한 것인데 말이지요.
언젠가 세계적인 팝 가수라는 마이클잭슨의 죽음을 극성스럽게 애도하는 군중들을 보면서도 나는 그들의 슬픔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매스컴을 통해 본 그의 음악활동이나 사생활도 전혀 감동적이지가 않았고요. 몇 번이나 뜯어고쳤다는 그의 얼굴이 내게는 인간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섬뜩한 가면으로 보일 뿐이었습니다. 소위 극성팬들이 이 말을 들으면 때려죽이고 싶어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러는 그들의 광분도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아니 별로 이해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게 나 같은 촌놈의 정서입니다.
촌에서 살다보니 저절로 촌놈이 되었다는 것이지 그래서 굳이 유감이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 꺼병이와 고양이
풀숲에서 웬 삐약삐약 소리가 납니다. 들여다보니 깬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꿩 병아리들이 오글거리고 있습니다. 닭 병아리보다 몸집은 작지만 야생답게 반짝이는 눈빛과 삐약거리는 기세가 여간 아닙니다. 꿩 병아리를 지칭하는 ‘꺼병이’이라는 말이 ‘겉모양이 잘 어울리지 않고 거칠게 생긴 사람’이라는 뜻도 가진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인기척에 숨어버린 것인지 어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앙증맞은 것들을 붙잡아보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어미와 만나도록 얼른 자리를 피해 줍니다. 삐약삐약삐약 소리가 한동안 귓가를 떠나지 않습니다.
저만치 고양이가 한 마리 지나갑니다. 한눈에 사람 손길이 닿지 않은 고양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군살이 없는 몸매와 경계심이 잔뜩 밴 행동이 그렇습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고양이를 잘 기르지 않아서 집 주위에 도둑고양이로 살거나 아니면 아예 산짐승으로 살기도 합니다. 호랑이나 늑대 같은 맹수들이 없는 숲에서 야생 고양이는 먹이사슬의 꼭대기를 차지하는 포식자(捕食者)인 셈입니다. 사뿐한 몸동작과는 달리 숲을 팽팽한 긴장감으로 몰아넣는 놈이지요. 아까 그 꺼병이들이 무사할지 걱정입니다.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지상낙원입니다. 인간이 개입하지 않은 자연 상태, 즉 오염과 파괴가 안 된 생태계가 바로 정토낙원이지요. 땅 위에 그 이상의 파라다이스는 존재할 수가 없으니까요. 반세기 넘도록 사람의 발길이 통제된 휴전선 비무장지대가 야생동식물에게 낙원인 이유지요.
그것은 그러나 인간이 꿈꾸는 이상향과는 거리가 멉니다. 문명과 격리된 타잔이나 로빈슨 크루소를 꿈꾸는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지구상에서 건강한 생태계 이상의 낙원을 꿈꾼다는 것은 결국 사람의 탐진치가 지어낸 망집(妄執)일 뿐입니다. 문명이란,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겠다는 것이고 생태계를 파괴하겠다는 것에 다름아니니 일시적인 성과는 몰라도 소위 ‘지속 가능한’ 세상일 수는 없는 일이지요.
자유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종교적 구원이나 해탈이 아니라면 자유의 본질은 자연스러움 이상일 수가 없습니다. 사람 역시 생태계를 떠나 살 수 없는 자연의 일부이기에 그렇습니다. 자연스러움이란 인위적 간섭이 없는 자연생태계의 법칙과 질서를 말하는 것이지요. 사자나 하이에나 같은 포식동물이 없는 초원이 얼룩말이나 가젤영양의 낙원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생태계의 먹고 먹히는 긴장관계를 벗어난 자유를 꿈꾼다는 것은 과욕입니다. 문명화된 인간사회라 할지라도 자유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릅니다. 나 아니면 남이라도 치러야 하는 것이지요. 세상에 남을 억압하지 않는 자유란 환상일 뿐이니까요.
꺼병이들을 걱정하는 나보다는 그들을 먹잇감으로 노리는 고양이가 훨씬 이 숲에 잘 어울릴지 모릅니다. 벌써 숲의 일원으로 먹이사슬의 한 축을 이루고 사는 것 같으니까요. 고양이가 꿩 병아리를 잡아먹어도 꿩의 개체 수는 적당 선에서 유지될 것입니다.
* 나와 이웃들
고라니, 산토끼, 멧돼지, 너구리, 청설모, 두더지, 들쥐, 뱀, 산비둘기 꿩, 뻐꾸기, 까치, 청둥오리, 쇠백로, 꾀꼬리.......이상은 초곡리 산37번지와 주변에 살거나 자주 찾아오는 이웃들입니다. 그밖에도 새들과 벌레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대충 굵직한 것들만 나열한 것이지요.
이 일대의 임야는 국유지와 개인 명의로 된 꽤 값나가는 부동산이지만 사실상 주인은 그들이지요. 돈 주고 샀다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뒤늦게 끼어든 소들과 내가 주인인 양 행세를 하는 것이 저들에겐 어떻게 보일까요. 잘 봐줘야 반갑지 않은 이웃이요 아니면 침입자요 점령군에 불과하겠지요.
소들은 아닌지 몰라도 나와 그들의 관계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를 못 합니다. 나만 보면 다들 놀라서 후다닥 달아나기 일쑤니까요. 내가 그들을 해치거나 싫어하지 않아도 그들은 본능적으로 사람을 천적으로 인식하는 유전자를 타고난 것 같습니다. 하기야 우리의 조상들이 수렵을 주로 하던 시절이 있었고 지금도 그 피가 다 식지 않아서인지 야생동물만 보면 잡고 싶어 하는 기질이 없지 않지요.
경계심이 유난히 많은 고라니나 산토끼, 쇠백로들도 육중한 몸과 사나운 뿔을 가진 소들은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걸 보면 저들을 해칠 이유가 없는 초식동물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고 사람은 호랑이, 늑대, 여우, 살쾡이처럼 천적인 육식동물로 분류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지만,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갖는 동물이기도 합니다.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이성적 존재라는 것이지요. 인류가 문명화되면서 본능이 감퇴한 만큼 그것을 대신할 이성의 발달을 자져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은 곧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이나 행위의 당위성에 대한 질문과 판단을 놓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사람이 ‘나는 누구(무엇)인가’를 알고 싶으면 사람들에게만 물어볼 것이 아니라 종이 다른 동물이나 식물에게도 물어보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고라니에게도 물어보고, 쇠백로와 청둥오리에게도 물어보고, 소나무나 민들레에게도 물어보아야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온전한 답이 나온다는 것이지요. 인간이 인간에게만 스스로를 묻고 인간을 위주로만 행동을 한 결과 환경오염이나 생태계파괴라는 엄청난 재앙을 초래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얼씬거리기만 해도 후다닥 달아나기 바쁜 온갖 야생의 동물들이 끊임없이 인간인 내 정체성을 환기시키는 초곡의 이웃들이지요.
김옥한
안동출생
포항문예아카데미 수료
<<수필문학>> 천료(2010)
ko3699@hanmail.net
김종숙
김천에서 태어남
잠언집 <<행복을 담는 그릇>>
글모음 <<누군가 내게 말했다>>
수필집 <<가난하고 힘들어도>>(2015, 수필문학사)
2525-114@hanmail.net
무임승차
공무원인 처제가 제주도에 순환근무를 하게 되었다. 이번 기회에 제주도 여행이나 다녀가라며 전화가 왔다. 사택도 있으니 언니와 함께 며칠 푹 쉬었다 가란다. 단체여행은 여러 번 가보았지만 우리 식구만 간 것은 1988년 올림픽이 끝나고 어머님과 장모님을 모시고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 숙식이 공짜로 해결된다고 하니 부담 없이 가보기로 했다. 한산한 고속도로를 콧노래 부르며 오십 분을 달려 대구공항에서 7시20분 제주행 아시아나 비행기에 탑승했다. 각종 모임에서 제주도를 여러 번 다녀오긴 했지만 그때는 단체 행동을 하느라 맘 놓고 구경을 못했는데, 이번엔 오붓한 우리 내외만의 여행이었다.
제주공항에 도착하니 처제가 동서와 함께 마중을 나와 있었다. 처제는 우리를 위해 삼 일간 휴가까지 냈단다. 제주에 머무는 동안 처제는 가이드가 되고 동서는 기사 역할을 해 주었다. 유명한 관광 코스는 이미 한 두 번은 다녀 보았거나 아무 때나 올 수 있다고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을 골라 다녔다. 제주도는 여러 번 다녀 봐도 계절에 따라 늘 새롭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산 중턱에 자리한 원시림 수백만㎡을 개발하여 조성한 에코랜드 테마파크를 찾아 갔다. 공사를 마무리 하느라 여기저기 패이고 전시용 물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생태계를 탐방하고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무한한 혜택을 다 누리고 가라는 곳인 것 같았다. 모든 공사가 완공되려면 5~6개월은 더 걸린다고 하지만 미리 보고 싶어 하는 관광객이 너무나 많아 서둘러 개장하였다고 한다.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어 우리도 후미에 가서 차례를 기다렸다.
단선으로 된 기차를 타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차창 밖 좌우에는 훼손되지 않은 원시림이 길게 펼쳐져 있어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기차가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에 자세하게 볼 새가 없어 아쉬웠다. 금세 큰 호숫가 에코브리지라는 역에 도착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큰 호수가 지평선을 이루고 있다. 호수 중앙에는 아름다운 섬이 우뚝 솟아 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섬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무를 엮어 물위에 띄워 흔들리게 만들어 놓았다. 어린애처럼 출렁거리는 다리에서 흔들며 뛰어 보기도 했다. 섬에는 카페와 풍차도 있어 잠시 쉬어 갈 수도 있었다. 은빛의 햇살이 잔잔한 물결 위에 반짝이는 호수의 아름다움은 그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었다. 물속에 비친 출렁다리에도 많은 사람들이 건너가고 있다.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도 우리를 바라보고 우리가 걸어가면 그들도 걸어간다. 워터볼 풀장과 넓게 펼쳐진 공원을 산책하면서 한참을 보냈다.
다시 기차를 타고 꼬불꼬불 습지와 벌판을 달려 레이크사이드 역에 도착했다. 산책도 할 겸 기차에서 내렸다. 살아 있는 원시림과 새우란 군락지를 감상하면서 야생화 단지로 들어갔다. 육지에서는 구경도 못한 야생화에 푹 빠졌다. 이제껏 한 번도 마셔보지 못한 숲 속의 맑은 공기를 한없이 들이켰다. 그러고도 모자라 한아름 가슴에 안고 기차에 올랐다. 부푼 가슴을 두 손으로 안고 달려가노라면 어느새 퀴즈타운을 지나고 다음 역인 피크닉가든역에 도착하였다.
우거진 숲에 가려 하늘이 보이지 않는 오솔길을 따라가는 단거리 코스와 장거리 코스가 있었다. 장거리 코스는 수천 가지의 희귀식물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다. 보는 즐거움도 있지만 그 아름다움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사진을 찍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숲이 터널을 이루어 하늘을 보지 않고도 다닐 수 있는 곳이었다. 송이 체험장이라는 곳도 있었다. 먹는 송이가 아닌 발바닥을 찜질하는 모래의 이름이라고 했다. 용암 돔과 분화구를 지나면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에코로드 카페가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 이곳에서 추억을 만들며 한잔 하고 싶었지만 시간 관계상 그냥 지났다.
다시 기차를 타고 그린티로즈가든 역으로 갔다. 넓은 공원에 잔디밭과 체육시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각종 놀이기구와 수백 가지의 동물 형상들이 설치를 기다리고 널려 있다. 완공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며 다시 달려온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창 넘어 빽빽하게 보이는 원시림을 뒤로하며 손을 흔드는 사이에 그린티로즈가든 한 바퀴를 도는 여정이 모두 끝났다. 모든 것이 완공되면 그때 다시 오겠다는 기약을 하면서 그곳을 떠났다.
절물 자연휴양림으로 갔다. 중턱에 자리한 약수터에 솟아오르는 용천수가 신경통과 위장병에 큰 효과가 있다는 푯말이 붙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물통을 들고 줄을 서서 물을 받는다. 시내에서 불과 20분 거리에 하늘을 찌를 듯 쭉쭉 벋은 삼나무 숲으로 우거진 곳이다. 500년 된 삼나무 숲에서는 은은한 향이 감돌았다. 숲속을 걸어 다니는데 피톤치드가 전신을 감싸 기분이 상쾌하고 몸과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절물 자연휴양림 숲 속의 휴양관, 산림문화세미나실, 맨발의 지압로인 건강산책로와 오름 등산로 및 약수터, 놀이와 체력단련을 겸한 도전프로그램장 등 여러 가지 유익하고 즐거운 시설을 갖추어 놓았다. 교육연수 생태학습 및 야외 수련회 등 크고 작은 모든 행사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비자림으로 갔다. 이곳은 아름드리 비자나무가 군락을 이루었다. 나이가 팔백스물다섯 살이라는 새천년 비자나무도 있다. 나무의 둘레는 어른 네 명이 양팔을 벌려야 손끝이 이어질 수 있었다. 많은 나무가 빽빽이 서 있는 관찰로 지역으로 갔다. 수많은 비자나무 밑에서 자생하는 풍란, 생달나무, 머귀나무, 콩짜개란, 혹난초 등 140여 종의 희귀식물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천연기념물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관리하는 곳이었다. 관람객들은 풀 한 포기도 손을 댈 수 없는 곳이다. 천연기념물 374호로 지정된 비자나무가 50만㎡나 되는 산에 500년에서 800년간 자란 나무도 이천팔백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다고 한다. 제주도는 여러모로 우리나라의 보고(寶庫)가 아닐 수 없다.
모처럼 처제와 동서 덕분에 건강하고 알차고 즐거운 여행이 되었다. 나중에 처제 내외가 포항에 오면 그 빚을 톡톡히 갚아야겠다.
김주영
2001년 <<문예사조>> 수필등단
매실차
매실 상자를 여니 청매실이 누릇누릇해졌다. 며칠 전 택배 받은 매실을 베란다에 놓아 둔 게 후회가 된다. 푸르고 실하던 알맹이가 반 이상이 황 매실이 되었다. 황매실로 담은 엑기스가 단맛이 많다고 황매만으로 매실청을 담기도 한다. 하지만 내 게으름으로 청매실을 황매실로 만들었으니 그 맛이 어떨지 걱정이다. 매실을 깨끗이 씻어 채반에 받쳐둔다. 청매실과 황매가 반반이다. 꼭지를 따고 상처 난 것들을 골라내고 물기가 마르기를 기다린다. 매실의 무게만큼 설탕을 준비한다. 유리병에 매실을 한 켜 넣고 그 위에 설탕을 넣고 켜켜이 매실과 설탕을 담는다. 맨 위쪽에 남은 설탕을 모두 붓고 뚜껑을 닫아둔다. 날짜를 적어 통에 붙이면 올해의 매실담기의 첫 과정은 끝이다. 이제 매실과 설탕이 적당히 녹아서 발효되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처음에는 매실에 설탕이 녹는 것을 바라본다. 설탕이 녹고 그 녹은 물에 매실이 절여진다. 설탕과 매실 서로 다른 두 성질이 서서히 스며드는 과정을 바라본다.
몇 해 전 담아둔 매실 엑기스로 따뜻한 매실차 한잔 만들어 마신다. 벗 생각이 난다. 매실차를 유난히 좋아하는 그 친구와의 인연의 시간을 되짚어본다. 처음 우리가 만났던 시간에는 서로의 생각들이 단단한 덩어리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지나면서 서로의 생각들이 서로에게 스며들고 그 생각들로 서로 참 많이 닮아있다. 비슷하니까 어울리지 하고 말을 하지만 우리 둘은 결코 비슷하지도 닮지도 않았다. 서로의 생각이나 주장은 늘 다르다. 하지만 어떤 일과 문제를 해결했던 과정을 가만히 되짚어 보면 매실이 익어 가는 과정과 참 많이 닮은 듯하다.
어떤 문제점이 생겼을 때 서로의 생각들이 양보가 없으면 결코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양보하는 마음은 매실이 숙성되어가는 과정에서 공기가 필요한 것과 닮았다.
몇 해 전 매실을 담을 때 일이다. 퇴근을 해서 집에 돌아왔는데 베란다 유리창이며 벽이 설탕물로 도배가 되었다. 매실담은 통 하나가 폭발하였다. 뚜껑은 열려있고 안에 들어 있던 내용물이 온 사방으로 튀어있었다. 베란다에 놓아둔 몇 개의 통에서 유독 하나가 왜 폭발했을까? 베란다 청소를 하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 통만 공기가 통하지 않게 닫은 것이 원인이었다. 엑기스를 만들 때 뚜껑을 꽉 닫아도 문제지만 또 너무 느슨하게 풀어놔도 문제가 된다. 뚜껑을 느슨하게 열어두면 설탕이 쉽게 녹는다. 녹는 과정에서는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다. 설탕 녹은 물에 매실이 푹 절여질 쯤 달달한 향이 진해진다. 하지만 그 달콤한 향에 초파리들이 침투를 한다. 그 엑기스로 만든 차는 단맛도 덜하다.
