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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如來의 語業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應云何知如來應正等覺音聲고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應知如來音聲이 徧至니 普徧無量諸音聲故며 應知如來音聲이 隨其心樂하야 皆令歡喜니說法明了故며 應知如來音聲이隨其信解하야 皆令歡喜니心得淸凉故며 應知如來音聲이化不失時니 所應聞者가無不聞故며 應知如來音聲이無生滅이니 如呼響故며 應知如來音聲이無主니 修習一切業所起故며 應知如來音聲이 甚深이니 難可度量故며 應知如來音聲이 無邪曲이니 法界所生故며 應知如來音聲이 無斷絶이니 普入法界故며 應知如來音聲이 無變易이니 至於究竟故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여래 응공 정등각의 음성을 알아야 하는가.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여래의 음성이 두루 이르는 줄을 응당 알아야 하나니, 한량없는 모든 음성에 두루 하는 연고이니라.
여래의 음성이 그들의 좋아하는 마음을 따라 다 환희케 함을 응당 알아야 하나니, 법문 연설하기를 분명히 하는 연고이니라.
여래의 음성이 그들의 믿고 이해함을 따라 다 환희케 함을 응당 알아야 하나니, 마음이 서늘하여지는 연고이니라.
여래의 음성이 교화하는 때를 놓치지 않음을 응당 알아야 하나니, 들을 만한 이는 듣지 못함이 없는 연고이니라.
여래의 음성이 나고 없어짐이 없음을 응당 알아야 하나니, 메아리와 같은 연고이니라.
여래의 음성이 주체가 없음을 응당 알아야 하나니, 일체 업(業)을 닦아서 일어나는 연고이니라.
여래의 음성이 매우 깊은 줄을 응당 알아야 하나니, 헤아리기 어려운 연고이니라.
여래의 음성이 삿되고 굽음이 없음을 응당 알아야 하나니, 법계로부터 나는 연고이니라.
여래의 음성이 끊어짐이 없음을 응당 알아야 하나니, 법계에 두루 들어가는 연고이니라.
여래의 음성이 변함이 없음을 응당 알아야 하나니, 끝까지 이르는 연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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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불자여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응운하지여래응정등각음성(應云何知如來應正等覺音聲)고: 어떻게 여래 응공 정등각의 부처님 음성을 알아야 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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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은
응지여래음성(應知如來音聲)이 : 여래의 음성이
변지(徧至)니 : 두루 이르는 줄 알아야 하나니
보변무량제음성고(普徧無量諸音聲故)며 : 한량없는 음성에 두루 하는 연고다.
부처님의 음성은 항상할 상(常)자를 써서 상음(常音)이라 하기도 하고, 진짜 음성이라서 진음(眞音)이라 하기도 한다.
한결같아서 일음(一音)이라 하기도 하고, 어디든지 막힘없이 뚫린다 해서 통음(通音)이라 하기도 하고, 누구에게나 적절하게 들린다 해서 원음(圓音) 원만할 원자 원음이라 하기도 한다.
일음연창(一音演暢)이라, 일음이다 진음이다 상음이다 통음이다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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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지여래음성(應知如來音聲)이 : 응당히 알아야 된다. 마땅히, 무엇을? 여래의 음성이, 부처님의 음성이
수기심락(隨其心樂)하야 : 그들의 좋아하는 마음을 따라
개령환희(皆令歡喜)니 : 모두 다 환희하게 하나니
설법명료고(說法明了故)며 : 법문 연설하기를 분명히 하는 연고이니라. 설법이 명료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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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지여래음성(應知如來音聲)이 : 응지하라, 여래의 음성이, 부처님의 음성이
수기신해(隨其信解)하야 : 그들의 믿고 이해하는 바를 수(隨) 따라서
개령환희(皆令歡喜)니 : 모두 다 환희하게 하는 줄을 알지니
심득청량고(心得淸凉故)며 : 심득청량고라. 마음의 번뇌가 싸악 열 받던 것이 꺼져버리고 시원한 아스피린 같다.
청량한 까닭이다. 심득청량고라.
부처님의 음성을 한 번 들으면 청량하다는 것이다.
제가 요즘에는 다른 분들에게도 간경(看經)을 많이 권한다. 스님들께서도 간경을 많이 하실 것이다. 간경이라고 하는 것이 간병할 때 쓰는 간(看)자를 쓴다. 간호사할 때의 그 간(看)자다. 손으로 눈으로 잘 살피듯이 보는 것이다.
사경을 하시든지 독경을 하시든지 어쨌든지 강의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저는 강의 전에는 경전을 먼저 세 번 다같이 읽었다. 한문을 세 번 읽고 그다음에 강의를 하였는데, 세 번 읽으면 읽는 저나 듣는 분들이나 무슨 뜻인지 되새김질이 된다. 그런 다음에 서로 뜻을 주고 받으면 강의가 편해진다. 그렇지 못하면 한문 풀이만 하다가 쭈욱 듣다가 졸리다가 잡생각하다가 희한하게 간다.
그러니까 같이 읽을 때는 한 번이라도 같이 읽는 것이 중요하다. 읽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한 자 한 자에다가 눈이 꼽히듯이 해서 보는 것이다. 그러면 한 번 읽는 것이 아니라 구백 번 삼백 번 읽는 턱이 된다. 그러면 명심(銘心)이 된다.
그렇게 안 하면 도대체 경전을 배웠는지 안 배웠는지 다음달 올 때는 홀딱 다 까먹고 콩나물시루에 물 빠지듯이 한 자도 기억이 안 난다.
