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소통운동본부 CCCC| 소통 ! 여러분의 고견과 댓글로 대한 국민<가족> 소통 운동에 적극 동참을 소망합니다 !
박근혜정부에서는 동서남북 소통행정<소통정치>를 하실 줄 압니다. <<미래창조과학기술부 소관 주관하에>>.
나에게 의식주 문제를 담당한 분이 누구인지를 아시나요 ?<부모형제처자> 나의 건강 생명 사랑의 주관자 누구인지 아시나요?<조물주=창조주 하나님>
"인연을 소홀히 하면 내생에 악연이 되어 다시 만난다. 오다가다 옷깃만 스쳐도 만남은 삼백생의 인연이요,
같은 좌석에 앉아 대화를 하면 오백생의 인연이요,
같은 솥의 밥을 먹으면 칠백생의 인연이라..
같을 피를 나누면 구백생의 인연이요,
부부로 만나는 것은 천생의 인연이니라.......
금생의 인연이 참으로 중하니 어떠한 인연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 이니라...
- C C C C - 평택 소통 김 평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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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8일
오늘의 말씀
① 시편 8장 전문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2.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5.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21:5, 히2:9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창9:2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9.
② 잠언 8장 전문
○ 부르짖는 지혜
1.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2.
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사거리에 서며
3.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가로되
4.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5.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명철할찌니라 미련한 자들아 너희는 마음이 밝을찌니라 너희는 들을찌어다
6.
내가 가장 선한 것을 말하리라 내 입술을 열어 정직을 내리라 잠22:20
7.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 내 입술은 악을 미워하느니라
8.
내 입의 말은 다 의로운즉 그 가운데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없나니
9.
이는 다 총명 있는 자의 밝히 아는바요 지식 얻은 자의 정직히 여기는바니라 잠14:6, 사35:8
10.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
11.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무릇 원하는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
12.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14.
내게는 도략과 참 지식이 있으며 나는 명철이라 내게 능력이 있으므로
15.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전7:19, 전9:16, 잠29:4
16.
나로 말미암아 재상과 존귀한 자 곧 세상의 모든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 대하1:10
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18.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
19.
내 열매는 금이나 정금보다 나으며 내 소득은 천은보다 나으니라
20.
나는 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평한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21.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함이니라
○ 창조에 참여한 지혜
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23.
만세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요17:5
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욥15:7
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욥26:10
28.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29.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로 명령을 거스리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시24:2, 시104:5
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요1:1, 요1:2, 마3:17
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
○ 초청하는 지혜
32.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33.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으라 그것을 버리지 말라
34.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35.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요17:3
36.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오늘의 역사
① 왕건, 후삼국 통일(936) : 신라·후백제·고려간의 후삼국 관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920년부터였다.
하지만 신라는 이전부터 계속되어 온 견훤과 궁예의 침략으로 인하여 영토가 날로 줄어드는 데다가 중앙 정부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고 지방에서 힘을 키운 호족들은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으므로 이미 나라의 형태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였다.
따라서 후삼국 통일은 고려와 후백제간의 싸움으로 결판나는 형국이었다.
궁예를 몰아낸 왕건의 고려는 신라에 대해 화친정책을 쓰고 후백제에 대해서는 화전 양면책을 썼다.
초반 고려는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견훤의 공격이 매우 맹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세는 전혀 뜻밖으로 두 나라의 국경선이 아니라 신라의 영역이었던 고창(지금의 안동)에서 결판나고 말았다.
후백제는 고려와 신라의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서 고창 일대에 대해 군사적 압박을 가하였다.
그러나 고려로서도 이 지역을 사수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929년 12월 견훤은 군사·교통의 요지인 고창군을 포위 공격하였다.
왕건은 이곳을 구하기 위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고창군에 들어가 그곳을 지키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듬해 정월 병산에서 견훤의 군대와 결전을 벌여 크게 무찌르고 인근 30여 성을 얻는 쾌거를 이루었다.
935년 후백제의 내분으로 왕위에서 축출된 견훤이 유폐지인 금산사를 빠져나와 고려의 영토인 금성(지금의 나주)로 달아나오자 그를 개성으로 맞아들여 극진하게 대우하였으며, 또 같은 해 10월에는 신라 경순왕이 항복함으로써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936년 태조는 견훤의 간절한 청에 따라 후백제에 대한 군사 행동을 개시하여 양군은 일선군(지금의 선산)의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
하지만 후백제는 더 이상 고려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도 사기가 크게 저하되어 있었다.
결국 변변한 접전도 해보지 못하고 후백제의 중군이 무너지자 신검은 항복을 하고 말았다.
후백제는 견훤이 나라를 세우고 백제의 부흥을 도모한 지 45년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반면 왕건은 한국사상 최대의 내란기였던 후삼국을 통일하고 새로운 통일 왕조를 시작하였다.
② 국토의 분단(1945) :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와의 대립이 날카로와지는 가운데 소련군은 북한으로 진주하였고, 이어 1945.9.8에는 「하지(Hadge)」중장 인솔하에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남한에 진주하게 되었으며 이들은 38°선이 타의에 의하여 생겨나게 되었고 남북에서 군정이 실시되었다.
⇨9월 2일.
③ 연호를 단기로 결정(1948) : 대한 민국 정부 수립 후 연호에 관한 법률에 의해 단군기원을 공용연호로 제정, 서기 1948년을 단기4281년으로 결정했다.
⇨1월 1일.
④ 국토 개발 : 1981년까지의 10개년 국토개발기본․ 부문별․권역별계획 및 관리집행의 4부분 공표(1971.9.8).
국토개발의 의의는 국가전체의 경제․문화․사회 등의 종합적 입장에서 국토내의 자연조건을 감안한 개발․이용․보전등으로 산업의 적정화를 기하여 농업과 경제개발의 지역적 불균형을 시정하는데 의의가 있다.
⇨3월 31일.
⑤ 한-일 경제 각료회담(1966) : 1966년 오늘 !
한일 경제 각료 회담이 서울에서 열립니다.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처음 열리는 회담입니다.
일본의 후지야마 경제기획청장관을 비롯한 대표단 일행이 청와대로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해 내한 인사를 합니다.
경제기획원 회의실에서 열린 한일 경제 각료 회담 전체회의!
우리측은 장기영 경제기획원장관이 수석대표입니다.
이번 각료회담에서는 한일간의 경제협력과 통상증대 그리고 농수산과 해운, 항공등 4개분야의 현안 경제문제가 집중논의됐습니다.
특히 한국은 제2차 경제5개년 개발계획에 필요한 자금 2억8천5백만달러를 일본으로부터 상업차관 형식으로 도입하게 되는 성과를 거둡니다.
⑥ 미군 7사단 한국 진주(1945) : 1945년 오늘 !
존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군 제 24군단 예하 7사단 병력이 한국에 처음 도착합니다.
미군이 주둔한 학교에 성조기가 게양됩니다.
미군의 진주는 공식적으로는 연합국과 일본간에 맺어진 종전협정에 따른 것 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소련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한 응급조치 입니다.
서울에 진주한 미군은 조선총독과 일본 지휘관으로부터 항복을 받습니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11월말에는 총 7만여명에 달합니다.