매실 엑기스를 만드는데 매실과 설탕의 촉매 역할은 공기와 빛이다. 넘쳐도 모라지도 않아야 한다. 빛이 넘치면 신맛이 강해지고 공기가 넘치면 날파리가 생긴다. 친구와의 만남에서 촉매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시간과 배려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서로의 생각들은 매실처럼 단단한 알맹이였다. 두 생각들이 부딪치고 의견을 조율하는 데는 배려와 시간이 필요했다. 공기는 나와 친구의 관계에서 배려이고 빛은 시간이다. 생각들이 부딪칠 때 각자의 주장만 강조하면 그 의견들은 조율 할 수 없다. 생각은 한쪽으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야 한다. 엑기스를 담을 때 설탕도 적당히 들어가야 제 맛이 나듯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적당한 것이 좋은 인연을 만든다. 배려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야 한다. 친구의 생각이 자신과 다른 걸 알면서 배려가 넘쳐 잘못된 판단인줄 알면서도 내 의견을 말하지 않는다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적당한 배려와 시간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한다.
매실 액을 만드는 첫 과정에서 설탕이 녹기 시작할 때 거품이 많이 일어난다. 하지만 설탕이 어느 정도 녹으면 고요해진다. 사람의 인연도 그러하다. 매실이 적당한 빛과 시간에 잘 숙성되어간다. 나도 벗과 배려와 시간 속에 숙성되어 왔다. 시간이 흐르고 그 의견들이 조율이 되면서 서로에게 스며들어 달달한 우정이 생겼으리라. 매실차 한 잔 마시러 오라고 친구에게 전화 걸어야겠다.
찻물을 준비하는 마음이 바빠진다.
김철순
제1회 포항 바다 문학제 우수상(2015)
wbhaekug@hanmail.net
축항 사람들
해 지난 파래가 흰 꽃처럼 나풀거린다. 셔터가 한 컷을 건져 올릴 때마다 겨울 바다는 시샘하듯 내 종아리로 짠물을 퍼 던진다. 성큼 뒷걸음으로 물러서다 빠지직 밟히는 소리에 내려다보니 반들거리는 홍합무리가 방파제를 오지게 붙잡고 있다.
한때 형산강과 송도 바다가 만나는 곳에 방파제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축항이라 불렀다. 그 위로 횟집이 하나, 둘 들어서면서 해수면과 같은 붉고 푸른 천막촌은 수상가옥 같았다. 사람들은 싱싱한 회 맛도 볼 겸, 좁은 축항 길을 누비며 이 색다른 풍경을 즐겼다. 축항은 파도와 싸우는 바다 사람들의 쉼터이고 철강 공단 노동자들이 소주잔을 기울이며 재충전을 하는 곳이기도 했다.
햇살이 좋은 아침이면 자주 축항을 찾았다. 부산한 아침을 여는 천막촌은 갯내음이 진동했다. 골 깊은 천막 안길을 벗어나면 확 트인 바다가 보였다. 밤새 정박한 오징어 배들이 수평선에서 넘실대고 낚시꾼들은 물 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축항은 거친 삶을 사는 사람들의 터전이지만 내게는 꽤 낭만적으로 보였다.
“어디서 왔수?”
숙이네 간판을 건 여주인이 퉁명스럽다. 통이 넘칠 듯 맴도는 뱀장어를 구경하는 내게, 생선 거품을 걷어내던 그의 심통스런 볼이 실룩거렸다. 아침 댓바람부터 낯선 여자가 남의 가게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게 불쾌했나 보다. 주인의 얼굴이 붉은 천막에 비쳐 환해졌다.
“아지매 참 곱습니다, 싱싱한 생선을 드셔서 그런가 봐요.”
“이제 쪼그라져 볼 게 있나, 젊을 때는 한가락 했제.”
숙이네는 예쁘다는 말에 금방 밝아졌다. 간간이 축항을 찾으면서 그녀는 내 사진 속으로 들어왔다. 손님이 뜸한 날은 줄담배를 피우며 아픈 속내를 털어놓았다. 어느 해 태풍이 삼킬 듯 덤비던 날, 강물에 쓸려 가버린 아들에 대한 쓰라림과 그 괴로움에 행방 없이 떠나버린 남편을 원망했다. 소주라도 걸치는 날이면‘죄 많은 내 청춘아’하고 한 맺힌 한가락을 뽑았다. 그럴 때면 축항에 이는 물결도 유난히 훌쩍였다.
가끔 어깃장을 놓는 손님에게 거친 욕설을 퍼부어 대기도 하지만 속내는 여리기로 소문이 난 숙이네였다. 그 해 여름 기우뚱거리던 용이네 가게가 태풍에 폭삭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망연해 하는 용이네를 다독이며 매운 솜씨로 간이 가게까지 만들어 주었다. 두 집의 도마 소리는 날아갈 듯 경쾌했다. 삶은 짠물에 절어 악다구니 같지만 심성은 봄볕이었다. 이른 아침에 들르는 내게도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꼭 건넸다.
부초처럼 떠돌다 축항에 정착한 용이네도 큰 몸집만큼 화끈한 성품이었다. 마음에 드는 손님이면 생선회를 듬뿍 올리고 구수한 입담을 풀어내어 단골이 많았다. 타고난 걸쭉한 목소리로 육자배기를 뽑으면 천막도 신들린 듯 흔들었다. 아침마다 들리는 칠순노인이 철강공단 옛 자리와 명사 오십 리 추억을 해장 소주에 풀어내면 갓 데친 오징어를 덤으로 올리며 맞장구를 쳤다. 바위에 붙은 홍합처럼 축항과는 떨어질 수 없는 그녀도 내일을 알 수 없는 삶이기에 애잔하게 다가왔으리라.
한여름 태풍이 휩쓸고 나면 헐거워진 축대와 해진 천막이 너풀거렸다. 천막촌 사람들은 너 나 없이 다듬고 꿰매어 해마다 새 단장을 했다. 축항이 그대로 있는 한 소박한 일상에 큰 욕심을 내지 않았다. 아침 바다에서 올라오는 생선과 단골처럼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어 펄떡이며 살아있었다.
어느 날 매스컴에서 축항을 정비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방파제도 더는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동빈 운하를 건설하고 송도를 새로운 명소로 만드는데 축항이 걸림돌이 되어 천막촌을 철거한다고 했다. 바위에 붙은 따개비 같은 악착스런 삶도 세상의 파도에 밀려 어디론가 떠나야 했다.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축항 사람들이 이곳을 떠나면 살길이 없다고 아우성이었다. 화면을 고정하고 보았지만, 숙이네와 용이네의 얼굴을 찾을 수가 없었다. 부표처럼 떠도는 인생이었기에 언젠가는 밀려날 운명이었으리라.
다시 찾은 축항은 썰물이 지나간 자리처럼 미끈하였다. 천막 옷이 벗겨진 자리에 녹슨 철근이 심지처럼 박혀있다. 힘 좋은 일꾼들도 뽑아내지 못한 깊은 상흔들이다. 철벙대던 생선도 어부들 굵은 팔뚝과 노동자의 워커 소리, 축항사람의 푸념 소리까지 사라졌다. 도시의 새 물결은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겠지만, 파도만 그들의 미련인 양 목을 빼고 오르내리며 철썩거린다.
사진 속의 천막촌 골목길을 컴퓨터 화면으로 옮겨왔다. 확대된 화면에서 축항 사람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펄쩍 뛰는 숭어를 두 손으로 잡고 활짝 웃는 숙이네 뻐드렁니와 한쪽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담배 연기를 피워 올리는 용이네, 천막촌 안길에 바쁘던 도마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그 투박하고 뜨끈한 정은 어디에 정착했을까. 다들 어디로 떠났을까. 어느 시장통에서 혹은 어느 골목에서 그들은 땅을 부여잡고 살고 있겠지. 그들과 헤어졌지만, 기억은 내 사진 속에 오래도록 천연색으로 살아있다.
김희준
<<포항문학>> 등단(1997)
대구일보 수필공모전 수상(2011, 2012)
<<수필시대>>(2014) 신인상
청하(靑荷)문학회, 경북작가회의, 포항문인협회 회원
<<인문학의 공간, 내연산과 보경사>>(공저, 2015)
sunya91@hanmail.net
추성에서
공자님을 잉태한 태산을 등정하고 내려와 맹자님 사당과 맹자님 고택이 있는 추성(鄒城)으로 차는 달렸다. 추성이 그렇게 멀지는 않았다. 아마도 2시간 정도 이동하였을 것이다. 추성 시내에 이르자 익숙한 식당 이름이 눈에 띈다. ‘家和萬福源(가화만복원)’, 가정이 화목한 것은 만복의 근원이 된다. 사람이나 가족의 화목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에서 출발한다.
예산의 추사 선생 고택에 갔을 때 기둥에 걸려 있던 대련이 떠오른다.
大烹豆腐瓜薑菜 제일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고,
高會夫妻兒女孫 가장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과 손자이다.
일흔한 살의 노인이 된 추사 선생이 세상의 간난신고와 바다같이 깊고 산악처럼 높은 학문의 경지를 쌓은 뒤에 지은 시구이다. 글씨도 아무런 욕심이 없는 무심의 경지에서 쓴 명작이다. 가족이 화목하게 모여 이가 없는 노인도 먹기가 좋은 두부와 비린내 없는 담박한 나물 반찬으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를 일깨워주는 시이고 글씨이다.
추성의 길거리 가로등 기둥에는 죽간(竹簡) 두루마리 책 그림이 있는 간판이 붙어있다. 거기에 ‘人之患在好爲人師(인지환재호위인사)’, ‘孟子公開課’(<<맹자>> 공개 수업)’ 라는 붓글씨가 쓰였다.
교사의 직분을 가진 내가 이 맹자님 말씀에 괜히 가슴이 뜨끔해지는 것은 왜일까? 시간이 허락되면 나도 그 <<맹자>> 공개 수업에 출석하여 배우고 싶었다. 맹자님 고향 마을에서 듣는 <<맹자>>는 얼마나 각별한 맛이 있을까!
그런데, <<맹자>> <이루> 장구에는 이 구절 바로 다음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제자 악정자(樂正子)가 제나라의 몰염치한 권력자 자오(子敖)의 사치스러운 행락을 따라 노나라에서 제나라로 왔다가 며칠이 지난 뒤에야 늦게 문안 인사를 하러 오자, 맹자는 제자를 꾸짖었다.
“자네는 머물 객사가 정해진 연후에나 어른을 찾아뵙는 것이라고 배워 처먹었는가?”.
대학자였던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이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 문집의 <입암기(立巖記)>를 읽고, 경향 각지로 벼슬살이하다가 경주부윤에서 퇴임하여 내 고향으로 퇴거한 뒤에야 꿈에도 가보고 싶었던 입암에 어둑해서야 도착하였다. 마중 나온 사람들이 먼 길 오느라 피곤한 것을 생각하여, 입암서원의 여헌 선생 영당(影堂)에 참배하는 일은 내일로 미루라고 하자, 병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맹자>>에 나오는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답하였다.
“자네들은 숙소가 정해진 뒤에야 어른을 찾아뵙는다고 배웠는가?(子聞舍館定然後求見長者乎) 나는 감히 악정자가 되고 싶지는 않네!”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출가를 하였던 보경사의 오암(鰲巖) 스님 문집에도 <<맹자>> 독후감을 읊은 시가 실려 있다.
맹자를 읽으면서 讀孟子
욕심을 막고 천리를 보존함이여 遏欲存天理
칠 편이 한 맛 같구나. 七篇一味同
모름지기 마음을 가라앉히어야 얻는 것이 있거니와 潛心須有得
헛되게 치달려서 끝내 공이 없을러라. 虛騁竟无功
내 고향 출신의 요절한 미모의 작가, 일제강점기에 진보적인 민족운동을 한 인텔리 여성, 백신애(白信愛)도 어린 날 집 가까이에 있는 향교에서 <<맹자>>를 배웠다. 그녀의 수필, <백안(白雁)>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맹자견양혜왕(孟子見梁惠王) 하신데, 왕이 입어소상(立於沼上) 이러시니, 고홍안미록왈(顧鴻雁麋鹿曰) 현자(賢者)도 역낙차호(亦樂此乎) 잇가.” 하고 내 입술은 그 다음으로 줄줄 내려가고 있는데 그때 내 머리는 그 군소리를 듣고 무엇이 생각났는지 내 몸을 재촉하여 책장을 뒤지게 했다. 나는 연방 군소리를 하며 책장 한편 구석에서 <<맹자>>를 끄집어내 막 뒤져보았더니, 마침내 내가 알고자 애쓰는 것을 알아내고 말았다.’
우리 역사에서 민본주의와 혁명의 책인 <<맹자>>의 가치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내 고향 영천 출신의 포은 정몽주 선생이다. 포은은 조선 국가 체제를 설계한 유배 간 정도전에게 <<맹자>>를 보냈다. 조선의 선비들은 <<맹자>>를 읽고서 호연지기를 가진 대장부가 되고 권력과 재물 앞에서 당당하였고, 선비로서 예의염치를 잃지 않고 살았다.
1980년 12월 8일, 공자님의 칠십칠 대 적손인 연성공(衍聖公) 공덕성(孔德成) 선생이 도산서원 원장으로서 사당에서 퇴계 선생 신위에 배알하고 강당에 올라 끼친 학규(學規)를 우러르며 선생을 흠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는 전서체 휘호를 돌에 새겨 남겼다. 글씨는 퇴계 선생의 학맥이 이어지는 유교의 고장인 안동이 공자님이 나고 자란 노나라와 맹자님의 고향 추나라와도 같은 고을이라는 뜻이다. 이로부터 다시 30년이 지나서 공자님 79대손 공수장(孔垂長)과 맹자님 76대손 맹령계(孟令繼)가 도산서원 향사(享祀)에 헌관(獻官)으로 참여하였다.
나는 맹자님 사시던 마을에 온 것이 마치 고향에 온 듯 반가웠다. ‘오십보백보’, ‘호연지기’, ‘사단 칠정’, ‘대장부’ 같이 어릴 때부터 들었던 말들의 출전이 <<맹자>>이다.
사학과에 입학하여 자형의 추천으로 한문 공부의 교과서로 삼아서 <<맹자>>의 첫 부분을 여름방학에 읽은 경험이 있다. 지구력도 없고 소심한 나는 그 책의 냄새만 맡다가 다 읽지는 못하였다. 초등학교가 학력의 전부인 어느 국회의원은 어릴 때 <<맹자>>를 수백 번 읽었다고 하고, <<맹자>>에 대하여 주변 사람들이 말하지만, 나는 사서집주본 <<맹자>> 책만 구해놓고 읽지는 못했다.
<<대학>>은 유학의 강령, <<논어>>는 유학의 근본, <<맹자>>는 유학의 비약, <<중용>>은 유학의 총론이다. 재작년 초여름에야 김용옥 교수가 한글역주를 한 <<맹자, 사람의 길>>을 정말 재미나게 읽었다. 대학 입학 후 삼십 년이 넘었다. 정말 너무 늦은 독서이다. 우리나라에는 왜 제대로 된 사서(四書) 번역이 그동안 없었는지 이상하였다. 하지만, 내면의 목소리와 외면적인 조건들이 어울려 <<맹자>>를 읽었기에 그 의미의 지평은 넓고 그 독서의 기쁨은 컸다. 추성에 오기 전에 그래도 <<맹자>>의 맛을 한 번이라도 보고 온 것에 감사하고, 안도가 되고, 천만 다행이었다.
버스가 서고 측백나무가 심어진 광장 끝에 맹자님 사당의 정문이 보인다. 그 왼쪽에는 ‘맹자소학(孟子小學)’이라고 하는 편액이 걸린 초등학교가 있다.
가까이로 다가가자 문 앞마당에서 중년과 노년의 마을사람들이 빠른 템포의 음악에 맞추어 두 손을 허리춤에 올리고서 발을 굴리다가 두 팔을 흔들며 흥겹게 춤을 춘다. 신명과 익살이 많은 박 단장님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두 팔을 어깨 위로 올려 저으며 우리의 춤사위로 어울리고, 권 선생님과 중년의 여 선생님들도 허리에 양 손을 집고서 마을 사람들과 금세 박자를 맞춘다. 머리카락은 반백(頒白)이 되고, 얼굴은 주름지고, 옷은 남루하지만 노인들의 낙천적인 모습에 우리는 모두 절로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구경했다.
