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에서 머리를 다듬고 가족을 만나서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머리 한다더니 왜 미용실이 문 닫았더냐 킬킬대며 아이스크림이랑 체리를 사들고 더 비가 거세지기 전에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어요. 어둠 속 비는 투둑투둑 내리고 새 머리는 제법 마음에 들고 색색의 네온이 땅에 고인 빗물에 담겨 핸드폰 판매점의 쿵쿵대는 비트와 함께 일렁이는데 신호등 앞에 선 나는 어떤 영화의 한장면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붕 떠있었어요.
한순간 주변의 모든것이 흐릿해졌어요. 맞은편에 서 있는 사람. 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꽂고 다른 손으로 들고 있는 우산에 빗방울이 튕기는 그의 실루엣만 또렷했어요 후루룩하고 가슴이 불에 덴 듯 아려왔어요. 딱 그 정도의 체형과 키. 검은색 라운드 넥 면 티에 잘 맞는 검은 바지 검은색 베이스볼 캡, 그리고 컨버스에 검은 우산.
무례하지 않으려 해도 나도 모르게 어쩔 수 없이 마스크 위로 빛나는 그의 눈을 뚫어지게 보았을 거예요 그도 눈을 피하지 않고 지나쳐 가는 동안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던걸 보면.
어둑한 저녁시간 퍼붓는 빗 속에서 혼잡한 건널목을 1 초간 스쳐 지난다 해도 나는 성우님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거라고 항상 확신했었어요. 한번쯤은 우연히 마주칠거라고 여러 번 상상했거든요. 그런데 그 순간이 오자 너무나 두려웠어요. 갑자기 말이 없어진 나를 느끼고 상황을 파악하려던 혈육이 스쳐 지나가는 그를 보고 나즈막히 읊조렸어요. 엄청 닮았네...
저 정도면 숨겨놓은 형제다/ 어차피 너를 모르는데 왜 그렇게 씨게 쪼냐 귀신 본 줄 알았다/ 그래도 미용실에서 오면서 만나 다행이다 진짜 갈때 만났으면 어쩔 뻔 했냐/ 오며 만나나 가며 만나나 어차피 와꾸에 큰 차이는 없다/ 하긴 창범이 형도 없이 여길 이 저녁에 혼자 뭐하러 오겠냐/ 암튼 우리 앞으로도 들키지 말고 잘 숨어 댕기자/
그리곤 시덥잖은 낄낄거림 후에 나는 어쩐지 목구멍이 간지러워져서 <당신에게로>를 큰소리로 부르기 시작했어요. 얼마나 반가울까 우리 다시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다시 만나면 우리 다시 만나면 헤어지지 말아요
비가 쏟아지는 텅 빈 아파트 단지에서 마치 불 꺼진 어두운 무대 위 애절한 피맛골 연가 뮤지컬 여주인공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