그러니까 야무지게 한 번 읽고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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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지여래음성(應知如來音聲)이 : 여래의 음성이
화불실시(化不失時)니 : 마땅히 알아라. 교화하는 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소응문자(所應聞者)가 : 마땅히 듣는 사람이, 응당히 들을만한 사람이
무불문고(無不聞故)며 : 무불문고라. 들을 만한 사람은 귀에 다 들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기나 파리나 날개 있다고 자기도 새다, 이러면 안 되잖는가? 모기나 파리는 새가 아니다.
우리는 이제 모기 파리는 좀 면하고 참새쯤 안 되겠는가?
파닥파닥거리니까.
스님들이나 저나 대선지식은 안 되더라도 황새처럼 훨훨 날지는 못해도, 대붕처럼 날지는 못해도, 참새정도는 안 되겠는가. 포록포록 하고.
들을 만한 사람이 듣지 못함이 없는 연고다. 무불문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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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지여래음성(應知如來音聲)이 : 여래의 음성은
무생멸(無生滅)이니 : 생멸이 없다. 여래의 음성은 무생무멸이다. 이런 얘기를 제가 이렇게 비유한다.
텔레비전 화면에 불이 난 화재현장을 비추는데 텔레비전 화면은 절대 뜨겁지 않다. 영화 스크린에 나이아가라 폭포가 쏟아져도 강물이 흐르지 않는다.
그렇게 흘러가는 우리 의식세계를 경전에서는 폭류라고 한다. 폭류(瀑流) 폭포처럼 흘러내려 가는 것, 의식이 완전히 눈에 총알이 튀고 레이저를 쏘고 한다.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가는 것 폭류라고 한다.
폭류를 거슬러서 올라가는 것을 수행이라고 한다.
그것을 금강경 같은 데서는 수다원(須陀洹)이다. 수다가 끊어진다. 수다원과를 딱 증득하면 첫째 나타나는 현상이 사람이 말이 없어진다. 수다가 끊어진다 해서 수다원. 말이 끊어졌다고 하는 것은 안에 잡념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분별심이 끊어졌다.
그다음에 사다함(斯陀含)으로 올라가면 남 많이 사다준다고 사다함 의미가 그 정도 되는 것이다.
사다함쯤 되면 많이 사준다. 밥을 잘 산다. 평생 사도 ‘내가 샀다’고 생색내지도 않는다. 계속 사주는 사람이 사다함이다.
그다음 뭐든지 물으면 아나 모르나 할 때 대충 다 안다. 아나함(阿那含)이다.
완전히 다 알아버리면 책 덮어놓고도 강의하는 사람은 아라한(阿羅漢)이다. 가만 앉아서 부처님처럼 부처님은 책보고 하시는 것이 아니니까, 수도꼭지만, 수도꼭지도 아니다. 그냥 솟아오르는 옹달샘 같아서 앉으면 법문이 졸졸졸졸 나오고, 스위치 안 켜도 해가 환하게 떠오르는 것 같고, 굳이 선풍기 안 켜도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 같다. 어쨌든지
여호향고(如呼響故)며 : 여래의 음성은 메아리와 같은 연고이니라. 메아리라고 하는 것이 생명력이 없지 않은가?
물에 비친 그림자라고 하는 것이 생명력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음성이 굳이 있는 것은 누구 때문인가? 중생 때문에 있다.
그것은 세주묘엄품에도 나온다.
또 여래현상품 게송 중에 제일 유명한 것이 무엇인가?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 불신은 충만하여 법계에 가득하다.
보현일체중생전(普現一切衆生前)
수연부감미부주(隨緣赴感靡不周)라, 인연 따라서 중생 앞에 가지 않는 부처님은 한 분도 없다.
중생이 백만 명이면 부처님도 백만 명이다.
그래서 아미타불을 ‘도마죽위(稻麻竹葦) 무한극수(無限極數) 삼백육십만억(三百六十萬億) 일십일만구천오백(一十一萬九千五百) 동명동호(同名同號)’ 니도 아미타불 나도 아미타불 ‘대자대비(大慈大悲) 아등도사(我等道師) 금색여래(金色如來)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고 부른다. 아미타불의 이름은 똑같다.
니도 아미타불, 나도 아미타불 다 동명동호(同名同號)다. 이것은 무성을 이야기하고 무상이라서 모양이 없는 것이라서 이름이 똑같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모양이 있는 것은 이름이 다 다르다. 주민등록 번호가 다 다르다.
생멸법은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또 불생불멸의 법은 같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다, 이렇게 보면 된다.
생멸법에서는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한 나무에 자라는 데도 나무 이파리의 크기가 다르고 열매 굵기가 다르고 맛의 강도가 다르다. 사과도 햇볕 쪽에 있는 것의 맛하고 뒤쪽에 있는 것의 맛하고 또 다르다. 감자도 굵은 놈이 있고 작은 놈이 있다. 한 번 실험해 보시기 바란다.
생멸이라고 하는 것, 생겼다고 하는 것은 전부 차이가 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 것을 갖다가 차이가 안 나도록 하는 것을 뭐라고 하는가? 집착이라고 한다.
‘내가 이리 해 줬는데 니도 그리 해줘야지’
그렇게 하는 것은 집착이다.
‘니가 그래 해줬거나 말거나 나는 이리 할란다.’
어제 어른 스님 병문안을 갔다가 저녁 한 다섯 시쯤 되어서 공양을 같이 하게 됐다.
“저는 안 먹습니다.”
“그래 먹고 안 먹고는 니가 알아서 할 것이고, 차리고 안 차리고는 지혜월이 알아서 할 것이고.”
간단하지 않는가?
먹고 안 먹고는 먹을 사람인 제 소임이고, 차리고 안 차리고는 차리는 사람의 소임이다.