경작지를 주고 전쟁을 일으키지 말아서 도탄에 빠진 민생을 보호하고, 학교를 지어 도덕을 세워 삶의 질을 높인다면, 그 나라는 반석에 세워지고, 그 군주는 성군이 되는 인의(仁義) 길을 맹자는 설파하였다. 맹자님 사시던 마을에는 맹자님의 덕화(德化)가 오늘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화강암 네모 석주 위에 푸른 단청을 입힌 여러 겹의 박공과 붉은 칠을 한 문이 기와지붕 아래에 나 있는 세 칸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에는 금색의 글씨로 ‘영성문(欞星門)’이라고 쓰여 있다. 우람하고 고풍스러운 편백나무 노거수가 서 있고, 동쪽 담장에는 ‘계왕성(繼往聖)’, 서쪽 담장에는 ‘개래학(開來學)’이라는 금빛 글씨가 쓰인 목조 패방(牌坊)이 보인다. 정면에는 ‘아성묘(亞聖廟)’라고 금빛 글씨를 새긴 세 개의 문이 있는 석방(石坊)이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자 신도 좌우에는 수령이 몇 백 년은 되었을 늙은 측백나무가 대략 50~60 그루가 도열하여 숲을 이루고, 서쪽에는 금나라 시대에 주조된 큰 종이 걸려 있다. 기와지붕을 이고 있는 태산기상문(泰山氣像門)을 들어서자 다시 곧게 자란 측백나무 노거수들이 너른 마당에 숲을 이루고 있다. 숲이 정말로 고풍스럽고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승성문(承聖門) 앞에 벽돌로 쌓고 이층의 기와지붕을 올린 강희제(康熙帝)가 바친 비석을 보관한 비각이 있다. 비 높이가 5미터는 되어 보였다.
그 동쪽 담 밑에 ‘孟母斷機處(맹모단기처)’, ‘孟母三遷祠(맹모삼천사)’, ‘子思子作中庸處(자사자작중용처)’라고 새겨진 세 개의 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어릴 때부터 말로만 듣던 맹자님이 자라나 사시었고, 공자님의 손자인 자사가 이곳에서 <<중용>>을 지은 곳이다. 나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여기가 진정 모친의 훈육 속에서 성장하여 아성이 되신 맹자님의 고향인가! 비석들에 흠집이 많고 다시 세운 듯하다. 문화혁명의 광풍 속에서 홍군(紅軍) 아이들이 했던 짓일 것이다.
다시 오른쪽의 계현문(啓賢門) 안으로 들어갔다. 벽돌이 깔린 좁은 길 좌우로 측백나무 아래에 수십 기의 비석들이 도열해 있다. 그 중에는 벽돌을 쌓아서 비석 전체를 보호해놓은 것도 있다. 가까이로 다가가서 보니 전서체로 ‘述聖遺像(술성유상)’의 비액을 쓰고 역시 전서체로 송 이종(理宗)의 찬문과 술성, 자사(子思)의 상을 새겨 놓은 비이다. 그 옆도 비석이 부수어져 벽돌로 보호를 하였다. 상단 표면에 쌍룡이 여의주를 물고 구름 속에 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고, 깨어지고 희미하여 비문을 읽을 수 없지만, ‘萬曆六年(만력육년)’, ‘謁告于(알고우)’, ‘欽差巡撫(흠차순무)’, ‘亞聖孟子曰(아성맹자왈)’이라는 글자는 눈에 띈다. 안쪽 끝에 작은 사당이 있다. 붉은 칠을 한 닫집에 ‘啓聖鄒國公之位(계성추국공지위)’라고 쓴 위패 뒤에 면류관에 홀을 잡고 하얀 수염에 빼빼 마른 얼굴의 계성, 맹자님 상이 모셔져 있다.
서쪽 담장에 나있는 쪽문 안으로 들어갔다. 너른 마당에 우람하고 당당하고 고풍스러운 측백나무 노거수들이 숲을 이룬다. 석조 기단 위에 이층의 녹색 기와지붕을 이고 있고 녹색이 주조를 이루는 단청이 입혀져 있으며, 팔각 석주가 처마 아래의 바깥에 세워지고 벽체에는 붉은 기둥이 세워진 일곱 칸 큰 건물이 웅장하게 서 있다. 지붕 사이의 처마에 세로로 ‘亞聖殿(아성전)’이라는 금색 테두리에 금빛 글씨가 청색 바탕에 쓰인 편액이 걸려 있는 맹자님 사당이다.
계단을 올라 사당 앞으로 나아갔다. ‘亞聖孟子位(아성맹자위)’라는 위패 뒤에 면류관을 쓰고, 녹색 곤룡포를 입고, 홀을 들고 있는 하얀 눈썹과 수염이 난 맹자님의 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 앞의 향로에는 향연이 피 오르고 있다. 나는 허리 숙여 맹자님께 절을 올렸다.
사당을 참배하고 다시 서쪽 문을 지나 담장 밖의 길거리로 나갔다. 해는 기울어 있는데 하늘이 미세먼지에 덮여 있어서 해가 달처럼 보인다. 혼탁한 세상에 우리 인생의 등불이 될 성현의 가르침도 오늘 혼탁한 세상에서는 저 해처럼 희미해지고 있다.
삼각형 돌 지지대 위에 붉은 기둥이 있고 기둥 위에 청색과 녹색과 하늘색으로 단청을 입힌 박공이 있으며 그 위로 중앙의 높은 기와지붕과 그 좌우에 날개처럼 붙은 지붕이 올려진 3문의 패방이 마을 입구 길에 높이 서 있다. 문미(門楣)에 금물로 ‘亞聖(아성)’이라고 써 놓았다. 맹자님 고택이 있는 맹자님 마을, 맹부(孟府)의 입구이다.
좁은 골목길로 꺾어 들자 ‘아성부(亞聖府)’라는 편액이 걸린 대문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다시 ‘예로의문(禮路義門)’이라고 쓴 현판이 걸린 중문이 있다. 중문 안에 다시 작은 문이 있는데, 마당 가운데 홀로 서 있고 ‘의문’이라는 편액이 걸렸다. 대문부터 검은색의 문에 관복을 입고 한 손에 홀을 든 한 쌍의 관리가 서 있는 그림을 그렸다.
의문을 지나자 석단 위에 맹부대당(孟府大堂) 건물이 나온다. 석단 아래에는 두 그루의 웅장한 기세의 측백나무 노거수가 엄청난 기운을 내뿜으며 유서 깊고 고색창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두보(杜甫)가 제갈공명 사당 앞의 늙은 측백나무를 보고 가지는 청동 같고 뿌리는 돌을 닮았다고 한 시, <고백행(古柏行)>이 생각났다. 석단 동쪽 모퉁이에는 해시계가 세워져 있고, 서쪽 구석에는 부피를 재는 돌 됫박을 돌기둥 위에 올려놓았다. 여기가 맹자마을의 작은 정부, 맹부(盟府)임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맹자가 제시한 인의와 민본의 부국강병책은 합종과 연형의 치열한 생존경쟁을 하는 전국시대 제후들에게 우활한 대책으로 홀대받았다.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와 시서예악을 정리하고 <<춘추>>를 지었고, 제자들이 <<논어>>를 편찬하였듯이, 제나라와 양나라에서 물러나 맹자는 이곳 추나라의 고향에 은거하며 만장, 공손추 같은 제자들과 7편, 261장, 34,685자의 <<맹자>>를 지어 후세에 요임금과 순 임금 같은 성군들이 남긴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도를 전했다.
<<맹자>> 첫 편인 <양혜왕>은 올해의 내 나이와 같은 53세의 맹자가 서기전 320년에 양혜왕과 나누는 대화로 시작한다. <<맹자>>에는 정말 탁월한 식견과 천재적인 언변을 구사하며 패도(覇道)의 시대에 인의(仁義)와 민본(民本)의 왕도(王道)를 갈파하는 인간 맹자의 뜨거운 숨결이 배어 있다.
‘제나라에 빈둥거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다. 외출을 하면 술과 고기를 배부르도록 먹고 취기가 오른 채 어슬렁대며 귀가했는데 부인에게는 부자와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과 어울린다고 하였다. 어느 날, 부인이 몰래 따라가 보니 남편은 성 밖 공동묘지로 가더니 묘사 지내고 남은 음식과 술을 구걸하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부인이 평생을 섬겨야 할 남편의 이런 실상을 첩에게 말하고 둘이서 부둥켜안고 남편을 원망하며 뜰에서 엉엉 울었다. 그런 줄도 모른 채 남편은 그날도 귀가하여 처첩에게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었다.’
<<맹자>> 전편에서 가장 문학적이고 사회 풍자적인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맹자는 우리를 질타하고 있다. ‘군자의 눈으로 이 세상 사람들을 평가하자면, 부귀를 추구하고 이익과 영달을 갈구하는 사람치고, 그 처첩이 부끄러워 서로 부둥켜안고 울지 아니 할 자가 그 몇 사람이 있으랴!’ <<맹자>>는 우리 삶을 비추어주는 얼마나 밝은 거울인가? <<맹자>>의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이마에 땀이 났다.
본당에서 서쪽 문으로 나가니 맹부감은당(孟府感恩堂)이 있다. 안에는 호호백발에 주름살 가득하고 늙으신 세상의 수많은 어머니들의 흑백 사진들,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젊은 엄마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다. 옆에는 부모님의 은혜를 기리는 문구들이 적혀있다.
당신을 낳고 키우셨기에
부모님이 당신에게 생명을 주셨음에 감격하시오.
당신을 어루만지며 길렀기에
부모님이 당신이 성장하도록 하셨음에 감격하시오.
당신을 늘 도와주었기에
부모님이 당신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하셨음에 감격하시오.
당신을 보살펴주셨기에
부모님이 당신에게 따뜻한 품성을 주셨음에 감격하시오.
당신을 늘 격려하셨기에
부모님이 당신에게 힘을 주셨음에 감격하시오.
당신을 교육시켰기에
부모님이 당신에게 지혜를 주셨음에 감격하시오.
자식이 먼 곳에 공부하러 갔다가 견디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베틀에 앉은 채로 짜고 있던 천을 칼로 잘라 버리며 추상같은 얼굴로 아들을 분발시킨 맹자님의 어머니, 자식 교육을 위하여 두 번이나 이사를 한 성인의 그 어머니, 옆집의 형 친구와 작당하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과자를 훔치다가 주인에게 들킨 나를 회초리를 들고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며 밤이 깊도록 호통 치시고는 울다가 잠든 나를 안으며 우시던 나의 엄마, 자식 공부를 위해 점심도 굶고 땡볕에 십 리 길을 걸어서 집에 오시던 어머니, 성인이건 범부이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어머니가 키우셨다.
틱낫한(釋一行) 스님은 말했다. ‘창조주는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왜냐하면 창조주는 스스로 생겨났고 어머니를 가지는 좋은 행운이 없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오봉산 주사암에서 보시 받아온 <<부모은중경>>을 지금의 나처럼 돋보기안경을 끼고 호롱불 심지를 돋우며 읽다가, 나에게도 읽기를 권하였다. 부처님이 해골무더기 앞에 멈추어 서서 아난에게 설법하는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내 마음 속에서 곁에 있는 엄마 모습과 겹쳤다. 어린 나는 <<은중경>>을 소리 내어 읽다가 그만 눈물방울을 방바닥에 떨어뜨리며 울고 말았다. 내가 대학 일학년을 마치고 눈이 내린 설날을 지내고 새봄이 올 무렵, 세상을 버리고만 엄마가 맹자님 사시던 집에 와서 문득 보고 싶고, 절절히 그리워진다.
레바논 출신의 작가,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의 소설, <<부러진 날개>>의 한 대목을 중국어로 옮겨 놓은 <모친송(母親頌)>을 추성의 맹자님 고택에서 남몰래 읽어보았다.
‘우리가 슬퍼하거나 기뻐할 때, 어머니, 이 말이 우리의 입술에서 만리 창공에 부슬비가 뿌릴 때 장미꽃떨기에서 향기가 넘치는 것같이 흘러나온다.’
박창원
<<수필문학>>으로 등단,
저서: <<향기 있는 사람>>(수필집), <<포항지역 구전민요>>, <<인문학의 공간, 내연산과 보경사>>(공저) 등.
풍 물
직장을 그만 두면 무얼 하며 사나? 퇴임을 3년 정도 앞둔 작년부터 내 머리 속을 맴돌고 있는 화두다. 오랫동안 글도 써 왔고, 이런저런 연구 활동도 하고 있으니 할 일이 없다고도 못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직장에 출근하듯이 매일 할 일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성격상, 체질상 조용한 걸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 나에겐 사실 정적인 활동보다 동적인 활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근래에 시작한 게 등산이다. 산악회에 들어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등산을 한다. 거기서 사람도 만나고 체력도 가꾼다. 이산 저산을 다니면서 국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 좋고, 산 속의 꽃이나 나무와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좋다.
내 자신이 즐기면서 사회에 참여하는, 좀 보람 있는 일이 없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악기를 배우면 그런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여태 살아오면서 다룰 줄 아는 악기 하나 없다는 점이 늘 아쉬웠다. 그 흔한 기타 하나 다룰 줄 모른다. 그러기에 악기 들고 연주하러 다니는 사람만 보면 열등감이 생긴다. 퇴임을 앞두고 색소폰이나 대금을 배우는 지인이 여럿 있지만 그 쪽에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워낙 ‘재주가 메주’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풍물을 배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이다. 고향 마을에 정월보름이 오면 청년들이 집집마다 다니며 지신밟기를 했다. 똑같은 옷을 갖춰 입고는 머리에 고깔을 쓰고 꽹과리나 장구, 북, 징을 치는 모습이 참 멋있고 신나 보였다. 온 마을을 따라다니며 구경을 했고, 나도 모르게 장단에 맞추어 어깨를 들썩거렸다. “주인 주인 문 여소. 나간 손님 들어간다.”하면서 풍물패가 집에 들어가면 대문간에서, 마루에서, 부엌에서, 마구간에서, 장독간에서 지신을 밟았다. 집 주인이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내와 풍물패를 대접하면 “주인 주인 문 여소. 들온 손님 나간다.”하면서 대문간에서 인사를 하고 다른 집으로 이동했다.
그 땐 풍물을 특별히 가르치는 데가 없었다. 그냥 마을 청년들끼리 어깨 너머로 배워서 했다. 나도 어른이 되면 저렇게 풍물을 배워 신나게 놀고 싶었다. 하지만 여태 꽹과리든 북이든 장구든 잡아보지도 못한 채 세월만 무심히 흘렀다.
올 봄, 저녁에 풍물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없나 싶어 찾다가 어느 대학의 평생교육원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장구반주와 민요’라는 과목인데, 장구를 가르친다니 등록을 했다. 장구와 민요를 함께 가르치는 프로그램이었다. 민요는 따라 하기 힘들었지만, 자진모리니 세마치니 굿거리니 하는 장구장단을 익혔다. 금세 한 학기가 끝나고 2학기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집 가까이서 풍물 가르치는 곳을 발견했다. 면에서 운영하는 복지회관이다.
첫날 가보니 배우러 오는 분들은 거의가 60대 노인들이다. 중학교 교장이 배우러 온다 하니 처음엔 수강생들이 조금 긴장을 한 것 같았지만 금방 친해졌다. 장구부터 시작했다. 양팔을 크게 움직이며 궁채와 열채로 힘차게 두드리는 활동이니 운동이 돼서 좋았다. 여기서 배운 사람들을 주축으로 풍물패를 구성하여 지역의 여러 행사에 풍물놀이 봉사를 한단다. 나도 여기서 배우면 언젠가는 주민들과 함께 풍물패의 일원이 되어 신나게 놀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를 갖게 했다.
정월대보름에는 초청하는 집을 돌아다니며 지신밟기를 한다. 지신밟기가 끝나면 저녁에 월포해수욕장 달집태우기 행사장에 가 거대한 달집 앞에서 크게 한 판 논다. 하루 종일 하는데도 신명으로 하는 일이니 지칠 줄도 모르고 두드린단다. 내가 어릴 때 해 보고 싶던 바로 그 일이다.
지신밟기에는 상쇠가 휘모리장단에 맞추어 부르는 사설이 있다. 집안의 액운을 물리치고 복을 부르는 내용이지만 지방마다, 부르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데, 맨 마지막 구절은 거의 같다. “잡귀잡신은 물알로 만복일랑 이리로!” 잡귀신은 물 아래로 떠내려가고 만복은 이리 오라는 뜻이다. 이 장면도 재미있을 것 같다.
초여름에 시작했는데, 어느 새 계절이 바뀌었다. 시월에 면민체육대회가 있고, 거기서 풍물 공연을 해야 하니 나도 참여하란다. 배운 지 겨우 석 달밖에 안 된 초보가 나가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남자가 없어서 내가 꼭 나가야 한다나. 배운 지 석 달 만에 풍물패로 관객 앞에 서야 했다.
여태 배운 장구 대신 북을 잡으란다. 야외에서 놀 때 장구는 소리가 작아 흥이 덜하기 때문에 소리가 큰 북을 잡아야 한다는 거다. 행사를 보름 앞두고부터 북장단을 연습했다. 여태 앉아서만 치다가 일어서서 행진하는 연습을 했다. 자진모리를 치면서 행진 중에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도는 연습까지 하니 신이 난다.
옷을 받았다. 흰색 옷에다 청색 조끼를 입고 어깨띠를 둘렀다. 삼색 꽃이 달린 고깔까지 쓰고서 거울 앞에 서니 영락없는 풍물패다.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고, 함께 배운 사람들과 신나게 뛰노는 공연이니 그 날이 기다려진다. 행사는 마침 내가 있는 학교에서 한다. 교장이 자기 학교 운동장에서 풍물을 치며 뛰노는 걸 보면 사람들이 즐거워하리라.
