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21. 12. 12(주일) - 대림절 셋째 주일 - (2021년 50주)
제목; “낮은 자들을 위한 복된 소식”
성경; 사 61:1-11 (p. 1042) (시 126:1-3, 272<330>, 91<91>, 6장)
<예배의 부름> (시 126:1-3)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 대림절 첫째 주일 : “소망”의 촛불 ★ 두 번째 주일 : 「평화」의 촛불
★ 세 번째 주일 : 「사랑」의 촛불
“우리는 사랑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선포하기 위해 이 불을 켭니다.
이 놀라운 사랑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 첫 주 복습 : 대림절 ☞ 교회력으로 새해 시작, - 의미: 오심= 과거적, 현재적, 미래적
- 색상 : 보라색 = ‘참회’를 상징
※ 둘째 주 복습 : 촛불예배의 의미 ☞ 촛불: 기쁨을 알리고, 죄의 어두움을 제거하는 상징
I. 크리스마스와 카드의 유래와 의미 :
1. 크리스마스의 유래 : Christmas = Christ + mass
1) 그리스도(Christ) = 메시아 = ‘기름부음 받은 자’ =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2) 마스(mass) = 가톨릭의 ‘미사’ 혹은 ‘예배’를 뜻함.
∴ 크리스마스 =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고 예배한다’는 뜻이다.
* 먹고 마시고 노는 날이 아니다.
① ‘평화의 주’로 오신 그리스도
②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오신 그리스도
③ ‘구원의 메시아’로 오신 그리스도
2. 크리스마스 카드의 의미 :
- 카드를 보내는 풍습 ;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1840년대 영국으로부 터 시작되었다고 짐작된다. ▶ 이때부터 최초의 카드가 발행되었다.
- 최초의 카드 ; 1843년 ‘코울호슬리’ 카드가 최초인데, 그 그림은 ‘카드 가운데는 행복 스런 한 가정의 모습을 그리고, 그림 옆에는 굶주린 자를 먹여주고 헐벗은 자를 입혀 주는 두 사람이 그려진 카드’였다.
- 그후 점차 크리스마스 인사를 위해 카드가 유행되어지고, 1960년대 새 인쇄술의 발달에 따라 싼 값으로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고 오늘날 상인들의 상품이 되기에 이르렀다.
∴ 크리스마스 카드는 크리스마스 인사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나심을 알리기 위해서 유 래되었다.
※ 강 목사 성탄절 카드 : 그해 가족 사진을 넣어서 만드는 특별한 성탄절 카드이다. 이유는 ‘한 해 동안 우리의 가족들이 이만큼 잘 살아왔습니다. 다 여러분 모두의 기도와 성원 때문입니다’하는 감사의 마음으로 카드를 만들고 보낸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림절 세 번째 주일, ‘사랑의 촛불’을 밝혔습니다. 누군가 ‘사랑은 희생이요, 관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성탄절 카드를 나누는 이유는 서로의 안부를 전하며,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복된 소식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성탄절 카드는 내가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대림절 세 번째 주일, ‘사랑의 촛불’을 밝히고 다시 오실 예수님 오심을 준비하는 오늘,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참 사랑과 평화가 충만하며 생명을 살리시기를 기원합니다.
II.
우리가 성탄절 카드를 나누는 이유는 서로의 안부를 전하며,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복된 소식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요즘 금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는데, 지금부터 백여년전 미국의 캘리포니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때 ‘골드 러쉬(Gold Rush)’라고 하는, 금광을 찾으려고 수많은 무리들이 서부로 향하던 1850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사진 보며)
한 감리교 목사님이 그 현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금을 찾으러 간 것이 아니라 영혼을 찾으러 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는 그가 설교를 할 수 있는 교회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있는 모임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주일 아침이 되면 늘 통으로 만든 연단 위로 올라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무슨 소식일까요? 무슨 소식일까요?”
처음엔 무심히 지나치던 사람들이 계속 반복해서 외치는 그의 말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과연 무슨 소식이 있는 걸까?’ 하고 궁금히 여긴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는 자기 주위로 모여든 사람들을 향하여 크게, “여러분! 오늘 아침 여러분께 전할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라고 말하고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 금광에 복음이 열기가 치솟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기쁘고 즐거운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소식이 무엇이겠습니까?그것은 인류의 구원자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소식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사 61:1-11)은 바로 가장 아름다운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께서 보내신 메시아의 사명과 사역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1-2절말씀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는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사명을 말한 누가복음 4:18-19절에 인용된 말씀이며, 이사야서에 자주 등장하는 메시아 예언들 가운데 하나로써, 예수님께서 누가복음에 기록된 첫 안식일 회당 설교에서 이 말씀의 성취를 선포하셨던 본문입니다.