햇빛이 쏟아져서 부처님처럼 쏟아지는 것은 부처님의 소임이고,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중생의 지 소갈딱지이고 지 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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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지여래음성(應知如來音聲)이 : 여래의 음성이
무주(無主)니 : 주제가 없음을 알아야 된다. 이것을 우리 흔히 인아견(人我見)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내 마음속에 인아견이 없다. 색수상행식이 없다. 색수상행식은 분별망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으로써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
수습일체업소기고(修習一切業所起故)며 :온갖 업을 닦아서 업으로부터 일어나는 수습, 일체업소기라 업으로부터 일어난 바다. 업을 닦아서 일어나는 연고다.
업을 교리적으로 해석할 때는 작동이라고 한다. 동작개시 하는 것, 동작하는 것을 업이라고 하고, 업상이 딱 동하면 옆으로 밀어붙이면 바로 행이 된다.
무명(無明)이 연행(緣行)하고 무명 업이 딱 업상이 동하면 행상이 돋아난다. 행이 되고, 행이 되면 바로 기록을 한다. 행연식(行緣識)한다. 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분별망상이 전부 기록을 하는 것이다. 기록했던 것은 다 뿜어져 나온다.
식연명색(識緣名色) 명색연6입(名色緣六入)하고 그런 것을 현상이라고 한다.
6입연촉(六入緣觸)하고 촉하는 것이 아집덩어리다. 아집이 딱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촉연수(觸緣受)하고 촉이 있으면 수(受) 고수 낙수를 일으키는 것, 그것을 상속상이라고 한다.
수연애(受緣愛)하고, 괴롭다 즐겁다는 느낌이 일어났다고 하면 거기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고 받아 당겨서 수고스럽게 수락을 한다. 낙을 즐기려고 하고 고통에 빠지게 되고 고통에 빠지거나 즐기게 되면 수연에 애연취(愛緣取)하고 그 뒤에는 취착을 하게 된다.
취착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계명자상(計名字相)이라서 요리 조리 분별하는 것이다.
그다음에 취연유(取緣有)하면 업을, 드디어 신구의 삼업을 짓게 된다.
여기 업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옆에서 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저 앞의 무명으로부터 시작됐기 때문에 무명은 기동(起動)한다. 일어날 기자 움직일 동자, 지을 작자 움직일 동자.
작동한다 기동한다 조작한다 조업한다 작업한다는 것을 전부 업이라고 한다.
업은 작업을 했기 때문에 보(報)가 따른다. 업보, 과보, 결과가 따른다. 인과라고 하고 업보라고 한다.
그러니까 안 움직이면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이면 동즉유보(動卽有報)요 부동즉각(不動卽覺)이라 움직이지 않는 것, 여여부동(如如不動)을 즉명제불(卽名諸佛)이라 금강경에서 그렇게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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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지여래음성(應知如來音聲)이 :응당히 알아라, 여래의 음성이
심심(甚深)이니 :매우 깊은 줄 알아야 하나니
난가탁량고(難可度量故)며 : 헤아리기 어려운 연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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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지여래음성(應知如來音聲)이 : 여래의 음성이
무사곡(無邪曲)이니 : 삿되고 왜곡된 것이 없음을 알아야 된다. 사곡(邪曲)이라고 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했을 때를 말한다.
사람은 신심이 성취되고 남을 위한 공덕행을 짓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이 삿된 소갈딱지다.
왜곡되고 아첨하고 ‘아이 안녕하세요’ 이런 말투부터 다 사라진다. 촐싹거리는 것이 많이 사라진다. 눈에 사기가 흐르는 것들이 많이 사라진다.
흰백자위가 들어나서 눈을 희번덕거린다는 것이 있지 않은가.
눈이 희번덕거린다는 것은 색신이다.
몸이 동하기 전에 뭐가 동했는가? 궁시렁궁시렁거린다. 생각이 동했기 때문에 눈이 희번덕거리는 것이다.
욕이 그냥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다. 안에서 생각이, 탐진치가 자라서 욕으로 툭 튀어나온다.
신업 구업으로 올라올 때는 엎어진 것이 아니고 깨진 그릇과 똑같다. 엎어진 물 정도가 아니다.
그러니까 신업 구업으로 가기 전에 의업으로, 의업까지 가도 이미 잘 못 다스린다. 의업으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으로 자꾸 돌려야 된다.
자꾸 돌려야지, 그렇지않고 일어났다라고 하면 동시다발이기 때문에 감당이 안 된다. 한 군데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물을 한 번 딱 마셨다 하면 따뜻하다 좋다 싫다부터 해서 ‘콜라가 더 좋은데, 식혜가 더 좋은데’ 별생각이 다 든다. 딱 마시는 순간에 그냥 팔만사천 가지가 확 달라붙게 된다. 무조건 하나를 없애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법계소생고(法界所生故)며 : 법계로부터 나는 연고이다. 법계는 성품이 있는가 없는가? 없다.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하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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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지여래음성(應知如來音聲)이 :여래의 음성이
무단절(無斷絶)이니 : 끊어짐이 없음을 알아야 하나니
보입법계고(普入法界故)며 : 법계에 두루 하는 까닭이다. 아까 무어라고 했는가? 여래의 음성은 항상 할 상자 상음이라고도 했다. 또 막힌 데 없이 뚫고 들어가 버리니까 통음이라고도 했다. 어떤 장애도 소용없고, 철갑을 둘러도 여래의 음성은 뚫고 들어간다. 우리 같은 철면피 얼굴에도 여래가 뚫고 들어오니 신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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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지여래음성(應知如來音聲)이 :여래의 음성이
무변역(無變易)이니 :변함이 없음을 알아야 하나니
지어구경고(至於究竟故)니라 : 끝까지, 구경이라고 하는 것은 유통기한이 없이 퍼펙트 하다. 허공은 변질이 없지 않은가. 그런 것처럼.