⑦ 대일강화조약 체결(1951) : 9월 8일 일본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영국 등 48개국을 상대로 대일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제2차 세계대전을 완전히 끝맺고 세계 각국과의 국교를 새롭게 맺기 위한 것으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혹은 대일평화조약이라고도 한다.
이 조약은 이듬해인 1952년 4월 28일부터 발효되었다.
조약은 전문(前文)과 본문 7장 27개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기에 몇몇 나라와의 의정서, 국제조약 가입 및 전사자(戰死者)의 분묘에 관한 2가지 단독 선언이 추가되었다.
영토처리문제에 대해서는 한반도의 독립을 승인하고, 타이완과 펑후 군도[澎湖群島], 지시마 열도[千島列島], 사할린 섬 남부 등에 대한 모든 권리와 청구권을 포기하며 남태평양 제도의 구(舊) 위임통치지역을 미국이 단독으로 신탁통치한다는 내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밖에 배상문제, 안전보장문제, 일본 내 신탁통치문제 등이 규정되었다.
회의 참가국과 관련해 타이완과 중화인민공화국 중 어느쪽을 중국의 대표로 인정할 것인가에 대해 미국과 영국 간 의견 불일치로, 양쪽 모두 회의에 초청받지 못했다.
또한 인도․미얀마․유고슬라비아는 초청을 받았지만 참가하지 않았고 소련․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는 참가했지만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다.
일본은 조약에 참가하지 않은 이들 국가와도 1952~58년 2국 평화조약, 혹은 그에 대신하는
⑧ 동남아 집단 방위 조약기구 조인(1954) : SEATO.
South East Asian Treaty Organization.
마닐라에서 열린 미국․영국․프랑스․타일랜드․오스트레일리아․필리핀․뉴질랜드․파키스탄 등 8개국 외상회의에서 태평양 헌장과 동시에 조인함으로써 1955.2.19에 발족,설립된 기구이다.
SEATO는 상비군을 보유하지 않는 대신 합동군사훈련에 참가하는 회원국들의 군사력에 의존했으며, 평의회 또는 대표단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는 사무총장이 방콕에 있는 참모부를 대표했다.
SEATO는 존립목적을 방위에 국한했는데, 특히 동남아시아 지역을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주의로부터 방위해야 할 필요성에 따라 설립되었다.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 등 3개국은 1954년의 제네바 협정 등을 이유로 회원국으로 인정되지는 않았으나 의정서에 의해 군사보호를 승인받았다.
기타 나머지 남아시아나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비동맹 외교정책을 유지했다. 파키스탄이 1968년 탈퇴했고, 1975년에는 프랑스가 재정지원을 중단했다.
SEATO는 1976년 2월 20일 마지막 군사합동훈련이 있은 뒤 1977년 6월 30일 공식 해체되었다.
⑨ 미국 쿠바주둔 소련군 철수 요구(1979) : 1979년 오늘 !
미국의 카터 행정부는 쿠바에 주둔한 소련군 전투여단의 철수를 강력히 요구합니다.
소련군의 규모는 3천명으로 알려졌습니다.
소련측은 사흘뒤인 9월 11일 푸라우다지를 통해 소련군 전투부대에 쿠바주둔에 대한 미군에 모든 발언들은 근거없는 것이라고 반박합니다.
결국 소련의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쿠바주둔 소련군은 훈련이외의 어떤 임무도 수행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함으로써 이 사태는 일단락됩니다.
⑩ 미국 여자오픈 테니스 결승(1952) : 1952년 오늘 미국 여자 오픈 테니스 선수권 대회 !
수많은 관중들이 열여덟살의 모린 코널리선수가 우승할 것인지에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모린 코널리 선수가 당당하게 우승을 차지합니다.
일년 뒤 여자선수로서는 처음으로 4개의 세계 선수권대회를 석권하면서 "그랜드 슬램"을 기록합니다.
⑪ 뉴기니 민속축제 열기(1969) : 문화 인류학의 보고 뉴기니 섬 !
1969년 오늘 뉴기니의 원주민들은 민속 축제에 참가합니다.
2년에 한차례씩 개최되는 뉴기니 민속축제 !
북소리에 맞춰 경쾌하게 춤을 춥니다.
아직도 독립하지 못한 뉴기니 섬 !
축제가 개최된 동부 기니아는 영국과 독일의 점령 기간을 거쳐 현재는 오스트레일리아 영토 !
이번 행사도 오스트레일리아 정부가 주관했지만 원주민들은 전통문화를 알릴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합니다.
섬에 서쪽은 인도네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⑫ 후세인 요르단왕 군인 격려(1970) : 1970년 오늘 !
요르단 군인들이 후세인 국왕을 열광적으로 환호합니다.
보름 뒤에 개시될 팔레스타인 게릴라들과의 전면전을 앞두고 후세인 국왕은 군의 사기 진작을 시도합니다.
3년전 아랍이 이스라엘에 패배한 뒤 수많은 펠레스타인 난민들이 요르단으로 흘러들어 왔습니다.
팔레스타인 군사 게릴라조직이 차츰 후세인 국왕의 통치를 위협하자 후세인 국왕은 자신의 군사조직을 강화합니다.
미국과 영국등 서방측 국가의 도움을 받아 군사력을 증강하고 자신에 대한 충성심에 따라 군인들을 승진시켰습니다.
후세인 요르단 국왕은 서방측과의 유대관계로 이웃 아랍국가로부터 불신을 받고 팔레스타인과의 갈등은 결국 전면전으로 확대됩니다.
후세인 국왕은 전쟁에서 승리하지만 그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는 온건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⑬ 올림픽 습격 게릴라 추모(1972) : 1972년 오늘 !
이집트의 회교도들이 사원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독일 뮌헨올림픽 선수촌에서 숨진 아랍 게릴라 네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섭니다.
이스라엘 선수 열한명을 숨지게한 아랍게릴라 추모 기도회는 엄숙하게 거행됩니다.
이번 기도회는 부녀자들도 남자들과 함께 참여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세계적인 테러사건의 주범들이었지만 이집트 회교도들에게는 신성한 전쟁의 기수로 추앙됐습니다.
⑭ 영국 앤공주 마술경기 출전(1973) : 1973년 오늘 소련 케이프의 한 마술 경기장 !
세계적인 마술 선수 영국의 앤공주가 말에서 떨어집니다.
앤 공주는 소련 선수와 선두다툼을 벌이다 장애물을 넘는 순간 말의 뒷다리가 걸리면서 말에서 떨어집니다.
1973년 유럽 마술선수권대회에서는 챔피언 자리를 내놓습니다.
지난해 챔피언이었던 앤공주는 부상당한 채 소련선수에게 영광을 넘겨줍니다.
⑮ 인도 무굴제국 멸망(1858) :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
16세기 전반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인도의 델리를 수도로 하여 17대 동안 계속된 왕통을 가지며, 영국 침입 전의 최후의 통일 세력이 되었던 무슬림 왕조(1526~1857).
