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8/27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1 - 2011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팡파르..女 마라톤 출발 오후 6시30분 개회식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여자 마라톤의 출발 총성을 신호탄으로 9일간의 레이스에 들어갔다.
2007 - 그리스 사상최대 산불로 61명 사망 고대 아폴로 신전까지 위협 올림픽 창시자 무덤 불타…개발 노린 ‘방화’ 의심 150년만의 최악의 산불이 그리스 고대 유적까지 위협했지만 가까스로 피해를 막았다. 지난 24일 발생한 산불은 그리스 전역에서 나흘째 번져나가 희생자는 61명으로 늘어났다. 25일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한 그리스 정부는 방화범 현상금으로 100만 유로(약 13억)를 내걸었다. 주변 유럽 각 나라도 소방헬기 등을 보내 지원에 나섰다. ■ 고대 올림픽 유적까지 덮친 산불=때로 높이 100m가 넘는 화염이 2800년된 그리스 남부 고대도시 올림피아를 덮치자, 피해를 막기 위한 총력전이 벌어졌다고 외신들이 27일 전했다. 고대 그리스의 제우스 신전과 1000년 넘게 올림픽이 열린 올림픽 발상지, 헤르메스 조각상 등이 보관된 박물관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까지 화염이 타올랐다. 다행히 화재예방 시스템이 작동하고 진화작업이 집중돼, 주변의 나무들은 불탔지만 유적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에이피〉(AP) 통신이 전했다. 그리스 정부 관계자는 “최악의 재난으로 나라의 절반이 불타고 있지만, 사투 끝에 고대 올림픽 유적을 보호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제 올림픽 아카데미의 운동장 주변, 현대 올림픽의 창시자 피에르 쿠베르탱이 묻혀있는 무덤이 불탔다. 또 산불은 기원전 5세기에 지워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아폴로 신전쪽으로 번져나가고 있다고 〈아에프페〉(AFP) 통신이 전했다. 외신들은 이번 산불로 까맣게 타버린 주택과 자동차, 동물들의 주검이 곳곳이 널려있고, 자욱한 연기가 도시를 휘감고 있다며 참혹한 현장을 전했다. 현재 그리스 전역에서 수천 헥타르의 산림과 가옥 수천 채가 불타고 수백명이 피신했다. 인명피해는 더 늘어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산불 피해가 집중된 펠로포네소스 반도의 주민들은 “모든 곳이 지옥이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 ■ 왜 불길이 번졌나=그리스에서는 덮고 건조한 여름철에 산불은 잦지만, 이번처럼 대규모 산불이 일어난 적은 없었다. 그리스 전역을 휩쓸고 있는 이번 산불의 원인은 상당수 방화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스에서 산림지대로 지정된 곳은 개발할 수 없어, 토지 소유자들이 산불을 놓아 산림을 파괴한 뒤 개발이 가능하도록 노린 것이다. 그리스 정부는 현재까지 65살 노인 등 10명의 용의자를 고의 및 부주의로 불을 놓은 혐의로 검거했다. 코스타스 카라만리스 총리는 산불이 동시다발적으로 한밤중에 일어났다는 점은 “지나친 우연이다”며 조직적 방화를 의심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그리스 정부는 16대의 소방헬기 등을 동원해 산불진화에 온 힘을 쏟고 있다. 현재 4천여명의 군인과 군용 헬기까지 동원했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12개 나라에서 소방헬기 등을 보내 진화를 돕고 있다. 하지만, 산불은 진화하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번져나가고 있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산불대응에서 무능력을 드러냈다며 국민들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한겨레 2007-08-27 오후 08:18:33
2000 - 재일동포 홍창수 선수, WBC 슈퍼플라이급 챔피언 획득 총련계 재일동포 홍창수(26, 일본이름 도쿠야마 마사모리)는 2000년 8월27일 일본 오사카 부립체육관에서 열린 세계권투평의회(WBC) 슈퍼플라이급 타이틀 매치에서 한국의 조인주(31풍산체육관)를 판정으로 누르고 챔피언에 오른 뒤 관중석을 향해 조선은 하나다. 조선은 하나다를 외쳤다.