또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대목이 있다.
여러분들이 참고하시려면 화엄경 십인품, 십인품이 몇 권에 나오는가? 44권인가. 희한하네. 어째 그런 것을 잊는가?
스님들은 한 번 배운 것에 대해서 미련이 없다. 한 번 떠나온 집에 대해서, 한 번 떠나버리고 나면 옛집에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하듯이, 한 번 배운 것에 대해서도 미련이 없다.
(2) 如來語業의 十種譬喩
가. 世界의 壞滅時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應知如來音聲이 非量非無量이며 非主非無主며 非示非無示니 何以故오 佛子야 譬如世界가 將欲壞時에 無主無作호대 法爾而出四種音聲하나니 其四者는 何오 一曰汝等은 當知하라 初禪安樂이 離諸欲惡하야 超過欲界라하면 衆生이 聞已에 自然而得成就初禪하야 捨欲界身하고 生於梵天하며 二曰汝等은 當知하라 二禪安樂이 無覺無觀하야 超於梵天이라하면 衆生이 聞已에 自然而得成就二禪하야 捨梵天身하고 生光音天하며 三曰汝等은 當知하라 三禪安樂이 無有過失하야 超光音天이라하면 衆生이 聞已에 自然而得成就三禪하야 捨光音身하고 生徧淨天하며 四曰汝等은 當知하라 四禪寂靜이 超徧淨天이라하면 衆生이 聞已에 自然而得成就四禪하야 捨徧淨身하고 生廣果天이니 是爲四니라
佛子야 此諸音聲이 無主無作이로대 但從衆生의 諸善業力之所出生인달하야 佛子야 如來音聲도 亦復如是하야 無主無作하며 無有分別하며 非入非出이로대 但從如來功德法力하야 出於四種廣大音聲하나니 其四者는 何오 一曰汝等은 當知하라 一切諸行이 皆悉是苦니 所謂地獄苦와 畜生苦와 餓鬼苦와 無福德苦와 着我我所苦와 作諸惡行苦라 欲生人天인댄 當種善根이니 生人天中에 離諸難處라하면 衆生이 聞已에 捨離顚倒하고 修諸善行하야 離諸難處하야 生人天中하며 二曰汝等은 當知하라 一切諸行이 衆苦熾然하야 如熱鐵丸하니 諸行이 無常이라 是磨滅法이요 涅槃寂靜이 無爲安樂하야 遠離熾然하야 消諸熱惱라하면 衆生이 聞已에 勤修善法하야 於聲聞乘에 得隨順音聲忍하며 三曰汝等은 當知하라 聲聞乘者는 隨他語解하야 智慧狹劣이어니와 更有上乘하니 名獨覺乘이라 悟不由師니 汝等은 應學樂勝道者라하거든 聞此音已에 捨聲聞道하고 修獨覺乘하며 四曰汝等은 當知하라 過二乘位하야 更有勝道하니 名爲大乘菩薩所行이라 順六波羅蜜하야 不斷菩薩行하고 不捨菩提心하야 處無量生死호대 而不疲厭하야 過於二乘일새 名爲大乘이며 第一乘이며 勝乘이며 最勝乘이며 上乘이며 無上乘이며 利益一切衆生乘이라하면 若有衆生이 信解廣大하고 諸根猛利하야 宿種善根하야 爲諸如來神力所加면 有勝樂欲하야 希求佛果일새 聞此音已에 發菩提心이니라
佛子야 如來音聲이 不從身出이며 不從心出이로대 而能利益無量衆生이니라
佛子야 是爲如來音聲第一相이니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知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여래의 음성이 한량이 있지도 않고 한량이 없지도 않으며, 주재가 있지도 않고 주재가 없지도 않으며,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보여 줌이 없음도 아님을 응당 알아야 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불자여, 비유컨대 세계가 무너지려 할 적에 주재함도 없고 지음도 없지마는 법이 으레 네 가지 음성을 내느니라.
그 네 가지란 무엇인가. 하나는 ‘그대들은 마땅히 알라. 초선(初禪)은 안락하여 모든 나쁜 욕심을 여의고 욕심세계를 초월하였다.’라고 하거든, 중생들이 듣고는 자연히 초선을 성취하여 욕심세계의 몸을 버리고 범천(梵天)에 나는 것이니라.
둘은 ‘그대들은 마땅히 알라. 이선(二禪)은 안락하여 각(覺)도 없고 관(觀)도 없어서 범천을 초월하였다.’라고 하거든, 중생들이 듣고는 자연히 2선을 성취하여 범천의 몸을 버리고 광음천(光音天)에 나는 것이니라.
셋은 ‘그대들은 마땅히 알라. 삼선(三禪)은 안락하여 허물이 없어 광음천을 초월하였다.’라고 하거든, 중생들이 듣고는 자연히 삼선을 성취하여 광음천의 몸을 버리고 변정천(徧淨天)에 나는 것이니라.
넷은 ‘그대들은 마땅히 알라. 사선(四禪)은 고요하여 변정천을 초월하였다.’라고 하거든, 중생들이 듣고는 자연히 사선을 성취하여 변정천의 몸을 버리고 광과천(廣果天)에 나는 것이니, 이것이 넷이니라.
불자여, 이 모든 음성들은 주재함도 없고 짓는 이도 없건마는 다만 중생들의 모든 착한 업의 힘으로 나는 것이니라.