무굴제국의 시조 바부르는 중앙 아시아를 전전한 후 카부르를 점령하고,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1526년 인도에 침입, 델리 왕조의 하나인 로디조(1451~1526)의 이브라힘왕을 델리 북방의 파니파트 전투에서 격파하고, 델리를 탈취하여 여기에 무굴제국을 창시하였다. 바부르의 뒤를 이은 후마윤은 벵골,비하르 지방에서 일어난 아프간계 수르조(1539~55)의 셰르 샤에게 패하여, 40년 일단 페르시아로 도망하였다가 55년에 재차 델리를 점령하고 일시 중단 되었던 무굴 왕조를 부활하였다.
⑯ 뉴 칼리지→하버드 : 1636년 9월8일 보스턴. 북미 대륙 최초의 대학이 문을 열었다.
목사 양성을 위해 세워진 학교의 이름은 뉴 칼리지. 말이 대학이지 달랑 학생 9명으로 출발한 이 학교는 오늘날 하버드대학교로 불린다.
명문으로 발돋움한 첫번째 계기가 바로 교명 변경. 1838년 31세 때 폐결핵에 걸려 요절하면서 800파운드와 서적 400권을 기부한 존 하버드(John Harvard) 목사 덕에 교사를 증축하고 도서관을 꾸며 대학다운 대학으로 거듭났다.
구매력으로 평가한 당시 돈 800파운드의 가치는 요즘 돈 14만7,871달러 상당. 책이 귀하던 시절이어서 기부한 서적의 가치는 훨씬 컸다. 셰익스피어의 후원자였던 외삼촌에게 물려받은 책을 학교에 기부한 하버드 목사의 이름이 대학에 새겨진 것은 1639년 3월. 사망 6개월 후였다.
하버드 목사가 남긴 400권으로 출발한 이 대학 중앙도서관은 1,530만권을 소장, 세계 4대 도서관으로 꼽힌다.
800파운드로 시작한 대학기금은 2005년 현재 259억달러. 대학으로서는 세계 1위다. 학생 9명은 2만여명(대학원생 1만3,000여명 포함)으로 불어났다.
개교 371년 동안 배출한 인물도 부지기수다.
미국 대통령만 13명이 나왔다.
노벨상 수상자는 41명에 이른다.
하버드가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동문은 전사자. 캠퍼스 곳곳에 조국을 위해 싸우다 사망한 재학생ㆍ졸업생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하버드로 대표되는 미국이 세계 1위를 달리는 저력이 여기에 있다.
공공에 기부하고 위험한 일에 솔선수범하는 정신.
반대인 나라가 있다.
기부에 인색하고 가진 자일수록 병역을 기피하는 곳, 목사의 기부는 더욱 찾기 힘든 사회, 그러면서도 국가와 대학의 경쟁력이 낮다고 타령하는 나라. 한국이다.
(서경.권홍우 편집위원.2007한국아이닷컴)
⑰ 이탈리아, 연합군에 공식 항복(1943) : 연합국(미국, 영국, 소련 등)과 동맹국(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으로 나뉘어 팽팽하게 전개되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제일 먼저 무너진 나라는 이탈리아였다.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승리한 연합군이 1943년 7월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에 상륙한 직후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은 실각했다.
국왕 빅토르 엠마누엘 3세의 신임 아래 새 총리가 된 피에트로 바돌리오는 “우리는 여전히 독일 편에 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말뿐이었다.
바돌리오 총리는 물밑에서 연합군 측과 휴전 협상을 벌였다.
그해 9월 3일. 바돌리오 총리는 연합군과 휴전 협정에 조인했다. 그리고 닷새 후인 9월 8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연합군 사령관은 이탈리아가 항복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공식 항복 발표 후 이탈리아는 혼란에 빠졌다.
엠마누엘 국왕과 바돌리오 총리는 독일의 보복이 두려워 로마에서 도망쳤다.
이탈리아 군대는 아무런 명령도 받지 못하고 방치됐고, 많은 부대가 스스로 해산했다.
독일은 이탈리아의 배신에 분노했다.
항복 발표와 함께 히틀러는 독일군에 이탈리아로 진군하도록 명령했다.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점령되면 발칸 반도에 머물던 독일의 주력 부대가 연합군의 사정권에 들어가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밀듯이 밀고 내려온 독일군은 옛 전우였던 이탈리아군의 무장을 해제했다.
저항한 이탈리아군은 살해됐다.
이탈리아군과 독일군이 함께 주둔해 있던 그리스의 케팔리니아 섬에서는 대학살이 벌어졌다.
독일군은 이탈리아군이 보유한 군수품이 연합군에 넘어가면 장차 자신들을 겨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장 해제를 두고 갈등을 빚던 양측은 교전에 돌입했다.
전투 중 1600여 명의 이탈리아군이 숨졌다.
전투에서 승리한 독일군은 막바지에 항복한 5000여 명의 이탈리아군을 총살했다.
체포 감금돼 있던 무솔리니는 독일군에 구출돼 북부 이탈리아에 나치스 괴뢰정권을 세웠다.
그로부터 2년도 되지 않은 1945년 4월 25일 무솔리니는 반(反)파쇼 의용군에 붙잡혀 그달 28일 총살당했다.
히틀러는 바로 다음 날인 29일 자살했다.
전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던 두 독재자는 비슷한 날짜에 비슷하게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동지에서 적으로 돌아선 그들의 군대는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남겼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2007)
⑱ 독일군, 소련 레닌그라드 900일 포위 개시(1941) :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오늘 나치스 독일군의 기나긴 레닌그라드 포위가 시작된다.
레닌그라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당시 이름이다.
독일군은 이날부터 1944년 1월 18일까지 무려 900일 동안 레닌그라드를 둘러싼 채 공격을 계속했다.
육상은 물론 인접한 라도가(Ladoga)호수의 수상 통로도 완전히 차단해 모든 물자의 수송을 끊었다.
소련 붉은군대는 1943년 1월 12일에야 총공세를 펼치기 시작해 엿새 만에 라도가 호수 쪽의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군은 이듬해인 44년 1월에야 독일군들을 이 도시로부터 멀리 쫓아낼 수 있었다.
소련 정부는 9백일 동안 레닌그라드 시민과 군인 67만여 명이 굶어죽거나 동사했다고 발표했다.
이보다 훨씬 많은 백50만여 명이 숨졌다는 비공식 집계도 나왔다.
소련 정부는 독일군에 맞서 싸워 주권을 지킨 레닌그라드에 '영웅도시'라는 호칭을 내렸다.
⑲ 콰트론 스캔들 : 징역 18개월에 보호관찰 2년, 벌금 9만달러. 뉴욕 법원이 2004년 9월8일 프랭크 콰트론(Frank Quattroneㆍ당시 49세)에게 내린 판결이다.
담당판사는 최고 형량(16개월)보다도 높게 선고했다.
네스케이프와 시스코ㆍ아마존닷컴의 가능성을 예견하고 상장까지 이끈 ‘기술주 투자의 지존’ 콰트론은 왜 법정에 섰을까.
주가조작과 증거 인멸, 위증죄 탓이다.
첫 직장인 모건스탠리에 근무할 때부터 그는 연봉 1,000만달러를 받는 슈퍼 애널로 통했다.