(참고) 북, 홍창수 선수 기념우표 발행 북한 조선우표사는 최근 세계복싱평의회(WBC)슈퍼플라이급 챔피언 홍창수 선수의 기념우표를 발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11&p_club_id=alwayshaechan&p_menu_id=15&message_id=M37614
1999 - 브라질의 가톨릭 대주교, 해방신학자 엘데르 카마라(Câmara, Hélder) 선종 카마라 [Câmara, Hélder Pessoa, 1909.2.7~1999.8.27] 남미 해방신학 대부 카마라 주교 사망 브라질 빈곤층의 대부이자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 운동의 창시자인 엘데르 카마라 주교가 27일 브라질 동북부 페르남부쿠주(州) 레시페에서 사망했다. 향년 90세. http://media.daum.net/breakingnews/newsview?newsid=19990828175200007
1996 - 영국의 그래픽 디자이너 어브램 게임스(Games, Abram) 사망 게임스 [Games, Abram, 1914.7.29~1996.8.27] 영국의 그래픽 디자이너.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군부의 선전 포스터를 그려 독자적이고도 신선한 스타일로 일약 유명해졌다. 직장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디자이너로서, 포스터 영역에서 활약했다. 런던에서 태어났다. 독학으로 디자인을 배워 21세에 디자이너로 출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군부의 선전 포스터를 그려 독자적이고도 신선한 스타일로 일약 유명해졌다. 1946년부터 한 직장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디자이너로서, 포스터 영역에서 활약하였고, 1953년까지는 왕립미술학교에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1953년에는 뉴욕근대미술관에서 개최한 ‘유럽의 포스터 4인전’에 영국대표로 선정되었다. 주요 작품에는 BOAC항공사 및 영국 알루미늄 회사의 포스터 등이 있다. /네이버
1990 - 8th UN Conference on the Prevention of Crime and Treatment of Offenders UN, Cuba, 27 Aug-7 Sep 1990 http://www.unpi.com/projects_un_conference_stamp_listing_1999.asp
전두환, 제11대 대통령 당선
1979 - 영국의 군인, 정치가 루이스 마운트배튼(Mountbatten, Louis) 피살 마운트배튼 [Mountbatten, Louis, 1900.6.25~1979.8.27] Baron Romsey of Romsey라고도 함. 본명은 Louis Francis Albert Victor Nicholas, Prince of Battenberg. 영국의 정치가, 해군 지도자, 마지막 인도 부왕(副王). 국제적인 왕실가문 출신으로 해군사령관, 인도와 파키스탄 독립을 위한 외교협상가이며 국방의 최고 지도자였다. 바텐베르크 루트비히 공(뒤에 밀퍼드 헤이번 후작)과 헤센다름슈타트 공녀 빅토리아(영국 여왕 빅토리아의 손녀) 사이의 4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1913년 영국 해군에 들어가 여러 부 서에서 일했으며 1921년 웨일스 공의 부관이 되었다. 1922년 에드위나 애슐리와 결혼했다(그녀는 세인트존 구급대 책임자로 근무하다가 1960년 북보르네오에서 죽었음). 1932년 대령으로 진급했고 다음해에는 프랑스어와 독일어 통역관 자격을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구축함 '켈리'와 제5구축함 소함대를 지휘했고 1941년 항공모함 사령관이 되었다. 남들에 비해 젊은 나이에 해군장교를 맡았던 그는 1943~46년 동남아시아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인척 등용(그는 왕의 사촌임)이라는 비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일본과의 전투에서 승리해 미얀마를 탈환했다. 인도 부왕을 지내면서(1947. 3~8) 영국이 가지고 있던 권력을 신생독립국인 인도와 파키스탄 정부에 이양했고(1947. 8. 15), 인도 총독으로 재직시에는(1947. 8~1948. 6) 인도 군주들을 설득해 분리 독립한 인도·파키스탄에 각 주를 병합하도록 했다. 1946년 자작작위, 1947년 백작작위를 받았다. 1950~52년 해군본부위원회 제4군사위원, 1952~54년 지중해 함대 총사령관, 1955~59년에는 해군본부위원회 제1군사위원으로 진급했다. 1956년 해군원수가 되었고, 1959~65년에는 영국 국방참모장 및 참모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1965년 와이트 섬 총독, 1974년에는 그곳의 주지사가 되었다. 1979년 아일랜드 공화국군 소속 과격파가 배에 장치한 폭탄이 터져 죽었다. /브리태니커 (마운트배튼은 1979년 아일랜드에서 휴가를 보내다 IRA가 배에 설치한 폭탄이 터지면서 비명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 Ethiopia, 1 Dollar (1966, Banknote)