불자여, 여래의 음성도 그와 같아서 주재함도 없고 짓는 이도 없고 분별도 없고 들어감도 아니고 나옴도 아니지마는 다만 여래의 공덕과 법의 힘으로부터 네 가지 광대한 음성을 내느니라.
무엇이 넷인가. 하나는 ‘그대들은 마땅히 알라. 모든 행하는 것이 다 괴로운 것이니 이른바 지옥의 괴로움, 축생의 괴로움, 아귀의 괴로움, 복덕이 없는 괴로움, 나와 내 것에 집착하는 괴로움, 여러 나쁜 짓을 하는 괴로움이니라. 인간과 천상에 나려거든 착한 뿌리를 심고 인간이나 천상에 나서 여러 가지 어려운 곳을 여읠지니라.’라고 하거든, 중생들이 듣고는 뒤바뀜을 버리고 온갖 착한 행을 닦아서 모든 어려운 곳을 떠나서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느니라.
둘은 ‘그대들은 마땅히 알라. 모든 행하는 것은 온갖 괴로움이 치성하여 뜨거운 탄환(彈丸)과 같으며, 모든 행하는 것은 무상하여 없어지는 법이며, 열반은 고요하고 함이 없이 안락하여 치성한 괴로움을 여의고 모든 번뇌를 소멸한다.’라고 하거든, 중생들이 듣고는 착한 법을 부지런히 닦아 성문법(聲聞法)에서 음성을 따르는 지혜[忍]를 얻느니라.
셋은 ‘그대들은 마땅히 알라. 성문승(聲聞乘)은 남의 말을 따라서 아는 것이므로 지혜가 얕고 그보다 높은 법이 있으니 이름이 독각승(獨覺乘)이라.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깨닫는 것이니 그대들은 응당히 훌륭한 길을 좋아함을 배우라.’라고 하거든, 이 말을 듣고는 성문의 도를 버리고 독각승을 닦느니라.
넷은 ‘그대들은 마땅히 알라. 이승(二乘)의 지위를 지나서 다시 훌륭한 길이 있으니 이름이 대승(大乘) 보살이 행하는 것이라. 육바라밀을 따르며, 보살의 행을 끊지 않고 보리심을 버리지 않으며, 한량없이 나고 죽는 데 있으면서도 고달프지 않으니라.
이승보다 초과한 것이므로 이름을 대승이며, 제일승이며, 수승한 승이며, 가장 수승한 승이며, 높은 승이며, 가장 높은 승이며, 일체중생을 이익하게 하는 승(乘)이라 하느니라.’
만약 어떤 중생이 신심과 이해가 광대하고 모든 근기가 맹렬하고 날카로우며 숙세(宿世)에 착한 뿌리를 심어서 모든 여래의 신통한 힘으로 가피함을 받으면 훌륭한 욕망이 있어 부처님의 과보를 희망하리라.’라고 하거든 이 음성을 듣고는 보리심을 내느니라.
불자여, 여래의 음성은 몸에서 나지도 않고 마음에서 나지도 않지마는 한량없는 중생을 이익하게 하느니라.
불자여, 이것이 여래의 음성의 첫째 모양이니, 보살마하살들은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
여래어업(如來語業)의 십종비유(十種譬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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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世界)의 괴멸시(壞滅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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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응지여래음성(應知如來音聲)이 : 응당히 알아라 여래의 음성이
비량비무량(非量非無量)이며 : 한량이 있지도 않고 한량이 없지도 않다.
비주비무주(非主非無主)며 : 주관하는 바가 있지도 않고 주재하는 바가 없지도 않다.
비시비무시(非示非無示)니 :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보여줌 아님도 없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하이고(何以故)오 : 어떠한 까닭이냐
불자(佛子)야 :불자야
비여세계(譬如世界)가 :비유컨대 세계가
장욕괴시(將欲壞時)에 : 장차 하고자 한다. 무너지고자 할 적에
무주무작(無主無作)호대 : 주재함도 없고 지음도 없지마는
법이이출사종음성(法爾而出四種音聲)하나니 : 법이(法爾)라고 하는 것은 법연(法然)이라고도 이야기한다. 또 다른 말로는 자연(自然) 자이(自爾) 이렇게도 이야기한다. 법(法)자에다가 그럴 이(爾)자 그럴 연(爾)자와도 똑같이 쓴다. 법연(法然) 다 아시는 것이겠지만 혹시나 한문이 조금 쪼들리는 분이 있으면 참고하기 바란다.
법연 자연 법이 다 똑같은 말씀이다.
자연스럽게 하는 것 있지 않은가.
‘으레’ 이런 말이다.
네 가지의 음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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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자(其四者)는 : 그 네 가지란
하(何)오 : 무엇인가, 그 무엇이 넷이냐
일왈여등(一曰汝等)은 : 첫째는 그대들은
당지(當知)하라 : 마땅히 알아라
초선안락(初禪安樂)이 : 초선의 안락이
이제욕악(離諸欲惡)하야 : 모든 욕심과 나쁜 욕심을
초과욕계(超過欲界)라하면 : 다 초월하여서 초과욕계라 욕계를 초과한다면 그것을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들은
중생(衆生)이 : 중생이
문이(聞已)에 : 그것을 듣고는, 신심 있는 사람은
자연이득성취초선(自然而得成就初禪)하야 : 자연스럽게 얻는다. 성취 초선이라. 자연스럽게 초선천을 성취해서
사욕계신(捨欲界身)하고 : 욕계의 몸을 버리고
생어범천(生於梵天)하며 : 범천(梵天)에 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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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왈여등(二曰汝等)은 : 두 번째는 그대들은
당지(當知)하라 : 당지하라 마땅히 알아라.