서정애
2012년 교육신문 교단수기 금상
2013년 공무원문예대전 수필 부문 은상
'결혼 후 10년(공저, 2011), 공저 호미곶 돌문어(공저, 2014)', '지금 그대로 사랑합니다.'(공저, 2015)
고리
겨울비가 내린다. 기온이 뚝 떨어졌다. 보온병과 우산을 들고 허둥거리며 뛴다. 간밤의 추위에 강아지가 얼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하다.
거적을 들추니 아직 눈을 못 뜬 강아지 다섯 마리가 어미젖을 먼저 차지하려고 서로 밀쳐댄다. 다행히 모두 무사하다. 나를 본 어미 개는 앙상한 뼈가 드러난 가슴을 모으고 벌벌 떨며 일어난다. 두려움과 경계가 섞인 눈빛이나 혹한 속에서 생명을 받아내고 지켜낸 어미로써의 결연함도 섞여있다.
개밥그릇 바닥에는 밥풀과 불어터진 국수 가닥, 뼈다귀와 고춧가루 범벅의 야채가 뒤엉켜 얼어있다. 뜨거운 물을 끼얹어 녹인 음식물을 쏟아내고 준비해간 따뜻한 개밥을 붓는다. 어미 쪽으로 들이 밀며 먹으라고 했으나 일별할 뿐, 고개를 외로 꼰다. 내가 멀어지면 먹을 것이다. 얼굴이 익을 만도 한데 낯가림은 여전하다.
그 개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가을, ‘사랑지’ 자드락길에서였다. 눈빛이 맑고 순했다. 장 씨가 못가의 공터에 끌어다 놓은 떠돌이 개 중에서 가장 비루먹은 개였다. 가끔씩 우유를 부어주고 말을 걸며 쓰다듬었지만 부끄러움을 몹시 탔다. 그 개는 제 밥그릇의 밥을 빼앗기고도 멀뚱하게 물러설 뿐 짖는 일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갔을 것이다.
사랑지에는 여러 마리의 개가 한동안 묶여 있다가 사라지곤 했다. 한때 우리 마을에서 곁방살이 했던 장 씨가 드나들며 이태 째 키우는 것들이다. 그는 겨울에는 생명을 유지할 만큼의 먹이만 주다가 이듬해 봄부터 밥찌끼를 부지런히 가져다 날랐다. 살을 불려 보신탕집이나 제탕원에 좋은 값으로 넘기기 위해서였다.
개들은 각각의 나무둥치에 묶여 있다가 때가 되면 먹이를 주던 그 손끝에서 몇 근의 고기로 사라졌고 금세 다른 개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사람이 그리운지 내가 지나치면 개들은 좋아서 목줄이 끊어져라 뛰어올랐다. 특히 애완견이었던 흰둥이의 울음은 절규에 가까웠다. 벌에 쏘여 한 쪽 눈을 실명했다는 흰둥이는 한때 사람에게 사랑 받았던 때가 그리워서였을까. 그 개도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다.
‘몸집이 작아 돈도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주인 잃은 개밥그릇에 시나브로 떨어져 내리는 아까시 잎을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다. 한 그릇의 보신탕을 위해 죽어간 개들의 눈에 마지막 망치를 휘두르는 인간의 모습은 어떻게 비춰졌을까? 마음이 아렸다.
못이 얼어붙는 강추위가 시작될 무렵 그 개의 배는 눈에 띄게 처져갔다. 제대로 해산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 나는 매일 아침 개집을 살펴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멸치 대가리나 생선뼈를 챙겨가는 날이 많아졌다.
사상 초유의 추위라는 보도에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집을 나섰다. 바람에 뚜껑이 날아간 개집이 휑했다. 온몸이 젖은 채 와들와들 떨고 있는 개의 넓적다리 사이로 꼬물거리는 것이 보였다. 하필이면 그 추운 날에 새끼를 낳은 것이다. 널브러져 있는 어미 개 품속으로 다섯 마리의 강아지들이 필사적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부풀어 오른 어미젖은 혈관이 다 내비쳐 곧 터질 것 같았다. 저 몰골로 새끼를 어떻게 낳았을까? 내 마음이 오그라붙는 것 같았다. 지난밤의 모진 추위에 무사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뱃가죽이 달라붙고 가슴뼈가 앙상하게 드러났을망정 어미 개는 당당한 표정으로 젖을 물리고 있었다. 갓 태어난 강아지들은 낑낑거리며 허공에서 주둥이를 내저으며 젖을 찾았다. 어미 개의 몸놀림은 새끼를 거두는 어미답게 조심스럽고도 다소곳했다. 삭풍의 어둠 속에서 생명을 받아낸 어미 개를 외경심으로 바라보았다. ‘생명’앞에 숙연했다.
날아간 개집 뚜껑을 찾아서 덮고 나무에 걸려 있는 넝마를 주워 개집 바닥에 깔아주려고 새끼들을 안았다. 새 생명의 감촉은 따스하고도 뭉클했다. 혹시 예민해진 어미가 물까 걱정 했으나 내가 하는 대로 맡겨 두었다. 물기어린 눈빛에 혼곤함과 경계심이 교차했다.
다음 날 아침부터 나의 해산바라지가 시작되었다. 운동길 양 손에 항상 보온병 두 개를 챙겨 들었다. 한 손에는 따뜻한 물이 든 것을, 다른 손에는 영양가 있는 개밥이 든 것이었다. 간밤 추위에 무사했는지 못가 입새에 들어서면 마음이 먼저 달렸다. 애써 깔아준 깔개는 간데없고 바닥이 차가운 플라스틱 그대로일 때면 내 몸이 절로 몸이 옹송그려졌다. 젖몸살을 살피려 했으나 엉켜있는 강아지들 때문에 그럴 수 없어 걱정되었다. 어미 개는 저 생명들을 대체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혹한 속에 던져진 생명 앞에서 나는 어미 개 심정이 되었다.
유별난 추위 속에서도 때가 되니 강아지들은 눈을 떴다. 어느 날, 어미를 간절히 올려다보는 강아지와 새끼를 그윽하게 내려다보는 어미 개를 보았다. 그것은 옹알이를 하는 아가와 눈을 맞추며 어르는 엄마의 눈길과 다름없었다. 그 천진한 눈동자들은 신비로울 만큼 반짝였다.
어미 개는 알 것이다. 새끼들은 곧 뿔뿔이 흩어져서 세상 밖으로 나가 발바닥에 단단하게 박일 굳은살의 힘으로 살아가야 할 것임을. 그러다가 때가 되면 대부분 인간의 보신을 위해서 사라져가야 할 것임을.
찬바람이 부는 오늘 아침에도 생선 찌끼와 누룽지, 따뜻한 물을 보온병에 붓는다. 생명들이 무사히 겨울을 날 수 있기를 기원하는 간절한 마음도 담았다. 꼬리를 흔들며 내 주위를 맴돌 강아지들을 그리며 서두른다.
나는 겨우내 견공 가족들로 인해 몸과 마음이 분주했다. 근심했으나 경이로웠다. 하지만 그것은 나를 정화시켰고 작은 기쁨을 누리게 해주었다.
‘모든 것은 생명의 원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라는 말을 떠올린다. 대지의 품에서 어미 개와 강아지들 그리고 나는 결국 하나의 생명 고리에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
손달호
<<월간문예사조>> 수필 등단(2006.03)
교원문예 교육부장관상
제12,13,14회 공무원문예대전 동상, 우수상, 은상
2011교원문학상 당선
포항이동중학교 교사
놋대야
나는 달빛을 꺾은 새털구름이었나 보다. 달무리가 진다. 베란다 창 너머로 빗방울이 들어와 대야에 달그락거린다. 바쁘다는 핑계로 한동안 형님과 소식이 적조했던 무심함을 나무라는 듯 놋대야를 울리던 비는 무정한 내 마음으로 옮겨온다. 우리 집 놋대야는 살림날 때 형님네가 사다준 것이다. 금방 끓었다 식어버리는 양은보다 놋그릇처럼 서서히 달더라도 쉬이 식지 말라는 깊은 뜻을 담아 아우에게 준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삼 학년 때인 그날도 비는 이모네 집 대야에 통통댔다. 놋대야를 울리는 빗소리를 듣는 어머니한테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온다. 투덕대는 빗소리는 먼 길을 따라 사립문을 나섰던 이모의 발꿈치 딛는 소리 같다. 이모는 이삿짐 속에 어머니가 느낄 공허감까지 싸지는 못했다. 이모가 떠난 빈자리에 추적거리는 빗소리는 엄마의 마음을 적막공산으로 몰아넣는다. 어머니는 꿈자리가 안 좋을 때나 심란한 일이라도 있는 날은 식전부터 ‘옴마니반메훔’을 입에 단다. 나는 그 말이 늘 아리송했지만 어머니에게는 돌부처 같은 신앙이었다.
어제 이모네가 광산촌으로 떴다. 이십 년 동안 앞뒷집에서 부대끼며 우리 집 군식구로 살아왔던 이모네가 단양으로 이사를 간 것이다. 어머니에겐 짐스럽기도 했지만 집안의 사소한 내막도 시시콜콜 다 들어주던 외할머니만큼 편했던 이모였다. 준 건 이미 잊었지만 그간에 못다 준 것과 이모네 앞날이 마음이 걸려 어머니는 속이 탔다. 잔정이 유별나고 못 주어 안달인 엄마는 이모가 손윈데도 언니처럼 보인다.
오늘 어머니의 눈길은 온종일 돌담 너머 이모 집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며느리의 심사를 눈치 챈 할머니는 어머니 곁을 맴돌며 눈알을 되록거리신다. 적막감이 흐르는 이모네 오두막 지붕은 오늘따라 더 낮아 보이고 빈 방에 걸린 문고리는 시누이 머리채 뒷모습만큼 싸늘했다. 녹슨 철사로 간신히 배겼던 금 간 독과 이 빠진 단지가 이사를 뜬 빈 장독간에 놋대야 홀로 밤을 맞는다.
이모와 어머니 사이에 두 사람의 마음을 한 데 담는 빨래 그릇이 있었다. 이모네 오막살이에 어울리지 않은 누런빛이 섬광처럼 번쩍하는 놋대야다. 이 방짜는 집안이 기울기 전, 윗대 어른이 시집 올 때 혼수로 들고 온 것이라 한다. 이모부의 손버릇으로 전답을 다 날렸지만 놋대야만은 가보로 전해졌다. 이모네의 세간을 통틀어 제일 보배로운 물건이 된 것이다. 끼니마저 힘들 때가 많았지만 이 놋대야는 이모 네 권속들의 자존심을 적잖이 곧추 세웠다. 두드리면 높낮이의 파장이 옛날 영상으로 현재의 가난을 상쇄시키려는 맥놀이를 일으킨다.
가난 속에 피었던 어머니와 이모 간의 정도 놋대야처럼 보배로웠다. 놋대야는 이모가 어머니에게 마음을 전하는 유일한 휴대 전화다. 긴 여음은 담을 타고 가는 귀 먹은 할머니를 따돌리고 어머니의 가슴에 전해졌다. 높낮이가 서로 간섭하여 놋대야에 신비한 소리 파동이 이는 것은 수없는 망치질의 인내에 있었지 않을까. 쉼 없는 두드림으로 놋대야 밑바닥에 단내가 났던 것처럼 자매간의 사랑도 가난에 여물어지고 할머니 눈칫밥에 단단해졌을 것이다.
이모는 놋대야를 허리에 끼고 다녔고 어머니는 양동이를 이고 빨래터로 오갔다. 속이 깊은 양동이는 어머니의 마음속 같다. 양동이 밑에 감춘 쌀 봉지, 짠지 통은 빨래터에서 이모 집 놋대야로 옮겨진다.
놋대야는 빨래 그릇만이 아니라 때로는 이모네 양식 길이고, 자매 사이를 가깝게 당겨주는 끈이고, 그리움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할머니의 눈을 피해 빨래터를 이어주는 해방의 그릇이기도 했다.
이모는 놋대야를 어머니 눈에 쉽게 띄도록 담 너머 눈길 닿는 장독대에 놓아둔다. 빨래가지가 나오면 대야에 어김없이 담겼다. 광목 수건으로 둘둘 말린 모녀의 개짐이 밑바닥에 놓이면 그 위로 무명 고쟁이가 덮이고 뒤축이 반질반질한 양말짝이 얹힌다. 고봉으로 올라오면 빨래터로 나가자는 신혼데 어머니가 알아채지 못하면 대야를 비우고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밀어준다. 시굼한 정이 밴 놋대야 소리는 어머니 귀에 속울음을 떤다.
이모는 애지중지 하던 놋대야를 그냥 두고 떠났다. 놋대야를 나 보듯 보라는 어머니의 허전함을 달래려는 언니 마음이다. 하지만 놋대야는 어머니에게 상처였을지 모른다. 만지면 덧나는 걸 알면서 딱지 앉고 나을 때가 되면 근질거림을 참지 못하고 다시 손대게 되는 껴안아야 할 통증이었다. 어머니는 놋대야를 윤이 나도록 닦아 마루에 걸어두며 새록새록 기억의 부스럼을 긁어 상처를 도지게 했다.
어머니는 이모 보듯 놋대야를 본다. 그것에는 엄마와 얽히고설킨 속울음이 절절하게 배어 있고 못 다한 이야기가 설움으로 남아 있으며, 이모의 한 생이 얼룩져 있다. 다는 시간도, 식는 과정도 서두르지 않는 놋그릇이 지닌 천성과 쉬이 마르지 않은 여운은 이모를 닮았다.
옛날에 어른들은 대야를 사사로운 가재도구들과 차별화했다. 이사를 갈 때도 요강과 함께 꼭 받은 날에 먼저 옮겨졌다. 피부에 낀 기름기나 여자한테 나온 혈을 받아내며 신체 안팎의 체취가 짙게 밴 그릇이었기에 그랬을까.
대야는 금기도 초월한다. 생명이 탄생할 무렵에 대야는 안방으로 들어간다. 산모 옆에서 경건하게 태아를 씻길 채비를 한다. 주검 옆에서 망자의 머리를 씻기고 얼굴을 닦일 때도 대야가 옆에 있었다.
대야에 물 주름을 일렁이며 세수하고 온 어머니 표정엔 맑은 고요가 가라 앉아 있었다. 대야로 인륜을 다독이며 살았던 어머니는 새로 살림 차린 자식이 있으면 손위에게 놋대야를 사다주라고 이르신다. 살다가 마음에 욕심의 때가 끼면 대야에 핀 짙푸른 녹처럼 닦아내고 상쇄하는 놋대야 소리처럼 서로 보듬어 주라는 어머니의 바람이다.
유산을 놓고 물고 뜯는 요즘 형제들에게 놋대야를 하나 걸어주고 싶다. 옛날 어른들한테 어떤 고귀한 것과도 견줄 수 없었던 노동과 효제정신의 가치가 돈 앞에 무너지고 있다. 두드림을 끝까지 인내한 놋쇠 소리는 전통적인 우리 소리이다. 유기의 소릿결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것은 망치질에 시달린 혹독한 시련을 거쳤기 때문이리라. 나약해져가는 사회인들을 향해서도 놋대야를 울리련다.
비록 놋대야가 아니라도 좋다. 전통적으로 끈끈한 유대를 지니게 했던 훈장 같은 소품을 가슴에 하나 걸고 사는 것은 어떨까?
지금 빈 대야를 울리는 비는 동기간에 무관심한 내 마음을 때리는 어머니의 회초리 같다. 놋대야처럼 식지 말라는 형님의 속뜻이 차가운 빗방울에 식는다. 막 내 손엔 형님에게 걸 전화기가 들려 있다.
손진숙
《수필문학》《계간수필》로 등단.
수필집《신록처럼》.
경주문협, 행단문학, 계수회 회원.
찐빵 없습니다
G읍에 맛있다고 소문난 찐빵집이 있습니다. '50년 전통 G읍 찐빵 CK분식'이라는 입간판을 출입문 앞에 세운 초라한 가게입니다.
낡은 유리창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면 열 평쯤 될까 말까한 공간입니다. 벽에 바른 빛바랜 꽃무늬 벽지 때문일까요. 첫 인상은 옛집 안방에 들어선 느낌입니다. 가게에 들어서면 바로 통로로 이어집니다. 통로 오른편에는 식탁 두 개가 세로로 배치되어 있고, 왼편에는 식탁 두 개가 가로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비어 있는 왼편 안쪽의 식탁에 가 앉았습니다.
주문을 받기도 하고, 음식을 나르기도 하는 주인아저씨는 찐빵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타입입니다. 희끗한 머리, 퀭한 눈, 강마른 몸피, 얼핏 나무젓가락 인형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몸놀림은 의젓하고 강단이 있어 보입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점심을 먹은 터라 단팥죽 삼 인분과 찐빵 칠천 원어치를 주문합니다. 맛있기로 소문났다는 찐빵을 세 사람이 하나씩만 맛보고 나머지는 나누어 가족에게 맛보이려는 속셈에서입니다.
"단팥죽 먼저 드릴까요?"
