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글탱글 추 돌아가는 소리가 한여름 장대비처럼 요란하다. 답답한 마음을 일시에 풀어주려는 것처럼 시원하게 속도를 낸다. 잠시 후 불을 줄이니 그제야 쌀 익는 냄새가 퍼진다. 구수한 냄새에 새벽녘 찬 기운이 살짝 기가 꺾인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단짝 친구와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했다. 연탄아궁이가 방문 바로 아래 있는 집이었다. 아궁이 뚜껑은 쇠로 만든 것이었는데 덜렁대다 발이 닿아 놀란 적이 한두 번 아니다. 세 발 달린 둥근 밥상 하나와 양은 냄비 두 개, 그리고 밥그릇 국그릇이 전부인 살림이었다. 양은 냄비는 바닥이 얇아 세심한 불 조절이 필요하다. 잠깐 한 눈을 팔면 파르르 끓어올라 넘치기 일쑤인 것이다. 성질 급한 나처럼 참을성이 없다. 친구는 냄비 밥을 잘했다. 늘 애호박 낯빛처럼 윤기가 자르르 흘러, 가난한 고교시절에 꿀맛처럼 달콤한 밥을 먹었다. 중학교 친구였던 승숙이는 나보다 한 해 늦게 같은 고등학교 야간부에 진학했다. 우연히 하굣길에 만났는데 낮에는 공장에서 일한다고 했다. 중학교 3학년 가을 승숙이 아버지가 쓰러졌다.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이라 고등학교는 엄두도 내지 못하다 회사의 배려로 입학이 가능했다고 한다. 빨간 노을이 내려앉은 운동장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승숙이 뒷모습은 항상 처져있었다. 광고 카피처럼 뜨거운 쌀밥 한 그릇 먹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 자취방은 학교 정문까지 가려면 한참을 돌아야 하지만 개구멍이 있어 엎드리면 코앞이라 반 아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학교 앞 소나무 동산에 푸릇푸릇 잔디가 돋았다. 아이들은 하교 후 삼삼오오 숲으로 모여들었다. 푸른 솔 향과 여고생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는 곳이다.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잔디위에 벌러덩 누워 윤동주를 만나고 헤르만 헤세를 만났다. 모든 것이 아름다운 날들이었다. 야간부에 다니는 그 친구를 다시 만난 것은 아까시향 진하게 배어드는 푸른 오월의 어느 날이다. 친구는 소나무 숲 속에 시간이 멈춘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불러도 대답 없이 근심이 가득했다. 다니던 회사가 부도났고 기숙사도 문을 닫았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승숙이 집은 시내에서 무척 멀었다. 야간 공부를 마치고 나면 버스가 끊겨 갈 수 없는 시골이었다. 나는 대꾸 없이 가만히 있었다. 소나무 숲도 승숙이 걱정은 알 바 아니라는 듯 청량한 바람으로 살랑댔다. 그때는 왜 그리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던지 모르겠다. 나는 함께 사는 친구와 의논하지 않고 승숙이를 자취방으로 불렀다. 밥상에 숟가락 하나만 얹으면 된다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함께 살던 친구가 워낙 속이 깊고 착해 당연히 이해할 거라고 착각한 것이다. 둘은 모르는 사이였다. 늘 일찍 와서 밥을 지었던 친구는 집에 들어오는 것을 싫어했다. 누구 하나에게 좋은 일이 또 다른 사람에게는 화가 나는 일이 되었다. 어리석은 나 때문에 두 친구 모두에게 상처를 준 꼴이었다.
부엌에서는 밥 냄새가 풍겨오지 않았다. 우리들은 성냥불을 그으면 화르르 타버릴 것 같은 마른 침엽수처럼 어색했다. 서걱서걱 바삭바삭 불안하기 짝이 없는 동거였다. 침묵은 견딜 수 없는 무거움이라 두 배로 힘이 들었다. 바람이 뜨겁게 불어오더니 어영부영 하는 사이 여름이 되었다. 누군가 조금만 헐렁해지면 좋은 것을 세찬 바람에 옷깃을 여미듯 둘은 계속해서 마음을 닫았다. 한 명은 섭섭하고 한 명은 미안해서 그랬을 것이지만 중간에 있는 나는 숨이 턱턱 막혔다. 며칠째 쏟아진 폭우에 우리는 비좁은 방안에서 일요일을 맞이했다. 어색함이 장마철 불쾌지수보다 답답하고 축축했다. 굴러온 돌 박힌 돌. 이럴 때는 어떤 돌이 양보를 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갔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둘이서 하라는 의도였다. 부엌에도 빗방울이 떨어져 축축했다. 우물에서 쌀을 씻는데 굵은 빗물이 등 위로 쏟아졌다. 비를 맞으니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일부러 머리를 빗속으로 내밀었다. 곤로 심지에 불을 밝히고 우선 김치를 볶았다. 밥으로 미안한 마음 전하고픈 심정이었던 것 같다. 미리 양해를 구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묻지 않은 내 잘못이었다. 오랜만에 부엌은 밥 냄새로 가득했다. 구수한 냄새에 불편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밥은 화를 삭이는데 효과적이다. 부글부글 끓어오른 쌀 물이 냄비 뚜껑을 비집고 후루룩 넘쳤다. 불을 확 낮췄어야 했는데 잠시 딴 일을 하다 때를 놓친 것이다. 밥이 다 타버렸고 냄비도 새까매졌다. 방 안에 있던 두 친구가 문을 벌컥 열었다. “밥도 못 하는 게. 누가 너보고 밥 하라고 했어?” 박힌 돌이 시커멓게 타버린 냄비를 들고 우물로 가며 소리쳤다. 야단을 맞았지만 속이 후련하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여전히 나와는 단짝인 친구가 밥을 다시 했다. 무덥고 찐득했지만 그 날의 냄비 밥은 맛이 최고였다. 박힌 돌이 굴러온 돌에게 해 준 첫 끼니였다. 내가 사용하는 압력솥은 지능적이다. 거친 쌀도 한 순간에 숨을 죽게 하고 말간 목소리로 밥이 다 되었다고 알린다. 입 안 가득 입김을 넣어 찰진 밥을 만들고 잔뜩 힘이 들어간 속을 스스로 비워 김을 뺀다. 뭐든 알아서 척척 잘한다. 이 정도의 센스쟁이를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그렇더라도 그날 친구가 해 준 밥맛은 흉내 내지 못한다. 바쁜 일상에 꼭 맞는 솥이지만 밥맛은 그때만 못하다. 압력솥의 요란한 추 소리가 쿨럭쿨럭 쏟아진다. ‘칙 칙 칙, 큭 큭 큭.’ 어린 시절 함께 했던 친구들 웃음소리 같다. 힘들고 지칠 때는 역시 밥이 보약이다. 따뜻한 밥에 담긴 정을 다른 무엇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베란다에 심어둔 상추가 파릇파릇 자랐다. 겉장을 모두 따니 제법 많은 양이 나온다. 뜨거운 밥에 삼겹살을 함께 먹을 생각이다. 그 옛날 친구들도 그때 일을 기억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