이선안락(二禪安樂)이 :이선의 안락이
무각무관(無覺無觀)하야 :무각무관이라.
초어범천(超於梵天)이라하면 :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수행할 때 각관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대충 살피는 것은 각(覺)이라고 하고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관(觀)이라고 하는 것은 세밀하게 분석하는 것을 말한다.
흔히들 이렇게 비유를 많이 한다. 볼펜을 들고 ‘자 이것 보십시오’ 해서 보는 것은 각이다. 그에 반해서 볼펜을 움직일 때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하는 것은 관이라고 한다.
각관분별은 제6의식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사수(思數)라고 한다. 사유할 사(思)자에 숫자할 때의 수(數)자.
각관이 끊어지면 바깥의 분별이 끊어졌지만 안에 그냥 도사리고 있는 것이 있다. 발에 불이 붙으면 ‘앗따가워’ 하는 것이 있지 않은가?
각관분별은 끊어지지만 안쪽으로 도사리고 있는 것이 있다. 내연이주(內緣而住)하는 거기서부터는 제7식이라고 한다. 각관은 제6식이고, 무각관이라고 하는 것은 제 7식으로 엔간히 들어간 것이다. 제7식으로 타고 들어갔기 때문에.
우리는 보통 탐진치 바깥으로 일어나는 생각 망상불별을 가지고 ‘니 옳나, 내 옳나’ 망상분별을 가지고 나라고 착각하고 산다.
그런데 고요하게 고요하게 이것이 다 끊어질 때까지, 끊어지고도 아직 덜 끊어진 것이 있다.
번뇌는 거친 것 굵은 것보다 가는 것이 더 끊기 힘들다.
엔간히 잘 드는 칼 아니면 가는 솜털 잘 안 나간다.
낫 가지고 이런 데 문대도 안 나간다.
톱 같은 것을 가지고 솜털 자르려면 욕본다.
톱 같은 것은 굵은 나무나 자르지.
번뇌는 세밀할수록 자르기 힘들기 때문에 참선을 통하지 않고는 업장소멸이 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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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에는 색계 18천을 딱 줄여서 4개로 줄여놓았다. 대범천(大梵天) 광음천(光音天) 변정천(遍淨天) 광과천(廣果天) 이렇게 네 개로 18개천을 줄여놓았다. 이 대목은 다음시간이 되면 자세하게 살필 것이다. 호흡이 끊어진 상태라든지 제가 경험한 것이 아니고 경전에 교리상으로 설명해놓은 대로 호흡이 끊어졌다든지 삼재팔난이 미치지 못한다든지 냄새가 사라졌다든지 맛이 사라졌다든지 그런 것이 순서대로 나오지 않는가.
치밀하게 임상실험 하에서 경전에 적어놓았기 때문에 정확하다.
그래서 ‘아 내가 지금 맛을 집착하지 않는다’‘냄새에 집착하지 않는다’ 하면 자기는 어느 정도 참선해서 수행의 경지가 있다고, 경전에 의거해서 점검해도 된다.
그런데 말초신경이 살아서 ‘단 게 좋다, 쓴 게 좋다, 조금 더 맵게 해라, 어떻게 하라’ 냄새부터 따지고 하면 싱긋 웃고 말아야지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한 것들이 여기에 자세하게 되어 있으니까 나중에 될 때 하고 오늘은 네 개 게송으로 마치겠다.
자세한 것은 다음 시간에 제가 소견이 없으니까 철저하게 경전에 의거해서 여러분들에게 소개시켜 드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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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衆生)이 :중생이
문이(聞已)에 :듣고는
자연이득성취이선(自然而得成就二禪)하야 : 제2선정을 성취하여
사범천신(捨梵天身)하고 : 범천에 몸을 버리고
생광음천(生光音天)하며 : 더 좋은 광음천에 나는 것이니라.
광음천(光音天) 이름만 듣기에도 굉장하다. 음성, 소리로 내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빛으로 나오는가 보다.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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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왈여등(三曰汝等)은 : 세 번째는
당지(當知)하라 : 너희들이 마땅히 알라
삼선안락(三禪安樂)이 : 삼선(三禪)은 안락해서
무유과실(無有過失)하야 : 허물이 없어
초광음천(超光音天)이라하면 : 광음천을 초월하였다, 하거든
중생(衆生)이 :중생이
문이(聞已)에 : 듣고는
자연이득성취삼선(自然而得成就三禪)하야 : 자연히 삼선정을 성취하여
사광음신(捨光音身)하고 :광음천의 몸을 버리고
생변정천(生徧淨天)하며 : 변정천(徧淨天)에 나는 것이다.
이 대목은 화엄경 세주묘엄품부터 자세하게 나온다.
선사들이 오도송을 많이 남기는데 오도송 중에서 제일 많은 오도송이 세주묘엄품이다.
세주묘엄품이 전부 오도송이다. 40부류의 선지식들이 전부 오도송을 남긴다. 보살 오도송 온갖 화엄신중들의 오도송이 전부 쏟아져 나오는 데가 세주묘엄품이다.
깨닫고 싶은 분들은 세주묘엄품 많이 읽으시면 된다.
그래도 힘이 조금 달리고 하는 분은 시장에 가서 깨 사가지고 달아놓으면 깨달아버리니까, 그래도 도반들이 뭐라고 하면 들깨 사서 달아 놓으면 들깨달아버리니까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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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왈여등(四曰汝等)은 : 네번째는
당지(當知)하라 : 그대들은 마땅히 알아라.