주인아저씨의 목소리에는 차분하면서도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습니다.
"네."
단팥죽은 얼마 기다리지 않아 나왔습니다. 조그마한 공기에 검붉은 죽이 반가량 담겨 있습니다.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자 보드랍고 다디단 액체가 입안에서 사르르 녹습니다. 새알심이 없어 씹을 것도 없이 목구멍을 타고 내립니다.
우리가 단팥죽을 먹는 동안, 손님들이 끊이지 않고 드나듭니다.
"찐빵 있습니까?"
"찐빵 없습니다."
주인의 대답 한 마디에 잠시 머뭇거리던 손님은 발길을 되돌립니다.
주인아저씨는 단팥죽이나 국수를 먹고 있거나 기다리는 식탁에 찐빵 한 접시씩을 가져다 놓습니다. 가져다 놓고는 말 한 마디 않고 돌아섭니다. 잠시 후 우리 식탁에도 방금 솥에서 꺼낸 찐빵을 갖다 놓습니다. 주문한 양에 훨씬 못 미치는 여섯 개입니다. 돌아서 가는 주인아저씨의 뒷모습이 꼿꼿해 보입니다.
찐빵의 크기래야 아기의 꼭 쥔 주먹만 합니다. 남아 있던 단팥죽에 찍어 먹습니다. 부드러운 빵이 단맛과 어우러져 혀에 살살 감깁니다. 이내 다 먹어 치우고 나머지 찐빵이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주인아저씨는 우리 쪽에 눈길도 주지 않습니다. 잇달아 찐빵 찾는 사람들을 “찐빵 없습니다.” 침착한 목소리로 되돌려 보내고 있습니다. 가족에게 가져다주려던 마음은 접고 일어섭니다. 찐빵을 사려다가 돌아서는 사람들 뒤를 따라 가게를 나섭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찐빵을 사러 줄을 잇는 손님들을 미련 없이 돌려보내다니요. 보다 많이 빵을 준비해 몰려오는 손님들이 주문하는 대로 팔면 많은 매상을 올릴 텐데 말입니다. P읍 재래시장 안 허름한 돼지국밥 집에서는 소문을 듣고 몰려오는 손님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시장 바닥에 멍석을 깔았던데….
국수나 단팥죽과 함께 주문한 손님에게는 어김없이 찐빵이 있었습니다. 50년 전통의 국수, 단팥죽, 찐빵 중 어느 하나에 치중하는 걸 경계하는 'CK분식'의 판매 전략이었을까요. 그래서 가게에 들어와 선 채로 찐빵 있느냐고 묻는 사람에게는 녹음한 테이프를 틀 듯 “찐빵 없습니다.”를 되풀이했던 건 아니었을까요.
‘50년 전통 CK분식’의 메뉴는 아주 단출했습니다. 국수, 단팥죽, 찐빵. 가격도 매우 저렴했습니다. 국수와 단팥죽은 한 그릇에 2,000원, 찐빵 3개에 1,000원입니다. 언제 적 메뉴와 가격인지 묻고 싶을 정도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이 좋아하는 맛을 고수하면서 파는 양을 일정하게 하고 가격도 함부로 올리지 않는 뚝심. 진득이 앉아서 기다리며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진미. 우리가 잠깐 머무는 동안에도 계속되던 주인아저씨의 담담한 “찐빵 없습니다.”가 오히려 찾는 발길을 연잇게 한 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P읍 재래시장 안 돼지국밥 집 주인아줌마는 나중에 시내 한복판에 현대식 이층 점포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피둥피둥 살진 몸으로 손님에게 쫓기는 듯하던 아줌마의 종종걸음이 마음을 어지럽힙니다. 급하게 서두르는 사람이나 한꺼번에 많은 것을 얻으려는 사람에게 'CK분식'의 그 맛있는 찐빵은 없는 게 맞습니다.
안희옥
경북교육청 주관 교원문예실기대회 입상(2002)
포항문학 부설 문예아카데미 7기 수료(2005)
포항문학 부설 수필연구반 수료(2006)
동리목월 문예창작대학 수필연구반 수료
경북교육청 주관 교육현장체험수기공모 대상(2012)
동서문학상 수필부문 은상(2012)
현) 초등학교 교사
오순이
경주대 사회교육원 수필창작반 수료
글항아리 독서회 회원
기억을 떠올리며
신문 한 쪽의 칼럼이 의미심장하다. 이슈가 되고 있던 음악영화가 폭력교육의 유무로 쟁점화 되고 있어 평론가들의 찬반이 뜨거웠다는 내용이다. 글쓴이는 글을 통해 옛일을 떠올린다. 중1때의 일화를 피력하며 그 일이 트라우마로 남아있다고 했다.
토요 조회 전 운동장 교단 위에서 놀던 아이들 중 누군가 이사장의 의자에 앉았던 것이 화근이었고, 한 선생님의 불호령에 아이들은 흩어졌다. 상황파악이 안된 글쓴이를 포함한 몇몇 아이들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왜 맞아야 하는지,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른 채 수차례 뺨과 머리를 맞았다는 내용이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때고 더군다나 여자아이라면 충격은 더 할 것임은 당연지사다. 글쓴이는 이후로 장래희망이던 교사의 꿈을 접었다고 한다.
까마득한 옛 일이 떠오른다. 나 역시도 그러한 경험이 있었다. 중학시절 점심시간에 외출 금지 학칙을 어기고 몰래 나갔다가 걸렸다. 악명 높은 선생님에게 친구와 난 뺨을 얻어맞았다. 큰 손의 완력으로 몸은 힘없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비참함과 수치심이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그 일이 뺨을 맞을 만큼 큰 잘못이었을까. 학칙을 어긴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분노감이 앞섰다.
기질적으로 약한 아이들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을 것인지 그 선생님은 몰랐던 것일까? 한 번 쯤은 타이르고 넘어 갈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어린 나에겐 선생님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이 트라우마로 자리 잡은 사건이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은 대상에 따라 엄청나게 달라진다. 제각기 타고난 천성적 기질 탓도 있겠지만, 후천적 양육과 훈육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다. 사제지간이라는 상하 관계가 일그러진 권위와 맞물려 마치 정당한 훈육인양 당연시 했다. 권위와 우월 의식이 팽배했던 불우한 시대의 산물이라 치부해도 왠지 억울하기만 하다.
과도한 경쟁 속에 내몰리고 스트레스로 폭발 위기에 선 작금의 사회다. 권위만 있고 정서는 메마른 교육과 환경, 차가운 이성과 지식은 넘치고 감성이 부재한 사회는 여러 형태의 부작용으로 나타난다. 참다운 권위는 당위성을 잃었다. 물질로 모든 것을 결정짓고 경계 지어진 세상에 분노감만 높다.
빈부의 양극을 치닫는 현 세태가 불안하고 위태롭다. 가난한 부모가 죄인처럼 회자되는 현실이 가슴 아플 따름이다. 세간에는 금수저, 은수저, 최근엔 다이아몬드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들과,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들로 가름하기도 한다. 스스로 운명을 탓하는 비틀린 세태를 보더라도 씁쓸한 마음 지울 수가 없다.
유독 기억에 남는 한 아이가 있다. 얼마 전까지 일 년여를 함께 한 아이다. 내년이면 중학교에 진학 한다. 그리 넉넉지 않은 가정환경이었지만 욕심 없이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심성이 여린 아이였다. 가르치는 입장이라 자만했던 것이 오히려 부끄러웠다.
책을 읽고 정서적 교감에 치중 했다. 아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공감 하는 시간들을 일 년 정도 가졌었다. 처음 전학 왔을 때는 문제가 많았다고 했다. 학년을 이어서 선생님이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정성을 기울였다는 말을 들었다. 아이가 학교에서 영화감상문을 써서 최고상을 받았다고 했다. 감상문의 말미에 ‘최고의 감상문이었다.’ 라는 선생님의 칭찬 글이 씌어 있었다.
아이는 감상문을 펼쳐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의기양양하게 감상문을 보여주며 환하게 웃었다. 금세 눈가가 젖고 가슴이 뭉클했다. 나의 일인 양 기뻤다. 무엇이 이 아이를 자신감이 넘치고 기쁨에 들뜨게 했을까. 선생님의 편견 없는 사랑과 관심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아이에게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을 뿐이다. 아이는 진정으로 감사한 마음을 내비쳤다. 그것이 나를 더욱 부끄럽게 했다. 아이는 담임선생님을 최고로, 그다음으로 나를 기억할 것이라 말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 한다. 자아가 형성되고 한 인격체로서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은 어찌 보면 인간의 기본 욕구일 것이다. 부정적 요소보다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켜 칭찬하고 용기를 주는 것과 무엇이 문제인지 본질을 꿰뚫는 것, 그것은 곧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평등한 시선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닐까.
참으로 부끄럽다. 아이를 기르면서 제대로 사랑을 주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 감정 실린 말에 마음 다쳤을 내 아이들을 생각하면 미안하고 죄스럽다. 훗날 난 어떤 엄마, 어떤 사람으로 기억 될 것인가.
오늘 난 신문의 한 칼럼을 통해 글쓴이가 어떤 기억을 떠올렸듯 지난날의 씁쓸한 기억을 상기했다. 그 기억 속에는 비틀린 권위로 폭력을 휘두른 지각없는 한 사람이 있었다. 아이에게 부모와 선생님은 삶의 지침과 바른 가치관을 심어주는 존재다. 나의 모습은 어떤한 지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윤종희
류하
윤미애
1956년 경북 포항 출생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 수필 대상
포항소재문학상 최우수상
못갖춘마디
그분이 오셨다. 섣달 열여드레 시린 달빛 받으며 오신 모양이다. 서걱대던 댓잎도 잠든 시각. 제주가 위패에 지방을 봉하자 열린 대문사이로 써늘한 기운 하나가 제상 앞에 와 앉는다.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망설이다 들어온 걸음일까. 촛불은 병풍에 두 남자의 실루엣을 그리며 천장 향해 솟는다. 허리가 꾸부정한 제주가 한 순배 술을 올리고 용서라는 절을 하자, 고개 숙이고 있던 그의 아들은 신뢰라는 절을 한다. 망자의 아들과 그 아들의 업둥이가 지내는 내 아버지 제사 날이다.
큰 오빠는 아버지에게 못갖춘마디 같은 자식이었다. 깨진 유리온실 속의 시들어 가는 화초 같은 아들이었다. 가슴여미는 아픔으로 무섭게 스치거나 소용돌이치다가 비워진 쉼표와 마지막 마디의 음표가 만난 후에야 완성되는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자식 때문에 더 많이 아파야했고 더 많이 내어주고 보듬었는지도 모른다.
자식 셋을 연이어 잃은 아버지의 상심은 컸다. 품에 안아보지 못한 자식들로 인해 외아들로 자란 아버지는 한동안 고통 속에서 살았다. 그 일로 쫓겨난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찾아 나선 걸음에 얻은 자식이 큰 오빠였다. 그래서 그랬을까. 태어나자마자 골골대며 잦은 병치레로 부모님의 애간장을 어지간히도 태웠다. 시오리 신작로 길 아버지의 자전거 뒤에는 콜록거리며 담요에 쌓여 병원을 오가는 오빠가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아버지 생의 여린내기 음반 위에서 불안정하게 구르고 있는 선율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 후, 내리 아들 딸 넷을 더 얻어 여린내기로 시작된 아버지의 삶은 음역을 넓혔다. 가난했지만 자식으로 인해 마음만은 부자로 살았던 그때, 아버지의 인생연주라는 선율은 안정감 위에서 봄 아지랑이처럼 다복한 꿈을 꾸며 따뜻하게 피어올랐다. 그렇지만 할아버지의 무릎을 독차지하고 응석만 늘어가는 큰오빠 때문에 형제간에 엄살, 정 투정이라는 나지막한 외침들로 아버지의 악보선율은 그리 매끄럽지는 못했다.
약해진 마음이 더 문제였다. 허약한 몸을 무기삼아 오빠는 동생들의 내리사랑까지 자신의 것으로 여겼다. 형의 도움을 받아야 할 오빠들이 되레 신발 안 돌멩이 같은 그의 가방을 메고 먼 등하굣길을 오갔다. 나와 여동생도 노는 시간이면 손톱 밑 가시 같은 오빠를 살피려 달려갔다. 또래들한테도 따돌림을 당해 외톨이가 되어가는 그를 보호하기 위한 우리 형제들의 노력은 가히 필사적이었다.
어쩌다 미처 그를 돌보지 못해 다치거나 앓아눕기라도 하는 날이면 아버지의 호된 꾸지람이 날아들었다. 그에 상반되는 벌도 달게 받아야 했다. 보통빠르기의 4분의 3박자, 내림나장조인 아버지의 선율은 못갖춘마디로 인해 가사와 마디가 불일치해 자연스럽지 못했다. 부드럽지도 않았다. 그로인해 우리들은 일찍이 가족이란 청하지 않아도 내리는 눈비와 같다는 것을 알았다. 그 거역할 수 없는 섭리 앞에 작은 나를 느끼며 순응하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나이가 들어도 오빠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점점 더 게을러지고 나태해져 갔다. 맏이로써의 책임감도 신뢰도 저버렸다. 어렵게 벌어 보내온 다른 오빠들의 돈마저 사업자금으로 탕진했다. 부도를 내고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 때에도 아버지는 모든 전답을 빚쟁이들한테 내어주고 오빠를 찾아다녔다. 미덥지 못한 오빠보다 더 이해하기 힘든 건 아버지였다. 우리는 하나, 둘 아버지 곁을 떠났다. 나 또한 평생 자식 편애하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앙칼지게 대들어도 봤지만 그를 향한 당신의 믿음에는 도돌이표도 쉼표도 없었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혈육 인데. 같이 가야지” 하면서.
오빠는 서른 중반을 훌쩍 넘기고서야 결혼을 했지만 생산을 하지 못했다. 그 원인이 당신 아들한테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아버지는 나오지 않는 헛기침 두어 번으로 아린 속을 달래는 듯 했다. 장손으로 조상보기 부끄럽다며 양자들이기를 권하는 일가친척들의 등살에도 아버지는 반응이 없었다. 부실한 몸에 가진 것 없는 오빠에게 양자 줄 사람 또한 없어 보였다. 세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분열이라는 뜨거운 대립과 융화의 과정을 거쳐야 하듯, 마디라는 능선을 불협화음으로 숨차게 넘어오던 아버지의 연주는 절정에서 숨고르기가 필요해보였다.
그해 시월, 삶은 완벽하지도 아름답지도 않기에 맞잡을 두 손이 필요했을까? 누군가 대문 앞에 놓고 간 업둥이를 오빠는 숙명처럼 거두었다. 그리고 그 업둥이를 안고 온 사람이 바로 당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서는 조금씩 변해 갔다.
마지막에야 완성되는 사람이 있다. 그 무엇에 대해 절실한 결핍을 느끼면서 아주 느리게 성숙했던 내 오빠가 그랬다. 똑똑하고 건강했던 형제들 속에서도 결코 낙오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힘이었다. 즉흥적으로 벌하고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실수도 게으름마저도 껴안고 용서하며 기다려주었던 아버지. 헌신과 평범함으로 못갖춘마디의 빈틈을 아우르고 포용력을 보여줌으로써 사랑과 구원이라는 완성된 연주를 이끌어 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게 우리네 삶이다. 때론 놓친 삶이라도 되돌이표로 되돌려 다시 갖춘 삶을 살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그럴 수가 없다. 연주자들은 말한다. 못갖춘마디를 연주할 때는 앞에 한 박자 쉬는 부분을 명확하게 느껴야 된다고. 그래야만 막판 셈여림의 조절이 가능하다고. 그렇다면 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놓친 한 박자도 한 번 더 믿어주고 보듬어 주면 마지막에는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진리를.
아버지의 말년은 평온했다. 오랜 병상생활을 하면서도 영특한 업둥이로 인해 일생 다하지 못한 즐거움을 누리셨다. 큰아들의 늦은 성공으로 여유와 효도를 받으며 꼭짓점의 마지막 음표를 완성한 후에야 생을 마감하셨다. 누군가가 그랬다. 결코 갈대는 약한 식물이 아니라고. 속에서 자라나는 새끼 갈대가 바람에 깔리지 않고 자라기를 바라며 지켜주다 저 혼자 힘으로 버틸 수 있을 때가 되어서야 몸을 뉘인다고. 갈대가 여름까지 쓰러지지 않고 서 있었던 그 이유처럼. 그렇게 살다 가셨다.
아버지가 보인다. 생각을 접어보면 그의 사랑과 좌절도 보인다. 아버지를 아버지라는 틀 속에 가둬 놓은 채 기대하거나 요구하기만 했던 지난날들. 이상하다. 아이 다섯을 키우고 이제 겨우 아버지를 이해했을 뿐인데 사랑하게 되는 것은 나 자신인 것이. 놓친 못갖춘마디의 첫음절을 붙잡고 마디마디 넘어오던 아버지를 기억하면 내 안에 내재되어있는 꿈이 일어나 춤을 춘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드리는 제사는 나 자신과의 교감이기도 하다.
