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 시인 2

[최병무]

초토(焦土)의 시 / 구상 (1919`2004)

- 적군 묘지 앞에서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언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 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져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욱 신비스러운 것이로다.

이 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30 리면

가로 막히고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금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어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으로 흘러 가고,

어디서 울려 오는 포성(砲聲)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꽃자리 / 구상 (1919~2004)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고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고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묶여 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풀꽃과 더불어 / 구상 (1919~2004)

아파트 베란다

난초가 죽고 난 화분에

잡초가 제풀에 돋아서

흰 고물 같은 꽃을 피웠다.

저 미미한 풀 한 포기가

영원 속의 이 시간을 차지하여

무한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여

한 떨기 꽃을 피웠다는 사실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기하기 그지 없다.

하기사 나란 존재가 역시

영원 속의 이 시간을 차지하며

무한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며

저 풀꽃과 마주한다는 사실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묘하기 그지 없다.

곰곰 그 일들을 생각하다 나는

그만 나란 존재에서 벗어나

그 풀꽃과 더불어

영원과 무한의 한 표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부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사랑으로

여기 여기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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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구상 시인의 우정 이야기

구상 시인의 문학 외적인 부분에 대통령 박정희가 있다.

구상 시인이 문단에서 대통령 박정희와 각별한 우정을 나눈

친구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의 인연은 박정희가 역사에 등장하기 이전 1950년대

부터 시작된다. 두 사람의 인연과 우정의 세월은 반세기를

헤아린다.​ 대통령 박정희의 카리스마와 시인은 걸맞지 않은

느낌을 주지만, 박정희와 교유한 문인은 이밖에도 김팔봉,

이병주, 장덕조 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인들과의 만남은 6.25전쟁이라는 국가적 고난이 맺어준

인연이다. ​박정희는 피란지 대구에 옮겨 와 있던 육군본부의

작전국 장교로 복무하고 있었고, 거기에 모여 있던 각계각층의

인사들 중 언론에 종사하는 문인들, 특히 종군기자들과의

만남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종군기자단장이

구상이었다. 구상은 서울에서 태어나 원산 근처 덕원으로

이주해서 해방 후 작품활동을 하다가 작품성향 때문에 

반체제분자로 몰려 월남을 했고, 피란지 대구에서 국방부

신문인 승리일보의 주간으로 종군하면서 두 살 위의

젊은 장교 박정희를 만나게 된다.​ 대구는 박정희에게 인연이

깊은 곳이다. 전란의 와중에 옥천 색시 육영수와 결혼을

한 곳이 대구였고, 거기서 장녀 근혜가 태어났다.

대구 삼덕동의 셋집에는 장모와 처제가 함께 살았다.​

처음 박정희를 구상에게 소개한 사람은 이용문 준장이다.

박정희는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으로 계급은 소령

이었고, 이용문 준장이 정보국장이었다. 이용문은 구상에게

박정희를 대면시키며 '의리의 남아' 라는 한마디 말로 소개를

했다.​ 구상에 눈에 비친 박정희, 이 날카롭고 고독한 눈매의

조그맣고 새까만 남자는 플라톤의 <국가론>, <월남흥망사>를

탐독하는 등 지적 탐구심이 강했으며, 민족주의 성향의

투철한 국가관을 지니고 있었다. 박정희 역시 처음 만난

구상에게 인간적 매력을 느꼈다. ​

둘은 전쟁의 비극과 가난, 허무를 술로 달래고, 또 맵디 매운

선지 따로국밥으로 해장을 하며 수시로 어울렸다. 만나면

조국과 인생을 담론하며 의기투합으로 가장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둘은 조국의 현실을 개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역사의 고난을 벗어날 수 있는지를 뜨겁게

이야기했다.​ 군인과 문인으로선 먼발치에서 서로를 존경하는

반면, 강한 역사의식과 현실참여의 행동주의로 밀착되어 

있었고, 이후 고난과 모험에 과감히 자신을 던지게 된다.