사선적정(四禪寂靜)이 : 사선정 적정이 고요해서
초변정천(超徧淨天)이라하면 : 변정천을 초과한다고 하면은
중생(衆生)이 :중생이
문이(聞已)에 :그것을 듣고는
자연이득성취사선(自然而得成就四禪)하야 :자연히 사선정을 성취하여
사변정신(捨徧淨身)하고 : 변정천의 몸을 버리고
생광과천(生廣果天)이니 : 광과천(廣果天)에 태어나니
시위사(是爲四)니라 : 이것이 네 가지다.
지금 5시인데 한 구절만 더 하고 다음 시간에 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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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여
차제음성(此諸音聲)이 : 원래 이 음성이 모든 음성이
무주무작(無主無作)이로대 :주재도 없고 짓는 것도 없지만 불수자성수연성이라. 다만 누구를 따라서?
단종중생(但從衆生)의 : 중생의
제선업력지소출생(諸善業力之所出生)인달하야 : 선업력을 따라서 소출생이라. 이 음성은 주재함도 없고 짓는 이도 없지만 다만 중생의 착한 업의 힘으로 나는 것이다.
거기는 줄을 긋겠다.
‘단종중생(但從衆生)의 제선업력지소출생(諸善業力之所出生)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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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여래음성(如來音聲)도 : 여래의 음성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야 : 이와 같아서 여래의 음성도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무주무작(無主無作)하며 : 무주무작이다. 안으로 주재하는 사람도 없고 바깥으로 짓는 것도 없는데
무유분별(無有分別)하며 : 무유분별이라. 분별이 없는데
비입비출(非入非出)이로대 :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나가는 것도 없다. 출입이 아예 없다. 허공이 무슨 왔다갔다 출입을 하겠는가?
단종여래공덕법력(但從如來功德法力)하야 : 다만 부처님의 공덕 법력에 의해서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다 보니까
출어사종광대음성(出於四種廣大音聲)하나니 : 이 네 가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아까 그것을 상대(相大)라고 말씀드린 바가 있었다. 중생이 그것을 받아들여서 다시 돌아가고자 한다면 용대(用大)의 작용을 일으킨다.
본체는 원래 어떻다?
불생불멸이요 불구부정이요 부증불감이고 무거무래라. 무생무멸이라 그렇지만 그렇게 되어 있다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것은 우리가 다 아실테고 조금 중간에 잘려서 애매하기는 하지만 그 사자(四者)는 다음 시간에 하겠다.
(죽비소리)
하강례
“환한 풀잎마다 환한 조사의 뜻입니다.”
해마다 마당의 호두를 백 개씩 따다 큰스님께 올리는 무성스님이 큰스님 계신 병원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물으셨다. 법회가 끝나고 문병을 가실 모양이었다.
5월 법회인데도 문수선원 특유의 염불조 ‘스승의 날 노래’가 빠졌다.
다행히 5월 16일자 <다음까페 염화실>에는 문수사경반 법우님들이 큰스님의 병실로 찾아가서 케잌을 자르고 스승의 날 노래를 음성공양 올렸다는 소식과 사진이 올라왔다. 사진 속에서 큰스님은 워커를 짚고 꼿꼿하게 서서 그 모습들을 지켜봐 주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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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경반 법우님들은 항상 묵묵히 정진하신다. 문수선원의 햇등이 올해도 이분들의 울력으로 반짝반짝 빛나게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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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엄법회 녹취를 마치면 가까운 회암사지에 가보려고 마음 먹었다. 큰스님께서 1996년 번역하여 출간하신 <나옹선사 어록>에서 ‘회암사의 북쪽 언덕 위에 스님의 부도를 세웠다’라는 구절을 읽을 때부터 가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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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옹선사 어록>은 2020년 10월 영덕에 지어진 <나옹왕사 기념관> 개원에 맞춰서 2쇄를 발간한 책이었다. 영덕 출신의 큰스님이 개원식에 초대를 받으시고 역시 영덕 출신이신 용학스님도 함께 가셔서 현장을 유튜브 목어TV로 중계해 주셨다. 2021년 큰스님께서 대원상을 수상하시던 초겨울에 대중스님들에게 법공양을 해주셔서 한 권 받았다. 읽자마자 각주마저 공들인 번역글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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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이 다 끝나고 말끔하게 정리된 회암사지에는 역사박물관이 있고, 너른 잔디밭과 조형물들이 있고 또 그 뒤로 발굴된 유물들로 고스란히 옛 절터를 재현한 폐사지가 있었다.
유네스코 등재이슈로 요즘 ‘핫하다’고 하던데 천보산 아래 회암사의 광활한 터는 빛으로 가득찼다. 간간이 바람과 소풍 나온 유치원생들의 웃음소리로 들썩였다.
풀밭 옆의 나무의자에 앉아 <나옹선사 어록>을 조금 읽다가 숨을 고르고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박물관은 예상을 뛰어넘는 고증에, 규모였다.
브리핑을 받듯 혼자 앉아서 홀로그램 기법으로 설명되는 회암사 역사를 듣다가 그곳의 주불이 비로자나 부처님이며 화엄경에 의거해서 아홉 개의 문이 있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랐다.
큰스님이 법문 중에 자주 말씀하시던 홀로그램 기법들이 박물관 곳곳에 사용되었다.
2층 ‘회암사, 빛으로 살아나다’라는 타이틀을 가진 다면실감 체험장에서 문을 닫고 혼자서 증감현실을 체험했다.