[2015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이남재
한동대 평생교육원 문예창작반 수료
포항우창교회 담임목사
회갑 휴가
객지에서 목회활동을 한 세월이 이십 삼년 째다. 고향을 떠난 지 사십년이다. 1955년생으로 1975년 부산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목회자로서 생활한 지역이 부산과 대구와 경북이다.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부모공경에 대하여 죄인이다. 부모를 모시는 짐을 동생에게 맡겼으니 장남으로서 늘 미안한 일이다. 객지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 보니 고향교회에서 주일에 예배를 드린 경험은 이십일 년 전 어머님 상(喪)을 당했을 때가 유일하다.
태어나기 전부터 엄마와 함께 교회에 다녔는데 내 기억에는 한 번도 주일예배를 빠진 경우는 없는 것 같다. 나의 모습은 교회와 더불어 성장했다고 본다. 초등학교와 중 고등학생 때의 추억들 대부분이 교회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시골교회이다 보니 중학생 때부터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를 했다. 물론 중 고등부 학생회 회장도 지냈다. 그 안에서 인간관계도 배우고, 선후배도 알고, 리더십도 몸에 배였다. 특별히 선배들의 헌신적인 리더십은 좋은 귀감으로 나를 이끌었다.
시골 마을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던 고향 교회는 내가 고등학생 때에 새로 지었다. 그 때의 예배당은 바닥이 마루였다. 마루에 방석을 깔고 앉아서 예배를 드렸다. 어두움을 호야 불로 밝히며 신앙생활을 했다. 겨울철 난방은 나무나 톱밥난로를 사용했다. 여름에는 창문을 열어 두고 예배를 드렸다. 전기가 들어오진 않았으니 선풍기는 생각도 못했다. 커다란 부채라도 있으면 감사했다. 지금은 고향교회 건물이 마을 외곽의 넓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현대식 건물로 잘 지어졌다. 예배와 교육을 위한 시설들이 잘 갖추어져 있다.
어머니는 스물한 살에 나를 낳으셨다. 회갑을 맞아 고향집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아버지께 내가 태어난 산실(産室)을 여쭈었더니 지금 조카들이 쓰고 있는 작은 방이라고 일러 주신다. 어머니는 회갑에 세상을 떠나셨다. 일곱 남매를 낳고 기르시느라 당신의 몸은 챙길 겨를이 없었다. 내가 스무 살에 고향을 떠났는데 그날 그때까지 엄마가 편찮아서 누워 있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동생들을 낳고도 곧 일을 하셔야 했던 고단한 삶이 이어 졌지만 어머님은 강하셨다. 시골 농부의 아내로 살면서 5남 2녀를 대학까지 보낸 엄마를 생각만 해도 가슴에는 멍이 든다. 늘 논과 밭에 엎드려서 농사를 지었다. 새벽마다 농사지은 것들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평생을 그렇게 지내셨다. 지금도 고향에 가면 어머님 연배의 동네 어른들을 많이 계신다. 그분들을 볼 때마다 어머님에 대한 생각을 수습해야 한다. 어머님의 삶은 표현할 수가 없다. 그냥 가슴만 멍할 뿐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그 나이가 되었다.
지금 동생이 살고 있는 시골집 작은방이 신혼인 부모님의 삶의 자리였다. 셋방살이였다. 내가 태어난 후에 아버지는 군(軍)에 가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한 살 연상이시다. 6.25전쟁이 채 정리가 되지 않은 1955년의 유월에 내 생일이 있다. 스물한 살의 어머니는 삼복더위 속에서 나를 낳고 키우셨다. 이 좋은 세월에도 자식을 키우느니 마느니 하면서 갓난아이 하나에 온 가족이 매달려 어쩔 줄 몰라 하는데 그때 그 시절을 어떻게 지내셨는가 물어보지도 못했다. 하늘이 노랗게 보일 만큼 감정이 격해 질뿐이다.
세 살 아래 동생이 고향교회의 장로이다. 못난 형이 목사라는 이름표를 달고 사는 짐을 동생이 떠맡았다. 동생은 부모를 모시고 형제들을 돌보는 장남 노릇을 하고 있는 고마운 피붙이다. 최근 일이년 사이에는 두 번이나 뇌졸 증으로 입원을 하고 척추에 문제가 생겨 큰 수술까지 했다. 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짧은 직장생활을 하다가 군복무를 마치고 줄곧 고향에서 농사꾼으로 살았다. 비닐하우스에서 온갖 채소를 공장처럼 키워내고 제수씨는 그것을 시장에 내다 판다. 우리 엄마는 장거리를 머리에 이고, 나는 장거리를 지게로 져다 날랐다. 지금은 농작물을 차로 실어 나를 만큼 규모가 커졌지만 삶의 모습을 그대로다. 흙과 더불어 살아간다. 농약을 적게 사용하면서 직접 재배한 것을 아는 소비자들은 동생이 내다놓은 농산물을 좋아한다. 단골들이 많고 늦게 나가도 동생이 키운 채소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판매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는 모양이다. 동생도 그렇게 해서 조카 셋을 모두 대학에 보냈다.
분초를 다투는 바쁜 생활 중에도 동생은 새벽예배를 거의 빠지지 않는다. 신앙으로 삶을 가꾸는 동생을 보면 늘 든든하다. 그런데 요즘은 건강 때문에 마음을 쓰는 것을 보면 늘 미안 하다.
동생과 새벽예배를 다녀와서 어머니 산소에 벌초를 한다. 어머니 산소는 고향마을 뒷산에 있다. 그 곳에서 서면 산 아래 넓은 들과 고향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나무가 땔감이었을 시절에 동생과 함께 늘 지게를 지고 다녔던 산이다. 요즘은 임도가 잘되어 있어서 산소 근처까지 차로 갈 수 있다. 한 여름에는 아침 일찍 벌초를 해야 한다. 그래야 덜 덥고, 벌을 만나더라도 위험이 덜하다.
동생이 예초기를 짊어 졌다. 건강이 썩 좋지 않은데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나에게 맡기는 것이 불안 한 가 보다. 올해는 비가 적게 와서 그런지 지난해 보다 풀이 그렇게 무성하지 않다. 조부모님과 어머니 산소를 벌초한다. 동생은 기계를 지고 나는 베어진 풀을 걷어낸다. 다행스럽게도 벌은 없었다. 산소를 정리하고 어머니 산소 앞에 서서 기도를 드린다. 왜 그렇게 슬픔이 많은지 두 형제는 한 참을 훌쩍였다. 어머님 생각만 하면 마냥 울고 싶다.
환갑의 나이에도 어머니는 여전히 아픈 슬픔이다. 내가 사십도 채 되기 전에 엄마를 떠나보냈다. 다섯째 남동생 결혼식까지는 치루셨는데 그 해 삼월부터 십일월까지 병원만병원만 출입하시면서 항암치료를 받다가 지친 몸으로 가셨다.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하고 고물차로 병원에 모시고 가고, 퇴원할 때 포항에 있는 우리 집으로 모셔서 간병하는 흉내만 냈다. 우리 엄마는 그 일을 여덟 달 동안 감내하시다가 끝내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렇게 어머니를 속수무책으로 떠나보냈다. 그 세월이 이십일 년이 되었다.
팔순을 넘기신 아버지는 벌초하러 가는 두 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가서 대금이나 몇 곡 불러 드려라, 엄마가 좋아하던 찬송으로” 벌초를 마치고 주저앉아 대금으로 찬송 몇 곡을 연주한다. 울컥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누르고 연주를 해 본다. 산 아래에는 어머니가 평생을 엎드려 일구어 온 밭과 비닐하우스가 내려다보인다. 나중에 들어보니 어머니 산소에서 연주하는 대금소리가 시장갈 준비를 하고 있는 제수씨와 조카들에게도 들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런 말도 했단다. “두 형제가 또 울고 있을 것이라”고.
회갑이 되면 해보고 싶은 일이 있었다. 하나는 동갑내기인 친구 같은 아내의 독창회를 하는 것이었다.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는데 오월이 생일인 아내는 “인수는 노래하고”라는 이름으로 노래를 불렀다. 가족들 처가의 식구들 그리고 친구들 동료들 백여 명이 모인 자리를 만들었다. 만찬으로 준비한 “성경의 음식”은 귀한 분의 요리로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고향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설교를 하고 싶었다. 보통 목사의 여름휴가는 월요일부터 금요일 까지다. 주일날 예배를 인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올 해는 특별히 주일까지 쉬도록 교회가 허락을 해 주었다. 이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우리가 휴가 중일 때 창원에서 살고 있는 부부가 우리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렸다. 우리 교회 출신이니 휴가 때에 포항에 와서 고향교회를 찾은 것이다. 그 부부가 추석 때에 와서 이런 말을 남겼다. “목사님이 계시지 않아서 깜짝 놀랐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잖아요.” 그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나도 주일을 고향에서 보내는 것은 정말 특별한 일이다.
명절에 고향교회의 담임목사가 그의 고향에 간다고 자리를 비울 때가 있다. 그럴 때 고향을 찾은 내가 새벽예배에 설교를 한 경우는 몇 번 있었다. 그렇지만 고향교회 담임목사의 허락을 받아 주일예배 시간에 설교를 한 것은 처음이다. 나의 삶을 어릴 때부터 지켜 본 마을 사람들이 대부분인 고향교회 성도들 앞에서 하는 주일 오전예배에 설교는 참 조심스럽다. 예배를 마친 후에 돌아가신 어머님과 연배가 비슷한 권사님이 젖은 눈으로 내 손을 마주 잡는다. 내가 하는 설교를 들으니 “이 목사님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할 때는 숨이 턱에 차오른다. 예배 후에는 우리 가정이 준비한 작은 음식과 과일로 교인들을 섬기면서 교제를 나누었다. 마침 오늘 주일예배에 기도순서를 맡은 이는 나의 어릴 때 친구였다. 그 친구 집이 교회 앞에 있었는데 어릴 때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그런데 사십년이 지나서 고향교회 안수집사가 되어 있는 친구와 식사를 같이 하니 감회가 새롭다.
아직도 면 소재지에는 오일장이 선다고 한다. 2일 7일장이다. 새벽같이 어머니와 함께 장거리를 지고 갔던 그 길을 아내와 딸아이와 같이 걸어간다. 시골 장은 일찍 선다고 하니 아침 식전에 장보러 간다.
내가 어릴 때는 비포장도로였다. 차도 많지 않은 시절이다. 새벽예배를 마친 어머니는 저녁 내도록 준비 해 두었던 장거리를 머리에 이고 2km가 넘는 길을 가신다. 나는 장거리를 지게에 지고 어머니의 뒤를 따른다. 면소재지는 4개의 마을이 모여 있어서 시장의 규모가 비교적 큰 곳이었다. 면소재지 주변 마을에서 재배한 여러 종류의 채소들을 아침 시장에 내다 팔았다. 우리 아버지는 온상에서 모종을 키워서 다양한 채소와 과일들을 많이 생산했다. 그러다 보니 계절에 따른 여러 가지 채소들이 많았다.
추석을 지내고 마늘을 심을 때에 시금치 씨를 같이 뿌린다. 그러면 늦은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시금치를 캐내어 판다. 그리고 구정이 지나면 풋 마늘을 속아서 장거리를 만든다. 마늘 농사를 마치면 마늘을 뽑기 전에 고추와 가지와 호박과 오이, 참외와 수박 모종을 마늘 두둑에 심는다. 마늘을 뽑아내면 이어서 가지와 오이가 나온다. 한 여름이 되면 토마토와 수박과 참외로 품목이 바뀐다. 초가을에는 무가 나오고 이어서 배추를 팔아야 한다. 가끔씩 장거리가 없으면 양파나 잘 엮어 둔 마늘을 가지고 갔다. 내 기억에는 일 년 열두 달 거의 매일 시장에 간 것으로 기억된다. 제일 무거운 것이 무였다. 무를 단으로 묶어서 지고 가면 몇 단 안되는 것인데 무척 힘들었다. 무를 지고 갈 때는 중간에 한번은 쉬어야 한다. 새벽같이 장거리를 지고 시장에 다녀오면 아침을 챙겨 먹고 학교 가는 길이 바쁘다. 초등학교 3학년인 여동생이 차려내는 밥을 먹었다. 그렇게 다녔던 길이 지금은 아스팔트길이다. 차들도 많아 졌다.
신작로를 걸어가면서 지게 발을 세우고 쉬었던 곳을 찾아본다. 돌담으로 된 적당한 높이의 논 언덕은 보이질 않는다. 대신 웅장한 노인 요양 병원이 자리를 잡았다. 시장에 거의 다 왔을 때는 옛 기억을 더듬어 골목길을 눈여겨본다. 지게를 진 어깨가 아프고 등짝에 땀이 흐르지만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장마당에 빨리 도착해야 했다. 그렇게 골목길을 돌며 지게 작대기를 굳게 잡고 마른 힘을 쓰던 그 길을 찾아본다. 그때에 개울을 가로 질러 있었던 다리는 복개 천에 묻혀 버렸다. 물론 개울가에서 꽥꽥거리며 먹이를 찾던 오리도 없다.
그런데 변함이 없는 것이 있다. 시장에 나온 아주머니들이 풀어내는 정겨운 어머니의 목소리다.
“이리 저리 폴지(팔지) 뭐”, “마이 주께(많이 줄 터이니) 이리오소”, “다 할라쿠모(다 살 것 같으면) 삼만 원만 주소”, “만원이 없는데 내일 갖다 주모(주면) 되요”, “야(예)-”
한없이 주저앉아 듣고 싶은 거제도 사투리다. 그리고 가슴이 아프다. 그러면서도 아직도 고향의 말들을 생생하게 담고 들을 수 있는 것으로 마음을 달랜다.
삶은 옥수수 몇 자루와 즉석 수제 어묵을 몇 개 담아서 집에까지 걸어온다. 환갑의 두 내외와 서른이 넘은 딸이 사오십년 전에 어머니와 함께 걸었던 그 신작로 길에 서있다. 비포장도로는 아스팔트가 되고, 지게는 차가 되고, 내 나이는 어머니 나이가 되었다. 세월은 변했는데 고향 마을을 품은 대봉산(山)은 여전하고, 고향 바다도 잔잔하다. 내 마음에만 땀 냄새가 배여 있다. 오뉴월 더위는 시간을 다투어 내려온다. 장거리를 다 팔고 이 길을 걸어오신 어머니는 아직도 아침을 드시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장거리가 다 팔리면 가끔씩 도다리 새끼 몇 마리를 장 그릇에 담아 오셨다. 그때 껍질 째 썰어서 장만 해 주셨던 그 회 맛은 아직도 어머니의 맛으로 그리움이 되었다.
이상준
청산거사(靑山居士)
<<문학세계>> 수필부문 신인상 등단(2003)
제7회 전국공무원문예대전 수필부문 우수상(2004)
한국문협·경북문협·서라벌수필문학회 회원
저서: <<장기고을 장기사람 이야기>>(2006)
<<포항에 뿌리박힌 포은의 자취>>(2007)
<<영일유배문학산책>>(2012)
<<포항시사>><<포항체육100년사>> 집필위원
논문: <연오랑 세오녀 설화의 연구>
엿쟁이
각설이 복장을 한 엿장수들이 가위소리를 내며 춤판을 벌이고 있다. 며칠 전부터 건물이 올라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완공이 되어 누군가가 그곳에서 식당을 개업하는가 보다. 개업 이벤트 행사에 동원된 각설이들의 익살스런 몸놀림이 길손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요즘 아이들에게 엿장수를 설명하라고 하면 엿가위 소리에 맞추어 현란한 춤과 익살스런 풍자로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는 저 광대 정도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릴 적 우리에게 다가왔던 엿장수, 경상도 표준말로 ‘엿재이’는 그게 아니었다. 구멍가게조차 없었던 우리 마을에는 엿장수가 아이들에게 가장 반가운 손님이었다. 찰칵! 찰칵! 엿재이 가위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리면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동안 모아두었던 탄피나 빈병, 밑창이 낡아 떨어진 백고무신을 들고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뛰곤 했다. 혹시나 며칠 동안 목을 빼서 기다리던 엿장수를 놓칠세라 아예 맨발로 뛰는 아이도 있었다. 어떤 아이는 바지가 흘러내리는 줄도 몰랐고, 더러는 가랑이가 찢어지는 줄도 모르고 그 가위소리에 홀린 사람마냥 뛰어나갔다. 마루 밑과 장독대까지 구석구석을 뒤지다가 찌그러진 깡통이라도 없는 날이면 할머니의 빠진 머리카락을 뭉쳐 뛰어나갔다. 할머니가 빗질을 할 때마다 머리가 더 빠지기를 바라는 나쁜 손자가 된 것도 순전히 그 엿 때문이었다. 그것도 없는 아이들은 엿판이 얹힌 손수레를 졸졸 따라다니며 코를 실룩거리다보면 마음씨 좋은 엿장수가 가끔가다 맛보기로 엿 한 조각을 떼어주기도 했다. 그 달콤한 맛의 유혹에 견딜 수가 없던 놈은 댓돌위에 할아버지 고무신을 갖고 나오거나 부엌에 있던 새 냄비를 들고 오기도 했다. 어떤 놈은 처마 밑에 걸린 마늘 한 접을 갖다 주고 엿을 바꿔먹다가 혼이 나기도 했다. 그런 날 저녁이면 동네어귀에는 으레 매를 맞고 쫓겨나온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마련이었다. 저녁 짓는 연기가 안개처럼 피어오르던 동네어귀에서 쫓겨나온 애들은 저마다 엉덩이를 까놓고 누구 멍이 더 시퍼렇다며 키득대곤 했다.