1975 -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1세(Haile Selassie I) 사망 하일레셀라시에 1세 [Haile Selassie I, 1892.7.23~1975.8.28] 에티오피아 황제(1930∼74). 하레르주 출생. 하일레 셀라시에는 삼위일체라는 뜻이다. 즉위 전의 이름은 라스 타파리 마콘넨이다. 황제 메넬리크 2세의 사촌동생 마콘넨왕자의 아들로서 가정교육을 받은 뒤 1910년 하레르주의 지사가 되어 개명정책(開明政策)을 실시하였다. 16년 메넬리크 2세의 딸 자우디츠 여왕의 섭정이 되었고, 30년 여왕이 죽은 뒤 황제로 즉위하였다. 헌법 제정, 의회·사법제도를 도입하였고,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교육보급에 힘쓰는 등 개명군주로 명성을 떨쳤다. 35년 이탈리아가 침략하자 국제연맹의 개입을 호소하였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이듬해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41년 귀국하여 국내개혁을 도모함과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범아프리카주의·비동맹주의를 표방하였다. 63년 독립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원수로 구성되는 아프리카통일기구(OAU) 설립에 힘을 기울였으며, 본부를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두고 아프리카 여러 나라 사이의 분쟁해결에 힘썼다. 그러나 73년 기근을 계기로 국내의 불만이 높아져서 74년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그해 9월 폐위되었다. /야후 백과
1966 - 문화대혁명 기간 중 집단학살 사건 발생 홍위병의 집단 광기로 인한 집단 학살 사건이 1966년 8월 27일부터 9월 1일에 걸쳐 중국 북경 남부의 대흥현에서 일어났다. 집단학살 사건으로 80세 노인에서 생후 38일 되는 젖먹이에 이르기까지 총 22세대 325명이 희생됐다. 8월 18일 열광적인 천안문 광장의 `백만인 집회`에서 모택동으로부터 급진적인 사회 개조 정신을 고무받은 대학생과 중학생 등 홍위병들은 `4구(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 타파`를 외치며 군복 차림으로 북경 시내를 활보했다. 이들이 외쳐대는 `4구 타파`와 `4신(신사상, 신문화, 신풍속, 신습관) 확립`은 봉건사회에서 내려온 낡은 폐습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나 수정주의의 썩은 냄새를 풍긴다고 간주되는 것을 `파괴하고, 혁명화 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빨간색은 혁명의 상징인데 빨간색 신호일 때 정지하는 것은 이상하다"라고 우겨댈 정도로 이들의 주장은 유치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했지만 이들을 막는 세력이 아무도 없었다. 군인과 경찰까지도 이들의 광기를 무력으로 막는 것은 반혁명이라며 두둔하기까지 했다. 중국 전역에는 광신적인 행위가 확산되어갔다. 홍위병들의 4구 타파는 더 나아가 `4류 분자` 등을 공격의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4류 분자`란 지주, 부농, 반혁명 분자, 악질 분자를 가리켰다. 이들이 지나간 곳에는 언제나 피와 나뒹구는 시체뿐이었다. 모택동이 면죄부를 주고 칭찬을 한 문혁 급진파나 홍위병들이 적으로 간주하는 자는 `우사귀신`(요괴가 변화한 것)이지 인간이 아니었다. 지옥같은 학살사건은 중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문혁 후 공식집계에 따르면 북경시에서만도 8월24일부터 9월1일 사이에 학살당한 사람이 1천5백29명에 달했다. /조선
1966 - 콜롬비아 축구 선수 레네 이기타(Higuita, Rene) 출생 이기타 [Higuita Zapata, Jose Rene, 1966.8.27~ ] 호세 레네 이기타 (Jose Rene Higuita Zapata, 1966년 8월 27일 ~ ) 은 콜롬비아의 전 축구 선수이다. 1990년대 콜롬비아 축구대표팀에서 활약하면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출전하였다. 포지션이 골키퍼임에도 불구하고 국가대표로 활약하면서 8골을 기록하여 파라과이의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와 함께 '골 넣는 골키퍼'로 유명하였다. 기행 이기타는 수많은 기행으로 유명한 선수이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카메룬과 콜롬비아의 16강전에서 이기타는 중앙선까지 공을 몰고 나오다 카메룬의 공격수 로제 밀라에게 공을 뺏겨 골을 허용한 적이 있다. 이 경기에서 콜롬비아는 카메룬에 1-2로 져 16강에서 탈락하였다. 또한 1995년 9월 6일, 웸블리 경기장에서 열린 잉글랜드와 콜롬비아의 축구 친선경기에서 제이미 래드냅의 슛을 뒷발차기(일명 스콜피온 킥)으로 막아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밖에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마약 복용 혐의로 월드컵 경기에 출전할 수 없었다. 선수 경력 * CD 로스 미요나리오스 1985 * 아틀레티코 나시오날 1986-1992 * 레알 바야돌리드 1992-1993 * 아틀레티코 나시오날 1994-1997 * 티부로네스 로호스 데 베라크루스 1997-1998 * 인디펜디엔테 메데인 1999-2000 * 레알 카르타헤나 2000-2001 * 아틀레티코 주니어 2001-2002 * 데포르티보 페레이라 2002-2003 * SD 아우카스 2004 * 바호 카우카 FC 2005 * 과로스 데 라라 FC 2007 * 데포르티보 리오네그로 2008 * 데포르티보 페레이라 2008-2009 /위키백과
- 'Chapel of Notre Dame du Haut, Ronchamp'
- Switzerland, 10 Francs(Franken) (Banknote)
1965 - 프랑스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사망 코르뷔지에 [Le Corbusier, 1887.10.6~1965.8.27]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 사망 세계적인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965년 오늘 남프랑스 해안에서 수영을 하다 심장마비로 숨진다. 이 때 그의 나이 78살. 코르뷔지에는 스위스에서 태어났지만 29살에 프랑스로 귀화했다.