제가 언젠가 이사야서 말씀을 설교하면서, 이사야서가 1-39장, 40-55장, 56-66장등으로 세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1-39장은 바벨론 포로 이전에, 40-55장은 바벨론 포로기에, 56-66장은 바벨론 포로 귀환 후의 기록으로 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포로기 이후 시대에 관한 예언을 기록한 제3이사야 56-66장을 세분하면, 55-59장은 회복될 예루살렘의 모습, 60-66장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회복과 위로, 미래의 소망에 관한 말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분명히 이스라엘 민족의 총체적인 타락과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유다 왕국의 멸망과 포로 생활의 역사를 경험했던, 그 당시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큰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포로 귀환 후의 위로와 구원의 말씀에 속해있는 오늘 본문 이사야 61장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의 오심과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1-3절은 메시아의 사명 곧 구원 사역에 관하여, 4-9절은 메시아의 구원 사역의 결과로 시온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회복에 관하며, 10-11절은 메시아의 사역에 대한 기쁨으로 감사의 찬송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에, 포로된 백성들의 구원과 회복, 위로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큰 위로와 구원의 메시지가 됩니다.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 사역을 예언하는,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은 우리에게 어떤 위로와 사명을 주십니까?
1. 메시아의 사명 : 구원 사역(1-3)
1) 메시아는 낮은 자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1).
오늘 본문 1절은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라고 말합니다.
메시아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이유와 목적이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갇힌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 곧 자유와 해방의 복된 소식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가난한 자”는 바로 다음에 나오는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갇힌 자”와 일맥상통하는 말입니다.
① 첫 번째 사명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기 위함입니다.“가난한 자”(아나윔, ענוים)는 ‘괴롭히다’, ‘천하게 하다’는 동사 ‘아나’(ענה)에서 유래한 ‘가난한’, ‘고생하는’이란 뜻의 형용사 ‘아누’(ענו)에서 온 명사입니다. 특별히 ‘가난한’, ‘궁핍한’이란 뜻의 ‘에브욘’(אביון)이 주로 물려받은 재산을 탕진해서 물질적으로 ‘가난하다’는 뜻인데 반해, ‘아누’는 처음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없는 가난한 자를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아나윔’은 경제적으로 빈곤한 자를 의미하는 “가난한 자”(욥 24:4), 강자에게 억압받는 사회적인 약자인 “곤고한 자”(시 34:6)를 의미하는 명사입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은 ‘프토코이스’의 단수인 ‘프토코스’(πτωχός)를 사용하여, 천국을 소유할 마음이 있는 “심령이 가난한 자”를 표현합니다(마 5:3). 따라서 여기서 “가난한 자”는 영적으로, 육적으로 핍절한 자 모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 이들은 물질적으로 가난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압박받는 아무런 힘도 능력도 특권도 없는 자들이며, 세리와 죄인과 같이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는 자들을 말합니다. 메시아 예수님은이런 자들을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② 두 번째 사명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기 위함입니다.“마음이 상한 자”(니쉬베레, נשׁברי)는 ‘부수다’, ‘깨뜨리다’, ‘산산 조각내다’는 뜻의 동사 ‘샤바르’(שׁבר)의 명사형으로 여기서는 ‘깨뜨려진 자들’이란 뜻입니다. 이는 마음이 세상적으로나 영적으로 상처를 받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앞서 언급한 “가난한 자”(아나윔)이 스스로 마음이 가난한 상태에 있는 자들을 의미한다면, “마음이 상한 자”(니쉬베레)는 외부에 의하여 마음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절망 상태에 있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메시아 예수님은이런 자들을 고치기(치유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사 53:4-5).