찰칵! 찰카악! 저 가위소리가 들리는 날, 입안에 고였던 엿물의 단맛을 주체할 수 없었던 그 시절이 아득하다. 아이들의 인기로 따진다면, 그때의 엿장수는 컴퓨터였고, 스타크래프트였고, 탤런트였고, 개그맨이었고, 인기 있는 가수였다.
이제는 우리나라 어디를 가더라도 그 옛날의 그 엿장수는 없다. 가위소리도 없고, 그 소리에 넋을 놓고 뛰어가던 아이들도 없다. 이어폰만 귀에 꽂으면 엿장수의 가위소리보다 더 빠르고 매력적인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엿가락 보다 더 달콤한 군것질거리가 지천에 널려 있다.
보리밥 한 그릇도 제대로 먹기 어려웠던 시절, 그 꿀맛 같은 추억과 고향 마을의 모습이 잠잠하고 다소곳이 젖어있는 가위소리. 그 찰칵대는 소리가 온 저녁거리를 뒤덮고 있다.
이순영
취정(翠亭)
<<문학세상>> 수필부문 신인상수상 등단(2006)
보리수필문학회, 포항문인협회, 한국문인협회 회원
현) 국립경주박물관 해설사
경상북도 문화관광해설사
경북향토사 연구협의회 포항시위원
저서: <<산남의진 3대 의병대장 최세윤>>(공저, 2013)
발톱
고맙네. 마치 모감주나무 열매처럼 되었구먼. 염주를 만든다는 까만 열매 말일세. 내 오늘 너를 어루만지려 하니 손도 대지 못하게 하는구려. 그래, 온몸으로 저항을 할만도 하지. 네 속내를 충분히 이해하네. 미안하이. 편안하게 쉬게나. 참으로 고생 많았네.
사람들이 해수욕장이나 계곡으로 피서를 떠날 때 두꺼운 양말과 등산화 속에 갇혀 숨이나 제대로 쉴 수 있었겠느냐. 철갑 속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리. 거기다가 비 맞은 바위와 험난한 산을 행군했으니 견딜 수 없는 고문이 되었겠구나. 주인을 잘 못 만나 이렇게 숯덩이처럼 되고 말았구나.
가만히 보면 볼수록 송구스럽기 짝이 없네만 자네 덕분에 많은 것을 보고 느꼈네. 그 치열했던 낙동강, 다부동 전투 현장을 내 두 발로 밟을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자네 덕일세. 그 공을 높이 인정하네. 육십오 년 전, 찜통같이 뜨거운 날이었지. 열세한 병력에다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학도병과 신병들이 적군과 맞서 십 여 차례나 육탄전을 벌였던 혈전의 전투. 험난한 산을 오르내리며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구별 할 수 없는 전투였지. 죽고 죽이는 전투에서 이루어 낸 평화, 그 평화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그대의 인내가 아니었으면 어찌 내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겠는가.
그날의 아픔과 쓰라림을 고스란히 품고 가만히 엎드려 있는 산과 그들이 목숨처럼 갈망했던 평화로운 하늘과 들녘을 바라보며 울컥, 가슴이 미어졌던 것도 자네의 희생 덕분이었네. 매미소리는 참으로 요란했지. 전쟁터 여기저기에서 어린 학도병들이 애타게 부르는 소리 같더구나. ‘어매어매어매… 시야시야시야….’ 어머니(어매)와 형(시야)을 부르는 소리, 온 산을 흔들어대었지.
건장한 예비사관생도들과 체육인들을 쫓아가느라 숨이 차던 강행군이었지. 하지만 오십오일 동안 그 악산에서 이어졌던 총격전 현장은 아무런 일 없었던 것 같았지. 사흘 동안 때로는 비를 맞으며 땀을 쏟아 내었지만 그날을 생각하니 호사스럽게 여겨지더구먼. 무참하게 쓰러지고 만 꽃봉오리 같은 생명들의 넋과 적을 피해 보급품과 주먹밥을 지고 날랐던 영혼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더구나. 그냥 묵묵히 순례자처럼 땅만 꾹꾹 밟으며 걷고 또 걸었을 뿐이었지. 너에게 그런 고통은 처음이었지. 그렇다고 열 중 셋은 나와 이별을 하려고 작정이라도 한 게냐. 폭풍우에 흔들린 바윗돌 같구나. 온몸으로 나를 향해 시위를 하니 내가 몸 둘 곳이 없구나. ‘2015 전국대학생 칠곡호국순례대장정’ 완주증은 너에게 바치겠네. 떠나지 말고 나를 믿어다오.
우리 오십년이 넘도록 한 몸이었으니 남은 생도 함께 하자꾸나. 앞으로는 이런 고생을 시키지 않을 터이니 용서해주게. 흥분을 가라앉히게. 새벽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보살피고, 잠이 들 때 까지 오랫동안 쓰다듬으며 눈 맞춤 할 것을 약조하네. 고통의 도가니에서 이겨 낸 너를 잊지 않을 걸세.
너는 내가 숨 쉬고 살아있음을 일깨워주었네. 네가 있어 내가 있고 나 또한 너로 하여금 깨어 있음을 알겠네. 그러하니 어쩌겠는가. 너와 나는 둘이 아닌 것을. 숙명적으로 아픔도 함께 해야 할 수밖에 없는 것을…. 자네가 나의 주인일세. 쉰 번이나 넘는 겨울을 지나고 여름을 보내는 날까지 자네가 나를 이끌었네. 내가 어리석었네. 내가 주인인줄 알았으니 말일세.
그런데 자네, 생각해보게나. 우리나라는 언제쯤이면 전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려나. 자전거를 타고 낙동강에서 러시아까지 달려 갈 수도 있으련만…. 그 날이 오면 우리 두 바퀴 페달을 힘껏 밟아 보세나. 휘파람을 불며 신명나게 자유와 평화를 누려보세. 그날은 흥겨운 잔칫날이 될 걸세. 그때도 자네가 나를 이끌어주시게. 부탁하네.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서 드러나지 않게 큰일을 하는 자네를 제2의 어머니라고 칭하고 싶구먼. 허허, 지나친 비약이런가. 내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겠네. 고맙네. 정말 고맙네.
이정란
부산출생
보리수필, 에세이문 문학회 회원
저서 <<봉산 이야기를 품다>>(2013)
mail : ljr6710@hanmail.net
허 허
바람 속엔 많은 소리들이 담겨 있어. 시골에선 다양하고 명확한 소리가 많아 민감해지지. 흐린 밤이면 빤히 건너다보이는 앞산에서 도깨비불이 휘익 날아올라 옆 골짜기로 툭, 떨어졌어. 작은 불꽃들이 톡톡 튀어 올라 무더기가 되어 빙글빙글 돌면서 도깨비 불기둥을 만들기도 했어.
마을 앞으로는 들판이 펼쳐지고 그 앞으로는 개천이 흘렀어. 흐르다 여러 가닥으로 만난 냇물은 휘감아 돌다 큰 내를 이루었지. 그 땐 돌다리를 건너다니고 고갯길도 넘나들면서 십 리 길도 힘든지 모르고 다녔어.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초가을이 되면 마을마다 길 닦는 행사를 했어. 장마에 쓸려간 징검다리도 고치고, 길가에 제멋대로 자란 바랭이풀도 쳐내고, 움푹움푹 패인 길엔 자갈과 흙을 메우기도 했지.
아이들은 맨발을 좋아했어. 비가 오면 질퍽한 흙 마당이 맨발 놀이터였어. 깔깔 호호 까불며 신나게 놀다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어도 아랑곳없이 뒤로 벌렁 넉장거리를 치기도 하지. 아버지도 늘 맨발이었어. 맨발로 논둑을 걷고, 맨발로 삽질을 했으니까. 아버지는 맨발로 풀을 밟고 맨발로 물컹한 무논 흙을 밟았어. 그럴 땐 아버지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어. 논이나 밭이나 거리낌이 없었어. 땅은 아버지에게 안방보다 편한 곳이었으니까.
가리나무는 봄철에 소나무 낙엽을 갈퀴로 긁어서 집으로 가져온 땔감이었어. 지게로 짊어다가 그걸로 아궁이에 불을 때면 훌륭한 땔감이 되었지. 아버지와 봄에 나무하러 갈퀴와 지게를 지고 산으로 올라가면 소나무 밑에는 가리나무가 수북이 쌓여 있었어. 아버지와 나는 지게를 펴고 갈퀴질로 그것들을 긁어모아 나뭇가지를 두르고 그 위에 가리나무를 차곡차곡 쌓아 지게에 짊어지고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어.
허청에 땔감을 부려놓고, 재를 화로에 담아 안방에 들여놓고 온 식구가 둘러앉아 고구마를 구워먹으며 얘기꽃을 피울 때면 세상천지에 부러울 게 없었어. 어떨 땐 마루 밑에 장작을 쌓아두고 추위가 가실 때까지 아궁이에 불을 지폈지. 가끔씩 밤도 구워 먹고, 가마솥에서 물이 끓으면 묵직한 뚜껑을 열고 물을 퍼내 귀한 세숫물로도 썼어.
지게는 벗어날 수 없는 농사꾼의 굴레였어. 몸이 도구가 되던 시절에는 마누라보다 등을 대는 시간이 더 많았고 생계를 짊어진 가장의 분신이었으니까. 지게는 어깨와 등은 물론 전신의 힘으로 짐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게 허리에 무게중심을 두어야 했어. 지게에 아무리 무거운 짐을 실어도 일어설 수만 있다면 누구든 자신의 몸무게에 두 배나 되는 무게에도 너끈했어. 그래서 무게중심이던 지겟다리 왼쪽 허벅지는 유난히 까맣고 번들번들했지. 지고 일어설 때 왼손으로 그곳을 꽉 잡고 균형을 잡으면서 오른손 작대기에 순간 힘을 주면 지게는 곧추 세워졌어. 중요한 허리 부분은 짚을 넣어 푹신하게 만든 등태를 달았는데, 이곳도 나중엔 잦은 마찰로 반들거렸어.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 힘을 못 쓰면 젊은 날 이골 난 지게질에 몸에서 진기가 빠졌기 때문이라고 소곤거렸지. 그래서 지게 일은 상일로 쳐 품삯도 선금으로 주고 밥상엔 고기반찬이 올랐어. 한 칸 오두막에도 지게는 남자수대로 준비했지. 어떨 땐 솔가지를 지고 산비탈을 내려오다 사고를 당하는 일도 있었어. 힘든 만큼 지게에 얽힌 사연은 동네마다 심심찮게 일어났으니까.
쌀독이 빌 때쯤이면 아버지는 새벽녘에 어김없이 지게를 지고 논둑에 나가 풀을 벴어. 한 입이라도 덜기 위해서였지. 아버지는 마을에서 제일 형편이 나은 집에 지게 짐을 말없이 내려놓고 아침 끼니를 해결했어.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밥을 남겨 집으로 가져올 때도 있었지.
간혹 밥상머리에서 지게질이라도 해달라는 주인의 말이 건네지는 날은 운 좋은 날로 쳤어. 일이 끝나면 하얀 쌀 반 됫박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가난이 숙명인 시절이었지. 때로 아버지는 막걸리에 취기가 오르면 나를 지게에 태워 마당을 한 바퀴 돌며 가난한 아비처럼 살지 말라며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어.
가을엔 결실에 대한 희망으로 더없이 풍성했어. 한여름 뙤약볕에서 줄곧 비지땀을 흘려도 수확이 바로 즐거움이었으니까. 보릿고개를 무사히 넘기기 위해서는 추수 뒤 허리춤을 더 졸라매야 했어. 먹을 것이 없어도 내년에 뿌릴 종자 씨앗만은 남겨두었어. 끝까지 걸려 있는 옥수수는 내년 봄 씨앗이고, 덩치 큰 누런 호박은 손자 낳은 며느리를 위해 남겼어. 하지만 철없는 아이들은 알면서도 허기를 견디지 못해 몰래 한 알 두 알 따먹기 일쑤였지. 아이들은 뱃가죽이 등에 붙을 만큼 배를 곯아도 갯버들 꺾어 버들피리 불고, 여름이면 강가에서 은어와 피라미를 잡으며 즐거워했어.
굵은 빗줄기가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하면 텃밭에서 일하던 농부들은 급한 마음에 애들을 먼저 불렀어. 마른 곡식이 물에 젖을까 사색이 된 얼굴로 한걸음에 마당 앞까지 달려가, 재바른 손놀림으로 마당과 고샅에 깔린 멍석을 대청마루 안으로 옮겼어. 아이들은 그저 놀기에 바빠 매번 딴청을 부리다 결국 꿀밤을 얻어맞았지.
멍석 위에서 시나브로 고추가 검붉게 말라가던 가을이 지나 겨울이 오면, 시골집 골방에서 어른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짚이나 새끼를 촘촘히 엮어 멍석을 삼으며 긴 겨울밤을 지새웠지. 개똥이네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아무개네 집안 사정이 어떤지도 이곳에서 퍼져 나갔어. 그래서 비밀이 있을 수 없었어.
옛날 여자들은 일손이 마무리되어 가던 저녁나절이나 새벽 일찍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마주 앉아 주로 맷돌질을 했었어. 한껏 먹는 게 소원이던 시절이었으니, 어머니나 할머니는 자식들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보리나 밀을 갈며 가난을 갈았었지.
해거름이 질 때 돌아가던 맷돌 소리는 왠지 아이들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어. 맛있는 부침개를 만들기 위해 쌀이나 밀을 가는 걸까? 혹시나 찰떡 고물에 쓸 콩을 가는 것일까? 아이들은 볶은 콩에 유자나무 잎을 썰어 갈아 낸 콩고물을 흠뻑 묻힌 맛있는 찰떡을 떠올리며 군침을 흘렸어. 그러나 죽을 쑬 곡식이나 고추장용 메주가루를 갈 때면 아이들은 괜히 서러워서 울음을 터뜨렸지.
집안 행사가 있을 땐 마당 한 머리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절구에 떡고물을 빻아 연신 부엌으로 날랐고, 부엌에선 소매를 걷어붙인 어머니가 장작불을 지피며 흘러내리는 땀과 눈물을 훔치기에 바빴지. 어머니는 시루 안에 고물과 쌀가루를 한 겹씩 놓고 김이 한참 오를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어. 마침내 조심스레 시루 위의 뚜껑을 들어 올리면 어느새 하얀 쌀가루는 쫄깃하고 맛있는 떡으로 변해 있었어.
시루에서 갓 쪄낸 인절미를 떡메로 쳐서 떡판에 밀대로 밀어 둥글납작하게 자르거나, 긴 네모꼴로 잘라서 참기름을 칠해 인절미를 만들면 아이들은 군침부터 삼켰어. 어쩌다 어머니가 장만하던 떡 한 조각을 떼 주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끝내 그 곁을 떠나지 못했어. 뿐만 아니라 시루 옆에 김이 새지 못하도록 붙였던 쌀가루와 시루 안에 붙은 떡을 긁으면 누나도 동생도 덩달아 숟가락을 들고 나섰지.
겨울철이면 구들 아랫목 화로에 둘러 앉아 오순도순 고구마나 알밤을 구워먹기도 했지만, 때로는 먹다 남은 된장국이나 식은 죽을 덥히거나 놋그릇에 엉긴 조청을 녹여 먹기도 했어. 또 더러는 부스럼에 붙이는 고약을 눅이기도 했고.
낮에는 각종 농사일, 길쌈 등에 시간을 보내고 저녁나절엔 짚을 추려 적당한 물을 뿌리고 짚이 눅눅해지길 기다렸다가, 일찌감치 저녁을 먹은 동네 처자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짚단을 들고 한자리에 모였지. 호롱불 아래 새끼를 꼬며 온 마을 소식을 한꺼번에 쏟아가며 정을 나누던 시절이었어. 처자들은 간식으로 삶은 고구마에 김치가닥을 걸쳐 먹거나 제사상에 올리고 남은 자투리 음식으로 허기를 달래곤 했어. 그러다 늦은 밤 그미들이 살그머니 돌아가면 잠귀 밝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벌써부터 새벽일을 시작했지.
정월 그믐이면 집집마다 말려 둔 쑥을 삶아 찹쌀 듬뿍 넣어 콩고물 묻혀 떡을 만들었어. 집집마다 같은 떡일지라도 서로 나눠 먹었어. 아이들도 정월 보름날 조리 들고 오곡밥 얻어 나르듯, 쑥떡을 얻어 모아놓고 친구들과 나눠 먹곤 했지. 섣달에 들어서면 찹쌀 담가 고두밥 쪄 소금물에 헹궈 말려두었다가 가마솥에다 볶으면 튀밥들이 하얗게 꽃처럼 일어났어. 이것으로 강정을 묻혀 유과는 물론 정과에 약과도 만들어 먹었어. 한편 곶감과 엿, 강정 등은 아이들 눈을 피해 광속이나 다른 곳에 꼭꼭 숨겨두었지. 두고두고 먹어야 했으니까.