1962 - 미국 금성 탐사선 마리너 2호 발사
1950 - 이탈리아 시인, 소설가 체사레 파베세(Pavese, Cesare) 자살 파베세 [Pavese, Cesare, 1908.9.9~1950.8.27] 체사레 파베세(Cesare Pavese, 1908년 ~ 1950년)는 이탈리아의 소설가·시인이다. 북부 이탈리아의 피에몬테 주(州) 산토 스테파노 벨보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베르보 강(江)은 구릉을 누비며 포 강(江)으로 빠져 토리노 시(市)를 관류하고 있다. 이러한 구릉(丘陵), 강, 도회지 등이 작품의 배경으로 일관되어 있다. 토리노 대학을 졸업한 후 고교 교사와 <문화>지(誌)의 편집을 하는 한편 현대 영미 문학을 다수 소개 또는 번역했다. 특히 조이스나 포크너로부터는 수법상의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1935년 반(反)파쇼 활동으로 인하여 남 이탈리아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처녀작 <너의 고향>(1941)은 최초의 네오리얼리즘 문학이라 인정되었으며 그 후에도 더렵혀진 목숨, 자살의 유혹, 좌절된 사랑 등 신화와 현실과의 교착(交錯)을 주제로 하여 독자적인 서정 세계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름>(1949)으로 스토레가상(賞)을 받는 등, 작가로서 크게 성공한 후 소설의 주인공과 같은 숙명에 처해 토리노의 한 호텔에서 자살하였다. /위키백과
- Aristide Briand
1928 - 부전조약(不戰條約) 체결 (켈로그-브리앙조약) 부전조약(不戰條約) 체결 제1차 대전 후, 세계 각국은 전쟁 재발을 방지하고 전쟁의 참화로부터 인류를 보호할 목적으로 국제연맹을 창설(1920년)하지만 정작 창설을 주도했던 미국이 가입하지 않아 무력해보였다. 제네바 해군 군축회담(1927년)도 별 성과가 없자 독일의 재침을 우려한 프랑스 외무장관 브리앙은 미국에 전쟁방지를 위한 양국간 협정을 제안한다. 켈로그 미 국무장관이 협정을 다자간 협정으로 확대하도록 수정 제안함으로써 탄생한 조약이 1928년 8월27일에 미국ㆍ독일ㆍ소련 등 15개국이 파리에서 조인한 ‘켈로그ㆍ브리앙조약’이다. ‘부전조약(不戰條約)’으로도 불리는 이 조약은 국제분쟁 해결의 수단으로 전쟁을 일으키지 말자는 국가간의 약속이었지만 조약 당사국인 독일과 일본은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조약을 깨뜨렸다. 조약위반국에 대한 제재규정을 두지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제기됐지만 언제나 그렇듯 국제관계의 기본은 ‘힘’이었다. /조선
1908 - 미국의 제36대 대통령 린든 B. 존슨(Johnson, Lyndon B.) 출생 존슨 [Johnson, Lyndon Baines, 1908.8.27~1973.1.22] 미국 제36대 대통령(1963∼69). 텍사스주 출생. 가난한 지방정치가의 장남으로, 주립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교직과 하원의원비서 등을 거쳐, 1937년 민주당원으로 텍사스주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루즈벨트대통령의 뉴딜정책에 협력하였다. 48년 연방상원의원에 당선되고 54년 재선되었다. S. 레이번하원의장 등의 지원을 받아 53년에는 사상 최연소의 민주당원내총무가 되어 의회를 조종하였다. 60년 당대회에서 J.F. 케네디와 대통령후보를 놓고 경선하여 패했으나 부통령후보가 되어 남부 여러 주의 지지를 확고히 하여 케네디정권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였다. 63년 11월 케네디가 암살되자 대통령으로 취임, 국민의 공감을 배경으로 능숙한 정치력을 발휘하여 공민권법 등 많은 진보적인 정책을 실현하였다. 또한 <빈곤과의 투쟁>을 토대로 광범위한 사회복지정책에 입각하여 <위대한 사회>의 실현을 제창하였다. 대외적으로 온건주의정책을 주장하며 64년 선거에서 공화당보수파인 B.M. 골드워터 후보를 큰 표차로 물리쳤으나, 그 뒤 베트남전쟁에 군사개입을 강행하면서 외교적 미숙과 국내정치 흐름인 비밀주의를 전쟁 수행에 적용, 국내의 불신을 샀고 인종대립, 달러 하락과 더불어 국내위기를 초래하였다. 68년 3월 임기 만료로 은퇴하였다. /naver
1908 - 오스트레일리아의 크리켓 선수 도널드 브래드먼(Bradman, Donald) 출생 브래드먼 [Bradman, Donald, 1908.8.27~2001.2.25] 오스트레일리아의 크리켓 선수. 크리켓 역사상 가장 훌륭하고 천부적인 타자로 평가받는다. 1934년부터는 주식중개인으로 일했다. 국제 크리켓 우승 결정전(테스트 매치)에 오스트레일리아 대표로 출전해 6,996점을 얻어 한 경기당 평균 99.94점을 기록했다. 1928~48년 영국과의 테스트 매치에서 센트리(1이닝에 100점을 얻는 것)를 19번이나 기록했다. 1930년에 최초로 출전한 영국 원정경기에서 1이닝에 무려 334점을 얻는 대회기록(이 기록은 결국 깨졌음)을 세웠다. 1934년에도 영국에서 1이닝에 304점을 얻었다. 1948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대표 팀 주장으로 영국 원정경기에서 통산전적 4 대 0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1949년에 1급 크리켓에서 은퇴하고, 그해에 기사작위를 받았다. 브래드먼은 젊었을 때 부드러운 공을 골진 금속으로 만든 물 탱크에 대고 치면서 타격 감각을 몸에 익혔다. 재빠른 눈, 능숙한 발놀림, 굴러가는 공에 대한 초인적인 판단력을 개발하여 타자뿐만 아니라 외야수로도 뛰어난 선수가 되었다. 그는 회고록 〈크리켓이여, 안녕 Farewell to Cricket〉(1950)과 코치 입문서인 〈크리켓의 기술 The Art of Cricket〉(1958)을 썼다. 1978년 어빙 로젠워터가 브래드먼의 전기를 출판했다. /브리태니커
- 순종황제 어차
순종 황제 즉위