③ 세 번째 사명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포로된 자”(쉬부임, שׁבוים)는 ‘전쟁에서 패한 나라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소유물로 삼는다’는 뜻의 동사 ‘샤바’(שׁבה)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영적인 의미로 죄와 사탄의 소유물이 된 가련한 자들을 의미합니다(눅 4:18). 전쟁에 패하여 포로된 자들이 바뀐 환경이나 자신이 처한 암담한 처지들로 인해 불안해 하며 갈등을 겪듯이, 죄와 사탄의 소유물로 전락한 죄인도 죄와 사탄의 영향으로 심한 갈등 상태에 있으며 포로된 자처럼 평안이 없습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마귀가 왕노롯하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④ 네 번째 사명은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갇힌 자”(아수림, אסורים)는 ‘묶다’, ‘감금하다’라는 뜻의 동사 ‘아사르’(אסר)에서 파생된 단어로, 이는 어떤 일에 대한 처벌로 감옥에 구금된 자들을 의미합니다(창 40:3, 민 15:34, 왕상 22:27). 죄를 지은 사람은 그 사람이 처벌을 면하고자 도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감옥에 가두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문자적인 의미 외에도 영적으로 죄에서 본질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이전의 관습을 벗어나지 못해서 여전히 죄의 사슬에 묶여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인간은 그리스도로 인해 죄에서 해방되었어도, 다시 죄를 때마다 또다시 죄의 노예가 됩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이런 자들에게 그들이 확실히 죄에서 놓였음을 선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약에 무수히 예언된 바와 같이 메시아 예수님은 2천여년 전에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분명히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기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탄의 권세 아래서 신음하는 자들에게 완전한 영적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메시아 예수님의 오신 목적과 사명을 정확하게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가난하고, 마음이 상하고, 포로되고, 갇힌 자들에게 참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는 아름다운 소식, 복된 소식,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2) 메시아는 인생의 대전환을 가져오셨습니다(3).
오늘 우리의 본문을 자세히 주의하여 보면,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는 등 위로를 주시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슬퍼하는 자의 재를 대신하여 기쁨의 기름으로, 근심을 대신하여 찬송의 옷으로 바꾸어 주신다’고 하십니다. 또 죄의 열매만을 맺던 우리를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낼 ‘의의 나무’가 되게 해주신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사실은 우리 인생의 대전환을 의미합니다. 마이너스 인생이 플러스 인생으로 변화하는 것을 뜻합니다. 죽을 인생이 새 생명으로, 죄인이 의인으로 변하는 것을 뜻합니다. 메시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바꿔주십니다(고후 5:17).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인간들을 생명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켜 택하신 족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꿔주십니다(벧전 2:9-10).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베드로와 같은 하찮은 어부가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됩니다(마 4:18-19). 민중의 고혈을 빨아먹던 세리장 삭개오가 선한 독지가, 자선가로 돌변하여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합니다(눅 19:8). 사울과 같은 피의 박해자를 변화시켜 바울이 되게 하고, 이방인을 위한 최고의 선교사가 되게 합니다(행 22:21). 이처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인생이 변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인생의 대전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온 자기 자신의 인생에 대해 심한 회의와 좌절을 안고 고민하시는 분 계십니까? 우리를 새롭게 하시며 우리 인생의 대전환의 열쇠를 쥐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 지금 곧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을 의의 나무로 변화시켜주어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낼 자로 바꿔주시는 메시아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메시아는 은혜의 새 시대를 가져오셨습니다(2).
아무리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믿는 자들의 인생을 대전환시켜 주셨다 하더라도 예수님 당대의 사역으로만 그쳤다면 그게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예수님 시대 사람들에게만 은혜가 있을 뿐이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2절에서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것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새 시대의 개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세상에 들어와서 이제까지 인류 위에 왕노릇하였지만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왕노릇한다는 것입니다(롬 5:19).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우들을 향해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메시아 예수님은 은혜의 새 시대를 가져오신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면 모든 죄의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얻게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만 믿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알파와 오메가시요 처음과 나중이십니다(계 1:8). 따라서 은혜의 시대를 개막하신 예수님께서 은혜의 시대를 닫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은혜의 시대가 열려있는 동안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든 성도들은 은혜의 시대가 열려있는 지금, 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구원의 복음을 나눠주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2. 메시아의 구원 사역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시고, 인생의 대전환을 가져오며, 은혜의 새 시대를 가져오신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의 근원이 되시는 메시아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구체적인 결과는 무엇일까요?
1) 황폐되고 무너진 곳들이 회복될 것입니다(4).