도이치모건그렌펠(1996년)을 거쳐 1998년 이적한 CSFB에서도 이름값을 톡톡히 해냈다.
IT투자 19위에 머물던 CSFB는 2년 만에 업계 1위로 올라섰다.
콰트론은 최고경영자에 버금가는 권력도 누렸다.
공식 연봉 1억2,000만달러 외에 투자수익의 15%를 인센티브로 받았다.
인사권까지 행사하던 그의 몰락은 닷컴 버블 붕괴와 함께 찾아왔다.
업계의 평균 수수료인 주당 6센트보다 훨씬 높은 최고 3달러15센트까지 받던 그를 조사하던 증권거래위원회는 추가 혐의를 속속 찾아냈다.
월 10만달러씩 회비를 내는 ‘프랭크와 친구들’의 고급 회원들과 내부자 정보를 교환해 주가를 조작한 혐의가 포착된 것.
특검까지 투입된 조사 끝에 그는 결국 회사는 물론 월가에서도 쫓겨났다.
콰트론 스캔들을 계기로 도덕경영에 나선 CSFB(2006년부터 CS)는 요즘 미국 투자은행들이 모기지 사태로 휘청거리는 와중에서도 뛰어난 경영실적을 올리고 있다.
콰트론은 올해 3월 투자자문회사를 세우며 월가에 재등장했지만 약 5년 동안 당국의 집요한 조사를 받아야 했다.
국내에서도 이 같은 끈질긴 수사가 가능할까.
최근 대통령의 사위를 비롯한 재벌 2~4들이 주가조작 혐의를 받고 있다.
귀추가 주목된다.
(권홍우 편집위원.서경.2008.인터넷한국일보(www.hankooki.com))
⑳ 獨V2 로켓 런던 공습(1944) : 1944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밀려 궁지에 몰리게 된 독일의 히틀러에게 한 편의 영화가 전달됐다.
지상에서 발사된 길이 14m, 무게 125t의 거대한 로켓이 100km를 넘게 날아가는 모습을 영화로 본 히틀러는 “6년만 일찍 개발됐었더라면…” 하며 가슴을 쳤다고 한다.
히틀러는 즉각 탄두만 980kg인 이 거대한 로켓을 만들 대규모 공장을 짓도록 지시했다.
그로부터 2개월여가 지난 9월 8일 이 거대한 로켓이 영국 런던 하늘에 나타났다.
단 한 대의 폭격기도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거대한 폭탄이 쏟아져 내리는 모습을 본 런던시민들은 경악했다.
보복무기(Vergeltungswaffe) 2호의 머리글자를 따 ‘V2’로 명명된 이 로켓은 이후 6개월여 동안 3000여 발이 발사됐고 런던을 포함한 연합국 주요 도시 시민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대형 트럭을 이용한 이동식 발사대에서 쏘아지는 데다 당시로는 요격이 불가능한 시속 5760km의 속도로 날아오는 V2 로켓에 연합군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V2 로켓의 명중률이 매우 낮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은 목표 지점에서 몇 km씩 떨어진 지점에 떨어졌고 런던으로 발사된 V2 로켓 중에는 해협을 건너지 못해 바다에 떨어진 것도 적지 않았다.
V2 로켓의 비싼 생산비용은 오히려 독일군의 골칫거리가 됐다.
V2 로켓 한 발의 제조비는 전투기 한 대의 제조비와 비슷했다.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독일이 만든 V2 로켓은 6000여 발로 탱크 4만8000여 대를 만들 수 있는 비용이 V2 로켓 제조에 들어갔다.
1945년 전쟁이 끝났지만 V2 로켓의 주가는 떨어지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미국과 소련은 V2 로켓 개발 연구원과 발사되지 않은 V2 로켓 확보 경쟁에 나섰다.
미국은 V2 로켓 개발자인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를 포함해 126명의 주요 연구원을 수백 발의 V2 로켓과 함께 미국으로 데려갔다.
소련으로 압송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미군에 붙잡힌 브라운 박사는 1950년부터 미국 육군병기공장의 유도탄 연구 기술부장으로 장거리로켓을 연구했다.
1960년부터는 미국항공우주국(NASA)에 소속돼 아폴로계획을 포함한 우주개발계획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덕분에 V2 로켓에 사용된 엔진구조와 유도제어 기술은 아폴로 우주선인 새턴 5호에 이용될 수 있었다.
소련도 V2 로켓 발사 연구원과 V2 로켓을 확보한 덕분에 소련 최초의 미사일인 R1을 만들어냈다.
(이현두 기자 ruchi@donga.com.2008)
㉑ 방코르(Bancor) : '세계경제가 폐허를 딛고 순항할 길은 무엇인가.'
2차 대전이 한창일 무렵 영국 경제학자 케인스의 고민이다.
그의 대안은 국제무역기구(ITO)와 국제청산동맹(ICU) 설립. 국제화폐 '방코르' 도입도 추가했다.
방코르는 세계중앙은행의 역할을 맡을 ICU가 국제무역 대금결제용으로 발행하는 세계화폐. 전쟁이 터진 경제적 이유를 '국제수지 흑자경쟁'으로 간주한 케인스는 어떤 국가도 시장을 장악하고 막대한 무역흑자를 축적할 수 없는 시스템으로 ICU와 방코르를 제시했다.
케인스의 방안에 따르면 각국은 은행의 당좌대월 고객처럼 ICU로부터 배정받은 한도(5년간 평균 무역 거래량의 절반)를 초과할 경우, 즉 수입이 누적돼 방코르가 부족할 경우 이자를 물고 환율을 내려야 한다.
반대로 수출이 많아 방코르가 쌓일 경우에도 일정액 이상은 이자를 부담하고 환율을 올리도록 했다.
케인스는 이 시스템으로 국제무역이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여겼다.
방코르 구상은 1941년 9월8일 발행된 '전후 통화정책'이라는 작은 책자를 통해 소개된 후 전후 국제경제 질서를 모색하기 위한 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영국의 공식의견으로 제안됐으나 금융 패권국으로 올라선 미국이 주장한 금ㆍ달러 본위제에 밀려났다.
그 결과는 익히 아는 대로다. 초기에는 작동하는 것 같았으나 막대한 전쟁비용 등으로 미국의 재정이 고갈되면서 세계의 골칫거리로 전락해버렸다.
케인스의 영혼이 방코르 부활의 주문을 걸고 있는 것일까.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 무덤 속의 방코르가 주목 받는 분위기다. 미국은 일축하고 있으나 달러를 믿지 못하는 중국과 유럽 쪽에서 글로벌 불균형을 해소할 대안으로 방코르 도입론이 나오고 있다.
'앙코르(encore), 방코르!'
(인터넷한국일보.2009)
㉒ 기욤 아폴리네르(Apollinaire, Guillaume;1880.8.26 ~ 1918.11.
9) ‘미라보 다리(Le Pont Mirabeau)’를 노래하다(1911) : 미라보 다리.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간다
그러나 괴로움에 이어서 오는 기쁨을
나는 또한 기억하고 있나니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날들은 가고 나는 머무네.