1896 - 일본의 시인, 동화작가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 출생 미야자와 겐지 [宮澤賢治, 1896.8.27~1933.9.21] 일본문학사상 중앙문단과 거의 관계가 없었던 이색적인 작가로, 시·동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1918년 모리오카 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지질 토양비료 연구에 종사했다. 특히 히에누키 군[稗貫郡]의 토성(土性) 조사는 뒤에 그의 활동에 중요한 의미를 주었다. 한편 생가는 열렬한 정토진종(淨土眞宗) 집안으로 그도 어렸을 때부터 불교 경전을 접해왔는데, 중학시절 법화경(法華經)을 읽고 감동을 받아 1920년 니치렌종[日蓮宗]의 신앙단체로서 다나카 지가쿠[田中智學]가 주재하는 고쿠추카이[國柱會]에 가입했다. 종교의 차이로 부모와의 대립은 깊어만 갔으며 1921년 무단 상경해 문필이나 교정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포교활동에 종사했다. 그는 농림학교 재학시절부터 단카[短歌]를 짓고 산문 습작을 하기도 했으며, 졸업 후에는 동화도 몇 편 썼다. 1921년 12월 히에누키 농학교의 교사가 되었고 이듬해 11월 사랑하는 여동생 도시의 죽음을 겪었으며, 1926년 3월까지 계속 이 학교의 교사로 있었다. 이 시기, 특히 전반기는 그의 문학이 화려한 꽃을 피운 시기였는데, 대표적인 작품은 시집 〈봄과 수라 春と修羅〉(1924)와 동화 〈주문이 많은 요리집 注文の多い料理店〉(1924)에 실린 작품들이다. 농학교 교사시절 후반부터 농민들의 빈곤한 생활에 직면하게 된 그는 1926년 3월 하나마키로 돌아갔다. 거기서 젊은 농민들에게 농학이나 예술론을 강의하는 한편, 벼농사 지도를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했다. 그러나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병석에 눕게 되었으며 자신의 농업기술로는 농민들을 가난에서 구할 수 없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절망, 농민들의 도회지인에 대한 반감 등에 부딪혀 좌절감은 더욱 깊어만 갔다. 1933년 급성폐렴으로 37세에 요절했다. 만년에 나온 동화로는 걸작 〈은하철도의 밤 銀河鐵道の夜〉·〈구스코 부도리의 전기 グスコ-ブドリの 傳記〉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1879 - 근대 우편제도의 아버지 로랜드 힐(Hill, Rowland) 사망 로랜드 힐 [Hill, Rowland, 1795.12.3~1879.8.27] 영국의 행정가·교육가이며, 1페니 우편제도의 창시자. 현대 우편제도를 창안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힐이 개발한 우편제도는 이후 세계 전역에서 채택되었다. 아버지가 중학교 교장이었던 힐은 교육문제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5년간 학교를 운영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주주의, 엄격한 자기수양, 철저한 학습 등을 강조했다. 그는 인쇄·천문학·수학·수송문제 등 실로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835~37년에 작성된 우편제도에 관해 힐이 내놓은 개혁안은 "국가의 조세수익은 인구의 증가와 국가의 경제적 번영과 더불어 반드시 증가하게 된다"는 원칙에 근거한 것이었다. 힐은 우편물에 대한 높은 과세는 결과적으로 전체 우편물의 양을 감소시켜 국가의 조세수익을 감소시키므로 우편에 대해 낮게 과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배달 거리에 따라 지나치게 다양한 비율의 요금을 부과하는 것은 우편요금 계산에 지나친 인적·물적 경비를 낭비하게 하여 결과적으로 더 많은 경비를 지출하게 되므로, 배달 거리에 관계없이 동일한 비율의 우편요금을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그는 모든 우편물의 우편요금을 선불하는 방식을 채택할 것을 덧붙였는데, 이 마지막 제안사항을 실현시킬 수 있는 방안으로 그는 후에 '우표'라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힐은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840년 자신의 계획안을 실행시키는 데 성공했다. 힐은 1860년 기사작위를 받았다. /브리태니커
1870 - 멕시코의 시인, 외교관 아마도 네르보(Nervo, Amado) 출생 네르보 [Nervo, Amado, 1870.8.27~1919.5.24] 멕시코의 시인·외교관.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모데르니스모'(Modernismo:모더니즘)라고 알려진 문학운동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평가된다. 네르보의 내면성찰적인 시는 깊은 신앙심과 단순한 형식이 특징인데, 불확실한 세계에서 자기이해와 내면의 평화를 쟁취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준다. 1888년 성직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포기하고 마사틀란에서 신문기자 일을 시작했다. 1894년 멕시코 시티로 옮겨 첫 소설 〈학사학위 El bachiller〉(1895)를 썼고, 이어서 모더니즘 양식의 첫번째 시집 〈흑진주 Perlas negras〉(1898)를 발표했다. 또 1898년 〈레비스타 모데르나 Revista moderna〉를 창간했는데, 이 잡지는 곧 모데르니스모 운동의 가장 유력한 잡지가 되었다. 1905~18년에는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살면서 멕시코 공사관 서기관으로 일하는 한편 파리 문학계에서 상당히 많은 시간을 보냈다. 29권의 전집에 실린 시·수필·단편소설은 대부분 이 시기에 씌어졌다. 일반적으로 그의 가장 뛰어난 시들로 평가되는 〈고요 Serenidad〉와 〈충만 Plenitud〉 등 말년의 작품 제목들은 그가 평생토록 갈구했던 내면의 평화를 어느 정도는 불교철학 연구를 통해 성취했음을 보여준다. 멕시코로 돌아온 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주재공사로 임명되었으며,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에서 임기중에 세상을 떠났다. /브리태니커