오늘 본문 4절에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옛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은 황폐화되어졌습니다. 이 황폐해진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재건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곳곳에서 황폐해진 예루살렘의 회복과 재건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의 종의 말을 세워 주며 그의 사자들의 계획을 성취하게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거기에 사람이 살리라 하며 유다 성읍들에 대하여는 중건될 것이라 내가 그 황폐한 곳들을 복구시키리라”(사 44:26)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사 49:8) “이는 네 황폐하고 적막한 곳들과 네 파멸을 당하였던 땅이 이제는 주민이 많아 좁게 될 것이며 너를 삼켰던 자들이 멀리 떠날 것이니라”(사 49:19)
이 황폐되고 무너진 예루살렘의 회복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바사 왕 고레스의 바벨론 포로 귀환을 허락하는 칙령에 의해 이뤄집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통한 교회의 건설을 예언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메시아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창조해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회였습니다. 교회는 이 땅에 세워진 천상 성전의 모형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나눠주는 은혜의 보급소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세워주셨으나 인간의 생각과 욕망으로 인해 파괴된 교회의 본래 모습과 권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뜻이 앞서고,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인간의 음성이 더 큰 현재 교회의 모습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더불어 본래의 모습을 회복한 교회는 인간의 욕망으로 인간성이 파괴되고 자연과 환경이 파괴된, 황폐된 이 땅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2) 포로된 백성들이 여호와의 제사장, 봉사자로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 될 것입니다(6,9).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날에는 이스라엘의 원래 지위가 회복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방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더 이상 침략과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아닌 “여호와의 제사장”(6), “하나님의 봉사자”(6),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9)으로 불려지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개념들은 3절의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낼 자”라는 표현과 연결되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선민으로 불러주실 때의 본래 지위를 회복시켜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 예언은 출애굽기 19:5-6절의 “하나님의 소유,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라는 이스라엘 민족의 소명에 관한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스라엘이 본래부터 이방 나라를 구원으로 이끄는 ‘제사장 나라’(출 19:6)로 불림받은 대로 그 역할을 잘 감당할 것이며, 그로 인해 제사장 나라로 누릴 수 있는 모든 축복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가만히 살펴보면, 사실 메시아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 이스라엘은 편협한 선민 사상에 빠져서 이방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보다는 배척하는 오류를 범함으로 그들의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예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먼저 이스라엘에 전파되어 그들을 통하여 이방인에게 전파되었고, 그 결과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9-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메시아 예수님의 오심으로 내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봉사자로, 여호와께 복 받은 백성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얻은 백성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복을 받아누리게 되었음을 감사하고, 이 아름다운 덕을 온 누리에 선포하는 성도님들 다 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3. 메시아의 사역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찬송(10-11)
여호와의 종, 메시아의 사명(1-3) 및 사명 수행의 결과(4-9)를 기록한 이후 본서 기자는 마지막으로 여호와의 종, 메시아에 대한 기쁨과 찬양(10-11)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까지 언급한 메시아의 도래와 사역에 대한 예언을 확증시키기 위해 과거 시제를 사용하였으며, 성취 이후에 부를 노래를 미리 부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미래에 대한 확신 가운데 불려지는 찬송이 드러나는 본 단락은 찬양의 이유(10)와 찬양을 일으키시는 하나님(11)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찬양해야 할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쁨과 즐거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10).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의 근원이 되시는 메시아의 구원 사역의 결과로 황폐되고 무너진 곳들이 회복되며, 포로된 백성들이 여호와의 제사장, 봉사자로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 되면, 세상 어떤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으로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은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히브리어 원문에는 “크게 기뻐하며”가 문두에 위치하는데, 벅찬 기쁨의 원인이 이스라엘의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기쁨은 무슨 일이 이루어졌는가 보다는 누가 그 일을 이루셨는가에 따른 것입니다. 신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웨딩드레스가 아니라 신랑입니다. 마찬 가지로 창조주요 구주이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참된 기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는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분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이’,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더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공의와 찬송을 솟아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11).
계속해서 11절에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께서 공의와 찬송을 모든 나라 앞에 솟아나게 하시리라”고 말합니다.
해마다 땅에서 싹이 움트듯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도 반드시 실현될 것을 확언해 주십니다.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는 창세기 1:11-12(“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에 나오는 창조 기사와 창세기 8:22(“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에 기록된 대홍수 직후의 약속을 연상시킵니다.
땅 자체가 싹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땅에서 싹이 나게 하십니다.이스라엘이 포로 생활 이전이든 이후든 자력으로는 의로운 모습을 드러낼 수 없겠지만, 하나님께서 공의를 덧입혀 주시고, 그로 인해 절로 찬송이 메아리치게 하실 것입니다.
