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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다푼 신명에 뒤돌아 보면/ 바람같은 목소리/ 흩어지는 바람소리/ 사랑인 줄 믿었는데/ 바람인 줄 몰랐는데/ 이제와서 가슴시린 바람이었어...’(<바람인 줄 알았는데> 김현식)
거친 바람처럼 살다가 32살 나이로 요절한 가수 김현식. 들국화, 신촌블루스와 함께 언더그라운드 가수 1세대로 한국대중음악의 기적 같은 시기인 80년대를 일궈낸 김현식의 죽음이 지난 11월1일로 15주기를 맞았다. 갈라지고 탁한 목소리로 토해내듯 악을 쓰면서 죽음이 짙게 드리워졌던 순간까지 무대에서 혼신을 다했던 그가 10주기를 기리는 동료 가수들에 의해 다시 살아났다. 살아서 그와 함께 소주잔을 기울였던 동료들과 죽어서 그의 노래를 따라하며 음악을 배운 후배 가수 등 20여명이 모여 김현식을 기리는 헌정음반을 냈다.
*환호성이 높을수록 고독도 더해져
그동안 신중현, 산울림 등 거장들의 헌정음반이 몇장 나오기는 했지만 이 앨범처럼 80년대와 90년대, 언더와 오버 가수가 폭넓게 참여하는 헌정음반이 나오는 것은 처음이다. 엄인호, 전인권, 권인하에서 신승훈, 이승환, 유승준, 조성모까지 80년대 이후 등장한 대표가수를 총망라한다. 활동 당시 김현식이 받았던 음악적 평가는 들국화나 신촌블루스에 비해 야박했지만 죽음 이후 대중음악에 끼친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했는가를 보여주는 앨범이기도 하다.
김현식이 살아서 이 음반 작업을 지켜봤다면 어땠을까? 녹음하던 후배를 불러내 주먹으로 한대 치며 “똑바로 해” 하고 괜한 으름장을 놓으며 머쓱함을 애써 숨겼을지도 모른다. 생전에 그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선배, 동료 할 것 없이 술자리에서 그의 욕지거리나 주먹다짐을 안 받아본 사람이 없고, 후배들은 사무실에서 갑자기 끌려나가 “조심해”, “있을 때 잘해” 등 아무런 맥락없는 말을 들으며 쥐어박혔지만 아무도 그를 미워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애정표현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김현식은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나이를 정확히 파악하는 가수들은 거의 없다. 일찌감치 고등학교를 때려치우고 어린 나이에 성인들이 다니는 술집에서 노래하며 동료 가수들에게 기죽지 않기 위해서 그는 때로 대여섯살까지 나이를 속이면서 자신을 소개하곤 했다. 76년 신촌의 한 막걸리집에서 개그맨 전유성으로부터 김현식을 소개받은 엄인호는 그때의 첫인상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어려보이는 친구가 스스럼없이 말을 놓기에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지만 그 자리에서 비틀스며 닐 영을 부르는 데 깜짝 놀랐습니다. 그 친구처럼 노래 잘하는 가수는 앞으로도 나올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신촌블루스 2집 앨범에서 함께 음악을 하기도 한 엄씨는 고인이 생전에 유일하게 ‘선생’이라는 존칭을 붙이며 마음을 기댔던 사람이기도 하다. 뒤에 지나친 폭음과 거친 행동 때문에 술자리에서 언성을 높이며 다투기도 했지만 그는 다음날이면 돼지고기 한근을 사들고 어김없이 엄씨 집 대문 앞에서 “엄 선생, 엄 선생” 큰소리로 불러댔다고 한다.
통기타를 메고 호프집에서 노래하며 주가를 높여가던 김현식은 당시 잘 나가는 가수들의 집합소였던 고급 나이트클럽 무대로 진출했다. 그러나 밤무대를 떠돌며 노래하던 이 시기는 그의 영혼이 피폐해가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그의 데뷔앨범을 제작하던 가수 이장희가 미국으로 떠나는 바람에 공중에 떠버린 앨범과, 쉬지 않고 밤무대로 내몰던 경제적 궁핍함은 아직 20대 초반인 김현식을 술과 대마초에 빠져들게 했다.
1984년 동아기획에 소속되면서 낸 두 번째 앨범의 <사랑했어요>가 나이트클럽과 음악다방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면서 김현식의 이름도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듬해 내놓은 3집 앨범 <비처럼 음악처럼>은 30만장 이상 팔려나가며 그에게 여대생 팬군단을 선사했다. 그러나 공연장에서 팬들의 환호성이 높아갈수록 그는 더 외로워져갔다. 동아기획의 김영 대표는 “둘만 남아 있을 때면 그는 자주 울었다”고 전한다. 잠시 그를 행복하게 해주던 부인과 아들이 떠난 뒤 음주량도 급격히 늘어났고 파출소를 때려부수는 등 술주정도 심해졌다. 이미 알코올중독이 된 그는 해마다 한 차례씩 정신병동에 격리됐다. 사랑을 노래하고 이별을 서글퍼하던 그의 노래들은 대부분 병원에 갇혀 만들어진 곡들이다.
87년 대마초 사건으로 집행유예를 받은 뒤 그는 잠시 몸을 추스리는 것 같았지만 이내 다시 폭음을 하기 시작했다. 피붙이 가운데 그를 가장 많이 이해하던 누이마저 캐나다로 이민간 뒤 그는 아침에 눈뜨면 소주병부터 찾았다고 한다. 눈에 띄게 몸이 망가져갔다. 힘차던 그의 목소리가 탁해지고 이때부터 그의 노래에서는 피곤함과 권태로움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90년 5집 작업과 공연을 함께 한 기타리스트 함춘호가 “아픈데 왜 술을 먹어, 약을 먹어야지.” 다그치면 그는 빙긋 웃으며 남은 병을 비우곤 했다고 한다.
*서구 대중음악 수용의 완성
온몸이 퉁퉁 붓고 눈에 띌 정도로 배에 복수가 차면서 무대에 서는 그의 카리스마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깃들었다. 공연장에서는 환호하는 관객보다 눈물을 흘리는 관객이 더 많았다. 죽기 한달 전 병원에 입원한 그는 11월1일 김 대표에게 불쑥 전화를 해 “이제 괜찮다”며 “오늘 퇴원해서 내일 녹음에 들어가겠다”고 의욕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참 이야기를 마치고, 통화를 마친 뒤 불과 두 시간 만에 죽음을 알리는 전화가 왔다. 88년 4집을 낼 때부터 그는 술자리에서 입버릇처럼 “나는 술먹고 죽을 거야”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지만 그렇게 빨리 가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병원에 들어가기 직전 녹음한 그의 6집은 결국 유작 앨범이 됐다. 그리고 200만장 넘게 팔린 이 앨범은 언더그라운드의 별이었던 김현식을 하늘 위로 띄웠다.
요절한 천재의 작품들이 주로 그렇듯 생전에 ‘언더그라운드의 신파가수’로 인정받던 김현식에 대한 진지한 음악적 평가는 사후에 이뤄졌다. 대중음악평론가 강헌씨는 “80년대 대중음악사에서 그가 지니는 핵심은 서구 대중음악의 수용이 한국에서 어떻게 완성되었는가를 총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데 있다”고 평한다. 강씨에 의하면 1집에서 5집에 이르기까지 포크와 이지리스닝 팝, 록과 블루스, 퓨전에 이르는 서구 대중음악의 스펙트럼을 탐사해간 김현식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대중음악과 대중음악가들은 애호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으며 한국 대중음악의 사회적 구조가 혁신적으로 재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