1867 -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움베르토 조르다노(Giordano, Umberto) 출생 조르다노 [Giordano, Umberto, 1867.8.27~1948.11.12] 이탈리아의 베리스모 오페라 작곡가.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 Andrea Chénier〉(1896)로 유명하다. 장인(匠人)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포자와 나폴리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사악한 인생 Mala vita〉(1892)을 포함한 초기의 오페라들은 피에트로 마스카니가 그의 베리스모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Cavalleria rusticana〉(1890)에서 시도했던 힘있고 멜로드라마적인 양식으로 작곡되었다. 프랑스 혁명 시인의 일생을 다룬 〈안드레아 셰니에〉에서 보다 온화한 등장인물의 성격을 통해 폭력을 완화시켰으며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후 빅토리아 시대의 사르도를 바탕으로 한 〈페도라 Fedora〉(1898)는 물론 그 후속 작품들인 〈시베리아 Siberia〉(1903)·〈왈가닥 부인 Madame Sans-Gêne〉(1915) 등도 그와 같은 인기를 얻지 못했다. 〈익살의 향연 La cena delle beffe〉(1924)에서는 중세 피렌체를 무대로 설정함으로써 획기적인 기법 전환을 시도했다. /브리태니커
- 'Portrait of Arkhipov' and 'Away' (1915)
1862 - 러시아의 화가 아브람 아르히포프(Arkhipov, Abram) 출생 아르히포프 [Arkhipov, Abram Efimovich, 1862.8.27~1930.9.25] Abram Arkhipov Abram Efimovich Arkhipov (Russian: Абра́м Ефи́мович Архи́пов) (August 27 [O.S. August 15] 1862 – September 25, 1930) was a Russian realist artist, who was a member of the art collective The Wanderers as well as the Union of Russian Artists. Born in the village of Yegorovo in the Ryazan Oblast to a religious Russian-Orthodox family, Arkhipov (birth name Abram Pyrikov) left for the Moscow School of Painting, Sculpture and Architecture in 1877, where he would fall under the tutelage of various Russian artists including Vasily Perov, Vasily Polenov and Vladimir Makovsky. In 1883, Archipov went to study at the Imperial Academy of Arts at Saint Petersburg, he would stay there two years, before returning to complete his studies in Moscow. Arkhipov was accepted into the art collective, The Wanderers in 1889, and joined the Union of Russian Artists in 1903. Themes that occur within his artwork include the lives of Russian women, with some of his realist paintings depicting their grim daily realities. Arkhipov also painted several paintings of peasant women in rural Russia, depicting them in vibrant traditional dresses and national costumes. Like others in the Union of Russian Artists, Arkhipov also painted regularly en plein air, travelling and painting scenes from the North of Russia and the White Sea coast. Arkhipov also taught at the Moscow School of Painting, Sculpture and Architecture where he was originally a student, and from 1922 through 1924 taught at Vkhutemas. Arkhipov joined the Association of Artists of Revolutionary Russia in 1924, and in 1927 was awarded the title of People's Artist of the USSR. Arkhipov died in Moscow in 1930.
- Peru, 100 Intis (1987. Banknote)
1797 - 페루의 군인, 정치가 라몬 카스티야(Castilla, Ramón) 출생 카스티야 [Castilla, Ramón, 1797.8.27~1867.5.25] 페루의 군인, 정치가. 페루의 정치를 대통령으로 또는 막후에서 거의 20여 년 간 지배했다. 보수주의자였던 그는 현명하게 사회 각 부문에 양보조치를 하고 장기간에 걸쳐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을 가져왔다. 청년시절 스페인 편에서 싸우다가 칠레의 애국자들에게 체포된 뒤 페루에서 스페인에 맞서 시몬 볼리바르 및 호세 데 산 마르틴과 함께 영웅적으로 싸웠다. 1841년 아구스틴 가마라 대통령이 죽고 무정부 상태가 이어지자 권력을 잡고 1845년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851년까지 대통령으로 봉직했다. 1855년에는 후임 대통령 호세 루피노 에케니케를 내쫓고 1862년까지 통치했다. 