메시아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받은 백성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구원과 의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기쁨의 보다 깊은 근원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고 외쳤던 하박국 선지자는 노래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7-19)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던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봅시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김으로 인해서 금 신상에 절하지 않으므로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 던져질 때, 하나님께서 이 풀무불 속에서 구원하지 않으실지라도 자기들은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겠노라고 고백했습니다(단 3:17-18,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고난받는 종 욥을 보십시오. 사탄은 욥이 하나님께 많은 복을 받았기 때문에 그처럼 신실히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시기했습니다. 하지만 영문도 모르게 갑자기 닥친 저주스런 환경 가운데서도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 2:10) 하고 말하면서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 기뻐하는 신앙의 참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남녀 간에도 진정으로 사랑해 보십시오. 아무리 어렵고 괴로운 일이 있어도 그 사람만 곁에 있으면 행복하고 만족하게 마련입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해 보십시오. 그 하나님으로 인해 시련과 환난이 와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환난 가운데 구원해 주시지 않아도 나를 도우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보다 깊은 근원은 바로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알고, 하나님 한 분 그 자체를 우리의 절대적인 기쁨과 즐거움으로 삼는 성도님들 다 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III.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우리 민요 한 곡 듣겠습니다. (☞ ‘아리랑’ 동영상 보고)
“아리랑”아마 대한민국 사람 중에 아리랑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10여년 전 이 “아리랑”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 1위에 선정됐습니다.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작곡가들로 구성된 선정대회에서 82%라는 높은 지지율로 단연 1위에 올랐습니다. 특히 선정단에는 단 한 명의 한국인도 없어 더욱 놀라게 했습니다. 우리 모두 긍지를 가져도 되겠다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그런데 혹시 아리랑의 참뜻을 알고 있는지요?
우리는 아리랑의 뜻에 대해 외국인이 물으면 한국인 임에도 불구하고 그 뜻과 의미를 제대로 답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확실하게 알고 있고 대답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리랑”은 어떤 노래이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아리랑”은 작가 미상의 우리나라 민요로써 남녀노소 누구나 잘 알고 부르는 노래로, 우리는 아리랑을 흔히 사랑에 버림받은 어느 한 맺힌 여인의 슬픔을 표현한 노래로 대충 그리 알고 생각하는데, 아리랑이라는 민요 속에 담긴 큰 뜻이 있습니다.
원래 참뜻은, ‘참 나를 깨달아 인간 완성에 이르는 기쁨을 노래한 깨달음’의 노래입니다.
“아”(我)는 ‘참된 나(眞我)’를 의미하고, “리”(理)는 ‘알다, 다스리다, 통한다’는 뜻이며, “랑”(朗)은 ‘즐겁다, 다스리다’란 뜻입니다.
그래서 “아리랑”(我理朗)은 ‘참된 나(眞我)를 찾는 즐거움’이라는 뜻입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것은 ‘나를 찾기 위해 깨달음의 언덕을 넘어간다’는 의미이고, “고개를 넘어간다”는 것은 곧 ‘피안의 언덕을 넘어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의 뜻은 ‘진리를 외면하는 자는 얼마 못가서 고통을 받는다’는 뜻으로, ‘진리를 외면하고 오욕락(五慾樂)을 쫓아 생활하는 자는 그 과보(果報)로 얼마 못 가서 고통에 빠진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아리랑의 이치(理致)와 도리(道理)를 알고 나면 아리랑은 ‘한(限)의 노래’나 ‘저급한 노래’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깊은 뜻이 담겨 있는 아리랑은 우리의 민요, 아니 이제 전 세계인의 노래가 되었음을 축하하고 기쁘게 생각해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2천년 전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구원과 영생을 허락해 주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그 메시아를 보내셔서 인류 구원을 완성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은 예수님 탄생 약 500여년 전, 하나님께서 메시아 예수님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의 말씀은 그 후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 세상에 오셨고, 인류 구원과 위로를 주셨습니다.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의 근원이 되시는 메시아 예수님은 가난하고 마음이 상하고 포로되고 갇힌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셨고, 인생의 대전환을 가져오셨으며, 은혜의 새 시대를 가져오셨습니다. 이런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의 근원이 되시는 메시아의 구원 사역은 구체적으로 황폐되고 무너진 곳들이 회복해 주셨으며, 포로된 백성들이 여호와의 제사장, 봉사자로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 되게 해주셨으며,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으로 기뻐하고 찬송하게 해주셨습니다.
다시 오실 메시아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고 이뤄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평화의 하나님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구원의 메시아로,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꼭 만나시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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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2일(주일) 주일 2부예배 facebook 실시간 송출한 동영상 url 주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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