손에 손을 잡고서 얼굴을 마주 보자
우리들의 팔 밑으로
매끄러운 물결의
영원한 눈길이 지나갈 때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날들은 가고 나는 머무네.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은 흘러간다
사랑은 흘러간다
삶이 느리듯이
희망이 강렬하듯이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날들은 가고 나는 머무네.
날이 가고 세월이 지나면
가버린 시간도
사랑도 돌아오지 않고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만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날들은 가고 나는 머무네.
⇨8월 26일.
⇨11월 9일.
㉓ 기타 오늘의 역사㉔㉕㉖㉗
1898 캐나다 장로교 한국 선교결의
1898 경부철도 부설에 관한 한일조약 조인
1900 텍사스주 갈버스턴에 허리케인으로 인한 해일, 6천명 사망 1904 디어도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에 당선
1920 뉴욕-샌프란시스코간 항공우편 개시
1926 독, 국제연맹 가입
1939 독일군, 바르샤바에 침공
1942 일제, 금속 회수령 공포
1943 이태리,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
1944 독일 장거리 로케트 V2 개발
1946 불가리아 왕정 폐지 국민투표, 공화제 채택
1948 성서신앙 창간.기독교 잡지.전주의 신우사 발행으로 발행인은 선교사 린턴이었고 편집인은 정기환이었다.
1955 아데나워 서독 수상, 2차대전 후 처음으로 소련 방문
1958 국제올림픽위원회, 올림픽서 중공 제외를 발표
1966 북한, 한국문제해결 위한 참전국회의 제안(10일 정부 거부)
1966 MRA(Moral Re-Armament) 아시아대회 개막
1966 북한, 한국문제 해결 위한 참전국회의 제안
1970 잠비아서 제3회 비동맹제국 수뇌회의 개막
1972 정부, 요미우리 서울지국 폐쇄. 주간지 별책이 북한찬양 원인
1973 소련 반체제 물리학자 사하로프가 기자회견을 해 "다수의 반 체제인사가 정신병원에 격리돼 약물투약으로 지적능력이 위 험해지고 있다"고 폭로
1974 제럴드 포드, 닉슨에 대통령재임시 모든 위법행위에 대한 사 면령
1974 닉슨 미국대통령, 워터게이트사건으로 불명예 사임
1979 법원, 신민당총재단 직무정지 가처분결정
1981 리비아, 소련에 항만 개방
1982 부산대, 경남 합천군 쌍책면 사양리서 세계최대 이암(泥岩)자 연동굴(길이260m) 발견
1986 도이 다카코, 일본 최초의 여성 당수(사회당)로 선출
1997 진로그룹 화의신청
오늘의 인물
① 세조(世祖 ; 1417 - 1468.9.8) : 세종의 둘째 아들.
문종의 동생.
수양대군.
문종이 죽고 조카 단종이 12세에 등극하자 왕위 찬탈의 야심을 품고 정인지, 한명회 등과 공모하여 문종의 고명으로 단종의 보호책임을 맡은 황보인 등을 죽이고 아우 양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킨다음 스스로 영의정이 되어 병마의 대권을 잡아 왕위를 강탈하였다.
그러나 정사에 정근하여 볼만한 정치가 많았다.
② 계용묵(桂鎔黙 ; 1905.9.8 - 1961.8.9) : 소설가.
평북 선천 출생.
일본 토요대학 철학과 졸업.
1924년 단편 〈상환〉으로 문단에 등단.
대표작으로 〈백치 아다다〉, 장편 〈별을 헨다〉등이 있다.
③ 윤천주 사망(2001) : 전(前) 문교부 장관-서울대 총장.
문교부 장관 등을 지낸 윤천주씨가 2001년 9월 8일 향년 80세로 별세했다.
윤천주 옹은 학자․교육행정가․정치인으로 왕성한 활동을 해 온 '현실 참여파' 정치학자였다.
한국의 정치․선거 풍토를 '여촌야도(與村野都)'라는 4자성어로 정리하는 등 많은 정치 조어를 만들어 냈다.
1947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윤옹은 이듬해 고려대 법정대에서 처음 강단에 섰다.
한국 전쟁 중인 1951년 공군에 입대, 1956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윤옹은 "정치학은 실천학문"이라며 5․16 이후 공화당 초대 사무총장으로 정계에 투신했다.
그는 1964~1965년 문교부 장관을 지내다 학원사태로 물러났다.
재임 당시 국장들이 셔츠 바람으로 장관실에 드나들게 할 만큼 수수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다.
윤 옹은 1967-1971년엔 공화당 전국구 의원(7대)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1973-1975년 부산대 총장, 1975-1979년 서울대 총장을 역임했다.
윤 옹은 '한국정치체계서설'(61) '우리나라의 선거실태'(81) '한국정치체계'(91) 등 저서를 냈으며, 1978년 학술원 회원으로 선임됐다.
여론조사와 선거결과를 연계시켜 국민의식에 따른 정치행태를 규명했다는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아왔다.
1983-1995년 단국대․인천대․방송통신대에서 강의를 했으며, 최근까지 학술원 회지에 논문을 기고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선비와 관료는 검소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40여년간 서울 삼선동 한옥을 지켰고, 3년 전엔 자신이 소장했던 책 1000여권을 고려대에 기증했다.
④ 최충(崔沖 ; 984 ~ 1068.9.8) : 고려의 문신.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해동공자로 불렸다.
1013년 국사수찬관으로 《칠대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047년 법률관들에게 율령을 가르쳐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했다.
농번기의 공역 금지 등을 상소하여 시행했고, 동여진를 경계하여 국방을 강화했다.
벼슬에서 물러나 송악산 아래 사숙을 열고 많은 인재를 배출했는데 이를 문헌공도(文憲公徒)라 했다.
본관 해주(海州).
자 호연(浩然).
호 성재(惺齋)·월포(月圃)·방회재(放晦齋).
시호 문헌(文憲).
1005년(목종 8) 문과에 장원, 1011년(현종 2) 우습유(右拾遺)가 되었다.
1013년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 때 태조에서 목종까지의 《칠대실록(七代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1033년(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등을 지내고 1037년(정종 3) 참지정사국사수찬관(參知政事國史修撰官) 때 《현종실록(顯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1041년 서북로병마판사(西北路兵馬判事)로 나가 영원(寧遠) ·평로(平虜)에 진을 치고, 산성개수(山城改修)를 감독했다.
1047년(문종 1)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서 법률관들에게 율령(律令)을 가르쳐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1050년 서북면도병마사(西北面都兵馬使) 때 농번기(農繁期)의 공역(工役) 금지와 국가 재정의 낭비를 막도록 상소하여 시행했고, 동여진(東女眞)의 동태를 파악, 국방을 강화하는 등 업적을 쌓고 1053년 궤장(几 杖)을 하사받았다.
나이가 많다고 사직을 상주하자 만류 조서가 내려지고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協謀同德治理功臣)의 호와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 문하시중상주국치사(開府儀同三司守太師 兼 門下侍中上柱國致仕)라는 훈작을 내렸고, 1055년 내사령(內史令)을 삼은 후 다시 추충찬도좌리 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이라는 호를 내렸다.