그가 권력을 잡은 무렵 페루는 거의 20년간 무질서와 반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강력하고 능숙한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집권기중에 운도 따라 막대한 구아노[糞化石]와 질산나트륨이 페루에서 발견되었다. 이들 자원에서 나온 수익에 힘입어 그는 경제발전을 이룩하고 국채를 줄였으며, 학교를 짓고 운송체제를 개선하고 국내 사업을 육성했다. 또한 흑인 노예제와 인디언에게 부과하는 인두세를 철폐하고 교회재판과 강제 십일조를 없앴다(교회는 강력히 지지했음). 1860년 참정권을 축소하고 대통령에게 더 큰 권력을 주며 로마 가톨릭 교회만을 배타적으로 인정한 페루의 새 헌법을 지지했다. 이 헌법은 1920년까지 효력을 발휘했다. 1862년 카스티야의 가부장적 전제정치가 막을 내리자 페루는 또다시 20년간의 혼란과 반란에 빠져들었다. /브리태니커
오리베 [Oribe, Manuel Ceferino, 1792.8.27~1857.11.12] 우루과이의 제2대 대통령(1835~38). 시스플라티네 전쟁(1825~28)에서 우루과이의 독립을 위해 훌륭하게 싸운 33명의 전설적 민족주의자들인 '트레인타 이 트레스 오리엔탈레스'의 한 사람이다. 그가 우루과이 초대 대통령 호세 프룩투오소 리베라와 동맹을 맺었다고는 해도 결국 그들의 야망은 깨져버리고 말았다. 대통령이 된 오리베는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초대 대통령이었던 리베라가 지배하고 있던 변방지역에까지 확대하려고 했다. 오리베가 이처럼 리베라의 권력에 도전하고 또 리베라의 재임기간중에 있었던 재정의 부실경영에 대해 비난을 하자, 분노한 리베라는 1836년 반란을 일으켜 결국 1838년 10월 오리베를 사임하게 만들었다. 그후 오리베는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하여,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로부터 군사적 권한을 부여받았다. 1842년 아르헨티나 군대를 이끌고 리베라 군대와 싸워 승리한 그는 우루과이로 돌아와서 9년 동안(1843~51) 몬테비데오를 포위했다. 이러한 내분으로 우루과이는 오리베와 리베라가 각각 이끄는 블랑코(백색당)와 콜로라도(적색당)라는 2개의 경쟁적 파벌로 분열되었다. 보수적인 시골 사람들을 대변하는 블랑코당과 진보주의자들을 대변하는 콜로라도당은 우루과이의 양대 정당으로서 오늘날까지 우루과이의 정치를 이끌어오고 있다. 오리베가 귀국하여 블랑코당에 대한 군사지휘권을 장악하게 될까 우려한 콜로라도당은 오리베로 하여금 1853~55년 유럽에서 망명생활을 하도록 강제했다. 1857년 오리베가 죽은 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개입으로 더욱 복잡해진 내전이 8년 이상이나 계속되다가 결국에는 콜로라도당이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그후 거의 1세기 동안을 통치했다. /브리태니커
1770 - 독일의 철학자 헤겔(Hegel, Georg Wilhelm Friedrich) 출생 헤겔 [Hegel, Georg Wilhelm Friedrich, 1770.8.27~1831.11.14] 독일의 철학자. 칸트 철학을 계승한 독일 관념론의 대성자이다. 슈투트가르트 출생.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재무관 아들로 1788년 뒤빙겐대학교 신학과에 입학 J.C.F.휠데를린 및 F.W.셸링과 교우하였다. 졸업 후 7년간 베른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정교사를 한 뒤 1801년 예나로 옮겨 예나대학교 강사가 되었다. 처음에는 이미 예나대학의 교수로 활약 중이던 셸링의 사상에 동조하여 잇달아 논문을 발표하였으나, 차차 셸링적 입장을 벗어나 1807년에 최초의 주저 《정신현상학(精神現象學) Ph nomenologie desGeistes》을 내놓아 독자적 입장을 굳혔다. 이 무렵 나폴레옹군의 침공으로 예나대학이 폐쇄되자 밤베르크로 가서 신문 편집에 종사하였으며, 이어 뉘른베르크의 김나지움 교장이 되었고, 이곳에서 둘째 주저 《논리학 Wissenschaft der Logik》(1812∼1816)을 저술하였다. 1816년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로 취임, 그 동안 《엔치클로페디 Enzyklop 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1817)를 발표하였으며, 1818년에는 프로이센 정부의 초청으로 베를린대학 교수가 되었고 곧 마지막 주저 《법철학 강요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1821)를 내놓았다. 베를린 시절은 헤겔의 가장 화려한 시절로서 유력한 헤겔학파가 형성되었으며, 그의 철학은 국내외에 널리 전파되었으나 1831년 콜레라에 걸려 사망하였다. 헤겔 철학의 역사적 의의는 18세기의 합리주의적 계몽사상의 한계를 통찰하고 ‘역사’가 지니는 의미에 눈을 돌린 데 있다. 계몽사상이 일반적으로 역사를 고려하지 않고 오직 머리 속에서 생각한 이상에 치중, 이 이상을 현실로 실현해야 하며 또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데 반하여, 헤겔은 현실이란 그처럼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의 과정은 그 자신의 법칙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정해졌다고 생각하였다. ... 헤겔은 이러한 근본사상을 바탕으로 장대한 철학체계를 수립하였는데 그 체계는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의 3부로 되었으며, 이 전체계를 일관하는 방법이 모든 사물의 전개(展開)를 정(正) ·반(反) ·합(合)의 3단계로 나누는 변증법(辨證法)이었다. 헤겔에 의하면 정신이야말로 절대자이며 반면 자연은 절대자가 자기를 외화(外化)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논리학에서는 자연 및 정신에 대하여 고루 타당한 규정이 다루어졌다. 그의 철학은 그 관념론적 형이상학으로 인하여 많은 비판과 반발을 받기도 하였지만, 역사를 중시하였다는 점에서는 19세기 역사주의적 경향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또 변증법이라는 사상으로도 후세에 다대한 의의를 가진다 하겠다. 1995년 기독교한국루터회가 선정한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란’의 한 사람이다. /naver