구상에게 닥친 고난은 정치적 사건이다. 자유당 정권 시절

그는 정치적 사건으로 15년 구형을 받고는 "사형 아니면

무죄를 달라" 요구하여 재판부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아낸다.

死生觀이 투철한 면에서 군인 박정희에 못지 않은 행동주의

시인의 강골이다. 둘은 박정희가 전후방으로 복무지를 옮겨

다님에 따라 멀리 떨어져 지낼수밖에 없었지만, 구상은

박정희가 제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당해 다시 대구로 와

있을 때 함께 어울려 우정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때 박정희는

직할 병력이 1개 소대도 안 되는 제2군 사령부의 부사령관

으로서 전군을 상대로 혁명군을 조직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군사혁명이 일어나자, 구상은 친구 거사가 성공

했음을 알고 주저없이 이를 구국운동으로 받아들였다.

"4.19후의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어. 학생들은 몽둥이를 들고

의정단상을 점령하고, 맨손 맨발로 휴전선을 넘어 북한을

해방하겠다고 난리고 난장판이었지" 시인은 말했다.

​혁명의 돌개바람 속에서 4.19혁명의 주체인 학생 세력은

5.16혁명의 군인으로 국가의 주체가 교체되었다.​

혁명 거사 사흘 후인 5월 19일, 박정희는 경향신문 논설위원

으로 있던 구상을 만나 현실을 함께 하자며 국정 참여를

요청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고문을 맡아 달라고 했다.​

"나를 그냥 남산골 샌님으로 그대로 놔두세요"​

"어떤 분야라도 짐을 져 주셔야죠!"​ 박정희는 최고회의 건물에

친구 구상의 사무실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구상은

박정희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정희는 김팔봉 등

주변 사람들에게 구상을 붙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김팔봉도 박정희와 서로 인간적 면모에 반해 교분을 나누었던

사이였다.​ 그러나 구상은 경향신문 도쿄지국장을 자청해서

국내를 떠나버렸다. 박정희는 친구의 맑은 고집을 꺽을 수

없음을 알기때문에 그후 똑같은 말을 두 번 꺼내지 않았다.

딱 한번으로 끝이었다.​ 박정희의 집권 기간 내내 구상은

멀리 친구로만 떨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박정희는 구상에게

너나들이 친구였으며, 구상 또한 남들처럼 고개 조아리고

'대통령 각하'를 존칭하는 일도 없었고, 박정희도 그걸

원치 않았다. 구상은 박정희를 官에 나가 있다는 이유로

'박첨지' 라고 불렀다 한다. 1974년 유신체제의 긴장과 불안

속에 문학평론가 임헌영, 소설가 이호철 등 문학인들이 

간첩 협의로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구상은 대통령과의 

친분을 의식한 주변의 우려에 아랑곳하지 않고 의연히 법정에 

증언으로 출두해 이들의 무죄를 설득력 있게 증언해 주어 

문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리고 1979년 9월, 정치적

저항과 혼란이 심해지자 구상은 친구의 외로운 처지를

근심하다 청와대로 찾아갔다.​

"이제 임자가 물러날 때가 된 것 같소" 은퇴를 권유했다.

박정희의 대답은 고뇌 어린 침묵뿐이었다. 묵묵히 현관까지

배웅을 하던 박정희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한 달 뒤

박정희가 세상을 하직하자, 그는 먼저 간 친구를 위해

鎭魂祝을 썼다.

국민으로서는 열여덟 해나 받든 지도자요

개인으로는 서른 해나 된 오랜 친구

하느님! 하찮은 저의 축원이오나

인류의 속죄양, 예수의 이름으로 비오니

그의 영혼이 당신 안에 고이 쉬게 하소서.