벼슬에서 물러나 송악산(松岳山) 아래에 사숙을 열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이를 문헌공도(文憲公徒)라고 했는데, 12공도(公徒) 중의 하나이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추앙받았다.
처음에는 정종의 묘정(廟庭)에, 후에 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해주 문헌서원(文憲書院)에 제향되었다.
《귀법사제영석각(歸法寺題詠石刻)》(개성)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원주) 《홍경사개창비(弘慶寺開創碑)》(직산) 등의 글씨가 남아 있고, 저서에 《최문헌공유고(崔文憲公遺稿)》가 있다.(두산백과사전)
⑤ 양세봉(梁世奉 ; 1896 ~ 1934.9.8) :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천마산대에 입대하여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하였고 조선혁명군 총사령이 되었다.
한중연합군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호는 벽해(碧海)이고, 양서봉(梁瑞鳳)이라고도 한다.
평북 철산(鐵山)에서 출생했다.
1919년 3 ·1운동 직후 최시흥(崔時興) 휘하의 천마산대(天摩山隊)에 입대하여 일본의 행정기관 파괴, 친일파 암살 등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 천마산대를 따라 중국 지린성[吉林省]으로 건너가 1923년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 소대장과 제3중대장을 역임하다가 조선혁명군 총사령에 취임하였다.
1932년 중국의용군 총사령과 이춘윤(李春潤)과 한중연합군을 조직, 융링제성[永陵街城]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싱징현성[興京縣城]을 함락시켰다.
그해 재차 융링제성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장칭먼[江淸門]으로 퇴각, 재기를 도모하던 중 일본 육 ·공군(陸空軍)의 대규모 공격에 패하고, 일본첩자의 유인으로 퉁화현[通化縣] 터우다오거우[頭道溝]에서 일본군에 포위되어 독립군 전원과 함께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95년 8월 29일 랴오닝성[遼寧省] 신빈형[新賓縣] 왕칭먼[旺淸門]에 그의 조각상이 세워졌다.(두산백과사전)
⑥'메조소프라노 대모' 성악가 이정희 사망(1998) : 1998년 9월 8일 한국 메조소프라노의 대모 이정희씨가 별세했다.
광복 후 외국유학을 다녀온 1세대 성악가로, 1950-197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메조소프라노로 활약했다.
1950년 현제명 오페라 '춘향전'을 시작으로 국립오페라단원 시절 한국초연 오페라 메조소프라노 배역 70% 정도를 그가 소화했다.
이씨가 출연한 주요 오페라는 '카르멘' '춘향전' '가면무도회' '리골레토' '파우스트'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등이다.
연간 20편씩 오페라 무대를 누비는 외에 베토벤 합창교향곡 솔리스트, 가곡 무대서도 이름을 날렸다.
이씨는 서울대 음대를 거쳐 미국 줄리아드음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1년 서울대음대 전임강사를 시작으로 32년 간 교수로 재직하면서 메조소프라노 윤현주, 백남옥, 소프라노 박정원, 김인혜 등 제자를 길러냈다.
재미 소프라노 신영옥도 이씨에게 배웠다.
이씨는 타계를 앞두고 소장 악보와 음악서적 일체를 서울대음대 성악과에 기증했다.
⑦ 조연현(趙演鉉 ; 1920.9.8 ~ 1981.11.24) : 문학평론가.
순수문학을 옹호하였다.
예술문화윤리위원회 위원장, 문학평론가협회장, 펜클럽 한국본부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한국현대문학사》, 《한국현대작가론》 등이 있다.
본관 함안
호 석재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경남 함안
주요수상 3.1문화상, 예술원공로상, 5월문예상
주요저서 《한국현대문학사》,《한국현대작가론》,《문학과 생활》
⇨11월 24일.
⑧ 그룬트비(Nikolai Fredrik Severin Grundtvig ; 1783.9.8 -
1872.9.20 : 덴마크의 신학자.
시인.
역사가.
정치가.
덴마크 중흥의 아버지로 불린다.
“하나님을 사랑하자.
이웃을 사랑하자.
땅을 사랑하자.” 고 주창, 실천궁행했다.
⑨ 메르센느(Marin Mersenne ; 1588.9.8 - 1648.9.1) : 프랑스의 신부.
데카르트와 동창, 친구.
사람들은 그를 데카르트의 ‘파리 대리 공사’라고도 불렀다.
⇨2월 11일.
⑩ 드보르작 출생(1841) : 체코슬로바키아의 음악가.
1904.5.1 사망.
드보르자크는 오늘날 스메타나와 함께 체코의 국민 음악가로 꼽힌다.
그들이 살던 시절 체코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다.
드보르자크는 젊은 시절 스메타나가 지휘자로 있던 프라하의 가설 극장에서 비올라 연주자로 일하기도 했다.
정식으로 받은 음악 교육은 프라하 오르간 학교에서의 2년이 전부였지만, 드보르자크는 독학으로 베토벤, 슈베르트, 바그너, 리스트 등 선배 음악가들을 연구했고, 마침내는 체코 민족의 애환을 담은 독자적 작풍으로 일가를 이뤘다.
그가살던 19세기 후반은 표제음악의 전성기였지만, 그는 시세를 거슬러 절대음악쪽으로 기울었다.
드보르자크는 어려운 성장기를 보냈지만, 생전에 충분히 영예를 획득했다.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고, 뉴욕 내셔널 음악원 원장으로 초빙돼 미국을 방문했고, 귀국해서는 프라하 음악원 원장이 됐고, 오스트리아의 상원 의원에 임명되었다.
내셔널 음악원의 초청으로 미국에 머물고 있을 때만든 신세계 교향곡은 드보르자크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일 것이다.
1893년 뉴욕 필하모니 교향악단에 의해 카네기 홀에서 초연된 신세계 교향곡은아메리카 인디언이나 흑인들에게 고유한 음악풍을 부분적으로 차용해 조국 체코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드보르자크가 거의평생을 거주하며 지극한 애정을 보인 프라하는 빼어나게 아름다운 도시다.
시내를 흐르는 블타바강(몰다우강)에 놓인 돌다리 카렐교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몽환과 현실이 포개진다.
카프카도 릴케도 그 다리 위에서 몽상에 잠겼다.
프라하는 또 20세기 언어학과 문학 연구에 큰 흔적을 남긴 프라하 학파의 근거지였다(고종석,2002).
⇨5월 1일.
⑪ 루도비 코 아리오스토(Ludovico Ariosto ; 1474.9.8 - 1533.
7.6) : ⇨7월 6일.
이탈리아의 시인.
레지오에밀리아에서 태어나 페라라에서 졸(卒).
처음에 법률을 배우다가, 뒤에 고전문학을 연구, 생애의 대부분을 페라라의 에스테 후작의 궁정에서 일하였다.
샤를 마뉴 전설의 영웅 롤랑을 주인공으로 하는 대표작 <광란의 오를란도>는 보이아르도의 미완작 <사랑에 빠진 오를란도>의 독창적인 후편인데, 르네상스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이탈리아 르네상스기 문학에서 아리오스토는 흔히 마테오 보이아르도(1441~1494)와 묶여 거론된다.