박스처럼 네모나고 하얀 그 공간에서 갑자기 터져 나온 빛과 소리의 폭풍에 그만 겉잡을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빛으로 쏟아지는 연꽃이나 빗발치게 눈앞에 떨어지는 꽃잎들 순간순간 사라지고 세워지는 절들과 등장하는 옛사람들 속에 거추장스러운 물성을 가진 이는 오직 관람하는 사람 한 명뿐이고, 그나마 조금 지나자 몸의 물성과 분리되어 스스로가 빛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글자로만 배우는 경전의 말씀을 과학의 힘으로써 체험하게 할 수 있다고 큰스님께서는 법문하셨었다. 이 박물관의 다면실감실 같은 데를 보신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 주실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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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을 나와서 발굴터로 가서 오래된 돌들로 다시 터만 다진 유적지까지 걸었다. 걸음이 더디지 않았는데도 한참을 걸어야 했다.
번듯하게 세워진 당간지주가 15미터 떨어진 자리에 비스듬히 쓰러져 있었다니, 화엄경에 기초하여 아홉 개의 단계적인 문으로 이어지고, 가장 고갱이의 자리에 비로전이 있었고, 엄청난 높이의 비로자나 부처님이 거기 계셨다니, 햇빛이 빗발치는 그곳은 과연 나란다 대학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살아온 시간을 종이처럼 반으로 접는다면 그 반절쯤 되는 시간에 회암사지를 몇 번 들락였고, 또 그즈음에 나란다 대학터에도 갔었다. 불자도 아니면서 가슴이 두근거리던 벽돌 무더기의 나란다 대학터에서 오래도록 눈길이 갔던 곳은 작은 승방터였다. 회암사지에도 그런 승방터가 있었다.
잔꽃들이 햇빛과 함께 무수히 피어나는 그 회암사 절터의 맨 마지막 계단 끝 오른쪽에 치우쳐 부도가 있었다.
그 부도 설명에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이라고 써져 있어서 그야말로 눈을 씻고 여러 번 보았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탑이 여기 이렇게 있다는 말인가? 누구에게라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볼 곳이 없었다. 휴대폰의 바데리도 이미 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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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더듬어 나옹선사의 부도가 있던 북쪽 언덕으로 올라갔다.
안내판에도 부도전에도 무학스님의 부도탑에 대해서만 언급을 해서 바로 앞의 지공스님의 부도탑까지만 보고 그냥 내려올 뻔했다.
회암사지에는 나옹선사 부도가 없었나? 기억의 오류인가? 나옹선사가 열반하신 여주 신륵사쪽으로 부도를 합쳐서 옮겨버린 걸까? 섭섭한 마음으로 다시 돌아봤는데 지공선사 부도 뒤로 반듯한 계단이 있고 뭔가 석조물이 보였다.
분명히 표지판에서는 천보산 정상으로만 표시되었는데, 남은 힘을 짜내서 계단을 오르니 거기에 나옹선사의 부도가 있었다. 부도도 석등도 세 분의 것 중에 가장 조촐했다.
文我名者免三途 (문아명자면삼도) 내 이름을 듣는 이는 나쁜 고통 벗어나고
見我形者得解脫 (견아형자득해탈) 내 모양을 보는 이는 생사번뇌 해탈하고
큰스님 법문을 들으며 이 발원문을 처음 알았다.
다음 구절은
如是敎化恒沙劫 (여시교화항사겁) 억천만년 지나면서 이와 같이 교화하여
畢境無佛及衆生 (필경무불급중생) 부처님도 중생들도 아주 차별 없어지이다.
라는 내용이다.
단순한데도 볼수록 간절한 느낌의 부도는 과연 나옹선사 부도다웠다.
남아있는 햇빛 아래서 책을 꺼냈다. 이미 두 번이나 읽고 밑줄이 그어진 책이다.
아무 데나 펼쳐서 읽은 <나옹선사 어록>의 모든 곳이 좋았다.
<나옹선사 어록>을 나옹스님의 부도에 안겨드렸다.
나옹선사는 기뻐하실까? 그럴 리가, 바람이 불어 아무렇게나 펼친 페이지에는 화답 같은 시가 있다.
“그대로가 본디
빛이라네.
바람 절로 불어
티끌 절로 일어남이여,
당당해라 본디 얼굴
오, 드러난 저 모습이여,”
*
다시 내려오는 길, 이천 명의 스님들이 상주했다는 회암사 터가 저무는 햇빛 아래 더욱 깊게 보였다.
집에 와 찾아보니 회암사는 세월 속에 자연스럽게 스러진 곳이 아니었다. 조선 중기에 억불숭유정책의 본을 보이느라 일부러 그 절을 태워버렸다고 했다. 그 말은 맞는 말일까? 큰스님께서는 법문 중에서 세상의 일 역시 우리가 속속들이 다 알지는 못한다고 하셨었다.
*
나옹스님께서는 법문을 마치고 돌아가는 청중들에게 항상 ‘살펴 가십시오’ 라는 말을 했다고 책에는 나와 있다. 진중(珍重)이라는 말이 헤어질 때 하는 인사말이라고 역주로 친절하게 쓰셨다. 그 말에 기대어 풀밭에 덩그라미 세워진 78번 버스 표지만 믿고 버스를 기다렸다. 오래 기다려 타게 된 마을버스가 굽이굽이 고개를 넘었다.
포천 송우리터미널까지 나와서 익숙한 큰 버스로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앞날이여,
길이길이
고운 빛만 몰고 오리니,
그 내음 깨지는 곳마다
기뻐하리
우리 님.
<지공스님의 시, 나옹선사 어록 p.61, 무비스님 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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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에 두 번 방문했었는데 드넓은 절터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마치 많은 대중 스님들의 독경소리와 풍경소리로 상상을 했었습니다.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_()()()_