이 세상에서 그가 지니고 떨쳤던

그 장한 의기와 행동력과 질박한 인간성과

이 나라 이 겨례에 그가 남긴 바

그 크고 많은 공덕의 자취를 헤아리시고

하느님, 그지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

설령 그가 당신 뜻에 어긋난 잘못이 있었거나

그 스스로가 깨닫지 못한 허물이 있었더라도

그가 앞장서 애쓰며 흘린 땀과

그가 마침내 무참히 흘린 피를 굽어보사

그의 영혼이 당신 안에 길이 살게 하소서.

하느님 앞에 친구를 보내는 우정과 사랑과 용서의 기원이다.

그리고 뭇사람이 저 세상의 친구에게 온갖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

것을 보면서 구상은 5년 동안 안식을 기원하는 가톨릭 미사를

올렸다. 친구의 제사를 지내준 것이다.

그후 그는 거주지인 여의도 서민아파트에서 친구가 이룩한

'한강의 기적'을 내려다보며 우정을 홀로 새김질하다 2004년 봄과

여름이 갈마드는 5월, 저만치 다가올 채비를 마친 여름은 이제

자기 몫이 아니라는 듯, 그는 가는 봄을 따라 훌훌 먼 길을 떠났다.​

시인 구상과 대통령 박정희는 격동의 근대사 한복판에 함께

위치하고 있다. 우국의 충정으로 의기투합했던 시인과 대통령은

슬픈 가족사를 지녔다는 점에서도 이들은 비슷했다.

박정희가 부인 육영수를 먼저 잃었듯이, 구상도 부인을 먼저 잃고

외로운 말년을 보냈다. 뿐만 아니라 구상은 두아들마저 병으로

잃은 데다 그 자신도 투병생활을 하는 남다른 불행을 한몸에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남의 불행을 더 챙기는 삶을 살았다.

전란기에는 갈 곳 없는 상이군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고,

잔정이 많아 주변의 가난한 시인들을 힘 닿는 대로 도왔으며,

나라의 벼슬은 사양했지만 시단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기저기 얼굴 내밀기를 서슴치 않았다. 그런 그에게 평생

따라다닌 것이 있으니 그게 바로 폐결핵, 가난의 병이었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투병하던 그가,

17평짜리 구형 아파트에서만 30년을 살아온 그가 장애인

문학지를 돕기 위해 2억원을 보내주어 주위를 숙연케 했으며,

그렇게 훌훌 털어주고 그 자신은 가난의 병을 가지고 아내와

두 아들이 기다리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박정희가 눈에 띄는 대로 서민들의 아픔을 챙기고 거기에 자신의

권력을 대입하여 그들을 손잡아 일으키며 눈물을 지었듯이,

시인과 대통령은 고난의 친구들이었다는 점에서도 같았다.

재물에 관심이 없는 청렴한 삶도 그들은 같이 살았다. ​

시인은 말한다. "마음이 가는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 시 <오늘> 중에서)

구상은 기교를 배제한 간결한 시어에 풍부한 의미와 암시를

담아냈다. 박정희는 일체의 정치적 수사가 없이 요점을 딱딱 집어

말하는 어법을 구사했다.​ 구상은 친구 박정희를 이렇게 말한다.

"의협심과 인정이 강하고 詩心이 있는 사람이었다."

"난세에 파격적인 인물들을 모아서 혁명을 일으킨 뒤에 정상적인

사람들로 주변을 교체해 가는 과정에서 갈등도 많았지만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람을 죽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시인과 대통령의 우정은 둘이 나눈 30년, 홀로 남아 새긴 20년을

합해서 반세기의 세월이었다. 대통령 박정희가 먼저 떠나고

시인 구상이 뒤따라 먼 길을 떠나던 날, 한 여성이 그의 영전에

와서 머리를 숙였다. "아버님의 오랜 친구이시자 저에게는

정신적인 선생님이십니다" 머리를 깊이 숙인 그는 친구의 딸,

박근혜였다.

/ 김인만 <임자 막걸리 한잔하세>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