아리오스토의 대표작인 서사시 광란의 오를란도(Orlando furioso: 1516)가 보이아르도의 서사시 사랑에 빠진 오를란도(Orlando innamorato: 1476~1483)의 후편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두 시인은 또 그 시절 페라라 지역의 문화촵예술을 지원하던 에스테 후작 집안에 차례로 몸을 의탁하기도 했다.
보이아르도의 사랑에 빠진 오를란도와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오를란도는 11세기 프랑스 무훈시 롤랑의 노래(La Chanson de Roland)를 새롭게 쓴 것이다.
오를란도는 샤를마뉴대제의 무장(武將) 롤랑의 이탈리아식 이름이다.
778년 8월15일 스페인 원정에서 돌아오던 샤를마뉴대제가 피레네 산맥에서 사라센군에게 패배한 사건을 소재로 삼은 롤랑의 노래는 그 뒤 유럽에서 수많은 기사도(騎士道) 이야기의 원천이 되었다.
보이아르도와 아리오스토는 자신들의 서사시를 통해 신심 깊은 전사(戰士) 이미지가 강했던 롤랑에게 나약한 연인 이미지를 짙게 입혔다.
특히 아리오스토는 광란의 오를란도에서 롤랑의 비극적 연애에다가 자신이 의탁하던 에스테 집안의 선조 루지에로의 모험적이고 성공적인 연애담을 보탬으로써 후원자의 후의에 보답했다.
롤랑과 오를란도의 예에서 보듯, 유럽어에서는 역사적촵신화적 인물들의 이름을 각자 제 나라식으로 부르는 일이 흔하다.
예컨대 1066년 잉글랜드를 정복한 노르망디공 윌리엄은 프랑스에서는 기욤, 독일에서는 빌헬름, 이탈리아에서는 굴리엘모, 스페인에서는 기예르모가 된다.
물론 근대 이후의 영국인 윌리엄이라면 어디서나 윌리엄이다(고종석,2004).
⑫ 슈트라우스 사망(1949) : ⇨6월 11일.
⑬ 기타 오늘의 인물
1100 클레멘스 3세 대립교황 사망.구이베르트,구이베르토 또는 라 벤나의 위베르트가 교황이 된 후에 선택한 칭호.
1157 영국왕 리처드 1세 출생
1380 베르나르디노 출생.프란체스코회 선교사이자 개혁가.그의 고향사람들 사이에 광범위한 복음 사업을 수행했으므로 가끔 [이탈리아의 사도]라 불렀다.
1474 서사시 '성난 오를란도'로 유명한 이탈리아 시인 아리오 스토 출생
1522 스페인 항해사 후안 데 엘카노, 마젤란의 탐험으로 시작된 최 초의 세계일주 완수하고 귀국
1565 현재의 플로리다주 세인트 오거스틴에 최초의 유럽인 영구정 착
1574 홀 사망.노르위치의 감독.시인과 풍자문학가로서의 경력을 가 졌던 그는 후에 성직을 수임하고 1601년 서포크주에서 홀스 테드의 성직록 받음.
1644 퀄즈 사망.영어로 된 우의시화집 중 가장 유명한[Emblemes and Hieroglyphikes]로 기억되고 있는 종교시인.
1713 우니게니투스 교서 공포.케넬에 의해 제시된 101개의 제안들 을 정죄하는 클레멘스11세의 교서.
1780 오이코노무스 출생.저명한 그리스 신학자.1857년 5월 20일 사 망.
1787 뱅상 출생.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교도.그는 프랑스 프로테스 탄트교에 독일신학을 소개하고자 노력했다.
1804 독일의 서정시인 뫼리케 출생
1809 칠레의 대통령 몬트 출생
1829 플라트 출생.루터교의 외국 선교 주창자.고소너선교회의 초대 총무등을 역임.
1830 프랑스 시인 미스트랄 출생
1841 스웨덴의 시인 스노일스퀴 출생
1842 니스트림 출생.일반침례교도.1872년 침례교 설립재단의 후원 으로 독일.영국.스코틀랜드 등지를 여행함.
1872 그룬트비 출생.덴마크의 주교,시인 및 찬송가 작곡가.덴마크 국가와 교회생활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1873 연극-영화감독 막스 라인하르트 출생
1873 매케이 출생.1970년 4월 18일에 사망.그는 모르몬교 제9대 회장을 지냈다.
1894 독일 과학자 헬름홀츠 사망
1897 컨트리음악 개척자 지미 로저스 출생
1900 미국 플로리다주 상원의원 클로드 페퍼 출생
1922 코메디언 시드 캐서 출생
1923 베어드 내한.미국 북장로회 선교사,한국명 배의취.초대선 교사 베어드의 3남으로 평양에서 출생.강계에서 부인과 봉사하였다.
1925 배우 피터 셀러스 출생
1932 컨트리음악 가수 팻시 클라인 출생
1953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 사망
오늘의 세시
① 백로(白露) : [요약] 24절기의 하나로 처서(處暑)와 추분(秋分) 사이의 절기이다.
양력 9월 8일경부터 추분 전까지, 음력으로는 8월절이다.
가을에 접어드는 시기로 일조량이 많아서 곡식이 여무는데 좋다. 제철식품으로 포도가 있어서 포도순절(葡萄旬節)이라고도 한다.
[본문]
처서(處暑)와 추분(秋分) 사이에 드는 절기로, 24절기 가운데 열다섯째에 해당한다.
양력으로는 태양의 황경(黃經)이 165°에 이르는 9월 8일경부터 추분(9월 23일경) 전까지이며, 음력으로는 8월절이다.
이 시기에는 밤 동안 기온이 크게 떨어지며, 대기 중의 수증기가 엉겨서 풀잎에 이슬이 맺힌다.
완연한 가을로 접어들어 선선하고 차가운 기운이 돌며, 특히 추석 무렵으로 만곡이 무르익는 시기이다.
장마도 걷히고 맑고 깨끗한 날씨가 계속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따금 태풍으로 인해 벼포기가 쓰러지거나 해안 지방에서는 해일로 인해 농작물이 해를 입기도 한다.
옛 중국에서도 이 시기를 5일씩 3후(候)로 나누어
① 기러기가 날아오고
② 제비가 돌아가며
③ 뭇 새들이 먹이를 저장한다고 하였다.
간혹 음력 7월 중에 들기도 하며, 제주도에서는 백로에 날씨가 고르지 않으면 오이가 썩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경상남도 인근의 섬 지역에서는 '백로에 비가 오면 십리천석(十里千石)을 늘린다'고 하여 이 날 비가 오는 것을 풍년의 징조로 여겼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무렵을 전후해서는 기온도 적당하고 맑은 날이 이어지기 때문에 일조량이 많아 곡식이 여무는 데 더없이 좋다.
따라서 이 때 비가 내리면 적당한 햇살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벼농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어 비가 오는 것은 좋지 않다. '백로에 비가 오면 오곡이 겉여물고 백과에 단물이 빠진다'는 말은 이에서 연유한 말이다.
예부터 내려오는 이 시기의 대표적인 제철식품으로는 포도가 있다.