- '관동별곡(關東別曲)'
송강가사는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이며 시인인 송강 정철(鄭澈:1536∼93)의 가사(歌辭)와 시조 작품을 모아 엮은 가집(歌集). [성주본] : 상 ·하 2권 1책으로, 1면이 8행, 1행은 16자로 되어 있다. 상권은 24장으로 가사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장진주사(將進酒辭)》를 수록하였고, 하권은 20장으로 단가(短歌), 즉 시조 79수를 실었다. 송강의 현손(玄孫)인 정천(鄭 )이 1698년(숙종 24)에 쓴 발문(跋文)에 따르면, 이미 간행된 정호(鄭澔)의 의성본과 이계상(李季祥)의 황주본에 잘못된 곳이 많아 여러 사본과 대조, 이를 바로잡아 새로 엮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1747년(영조 23) 정천의 아들 정하(鄭河)가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있으면서 다시 발문을 덧붙여 아버지가 간행하지 못한 것을 자기가 발간한다고 썼다. 따라서 고증이 가장 확실하고 믿을 만한 판본으로 여겨진다. /naver
1611 - 스페인의 작곡가 토마스 빅토리아(Victoria, Tomas) 사망 빅토리아 [Victoria, Tomas Luis de, 1548~1611.8.27] 스페인의 작곡가. 16세기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인 팔레스트리나, 오를란도 디 라소에 비견된다. 1565년 펠리페 2세의 명령으로 사제가 되기 위하여 로마의 콜레지움 제르마니쿰으로 갔다. 조반니 다 팔레스트리나에게 배웠으며 그의 뒤를 이어 콜레지움 로마눔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1578~85년에 산지롤라모델라카리타 교회의 지도 신부로서 펠라페 네리를 모셨고, 1578년 막시밀리안 2세의 미망인이며 신앙심이 돈독한 마리아 황후를 만나 지도 신부가 되었다. 1584년 마리아 황후가 마드리드에 있는 데스칼사스레아렐스 수도원으로 들어가자 빅토리아는 그곳에서 사제 겸 오르간 연주자로 일했다. 1594년 마드리드에 정착했다. 작품에는 미사곡 21곡과 모테트 44곡이 있는데 모두 당대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힌다. 그밖에 시편에 곡을 붙인 곡, 찬미가, 여러 편의 성모찬가, 〈죽은 자를 기리는 성무일과〉 4곡, 수난곡 2곡(〈임프로페리아 Improperia〉·〈예레미야 애가 Lamentations of Jeremiah〉)을 포함한 성주간(부활제를 앞둔 1주간) 예배 음악 등을 썼다. 〈마리아 황후를 기리는 진혼곡〉(1605)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의 음악에는 일부 작곡가들이 아빌라의 성 테레사가 지녔던 신비로운 열정에 비유한 심오함이 엿보인다. 성 테레사는 데스칼사스 수도원의 후원자로서 빅토리아가 청년시절 알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빅토리아는 팔레스트리나의 대위법적 기교를 갖고 독특한 개인정서와 강렬한 스페인적 성격을 띤 강렬하고 인상적인 느낌들을 융합해놓았다. 종종 패러디(→패러프레이즈) 기법을 이용해 자신의 음악이나 다른 작곡가들의 음악을 다시 쓰곤 했으며 카논 기법의 대가로 알려졌다. 단성성가를 정선율로 사용한 경우는 의외로 드물며 16세기 후기에 오면 근대적인 기법도 사용하게 된다. 사나운 야수의 분노를 그린 작품 〈쿰 베아투스 이그나티우스 Cum beatus Ignatius〉는 당대의 마드리갈 작곡가들의 작품들보다 훨씬 회화적 묘사력이 뛰어나다. 강조하기 위하여 같은 음들을 반복해서 사용한 것은 레치타티보에 점점 많은 관심을 기울이던 피렌체 악풍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다성합창 작품에서는 당대 베네치아 악파의 양식을 사용했으며, 그가 남긴 오르간 성부를 기보한 악보는 계속저음 시대가 올 것을 예견해주고 있다. 그의 음악에는 조성의 대비가 현저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바로크 시대의 특징이었던 장조·단조 개념을 미리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브리태니커
1590 - 로마 교황 식스토 5세(Sixtus Ⅴ) 선종 식스토(식스투스) 5세 [Sixtus V, 1520.12.13~1590.8.27] 반종교개혁기 로마의 교황. 본명 Felice Peretti(추기경 시절에는 Montalto). 안코나의 그로타마제 출생. 콘벤투알 수도회 수도사. 반종교개혁기(反宗敎改革期)의 교황이다. 뛰어난 설교사(說敎師) ·논객(論客)으로 두각을 나타냈는데, 1552년 로마에 파견되어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1557∼1560년 베네치아공화국 종교재판소 소장, 1565년에 에스파냐에 교황사절로 나갔으며, 1566년에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총회장 ·대목(代牧)으로서 주교(主敎)에 임명되었으며, 1570년에 추기경이 되었다. 교황이 되자 전임교황 때의 어지러운 질서를 회복시키고 잃었던 교황령(敎皇領)을 되찾아 재정을 튼튼히 하였다. 1586년에는 추기경의 수를 70명으로 정하였으며, 1588년에는 교황청의 정비를 완료하여 15 성성(聖省)으로 조직을 확대 개편하는 등 많은 제도 혁신을 단행하였다. 성베드로대성당의 원개(圓蓋)와 오벨리스크, 수많은 궁전과 수도(水道) 등을 건설함으로써 로마의 근대화에도 힘썼다. 또 학문연구에는 몸소 《불가타역 성서 Vulgate》의 식스토판(版)(1590)을 낼 만큼 열성적이었다. /네이버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