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미화랑 개관
영운(潁雲) 김용진(金容鎭) 특별전
영운 김용진은 한국 근현대기의 서화가로, 이도영과 방락에게 서화를 배웠고 민영익의 화풍을 사숙했다. 그는 중국 해상화파 화가들이 구사한 신문인화풍의 문인화훼화를 주로 제작했으며, 민영익 화풍의 영향을 받은 묵란과 묵죽도 그렸다. 김용진은 광복 후에 금란묵회의 주축으로 활동했다.
생애
김용진(金容鎭)은 한국 근현대기의 서화가로, 그의 자는 성구(聖九), 호는 영운(潁雲), 구룡산인(九龍山人), 한인(恨人), 향석(香石), 예정(藝庭), 과정(果庭), 중서(中栖), 여금(侶琴), 여란(侶蘭), 회오(悔吾), 금도인(琴道人), 노선생(老先生), 당호(堂號)는 창패실(蒼佩室), 미산석장(嵋山石莊), 석고연재(石皷硏齋), 인향각주인(紉香閣主人), 천수매관(千樹梅館) 등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그는 1878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김용진의 생부는 특진관(特進官)을 지낸 김흥규(金興圭)이고 생모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외손녀이자 고종(高宗)의 누이의 딸인 정부인(貞夫人) 임천조씨(林川趙氏)이다. 김용진은 후사가 없던 당숙 김정규(金貞圭)의 양자가 되었다. 김용진은 1891년에 은진송씨(恩津宋氏)와 혼인했다.
김용진은 지운영(池雲英)에게 한학을 배웠고, 1896년에는 한성 영어학원을 수료했다. 그는 1899년에 황태자의 세마(洗馬)로 관직생활을 시작했고, 수원군수(水原郡守), 내부지방국장, 동지돈녕원사(同知敦寧院事) 등을 역임하다가 한일합병 이후 관직에서 물러났다. 김용진은 이후 애국계몽단체인 대한협회(大韓協會)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서 활동했고, '마지막 문인'의 자세를 지향하며 서화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그는 고종의 국상 이후에 거문고 취미를 끊고 '금도인'이라는 호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등 모범적인 문인의 자세를 보였다고 전한다.
1905년부터 서화 활동을 시작한 김용진은 1920년부터 이도영(李道榮)에게 그림을 배웠고, 1926년에 청(淸)나라 서화가 오창석(吳昌碩)의 문인인 방락(方洛)에게 오창석의 서법과 화풍를 전수받았다. 김용진은 1921년부터 서화협회(書畵協會)에서 활동했고, 제1회부터 제10회 서화협회전람회(書畵協會展覽會)까지 지속적으로 서예 작품과 문인화를 출품했다. 그는 이외에도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와 여러 단체전을 통해 작품을 선보였다.
김용진은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의 제1부 위원을 지냈으며, 중일전쟁 이후 일본군 위문용 부채그림을 다수 제작하여 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와 조선총독부에 헌납했다.
광복 이후 김용진은 1946년에 결성된 서화동호인 모임인 대동한묵회(大東翰墨)에 참여했고, 1953년에는 금란묵회(金蘭墨會)를 결성하여 주축으로 활동했다. 금란묵회는 1960년대 후반까지 유지되었다. 김용진은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大韓民國美術展覽會)부터 제6회까지 서예부의 심사위원을 지냈고, 1965년에 고문을 맡기도 했다. 그는 1956년에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으며, 같은 해에 동방연서회(東方硏書會) 회장을 지냈다. 김용진은 1968년에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작품 활동
김용진은 일제강점기에 서화협회전람회, 조선미술전람회, 이묵회전(以墨會展), 문인서도연구회전, 조선남화연맹전(朝鮮南畵聯盟展) 등에 작품을 출품했다. 그는 1922년 제1회 조선미전에서 '묵란'(墨蘭, 1922)과 '해서'로 입선했고, 이후 제2회와 제3회에도 각각 '묵란'(墨蘭, 1923)과 '국화'로 입선했다. 광복 후에 김용진은 그가 활동했던 대동한묵회와 금란묵회의 전람회에 참여했다. 또한 1958년에는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팔질 송수전(八耋 頌壽展)을 개최했으며, 1964년에는 한국일보(韓國日報) 주최로 '영운 김용진 문인화 송수전'을 개최했다.
김용진은 과일과 화훼, 사군자를 소재로 한 담채(淡彩)의 수묵채색화를 주로 그렸다. 김용진 작품의 소재와 화풍은 당시 오창석과 같은 상하이(上海) 화단의 해상화파(海上畵派)가 구사한 신문인화풍(新文人畵風)의 영향을 보여준다. 다만 김용진의 화풍은 해상화파의 화풍에 기반을 두면서도 좀더 화면의 평면성을 강조하고 의도적으로 고졸함과 아마추어적인 느낌을 낸 경향이 있다. 김용진은 방락으로부터 화풍을 전수받은 192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신문인화풍을 구사하긴 했지만, 조선미전 입선작들을 통해서 그가 방락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상하이 화단의 화풍에 관심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금란묵회 회원들은 김용진 화풍의 영향을 받은 화훼화를 많이 제작했다.
김용진의 사군자화 중에는 민영익(閔泳翊)의 운미(芸楣)화풍이 두드러진 작품들이 있다. 김용진이 제2회 조선미전에 출품한 '묵란'도 민영익의 운미란(芸楣蘭)과 유사한 특징을 지닌다. 서화 수장가이기도 했던 김용진은 민영익의 난 그림과 대나무 그림도 소장하고 있었으며, 민영익의 화풍을 스스로 공부하기도 했다.
김용진은 서예 작품으로 안진경체(顔眞卿體)의 해서(楷書)와 예서(隸書), 행서(行書)를 주로 썼다.
김용진은 한국 근현대 화단에 해상화파의 문인화훼화와 민영익의 운미화풍을 정착시켰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의를 지닌다. 또한 그는 금란묵회가 서예와 사군자의 대중화를 시도했다는 의의를 지닌 단체라는 점에서 현대 묵회문화의 중심 인물로서 중요성을 지닌다.
ㅡ 지식백과
🎨
2023. 12. 5
인사동 소미화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