너나없이 허기로 지치는 춘궁기에는 쑥을 캐러 다녔어.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이른 봄날 댕기머리 처녀나 어린 계집아이들이 봄 마중하며 재미로 캐는 쑥이라면 풍경도 좋고 뿌리에 묻은 흙냄새도 상큼하지만, 양식으로 캐는 쑥은 참담한 기분에 가슴이 미어져 한숨만 나왔어.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저 손을 놀리지 않고 부지런히 캘 따름이었어. 그러다 해가 넘어가면 고개가 오므라지게 보퉁이를 이고 마을로 돌아왔어.
가을 벼 수확이 끝나면 얼마 남지 않은 양식에 목을 매고, 하루 두어 끼니 죽으로 연명 하던 보리 흉년엔 많이들 죽었지. 조금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문간에 가마솥을 걸고 멀건 갱죽이나마 끓여 걸식에 나선 사람들에게 바가지로 퍼 담아 주기도 했어. 처마 끝에 잇대어 늘여 지은 집에 차마 버리지 못해 쌓아둔 보릿단은 그냥 썩고 있었어. 붉은 곰팡이가 핀 것도 모자라 싹이 길게 자랐지. 그 중 나은 것을 골라 솥에서 말려 겨우 곡기라도 때울라치면 어린 아이들은 배불뚝이가 되어 온 몸에 피부병이 돋았어.
있는 힘을 다해 캐 낸 쑥으로 개떡을 찌거나 쑥과 쌀을 반반 섞어 밥을 해먹는 것은 호강에 겨운 일이었어. 그리고 밀가루에 버무려 범벅을 하는 것도 그나마 나았어. 쑥을 냄비에 넣고 싸라기 몇 줌 섞어 얼굴이 비치게 말간 죽을 쑤어 먹거나, 아니면 쑥만을 끓여 배고플 때 속이나 다스려 주는 경우가 태반이었으니까. 또 쑥에다 기장과 조를 넣어 송기를 치대어 뭉쳐 먹기도 했어. 쑥은 사람의 속을 편하게 해 줘서 밥에는 비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허기를 달래는 데는 제일이었어.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쑥을 한 번에 다 먹지 않고 말려두었어. 이윽고 쑥마저도 캘 수 없게 되는 날이 곧 닥치기 때문이었지.
쑥 못지않게 요긴한 식량으로는 송기가 있었어. 소나무 어린 가지의 겉껍데기를 벗겨 내고, 허옇게 드러난 속껍질을 찬찬히 벗긴 것을 삶아 방망이로 두드려 밥을 지어 먹거나 밀가루를 섞어 솥에 쪄먹었어. 그럴 형편도 안 되면 그냥 멀뚱하게 죽을 쑤어 먹기도 했지. 그래서 소나무가 있는 산이면 무시로 나무껍질 벗기는 사람들로 들어찼어. 사람들은 황망한 소나무에 묵묵히 칼을 그어 헤집어 떼 낸 속살로 헛헛한 속을 달랬지. 나무들은 하루가 다르게 벌거벗기어 무참해졌어. 그래서 멀리서 보면 온 산이 희었어. 채워지지 않는 허한 뱃속마냥 그렇게.
허허, 그 시절엔 그랬어, 그랬었지.
장승부
포항문예아카데미 수료(1999)
<<포항문학>> 수필부문 신인상(2001)
포항문인협회 회원
포항문예아카데미 총동창회 초대회장
특별회원 리태근
1950년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현 와룡산골 빈농 가정에서 출생
길림임업학원 중문학부 졸업
<<연변의학>> 잡지사 총편집 역임
<<연변일보>> 단편소설 <풍파>로 등단
<<연변문예>>·<<도라지>>·<<송화강>> 등 잡지에 단편소설 수십 편 발표
<할미꽃 피는 고향>이 도라지문학상 수상
문학집 <<톱질영감과 매돌 어머니>> 출간
수필집 <<깨어진 고향의 반쪽 얼굴>>(문경출판사, 2010) 한국 출간
문학집 <<어머님의 휘파람소리>> 출간
<<깨어진 고향의 반쪽 얼굴>>이 연변문학·윤동주문학상 본상 수상
<<두만강>> 신문사·두만강병원 사장, 연변작가협회 회원
http://blog.daum.net/litaigen8
개구리 합창단
밥술을 놓기 바쁘게 외양간에 모여들었다. 생산대에서 문예연습을 할 만한 장소가 없다보니 키꼴이 천정에 대이는 소외양간 소똥을 쳐내고 연습장소로 정하고 매일 저녁마다 즐겁게 모여들었다. 전 향1)에서 처음으로 조직하는 농촌문예경색대회2)라 만단의 준비를 빈틈없이 잘해야 한단다. 기껏 골을 동이고3) 연구하고 짜냈다는 절목4)이래야 몇 개 밖에 없었다. 모 주석5)을 노래하는 절목은 첫 번째로 앞장에 놓아야하기에 곤륜산을 노래하는 칠언 율시에 곡을 붙인 노래를 대합창으로 연습하였다. 악기래야 김빠진 고무풍선마냥 말 방귀를 끼는 손풍금 한 대 밖에 없었다. 악기가 없으면 뭐라 하는가. 외양간이 떠나갈듯 목청껏 외칠 때면 무조건 일등은 떼놓은 당상이라 높아가는 청춘의 정열에 산촌의 밤이 깊어 가는 줄 몰랐다. 생산대에서도 우리들을 고무격려 하느라고 일등만 하면 개를 잡아준다고 장담했다.
그런데 정작 연습을 시작하던 첫날에 처녀들이 소똥냄새가 더럽다고 코를 싸쥐고 도무지 연습하려고 하지 않았다. 날씨는 춥지 날자는 아득빠득 다가오는데 한지에 나앉아서 연습할 수는 없지 않는가. 금년은 왕년과 달라서 모 주석의 탄신 80주년을 기념해서 12월 달에(모주석이 탄생한 날은 12월 26일이었다.) 전현6)의 농촌문예경색대회를 열기 때문에 언제 장소를 가리고 날짜를 미룰 시간조차 없단다. 위대한 모택동이 공농 홍군7)을 거느리고 2만5천 리 장정8)을 걸어온 노고에 비하면 지금이 얼마나 행복한가. 무산계급9) 혁명정신으로 문예 연습을 대하며 결사적인 정신으로 백 일 전투를 해서 무조건 일등을 쟁취하잔다.
농촌문예선대10)라고 깔보지 말고 치열한 계급투쟁의 제일선으로 삼고서 열심히 연습하란다. 그런데 원체 모두들 한평생 소 궁둥이를 두드릴 팔자가 되어서 그런가. 아무리 발성 연습을 시켜도 올챙이가 개구리로 되기는 백번도 틀렸단다. 입만 벌리면 꽹과리 두드리는 소리, 당나귀 투레질 하는 소리, 새벽닭이 잠꼬대하는 소리마냥 소리도 각각 얼굴도 각각이라 아무리 올려 세우고 내리 맞춰도 목소리를 도무지 아름답고 우아한 고급합창단의 목소리를 만들아 낼 수가 없었다. 선전대의 배열은 전통방식 그대로 여자들을 앞줄에 세웠다. 그때 우리 생산대의 청년들은 전 향진11)에서 제일 끌끌했다. 처녀들이 저마다 달님 같은 복덩이인양 인물도 고와서 인근 생산대의 총각들이 군침을 겔겔 흘리었단다. 그런데 뚱단지 같은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인간관계가 대단히 복잡해졌단다. 무산계급 정치사상을 선전하는 선전대에 아무나 참가시켜서는 안 된단다.
마을의 간판 꾀꼴새12)라고 불리는 분님이를 독창가수로 선발한 게 잘못되었단다. 분님이 아버지 촤창수를 누가 고발했는지 역사반혁명분자로 여지없이 비판했다. 아무리 노래를 잘 부르고 인물이 곱다고 한들 잡귀신이 딸 분님이를 그냥 선전대에 참가 시키는 것이 옳은가? 아버지가 잡귀신이면 자식들도 무조건 잡귀신이라는 편견을 없애야 하지 않는가. 논쟁은 끝이 없었다. 생산대의 맨발 의사인 동화는 노래는 잘하는데 외지에서 이사 올 때 공청단원13)이 아닌데 공청단원이라고 조직을 기만한 게 문제란다 … 그 외도 춘세와 만춘이는 꼬리 없는 소라고 불리지만 생산대의 계급투쟁에 전혀 상관하지 않는 ‘정치불문14)’이라 선전대에 참가할 자격이 없단다. 이렇게 끝이 없이 따지게 되자 선전대 대장인 나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말로는 형님들이 항미원조15)를 간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이 문제란다. 더구나 한참 내부에서 북한을 수정주의16)라고 비판하는 때에 선전대 대장이란 중임을 맡기는 게 옳은가? 이처럼 출신 성분이 명확하지 못한 청년들로 묶어진 선전대가 사원들의 말밥17)에 올라서 쟁론이 끝이 없었다.
그뿐인가 만복이와 순녀는 금방 연애를 시작하는데 말광대 같은 순녀는 인물이 그닥잖다18)고 합창단에서 빼버렸다고 만복이가 앙심을 품고 나의 역사배경19)을 걸고들어서 애를 먹었다. 그 외도 제일 골치 아픈 게 선전대 단체복이었다. 해마다 한 공수20)에 마이나스 8전도 못가서 ‘우표생안대21)’라고 소문났다. 째지게 가난하던 생산대에서 집체복22)을 해준다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였다 처녀들은 그런대로 아주머니들이 시집올 때 해 입은 꼬리치마23)를 얼기설기 맞춰서 그런대로 넘어갈 수 있는데 남자들이 똑같은 중산복24)을 갖춘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무대에 오르기 전날 마지막으로 사원들 앞에서 회보연출25)을 하게 되었다. 아무 때도 남자들만 불쌍했다. 꿔온 보리자루인가 한평생 얼굴에 크림 한 점 바르지 못했다. 그래도 처녀들은 어디서 났는지 눅거리26) 크림과 연지곤지를 두텁게 바르고 눈썹은 도룡27)이 없으니 성냥가지를 태워서 숯검댕이로 까맣게 칠한 게 송아지 잡아먹은 물귀신으로 만들었다.
연출은 생각밖에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선전대가 어물쩍하게 연출을 잘하자 대장은 큰맘 먹고 한턱 쏜다고 야단이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제일 가슴 아픈 게 아무리 굶어죽게 되였어도 사진 한 장은 꼭 남겼어야 했는데 밤낮으로 죽게 연습 한 게 수포로 돌아갔단다. 연출은 나무랄 데 없는데 선전대 대원들이 성분이 불안해서 현문예대회28)에까지 참가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렇게 벼르던 개 잡이는 말한 대로 했는데 일등을 못했다고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하고 말았다. 비록 현문예대회에는 못 참가했지만 사원들이 한결같은 요청으로 해마다 생산대의 연말 총결29)을 할 때면 온 돌출30)을 하고 모내기가 끝나면 전간31)에서 회보연출도 했단다. 사원들은 아무 때나 부르면 연출 할 수 있는 선전대를 ‘외양간 선전대’, ‘개구리 합창단’이라고 친절하게 불렀다. 개구리합창단! 얼마나 호매로운32) 이름인가. 나는 매번 고향에 갈 때마다 집체 외양간 자리에 멍하고 서서 아름다운 상상에 잠기곤 한다. 시끌벅적했던 어제 날을 새삼스레 그려볼 때 마다 인생이 너무 짧다는 자비감33)에 모대긴다34).
선전대의 간판이자 꾀꼴새 분님이는 어디로 시집갔는지. 쏠로로 유명했던 맨발의사 동화는 외지로 이사 간 후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갑자기 앓다가 죽었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그럴 줄 알았으면 생전에 언녕35) 만나보는 건데 …. 살다보면 별나게 잘살지도 못하면서 항상 세월에 쫓기어서 고향사람끼리도 자주만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리운 대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손곱아 헤어보면 어째서 거의 다 제명을 못살고 죽었을까. 시골사람들의 운명은 짧기도 하다. 항상 키가 구척이라 날마다 외양간 대들보에 박치기를 하던 춘세와 순녀, 만춘이는 앓는다는 소문도 없이 갑자기 요절했단다. 그리고 용광로 주물에 찍어낸 것처럼 인물이 똑같아서 동네방네 소문 놓던 마 씨네 쌍둥이형제 넷은 왜서 60도 못 넘기고 몽땅 저세상 사람이 되었을까? 백년도 못살고 요절한 개구리합창단 노래 소리가 지금도 귀가에 쟁쟁하다. 세상에 태어났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른 개구리합창단 노래 소리를 녹음해 두지 못한 게 한스럽다. 역사의 바퀴를 되돌릴 수 있다면 개구리합창단을 멋지게 꾸려서 세계무대에 떳떳이 내세우련만 아쉽게도 인생은 왕복차비를 주지 않는단다. 한없이 순박하고 인자했던 얼굴들을 역사에 남기지 못한 게 모두다 선전대 대장 나의 불찰입니다.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연변을 들썽하는 멋진 개구리합창단을 만들 수 있었겠는데….
아! 세월이 갈수록 한없이 그리운 내 사랑 개구리합창단이여….
(2009.4.25.)
1)전 향: 향(鄕) 전체
2)농촌문예경색대회: 농촌문예경진대회
3)골을 동이고: 머리를 싸매고
4)절목: 절목(節目). 프로그램
5)모 주석: 모택동 주석
6)전현: 현(縣) 전체
7)공농 홍군: 노동자, 농민 홍군
8)장정: 장정(長征). 1934∼1935년 중국 공산당군(홍군(紅軍))이 장시성(江西省) 루이진(瑞金)에서 산시성(陝西省)의 북부까지 국민당군과 전투를 하면서 1만 2,000km를 걸어서 이동한 행군.
9)무산계급: 노동자, 농민 계급. 프롤레타리아 계급
10)농촌문예선대: 농촌문예선발대
11)전 향진: 모든 향(鄕)과 진(鎭)
12)꾀꼴새: 꾀꼬리
13)공청단원: 공장노동자 청년 단원?
14)정치불문: 정치불문(政治不問). 정치적 무관심
15)항미원조: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 중국에서 한국전쟁을 일컫는 말.
16)수정주의: 수정주의(修正主義) 외교 정책. 1966년 북한이 중국 편향 외교 정책에서 중·소 중립 외교로, 1971년 중·소 치중 외교 정책에서 벗어나 제3세계와 외교관계를 맺은 외교 정책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17)말밥: ‘구설수’
18)그닥잖다: 그리 대단하지 아니하다.
그다지 좋지 않다.
19)역사배경: 집안 내력
20)공수:?
21)우표생안대:?
22)집체복: 단체복
23)꼬리치마: 풀치마. 양쪽으로 선단이 있어 둘러 입게 만든 치마. 전통적인 한복 치마.
24)중산복: 중국의 국부, 중산(中山) 쑨원(孫文)이 고안한 옷. 인민복.
25)회보연출: 회보연출(回報演出)? 연습 뒤의 연주?
26)눅거리: ‘싸구려 물건’을 일컫는 북한말
27)도룡: 도룡(圖龍)?. 눈썹 그리는 먹, 눈썹 그리는 연필, 마스카라
28)현문예대회: 현 문예경진대회
29)총결: 총결(總結). 총 결산
30)돌출: 튀어나옴
31)전간: 전간(田間). 전답 가운데서, 들판
32)호매로운: 호매(豪邁)한, 씩씩한
33)자비감: 자비감(自悲感)? 절로 드는 슬픔?
34)모대긴다: 괴롭거나 안타깝거나 하여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움직이다.
35)언녕: ‘진작’(좀 더 일찍이)의 사투리
*현재 중국의 행정구획은 크게 성급(省級), 지급(地級), 현급(縣級)으로 나눌 수 있다. 성급은 성, 자치구, 직할시, 특별행정구를 포괄한다. 지급은 지구(地區), 자치주, 지급시(地級市), 맹(盟)으로 구분되며, 현급은 현(縣), 자치현, 직할시, 현급시(縣級市), 기(旗), 자치기(自治旗), 특구(特區), 임구(林區)를 포괄한다. 그리고 현과 자치현 아래에 지방 3급 행정단위인 향(鄕)과 진(鎭)을 두고 있다. 자치구를 비롯한 자치주, 자치현은 모두 소수민족의 자치 행정단위이며, 맹과 기는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에만 있는 행정단위이다(네이버).
20)공수:?
21)우표생안대:?
25)회보연출(回報演出)?
27)도룡(圖龍)?
33)자비감: 자비감(自悲感)?
첫댓글 윤미애님이 순서에서 빠졌군요... ^^*
이순영 신인상 2006 입니다~^^
이국장님 수정했습니다 :))
수고하십니다~제 사진 교체 부탁드립니다.
교체했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