이른바 '포도순절(葡萄旬節)'이라 하여 백로에서 추석까지의 기간을 일컫는데, 편지 첫머리에 '포도순절에 기체만강하시고' 하는 따위의 구절은 바로 이 무렵에 포도가 성한 것을 비유해 멋스럽게 표현한 것이다.
⇨1월 5일.
⇨2월 29일.
⇨9월 9일.
오늘의 샘터
① 신세계 교향곡 : 미국에서도 서부인 아이오아(Iowa)는 당시 아직도 신대륙적 색채와 환경을 남기고 있었으며, 그 곳의 「스필빌」 의 거리에는 보헤미아의 이민(移民)이 많이 살고 있었다.
「프라그」음악원에서 작곡의 강좌를 담당하고 있다가 1892년 초빙을 받고 미국에 건너와 뉴욕 국립 음악원 원장으로 있던 드보르작은 흑인 영가(黑人靈歌)에 대한 깊은 관심과 고향 보헤미아에의 향수(鄕愁)에 젖어, 서부의 이 조그마한 한촌(閒村)에 잠시 머물러 작곡에 전념(專念)하였다.
흑인 영가의 소박한 선율을 기조(基調)로 하는 「신세계 교향곡」은 1895년 이렇게 하여 만들어 졌던 것이다.
초연(初演)하였을 때 뉴욕의 부인들을 울렸다고 하는 이 곡은 끝없이 넓은 옥수수 밭에서 일손을 잠시 멈추고 타는 듯한 붉은 낙일(落日)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는 것 같은, 조용한 애상의 곡조에 넘쳐 있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까닭없이 달콤하면서도 구슬픈 감정에 사로 잡히게 하는 것은 드로브작의 망향(望鄕)의 상념이 이 곡 속에 담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드보르작의 집은 보헤미아의 시골로서 여관과 우육(牛肉) 판매업을 겸하고 있었다.
그의 밑에 7인의 형제가 있었기 때문에 가계(家計)가 빈곤하였으므로 16세 때 비로소 부친의 허락을 받아 프라그의 오르간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② 조선의 왕과 그 수명 : 조선의 왕은 모두 27명이었다.
그러나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을 제외하면 조선의 정식왕은 25명이다.
이들 조선의 왕들은 대체로 오래 살지 못했다.
30~40대 사망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가장 장수한 임금은 제21대왕 영조로 83세로 운명하였다.
반면 가장 단명한 임금은 세조에 의해 죽음을 당한 제6대왕 단종으로 그때 나이 17세였다.
25명 조선 왕들의 사망당시 연령을 보면,
60대 이상은 태조(74)․정종(63)․숙종(60)․영조(83)․고종(67) 등 5명 뿐.
50대에 사망한 왕은 태종(56)․세종(54)․세조(52)․선조(57)․인조(55)․순종(53) 등 6명,
40대 왕은 효종(41)․정조(49)․순조(45) 등 3명,
30대 왕은 문종(39)․성종(38)․중종(39)․인종(31)․명종(34)․현종(34)․경종(37)․철종(33) 등 8명,
20대 왕은 예종(20)․헌종(22) 등 2명,
10대 왕은 단종 한명 뿐이다.
왕으로서 재위기간이 가장 긴 왕은 영조로서 1724년 8월부터 1776년 3월까지 무려 51년 7개월이 된다.
반면 재위기간이 가장 짧은 왕은 제12대왕 인종으로 1544년 11월부터 1545년 7월까지 겨우 8개월 보름에 불과했다.
③ 알콜(Alcools) : [요약]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의 대표적 시집.
구분 시집
저자 기욤 아폴리네르
시대 1913년
[본문] 1913년 초판 간행. 프랑스 시의 갖가지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구두점의 폐지, 기타 대담한 기술적 혁신을 시도하여 프랑스 시에 새로운 길을 열어 놓았다.
섬세하고 유연한 표현과 유동적인 리듬으로 우수가 깃들인 신선한 서정 세계를 묘사한 이 시집에는 《미라보 다리 Le Pont Mirabeau》 등 애송되는 시도 많다.
20세기 전반의 프랑스 시단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두산백과사전.2010))
⇨8월 26일.
⇨11월 9일.
④ 오늘의 문답
제01문 : 당신은 <공자><공짜> 그리고 <맹자><맹짜>를 아십니까?
답 : 공자와 맹자는 사람이고, 공짜와 맹짜는 글자<짜>입니다.
제02문 : 당신, 사람 공자<맹자>는 하나<둘>이지만, 글자 공자<맹자 >는 하나<둘>이 아닌 것 <잘>아세요?
답 : 공자와 맹자가 얼마나 <몇이나> 되나 볼까요 .....
공자 : 公子, 孔子, 共字, 空, 功, 供, 恭, 供
. 맹자 : 孟子, 盟字, 盲, 猛, 氓.
제03문 : 당신, 33, 66, 77, 88, 99라는 숫자 아셔요 ?
답 : ① 칠뜨기같이(77), 구구(99)하게 살지말고, 팔팔(88)하게, 백살(99+1)까지 귀귀하게 삽시다!
② 33 ? 66 ? 55 44 22 11. 00.....
의 졸저<원저 편저자 (1973년도 초판)> 평택 소통 김평탁입니다.
1973년 초판 이래 조선일보를 비롯 각 신문들과 각방송국 특히 ytn 을 비롯하여 컴퓨터 인터넷.......오늘까지도 각 방송들과 신문 인터넷의 덕택으로 원저자의 보람을 온 국민들과 함께 만끽하며 감사 만족해 하고 있습니다.
소생은 하나님의 말씀<성경>과 개인<일기>를 60여년 동안 지금까지 쓰고 보존해 오면서,
오늘의 국민 소통 운동과 우리 한민족 한가족 소통 운동을 제창하게 되었으며 다행히도 박근혜정부<한민족미래창조과학기술부>의 탄생을 한없는 기쁨과 소원<소망>을 기대하고 있답니다.
국민 여러분 !
그리고
국내외 동포<가족> 여러분 !
어서빨리 동서남북 우리나라 남북 평화 통일을 이루십시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샬롬 !
2013년 08월 13일 광복절을 앞두고
CCCC C-man 평택 소통 김 평 탁 올림
(국민소통운동본부.017-727-3863,(031)692-3650
평택건강생명사랑상담소<교회> 본교회는 상담 대화 토론 소통 중심의 교회입니다.
소통이란 말<용어>부터 살펴봅니다.
영통 0통 1통 2통 3통 4통 5통 6통 7통 8통 9통 10통 100통 1.000통 10.000통………….
소통은 바로 영통부터 시작됩니다.
소통=영통
소통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한 말이고, 영통은 사람과 하나님과 관계된 말로서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통한다는 말입니다.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사람 곧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과는 절대관계 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 이며, 하나님은 창조주<조물주>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상대관계입니다.
절대관계 절대 !
상대관계 상대 !
우리 국가<민족>동포의 지도자<영도자>는 <영통>부터 시작하여(영통령)<소통령><중통령><고통령><대통령>(원통령)이어야 하겠습니다.
(국민소통운동본부.CCCC 017-727-3863,(031)692-3650 ,1588-9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